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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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중국 수, 당, 송 왕조의 도성제
2.1. 한국사
2.2. 중국사
2.3. 일본사
2.4. 베트남사



1. 개요[편집]


皇城

사전적 의미는 황제가 거주하는 성. 황도(皇都), 제성(帝城)과 같은 의미다. 그래서 외왕내제였던 고려의 개경, 명실상부한 황제국이었던 대한제국 시절 한성부의 별칭이었다. 황성신문이나 황성 YMCA 야구단이 그 예.


2. 중국 수, 당, 송 왕조의 도성제[편집]


건축물로서 의미는 내성(內城)과 동일하다. 한나라의 장안성은 아예 구조 자체가 전혀 달랐으므로, 수, 당나라의 장안성이 그 시초다.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고 건물이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을 띄고 있다. 당나라의 황성은 궁성에 붙어있고 궁성 앞부분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당나라 장안성의 황성은 후대의 송나라나 명, 청시기 황성에 비해 크기가 작았다. 베이징 성의 황성은 서쪽의 중난하이와 북쪽의 베이하이공원, 징산공원과 남쪽의 태묘, 사직단을 모두 감싸서 큰 편이다. 황성 안엔 보통 정부 청사나 사직 등 제단을 설치했다.

과거 이 문서에는 이 도성제를 따른 수도는 궁궐의 크기를 보통 황성까지로 본다는 뇌피셜이 사실인양 서술되어 있었으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당, 송, 명, 청 시대를 막론하고 이 도성제를 따른 수도에서 수많은 3성 6부와 같은 관청가들과 태묘(종묘),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는 공간이 바로 황성이었다. 만약 황성까지를 궁궐로 본다고 하면 각종 관청들은 말할 것도 없고 태묘, 사직단 같은 시설도 모조리 궁궐 내부 시설이 되버리는 반면 궁궐 이외의 관청은 지극히 말단 관청 이외에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애초에 황성에 존재하는 관청들을 궁궐 밖에 존재하는 관청들이라고 하여 외조(外朝)라고 칭한 것 부터가 궁궐 밖의 지역이라는 뜻이며, 명, 청시대 궁궐인 자금성도 해자로 분명하게 태묘, 사직단 지역과 구분되어 있는 오문부터의 구역을 궁궐 면적으로 따져서 영문 위키백과에서도 이 구역을 궁궐 부지로 칭하고 있지, 천안문부터 중난하이, 경산 지역까지 모조리 해당하는 황성 면적을 전부 궁궐 면적으로 계산하는 경우는 없다. 이는 북한의 개경 도시구조 연구 권위자인 장상렬을 포함하여 학계에서 고려의 정궁인 만월대 면적 계산 시에도 마찬가지다. 고려 또한 황성 내부에는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아래 6부와 같은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황성이 궁궐이면 중서문화성, 상서성 및 그 아래 6부가 전부 궐내각사가 되버리는 셈이다.[1][2]

또한 나무위키를 포함하여 여기저기서 주례 고공기에 의거한 도성 구조라거나, 이를 확장하여 유교식 도성구조라는 식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완벽한 뇌피셜이다. 주례 고공기에 언급된 도성 구조에 대한 원칙은 方九里 旁三門(방구리 방삼문), 九經九緯(구경구위), 左廟右社(좌묘우사), 前朝後市(전조후시) 등 아주 원론적인 내용에 불과하며, 이를 도식화한 구궁도에서 알 수 있듯이 도성 9구획 중 정 가운데 구역을 궁성으로 하는 것 외에 황성을 건설하라는 등의 내용은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주례 이외의 유교 경전에는 이런 내용마저 없으니 유교식 도성구조라는 것도 어불성설. 도리어 주례 고공기 원칙에 따라 황제의 수도를 건설한다면 황성을 지어서는 안되는 셈이 된다. 황성은 건축물로서는 내성과 의미가 동일[3]하며 내성과 외성을 함께 짓는 것은 수도가 아닌 지방 도시의 성곽에도 아주 일반적인 방식[4]이므로, 내성의 이름을 황성으로 칭하는 것을 말하면 모를까, 내성 자체를 유교적 도성 질서에 따라 천자의 수도에만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아무런 유교 경전이나 교리상 근거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도리어 유교 경전 주례 고공기를 철저하게 따른다면 황제의 수도야 말로 황성을 따로 건설해서는 안된다. 중국이 중화 질서를 내제적으로 강화, 강제하는 과정에서 황성에 관련된 독점적 권한을 창조해 냈을 수는 있으나, 이는 유교적 질서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

한국사에서는 발해에서 등장했다. 그 이전 왕조들은 중국식(당나라식) 궁성 질서가 넘어오기 전에 이미 고대 한국의 독자적인 원칙에 따라 도성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발해는 아주 완벽하게 당나라 도성제를 수용하여 수도가 당 장안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발해는 당나라 입장에서는 발해국왕도 아닌 발해군왕으로 책봉할 정도였음에도, 발해가 내성(황성)이 포함된 수도를 건설할 때 당나라가 이런 무엄한(?) 행태에 대해 질책하거나 강경대응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즉 내성을 포함한 도성 건설이 황제국만의 특권이었다는 건 이런 점에서도 근거가 없는 셈.

태봉은 직사각형으로 외성, 내성, 궁성을 지었지만 내성의 크기가 매우 컸다. 당식 도성제를 독자적으로 수용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외성과 내성을 짓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성곽 건축 방식이기에 직사각형 도시 구조 외에 당제가 어느 정도까지 수용되었는지는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당나라식 도성 구조는 단순히 황성을 짓는다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

고려의 경우 과거 이 문서에는 나, 황, 궁성 순의 순서만 따르고 자연과 산의 지형을 맞추어 완전히 독자적으로 지어서 은연 중에 황제국 지위에 따라 4가지 성을 한번에 건설한 것과 같은 뉘앙스로 서술되어 있었으나[5] 이는 시간적 역사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기술이다. 먼저 고려의 경우 나중에 황성으로 칭해진 성은 다름아닌 발어참성으로, 후삼국 쟁패 시기 송도 지역에 왕륭 호족 세력의 거점성으로 지어진 성곽이다. 즉, 가장 먼저 지어진 성곽인 것이다. 왕건의 역성 혁명 후 발어참성이 다시 고려의 수도가 되자 발어참성 만으로는 궁궐 영역과 궁궐 외부 영역이 구분이 되지 않았으므로 궁성 지역에 해당하는 만월대에 별도의 성곽이 건설되었으며, 현종 시기인 1029년까지 100년이 넘게 궁성과 발어참성 두 가지가 개경 성곽의 전부였으며 발어참성 자체도 이 당시에는 별칭으로 나성이라고 불렸다. 거란과의 갈등이 격화된 현종 시기 개성의 민간인 거주지역 시가지 전체의 보호를 위해 개경 시가지 전체를 둘러쌓는 나성(외성)을 새로 쌓으면서 기존의 나성(발어참성)을 이때에 가서야 황성이라고 격을 높여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시간적 흐름에 따른 시대상에 따라 필요에 의해 성을 계속 추가하다보니 외성, 황성(발어참성), 궁성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기존에 나성으로 부르던 발어참성을 황성으로 칭하게 한 것 까진 몰라도, 황제국 지위의 당 도성제를 본받기 위해 일부러 각 성을 모두 건설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외성, 내성, 궁성의 구성 방식도 직사각형의 당나라 도성제 보다는 고구려 평양성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당제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고구려 계승의 한 형태로 보는 시각도 유력한 해석 중 하나일 정도.

조선의 경우 한성에 내성(황성)을 짓지 않고 바로 궁성 경복궁이 있었다. 애초에 한성은 100년도 넘는 시간동안 계속 성을 추가해 필요에 따라 나간 개경성과 달리 처음부터 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성곽을 포함한 도시 구조를 건설 시작 단계부터 구상, 실현한 계획되시였으며, 중앙집권의 조선의 한성은 이미 군사적 목적[6]보다는 행정과 치안적 목적의 성으로 변화하여 사회, 도시 구조가 내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구조로 변화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황성 구역을 따로 쌓으면 필연적으로 종묘사직의 제단 지역이나 관청들이 한 지역에 몰려있어야 하며, 도시의 다른 지역 및 도시 평민들과 격리된다. 그런데 한양의 경우 가장 주된 두 궁궐부터가 서로 각각 북악산의 지맥과 응봉의 지맥 위에 서로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자리잡고 있으며, 종묘는 창덕궁 아래 응봉 지맥에. 사직단은 인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서 거리가 멀고, 여러 관청들도 6조 거리에만 몰려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덕궁 돈화문 앞 등 다른 곳에도 많이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이를 하나의 구획으로 묶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고구려나 고려시대처럼 혈통적으로 확고한 귀족들의 사회가 아닌, 법률적으로는 오직 양인과 천인으로만 구분되면서 그 양인 중에 과거에 급제하여야만 양반이 되는 구조였으므로, 양반층이라고 해서 아예 완전히 별개의 거주구역을 설정하는 것도 무리였다. 실제로 조선시대 한양의 양반들은 북촌과 서촌에 많이 모여 살기는 했지만, 신분만 양반이고 가난한 경우에는 임수배산의 남산 자락에도 얼마든지 살아야 했으므로. 귀족들의 거주지를 내성구역으로 설정한 고구려 평양성하고 같은 양식을 보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7]


2.1. 한국사[편집]


고려 왕조의 황성은 세 성이 있었다.




발해 왕조의 황성은 한 도시가 추정된다.

  • 상경성 황성. 상경용천부 문서로. 한국 황성 중 유일하게 당식 도성제를 철저히 지켰다.

태봉 왕조는 황성(내성)의 유적이 남아있다.



2.2. 중국사[편집]


당나라의 황성.


명나라 / 청나라의 황성.

  • 베이징성 황성. 해당 문서로. 근대 이후... 래봤자 주로 문화대혁명 당시의 대대적 훼손으로 황성이 거의 없어졌다.


2.3. 일본사[편집]


  • 장안성을 본뜬 헤이조쿄, 헤이안쿄 모두 황성이 존재하지 않고 외성과 궁성 뿐이었다. 다이다이리(일어위키) - 헤이안 시대의 궁성으로, 일어 위키에서도 平安京の宮城이라고 분명하게 궁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헤이안쿄는 외성(外城)이 따로 없었다. 교토시/역사 항목 참조.


2.4. 베트남사[편집]


  • 중국의 도성제도를 본받아 건설한 도성 구조가 잘 남아있고[8] 베트남 최후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 도성의 경우에도 외성과 궁성만 존재할 뿐 따로 황성은 없었다. 궁성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후에왕궁이다. 한편 이전 왕조들의 수도였던 하노이 탕롱 성의 경우에는 중국과는 다른 방식의 도성 구조라서 1:1로 대응시켜 파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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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카이펑 시 용정공원에 북송시대 개봉성과 황궁의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에서도 황궁은 베이징 자금성 오문에 해당하는 영역만을 가리키고 있다[2] 한국과 중국의 궁궐 크기를 비교할 때 자주 논란이 되는게 "궁궐의 범위가 어디까지냐?"라며, 당나라식 도성제를 따라 지었다면 황성의 범위까지가 궁궐이라고 기술되어 있었지만 당나라식 도성제건 아니건 간에 궁궐은 궁성의 면적이며, 궁성 밖은 궁궐 밖이라는 뜻의 외조 관청과 삶의 공간인 궁궐과는 성격과 목적이 다른 제례 공간인 태묘, 사직 등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 황성이다. 당나라 태극궁, 자금성 면적도 궁성만을 포함한다. 황성 자체가 없이 궁성만으로 이루어진 당나라 대명궁은 말할 것도 없다.[3] 단 당나라 장안성은 황성 밖이 외성이지만, 베이징 성의 경우 황성과 별도로 내성이 존재[4] 중국의 지방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진주성, 안주성, 정주성 등 한국 지방도시 읍성에도 흔하게 볼수 있었으며 기존 성곽의 개축이 아닌 조선시대 초축성들도 마찬가지다[5] 일례로 자연과 산의 지형을 맞추어 지어서 황성이 크다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앞뒤가 뒤바뀐 서술이다. 발어참성이 그대로 황성이 되었기에 큰 것이다[6] 외침에 대한 방비는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주가 되었다.[7] 이 문서의 이전 버전에는 아예 "왜인지는 모르지만"이라며 뇌피셜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며 "아마 성리학에 입각한 제후를 자처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내성을 황성으로 칭하는 것을 의미하면 모를까, 성을 지을 때 아주 일반적인 건축 방식인 내성을 지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는 성리학 그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하다못해 중국은 물론 조선에도 조공 외교를 한 류큐 왕국의 수도성인 슈리성은 외성, 중성, 내성의 3중 구조인 반면, 외왕내제로 내부적으로는 철저하게 황제국의 제도를 따랐던 베트남의 후에 성은 외성과 궁성 뿐이며, 실체가 어땠든 천황이라고 자칭하고 장안성을 본따 건설한 일본의 헤이조쿄, 헤이안쿄 또한 외성과 궁성 뿐이었다. 심지어 헤이안쿄는 외성도 짓다가 말았다.[8] 단, 내부 건축물은 대다수가 파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