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왕궁
덤프버전 :
후에 왕궁(Hoàng thành Huế)은 베트남 중부의 도시 후에에 있는 궁전으로, 1802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약 150여 년간 응우옌 왕조의 왕궁이었다. 인도차이나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경복궁처럼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전쟁 시절에 입었던 피해가 워낙 컸던 탓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다시 복원되지 못한 상태로, 현존하는 건물들은 옛 시절의 25%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2번 건물은 자롱 황제의 아버지를 모신 흥묘(興廟)이며, 23번 건물은 응우옌의 역대 황제들을 모신 세묘(世廟), 24번은 그 앞에 놓여 있는 9개의 청동 항아리를 의미하는 구정(九鼎)이라고 부른다. 25번 건물은 황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높다란 누각인 현임각(顯臨閣)이며, 26번과 27번, 28번 건물은 각각 성벽에 있는 동문과 서문, 그리고 북문이다. 참고로 27번의 북문 건물 옆에는 누사방무사(樓四方無事)라고 하여 황제가 휴식을 취하거나 경연을 열던 2층 누각이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29번 건물군은 왕실 내부의 궐내각사이며, 30번 건물군들은 후궁들이 머물던 처소이다.
자롱 황제는 후에 왕성을 지을 적에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을 본따 짓도록 명령하였다. 아예 왕궁의 내정(內庭, 황제 일가가 생활하는 공간)을 자금성(Tử Cấm thành, 紫禁城, 뜨껌타잉)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원래 자금(紫禁)이라는 건 중국 자금성만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한자문화권 전반에서의 일반명사적 성격이 짙다. 현재의 황거 이전에 일본 천황이 대대로 머물렀던 궁성이었던 교토어소의 중심 전각의 이름도 자신전(紫宸殿)이다. 자(紫)는 예로부터 황제 중심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로서 하늘의 별들 가운데 중심을 뜻해서 황제의 거처를 표현하는 단골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금궁(禁宮) 역시 황제가 사는 곳이니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해서 중국에서 옛날부터 자주 쓰이던 말이다.
후에 왕궁의 성벽은 둘레 2,500m, 남북길이 604m, 동서길이 620m, 성벽 높이 6.5m, 성벽두께 104cm에 달한다. 동서/남북 각각 622m 인 고구려의 안학궁과 거의 비슷하며, 동서 500m 남북 700m 로 알려져 있는 경복궁보다는 작다. 동서 760m 남북 960m 인 자금성과는 차이가 크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두 겹의 해자는 후에를 관통하여 흐르는 기다란 강인 흐엉강에서 물줄기를 끌어왔으며, 해자 안에 인공 섬과 정원 등을 만드는 등 그 규모도 매우 크다.
1802년 6월에 응우옌 왕조의 창업군주인 자롱 황제가 즉위한 이후, 자롱제는 응우옌 가문의 중심지였던 후에에 새로운 왕궁을 짓기로 결심한다. 이후 1804년에 왕궁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수 천명에 달하는 인력이 동원되어 왕궁 주위의 길이 10km에 달하는 해자, 성벽, 그리고 왕궁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후에 왕궁은 민망 황제의 시기와 뜨득 황제의 재위기에 대대적인 개축을 거치며 약 150여 년 간 응우옌 왕조의 중심지로 자리하였으며, 그 절정기에는 수많은 전각들과 누각, 그리고 유럽식 건물들까지 들어서며 수백여 칸에 달하는 거대한 왕궁으로서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프랑스군이 쳐들어오고, 응우옌 왕조의 힘이 유명무실해지고 황제의 권한이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후에 왕궁 역시 함께 쇠퇴기를 맞았는데, 황제는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면서 자기 앞가림에만 급급한 처지로 변해버렸고 이에 따라 왕궁도 대대적인 개축이나 보수 작업을 하지 못하면서 열대의 태풍, 그리고 홍수 등 자연재해 등을 겹겹이 맞으며 점차 쇠락해 갔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명색이 한 나라의 왕궁이었던 덕에 기본적인 골조나 보수 작업은 간간히 이루어졌고, 자롱 황제 시기에 지어진 건물들도 대부분 온전히 남아있는 등 현재처럼 휑한 모습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일본 제국이 조선 경복궁에 했던 것과 같이 대놓고 민족 정신을 탄압하기 위하여 궁궐까지 밀어버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물론 베트남에는 황실이 꼭두각시일망정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후에 왕궁이 본격적으로 파괴되어버린 시기는 20세기 중후반부이다. 1947년에 베트민이 후에 왕궁을 점령했고, 프랑스군이 이를 쫒아내기 위하여 왕궁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전각 상당수가 포격과 총격으로 날아가버렸고, 이때 황제와 황후의 침전이 불타버리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왕궁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1968년 1월 31일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후에를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공습전을 펼치며 왕궁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고, 전투 후반부에는 후에 왕궁 내부에서 베트남 공산군과 남베트남군이 본격적으로 격돌하며 왕궁은 옛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폐허 가까운 상태로 변해버렸다. 연합국 측은 베트콩이 해자 외벽에 설치한 대공포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미사일을 왕궁의 성벽에다 발포했고, 이로 인하여 무려 10km에 달하던 왕궁의 성벽 역시 한낱 돌더미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구정 공세 때는 아예 후에의 흐엉 강을 경계로 해서 강 남쪽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북쪽은 베트콩이 대치하는 구도가 되었다. 베트콩은 후에왕궁에 들어가 저항했고 미군은 왕궁을 공습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후에의 역사적 가치를 알았기에 함부로 소이탄이나 공습으로 후에에 폭탄을 쏟아붓는 짓은 최대한 자제하려 들었으나,[2] 시가전과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를 지키기는 대단히 어려웠으며 결국 후에 왕궁에도 엄청난 피해가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후에 왕궁의 150여 개에 달하는 전각들 중 10개만이 겨우 살아남았으며, 이 10동의 건물마저도 여기저기 총탄을 맞거나 일부 불타는 등 왕궁 내에서 멀쩡한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전쟁 이후 베트남 정부는 후에 왕궁의 역사적 가치 때문에 왕궁의 입구이자 얼굴인 오문과 태화전을 우선 복원하고, 해자를 정비하는 등 점차 왕궁의 복원 작업을 실시하고는 있으나, 워낙 전쟁통에 왕궁 대부분이 철저하게 박살난 탓에 아직까지 큰 진척을 보이고 있지는 못하다. 현재 후에 왕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전성기 왕궁의 모습의 25% 정도도 못 미친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왕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황제와 황후의 침전은 현재 기단부도 찾아보기 어려우며, 왕궁 내부 대부분은 잔디밭으로 가득한데 이 잔디밭 대부분에 한때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왕릉들은 후에 시가지 바깥 교외에 퍼져있다. 베트남 전쟁의 피해를 덜 받은 편이라 보존상태가 왕궁보다 좋은 곳도 많고,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봉분과 일부 구조물만 있는 한국식 왕릉과 달리 건축물이 좀 더 많은 게 베트남 왕릉의 특징이고 사실상 별궁에 가까운 곳도 있다.
후에 궁궐의 정형된 명칭은 없으며,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사용하였던 명칭인 대내, 자금성, 황성 등 황궁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만을 사용한다. 이것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자금성의 경우 궁명이 보통명사이며 선양고궁 역시 정해진 명칭이 없다. 또한 일본 역시 어소, 황거 등의 보통명사를 사용한다.
유네스코 등록 역시 궁궐을 하나로 놓지 않고 후에 요새(Citadel of Huế), 대내(Imperial City), 자금성(Purple Forbidden City)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고 이들을 모두 모아서 등록한 명칭이 후에 성, 후에 궁 등이 아니라 후에 기념물 복합지구(Complex of Hué Monuments)인 이유도 이런 이유에 의해서이다.
세부적으로 놓고 보면 명칭마다 약간씩 지칭하는 대상 및 뉘앙스가 다른데, 황성(hoàng thành)/경성(kinh thành)은 주로 금성홍기 깃대가 달린 요새 및 요새 내부의 유적군 전체를 칭할 때에 사용하며, 대내는 요새 내부의 궁성만을 칭하는 경우에, 자금성은 연조(황실 구성원의 실 생활공간)을 칭할 때에 사용한다.
FPS 게임인 라이징 스톰 2: 베트남에서 나오는 맵 중 하나로 나온다. 현재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게임 내적 밸런스라던지... 슈프리머시와 테러토리 모드 2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주로 테러토리가 선호된다. 슈프리머시의 경우 과거에는 북베트남이 강세였으나 패치 이후 점령지 위치가 바뀌어 미군에게 매우 유리해졌고 E 거점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통로가 막힘에 따라 E 방면으로의 진출이 불리해져 결과적으로 미군에게 자주 지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문 앞에 있으면 현지인들이 영어로 안내해주겠다고 접근하며, 안에서는 인력거꾼이 나선다. 바가지 쓰기 싫으면 그냥 가볍게 미소지으며 지나가자.
1. 개요[편집]
후에 왕궁(Hoàng thành Huế)은 베트남 중부의 도시 후에에 있는 궁전으로, 1802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약 150여 년간 응우옌 왕조의 왕궁이었다. 인도차이나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경복궁처럼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전쟁 시절에 입었던 피해가 워낙 컸던 탓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다시 복원되지 못한 상태로, 현존하는 건물들은 옛 시절의 25%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외관[편집]
3. 배치[편집]
사진에서 보다시피 대부분의 건물들이 베트남 전쟁 시기에 불타 사라졌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1번 건물이 바로 왕궁의 정문인 오문이며, 2번이 금천 역할을 하는 태액호이고 태액호 위에 놓인 다리가 중도교(中道橋, Cầu Trung Đạo)이다. 4번은 정전인 태화전 앞의 마당으로 비대조의(𡓏大朝儀)라고 부른다. 5번 건물이 바로 왕궁의 중심인 태화전(太和殿)이며, 6번 건물은 왕궁의 내정이자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인 자금성의 정문이었던 대궁문(大宮門)이다. 7번의 두 채의 건물들은 따부와 후부라고 하여 문무관원들이 대기하던 장소이며, 8번 건물은 황제의 집무실이었던 근정전(勤政殿)이다. 가장 거대한 10번 건물은 황제의 침전인 건성전(乾成殿)이며, 11번 건물은 황후의 침전인 곤태전(坤泰殿)이다. 12번 건물이 유럽과 베트남 양식이 혼합되어 지어졌던 건중루(建中樓)이다. 13번 건물은 황제가 독서를 하며 즐기던 태평루(太平樓)라 부르는 전각이며, 14번은 왕실 정원이다. 16번 건물은 보물들을 보관하던 누각이며, 17번 건물은 응우옌 왕조의 조상들을 모시던 조조묘(肇祖廟)이다. 18번 건물이 응우옌 가문의 시조를 모시는 태묘(太廟)이며, 19번 건물은 태황태후가 거주하던 장생궁(長生宮)이다. 20번 건물은 황태후가 거처하던 연수궁(延壽宮)이며, 21번은 왕가 선조들을 배향한 봉선전(奉先殿)이다.
22번 건물은 자롱 황제의 아버지를 모신 흥묘(興廟)이며, 23번 건물은 응우옌의 역대 황제들을 모신 세묘(世廟), 24번은 그 앞에 놓여 있는 9개의 청동 항아리를 의미하는 구정(九鼎)이라고 부른다. 25번 건물은 황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높다란 누각인 현임각(顯臨閣)이며, 26번과 27번, 28번 건물은 각각 성벽에 있는 동문과 서문, 그리고 북문이다. 참고로 27번의 북문 건물 옆에는 누사방무사(樓四方無事)라고 하여 황제가 휴식을 취하거나 경연을 열던 2층 누각이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29번 건물군은 왕실 내부의 궐내각사이며, 30번 건물군들은 후궁들이 머물던 처소이다.
자롱 황제는 후에 왕성을 지을 적에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을 본따 짓도록 명령하였다. 아예 왕궁의 내정(內庭, 황제 일가가 생활하는 공간)을 자금성(Tử Cấm thành, 紫禁城, 뜨껌타잉)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원래 자금(紫禁)이라는 건 중국 자금성만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한자문화권 전반에서의 일반명사적 성격이 짙다. 현재의 황거 이전에 일본 천황이 대대로 머물렀던 궁성이었던 교토어소의 중심 전각의 이름도 자신전(紫宸殿)이다. 자(紫)는 예로부터 황제 중심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로서 하늘의 별들 가운데 중심을 뜻해서 황제의 거처를 표현하는 단골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금궁(禁宮) 역시 황제가 사는 곳이니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해서 중국에서 옛날부터 자주 쓰이던 말이다.
후에 왕궁의 성벽은 둘레 2,500m, 남북길이 604m, 동서길이 620m, 성벽 높이 6.5m, 성벽두께 104cm에 달한다. 동서/남북 각각 622m 인 고구려의 안학궁과 거의 비슷하며, 동서 500m 남북 700m 로 알려져 있는 경복궁보다는 작다. 동서 760m 남북 960m 인 자금성과는 차이가 크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두 겹의 해자는 후에를 관통하여 흐르는 기다란 강인 흐엉강에서 물줄기를 끌어왔으며, 해자 안에 인공 섬과 정원 등을 만드는 등 그 규모도 매우 크다.
4. 역사[편집]
1802년 6월에 응우옌 왕조의 창업군주인 자롱 황제가 즉위한 이후, 자롱제는 응우옌 가문의 중심지였던 후에에 새로운 왕궁을 짓기로 결심한다. 이후 1804년에 왕궁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수 천명에 달하는 인력이 동원되어 왕궁 주위의 길이 10km에 달하는 해자, 성벽, 그리고 왕궁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후에 왕궁은 민망 황제의 시기와 뜨득 황제의 재위기에 대대적인 개축을 거치며 약 150여 년 간 응우옌 왕조의 중심지로 자리하였으며, 그 절정기에는 수많은 전각들과 누각, 그리고 유럽식 건물들까지 들어서며 수백여 칸에 달하는 거대한 왕궁으로서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프랑스군이 쳐들어오고, 응우옌 왕조의 힘이 유명무실해지고 황제의 권한이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후에 왕궁 역시 함께 쇠퇴기를 맞았는데, 황제는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면서 자기 앞가림에만 급급한 처지로 변해버렸고 이에 따라 왕궁도 대대적인 개축이나 보수 작업을 하지 못하면서 열대의 태풍, 그리고 홍수 등 자연재해 등을 겹겹이 맞으며 점차 쇠락해 갔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명색이 한 나라의 왕궁이었던 덕에 기본적인 골조나 보수 작업은 간간히 이루어졌고, 자롱 황제 시기에 지어진 건물들도 대부분 온전히 남아있는 등 현재처럼 휑한 모습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일본 제국이 조선 경복궁에 했던 것과 같이 대놓고 민족 정신을 탄압하기 위하여 궁궐까지 밀어버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물론 베트남에는 황실이 꼭두각시일망정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후에 왕궁이 본격적으로 파괴되어버린 시기는 20세기 중후반부이다. 1947년에 베트민이 후에 왕궁을 점령했고, 프랑스군이 이를 쫒아내기 위하여 왕궁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전각 상당수가 포격과 총격으로 날아가버렸고, 이때 황제와 황후의 침전이 불타버리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왕궁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1968년 1월 31일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후에를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공습전을 펼치며 왕궁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고, 전투 후반부에는 후에 왕궁 내부에서 베트남 공산군과 남베트남군이 본격적으로 격돌하며 왕궁은 옛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폐허 가까운 상태로 변해버렸다. 연합국 측은 베트콩이 해자 외벽에 설치한 대공포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미사일을 왕궁의 성벽에다 발포했고, 이로 인하여 무려 10km에 달하던 왕궁의 성벽 역시 한낱 돌더미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구정 공세 때는 아예 후에의 흐엉 강을 경계로 해서 강 남쪽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북쪽은 베트콩이 대치하는 구도가 되었다. 베트콩은 후에왕궁에 들어가 저항했고 미군은 왕궁을 공습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후에의 역사적 가치를 알았기에 함부로 소이탄이나 공습으로 후에에 폭탄을 쏟아붓는 짓은 최대한 자제하려 들었으나,[2] 시가전과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를 지키기는 대단히 어려웠으며 결국 후에 왕궁에도 엄청난 피해가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후에 왕궁의 150여 개에 달하는 전각들 중 10개만이 겨우 살아남았으며, 이 10동의 건물마저도 여기저기 총탄을 맞거나 일부 불타는 등 왕궁 내에서 멀쩡한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전쟁 이후 베트남 정부는 후에 왕궁의 역사적 가치 때문에 왕궁의 입구이자 얼굴인 오문과 태화전을 우선 복원하고, 해자를 정비하는 등 점차 왕궁의 복원 작업을 실시하고는 있으나, 워낙 전쟁통에 왕궁 대부분이 철저하게 박살난 탓에 아직까지 큰 진척을 보이고 있지는 못하다. 현재 후에 왕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전성기 왕궁의 모습의 25% 정도도 못 미친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왕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황제와 황후의 침전은 현재 기단부도 찾아보기 어려우며, 왕궁 내부 대부분은 잔디밭으로 가득한데 이 잔디밭 대부분에 한때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5. 주요 건축[편집]
5.1. 외정[편집]
5.2. 내정 (자금성)[편집]
5.3. 기타[편집]
왕릉들은 후에 시가지 바깥 교외에 퍼져있다. 베트남 전쟁의 피해를 덜 받은 편이라 보존상태가 왕궁보다 좋은 곳도 많고,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봉분과 일부 구조물만 있는 한국식 왕릉과 달리 건축물이 좀 더 많은 게 베트남 왕릉의 특징이고 사실상 별궁에 가까운 곳도 있다.
6. 언어별 명칭[편집]
후에 궁궐의 정형된 명칭은 없으며,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사용하였던 명칭인 대내, 자금성, 황성 등 황궁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만을 사용한다. 이것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자금성의 경우 궁명이 보통명사이며 선양고궁 역시 정해진 명칭이 없다. 또한 일본 역시 어소, 황거 등의 보통명사를 사용한다.
유네스코 등록 역시 궁궐을 하나로 놓지 않고 후에 요새(Citadel of Huế), 대내(Imperial City), 자금성(Purple Forbidden City)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고 이들을 모두 모아서 등록한 명칭이 후에 성, 후에 궁 등이 아니라 후에 기념물 복합지구(Complex of Hué Monuments)인 이유도 이런 이유에 의해서이다.
세부적으로 놓고 보면 명칭마다 약간씩 지칭하는 대상 및 뉘앙스가 다른데, 황성(hoàng thành)/경성(kinh thành)은 주로 금성홍기 깃대가 달린 요새 및 요새 내부의 유적군 전체를 칭할 때에 사용하며, 대내는 요새 내부의 궁성만을 칭하는 경우에, 자금성은 연조(황실 구성원의 실 생활공간)을 칭할 때에 사용한다.
7. 여담[편집]
FPS 게임인 라이징 스톰 2: 베트남에서 나오는 맵 중 하나로 나온다. 현재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게임 내적 밸런스라던지... 슈프리머시와 테러토리 모드 2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주로 테러토리가 선호된다. 슈프리머시의 경우 과거에는 북베트남이 강세였으나 패치 이후 점령지 위치가 바뀌어 미군에게 매우 유리해졌고 E 거점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통로가 막힘에 따라 E 방면으로의 진출이 불리해져 결과적으로 미군에게 자주 지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문 앞에 있으면 현지인들이 영어로 안내해주겠다고 접근하며, 안에서는 인력거꾼이 나선다. 바가지 쓰기 싫으면 그냥 가볍게 미소지으며 지나가자.
[1] 인류 역사에서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2] 비슷한 이유로 태평양 전쟁 때도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에는 공습을 자제했다. 일제가 핵을 맞고도 항복하지 않으면 언젠가 교토에도 핵을 투하할 계획은 세워두었으나, 아무튼 우선순위를 뒤로 해 두었고 일본이 항복해 지금도 교토는 옛 모습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UNESCO] A B C D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써의 명칭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7 09:55:58에 나무위키 후에왕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