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쿠니 나루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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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c965 일본 제국 제43대 내각총리대신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東久邇稔彦 | Higashikuni Naruhiko
'''

파일:s0001l.jpg

출생
1887년 12월 3일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교토교엔
사망
1990년 1월 20일 (향년 102세)[1]
도쿄도 시부야구 일본적십자사의료센터
재임기간
제43대 내각총리대신
1945년 8월 17일 ~ 1945년 10월 9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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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어머니 데라오 우타코
배우자
야스노미야 도시코 내친왕
자녀
모리히로 왕 (장남)
모로마사 왕 (차남 / 요절)
아와타 아키츠네 (삼남)
타라마 토시히코 (사남)
학력
육군대학교 (26기)
정당

약력
귀족원 의원
제27대 근위사단 제3보병연대장
제14대 제2사단장
제22대 제4사단장
제10대 육군항공본부장
제2대 제2군 사령관
제2대 방위총사령관
제55대 육군대신
치바공업대학 설립자
제43대 내각총리대신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20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08년 ~ 1945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중일전쟁
의원 경력
소속
귀족원
선거구
황족의원
선수
종신
기간
1907년 12월 3일 ~ 1946년 5월 23일

1. 개요
2. 생애
2.1. 출신 배경
2.2. 종전 이전
2.3. 허수아비 내각
2.4. 총리 사퇴 이후
3. 기행
4. 가족과 후손
5. 매체에서
6. 주요경력



1. 개요[편집]


일본 제국의 황족(고후시미 천황의 18대손), 군인, 정치인, 제43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1947년 신적강하전 의 이름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東久邇宮稔彦王).

일본 최초의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인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자손이다. 정확히 말하면 후시미노미야의 20대 당주인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4남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9남이다. 즉 후시미노미야에게 있어 분가의 분가인 셈. 그는 일본 역사에서 유일한 황족 출신 총리이다.[2]

102세에 사망하여 메이지 20년에 태어나 헤이세이 시대의 개막까지 보았다. 일본 근현대 메이지 - 다이쇼 - 쇼와 - 헤이세이 네 시대를 모두 겪었다.

장제스, 에리히 폰 만슈타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에르빈 슈뢰딩거 등의 인물과 동갑이며, 쇼와 덴노보다 14살 연상이다. 모두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보다 먼저 죽었다.


2. 생애[편집]



2.1. 출신 배경[편집]


일본 황실에서 친왕의 호칭을 쓸 권리는 직계 황족에게만 한하며, 그 외에는 왕(王)의 칭호를 쓴다. 그러나 후시미노미야, 가쓰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간인노미야의 가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대대로 친왕의 호칭을 세습하여 '세습친왕가'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호칭과 더불어 황위 계승에도 우선권을 가져 천황이 후계자를 못 남기고 죽으면 대신 황실의 대를 이을 권리도 있다. 그 가운데 후시미노미야 가문이 가장 오래 존속해 큰 힘이 있었다.

19대 당주 후시미노미야 사다요시(伏見宮 貞敬 1776-1841) 친왕의 아들들부터 분파 미야케가 생겼다. 사다요시 친왕의 넷째 손자이자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4남인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18번째이자 마지막 아이이며 9왕자가, 바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다. 참고로 후시미노미야는 26대 히로아키(博明) 왕으로 이어지고, 구니노미야는 3대로 끝,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계속 이어지나 신적강하로 친왕, 왕 칭호는 못 받는다.


2.2. 종전 이전[편집]


파일:General_Prince_Higashikuni_Naruhiko.jpg
20대 초중반의 히가시쿠니노미야
1887년, 교토에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테라오 우타코(寺尾宇多子)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덴노소노 사치코의 9녀인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공주와 결혼했다. 즉 메이지 덴노의 사위가 되며, 쇼와 덴노의 고모부가 된다. 또한 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의 친정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왕이 그의 형이니, 고준황후에게는 작은아버지이자 시고모부가 된다. 이방자 여사에게도 작은아버지가 된다.

게다가 쇼와 덴노&고준 황후 내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큰며느리이니, 쇼와 덴노 내외와는 서로 사돈도 된다.


2.3. 허수아비 내각[편집]


파일: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각료 사진.jpg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3]

일본 육군 대장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4]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다음 이틀 후에 일본 총리로 기용되었지만,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일본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연합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맥아더가 사실상 일본의 실권자였으니, 이 사람은 말만 총리지 사실상 얼굴 마담이었다.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43.jpg
43대 총리 취임 후

그럼에도 그는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온 맥아더에게 자주 반항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당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은 이른바 일억총참회론(一億総懴悔論)을 주장했다. 이는 일본의 패전에 대해 정부, 군대, 국민이 모두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반성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최소화하고 향후 있을 전범재판에 대비해 황실의 지위와 신변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평가된다. 내각은 일본의 전쟁 책임 추궁 등이 비생산적이라는 입장을 나타냈고 전쟁 책임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서류 등을 파기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억총참회론에 대해 보도 통제를 내렸고 극동국제군사재판 준비를 서두른다. 또한 그는 야마자키 이와오(山崎巌) 내무대신을 통해 후줄근한 근무복 차림의 맥아더와 연미복으로 차려입은 쇼와 덴노가 대비되어 보이던 맥아더와 쇼와 덴노의 사진의 언론 게재를 금지했다. 그러자 맥아더는 명령권자 야마자키 내무대신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내각 총사퇴를 명령하겠다고 통보하여 금지 처분이 해제되었다.

맥아더와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갈등은 10월 4일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치안유지법 폐지 명령을 계기로 폭발했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었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은 소극적 저항의 의미로 내각 각료와 함께 10월 9일에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는 전후 첫 총리이면서 최단 재임 총리(54일)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2.4. 총리 사퇴 이후[편집]


1947년에 다이쇼 덴노의 직계자손을 뺀 모든 일본 황족들과 화족들이 평민으로 강등(신적강하)되었는데, 신적강하 문제가 이슈였을 때[5], 이 사람은 아예 자청해서 "신적강하를 하겠다"고 언론에 밝히면서 "다른 황족들도 동참하기 바란다"고 말했다.[6]

이후 슈퍼마켓을 열었지만 경영에는 수완이 없어서 얼마 못가 망했고, 1950년에 신흥종교를 만들어 교주로 활약하신 업적을 남겼다. 그 종교의 이름은 히가시쿠니교였으며 얼마 안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 뒤로는 안보투쟁 당시 이시바시 단잔, 가타야마 데쓰와 함께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퇴진을 권고한 것을 빼면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전후 첫 총리이면서 최단 재임 총리이지만 수명으로는 오히려 역대 최장수 총리[7](102세)라 메이지 시대에 태어나 헤이세이 시대까지 살았다는 것이 아이러니. 2번째로 오래 산(101세)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다이쇼 시대에 태어나 레이와 시대까지 생존했다. 나루히코가 죽은지 30년이 넘은 지금도 100살을 넘기는 사람이 많이 없을 정도로 오래살았다.[8]

파일:external/cache5.amanaimages.com/23007001937.jpg
1988년 101세 당시 모습


3. 기행[편집]


메이지 덴노가 같이 식사하자는데 설사가 났다는 까닭으로 거절한 일화가 있다. 설사는 당연히 거짓 핑계. 말이 같이 먹자는 것이지 당시 일본에서 천황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취급했다. 근데 당시의 나이가 최소 24살 이전[9]의 이야기다.[10] 나이는 메이지 덴노가 히가시쿠니보다 35살,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다이쇼 덴노)가 8살 많다. 하지만 그는 엄연히 메이지 덴노가 죽은 뒤에, 그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된 사람으로, 예비사위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그런 걸로 벌하기 힘들었을 수 있다. 일단 방계 황족들 중에서도 지위가 상당히 높은 집안 출신이라 대충 넘어갔지만, 다이쇼 덴노에게 욕을 먹고 난 뒤[11] 스스로 신적강하를 신청했으나 메이지 덴노가 "이 늙은이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라고 일축하면서 신분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메이지 덴노는 자기 자식들마저도 잘 만나지 않을 만큼 대인기피증이 심했고,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만나는 문제 때문에 황족이 신적강하를 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야말로 기분이 영 좋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유학 사이에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화가라 속이면서 어떤 노파에게 손금을 봐달라고 했다. 노파가 손금을 보고는 "당신은 일본의 총리를 하겠다."라고 했는데, 그제서야 신분을 밝히며 '나는 일본의 황족이자 군인이라서 정치를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파가 '일본에서 대격변이 일어나겠다. 그래서 총리를 하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히가시쿠니 본인의 회고록인 <やんちゃ孤独>에 따르면,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 입장을 밝혔으나, 그에 동조하는 사람이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 일본 지도층에서 사이온지 총리는 '꼬장꼬장한 늙은이', 히가시쿠니는 '황족 가운데 좀 이상한 양반'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보기 좋게 씹혔다. 히가시쿠니는 사이온지가 죽은 뒤인 1941년, 제2차 고노에 내각도조 히데키 당시 육군대신에게도 직접 찾아가서 "미국과 전쟁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도조 본인도 태평양 전쟁 개전에 반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도조는 고노에 총리가 사임한 후 히가시쿠니를 총리로 추천했다. 이후 전개 상황은 도조 히데키 항목 참조.

이 사람의 일화를 보면 유독 황족 신분을 싫어했던 듯하다. 자세한 것은 여기 참조 (일본어 자료이다.)


4. 가족과 후손[편집]


메이지 덴노의 9녀인 도시코 내친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4명을 낳았다.
  • 장남 모리히로(盛厚, 1916-1969) - 사촌지간인 쇼와 덴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12]와 결혼했으나, 시게코는 1961년에 어린 3남 2녀를 두고 병으로 죽었다. 모리히로는 데라오 요시코(寺尾佳子)와 재혼해 2남을 더 낳았지만, 후처와 5남 2녀를 남겨 두고 1969년에 부친보다 먼저 죽었다.
  • 차남 모로마사(師正王, 1917-1923) - 관동대지진 때 만 5세로 요절.
  • 3남 아와타 아키츠네(粟田彰常, 1920-2006) - 1940년 신적강하를 신청, 황족에서 화족으로 신분을 바꾸었다. 물론 1947년 신적강하 때 화족 제도가 폐지되었으므로, 이후로는 평민. 2남을 낳았다.
  • 4남 타라마 토시히코(多羅間俊彦, 1929-2015) - 일본계 브라질인. 1951년 브라질이민을 갔고, 1970년에는 아예 귀화하여 국적을 브라질로 바꾸었다. 다만 이민과 귀화 후에도 일본 황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경조사를 챙겼고, 일본인 여성(오키나와 출신)과 결혼했다. 자녀로는 1남을 두었다. 작가 미시마 유키오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현 일본 황실은 남성 후계자가 모자라서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에 혈통상 가장 가까운 이 사람의 장남이자 쇼와 덴노의 외손자인 모리히로 왕의 후손들이 구 황족의 유력한 부활 후보로 꼽힌다. 같은 추축국의 방계 왕실이였던 이탈리아 왕국의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이 생각 나는 부분.

이 사람의 장손이자 모리히로 왕의 장남인 노부히코(信彦, 1945-2019)는 대공습 당시에 태어나 1947년 신적강하가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잠시나마 왕 칭호를 가지기도 했다. 노부히코의 아들이자 쇼와 덴노의 외증손자인 유키히코(征彦, 1974년생, 50세)는 2010년생(14세) 외아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노부히코의 남동생 나오히코(眞彦, 1953년생, 71세)도 2명의 아들과 2004년생(20세) 손자 1명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이 둘 중 하나를 아이코 공주부마로 삼는 방식으로 부활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보고 있다.[13]

다만 또 다른 남동생 히데히코(秀彦, 1949년생, 75세)도 2010년대에 태어난 손자들이 있다지만, 애초에 이 사람은 화족(백작)가문인 미부(壬生)가문에 양자로 갔기 때문에 복권 대상일지는 의문이다.


5. 매체에서[편집]


Hearts of Iron IV에서 일본 장군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획득 경험치를 10% 감소시키는 ‘정계와의 연줄’ 트레잇이 달려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3레벨에 3/3/2/2로 스텟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때문에 비교적 자주 쓰이는 장군이다.


6. 주요경력[편집]


일본 역대 육군대신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54대

55대

56대
아나미 고레치카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1945년 8월 17일 ~ 1945년 8월 23일)

시모무라 사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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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일본 총리들 중 가장 장수했다.[2] 근대 일본에서는 황족은 어지간하면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고, 전후에는 황족의 피선거권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황족 출신 총리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3] 익숙한 얼굴이 많이 보인다. 맨 앞의 히가시쿠니 총리 뒤로 사진 맨 왼쪽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되어 짚고 있는 것이다. 그 옆은 당시 해군대신을 맡았던 요나이 미쓰마사 전 총리다. 해당 줄에서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키 큰 사람은 특명담당대신을 맡은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다. 종전 직후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내각출범기념사진에서도 어두운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4] 이 무렵 치바공업대학을 설립하였다(1942년).[5] 처음에는 전쟁범죄에 연관된 가문들만이 대상이었다.[6] 황족 신분으로 육군 대장과 총리대신을 역임한 그가 신적강하 동참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이상, 방계 황족 및 화족들 중 이것을 거부할 힘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이후 일본 황실이 남자아이를 못낳아서 현 나루히토 천황의 아내 마사코 황후는 독한 시집살이로 고생했다.[7] 단순히 일본에서만 최장수가 아니라 전 세계의 총리들을 통틀어서도 가장 오래 살아 기네스북에도 등록되어 있다.[8] 하지만 그의 장남은 모계유전을 몰빵받아서 그가 죽기 20년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장손도 조모와 모친의 유전자를 몰빵받은 탓에 1945년생 동갑내기 구본무처럼 74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9] 메이지 덴노는 1912년 7월 30일에 죽었다.[10] 실제로 히가시쿠니는 황족들 사이에서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와 비슷한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11] 다이쇼 덴노는 천황이 된 후에도 아버지 메이지 덴노와는 대조적으로 밖에 자유롭게 나가서 빈민 및 병자들과도 악수하고, 학생들의 수영을 지켜보다가 "물이 너무 차갑다"고 지적하며 학생들이 감기라도 들까봐 걱정하였으며, 자식들과도 같이 영화를 보고 숨바꼭질을 하는 등 상당히 소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화를 내고 욕을 했다는 서술은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다이쇼 덴노 입장에서도 상당히 불쾌하고 욕 나올 일이었다는 뜻이 된다.[12] 즉 부인은 메이지 덴노의 증손녀이고, 남편은 메이지 덴노의 외손자이다. 5촌아저씨와 조카가 결혼한 것. 한국에서는 불법이지만, 일본은 4촌, 5촌간 결혼이 합법이기에 가능하다. 일본은 황족 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재벌 가문에서도, 사촌오빠와 사촌동생, 6촌오빠와 6촌동생이 결혼하거나 5촌 아주머니와 조카가 결혼하는 사례 등이 의외로 지금도 어느 정도 있다. [13] 다른 후보들보다 이들이 아이코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이러하다. '만약 남계 여성 황족인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녀가 낳은 자녀가 황족, 더 나아가 천황이 될 자격이 있는가?'라는 일명 '여계천황' 문제가 발생하게 되지만, 이러한 문제는 아이코 공주가 천황의 피를 이은 또 다른 계통인 구 황족 남성과 결혼하면 외가와 친가 모두 천황의 혈통이 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조치는 사실상 구 황족이 다시 일본 황실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후미히토 황사도 큰딸 마코 공주와 작은딸 카코 공주를 구 황족 가문의 아들과 결혼시켜서 황실에 남겨 사실상 차차기 천황이 유력한 막내 히사히토 친왕을 돕게 하고 싶지만, 두 딸은 당연히 이를 거부하고 있다. 큰딸은 온갖 반대들을 다 뿌리치고 논란과 문제가 많은 코무로 케이와 끝내 결혼하여 황실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고, 작은딸도 언니만큼은 아니라도 역시나 부모에게 반항하고 있으니 가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