히지카타 토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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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센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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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 국장 보조
국장
곤도 이사미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
참모
이토 카시타로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
군사
타케다 간류사이
조장
1번대
오키타 소지
6번대
이노우에 겐자부로
2번대
나가쿠라 신파치
7번대
타니 산쥬로
3번대
사이토 하지메
8번대
토도 헤이스케
4번대
마츠바라 츄지
9번대
스즈키 미키사부로
5번대
타케다 간류사이
10번대
하라다 사노스케
감찰 · 회계
감찰
야마자키 스스무 · 핫토리 타케오 · 요시무라 칸이치로 · 시노하라 타이노신
제사취조역 및 감찰
시마다 카이 · 오이시 쿠와지로
회계
카와이 키사부로
미부 로시구미 시절 인물
국장
세리자와 카모 · 니이미 니시키





신센구미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
土方歳三


파일:히지카타도시조.jpg

출생
1835년 5월 31일[1]
무사시국 타마군 이시다촌
(現 도쿄도 히노시 이시다)
사망
1869년 6월 20일[2] (향년 34세)
에조치 하코다테
(現 홋카이도 오시마 종합진흥국 하코다테시)
묘소
벽혈비[3]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이시다사 (도쿄도 히노시)
재임기간
신센구미 부장
1863년 ~ 1868년
하코다테 신센구미 국장[4]
1868년 ~ 1869년
에조 공화국 육군봉행 대우[5]
1868년 ~ 18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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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토요(義豊)
아명
도요타마(豊玉)
통칭
토시조(歳蔵 → 歳三)
가명
나이토 하야토(内藤隼人)[1]
부모
아버지 히지카타 하야토(土方隼人)
어머니 에츠(恵津)
형제
형 히지카타 다메지로(土方為次郎)
형 키로쿠(喜六)
누나 사토 노부(佐藤のぶ)
외 6인
신체
약 168cm | 약 75kg
유파
천연이심류(天然理心流)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신센구미 활동
2.4. 사망
3. 여담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신센구미의 부장(副長)으로 잘 알려진 막부 말의 무신으로, 메이지 유신에 반발했던 인물이다.

신센구미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으며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귀신 부장(鬼の副長)이라는 별명이 유명하다. 가끔 일본의 서브컬처에서 '귀신 부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캐릭터가 나오는데, 그 원조가 바로 히지카타 토시조다. 오키타 소지와 함께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신센구미 인물이며 신센구미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히지카타 토시조는 1835년 5월 31일[6], 무사시국 타마군 이시다촌에서 태어났다. 휘는 요시토요[7], 아명은 도요타마[8]다.

10명의 자녀 중 막내[9]였고, 부유한 농부[10]였던 아버지 히지카타 하야토는 히지카타 토시조가 태어나고 몇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인 다메지로는 장님으로 태어나 키로쿠와 부인에 의해서 자라 가독을 상속받을 수 없었다. 셋째 형 다이사쿠(후에 카스야 료진)는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 그의 큰누나 슈는 그가 세 살쯤 되었을 때 죽었고, 그의 어머니 에쓰도 결핵으로 토시조가 여섯 살 때 죽었고, 따라서 그는 둘째 형인 키로쿠와 처제에게 길러졌다. 당대의 평균적인 일본 남성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키가 컸고, 매우 잘생겼다고 한다. 그는 소년 시절에는 답지 않게 거칠어서 '바라가키バラガキ(가시꼬마)'[11]라고 불렸다. 어린 나이에 버릇없이 굴었고, 친구들과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심술궂게 굴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일화로 그는 사원의 옥상에 올라가서 새 둥지에서 알을 골라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곤 했다. 그러나 개혁파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진 아이즈 번(会津) 가문의 21세 검객이 강제로 할복을 하게 되면서 이런 성격이 바뀌었다고 한다. 히지카타는 그 남자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충격을 받아 사람들 앞에서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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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토시조의 생가[12]

히지카타는 독학한 일본 검술을 연습하면서 가족의 이시다 산약(石田散薬)[13][14]을 팔며 청춘을 보냈다.이시다 산약에 대한 기사 그의 처남 사토 히코고로(佐藤彦五郎)는 누이 사토 노부(佐藤のぶ)와 결혼하여 히노에서 천연이심류 도장을 경영하였고, 히지카타는 이후 곤도 이사미를 만나 그와 의형제를 맺고 1859년 천연이심류에 정식으로 입문하였다. 히지카타 자신은 천연이심류에 완전히 숙달된 적은 없었지만, 천연이심류로부터 신센구미식 일본 검술 전투 방식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한다. 후에 곤도 이사미, 오키타 소지 등과 함께 교토로 나와 신센구미가 발족된다. 당시 히지카타는 샤미센 가게 주인의 딸인 오코토와 결혼하기로 했다. 히지카타는 이미 곤도 이사미와 함께 로시구미에 합류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히지카타는 승진을 한 후에 결혼을 하겠다고 가족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알겠지만 히지카타 토시조는 그 태생이 무사가 아녔으며 평민 집안이다. 그저 시골 쫌 사는 집 아들내미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막내아들이라 서민에 불과하였다. 애초에 히지카타라는 성도 공식적인 것이 아닌 자칭이었으며[15] 그가 무사로 취급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무사였던 콘도 이사미와의 친분과 신센구미 시절 보여준 놀라운 실력에 의함이었다. 이와 같이 히지카타 토시조는 무사는 아니었지만, 무사다운 삶이나 무사들의 기예(검술, 궁술이나 기마술)에는 어렸을 때부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젊은 시절 자신을 무사 가문이라고 속이고 각지를 떠돌며 도장에서 무사수행을 했을 정도였으며 [16] 그러다가 신분이 들키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 다른 유파의 도장에서 배움을 이어가는 식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히지카타 토시조는 각 지역 각 유파에 많은 인맥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여러 무술을 넓고 얇게 배우게 되었으며 때문에 후에 입문한 천연이심류의 실력은 그저 그랬지만 실전에서는 엄청나게 강했다고 전해진다. 정교한 검술보다는 말 그대로 필요한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변칙적인 공세에 능한 아류 고수라고 할 수 있겠다.[17]

이런 농가의 막내 아들이 마지막까지 토막파(막부토벌파)에 대항하며 싸우다가 사망한 후, 도쿠가와 막부가 배출한 마지막 무사라고 평가받은 것을 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2.2. 신센구미 활동[편집]


1863년, 히지카타와 곤도 이사미가 에도의 로시구미에 합류하여, 교토 미부에 도착하여 미부로시구미로 남았고, 나머지는 에도로 돌아갔다. 이후, 미부로시구미가 신센구미로 개명하면서 곤도와 세리자와 카모, 니이미 니시키(新見錦) 등 두 사람이 공동의 리더가 되었고, 히지카타는 부대표 중 한 명이 되었다. 신센구미는 아이즈 번다이묘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밑에서 개혁파에 대항하는 특수 경찰로 교토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세리자와와 니이미는 교토의 상인들과 싸우고, 술을 마시며 행패부리며 돈을 갈취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신센구미의 명성에 먹칠을 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미부의 늑대(壬生狼)라는 경멸적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 히지카타는 이러한 문제에서 니이미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찾아 10월 19일에 할복 자살을 하도록 명령했다. 10월 30일[18] 밤에 히지카타와 선택된 신센구미 일원들은 야기 겐노죠의 집에 들어가 세리자와와 그의 정부 오우메를 암살한다. 그의 추종자 중 한 명인 히라마 주스케가 그날 밤 도망친 유일한 생존자였다. 이후 곤도 이사미는 신센구미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고, 야마나미 케이스케가 부사령관이 되었다. 1864년 6월 5일 이케다야 사건 당시, 신센구미는 아이즈 번마쓰다이라 카타모리의 명을 받아 조슈 번의 뜻을 받은 존양파들의 탐색에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히지카타는 죠슈번의 첩자가 되어 활동하고 있던 상인 후루타카 슌타로(古高俊太郎)를 포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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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야 사건

히지카타는 후루타카 슌타로를 미부 둔소(壬生屯所)에서 잔혹하게 고문을 했고 후루타카는 교토 거리에 방화해 천황을 조슈 번에 빼앗고 떠난다는 계획이 있음을 자백했다. 또한 이 계획에 관해 밀의를 하기 위해 조슈 번의 낭인들이 집결한다는 정보를 파악한 신센구미는 이 이야기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가 있는 아이즈번에 통보한다. 그러나 아이즈번의 움직임이 느렸기 때문에 신센구미는 곤도대와 히지카타대에서 분담을 하여 독자적으로 탐색을 개시했다. 그리고 곤도대가 산죠코바시 여관 이케다야에서 집회를 열고 있던 낭인들을 발견한다. 20명이 넘는 낭인들을 단 4명이 베었다. 뒤늦게 도착한 히지카타대는 이미 전투 중이던 곤도대를 엄호하고 현장으로 달려간 아이즈번의 번병들을 견제해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이러한 히지카타의 관리력도 효과를 발휘해, 신센구미는 교토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신센구미의 인지도는 단번에 올라가게 된다.

1865년 2월 3일(음력 1월 8일) 젠자이야 사건(ぜんざい屋事件) 이후 야마나미 케이스케는 탈영자에 대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신센구미를 떠나려 했다. 그 결과, 1865년 3월 20일(음력 2월 23일) 오키타 소지와 함께 가이사쿠닌으로 할복을 명했고[19], 히지카타가 부장을 맡게 된다. 1867년에는 곤도를 암살하려던 이토 카시타로사이토 하지메를 보내서 막고 토도 헤이스케도 암살하였다. 당시 히지카타 토시조는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험할 신센구미에서의 위치 때문에, 약혼했던 오코토와의 결혼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는 후에 많은 연인을 두었지만,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 약속을 하지 않았다. 부장 자리에 오른 히지카타는 치안 유지에 힘을 썼다. 감찰이나 조근 등 직무 별로 조직이 만들어졌다. 국장은 곤도 이사미지만 실제 지휘명령은 부장인 토시조가 하였다. 신센구미의 총대장은 곤도 이사미지만, 실제로 조직을 키운 인물은 히지카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곤도는 신센구미의 리더이고, 히지카타는 실제로 조직을 통제하는 또 다른 리더라고 평하기도 한다. 당시 신센구미는 140명으로 늘어났는데, 에도 막부가 멸망할 경우 생계를 위협받는 농민과 상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교토 내에서 신센구미가 정한 규제는 엄격했고 히지카타는 이를 집행하는 데 있어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어 그의 별명은 "귀신 부장(鬼の副長)"이 된다.

(히지카타) 토시조는 침착하고 예리하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을 하든 번개처럼 빠릅니다. 곤도는 실수하지 않습니다. 모두 토시조의 존재 때문입니다.

― 마츠모토 료준[20]

(松本良順)#


신센구미 내부에서도 히지카타에 의해 규제가 엄격히 시행되었다. 여느 때처럼 탈영병들과 배신자들은 할복을 시켰다고 한다. 국중법도(局中法度)를 고안하고 법을 어기면 동료도 서슴지 않고 베어 냉혹한 이미지로 악명 높았는데, 신센구미 내부에서는 언제나 신센구미의 규율을 대원들에게 엄수하도록 하여, 규율을 깬 대원에 대해서는 할복을 명하였고 대원으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로 인해 신센구미 대원 사망원인 1위는 할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후에는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나이를 먹은 탓인지 사기를 올리기 위한 계산상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확실히 엄격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틀림없으나 국중법도는 후세의 창작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히지카타 토시조의 후손들이 세운 히지카타 토시조 자료관에서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 '실제로 히지카타가 정한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히지카타는 1867년 막부의 하사받은 성씨인 나이토와 세습받은 이름인 하야토인 '나이토 하야토'라는 가명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곤도가 보신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 처형된 후 원래 이름으로 되돌아갔다.


2.3. 보신 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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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21]
하지만 신센구미의 영광도 오래가지 못했다. 신센구미의 뒤를 받치고 있던 막부는 사쓰마 번,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반막부 세력에 밀렸고, 마침내 1867년 6월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했다. 이에야스 이래 260년간 지켜온 정권을 조정에 반납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반납은 형식적인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앞으로도 계속 정치의 우두머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요시노부의 강경한 계산이 있었다. 어차피 지금과 같은 막번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면 선수를 쳐 정권을 돌려줌으로써 도막파의 칼끝을 피하고 도쿠가와 가문의 힘을 온존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간신히 에도 막부는 망했지만, 도쿠가와 가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반막부세력인 삿초[22](薩長) 측 입장에서 보면 불충분한 것이다. 삿초 측은 막부에서 이름을 바꾼 다른 정체 아래에서 여전히 도쿠가와 가문이 정치의 주도권을 계속 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도쿠가와 가문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전혀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외국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한 삿초 측은 왕정복고 대호령을 내리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사관 납지(즉 도쿠가와 가문의 권력을 박탈한다는 것이다.)를 하명했다. 이에 반발한 구 막부 세력과 삿초를 중심으로 한 신정부군이 교토 남쪽 교외의 도바, 후시미에서 격돌. 보신전쟁의 서전이 되는 도바-후시미 전투가 발발했다.

당시 히지카타는 부상을 당한 콘도 대신에 신센구미를 이끌고 분투했다. 그러나 사쓰마 소총대 앞에 대패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히지카타는 서양식 군비의 필요성을 깨달아 군대를 서양식으로 바꾸었다.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오사카성에서 몰래 에도로 도망쳐 돌아온 것을 두고, 신센구미도 에도에 귀환한다. 1868년 곤도와 히지카타는 신센구미를 이끌고 신 정부를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벌였고, 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싸웠다. 신센구미는 에도로 돌아와 나중에 갑양진무대(甲陽鎮撫隊) 부대로 개편되었고, 3월 24일 에도에서 고후 성으로 출발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3월 28일, 그들은 고후 성이 이타가키 타이스케가 이끄는 궁정군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후에서 동쪽으로 5m 떨어진 가쓰누마 마을에 정착했다. 여기서 신센구미는 신정부군과 싸운다. 다만 히지카타는 진군의 도중에, 원군 요청을 위해서 에도로 돌아왔기 때문에,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가쓰누마 전투는 신정부군에게 먼저 고후성을 빼앗긴 적도 있고, 병력 자체도 완전히 뒤떨어졌기 때문에 고요진 무대의 참패로 끝나고,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에도로 도망쳤다. 이 싸움의 결과, 곤도를 단념한 나가쿠라 신파치하라다 사노스케가 신센구미를 탈퇴한다. 오키타 소지도 결핵 투병 중이어서 이미 옛날 신센구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동지나 병사들이 차례차례로 이탈하는 가운데, 히지카타는 에도에서 착실하게 모병 활동을 계속하면서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1868년 4월 11일, 곤도와 히지카타의 갑양진무대는 다시 에도를 떠나 에도 북동쪽에 있는 가네코 가문에 임시 본부를 세웠다. 이후 1868년 4월 25일 나가레야마 본부로 이전하였다. 1868년 4월 26일 나가레야마에서 훈련하는 동안, 곤도가 단독으로 이끈 갑양진무대는 사쓰마 번의 아리마 토타 참모차장이 이끄는 200명의 신정부군에 의해 기습당했고, 곤도 이사미는 고시가야에 있는 그들의 진지로 함께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곤도 이사미는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스스로 칼을 빼들고 자결을 하려고 했지만 히지카타가 만류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아 싸우자며 출두를 종용했다고 한다. 곤도는 1868년 4월 27일 심문을 위해 이타바시로 보내졌다. 같은 날, 히지카타는 가쓰 가이슈를 만나러 에도로 가서 곤도를 사면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 이튿날, 이타바시에 도착한 전령은 가쓰가 쓴 편지와 함께 곤도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청했으나, 전령은 체포되어 거절당했다. 당시 곤도의 체포와 재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곤도 이사미 문서를 참조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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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 전쟁 당시 히지카타 토시조의 행적[23]

곤도는 1868년 4월 30일 재판 후 5월 17일 이타바시 처형장에서 처형되었다.[24] 동지 곤도를 잃은 히지카타였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은 조금도 쇠약해지지 않았다. 1868년 4월에 에도성이 신정부군의 손에 떨어지자, 히지카타는 에도를 탈출하며, 신정부군을 토벌하는 진영에 들어가게 된다. 히지카타는 북쪽으로 향해 구막부 보병대를 인솔하는 오토리 케이스케와 함께, 우츠노미야성에서 신정부군과 상대해, 한 번은 우츠노미야성을 함락시켰지만, 후에 신정부군의 반격에 부딪혀 전투중에 다리를 부상당한다. 그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이즈 번에 잠복했다. 히지키타는 아이즈 번에 곤도의 머리카락을 가져다 주었으며, 텐네이지 사에 있는 곤도의 묘소 건립을 직접 감독했다고 한다. 그 후, 히지카타가 전열에 복귀해도, 구 막부군과 신센구미 등은 보나리 고개의 싸움에서 져 아이즈번의 방어는 곤란하게 되었다. 1868년 10월 7일, 보나리 고개 전투 이후, 히지카타는 이나와시로 성에서 사이토 하지메를 만나 와카마쓰의 사이토야 여관에 머물렀다. 히지카타가 아이즈 번에서 후퇴하기로 결정하자, 사이토와 소수의 신센구미 군단은 히지카타와 결별하여 끝까지 아이즈 전투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여기서 히지카타는 센다이를 향해 구 막부 함대를 이끌고 에도를 탈출한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합류했다. 오쿠우에쓰 열번동맹에 기대를 걸었지만, 이 동맹도 차례차례로 신정부군에 항복해 붕괴된다. 도호쿠 제번이 신정부군의 군문에 내려와서는 이제 마지막 진은 홋카이도 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히지카타는 자신이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의사 마츠모토 료준[25](松本良順)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기기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도쿠가와 정부가 붕괴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아무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최고의 투쟁을 벌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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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토시조, 하코다테에서 죽다[26]

1868년 10월, 히지카타는 에조치에 상륙했다. 히지카타는 오토리 게이스케와 병력을 이끌고 하코다테 전쟁에 참전한다. 오토리 케이스케와 히지카타는 먼저 미일화친조약에 의한 하코다테 개항을 계기로 막부가 축성한 독특한 별 모양의 성곽 고료카쿠를 함락시키고 지역 저항군을 계속 제거했다. 이후 하코다테를 점령했으며, 하코다테에 주둔하고 있던 히지카타 토시조는 마쓰마에 성을 공격해 전투 끝에 함락시켰다. 히지카타는 마쓰마에 성을 함락시킨 후 잔병들을 에사시까지 추격했고 에사시도 점령하게 된다. 12월에는 일본 역사의 등장한 최초의 공화국고료카쿠를 거점으로 한 에조 공화국이 수립되자, 히지카타는 육군봉행[27]급(육군참모차장)의 임명된다. 또한 하코다테시 나카이사(中取締)와 육해군 재판국장을 겸임한다. 그의 상관인 정규 육군 봉행으로는 구 막부의 신하인 오오토리 케이스케가 취임했다. 오오토리는 오사카의 적숙에서 난학과 서양의학을 배웠고, 에도의 츠보이학원에서 공부를 했을 정도의 학구파였다. 하코다테 정부가 수립되어 에노모토 등이 축배를 나눌 때에 히지카타 혼자 침묵을 지키며 '지금은 술을 마시고 들떠 있을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히지카타는 도바-후시미 전투 패전 후부터 특히 신식총에 경도되어 갔다. 실제로 히지카타는 일찍부터 총기 무장을 시도했으며, 재빨리 양장을 도입했다. 당시 히지카타는 용병의 재능과 경험은 물론 전략안으로 크게 인정받기도 했다. 오쿠우에쓰 열번동맹 회의에서는 대통령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히지카타 토시조를 전군의 총독으로 추천했다. 그의 상관인 오오토리 케이스케보다 신분이나 경력이 한참 차이나는 히지카타가 육군 봉행같은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른바 에노모토의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당시 히지카타는 '군율에 어긋나면 대번[28]의 중역도 베겠다(軍律に背けば、大藩の重役も斬る)'고 발언하기도 했다. 1869년 정월에 히지카타는 에노모토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받았다. 조직 편성에 의해, 히지카타는 오오토리 케이스케와 함께 함관 정부군의 레지맨(연대)을 묶는 입장에 취임했다. 히지카타의 휘하에는 신센구미뿐만 아니라 프랑스인 사령관 앙드레 카제뇌브[29](Andre Cazeneuve)와 이바 하치로(伊庭八郎)도 추가되었다. 에노모토의 신뢰로 하코다테 정부군의 군권 대부분은 히지카타에게 맡겨지고 있었다.

당시 신정부 군대는 계속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1869년 4월에는 히지카타가 미야코 만 전투에서 신정부 군함 갑철합(甲鉄艦)을 탈취하기 위해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른 아침, 많은 반대파들이 카이텐 군함을 통해 배에 승선하였으나, 갑철함이 그 공격을 격퇴하고 개틀링 총으로 격추시켰다. 카이텐 선장을 포함한 많은 다른 사람들도 신정부 선박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전투는 30분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히지카타와 다른 생존자들은 하코다테로 후퇴했다. 4월, 사쓰나가 등 메이지 정부의 군이 에조치에 상륙을 개시, 하코다테를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게 된다. 압도적인 전력차로 평범하게 싸우면, 히지카타의 부대는 괴멸해 버릴것이 뻔했다. 게다가 장비하는 총이 히지카타 부대는 엔필드 총이었으며, 신 정부측은 보다 이들보다 더 최신인 원입식 스나이더 총이었다.

1869년 4월 13일, 히지카타는 후타마타 전투[30](二股口の戦い)에서 600명의 제국군에 맞서 230명의 에조 공화국과 살아남은 신센구미 일원들을 이끌고 16시간 동안 퇴각하였다. 신정부군은 다음 날 다시 공격했으나 후퇴했다. 다음 날 밤, 히지카타는 신정부군의 진영을 성공적으로 급습하여 그들을 도망치게 했다. 히지카타는 하코다테로 통하는 두 갈래로 진격하는 신정부군을 다이바산(台場山)에 흉벽과 진지를 구축하고 소총으로 방어해 2주 동안 신정부군의 진격을 막았다. 히지카타가 곳곳에 배치한 병사들의 총격과 백병전은 신정부군을 괴롭혔다. 23일에는 신정부군은 800명까지 병력을 늘렸다. 하지만 히지카타의 부대는 끝까지 저항하며 진지에서 십자포화를 퍼붓고 침공을 감행했다. 마침내 신정부군을 철수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히지카타는 이 전투에서 신정부군을 두 번이나 무찔렀다. 그 후 히지카타가 이끄는 군대는 십여일에 걸쳐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전투 모습을 보였지만, 배후에 있던 키코나이초(木古内)가 함락되어 고립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후퇴를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히지카타와 군대는 이후 6월 10일에 고료카쿠로 후퇴했다.


2.4.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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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토시조의 마지막 전투 당시 지도

보신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하코다테 전쟁 동안, 히지카타는 1869년 6월 14일 (음력 5월 5일) 시동 이치무라 데츠노스케[31]를 여관의 개인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곳에서, 그는 이치무라에게 사세구, 그의 일본도, 편지, 자신의 사진,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맡겼다. 이치무라는 히노에 있는 히지카타의 처남 사토 히코고로의 집에 그것들을 가져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치무라는 전쟁을 뚫고 편지나 사진 등을 사토에게 전달했다. 편지에는 시동 이치무라를 부탁한다는 히지카타의 걱정이 담긴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치무라에게 맡겨진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설사 이 몸이 북쪽 에조(蝦夷:홋카이도)섬 땅끝에서 썩을지라도, 내 혼만은 저 동쪽의 주군을 지키리.

たとひ身は 蝦夷の島根に 朽ちるとも 魂は東の 君やまもらん


혁명의 마지막 전투에서, 1869년 6월 20일(음력 5월 11일) 신정부군의 하코다테 총공격이 시작된다. 신정부군은 구막부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마침내 하코다테를 포위한다. 그리고 신정부군은 하코다테를 향해 총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당시 신정부군의 총병력이 1만에 가까운 대군에 비해 하코다테군은 3,000명도 안되는 소수였다. 또 신정부군은 하코다테 산에 기습공격을 실시하여 하코다테 시가지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 때, 고립된 벤텐다이바에는 시마다 카이 등 신센구미의 생존자들이 농성하고 있었다. 나나에하마에서 막부군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히지카타는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 신정부군을 물리친다. 그 때 아군 군함이 신정부군함 '아사히마루(朝陽丸)'를 격침하는 광경이 잇폰기 관문에서 지휘하는 히지카타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히지카타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고 판단해, 부관 오노 우나카(大野右仲)에게 말을 건다.

속히 군사를 일으켜라. 우리는 이 울타리에 올라가 물러나는 자를 베겠다.

速やかに兵を進めよ。我はこの柵にあって、退く者を斬る#


오노는 패주하는 아군을 이끌고 전진한다. 패주하는 하코다테 군은 순식간에 기세를 되찾아 갔다. 히지카타는 홀로 적지로 뛰어든다. 당시 상황은 막부군의 최후의 보루 고료카쿠도 항복할 기미가 짙어진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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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폰기 관문에서의 히지카타 토시조 (가운데)[32]

히지카타는 패배당하는 동료들을 이끌고 진군시켜 잇폰기 관문을 수비하며 "우리들의 법도에 따라 도망가는 자는 벤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말 위에서부터 칼을 휘두르며 지휘하는 모습이 너무 눈에 띄었다. 난전 중에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여 낙마, 측근이 급히 다가왔을 때는 히지카타 토시조는 벌써 절명했다고 전해진다. 향년 34세. 적의 총탄이 아닌 쏟아지는 탄에 맞았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항복에 완강히 반대하는 토시조를 제거하기 위해 아군의 손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히지카타 토시조의 죽음으로 나가쿠라 신파치사이토 하지메를 제외한 신센구미의 모든 주요 인물이 사망하게 되었다. 3일 후인 1869년 6월 23일(음력 5월 14일) 마지막 지휘관 소마 가즈에(相馬主計) 휘하의 생존한 신센구미 일당이 벤텐 다이바에서 항복했다. 그가 죽은 지 1주일 후, 고료카쿠 성이 함락되었고, 1869년 6월 27일 에조 공화국메이지 신정부에 항복하여 보신 전쟁이 종결되었다. 히지카타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시신은 고료카쿠, 헤케쓰히, 간조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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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향 히노시에 있는 묘소

그의 시신은 후에 정원지기 출신의 코시바 초노스케(小芝長之助)가 유해를 받으러 갔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코시바는 다이쇼 시대가 되어 히노시에 있는 히지카타의 생가를 방문했다. 당시의 코시바는 "고료카쿠안의 어딘가에 묻었다."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코시바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의문을 느낀 사람들은 히지카타 토시조 생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33][34] 히지카타의 무덤의 위치는 "이바 하치로 군의 무덤은 하코다테 고료카쿠, 히지카타 토시조 씨의 무덤 옆에 있다"라고 사담회 기록에 있다. 이바 하치로의 무덤도 고료카쿠 안의 어딘가에 있는것으로 추정하지만, 히지카타와 마찬가지로 확실하지 않다.

히지카타 토시조는 에도의 천연이심류 시위관 도장시절부터 교토의 신센구미, 도바-후시미 전투부터 일본을 거슬러 혼슈 북단 하코다테 전투까지 신센구미를 지켰다. 사실상 신센구미의 처음과 끝을 지킨 인물이자, 하코다테를 대표할 만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심지어 하코다테시의 준 마스코트 중 하나로도 등장하고 있다. 고향인 히노시도 마찬가지. 막부군과 오우에츠 열번 동맹의 군사 고문을 담당하고, 에조까지 올라가 막부군의 손을 끝까지 잡아 주었던 프랑스군 교관 쥘 브뤼네(Jules Brunet)[35]는 "그가 유럽에 갔으면 장군이 되었을 것"이라 평하기도 하였다. 이즈 지방의 대관(代官)인 에가와 타로자에몽[36](江川太郎左衛門)은 "호매불굴, 담기 비상한 사나이(豪邁不屈、胆気非常の男)#"라고 평했다.

히지카타 토시조의 결점으로는 역시 신센구미 시절 곤도와 함께 다수의 동지들을 숙청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행위다. 이 행동들이 조직의 방어라고는 하나 매우 지나쳤고 권력욕을 보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하지만 그는 신센구미 괴멸 후에도 보신 전쟁에 참전해 무사로서의 자세를 보이며 활약했고, 나약해진 다이묘와 무사들이 무조건적으로 항복하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가장 무사답게 투쟁해 막부의 유종의 미를 거둔 '좌막파(막부보좌파)의 영웅'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상당히 복합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3. 여담[편집]


  • 히지카타 토시조의 무덤은 출신지인 히노시의 이시다사(石田寺)에 있지만 실제로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불명이다. 이타바시에서 참수된 곤도 이사미의 목은 교토로 운반되어 산조 가와라에서 참수된 것을 고려하면 히지카타 토시조의 목은 참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코다테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 신정부군에게 유해는 넘기지 않고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 구막부군이 어딘가에 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역사 인물 중 한 명이다. 사카모토 료마,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일본인이 좋아하는 역사인물 리스트에 단골로 오르는 인물. 역사적으로 크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파란만장한 인생, 패배할게 뻔한 전쟁에서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지킨 신념, 막부에 대한 충성심, 비극적인 최후, 잘생긴 외모 등으로 일본인들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다 들어가있는 인물이다. 2006년 JST에서 방영했던 '1억 3천만명이 선택한 일본인이 좋아하는 위인 베스트 100'에서는 쟁쟁한 위인들을 제치고 10위에 랭크인 했으며[37], 2016년 NHK에서 방영중인 프로그램 역사비화 히스토리아에서 조사한 '역사 속에서 좋아하는 인물 베스트5'에선 오다 노부나가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참고기사) 2019년에는 12,000명[38]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인 인물 순위에서 9위를 기록했다. 막부 말기 인물 중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유이하게 상위권을 기록했다.[39]# 2021년에는 존경하는 위인 랭킹에서 11위를 기록했다.#[40]

  • 하코다테 고료카쿠 타워에는 히지카타의 동상이 세워져있다.[41] 고료카쿠 타워의 40주년 기념으로 고료카쿠와의 깊은 인연을 상징하기 위해 신센구미의 부장을 지낸 히지카타 도시조의 동상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고료카쿠 타워 1층 아트리움 무대 옆에 있다. 또 1층에는 에노모토 다케아키 동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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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으로는 5월 5일.[2] 음력으로는 5월 11일.[3] 보신전쟁, 특히 하코다테 전쟁에서 구 막부 군의 전사자를 기념하는 기념비.[4] 아이즈 잔류를 결정한 사이토 하지메와 결별 후 하코다테로 북상해 신센구미를 이끌었다.[5] 오늘날의 육군참모차장 격이다. 당시 직속상관은 오오토리 케이스케 육군봉행이었다.[6] 음력 5월 5일[7] 義豊[8] 豊玉[9] 이전까지는 6명의 자녀중 막내라고 알려졌으나,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10명의 자녀 중 막내였다고 한다.[10] 오다이진(큰 부자)이라고 불릴 정도로 부농이었다.[11] 가시가 돋친 것 같은 악동이란 의미. 은혼에서는 가시아귀라고 번역되었다. 어원은 茨のような乱暴なガキ(이바라노 요우나 람보나 가키)를 줄여 바라가키.[12] 29세에 상경 할 때까지 보낸 히지카타 토시조의 저택이다. 현재는 개조해 히지카타 토시조의 박물관으로 만들어졌다.[13] 타박상, 뼈가 부러지는 등 부상 치료약[14] 훗날 이 이시다 산약이 효과가 있는지 약사과에서 분석을 해본 결과 활용할 곳이 없고 효능이 전무하며, 효과가 전혀 없는 약이나 믿는 사람에게는 플라시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말하자면 약팔이용 엉터리 약이라는 것이 드러났다.[15] 에도 시대 평민들은 성을 가지지 못하고 공식적으로는 이름만으로 불렸다. 그러나 특히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는 그것만으로는 헷갈릴 일이 많았기 때문에 평민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성을 몰래 만들어 자칭하는 경우가 있었는데(隠し姓), 히지카타라는 성이 바로 그러하다.[16] 히지카타 토시조가 본래 농민이며 신센구미 결성이라는 우연이 없었다면 영영 임관은커녕 기껏 배운 무술을 뽐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젊은 시절을 이런 식으로 보냈다는 것은 특이하다 못해 기묘하다고 해도 될 정도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부농이나 상인들 자제를 중심으로 평민이 호신을 겸한 취미로서 무술을 배우는 경우가 늘었지만 깊게 배운다고 해도 임관이나 취직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천재 수준으로 재능이 뛰어날 경우에는 무사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출세하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콘도 이사미치바 슈사쿠의 스승이자 장인어른이었던 아사리 요시노부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그저 취미생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도장에서도 무사 가문이 아니면 비전을 가르쳐주지 않거나 일정 이상의 단수는 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히지카타 토시조처럼 죽기 살기로 파는 것은 정말로 희귀한 케이스다.[17] 특히 당시로서는 장신인 키와 보폭을 활용하여 상대의 다리를 걸거나 차서 자세를 무너뜨리는 것이 특기였다고 한다.[18] 10월 28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19] 총장인 야마나미 케이스케도 탈주하자 할복을 명해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졌으나 친했다는 설도 있다.[20] 신센구미와 가깝게 지낸 의사다.[21] 하코다테 전쟁 당시 찍은 사진. 사진 작가는 타모토 겐조(田本研造).[22]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줄임말.[23] 홋카이도의 상륙지 「와시노키초」, 구 막부군의 거점 「고료카쿠」, 히지카타가 함락시킨 「마쓰마에 성」, 후타마타 전투가 벌어진 「후타마구치」.[24] 곤도는 구 막군의 잔당의 두목으로서 포박되었지만, 일찌기 쿄토에서 반막부 활동가를 몇 사람이나 저승에 보낸 신센구미의 수령이라고 눈치채지 못하면, 무거운 처벌은 면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 기대는 배반되고, 정체가 알려진 곤도는 이타바시에서 참수 되어 버린 것이었다.[25] 보통 마츠모토 준(松本順)이라고 불린다.[26] 하코다테 전쟁 당시 히지카타 토시조의 일대기를 정리한 방송. 썸네일의 여자 리포터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사람은 중국인으로 이 시대의 일본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며, 인터뷰 도중 우연히 잡힌 장면이다.[27] 육군 봉행은 과거 에도 막부에 존재했던 직책이다. 과거에는 막부 내에서 보병·기병·포병을 인솔하는 직급이었다.[28] 넓은 영토를 가진 제후[29]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일원. 보신 전쟁이 시작되자 구 막부군을 지원하고 하코다테 전쟁에서 싸웠다.[30] 2021년 NHK는 '역사탐정'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현장 조사 및 과학적 분석으로 당시 전투를 재현하기도 했다.#[31] 시동으로 이치무라 테츠노스케를 두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채용한 작품이 소설 타올라라 검과 만화 피스메이커 쿠로가네. 이치무라는 1873년에 병사했다고 전해진다.[32] 그림 이름은 '箱館大戦争之図'#[33] 러시아로 망명갔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설일뿐이다.[34] 이 생존설을 채택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 골든 카무이다.[35]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네이선 알그렌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36] 에가와는 당시에는 제일의 개명가로 반사로 제조와 농병대 편성에도 관여했던 인물이다.[37] 곤도 이사미는 41위, 오키타 소지는 53위에 랭크되었다. 더 자세한 정보는 이쪽으로.[38] 조사 대상은 10대~60대 남성, 여성.[39] 1위 오다 노부나가(1,059표), 2위 사카모토 료마(1,047표), 3위 스기하라 지우네(603표), 4위 쇼토쿠 태자(582표), 5위 사나다 노부시게(561표), 6위 다테 마사무네(508표), 7위 우에스기 겐신(458표), 8위 도쿠가와 이에야스(440표), 9위 히지카타 토시조(426표), 10위 구로다 요시타카(380표).[40] 일본인으로 한정하면 9위.[41] 조각가 고데라 마치코가 만든 작품. 2003년 12월의 공개됐다.

  • 신센구미는 사극부터 코미디, 로맨스까지 영화, 텔레비전,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인기 소재가 되었는데, 신센구미의 상징인 히지카타는 보통 이러한 미디어 믹스의 간판격 인물로 등장한다. 많은 미디어 믹스에 출연하다보니 2021년 한 일본인이 "사후 150년 이상이 지나도 아직도 어떻게든 이 사람을 살리자, 활약시키자, 매력적으로 그리려는 팬이 끊이지 않는 히지카타 토시조, 인기의 끝이 영원히 오지 않는 남자."라는 트윗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시바 료타로의 신선조를 다룬 대하소설 '타올라라 검'[42]은 이 인물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 애도(愛刀)는 이즈미노카미 카네사다(和泉守兼定)와 호리카와 쿠니히로(堀川国広).[43] 이즈미노카미 카네사다의 경우는 히지카타 토시조 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지만, 호리카와 쿠니히로는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검술 실력은 행상으로 배운 버릇과 천연이심류가 섞여있었지만 최전선에서 싸워도 당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굉장한 실력이었다고 보인다. '무술영명록'에도 게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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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노카미 카네사다 (모사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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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5척 5촌(165~168cm)로 빼어난 미남이다. 차분하고 관대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감정과 분노가 보이지 않는다.

― 하시모토 마사나오(橋本政直)《양웅사전부록(両雄士傳補遺)》#
아버지는 늘 그가 배우처럼 예쁘다고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는 숱이 많고 눈은 생기가 있다. 곤도보다 한 살 아래지만 서너 살 아래인 것 같다. 그는 약방의 아들이라고 자칭하지만, 조금도 알아채지 못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야기 아이사부로[48]#
신센구미 곤도와 히지카타 등이 나이토 씨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자주 옵니다.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사람, 특히 히지카타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배우처럼 잘생기고 미남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나가미네 히데키[49] "메이지 초기를 이야기하다(漫谈明治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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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아하는 색은 빨간색. 면끈의 색도 빨강이었다.

  • 그의 마지막 전쟁터가 된 하코다테, 마쓰마에, 에사시 등에는 그의 많은 사적이 잘 정비되어 있어 그를 좋아하는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히노시에 위치한 그의 생가를 개조해 후손들[50]이 만든 히지카타 도시조 자료관(土方歳三資料館)은 히지카타 토시조에 대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그의 고향에 온 히지카타 팬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1994년에 문을 열었다. 박물관 소장품 중에는 히지카타의 물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히지카타가 천연이심류 검술을 접할 때 사용했던 목검, 교토에서 이케다야 사건 당시 히지카타가 착용했던 갑옷 세트가 있다. 히지카타의 검이 매년 한정된 기간 동안 대중에게 전시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매년 이 시설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약 16,000명인데 이 중 60~70%가 10대부터 30대까지의 여성이라고 한다.#

  • TV에서 자신이 히지카타 토시조의 후손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는데 바로 카레이서인 '반바 타쿠(番場琢)'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의 어머니인 반바 센나미의 증조할아버지가 히지카타라는 것이다. 반바 타쿠는 미국인 할아버지를 둔 쿼터이며 일본인 어머니는 중학교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그냥 이 사람의 주장일 뿐이다. 일본에서도 단순한 가십으로 보고 있다.

  • 일본의 한 디지털 컬러리스트가 그의 사진을 컬러로 복원하기도 했다.##

  • 워낙 인기 역사 인물이다보니 하코다테시나 그의 고향 히노시에서는 그를 테마로 해 관광지로 만들고 있다.(하코다테시, 히노시) 히노시청 홈페이지에서는 아예 히지카타 토시조의 사진을 올려놓기도 했으며 신센구미 관련으로 관광을 유치하고 있다. 또한 하코다테에서는 그의 얼굴이 들어간 굿즈나 히지카타를 캐릭터로 만들어 캐릭터 굿즈까지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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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료카쿠 타워 전망대에 있는 히지카타 토시조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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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면식이 있었다. 시부사와의 넷째 아들 시부사와 히데오가 저술한 '시부사와 에이이치'라고 하는 책속에 히지카타가 등장하고 있다. 히데오는 에이이치가 52세일 때의 자식으로, 만년의 에이이치는 그가 책을 읽어 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의 히데오가 '시대물'의 책을 읽고 있었을 때, 신센구미 히지카타 토시조의 이름이 나오자, 에이이치는 생각지도 않은 반응을 했다고 한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다시 한번, 거기를 읽어줘'라고 말했다. 그리고 '히지카타 토시조는 내 친구다'라고 말했다. 시부사와와 히지카타는 전 교토를 돌아다니다 포박당한 이후 한 번밖에 생애에서 만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시부사와는 만년에 가족에게 "히지카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는 대하드라마 청천을 찔러라의 등장한다.

  • 메이지 시대에 30년대에 걸쳐 미인화를 그린 화가 치카노부 요슈(楊洲周延)가 보신 전쟁 당시 히지카타 부대 소속의 군인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 1992년 일본 방송 '知ってるつもり'에서 소개한 히지카토 토시조.보기

  • 2021년 9월에는 NHK가 제작한 시대극 '히지카타의 스마트폰'이 방송됐다. 내용은 '만약 당시에 히지카타 토시조가 스마트폰을 갖고 있었다면?'을 주제로 한 SF 시대극이다. 총 6화로 방송된다.[51]#


4. 창작물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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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편집]




6.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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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해적판으로 유명한 대망에서의 제목은 '불타라 검'.[43] 위의 사진에서 차고 있는 검이 호리카와 쿠니히로이다.[44] 1877년에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45] 역대 최고의 히지카타 토시조 연기라고 평가받고 있다.[46] 거장으로 유명한 이치카와 곤(市川崑) 감독의 2000년 영화.[47] 이분은 기묘하게도 용과 같이 유신!에서 요시다 토요의 모습을 한 용과 같이 시리즈의 등장인물 카자마 신타로로도 출현하셨다.[48] 신센구미의 집주인 야기 겐노조의 차남으로, 1850년생으로 당시 13세였다. 자모자와 히로시의 "신센구미의 유산"에서 발췌.[49] 교토 문화무예계 국장[50] 히지카타 토시조의 방계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현재는 히지카타의 형인 키로쿠의 증손 히지카타 아이가 관장으로 있다.[51] 2020년에는 아케치 미츠히데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