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오야 마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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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란도르상 신인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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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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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이케우치 준코, 이시하라 유지로, 카와구치 히로시, 쿠사나기 고지로, 시라카와 유미, 스기타 히로코, 타카쿠라 켄
1957년
단 레이코, 에하라 신지로, 키타자와 노리코, 나카다이 타츠야, 시라카와 유미, 모리 미키, 츠구바 히사코, 카와사키 케이조
1958년
아사오카 루리코, 카노 준코, 아사오카 루리코, 쿠와노 미유키, 오오조라 마유미, 사토 마코토, 치노 카쿠코
1959년
혼고 코지로, 호시 테루미, 미즈키 조, 나카타니 이치로, 나츠키 요스케, 시미즈 마유미, 야마모토 토요조

196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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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아카기 케이이치로, 후지마키 준, 호시 유리코, 카와구치 토모코, 마츠카타 히로키, 미카미 신이치로, 요시다 테루오
1961년
이와시타 시마, 카야마 유조, 미타 요시코, 타미야 지로, 야마자키 츠토무, 요시나가 사유리
1962년
바이쇼 치에코, 하마 미에, 하마다 미츠오, 스가타 미치코, 치바 신이치, 야마모토 케이
1963년
이즈미 마사코, 카가 마리코, 키타오오지 킨야, 나카가와 유키, 나카오 미에, 타카다 미와, 타카하시 코지
1964년
후지무라 시호, 혼마 치요코, 마츠모토 하쿠오, 카토 고, 카야마 요시코, 마츠바라 치에코, 요시무라 지츠코
1965년
에나미 쿄코, 후지 스미코, 나이토 요코, 오가와 마유미, 타케와키 무가, 와타리 테츠야
1966년
구리주카 아사히, 구로사와 토시오, 오오하라 레이코, 야마구치 타카시, 야마모토 요코, 오오쿠스 미치요
1967년
아즈사 에이코, 쿠리하라 코마키, 나카야마 진, 오가와 토모코, 사카이 와카코, 스기 료타로
1968년
이쿠타 에츠코, 미네기시 토오루, 나카야마 마리, 오카 미츠코, 타카하시 에츠시, 타니 하야토
1969년
아츠미 마리, 오키 마사야, 오자키 나나, 타이치 키와코, 타카하시 노리코, 타치바나 마스미

197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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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하라다 다이지로, 모리타 겐사쿠, 나츠 준코, 오카다 유스케, 오카모토 노부토, 사카이 마사아키, 사토 오리에, 타케하라 에이코, 우메다 토모코, 와타세 츠네히코, 야나미 에이코
1971년
미개최
1972년
이케 레이코, 콘도 마사오미, 사카키바라 루미, 타카하시 케이코, 미후네 시로, 야마구치 카린, 요시자와 쿄코
1973년
우츠노미야 마사요, 스기모토 미키, 시가키 타로, 마츠자카 케이코, 무라노 타케노리, 야마모토 센, 타나카 마리, 후지오카 히로시, 혼다 미치코, 마키 히로코
1974년
아사다 미요코, 코즈에 히토미, 시마다 요코, 세키네 세츠코, 니시나 아키코, 하기와라 켄이치, 미우라 토모카즈, 모모이 카오리, 다이몬 마사아키, 타카하시 요코, 나카지마 유타카
1975년
아키요시 쿠미코, 쿠사카리 마사오, 이케가미 키미코, 단 후미, 시호미 에츠코, 나카무라 마사토시, 하기오 미도리
1976년
히가시 테루미, 오카다 나나, 오오타케 시노부, 다나카 겐, 카타히라 나기사, 네즈 진파치, 미츠바야시 쿄코, 카츠노 히로시, 사오토메 아이, 타키가와 유미
1977년
아사지 요코, 이와키 코이치, 에토 준, 하라다 미에코, 마야 쿄코
1978년
아라이 하루미, 아사노 유코, 이노우에 준이치, 시미즈 켄타로, 나츠키 요코, 타케시타 케이코, 타케다 테츠야, 나가시마 에이코
1979년
쿠니히로 토미유키, 나가시마 토시유키, 후지 마리코, 모리시타 아이코, 유리 치카코

198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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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쿠마가이 마미, 코테가와 유코, 시바타 쿄헤이, 마츠다이라 켄, 미야우치 준
1981년
카네다 켄이치, 칸자키 아이, 키시모토 카요코, 타키타 사카에, 히구치 카나코
1982년
카가 다케시, 사나다 히로유키, 다나카 유코, 나츠메 마사코, 후루오야 마사토
1983년
카자마 모리오, 콘노 미사코, 나카이 키이치, 나토리 유코, 류 다이스케
1984년
사토 코이치, 토키토 사부로, 나카이 키에, 하라다 토모요, 야쿠쇼 코지
1985년
이시하라 마리코, 에노키 타카아키, 와타나베 토루, 후지타니 미와코
1986년
키쿠치 모모코, 킷카와 코지, 사와구치 야스코, 야나기사와 신고
1987년
사이토 유키, 진나이 타카노리, 나카야마 미호, 야스다 나루미, 와타나베 켄
1988년
고쿠쇼 사유리, 토미타 야스코, 고토 쿠미코, 미나미노 요코, 나카무라 토오루
1989년
아소 유미, 오가타 나오토, 타카시마 마사히로, 미카미 히로시, 와카무라 마유미

199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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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모리 미유키, 스즈키 호나미, 미나미 카호, 모토키 마사히로, 야나기바 토시로
1991년
쿠도 유키, 타카시마 마사노부, 나카지마 토모코, 노무라 히로노부, 마키세 리호
1992년
이시다 히카리, 센도 노부코, 와쿠이 에미, 나가세 마사토시, 요시오카 히데타카, 다나카 미노루
1993년
카토 마사야, 시미즈 미사, 아카이 히데카즈, 유키 나에, 카라사와 토시아키
1994년
사쿠라이 사치코, 와시오 이사코, 스미다 유키, 츠츠이 미치타카, 하기와라 마사토, 무라타 타케히로
1995년
야마구치 토모코, 스즈키 안즈, 하다 미치코, 키시타니 고로, 토요카와 에츠시, 기무라 타쿠야
1996년
토키와 타카코(대상), 츠루타 마유, 잇시키 사에, 나가사와 토시야, 타카하시 카츠노리, 시이나 킷페이
1997년
마츠 다카코(대상), 이이지마 나오코, 세토 아사카, 카미카와 타카야, 니시무라 마사히코
1998년
칸노 미호(대상), 키무라 요시노, 다나카 미사토, 아사노 타다노부, 우치노 세이요
1999년
마츠시마 나나코(대상), 카시와바라 타카시, 카네코 켄, 사카이 미키, 후카다 쿄코

200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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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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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 수상자






1. 개요
2. 활동
3. 사망 이후
4. 가족

古尾谷康雅

1. 개요[편집]


1957.05.14~2003.03.25
키 187cm / 체중 75kg
후루오야 마사토는 1957년 5월 14일에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일본인 아버지와 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후루오야 마사토는 예명이고 본명은 후루오야 야스마사(古尾谷康雅). 존버로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구두 세일즈맨으로 일하다가 20세로 1977년 극단 히마와리에 입단하여 영화배우로 데뷔하여 후루오야 마사토 명의로 영화배우로 활동하게 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드라마에서도 출연하여 활동을 하였으나 2003년 3월 25일 집에서 목을매고 자살하였다.

장남이 태어났을때 자신과 같은 배우의 길을 겪길 바라는 마음이었는지 몰라도 자신의 예명인 후루오야 마사토(古尾谷雅人)에서 한 글자 아(雅)를 빼고 후루오야 마사토(古尾谷雅)로 이름을 지었다. 음독했을때 읽는 법은 둘다 '후루오야 마사토'로 동일하다. 그만큼 장남에게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듯.


2. 활동[편집]


후루오야 마사토의 아버지는 1923년생이며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이후 배우로 활동하였고 영화감독으로 활동해 왔다. 후루오야 마사토의 어머니는 1923년 동갑내기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진 바 없다.

1978년 영화배우로 데뷔.1979년 영화 '천사의 창자'에서 단역으로 출연하여 같은 단역으로 연기를 했던 카누마 에리(鹿沼絵里)와 1982년 결혼했다. 카누마 에리는 예명이고 본명은 후루야 토시에(古尾谷登志江). 1952년 12월 1일 생으로 슈퍼전대 시리즈 중 비밀전대 고레인저배틀피버 J태양전대 선발칸에 출연했던 배우로 비밀전대 고레인저에서는 이글연락원 가토 요코로 출연했고 베틀피버 J에서는 1화에서 1대 미스 아메리카 역을 맡은 다이안 마틴의 복장을 하고 국방부의 주요 간부들을 살해하는 비밀결사 에고스의 스파이로 특별출연했으며 태양전대 선발칸에서는 기계제국 블랙마그마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는 스파이 이자 기계 인간인 다크 Q로 활동한 바 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어 장남 타카토 하야토와 차녀 미즈노 레이를 두었다.

후루오야 마사토는 원래 영화에 주로 출연하던 배우였으나 1990년 기묘한 이야기(世にも奇妙な物語) 시즌1 12화 '지나치게 친절한 가족(親切すぎる家族)'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드라마 비중을 늘려가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켄모치 이사무로 출연하며 인기를 높였다.

3. 사망 이후[편집]


후루오야 마사토는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켄모치 이사무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예능 및 드라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자살하여 2002년 출연한 모닝구 무스메 서스펜스 드라마 스페셜 : '얼룩고양이 홈즈의 범죄학강좌, 내가 녀석이고 녀석이 나'가 그의 유작이다.

자살 이유는 아내 카누마 에리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1980년대 후반 아이돌이 주연의 드라마나 영화가 주류가 되었고 1990년에 들어서면서 거품경제를 배경으로 트렌디 드라마가 주류로 되는 가운데도 남편인 후루오야는 어디까지나 강경하고 진지한 역할만 고집하여 일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배우로 활동하는 폭이 줄어 들었다. 게다가 경력이 올라가면서 개런티도 올라 후루오야를 쓰는 쪽에서도 남편을 기피하게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이 줄자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경우도 많아졌고, 집에 틀어박혀 낮에 자고 밤에 정처없이 인근 공원을 돌아다니는 등 밤낮이 바뀐 상황이 계속 되었다. 수입이 크게 줄면서, 주민세도 밀리고 거품경제 말기에 1억 5000만엔에 구입한 아파트의 대출금 상환도 밀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내인 카누마 에리도 원래 배우였었다는 자존심을 버리고 인근 스낵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빚을 갚으려고 애썼지만 결과적으로 부채는 3억엔까지 늘었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친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둘러싸고 후루오야의 계모와 싸우게 된다. 후루오야는 원래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손을 씻을 정도로 결벽증 있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배우로서의 활동에 제동이 걸린데다 빚도 갚지 못해 빚 독촉을 받는 등 여러가지 스트레스를 쌓인데다 밤낮이 바뀐 황폐한 생활 때문에 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한다. 아내 카누마 에리와 말다툼 하면서는 아내의 얼굴에 중상을 입힐 정도의 폭력을 행사해 아내 카누마 에리는 남편이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울러 그와 반대로 후루오야가 '무대에서 죽는 것이 배우로서 숙원'이라거나 '자신은 필요없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비관적인 말을 진지하게 하는 등 불안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후루오야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버지가 남긴 거액의 유산이 최후의 보루였다. 아버지의 후처인 계모는 후루오야와 나이가 불과 몇살 차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타계 이후 후루오야가 빚을 갚기위해 상속에 관해 알아보던 중 아버지의 현금과 부동산 등이 모두 계모 명의로 이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후루오야가 계모에게 재산분할을 요구하였으나 계모는 거절, 언쟁이 불거졌고 계모와 재산을 둘러싼 소송을 벌이던 중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했다는 것이 카누마 에리의 의견이었다.

이 과정에서 죽은 후루오야 마사토의 아버지도 비판을 받았다. 후루오야 마사토가 1957년생인데 계모도 언론에 따르면 1950년 이후 생으로 최대한 많게봐도 후루오야보다 6살 정도 많다. 후루오야의 아버지는 후처와 나이가 3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도 결혼을 했고 결국 후처로 인해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리고 전처(후루오야의 친모)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재혼을 감행하여 이를 반대한 아들 후루오야와 의절하게 된다. 부자가 서로 소원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죽는 과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계모가 남편의 재산을 자기 맘대로 자신에게 이전하는 등 사문서위조를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후루오야의 자살 당시 유서가 발견되지 않아 타살 의혹이 제기 되기도했다. 이유는 소송 과정 중 계모가 남편 사후 자신의 명의로 이전을 한 과정에서 사문서 위조 정황이 드러나는 등 상황이 후루오야에게 매우 유리했음에도 갑작스럽게 자살했기때문이다. 후루오야의 아버지는 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했기때문에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아들인 후루오야에게 재산의 대부분을 물려주려고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런데 그 유언장을 계모가 위조한 게 드러나 계모가 사문서 위조로 감옥에 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살이 아니라 계모가 후루오야를 죽인 후 자살로 위장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후루오야의 시신부검에도 별다른 타살정황이 드러나지 않아서 자살로 발표되었고 후루오야의 유족도 이를 받아들였다. 후루오야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유족들이 후루오야 마사토의 소송을 계승하여 계모가 감옥에 수감된 상황에서 소송을 진행하였다. 결국 후루오야 아버지의 유산을 후루오야 유족에게 상환하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계모가 빼돌린 유산은 계모의 본가에서 관리하고 있었고 이들은 불복한다고 했으나 재판에서 패소하고 후루오야의 유족들이 법원에 강제집행을 신청하여 유산은 후루오야의 유족들에게 돌아갔고, 유족들은 빚 상환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문서 위조를 해서 재산을 차지했던 계모는 유산을 되돌려줘야 했을뿐만 아니라 감옥에 수감되어 응분의 처벌을 받게되었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계모의 사문서위조에는 계모의 남동생과 두명의 여동생과 부모 등 계모의 일가 전체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이들도 일본 경찰의 조사를 받아 검찰에 기소되었고, 유죄가 확정된다.

후후로야 계모의 부모는 노환인데다 주범은 후루오야의 계모와 그녀의 남동생과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보석으로 풀려났고 여동생 한명은 미성년자의 신분이라 제외되고 후로오야의 계모의 남동생과 여동생은 기소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각 신문사와 뉴스매체, 황색언론 등에서 후루오야의 계모와 그녀의 부모와 남동생과 여동생들의 신상을 공개하여 연이어 보도했다. 기소되지 않은 계모의 여동생의 신상이 보도된 것은 미성년자이기는 하지만 일본 경찰의 언론 브리핑에 의하면 당시의 전화통화 및 이메일, 메신저 내역을 보면 막내 여동생도 사전에 사문서위조 계획을 알았을 것으로 판단하지만 미성년자라서 구속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후 주간문춘에서 감옥에 수감되지 않은 후루오야의 계모의 부모와 구속되지 않은 막내 여동생에 대해서 취재했는데, 신상이 공개된 이후 계모의 부모는 재산을 처분해 어딘가로 이사했으며 후루오야의 계모의 막내 여동생은 다니던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할 것을 우려한다며 학교 측에 자퇴를 신청해 자퇴를 했다고 하며 이들이 이주한 장소는 불명이라고 보도했다. 후로오야 일가의 돈을 노리고 후루오야의 계모와 그 가족이 모두 후루오야 일가의 재산 탈취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고 신상이 모두 밝혀져 이들도 응분의 죄를 톡톡히 받게 되었다.

그의 자살 이후 10주기가 되는 2011년 추모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후에는 아들인 후루오야 마사토(古尾谷雅)가 자신의 예명 후루오야 마사토(古尾谷雅人)를 계승하여 2대 후루오야 마사토가 됨에 따라 후루오야는 1대 후루오야 마사토가 되었다.

카누마 에리에 의하면 비밀전대 고레인저에서 55화부터 67화까지 2대 키레인저 쿠마노 다이고로로 출연한 다루마 지로가 자신과 친분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후루오야 마사토와 알게되었다고 한다. 다루마 지로는 37살이던 1988년에 배우활동을 그만두고 필리핀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나름대로 유명한 배우였던 후루오야가 자살한 이후에 고인 관련 언급되는 연예계 인맥이란 것이 현역은 거의 없고 한참전에 은퇴한 다루마 지로 정도만 언급될 정도로 후루오야는 대인관계에 서툴렀다고 한다. 참으로 씁쓸한 부분.


4. 가족[편집]


아내 카누마 에리는1975년 작 비밀전대 고레인저에서 이글연락원 가토 요코로 데뷔한 것을 계기로 배틀피버 J에서 1화 비밀결사 에고스의 스파이 및 암살자로 특별출연 하였고 태양전대 선발칸에서는 기계제국 블랙마그마다크 Q 역할로 출연한바 있다. 카누마 에리는 후루오야 마사토와 결혼 후 1983년 장남 후루오야 마사토(古尾谷雅)를 낳고 1985년 딸 후루오야 레미(古尾谷快令)를 낳았다. 둘째딸 레미를 카누마 에리는 육아에 전념 하겠다는 이유로 1986년 배우를 은퇴하였다.

일본의 초 인기작인 1대 슈퍼전대 비밀전대 고레인저에서 이글 연락원 가토 요코의 역할을 맡았을 때이때 복장이 청바지를 입었다. 청바지 항목을 보면 알다시피 원래 미국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입었던 작업복에서 유래된 것으로 남자들이 입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본에서 있었기때문에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으나 가토 요코의 몸매를 드러내는 청바지 패션이 비밀전대 고레인저의 인기와 더불어 상승하여 신인 카누마 에리의 인기를 높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기로 인해 작중 이글 연락원들이 대거 등장하였으나 대부분 단역에 그치고 상당수는 신인이던 카누마 에리가 약 2년동안 해당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언론에서 카누마 에리를 청바지 패션의 카누마 에리로 대거 소개하면서 여성들의 청바지 패션이 폭발적으로 늘어 청바지의 카누마 에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문제는 수십년 전 일본 언론에 소개되었던 카누마 에리의 수식어를 그대로 나무위키에서 갖다 붙여넣기 식으로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앞서 말한 장남 후루오야 마사토(古尾谷雅)는 1983년 1월 7일 생으로 예명이 타카토 하야토(高藤疾土)이다.타카토 하야토의 데뷔 계기는 후루오야 마사토가 자살한 2003년 3월 25일 천장 대들보에 목을매고 죽은 후루오야의 시신을 엄마 카누마 에리와 함께 최초 발견자로 언론에 소개되어 유명세를 타면서 이를 계기로 동년 4분기 드라마 라이온 선생에 출연하며 데뷔하였다. 고쿠센 등 드라마에 출연하여 얼굴을 알려왔으나 점차 인기가 떨어져 잠를 은퇴 후 사업에 종사한다고 알려졌었다.

이후 2019년 아버지의 예명인 후루오야 마사토(古尾谷雅人)로 다시 데뷔를 하여 활동하고 있다. 다시 데뷔를 결심하게 된 이유를 스스로 설명하기를 본명인 후루오야 마사토 대신에 예명인 타카토 하야토로 데뷔한 것은 아버지인 후루오먀 마사토의 죽음으로 유명세를 얻어 데뷔하였다는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뛰어난 연기자로 알려진 아버지 후루오야 마사토와 이름이 같은 것이 부담이 되어 타카토 하야토로 데뷔하였다고 공개한 바 있다. 허나 은퇴 이후에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갈망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버지인 후루오야 마사토가 자살했던 나이와 자신의 나이가 동갑이 되는 2019년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각오로 기자회견을 열어 아버지의 본명 후루오야 마사토(古尾谷雅人)의 이름을 계승하여 2대 후루오먀 마사토로 데뷔를 한다며 선언하여 현재 활동 중에 있다.

둘째딸 미즈노 레이(水野快令)는 1985년 11월 26일 생으로 오빠인 후루오야 마사토와 배우로 활동했으며 결혼 전 본명은 후루오야 레미(古尾谷快令). 결혼 후에는 남편의 성을 따라 미즈노 레이(水野快令)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3년 데뷔한 오빠 후루오야 마사토보다 배우로서는 12년이나 선배로 1992년 요미우리TV의 드라마시티 92의 단막극 恋人たちのターミナル(연인들의 터미널)에서 아역배우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이름인 레미의 히라가나인 레미(ミィ)를 예명으로 배우로 활동을 하였으며 결혼 후에는 자신의 이름 미즈노 레이(水野快令)에서 이름만 히라가나로 바꿔 미즈노 레이(水野ミィ) 예명으로 배우 활동을 하였으며 일러스트 작가로 겸업 활동을 하였으나 배우는 잠정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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