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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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드미트리우스 비켈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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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피에르 드 쿠베르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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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앙리 드 바리에 라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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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시그프리드 에드스트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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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에이버리 브런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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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마이클 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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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파일:스페인 국기.svg
제8대
자크 로게
파일:벨기에 국기.svg
제9·10대
토마스 바흐
파일:독일 국기.svg











제7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Juan Antonio Samaranch y Torelló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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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0년 7월 17일
바르셀로나[2]
사망
2010년 4월 21일 (향년 89세)
마드리드
국적
[[스페인|

스페인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행정구
]]

재임 기간
제7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1980년 8월 3일~2001년 7월 16일
직업
기자, 섬유업 종사자, 공무원, 정치인

1. 개요
2. 생애
3. 대한민국과의 관계
4. 기타



1. 개요[편집]


스페인의 前 체육인이자 외교관이다. 위의 명칭에서 볼 수 있듯 스페인의 귀족이기도 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제7대 위원장을 역임한 인물로 유명하다.


2. 생애[편집]


경영학을 전공한 후 기자로 활동했으며, 한동안 가업섬유업에 종사했다. 1955년부터 1962년까지누 바르셀로나 시의 체육 분야 공무원으로 재직했고 1964년부터는 10여년 동안 스페인 하원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철권 통치 말기에 해당했고 때문에 이때의 전력으로 그가 독재 정권에 부역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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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 의원 시절 프랑코 총통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사마란치[3]
프랑코 총통의 사망으로 스페인이 민주화한 후에도 그는 체육부 장관과 바르셀로나 주지사 등을 지내며 승승장구했고 1977년에는 소련 대사로도 임명됐다. 이러한 경력으로 공산권에서도 외교적 지지를 얻었고[4], 마침내 198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제7대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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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IOC 위원장으로 무려 20년 동안 재임했고 1980~1990년대 세계 스포츠계의 명실상부한 최고위 거물로 군림했다. 이는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이 약 30년 동안 위원장으로 재직한 것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장기 재임 기록이다. 그는 재임 기간동안 올림픽의 세계적 열기를 부흥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스포츠의 상업화를 부추겼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의 유치 과정에서 불거진 뇌물, 부패 사건이 대표적. 당시 프랑스에선 사마란치에게 "쿠베르탱의 유골은 올림포스에서 쉬고 있지만 사마란치의 유골은 월 스트리트에 뿌려질 거다."라는 야유가 나왔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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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자 자크 로게와 함께
2001년 자크 로게에게 위원장직을 넘겨주었고, 2009년 덴마크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는 2016년에 열리는 제31회 올림픽 유치전에서 모국인 스페인의 마드리드를 지원하는 데 참여했다.[5] 이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듬해인 2010년 4월 21일에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그의 사후 바르셀로나의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기념관이 '사마란치 올림픽-스포츠 기념관'으로 개명되었고,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경기장도 '사마란치 올림픽 홀'로 바뀌었다.


3. 대한민국과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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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1988 서울 올림픽의 개최를 확정짓는 1981년 독일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의 "세울~!" 발표도 그가 한 것이었다. 서울평화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도 선정되긴 했는데 해당 상 자체가 논란이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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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란치와 11살 차이로 IOC 부위원장을 역임한 김운용과는 비교적 원만한 사이였으나[6] 2001년의 후임 위원장 선출을 두고 갈등을 빚자 자크 로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결정은 이후 김운용이 몰락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사적으로는 친구로 남았고, 2010년 사마란치가 타계하자 김운용이 조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마란치는 한국의 2002 월드컵 개최에도 큰 힘을 보태 줬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인데 월드컵 유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에 사마란치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요청으로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주앙 아벨란제와 만나 아벨란제를 거의 압박을 주며 한국 개최에 큰 힘을 보태게 만들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김운용의 사마란치 회고록에도 나온다.


4.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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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탈루냐어 이름은 '조안 안토니 사마랑 이 토렐료(Joan Antoni Samarach i Torelló)'. 통용되는 이름은 여기서 성씨를 제외한 이름을 스페인어(카스티야어)식으로 바꾼 것이다. 즉, 성씨 부분은 원래 카탈루냐어식으로 읽어야 한다.[2] 스페신 왕정 복고 당시[3] 사마란치 뒤에 있는 사람들 중, 왼쪽 두 번째의 인물이 프랑코다. 사진에서 프랑코 옆의 왼쪽에서 첫 번째, 송충이 눈썹을 달고 있는 사람은 후기 프랑코 정권의 2인자이자 73년 총리로 지명을 받았던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해군 제독으로 보인다. 그는 프랑코 정권의 가장 유능한 실무자로서 프랑코 사후 후계자 자리가 확실했지만 그 위세가 정점에 달했던 1973년(프랑코가 서거하기 불과 2년 전)에 바스크계 테러 조직 ETA의 폭탄 테러로 인해 살해 당했다. 결국 프랑코는 급히 후계자 선정을 다시 해야 했고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후안 카를로스 1세였다.[4] 이는 프랑코의 서거 전후인 1970년대의 스페인이 미국 및 자유 진영으로부터 외면받던 중립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30년대 후반 파시스트 정당으로 내전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프랑코는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끊임없는 참전 요구를 거절하고 납작 업드려 있었는데 그 덕에 연합군에 점령당하는 것을 면했지만 파시스트 정권이었기 때문에 이후 오랫동안 미국과 서방 세계에서 왕따를 당했다.[5] 여기서 마드리드는 끝내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최종 투표에서 패했고, 리우데자네이루는 올림픽을 개최하는 최초의 남미 국가가 되었다. 1차와 2차 투표에서 각각 탈락한 두 도시는 시카고도쿄.[6] 특히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측 IOC 위원이었던 박종규가 사망하자 대한민국 정부노태우를 비롯한 정권 주변 인사들을 검토 중이었는데 사마란치가 대놓고 김운용을 적극 지지했다. 이에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마란치를 설득하려 했지만 도리어 사마란치는 "김운용 말고는 안 된다. 만약 다른 사람을 고집할 경우 한국은 IOC 의원 없이 올림픽을 개최해야 할 것이다."라고 완강한 입장을 나타냈고, 결국 전두환이 물러서야 했다. IOC 위원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진 IOC 위원장이 김운용을 직접 추천한 것이니 제 아무리 전두환이라 해도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