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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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도바 칼리파국
خِلَاَفَةُ قُرْطُبَةٍ
Khilāfat Qurṭub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rdobanCaliphate1000.png

후우마이야 왕조의 최대 강역
756 ~ 1031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우마이야 왕조
타이파 분열기
[[코르도바|

코르도바 타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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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세비야 타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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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고사 타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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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호스 타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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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톨레도 타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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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

발렌시아 타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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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이베리아 반도
수도
코르도바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아미르 (756 ~ 929)
칼리프 (929 ~ 1031)
주요 군주
아브드 알 라흐만 1세 (756~788)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929~961)
알 하캄 2세 (961–976)
면적
600,000㎢
민족
아랍인
베르베르인
모사라베
세파르딤
인구
10,000,000명 (1000년 경)
언어
아랍어
베르베르어
모사라베어
중세 히브리어
종교
이슬람 수니파
통화
디나르 | 디르함

1. 개요
2. 역사
2.1. 코르도바 아미르
2.2. 코르도바 칼리파
2.3. 멸망
3. 후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목록
3.1. 아미르 시대
3.2. 칼리파 시대
3.3. 함무드의 찬탈기
3.4. 우마이야의 복귀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756년부터 1031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 (알안달루스)을 다스린 이슬람 왕조. 우마이야 왕조의 후계 국가고 (우마이야 조가 옴미아드 조로도 불리듯) 후옴미아드 왕조로도 불린다. 몇 안 되는 중세 칼리파 국가들 중 하나고 아브드 알 라흐만 1세[1]부터 아미르를 자칭했던 시기(756~929)와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를 기점으로 칼리파를 자칭했던 시기(929~1031)로 나뉜다.


2. 역사[편집]



2.1. 코르도바 아미르[편집]


750년 아바스 왕조의 시조 아부 아바스가 우마이야 가문 사람들을 모두 몰살시킨 사건 이후 간신히 살아 남은 왕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아직 아바스의 세력이 뻗지 않은 이베리아 반도로 도주해서 756년에 이베리아 반도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한 왕조를 개창했다. 이것이 후(後)우마이야 왕조(코르도바 칼리파조)다.

기독교 세력과 국경이 맞닿아 있어 상시 전쟁중이었지만 중앙군의 세력이 미약해 지방 영주들의 힘이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과 북아프리카 일부를 장악했지만 실제로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는 곳은 코르도바 주변뿐이었다. 이 지역은 아바스 왕조의 통제권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었지만 아바스 왕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이슬람 세계의 최고지도자를 뜻하는 칼리파(خَلِيفَة)가 아닌 '아미르(أمير)'라는 칭호를 쓰고 있었다.

9세기 무렵부터는 아랍어가 현지 스페인인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통용되었고, 많은 사람이 개종했다. 개종자가 급증하자 원래의 아랍 엘리트와 아랍화된 스페인인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졌고, 그 결과 상당히 동질적인 스페인-아랍 사회가 탄생했다. 아랍어가 주요 언어가 되고 스페인-아랍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9~10세기의 엄청난 경제적 번영 덕분이었다. 오리엔트식 관개시설의 도입은 체리, 사과, 배, 아몬드, 석류, 무화과, 대추야자, 사탕수수, 바나나, 목화, 아마, 뽕나무같은 가치있는 신작물들의 재배를 가능하게 했다.
파일:PENINS~1.png
파일:ab10fdc09d43dc0b34979336ffd5a081a.jpg
814년의 이베리아 반도
9세기 말엽의 혼란


로마제국 히스파니아 속주 시절부터 주요 도시였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 때 군사기지로 쓰인 에메리타 아우구스타, 톨레툼, 카이사르 아우구스타는 후우마이야 조에 이르러 군사 사령부로 발전하였다. 이는 북쪽의 아스투리아스 왕국과 바스크 및 바르셀로나 백작국 등 기독교 세력들을 감시하였다. 이들은 각각 하부 절도사 (앗 타그르 알 아드나), 중부 절도사 (앗 타그르 알 아우사트), 상부 절도사 (앗 타그르 알 알라)로 일컫어졌다. 9세기 후반 북부의 바누 카시가 강성해지자 아미르 무함마드는 그 수장인 무사 이븐 무사에게 복속하는 대가로 삼진 중 톨레도와 사라고사 두 개를 하사하여 영토의 약 30%를 떼어주기도 하였다. 이후로 톨레도가 반란을 일으키고 사라고사와 바다호스의 번국들이 자립하였으며 남부에선 우마르 이븐 하프순이란 무데하르가 봉기하여 수도 코르도바를 위협하기도 했으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그들 모두를 진압하였다.

2.2. 코르도바 칼리파[편집]


중앙 정부의 힘이 강력해지고 국력이 강해진 것은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재위기간 912-961) 때였는데 중앙 집권의 과정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아바스 왕조가 약해진 틈을 타 칼리파를 선언했다. 이 때 북아프리카에서는 튀니지를 중심으로 일어난 파티마 왕조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파티마 왕조가 칼리파를 자칭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항하는 의미도 있었다.

압바스 칼리파는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파티마 칼리파에 가로막혀 버렸으므로 파티마 칼리파의 권위에 대항할 서부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구심점을 확보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치가 효력을 발휘해서 후우마이야 왕조는 파티마 왕조의 진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코르도바의 후 우마이야 왕조,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에 각각 칼리파가 들어서면서 얼마 동안 이슬람 세계에는 무려 3명의 칼리파가 존재하게 된다.

수십만명의 인구에 이르던 거대 도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고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후우마이야 왕조 통치 동안 스페인은 농업, 상업, 수공업이 발전하고 학문이 융성했다. 아랍인들은 중동에서 여러 가지 농작물 종자를 도입하였으며, 관개 시설을 계속 수리,보수하여 농업 생산력을 크게 끌어올렸다. 동로마 제국에서 탄압받던 유대인들이 코르도바 칼리프국으로 대거 이주해 칼리프국 도회지에 정착하면서 상공업이 발전하고 세수가 증가했다. 매년 기독교 왕국들을 침략하여 잡아오는 많은 노예와 재물들도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메스키타나 40만권이 넘는 장서를 보유했던 도서관도 이 시기에 완공되었다. 이는 당시의 이슬람권이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권이며 동시에 무역로가 발달했기 때문에 나타난 긍정적 현상이었다.[2]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알 하캄 2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통치를 했다. 그러나 알 하캄 2세가 재위 후 15년만에 급사하자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알 하캄 2세의 12살 된 아들인 히샴 2세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권력을 좌지우지했다. 알 만수르는 피지배층에 가렴주구를 일삼고 기독교도들을 탄압했다.[3]

알 만수르는 군사적 능력에 바탕을 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중앙 집권은 유지될 수 있었다. 알 만수르가 계속해서 북쪽의 기독교인들에게 승리를 거두는 와중에 반대파들이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 만수르마저 죽게 되자 칼리파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허수아비가 되고 각지에서 반란과 독립 요구가 들끓게 되었다. 게다가 그가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베르베르 군인들의 반란까지 겹치며 알 안달루스는 혼란에 빠진다.


2.3. 멸망[편집]


파일:Map_Iberian_Peninsula_1030-es.svg.png

1030년의 이베리아 반도

1016년에는 7년동안 함무드 가문에게 칼리파 자리를 찬탈당하기도 했다. 1023년 아브드 알 라흐만 5세가 다시 칼리파 지위를 찾지만 다음 칼리파 무함마드 3세를 마지막으로 히샴 3세 이전까지 함무드 가문이 다시 칼리파 자리를 차지하고 1026년 ~ 1031년 재위한 히샴 3세(1029년 코르도바 입성, 1031년 축출 및 1036년 사망)를 마지막으로 후우마이야 왕조는 해체되고 이베리아 반도는 수많은 타이파(طائفة, 이슬람 공국)국으로 쪼개지게 된다. 그리고 이 타이파들은 무라비트 왕조에 의해 통일된다.


3. 후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목록[편집]





우마이야 왕조와 후우마이야 왕조의 계보도#

3.1. 아미르 시대[편집]


이 때는 칼리파라고 칭하지 않았지만 우마이야 왕조의 후신으로 사실상 칼리파였다. 그래도 형식상으로나마 (알 만수르와의 협상을 통해) 929년까지는 아바스 왕조를 종주국으로 인정했다.



3.2. 칼리파 시대[편집]


이 때부터 정식으로 칼리파를 칭했다.
  •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929–961
  • 알 하캄 2세 961–976
  • 히샴 2세 976–1008
  • 무함마드 2세 1008–1009
  • 술라이만 2세 1009–1010
  • 히샴 2세(복위) 1010–1012
  • 술라이만 2세(복위) 1012–1016
  • 아브드 알 라흐만 4세 1016


3.3. 함무드의 찬탈기[편집]


이드리스 왕조의 후손이다.
  • 알리 이븐 함무드 알 나시르 1016–1018
  • 알 카심 이븐 함무드 알 마문 1018–1021
  • 야햐 이븐 알리 이븐 함무드 알 무탈리 1021–1023
  • 알 카심 이븐 함무드 알 마문 (복위) 1023


3.4. 우마이야의 복귀[편집]


  • 아브드 알 라흐만 5세 1023–1024
  • 무함마드 3세 1024–1025
  • 야햐 이븐 알리 이븐 함무드 알 무타리(공위) 1025–1026
  • 히샴 3세 1026–1031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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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압드 아르-라흐만 1세[2] 대조적으로 이슬람의 전성기가 끝난 시점에 있었던 이슬람 국가인 킵차크 칸국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들은 각각 킵차크 칸국와 오스만 제국의 지배기를 거치는 동안 서유럽에 비해 많이 뒤처지고 낙후되었다. 그런데 이 낙후된 유럽 영토들은 각각 킵차크 칸국과 오스만 제국에서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는데, 킵차크 칸국의 유럽 영토들은 킵차크 칸국 해체 이후에도 러시아어권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계속 이어나가게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들은 오스만 제국 세입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도가 큰 핵심 지역이었고 술탄들도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무시해도 유럽 영토만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다.[3] 관용적인 이미지와 달리 후우마이야에서 기독교 탄압은 수시로 벌어졌지만 이 시기 특히 많은 순교자가 배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