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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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黃秉冀|Hwang Byeong-gi


파일:황병기선생.jpg

본관
우주 황씨(紆州)
출생
1936년 5월 31일
경기도 경성부 가회정[1]
사망
2018년 1월 31일 (향년 81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가족
아버지 황태문, 어머니 이영애
아내 한말숙, 슬하 2남 2녀
학력
서울재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단국대학교 (음악학 / 명예박사)
종교
천주교(세례명: 프란치스코)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4. 앨범
5. 저서
6. 수상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황병기.jpg

대한민국가야금 연주자, 국악인. 창작 가야금 음악의 창시자.


2. 생애[편집]


1936년 5월 31일 경기도 경성부 가회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아버지 황태문(黃泰汶, 1904. 5. 6 ~ 1972. 12. 5)[2]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영애(李永愛, 1900. 10. 4 ~ ?)[3] 사이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 경기중학교 3학년생으로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7년 KBS 주최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1959년부터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 출강했고, 1962년에 작곡을 시작, 다음 해인 1963년 첫 창작곡인 《숲》을 내놓아 '창작 국악'의 지평을 열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출신 국악인이라는 특이한 이력인데, 본래 가야금은 취미에 가까웠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에는 제대로 된 국악과가 없을 정도로 국악계가 어려운 시절이라 처음부터 국악인으로 진로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악과 과장으로 그를 초빙하면서, 본격적으로 국악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통 악기를 다루지만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굉장히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였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첼로 활로 가야금을 연주하는 기법이다.(미궁 연주 영상)을 보면 첼로 활을 쓰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덕분에 원래 '튕기기'로 소리가 짧게 끝나는 기존의 가야금 음색이 아닌 바이올린처럼 길게 늘어나는 독특한 음색이 나올 수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전국의 수련회 교관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담력 테스트할 때 항상 애용하는 곡이자, 국내 게임인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의 메인 BGM으로 수록되면서부터 유명해진 《미궁》이 있다. 1975년에 발표한 곡인 《미궁》이 매우 파격적이어서 별별 루머가 나돌았고, 심지어는 작곡가인 황병기 본인이 《미궁》을 작곡한 직후 사망했다는 루머도 있었다.[4] 그래도 그의 음악은 음반을 통으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인 전영혁의 음악세계[5]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대한민국예술원의 부회장 직책을 맡았으며,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 교수로 재직하였다.

2017년 80세까지 연주 활동을 했다가(인터뷰), 2018년 1월 31일 오전 3시에 사망했다. 이때가 향년 81세이며 사인은 폐렴이다.(기사) 그가 별세한 날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그의 노래 '춘설'을 엔딩곡으로 띄우며 추모했다.#


3. 가족 관계[편집]


가족들의 이력도 화려하다. 부인은 5세 위의 한국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자 청주 한씨 한석명의 딸인 한말숙 선생인데, 두 사람은 서울대학교 동문이다. 그러나 나온 과는 달라서 황병기는 법학과를 나왔으며, 한말숙은 언어학과를 나왔다. 한편 장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실력 있는 수학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황준묵 고등과학원 수학부 석좌교수다. 차남은 물리학자 황원묵(黃源默)[6]이며, 역시 고등과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위 중 김용범 전 기재부 1차관이 있다.

우리 집사람하고 제가 결혼한 것이 1962년이었어요. 제가 27살 때죠. 그때 집사람도 데뷔해서 소설가로 이름을 날릴 때입니다. 저희가 서로 안 지는 오래됐어요. 집사람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다녔는데 국립국악원으로 가야금을 배우러 왔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둘이 같은 선생님께 가야금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만나서 사귀다가 "같이 살자" 그래서 결혼을 했어요. 집사람이 저보다 5살 연상이에요. 그래서 그 때는 좀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희 부모님들은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쉽게 결혼을 했죠. 제가 3대 독자인데 집사람은 이 집에 들어와서 아들 둘을 낳았어요. 큰아들은 수학자고 작은아들은 물리학자예요. 재작년에는 우리가 금혼식을 했죠. 둘이 가끔 싸울 때도 있지만 오래 살다 보니까 지금은 같이 늙어가고 있는 거예요. 예전에 주례 서는 사람들이 신랑 신부를 보고 "검은 머리 뿌리되도록 해로하라"는 말을 많이들 했는데 우리 부부야말로 이럭저럭 살다 보니까 해로가 됐지요. 그러다 보면 이제 죽을 날이 오겠지요. 그러면 죽으면 되겠지요.

○ 황병기 교수 인터뷰 중(출처)



4. 앨범[편집]


  • 황병기 제2 가야금 작품집
  • 황병기 가야금 창작곡집 (1987)
  • 침향무 (1978.03.27)
  • 미궁 (1984.03.10)
  • 춘설 (1993.04)
  • 우리 한마당 2집(국악(國樂) 제14집) (1994)[7]
  • 비단길 (2001.07.01)
  • 가야금(황병기 초기 연주집) (2001.07.04)
  • 마고 OST (2002.01.01)[8]
  • 박노해 노동의 새벽 20 주년 헌정음반 (2004.12.01)[9]
  •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Vol.5 - 달하 노피곰 (2007.06.11)
  • 가야금 산조 (2014.12.09)


5. 저서[편집]


  • 침향무 (1974.12.01)
  • 밤의 소리 (1990.08.01)
  • 영목·아이보개 (1993.08.01)
  • 깊은밤 그 가야금소리 (1994.10.01)
  • 춘설·달하노피곰 (1997.05.15)
  • 나는 나답게 산다 (1998.12.05)
  • 한국의 악기 다이어리 2002 (2001.10.25)
  • 비단길 (2002.05.30)
  • 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 (2008.10.10)
  • 오동 천년, 탄금 60년 (2009.02.20)
  • 전설 산운 (2009.08.19)
  • 시계탑 하마단 (2009.08.19)
  • 가야금 산조 (2010.05.20)
  •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논어 백 가락 (2013.10.25)
  • 살아보니 행복은 이렇습니다 (2019.04.10)


6. 수상[편집]




7. 여담[편집]


  • 가야금 제작 장인들 사이에서는 잘 만든 가야금을 시험해 본 다음에 '팔기에는 아깝다'라고 생각되면 곧바로 황병기 씨한테 기증했다고 한다.


  • 본인이 작곡한 창작음악 위주로 활동했지만 전통 국악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으며, 본인이 직접 만든 '황병기류 가야금산조'가 있다[10]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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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족보명(族譜名)은 황원택(黃元澤). 초대 전국황씨중앙종친회 회장을 역임했다.[3] 이병순(李炳純)의 딸이다. 다음은 출처 사진들이다. 파일:황병기 일가 족보 1.png파일:황병기 일가 족보 2.png[4] 실제로 너무 괴기스러워 공연장에서 그 음악을 듣던 여성들이 겁에 질려 우는 수준을 넘어 실신하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5] 1986년부터 2007년까지 방송한 KBS 2FM의 장수 프로그램.[6]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황병기 일가 족보 4.png[7] 1번 '가야금 산조' 참여.[8] 10번 '마고성 고석정' 참여.[9] 12번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Duet. 전인삼)' 참여.[10]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했을때 1시간 20분정도 걸리는 자비심 없는 산조이다. 보통 산조 전바탕의 경우 각 유파에 따라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가량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