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고증적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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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체적 내용
3. 양적 고증오류
3.1. 존재 주장
3.2. 점점 사라지는 영토
4. 질적 고증오류
4.1. 통치 제도
4.2. 시대와 맞지 않는 사회상 묘사
4.3. 신화에 가까운 인물들
4.4. 공식에서 찾을 수 없는 기록
5. 용어 문제
6. 모순에 빠진 내용
7. 연대 오류
8. 기타 오류


1. 개요[편집]


환단고기의 고증적 측면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문서.


2. 전체적 내용[편집]


아주 먼 옛날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있었고 이들이 아이사비(阿耳斯庀)에서 만나 천신의 가르침을 받고 결혼했는데 한민족이 바로 이들의 후손이다. 그리고 한민족은 기원전 7197년 혹은 기원전 6만 7079년에 세계 최초의 문명국가 환국(桓國)을 세웠고, 그 군주를 환인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환인은 모두 7명이 3301년 혹은 6만 3182년 동안 다스렸는데, 일반적으로 초대 환인은 안파견(安巴堅) 이라고 하나 환국 말기에 환웅에게 태백산을 점지해주는 존재도 안파견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고유명사는 아닌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거발환(居發桓)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이 나라의 중심지는 흑수와 백산이라고도 하고 천산이나 천해라고도 하는데 그 영역은 자그마치 남북이 5만 리에 동서가 2만 리였다. 환국은 비리국·양운국·구막한국·구다천국·일군국·우루국·객현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사납아국·선비이국·수밀이국의 12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원전 3898년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동방으로 가 배달(倍達)을 세웠는데, 도읍은 당시 태백산이라 불리었던 현재의 백두산의 신시(神市)이고 그 군주는 환웅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그 유명한 단군신화의 천강신화 그리고 웅녀 이야기의 주인공인 초대 환웅은 거발환(居發桓)이라고 하나, 이 또한 고유명사는 아닌 듯. 모두 18대 환웅이 1565년 동안 다스렸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 중국과의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환웅과 나란히 환국에서 갈라져 나온 반고가 돈황 인근 삼위산(三危山)에 자리를 잡았고, 5대 태우의 환웅의 아들인 복희가 지금의 중국으로 이주하여 토착민인 수인씨와 유소씨를 밀어내고 일대 세력을 이루었으며, 그 뒤에는 역시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온 소전씨의 아들 신농이 중국의 우두머리가 되어 공상(空桑)을 경계로 배달국과의 국경을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전씨의 다른 후손이 바로 헌원이다.

이러한 중국과 배달국의 갈등이 터져나온 것이 바로 14대 환웅인 자오지 환웅 시기다. 비교적 인지도가 높은 치우천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치우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자오지 환웅은 당시 기준으로 엄청나게 혁신적이었던 쇠(금속)으로 만든 갑옷과 무기를 병사들에게 장착시켰고,[1] 그 뒤 신농씨의 후손 유망을 때려잡고, 연전연승하면서 황제, 공손헌원을 공격했다 한다. 이로써 유망은 쫓아내고 헌원에게는 항복을 받았으며, 여기에 더해 황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전욱과 고신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중국으로 널리 영토를 개척한 결과 하북성과 산동성과 강소성과 하남성 지방을 전부 차지하고 도읍을 중국 땅으로 옮기기까지 했던 이 시절이 바로 배달국의 황금시대였다. 이것을 청구배달(靑丘倍達)이라고 한다.

그러다 이번에는 마지막 환웅과 웅씨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불함산 아래에서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왕검의 지휘 아래 천하가 평정되고 조선이 세워졌는데, 도읍은 만주의 아사달이고 그 군주는 단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모두 47명의 단군이 2095년 동안 다스렸으며 영토를 진한(辰韓)·마한(馬韓)·번한(番韓)으로 갈라서 진한은 단군의 직할령이 되고 한반도에 해당하는 마한에는 웅씨의 후손이, 중국 방면에 해당하는 번한에는 치우의 후손이 대대손손 다스리도록 했다.

이번에도 역시 중국이 문제라, 단군 왕검은 요(堯)와의 전쟁이 이어지자 순(舜)을 지원해 주어서 요를 굴복시키고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선의 치수 기술을 중국에 전수해주었다. 또한 순과 국경을 정해서 하북성을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고 강소성에는 자치정부를 두어서 순에게 감독을 맡겼는데, 왕검의 뒤를 이어 즉위한 부루는 순이 하북성을 정복하려 하다 화를 입기도 했다고 한다.

단군 부루의 뒤를 이은 3대 단군 가륵은 기존의 문자 대신 독자적으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는데 훗날 한글의 모태가 되었다. 흉노, 몽골, 선비 등 여러 북방민족들도 바로 이 즈음에 한민족으로부터 갈라져 나간 지파들이다. 기원전 1767년에 은나라하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는 단군이 슬쩍 군사를 출동시켜 중간에 공격하자 은나라의 탕왕(湯王)이 놀라서 얼른 군대를 물려 단군에게 사죄하기도 했고, 이에 단군이 하나라로 출동시켰던 군사를 빼려고 하는데 여기에 하나라가 이를 막자 단군은 거꾸로 은나라를 도와서 하나라를 멸망시켰다.

다시 인구가 1억 8천만 명을 찍는 등 한창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조선은, 21대 소태 단군에 들어서 개사원의 고등과 그 아들 색불루의 세력이 강성해져 이웃나라들을 침략하고 급기야 단군을 자칭하기에 이르자 스스로 단군위를 버리고 은거해버렸다고 한다. 이로써 22대 단군으로 즉위한 색불루는 백악산으로 천도하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는 등 국체 개조 사업에 들어갔으나, 변방에서 신독의 난이 일어나 영고탑으로 몽진하던 중 객사하였고, 그 아들 아홀이 단군위를 이어받아서 가까스로 백악산으로 환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부사정과 관계없이 조선은 그 뒤로도 산동과 하북을 차지하고, 은나라를 공격해 강소성을 점령하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를 평정하는 등 위엄을 떨쳤다.

그런데 즉위와 붕어가 전부인 37대 마물 단군부터 42대 을우지 단군까지 18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이를 기점으로 조선은 급속도로 국세가 기울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43대 물리 단군 재위 36년에 벌어진 우화충의 난인데, 우화충이라는 사냥꾼이 무리 수만 명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깨져나갔던 것이다. 반란군이 도성을 포위하자 단군은 배를 타고 송화강을 따라 몽진하던 중 객사하였고,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영웅으로 떠오른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44대 단군으로 추대되었다.

구물은 국호를 대부여로,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고 삼조선의 군권을 분할하였다. 이후 45대 여루 단군 시절 조선은 서쪽으로 연(燕)·제(齊)와 공방을 거듭하다가 결국 상곡을 국경으로 화친을 맺었다. 하지만 번조선왕이 연나라의 자객에게 살해되고 기후(箕詡)라는 사람이 46대 보을 단군의 허락을 받아 왕위에 오르면서 번조선은 기자조선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이런 와중에 기원전 296년 진조선에서 한개(韓介)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46대 보을 단군이 몽진했다가 환도한 직후 사망하였고, 이번에도 한개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영웅으로 떠오른 장군 고열가가 47대 단군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고열가는 나라의 국력이 쇠진하고 고구려 사람 해모수가 기자조선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우외환에 처하자, 기원전 238년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은거하는 것으로 조선을 해체시켰다. 이후 진조선은 오가(五加)가 함께 공화정치를 펴다가 6년만에 해모수에게 정권을 이양하여 북부여로 전환되었고, 한편 기자조선은 중국에서 망명해 온 위만이 기준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면서 위만조선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자연스럽게 북부여는 이렇게 생긴 위만조선과 거듭 갈등했지만,[2] 결국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가 뒤이어 북부여로 쳐들어오자 위만조선에 살던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3]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눈부신 활약으로 한나라를 몰아낸 뒤 4대 고우루 단군에게 당장 물러나라고 요구했고, 이러한 고두막한의 기세에 대응한 고우루 단군은 병사, 뒤이어 즉위한 해모수의 증손 해부루는 군대를 동원한 고두막한의 위협에 순순히 수도를 바치고 가섭원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졸본부여는 북부여, 가섭원부여는 동부여가 되었다. 이후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는 동부여로부터 도망쳐 온 해모수의 다른 증손자인 고주몽을 받아들여 사위로 삼고 왕국의 후계자로 지정했으니,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시작이다.

이후 환단고기에서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단일 기록인 데다 고구려왕을 열제(烈帝)로 호칭하거나, 을파소조의선인을 조직하였고 을밀연개소문이 조의선인 출신이거나, 고구려와 백제가 요서와 중국의 동부 해안을 돌아가며 장악 하는 정도인데, 이렇다 보니 심지어 백제와 신라에 대한 것도 별도의 체제 없이 고구려본기로 끌어다가 서술하고 있다. 그래도 역시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건 7세기 중국과의 대전쟁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1차 고구려-당 전쟁의 승리까지만 서술되어있다.[4]

그 뒤로 이어지는 대진국본기, 고려본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국제정세가 비교적 안정된 시대다 보니 그다지 중요한 기록은 없었다. 다만 특징적으로 일본에 대한 서술이 조금씩 기록되어있다. 고려본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궁예안승의 먼 후손이라고 전하고 있다.


3. 양적 고증오류[편집]



3.1. 존재 주장[편집]


사실 환국과 환인 이야기는 초장부터 환인을 신(神)이라고 칭하는 데에서 보이듯 신화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실제로도 이유립1976년까지만 해도 환국을 신화적인 유토피아로 묘사했지만, 환단고기를 출판하면서 이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개변한 듯 하다.

환단고기에서는 환국의 강역에 대해서 삼성기 상/하편과 태백일사 환국본기에 두 번이나 거듭해 동서 2만 리, 남북 5만 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기록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아서 머릿속에서 그 크기를 보정해 위와 같이 환국의 지도를 매우 거대하게 그리지만, 엄밀히 말해 위 지도는 크게 잘못되었다. 환국은 동서가 20,000리, 남북이 50,000리다. 가로축(위도선)보다 세로축(경도선)이 두 배 이상 길다. 따라서 정말로 환단고기 본문에 입각해 그대로 환국의 지도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은 지도가 나와야 한다.

파일:attachment/환국_1.jpg
지도 안에 전부 표시가 되지 않는다. 남북 50,000리를 현대의 미터법으로 환산해보면 20,000km(19636.36km)가 산출되는데, 애당초 1km의 정의가 극점에서 적도까지 자오선의 1만분의 1이다.[5] 이는 환국은 남극에서 북극까지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결론이 나온다.[6] 동서 20,000리라는 거리도 또한 러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라시아를 가로질러서 터키 앙카라까지의 직선 거리가 약 20,000리가 나온다.

파일:attachment/환국_2.jpg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보정하는 것처럼 동서 50,000리에 남북 20,000리로 거리 방향을 바꾸어 보면, 역시 표시가 다 안된다. 동서 50,000리에 남북 20,000리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고도 남는 거리다.

하지만 지도의 형태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데 고문서를 볼때 먼저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현재의 과학기술이나 지리도에 근거하여 보는 것 보다, 그 당시 세계지도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 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ngnidoMap.jpg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그림을 오면 오히려 셰계지도가 현재와는 달리 좌우가 좁고 상하가 길다. 이는 마치 중세 시대에 쓰인 책에서 천동설을 주장한다고 이를 위서라고 단정 할 수 없듯이, 세계지도에 대한 인식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여지는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이를 오류라고 하기 보다 근세에 쓰인 책은 아니라는 증거도 될 수 있다.

여기에 단위 환산의 문제를 제기해서 환단고기의 도량형이 오늘날보다 훨씬 작았으리라는 가정을 제기한다면 모르겠는데, 문제는 그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도 아닌 자그마치 기원전 7197년에 자그마치 수만 리에 달하는 거리를 과연 어떻게 측정할 수 있었을지를 먼저 의문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는 애당초 문자도 존재하지 않던 당시에 리(里)라는 단위를 어떻게 사용하고 그 정보를 후세에 전달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또 언어도 통일되지 않고 교통과 통신 수단도 거의 전무한 상황 속에서 수만 명의 인구를 통솔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더불어 환단고기에는 환인 7명이 3301년 혹은 6만 3182년을 이어서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 이유립이 추산하였던 구석기 후기와 구석기 전기의 기간이다. 학계에서도, 대중들 사이에서도 환국의 존속 기간은 석기시대에 대입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후자에 따르면 환인 한 명에 평균 9026년, 전자에 따르면 환인 한 명에 평균 472년을 다스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환단고기 신봉자들은 한 명의 환인이 하나의 왕조이지 단일인이 아니라고 역설하지만, 1000년을 갔던 왕조2200년을 갔던 나라는 알아도 3301년 이상을 갔다는 왕조는 전무후무하다.[7]

따라서 환국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윤기의 말처럼 절대로 과학적·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20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신화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애당초 절대적인 신화의 영역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고. 덧붙여서 환국을 이루고 있던 12국가와 영역이라는 것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영상이 나오기도 했다.#

1
비리국(卑離國)
진서 사이전
숙신의 서북으로 말을 타고 200일을 가면 있다. 2만 호.
2
양운국(養雲國)
진서 사이전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50일을 가면 있다. 2만 호.
3
구막한국(寇莫汗國)
진서 사이전
양운국에서 말을 타고 100일을 가면 있다. 5만여 호.
4
구다천국(句茶川國)
삼국사기
대무신왕 5년에 개마국이 정복되자 구다국(句茶國)이 항복.
독로국(瀆盧國)
삼국지 동이전
변진 12국의 하나로 지금의 부산 동래이다.
5
일군국(一群國)
진서 사이전
구막한국에서 150일을 가면 있다. 여기까지 숙신에서 5만여 리.
6
우루국(虞婁國)
신당서 북적전
말갈의 불열, 철리, 월희부와 나란히 열거된다.
필나국(畢那國)

우루국을 환국의 동쪽 끝(畢)에 있는 나라(那)로 보았던 듯하나 불분명.
7
객현한국(客賢汗國)
광개토왕릉비문
수묘인연호로 객현한(客賢韓)이 등장한다.
8
구모액국(句牟額國)
광개토왕릉비문
수묘인연호로 구모객두(勾牟客頭)가 등장한다.
9
매구여국(賣句餘國)
광개토왕릉비문
수묘인연호로 매구여민(賣句余民)이 등장한다.
직구다국(稷臼多國)

위 구다국(句茶國)의 파생형으로 보이나 불분명.
10
사납아국(斯納阿國)

남시베리아의 사얀 산맥에서 따온 것.
11
선비국(鮮裨國)
삼국지 선비전
선비족에서 따온 것이다.
시위국(豕韋國)
북사 사이전
실위에서 따온 것이다.
통고사국(通古斯國)
혁명군마전졸
퉁구스족에서 따온 것이다.
12
수밀이국(須密爾國)

수메르에서 따온 것.


3.2. 점점 사라지는 영토[편집]


[8]
환단고기에서 묘사하는 한민족의 강역이 위와 같이 매우 크지는 않다. 치우가 정복한 영토는 고작해야 탁록과 회하를 넘지 않았으며, 고조선의 강역이라는 것도 만주요서 지방에 그치고, 진출 범위를 멀리 잡아도 전기에는 티베트까지 넘나들다가 나중에는 항산(恒山)까지는 가지 못한다.

우선 사실은 환국에서 배달국으로 넘어가면서 영토가 어느정도 사라진 것.[9] 그래도 환단고기에 보면 "이때 족속의 호칭이 한결같지 않고 풍속이 점차 달라졌다." 하는 내용이 있기는 한데, 이제 막 분화되기 시작한 민족들의 반발에 자비롭게 독립을 인정해주고 땅을 떼어주다 보니 점차 줄어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심지어 불가피하게 영토를 떼주더라도 최소한 봉건제처럼의 주종관계를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나마 가장 설득력 있게 구성할 수 있는 스토리는 전세계적으로 환국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 환국이 해체되거나 환국이 가지고 있던 초고대문명스러운 교통·통신망이 한순간 증발하는 등 어떻게든 국가 막장 테크를 탔다는 설정이다.


기원전 30세기 무렵 배달국의 영토
환국의 뒤를 이어 즉위한 배달국의 초기 영역이 정확하게 묘사된 바는 없지만, 그 중심지가 태백산 신시이고 이후 중국의 비옥한 땅을 탐내어 이주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만주에서 요서를 넘지 않는 선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후 5대 태우의 환웅에 이르러서는 막내 왕자 복희가, 8대 안부련 환웅에 이르러서는 소호와 소전이 이주해가는 등 지속적인 확장으로 배달국의 강역은 급속도로 확장되었고, 급기야 10대 갈고 환웅은 중원의 패권을 잡은 소전의 아들 신농과 강역을 정해 공상(空桑) 이동을 배달국의 땅으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27세기 무렵 배달국의 영토
하지만 이로부터 300년 뒤에 치우가 정복했다는 영토를 보면 이로부터 이미 영토를 재정복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치우가 차지한 영토는 기(冀)·연(兗)·회(淮)·대(岱)이다. 특히 회와 대가 새로 정복한 땅으로 여섯 번이나 강조되는데, 이곳은 이미 300년 전에 배달국에 귀속된 공상 이동의 바로 그 땅이다. 또한 탁록 서쪽으로 요서 지방까지는 창힐의 영역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배달국이 창힐에게 자비롭게 독립을 인정해주었다는 소리가 된다.


기원전 22세기 무렵 단군조선의 영토
이어지는 단군시대에도 계속된다. 초대 단군인 왕검의 외할아버지 웅씨왕(熊氏王)이 전사하자 왕검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서 온 한민족을 통일했다고 하니 배달국 말기에 모종의 난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다른 기록들에서는 백성들이 알아서 복종하며 임금으로 추대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에 단군 왕검은 자신이 통일한 땅을 셋으로 갈라서 진한·마한·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하는데, 단군 왕검 자신은 진한을 다스리니 수도는 송화강 유역의 아사달이고, 마한에는 웅씨왕의 일족 웅백다를 책봉하니 수도는 대동강 유역의 달지국[10]이고, 번한에는 치우의 후손 치두남을 책봉하니 수도는 요서의 험독[11] 이었다고 한다.

또한 앞에서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했던 회·대 지방은 또 사라지며, 단군 왕검 재위 67년에 다시 제후들을 평정하고 일종의 자치정부라 할 수 있는 분조(分朝)를 낭야성에 두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도 단군세기에는 순임금에게 분조를 감독시켰다고 하고 태백일사에는 번한이 분조의 정무를 겸했다고 해서 환단고기 안에서도 말이 상충된다. 그래도 절충하자면 번한이 맡아 다스리지만 순의 조언이나 의견을 수렴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위에서 치우가 차지했던 하남성 공상, 하북성 탁록 일대는 어느새 증발해버려서 더 이상 조선의 영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12]


기원전 13세기 무렵 단군조선의 영토
이로부터 다시 천여 년이 지나 기원전 13세기에 21대 소태 단군을 몰아내고 단군이 된 색불루가 삼한을 삼조선으로 나누고 은나라를 공격해 회·대 지방을 얻었다고 한다. 거꾸로 말해 이 즈음이면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 왕검이 평정했던 회·대 지방이 어느새 다시 증발은나라 땅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때 번조선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남국(藍國)이 크게 흥기해 엄독홀로 이주하고 은나라와 국경을 접했는데, 바로 그 남국의 왕 금달이 또다시 은나라를 갈구어서 회·대 지방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작 44년 만에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왕검이 평정하고, 색불루가 뜯어냈던 회·대 지방이 어느새 다시 증발은나라 땅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기원전 8세기 무렵 단군조선의 영토
그래도 500년 정도 이대로 영토가 유지되어오는 듯 보이다가, 기원전 8세기가 되면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고조선의 영토가 축소된다.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왕검이 평정하고, 색불루가 뜯어내고, 금달이 정복했던 회·대 지방은 더 이상 언급이 없다. 대신 이제는 그 자리에 연나라제나라가 등장해서 조선의 세력과 갈등한다. 조선은 이들과 상곡·조양을 국경으로 삼고 나중에는 만·번한까지 밀렸다고 하지만, 번한이 번조선의 수도 험독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건 밀린 것도 아니고 상곡·조양이나 만·번한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춘추시대 당시의 고조선은 이제 요서에서 벗어나 요하 일대의 부족국가들을 정복활동을 통해 차례차례 복속시켜 나가고, 연나라, 고죽국, 동호 등과 티격태격하는 수준이었고, 전국시대에는 요녕성 전역과 길림성,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영역을 통치하에 두며 만주와 한반도에서 감히 넘볼수있는 국가가 없을 만큼 패권을 장악했지만 그 전성기에도 연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하고 티격태격했으며 나중에는 연나라에게 일격을 당해 본거지를 상실했다.

이에 이어 환단고기에서는 번조선이라는 것이 등장한다.[13] 맞는 건 번조선이 하고, 때리는 건 단군조선이 하고 이밖에도 때때로 가끔 제나라(齊)와 싸운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진짜 강국이었던 진(晉), 진(秦), 초(楚)와는 아예 충돌한 기록 자체가 없다. 여기까지 영토가 뻗어나간 적이 없는 것.

따라서 의외로 환단고기의 단군조선은 생각보다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며, 국력은 영토와 별개로 전국칠웅과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14]

정리하자면 단군시대까지 환단고기의 영토 기록은 아래와 같다.

  • 갈고 환웅이 하남성(兗), 하북성(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확보(기원전 30세기)했지만 어느 순간 소실.
  • 치우 천왕이 하남성(兗), 하북성(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기원전 26세기)했지만 어느 순간 소실.
  • 단군 왕검이 하북성(幽),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확보(기원전 2267)했지만 어느 순간 소실.
  • 단군 색불루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기원전 1285)했지만 어느 순간 소실.
  • 남국왕 금달이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기원전 1236)했지만 어느 순간 소실.
※ 요서 이동의 남은 영토는 내휴 8년(기원전 902)에서 사벌 66년(기원전 707)간에 마저 증발하고 연나라제나라가 들어선다.

이와 더불어,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단군조선을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조선이 일개 읍락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는 단군조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읍락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단군조선은 그러한 수많은 읍락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읍락국가에 지나지 않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단군조선을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단군조선의 뒤에 등장한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등 한국의 국가들도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읍락국가군으로 구성된 국제 사회의 대표적 읍락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상고사』의 신채호 등 후대의 민족주의 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년 전의 단군조선에 투사하여 단군조선을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로 묘사했던 것이다.[15]


4. 질적 고증오류[편집]



4.1. 통치 제도[편집]


사실 조금이라도 생산수준과 정치체제의 발전 정도를 관련지어 사고할 수 있다면, 위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는 기원전 수천년 즈음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런 광대한 영토를 엄밀한 역사적 개념의 '국가'로 다스리는 건 어디의 누구라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은·주라고 하는 중국사의 첫머리에 위치하는 나라들 또한 말이 '나라'지 그 크기는 고작해야 오늘날의 읍 단위 도시 하나와 그를 둘러싼 공동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16] 중국만이 아니라 고대 수메르, 이집트, 그리스, 인더스 등도 역시 수없이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난립한 모습이었고, 한국사에서도 수천 호 단위의 78개 소국들이 집합된 삼한이 있다가 단계적으로 통합되어갔다. 이집트가 그나마 가장 빨랐다. 즉 이러한 과정은 정치사적인 발전 단계에서 보편적이고도 당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환단고기에 묘사되는 국가체제는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있다. 환단고기를 해석해보면 조선은 만주에서 하북성 및 산동성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봉건제와 군현제를 병행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 보이는 봉건제라는 것 자체도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관료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직위를 세습하고 일정한 외교, 인사, 군사권을 행사했지만 기본적으로 분급된 영역을 단군을 대신해 '관리'하는 것이었으며, 군사권이 단군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그 처신에 따라서 단군으로부터 상이나 벌을 받았고, 나아가 단군이 일방적으로 책봉하거나 폐위시킬 수도 있었다.

통치자보다 관리자에 가까움
웅녀군(熊女君)이 천왕의 신임을 얻어 세습하여 비서갑(斐西岬)의 왕검(王儉)이 되었다. 왕검은 속언에서 대감(大監)인데, 영토를 관리하고 지키면서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돕는다.
웅씨왕이 그의 신성함을 듣고는 뽑아 비왕(裨王)으로 삼았으니 대읍(大邑)의 국사를 섭행하였다.
정사는 천왕으로부터 말미암고 삼한이 모두 하나되어 명령을 따랐다.
군사권이 단군에 종속
개사원욕살(蓋斯原褥薩)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로 귀방(鬼方)을 습격하였다.
웅갈손(熊乫孫)을 보내 남국군(藍國君)과 더불어 남정(南征)한 병력이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폈다.
화친하고 전쟁할 권리가 일존(一尊)에게만 있지 않게 되었다.[17]
평가와 상벌의 대상
제한(諸汗)들의 선악을 살펴서 상벌에 지극히 신중하였다.
비를 세워 열성군한(列聖群汗)들의 공로를 새겼다.
열양욕살(列陽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게 하였다.
일방적으로 책봉 또는 폐위 가능
군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고 다 쫓아버린 뒤 그 군(君)으로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책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열양욕살(列陽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게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고 그 땅에 봉하였다.
우사(雨師) 소정(小丁)을 내보내 번한으로 보임시켰다.
서우여(徐于餘)에게 정무를 위임하고자 하여, 살수(薩水) 둘레 백 리에 그를 책봉하고 …… 서우여(徐于餘)를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명하여 여원흥(黎元興)을 마한(馬韓)으로 삼아 막조선(莫朝鮮)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徐于餘)를 번한(番韓)으로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리게 하였다.

기원전 22세기
처음에 우순(虞舜)이 유(幽)·영(營) 두 주(州)를 남국(藍國)의 이웃에 설치하였다.
기원전 2267
국경을 헤아려 정하니 유(幽)·영(營) 두 주(州)가 우리에게 속했다.
기원전 2173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이 반란하였다.
기원전 1767
주현(州縣)을 정하여 세우고 직제를 나누었다.
기원전 1180
뭇 주군(州郡)을 순시하였다.
기원전 426
서북방 36군(郡)이 무너졌다.
기원전 409
감찰관(監察官)을 보내어 주군(州郡)의 이민(吏民)을 규찰하였다.
기원전 380
연나라 사람들이 변군(邊郡)을 침탈하였다.
기원전 290
주군(州郡)에 명하여 현량(賢良)을 천거시켰다.

간접통치의 봉건제가 이러하니, 직접통치의 군현제를 실시했다는 기록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단군조선의 행정 구획으로는 가장 먼저 주(州)가 확인되는데, 중국의 우공구주(禹貢九州)에 비추어보면 단군조선에도 주가 존재했다는 게 납득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중국의 '구주'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구획된 각이한 아홉 개의 주가 있었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많은(九) 고을(州)을 뜻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광역적인 실체가 부여되고, 이에 기반해 한무제가 전국을 13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주가 실제적인 행정구획이 되었던 것이다.[18]

즉 주(州)라는 것은 전한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광역적 행정단위의 의미로 정착되었으므로 단군조선 시기에 벌써부터 행정구획으로서의 주가 존재했다거나, 순임금에 그러한 행정단위로서의 주가 설치되었다는 내용이 실린 환단고기의 기록은 자연스럽게 역사상의 실제와 어긋난다.

또 기원전 1767년에는 단군흘달이 주(州)만이 아니라 현(縣)도 설치했다고 나오는데, 이러한 현이라는 제도 또한 중국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충분히 그 기원이 추적 가능하다. 현이라는 것은 춘추시대에 처음 등장하는데 기원전 6세기에 진(晉)에서 현대부(縣大夫), 초(楚)에서 현공(縣公)·현윤(縣尹)을 통해 멸망시킨 읍을 변경을 방위하는 군사 거점으로서 다스렸던 것이 그 시초가 된다.[19] 물론 이 시기의 현은 아직 봉건제의 변형으로서 후대와 같이 군주의 직접지배라는 성격을 띤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제후가 측근에게 준 봉읍이나 마찬가지로 사유적인 영지였다. 즉 종래의 간접적인 봉건지배체제에서 직접적인 군현지배체제로 전환되는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단고기는 이것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수준이다. 주나라 여왕(厲王)이 산림천택을 국유화하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고, 초나라 영왕이 진(陳), 채(蔡)를 현으로 삼았다가 반란이 일어나 패가망신한 것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큰 영토를 단번에 현으로 만들었다가는 나라가 수십 번은 더 뒤집혀도 모자랄 상황이다. 때문에 단순한 군사거점을 넘어서는 본격적인 군현제의 실시를 위해서는 생산력의 획기적 개선, 중앙의 절대적인 힘의 우위, 지방의 씨족적 공동체 질서 와해, 군주권을 보좌하는 측근 집단의 출현 등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환단고기 어디에서도 그런 거대한 변화는 묘사되지 않는다.[20]


4.2. 시대와 맞지 않는 사회상 묘사[편집]


각 시대의 사회 상태는 우리 대에서 각 분야의 자료에 의해서 항상 그 개략적인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아무 책에서 그 시대 상황을 말한 것이 사리에 있어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라면 바로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량치차오(梁啓超), 『중국역사연구법』

이와 같은 제도적인 측면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 바로 당대의 사회구조, 즉 통치와 생활의 중심이었던 각 읍락 내부의 사회적 모습이다. 물론 단군시대 당시의 사회적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문헌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지만, 대신 환단고기에서 상대적으로 봉건세력의 활동이 제약되고 군현제가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기술한 기원전 8~7세기인 30세 단군나휴(기원전 909~기원전 875)부터 35세 단군사벌(기원전 772~기원전 705)까지의 기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이 시기는 단군색불루가 조선의 제도를 정비한 이래 줄곧 태평성대가 이어진 기간이었다. 중국의 주나라·초나라와 북방의 흉노족·선비족이 모두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뒷산에는 봉황, 앞뜰에는 기린이 뛰노는 가운데 백성들은 도리가를 지어 부르며 단군조선을 찬양했다 한다. 다만 단군사벌의 말년에 들어 일본으로 원정군이 출정하고 중국의 연나라 및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등 조금씩 갈등이 시작되었다. 더욱이 이 뒤로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 4세기 전반까지는 근 200년간의 암흑기가 펼쳐진다. 그 뒤로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멸망한다.

당연히 실제 고고학적인 연구결과와는 배치되는데 실제로는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하여 중심지를 요서에서 요하 일대로 이동한 뒤로는 랴오닝 성 남반부와 지린 성 서부, 평안도 일대에 산재해있던 소규모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킨 뒤에 기원전 4세기 말까지 패권을 장악하는것으로 나오기때문이다. 즉, 고조선이 한창 성장하던 전성기였다는 얘기이다. 비록 완전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수준은 아니지만 전국시대 당시에 '전국7웅' 으로 손꼽히던 연나라를 완전히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어도 연역왕이 왕을 칭하자 같이 왕을 칭하거나 연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울수있던것은 이러한 국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것이었다.]의 청동기시대 사회구조를 현재까지 축적된 고고학적 정황을 통해 추적하고 환단고기의 내용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21]


파일:attachment/환단고기/BC8-7.jpg

위 지도에 표시된 한국 관련 청동기문화권(1~11)에서 기원전 8세기에 군장사회 단계에 도달한 것은 가장 서쪽에 있는 십이대영자 문화(1)밖에 없었다.[22] 십이대영자의 대형 석곽묘군은 주위의 다른 중소형 고분들과 별도로 대릉하 근처 언덕 위에 독립적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청동검·청동거울·청동도끼 및 각종 위세품이 다량 부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주위의 다른 중소형 고분들이 피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이 거의 부장되어 있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단수로 소량 부장된 것과 대조적이다. 따라서 기원전 8세기에 십이대영자 문화는 전문적인 수공업과 사회적 위계화가 진행된 군장사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들은 여전히 부족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타 지역에서 청동기물의 발견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정되고, 그러한 청동기물이 발견된 고분이 입지상이나 크기상으로 다른 고분들과 구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서단산 문화(6) 등에서 토기 및 석제 부장품의 다양화를 통해 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성이 심화되어가는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요동과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거대 지석묘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의 재분배와 집단의 공동 의식을 주재하는 지도자로서 발전된 부족장의 면모 정도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십이대영자 문화(1)와 여타 지역들 사이의 사회 발전 격차는 기원전 6세기 중반에 대릉하 유역의 십이대영자 문화에서 일군의 집단이 요하를 건너 심양에 정가와자 유형을 형성하면서부터 비로소 좁혀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만주의 서단산 문화는 취락의 숫자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지만 여전히 청동기물의 독점적 소유 등은 보이지 않다가 기원전 5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양한 청동기물의 소유 차등,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거주공간 분리 따위가 일어나게 된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서는 금강 유역에 간석기, 쌀농사, 환호취락, 송국리형 주거, 송국리형 토기로 특징되는 송국리 유형이 발전하였지만 기물이나 공간이 독점화된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고,[23] 기원전 4~3세기 충청남도 일대의 남성리 유형이 정가와자 유형의 영향하에 군장사회로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서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환단고기의 내용과 심하게 배치된다. 군현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는 기원전 17세기는 고사하고, 그로부터 천 년 가까이 지난 기원전 7세기에조차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는 균질적인 영토라던가 통일적 집권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환단고기에서 당시 단군조선의 중심지라 주장하는 송화강 유역의 길림-하얼빈-영고탑 일대[24]가 그 부속국인 번한이 위치하고 있는 요서보다도, 아니 만주 일대에서 가장 정치적 경제적 통합이 미진한 후진지역이었다.

기원전 38세기
네 집이 정(井)을 함께하고, 20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
본래 신시의 구정균전(邱井均田)의 유법(遺法)이었다.
기원전 2240
매 봄과 가을마다 국내(國中)를 순시하며 예로써 하늘에 제사지냈다.
기원전 2231
구정(邱井)을 긋고 전결(田結)을 삼아 백성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했다.
기원전 2175
명하여 차등 있게 조세(租稅)를 감면하였다.
기원전 1994
2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였다.
기원전 1993
농지(田)를 나누어 땅을 주었다.
기원전 1990
단군이 미복하고 국경(國境)을 나가 하나라의 정세를 관찰하고 돌아왔다.
기원전 1833
단군이 국내(國中)를 순시하다 요하(遼河)의 좌안에 다다라서는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웠다.
기원전 1662
8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도록 제도를 고쳤다.
기원전 1501
단군이 오가(五加)와 함께 국내(國中)를 순력하다 개사성(蓋斯城)의 경계에 다다랐다.
기원전 1286
단군이 국내(國中)를 순수하여 남으로 해성(海城)에 다다랐다.
더욱이 이러한 사회적 여건 위에서는 '나라'라는 개념 자체도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단적으로 춘추시대에는 나라의 중심에서 제후가 거주하는 중심적 읍을 가리켜 국(國)이라 불렀고, 교(郊) 밖으로 이러한 국을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원야를 가리켜 야(野)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원야의 여기저기에 점점이 존재하는 소읍락이 비(鄙)이며,[25] 이밖에도 읍락의 성격이 국에 가까운 도(都)가 공족과 귀족의 채읍으로 존재하면서 주변의 비읍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 안에 거주하는 지배집단은 국인(國人), 성 밖에 거주하는 피지배집단은 야인(野人) 또는 비인(鄙人)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26]

따라서 초기에 국(國)이라는 개념은 중층화된 읍락들의 정점에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읍락을 가리킬 뿐, 일정한 선으로 존재하는 국경의 안이라던가 하다못해 지배력이 미치는 영역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조차도 아니었다. 이는 생산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읍락의 외연에 존재하는 농지(野)와 농지(野) 사이에 광대한 규모의 미개간지, 일종의 공백지대가 존재하였고 이 때문에 읍락국가는 아직 영역국가로 발전할 수도, 발전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일국의 속읍이 타국을 초월하여 존재할 정도로 이 시기 국경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았고 오직 속읍의 영유권만 확보할 뿐이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이러한 초기 국가의 사회상을 무시하고 '국(國)'이라는 글자를 명백하게 지배력이 미치는 일정한 경역을 가리켜 사용했다. 더군다나 토지세(田結·租稅)를 걷는다거나 백성들에게 농지를 분급했다는 데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노릇이다. 토지에 세금을 물렸다는 것은 노역에 의해 공동경작하는 씨족공동체가 해체되어 사적 토지점유의 불균등이 발생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7]


4.3. 신화에 가까운 인물들[편집]


국가의 형성과 탄생이라는 측면에서도 환단고기에 실린 내용들 중에 환단고기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환국과 배달과 조선 모두 환인, 환웅, 단군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셨다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의 역사 이해는 종교적 영웅주의가 대단히 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환국이 성립되었다는 기원전 72세기는 초기 농경 사회가 시작될 즈음이었다.[28]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93-75세기에는 요르단 강에서 야생 밀과 보리가, 기원전 80-45세기에는 장강에서 야생 쌀이, 기원전 65-55세기에는 황하에서 야생 기장이 곡물로 개량되었다. 그런즉 이제 사람들이 초보적인 정착 생활을 시작하던 시점에 환단고기는 성인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절로 모여서 자그마치 한 대륙을 넘어서는 규모의 제국이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29]

그리고 환국이 수메르부터 바이칼, 몽골, 중국, 만주, 일본을 모두 지배했다면 관련 유적이나 유물이 나와야 하지만 확인 할 수 없다.[30] 환단고기 신봉자들은 중국과 일본이 감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나, 중국과 일본 외에 환국의 본고장인 시베리아 에서도 유물은 확인할 수 없다.

더불어 환국의 중심지로 지목되는 시베리아 남부 바이칼 호 일대는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농경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기원전 120세기에 빙하기가 끝나고서도 한동안 빙하기의 연장선상에 있던 이 지역은 기원전 60세기가 되어 온난습윤한 아틀란틱기가 도래함에 따라 기후가 호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마저도 여타 지역들에 비해서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고 이는 대체로 농경보다는 삼림자원의 증대라는 측면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되어서도 중석기 시대의 수렵·채집 경제가 지속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정기적인 수입과 중장기적 저장성 그리고 무엇보다 순환적인 생산력 증대를 보장하는 농경과 목축으로 부(富)의 등장과 계층의 분화가 일어날 일은 없었다.

이처럼 온갖 문제점을 안고 있는 환단고기에 비해 고고학의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둔 현대 역사학이 제시하는 국가의 형성 과정은 훨씬 더 설득력 있다. 수많은 논의가 있지만 이를 개략적으로 정리하면 신석기 시대에 빙하기가 끝나고 정주생활이 시작되면서 여러 가족이 한 지역에 모여서 마을 단위로 응집되었고, 이후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한정된 자원의 독점을 바탕으로 위계질서가 고착화되어 국가 단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청동기와 같은 금속 기술의 출현은 채굴, 정련, 조형, 주조, 보수 등 전문적인 분업체계를 발생시켰고 자원의 독점과 맞물려 자원 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상업의 등장, 전쟁의 격화, 생산의 증대, 그리고 부가적으로 환경의 악화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마침내 최초의 계급적 고대국가가 배태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읍락'을 넘어서서 '국가'가 탄생했다는 관념은 바로 이러한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진화 과정을 무시하고 반대로 환국에서 배달국으로, 배달국에서 고조선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영토가 축소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도리어 극단적인 역사관이 나온다. 게다가 군주들의 수명도 환웅들은 기본이 100세이고, 최장기록은 자오지환웅으로 무려 151세에 달해 재위기간만 109년이었다. 아래 통계를 참고.

왕조
재위기간
수명
출전
총계
평균
최장
최단
평균
최장
최단
환인
1~7
63182
9026





환단고기
3301
472





환웅
1~18
1565
87
109
48
118
151
82
단군
1~47
2096
45
93
8



1
93
93
93
93
130
130
130
마한
1~34
2028
60
96
1



번한
2~71
1855
27
73
1



북부여
1~4
153
38
49
25



동부여
1~3
108
36
41
28



졸본부여
1~2
51
26
49
2



고구려
1~28
708
25
93
4
55
118
±22
고자묘지명
삼국사기
11~28
441
25
78
7
50
98
±22

 
환단고기 단군 재위년(연도)
집계
90
왕검(93)












1
80
솔나(88)












1
70
아홀(76)












1
60
흘달(61)
고불(60)
여을(68)
추로(65)
사벌(68)








5
50
부루(58)
한율(54)
노을(59)
도해(57)
아한(52)
대음(51)
위나(58)
구모소(55)
소태(52)
매륵(58)
마물(56)
여루(55)
고열가(58)
13
40
가륵(45)
동엄(49)
고홀(43)
색불루(48)
다물(45)
보을(46)







6
30
오사구(38)
달문(36)
아술(35)
마휴(34)
나휴(35)
추밀(30)
두홀(36)
물리(36)





8
20
두밀(26)
해모(28)
등올(25)
감물(24)
오루문(23)
음차(20)
구물(29)






7
10
구을(16)
연나(11)
달음(18)
을우지(10)









4
00
우서한(8)












1

 
삼국사기 고구려왕 재위년(연도)
집계
90
태조대왕(93)








1
80









0
70
장수왕(78)








1
60









0
50









0
40
고국원왕(40)








1
30
유리명왕(36)
산상왕(30)
미천왕(31)
평원왕(31)





4
20
대무신왕(26)
동천왕(21)
중천왕(22)
서천왕(22)
광개토왕(22)
문자명왕(27)
영양왕(28)
영류왕(24)
보장왕(26)
9
10
동명성왕(18)
차대왕(19)
신대왕(14)
고국천왕(18)
소수림왕(13)
안장왕(12)
안원왕(14)
양원왕(14)

8
00
민중왕(4)
모본왕(5)
봉상왕(8)
고국양왕(7)





4


4.4. 공식에서 찾을 수 없는 기록[편집]


만약 환단고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오지환웅(치우천왕)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삼국사기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같은 국가 공식 기록에 한 번이라도 언급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 흔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민담에서도 치우천왕이나 그에 대한 내용은 도무지 찾아볼수가 없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한국 민간 전설에서는 고려의 천민이 중국으로 건너가 명나라 개국황제인 주원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주장대로라면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정복자라는 자오지환웅(치우천왕)에 대한 내용이 왜 국가 공식 기록이나 민간의 민담에서조차 전혀 그 흔적이 없는 것은 이것도 의문이다. 이는 치우천왕이란 인물 자체가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아주 짧은 기간 안에 누군가가 지어낸 가공인물이라는 설이 대중들 사이에선 지배적이다.


5. 용어 문제[편집]


일단 수백 년 내려왔다는 역사서에 근대의 한자가 있다.[31] 단적으로 일본에서 서구의 언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세계(world), 인류(human), 국가(nation), 권리(right), 산업(industry), 공화(republica), 유신(reformation), 문명(civilization), 개화(civilize), 문화(culture), 개체(individual), 자유(liberty), 평등(equality), 평화(peace)와 같은 것들이 그대로 실렸다. 유신과 같은 한잣말은 중국 고전에서 사용한 말이고 한자는 자체로 글자마다 의미가 있으므로 이러한 조어들이 전근대에도 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이러한 단어들이 굉장히 근대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단어들이 동시에 하나의 문헌에 다발적으로 출현하였다 함은 내용상의 문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 구체적인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국가(nation)
국가에 큰일이나 재이가 있으면 늘 여기 기도하니 민지(民志)가 하나로 정해졌다.
국가가 유사시에는 몸을 버려 의를 보전하며
장차 국가에 이롭지 않으리라
그 저서 단군세기는 시원국가(原始國家)의 체통(體統)을 밝혔다.
국가가 이미 여러 기씨들을 주살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기로 하였다.

  • 전근대의 '국가'는 하나의 군주를 정점으로 공유되는 수직적인 공동체로서, 오늘날과 같이 사회 각 개인이 상호 교류를 통해 내적으로 투영하는 등질적 공동체와는 분명히 성격이 달랐다.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국가'와 '민족'이 서구에서 들어온 nation의 번역어로 채택됨에 따라 비로소 국가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32] 이 때문에 전근대의 국가란 군주의 소유하에 있는 실재적·비실재적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각 개인에게 1대 1로 투영되는 충성의 대상이나 주체성 및 객체성을 가진 무언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에는 근대적 국가관이 반영되었다.

권리(right)
화친하고 전쟁하는 권한(權)이 일존(一尊)에게만 있지 않게 되었다.
남녀의 권리(權)가 평등하고 노소의 역할을 나누며
의식을 고르게 함에 또한 권리를 평등히 하며
각기 직권이 있으니 서로 침범하여 넘지 말라.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聖朝)에게 돌아왔다.

  • 본래 '권(權)'이라는 글자는 저울을 뜻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통치자가 담지하는 기준이나 판단의 의미로 확장된 말이었다. 즉 본래 이것이 뜻하는 말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right)가 아니라 기준적인 판단을 가리키는 권력(power)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전통 사회에서 익히 사용되었던 권도(權道)라는 단어는 상황에 맞추어서 행동을 판단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이 지금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권리'가 서구에서 들어온 right의 번역어로 채택되면서부터의 일이다.

공화(republica)
5가가 비로소 공화의 정치를 거두었다.

  • 본래 '공화'라는 말은 기원전 9세기에 주나라에서 여왕(厲王)이 쫓겨나고 귀족 공백화(共伯和)[33]가 왕 없이 정무를 맡아 본 것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공화'가 본격적으로 왕 없는 공동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어로 쓰이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이것이 서구에서 들어온 res-publica의 번역어로 채택되면서부터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문자 그대로 '함께 화합한다'는 의미로 쓰였다.[34]

문명(civilization)
개화(civilize)
문화(culture)
물길을 준설하고 농잠을 권장하며 집을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여
문명으로 다스리고 개화하여 평등하니
환도 문명의 성대함이 나라 밖에 소문났다.
세계 문명에서 우리가 가장 오래되었다.

  • 본래 '문명', '개화', '문화'라는 말은 정신적인 맥락에서 성현이나 군주의 가르침을 밝혀서 백성들이 바르게 사는 상태로 이끈다는 교화(敎化)의 뜻이었다. 이것이 정신적이고 사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을 포괄하는 인간의 성취나 생활 양식 전반을 가리키는 단어로 확장되는 것은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문명'과 '개화'가 서구에서 들어온 civilization의 번역어로, '문화'가 서구에서 들어온 culture의 번역어로 각각 채택되면서부터의 일이다.

개체(individual)
비고 성김은 한 몸이고 개체(個)와 전체는 하나 같으며

  • 본래 '개(個)'는 오늘날과 같이 전체와 반대되는 각각의 특수성을 가진 존재들을 가리키는 의미의 말이 아니라 단지 수를 셀 때에 붙이는 수량사로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에 들어 서구의 언어가 들어오면서 중국어로 먼저 individual을 일개(一個)라는 의미로 번역했고, 여기에서 비롯되어 일본에서는 individual에 상응하는 것으로 인민각개(人民各個)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그러다 '개인주의'라는 조어가 퍼지면서 '개인'이란 말이 독립적 의미를 얻어 비로소 '개'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 정착했다.

이뿐만 아니라 지명에서도 이런 문제가 드러난다. 환단고기에서 고조선의 중심지로 자주 등장하는 영고탑(寧古塔)[35]은 본래 만주어 닝구타(ningguta)의 음역으로 청나라 초기인 17세기가 되어서야 나타나는 지명이다. 당시 이곳에 유배되었던 오조건(吳兆騫)의 영고탑기략에 따르면, 만주어로 닝구타란 '여섯 명'이라는 뜻으로 옛적에 형제 여섯 명이 각기 한 지방을 점유한 데에서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인 기오창가(覺昌安)와 그 형제들 더사쿠(德世庫), 러오단(劉闡), 소오창가(索長阿), 보오룽가(包朗阿), 도르지(寶實)의 여섯 명을 가리켜 여섯 버일러(六貝勒)라 일컬은 것과 연결짓기도 하지만, 이들 일족은 이미 고조부 대에 남만주로 이주해 왔던 이들이므로 직접적으로 영고탑의 유래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 이곳이 영고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실제로 발해 시기에는 이곳에 상경용천부가 있었음에도 홀한성(忽汗城)이라고만 일컬어졌지 영고탑이라고 불리지는 않았고, 원나라 때에는 고주(古州)가 있었지만 역시 영고탑이라고 불리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궁지에 몰린 환빠들은 이곳에 과거 실제로 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뿐이라고 강변하거나 증산도 역주본에서는 영고탑이 '영고터'라는 우리말이 와전된 것이라고도 하지만, 신당서에도 잘 나오듯 이곳은 본래 영고를 치르던 부여가 아니라 숙신의 땅이었다. 또한 영고탑에 대한 근거인 만주실록과 만주원류고는 청 시기에 만들어졌다. 명나라에서 뭐라고 부르건 만주원류고에서는 영고탑이라고 할 것이다. 쓰인 언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추가적으로 이들의 주장처럼 영고탑이 부여의 영고가 행해졌던 터라고 할 경우 더욱 이상해진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이 있을 때 부터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부여는 고조선보다 훨씬 뒤에 등장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환단고기에는 영고탑과 같은 시대착오적 지명들이 상당하다.

  • 송화강(松花江) - 1462년부터 사용[36]
  • 시베리아(斯白力/斯庀廲阿) - 16세기부터 사용[37]
  • 해성(海城) - 1653년부터 사용[38]
  • 혼춘(琿春) - 1714년부터 사용[39]
  • 세토내해(瀨戶內海) - 1872년부터 사용[40]
  • 하얼빈(哈爾濱) - 1898년부터 부각[41]

이에 반론으로, 후대로 오면서 예서나 해서로 번역했다는 반론이 나온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한자도 없던 시절의 문서를 어떻게 번역했는지도 의문이다. 비단 지명만이 아니라 수메르(須密爾)라는 말은 본래 북쪽의 아카드 인들이 부르던 타칭이고 수메르에서는 자신들을 키엔기(ki-en-gi)라고 일컬었는데도 환단고기에는 마치 수메르가 자칭인 것처럼 버젓이 써있으며, 수메르는 이미 기원전 1700년 경에 바빌로니아함무라비 왕에 의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700년이 지난 기원전 996년에 여전히 고조선으로 사신을 보내오고 있다.[42]

또한 선비(鮮卑)라는 이름도 동호가 기원전 206년에 흉노묵돌 선우에게 대파당한 뒤 일파가 선비산으로 달아난 데서 유래한 말이었고, 몽골(蒙古里)도 1206년에 칭기즈 칸이 초원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만주에서 밀려난 실위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적절하지 못한 시점에 나타나서 문제가 된다.


6. 모순에 빠진 내용[편집]


환단고기가 크게 네 개의 문헌을 취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특히 가장 분량이 많은 태백일사는 오만 잡다한 기록들을 조금씩 가져다 묶어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그 내용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피기 십상이다. 예컨대 단군조선에 대한 내용은 단군세기만이 아니라 삼성기 전 상편,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도 흩어져 있고 특히 단군왕검에 대한 내용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도 한 마디 거들고 있다. 이렇다 보니 환단고기라는 하나의 책 안에서도 기록이 엇갈리는 모순이 발생한다.

환국의 위치와 같은 경우 삼성기 상편에서는 환국이 만주에 있었다고 하면서 환웅은 그 땅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삼성기 하편과 태백일사에서는 바이칼호(天海)의 동쪽으로 시베리아 중앙 고원이나 천산산맥(天山) 혹은 파미르고원(波奈留山) 부근을 환국이 있던 자리라 가리키고 있다.[43]

또 환웅은 여기에서 별도의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즉 지금의 백두산 아래 만주 땅으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부싯돌의 최초 발명에 대해서도 삼성기 상편에서는 환인이 돌을 부딪쳐 불을 일으키고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는데, 태백일사에는 규원사화를 따라 환웅 초기 고시례가 부싯돌을 발명했다고 서술되었다.

거기다가 그토록 중요한 치우의 행적에 대해서도 환단고기 안에서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삼성기 하편에서는 치우가 탁록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하지만, 태백일사에서는 이와 더불어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고 중원으로 나오지 못하게 길목을 틀어막는 선에서 그쳤다는 기록이 함께 나온다. 여기에 이미 전에 함락시켰던 탁록을 함락시키고, 또 함락시키고, 다시 함락시키는 것을 반복한다. 마한세가의 기록에선 치우가 전군을 탁록에 집결시킨 상황에서 헌원에게 경고서한을 보내자 헌원이 항복한다.

삼성기 전 하편
태백일사 신시본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① 염농(炎農)의 힘이 쇠퇴하자 치우가 중원으로 진군하여 회(淮)·대(岱) 지방을 점거. 이후 헌후(軒侯)가 등장하자 탁록에서 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고,(결과A) 나중에 오(吳)장군을 보내서 더 서쪽의 고신씨도 마저 정벌함.
② 이때 탁(涿)을 중심으로 천하가 삼분되어 북쪽에는 대요(大撓), 동쪽에는 창힐(倉頡), 서로는 헌원(軒轅)이 있었는데, 헌원이 치우에게 밀려 대요와 창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미 두 나라는 모두 치우를 섬기고 있었음.
③ 유망(楡罔)의 정치가 쇠퇴하자 치우가 중원으로 진군하여 탁록을 함락하고 연전연승.(탁록전 1) 유망이 소호(少昊)을 보내서 치우를 막아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대패하고 달아남. 치우는 유망의 수도 공상(空桑)을 접수하고 다시 탁록을 포위해서 이들을 멸망시킴.(탁록전 2)
이 소식을 들은 공손헌원이 군사를 일으켜 치우에게 도전하자, 치우는 자신에게 항복한 소호를 보내서 탁록을 포위하고 헌원군을 멸망시킴.(탁록전 3) 그럼에도 근성가이 헌원이 굴하지 않고 계속 치우에게 도전하자, 치우가 직접 탁록의 유웅(有熊)벌에서 헌원군을 몰살시킴.(탁록전 4) 기(冀)·연(兗)·회(淮)·대(岱)의 땅을 모두 점거하여, 헌원의 무리가 모두 신하를 칭하며 조공을 바침.
④ 치우가 더욱 군대를 정비한 뒤 진군하여 10년 동안 헌원과 73회를 싸웠지만, 근성가이 헌원은 오히려 각종 무기와 갑옷을 만들어 계속 치우에게 도전. 이에 열받은 치우가 다시는 대들지 못하게 밟아버리겠다면서 헌원과 결전을 치루는데, 여기서 그만 치우비(蚩尤飛)가 죽었음. 환단고기 세계관에서 헌원이 죽였다는 치우는 사실 이 치우비라 이야기함.(탁록전 5)
이에 치우는 분노하여 최첨단 무기인 투석기를 가져다가 헌원에게 크게 공격했고,(탁록전 6) 이에 군대를 보내서 서쪽으로 예(芮)·탁(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으로 회(淮)·대(岱)에 성을 쌓아 헌원의 침공를 봉쇄함.(결과B)
① 신농(神農)의 힘이 쇠퇴하자 치우가 중원으로 진군하여 회(淮)·대(岱) 지방을 점거. 이후 헌원(軒轅)이 등장하자 탁록에서 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고,(결과A) 나중에 오(吳)장군을 보내서 더 서쪽의 고신씨도 마저 정벌함.
⑤ 헌구(軒丘)가 복종하지 않자 치우가 정벌하여 탁록(涿鹿)에서 대결. 싸우기 전 치우의 형상을 드러내보이고 격문을 지어 헌원을 꾸짖으니, 이에 헌구가 곧 평정되어 복종함.(결과 C)

그리고 태백일사에서는 22대 단군인 색불루가 단군 자리를 선위받으면서 종래 고조선 내의 삼한을 삼조선으로 개편했다고 나오는데, 단군세기에서는 그보다 한참이 지난 44대 단군 구물이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한 뒤 진한을 대부여로 고치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었다고 나온다. 일단 소도경전본훈에 따르면 색불루의 삼조선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구물에 이르러서야 삼조선이 완성되었다고는 하나 이것마저 불완전하다고 기록되어있다.[44]

이 가운데 백미는 단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번한세가 상편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도산회의의 결과로 낭야성에 감우소(監虞所)를 두고 뒤에 번한을 세워서 감우소의 정무를 맡겼다고 하는데, 그런데 정작 도산회의는 단군조선의 2대 번한인 낭야 시절에 있던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치우 관련 기록들처럼 여러 부분에 흩어진 게 아니라 한 기록 안에서 나타난다.

단군세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A
B
단군왕검 67년에 태자 부루를 보내서 도산회의를 소집하여 치수법을 전수. 우순(虞舜)과 국경을 정해 유주와 영주가 조선에 귀속되고, 회(淮)·대(岱)에는 우순에게 통치가 위임된 분조(分朝)를 둠.
9년 간 홍수가 일어나자 단군왕검이 태자 부루를 보내 도산회의를 소집하여 치수법을 전수. 이에 낭야성(琅耶城)에 감우소(監虞所)를 두어 구려(九黎)를 분정(分政)하고, 치우의 후손 치두남을 초대 번한으로 삼음.
2대 번한 낭야가 낭야성(琅邪城)을 쌓음. 태자 부루가 도산회의를 주관하기 위해 가다가 이 낭야성에 머물러 민생을 살핌. 이후 태자 부루가 도산회의에서 치수법을 전수.
도산회의 개최 → 구려분정 → 초대 번한 책봉 → 2대 번한 세습 → 낭야성 축성 → 도산회의 개최


7. 연대 오류[편집]


이밖에도 몇 가지 연대상의 문제가 있다.
  • 단군세기에는 고등을 우현왕으로 삼은 게 임진년(기원전 1289)이라 되어 있는데, 마한세가에서는 무오년(기원전 1323)이라 되어 있다거나, 번한 계전이 경신년에 삼신단을 탕지산에 쌓았다는데 정작 계전의 재위기간 안에는 경신년이 없다는 모순을 일으키는 연대가 있다.
  • 망한 지 200년이 넘은 수메르가 고조선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부여기에 보면 경진년(기원전 221)에 연나라가 진개를 보내 고조선을 침공하는데 연나라는 이미 1년 전(기원전 222)에 망한 나라다. 참고로 이유립은 뒤늦게 진개의 침입 부분의 모순점을 파악해서 '일찌기'라는 글자를 추가해서 경진년 기사에 앞서 일어난 사건을 몰아서 기록한 것으로 바꿔 놓았다.


8. 기타 오류[편집]


  • 발해의 역대 국왕
발해의 역대 국왕을 14명 기록하고 있으며, 그 시호와 묘호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은 발해의 13, 14대 국왕의 시호이다. 실제 기록에는 발해 선왕(10대) 이후로 시호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데, 13, 14대 왕의 시호는 경왕과 애왕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경애왕 때 발해가 멸망했다"는 기록을 오독하여 이를 경왕과 애왕이라고 착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 시대에 지어진 향가라는 시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원문
독음
번역
精誠乙奴 天壇築爲古 三神主其 祝壽爲世
皇運乙 祝壽爲未於 萬萬歲魯多
萬民乙 睹羅保美御  豊年乙 叱居越爲度多
정성을노 천단축위고 삼신주기 축수위세
황운을 축수위미어 만만세로다
만민을 도라보미어 풍년을 질거월위도다
정성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을 축수하세
황운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兄隱 伴多是 弟乙 愛爲古
弟隱 味當希 兄乙 恭敬爲乙支尼羅
恒常 毫毛之事魯西
骨肉之情乙 傷巵勿爲午
馬度 五希閭 同槽奚西 食爲古
雁度 亦一行乙 作爲那尼
內室穢西 非綠 歡樂爲那
細言乙郞 愼聽勿爲午笑
형은반다시 제을 애위고
제은 미당희 형을 공경위을지니라
항상 호모지사로서
골육지정을 상치물위오
마도 오희려 동조해서 식위고
안도 역일행을 작위나니
내실예서 비록 환락위나
세언을랑 신청물위오소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터럭 같은 일로서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요
말도 오히려 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만드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세언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3000여 년 전에 지어진 향가인데 독음만 읽어보아도 완벽하게 현대 한국어로 해석된다.[45]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의 향가는 1300여 년 전의 것인데 독음은커녕 어떤 방식으로 읽어도 이렇게 해석되지 않는다. 그런데 고조선 시대의 향가라는 물건은 완벽하게 현대 한국어에 즉각적으로 대응된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물론 애초에 향가라고 부를 수 없으며 이두, 향찰 등 다른어떤 한문 활용법과도 맞지 않는다.

또한, 다른 쪽에서도 문제가 되기도 한데 무엇보다 어떻게 그런 큰 제국을 운영할 인구가 고대사에 있었느냐도 문제가 된다. 당장 고대 로마나 이집트만 했어도 인구가 억을 넘기는 것도 어려워했는데 그 큰 나라를 다스리려면 인구와 행정체계 여러 문제가 있는데도 무슨 난항을 겪고 인구를 어떻게 증가시켰으며 통치도 의문점이 든다.[46] 당장 인류가 이만큼 불어난 것은 정작 의료와 보건 기술학문 쪽이 발달해서 그런데, 아무리 책을 봐도 그런 언급이 전혀 없음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1] 중국 신화에서는 치우에 대해 구리 머리에 쇠 이마(銅頭鐵額)라고 묘사한다.[2] 기원전 118년 북부여는 위만조선의 침공군에 대패해서 해성 이북 50리 땅을 상실했다가 3년 뒤에 고우루 단군이 직접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빼앗긴 땅을 탈환한다.[3] 고열가의 후손이라는 말은 일설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열가(高列加)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에는 애당초 노리고 지은 이름인 듯.[4] 추가로 을지문덕살수대첩에서 단순히 수나라군을 털어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수나라를 침공해 태원과 유주를 점령하고, 안시성 전투에서도 당나라를 역침공해서 당의 수도 장안에 입성하면서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를 모조리 점령한다.[5] 지구의 크기가 불변이 아닐 가능성 때문에 정의를 바꿔서, 1983년부터는 빛이 진공에서 1/299 792 458 초 동안 진행한 거리가 되었다.[6] 쉽게 말하자면 남극과 북극 같은 지역은 추위가 매우 심해 인간이 살수있는 환경이 아니며 환국이 존재했다는 시대의 기술력으로는 사람은 남극이나 북극에 살지 못했다. 당장 남극과 북극점을 최초로 정복한 인물도 19세기에 태어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고대시대 인류가 남북극을 탐험한 것도 아니고, 통치를 했다는 주장은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다.[7] 사실 신라마저 김씨 왕조가 연속으로 재위했던 기간만 따지면 내물 마립간 김내물이 즉위한 356년부터 효공왕 김요가 사망한 912년까지, 1000년의 절반 수준인 556년밖에 안된다. 신라 초기에는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 가며 왕위를 차지했으며 후기에는 잠깐 박씨가 왕위를 되찾기도 했다.[8] 후술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영토 수준은 환단고기 내에서도 기록되지 않았다. 위 자료는 환단고기 신봉자들이 과장한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듯하다.[9] 위 gif처럼 빗댄다면 굉장히 많이 줄어든 영토일 것이다.[10] 한문으로 達支國이라 쓰는데 한글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는 바로 마한의 맹주국이었던 월지국(月支國)을 가리킨다. 또는 목지국(目支國)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는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충남 직산이나 전북 익산에 비정하는 것이 통설이다.[11] 사기에는 위만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주석을 단 응소(應邵)는 공통되는 글자에 오인했는지 요동군의 속현이던 험독(險瀆)을 조선의 옛 도읍이라 했던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이를 받아들인 데다가 난하요수설을 끌어다가 이것을 난하 하류에 있는 탕산시 일대로 여긴다. 실제로는 험독과 왕험을 연결시키는 것을 오류로 보고 험독은 요하 하류에 비정하며, 왕험은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12] 덤으로 티베트까지 원정하여 중앙아시아의 강거(康居)에 원정한 사실이 있으나 영토를 확장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3] 예부터 중화문명권은 세계사에서도 가장 발전도가 높은 지역으로, 동시대의 문명권과 비교해 봐도 전국7웅은 다들 국력이 상당했다. 비록 7웅 중에서는 말석이었지만 연나라 또한 북방민족들과 벌인 싸움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울 정도 국력은 있었음을 고려하면, 연나라와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인 고조선이 오히려 상당히 선전한 것이다.[14] 이 때문에 대륙설 계통 주장은 환단고기를 직접적으로 근거로 삼지 않고, 삼국사기 등 사서에다가 억지를 쓰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대륙설로 가면 환단고기는 거의 인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15] 김한규, 『천하국가』, 57쪽의 일부를 어레인지한 것. 그 원문은 상나라 문서에 인용되었다.[16] "도시국가론자 가운데는 한대(漢代)의 취락규모로부터 유추하여 당시 성곽도시의 평균을 300호로 잡기도 하지만 이는 '도비불과백실 이편야사(都鄙不過百室以便野事)'만을 감안해도 기층의 전형적 읍이라 보기 어렵고, 반면 선진(先秦) 취락규모를 10~25호로 잡는 자연촌락설도 읍 본래의 공동방위집단적 성격에 의거할 때 지나치게 소규모인 듯하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정황적 조건과 기타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당시 비읍 규모의 최상한을 100호로 보고 대체적 평균치를 30~40호로 추정하는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한데, 물론 이 역시 추론의 역(域)을 넘지 못한다.(「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講座 中國史 I』)"[17] 이것이 단군조선 말기 단군구물 원년(기원전 425)의 일이므로 거꾸로 그 이전까지는 '화친하고 전쟁할 권리'가 단군에게만 있었다는 말이 된다.[18] 주(州)라는 글자 자체도 강(川)의 줄기 사이에 점을 찍은 자형에서 보이듯 본래 하중도(洲)를 뜻하는 글자였고, 사람들이 하중도에 모여 살면서 마을이라는 의미로 확장된 것이었다. 따라서 춘추시대에 주는 지방의 군사거점이라는 의미에 가까웠다.[19] 사기에서는 이들보다 조금 앞선 기원전 688년에 진(秦)이 규(邽)와 기(冀)의 융족을 토벌하여 이들을 초현(初縣)하고, 이듬해에는 두(杜)와 정(鄭)을 초현(初縣)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좌전에는 진(秦)의 현 설치가 전혀 보이지 않는 반면에 초(楚)와 진(晉)의 현 설치는 집중적으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후자가 더 중시된다. 현(縣)은 계(繫; 걸려 있다, 따라서 당기면 끌려온다)는 의미가 있어 '현'을 설치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단순히 직할화한다는 뜻인 동사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20] 게다가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오늘날과 달리 군(郡)이 현보다 작은 조직이었는데, 이유립이 이걸 몰랐는지 환단고기에서는 처음 한 번만 주현(州縣)이라 하고, 그 뒤로는 일관되게 주군(州郡)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21] 이하 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15~28쪽 참고.[22] 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14쪽, "군장사회는 수공업의 전문화와 사회적 위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군장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계층에 의해 일반 사회 성원들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통제와 조절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사회에서는 군장을 비롯한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권위를 현시하는 특수 유물을 전유(專有)할 뿐만 아니라 일반 성원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의 가옥·무덤·공적 의사 결정의 장소·의례 공간 등을 공간적으로 구분하기 마련이다."[23] 김경택, 「청동기시대 복합사회 등장에 관한 일 고찰: 송국리유적을 중심으로」, 19~20쪽.[24]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라.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사 조선삼한이라 하니 고리 시라 고례 남북의 옥저 동북의 부여, 예와 맥은 그의 관경이었다.(태백일사 신시본기)"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르빈이다.(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25] 사실 생활공간으로서 야(野)와 거주공간으로서 비(鄙)의 구분은 모호한 면이 있다. 비와 야를 동일시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는 반면에, 비와 야를 동일시할 수 없는 기록도 존재한다. 어찌되었든 둘은 교외라는 의미에서 일정하게 혼용되었던 듯하다.[26] 이성구,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講座 中國史 I』, 95~96쪽.[27] 안 그래도 미개간지가 유의미하게 널려 있는데 중국 따라한답시고 토지분급제를 실시했다가 철저히 시망한 사례가 있으니, 바로 다이카 개신 시대의 일본이었다.[28] 다만 예외적으로 괴베클리 테페같은 극히 희귀한 사례는 있다.[29] 그것도 지역마다 각기 다른 작물, 특성, 종교를 가졌다고 한다. 예컨대 기원전 75세기에 환국의 서쪽 끝 이라고 주장되는 시리아에서 시작된 밀 재배는 기원전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환국의 동쪽이라고 주장되는 중국에 도달한다. 일각에서는 환국의 백성이 북미로 건너갔다고도 하는데, 인류가 베링해협을 건너간 건 이미 기원전 300~100세기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당연히 콜럼버스 이전까지 북미에 밀 농사는 전혀 없었다.[30] 이미 무언가와 관련되어 있다고 확정된 유물을 환국과 관련지어 날조를 일삼기도 한다.[31] 이뿐만 아니라 초본이라는 책이 성분검사결과 캐나다산 펄프다. 신봉자들은 이것이 증거라 주장한다.[32] 더불어 이러한 개념적인 이행이 종래의 가족적 국가관 위에서 이루어진 만큼 이는 동아시아에서 특히 더 강력하게 동질성(문화)과 친연성(혈연)을 확인하고 이를 타 집단과 대비시킴으로써 정체성이 있는 공동체가 되었다. 간단히 말해, 전근대의 국가관이란 사람이 '아버지(왕)'를 섬기지 '가족(국가)'을 섬기지 않는 것과 같다.[33] 공백(共伯)인 화(和)라고도 하고, 공(共)나라의 백화(伯和)라고도 한다. 다만 이는 죽서기년에 따른 것이고 사기에는 공백화가 아니라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함께 정치하면서 공화라고 칭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소공은 목공(穆公)이라는 시호와 호(虎)라는 이름이 전하는 데 반해 주공은 그 자세한 신상을 알 수 없기에 근래의 학자들은 죽서기년의 기록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34] "협화(協和)니 상화(相和)니 공화(共和)니 하는 문자는 대개 서로 통용하는 말들인 것입니다(광해군일기)" "특별히 그 마음이 공화(共和)하지 못하고(영조실록)"[35] 지금의 헤이룽장 성(黑龙江省) 무단장 시(牡丹江市) 닝안 시(宁安市) 닝안 진(宁安镇). 1910년부터 영고탑(寧古塔) 대신 영안(寧安)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36] 본래 송화강은 만주어로 '하늘 강'이라는 의미의 쑹아리 강(松阿哩江)을 음역한 것이다. 고구려와 발해에서는 속말수(粟末水), 요나라에서는 압자하(鴨子河), 금나라와 원나라에서는 송와강(宋瓦江)이라 기록되었는데, 송화강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1462년의 명통지가 최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나라에서 이를 혼동강(混同江)이라 이름지어서 한동안 송화강과 혼동강이라는 명칭이 병존하기도 했다.[37] 시베리아라는 이름은 15세기에 킵차크 칸국이 분열되고 우랄 산맥과 예니세이 강 사이에 세워졌던 시비르 칸국(Khanate of Sibir)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러시아가 이반 뇌제의 지도 하에 아스트라한 칸국과 카잔 칸국을 멸망시키고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 칸국과 충돌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러시아 인들이 우랄 산맥 너머의 동토를 시비리(сибирь)라 부르던 것이 시베리아로 전화되었던 것이다.[38] 고대에는 부근에 요동군 소속의 신창현(新昌縣)이 있다가 요나라 때 비로소 해주(海州)가 설치되었는데, 본래 발해의 남경 남해부였다는 것으로 보아 황해도에서 사람들을 끌어다 정착시킨 데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금나라 때에는 등주(澄州)라 개칭했다가 원나라 초에 폐지되었는데, 명나라 초에 다시 이곳에 해주위를 설치하였다. 해성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청나라 순치 10년에 해주를 해성으로 고친 것이 최초이다.[39] 고구려 때에는 책성이 있었으며, 간혹 동해곡(東海谷)이 이곳을 가리키던 지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발해에서는 이곳에 동경 용원부를 설치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해관총관부(奚關總管府)가 설치되었다가 명나라 때에는 안춘(顔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혼춘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쓰이게 된 것은 청나라 강희 53년에 혼춘협령(琿春協領)이 설치된 것이 최초다.[40] 에도시대 이전까지는 섬과 섬 사이 해역들이 늘어선 개념만이 있을 뿐,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내해를 이룬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에도 시대에도 세토우치(瀨戶內)라는 명칭은 있었지만 단순히 해역이 확장된 것일 뿐, 오늘날의 것과 그 범위가 겹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 서구의 해역(The Inland Sea)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1872년부터 비로소 세토 내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이는 1911년에 '세토내해론'으로 정리되어 20년 뒤 하나의 국립공원으로 묶이게 되었다.[41] 엄밀히 말하자면 하얼빈이라는 말 자체는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만주어 토속 지명으로 그전부터 존재해왔다. 다만 이곳에 도시가 건설된 것은 1898년에 둥칭철도(東淸鐵道)의 건설에 따라 이곳이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부터의 일이고, 그전까지는 일개 촌구석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 아십하(阿什河)를 거슬러 올라가 있는 아성현(阿城縣) 일대가 이 지역의 중심이었으며, 금나라의 상경(上京) 회령부(會寧府)도 바로 이곳 아성현에 있었다.[42] 물론 수밀이국이 수메르라는 견지에서 바라볼 경우에 해당한다.[43] 대부분 환단고기 역자들이 저지르는 실수인데, 정작 이유립은 천산(파나류산)을 시베리아 중앙 고원으로 정의했다. 여기에서 '파나류(波奈留)'가 우리말 '하늘'의 일본어 음차라는 것은 해동역사 제28권 방언조에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를 인용하여 실렸다. 즉 파내류산은 뜻으로 쓰면 천산, 음으로 쓰면 하늘산이라는 것이다. 덧붙여 환국을 파내류국이라고도 했으니 환국=하늘국으로 환=하늘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 다만 이걸 한국이라고 읽지 않음은 위 문단에서 상술한 바와 같다. 추가로 태백일사에서는 '환'을 가리켜 광명이라 말하는 대목이 따로 있다.[44] 사실 신채호가 20대에는 기원전 15~14세기에 고등(高登)으로부터 부여라는 이름이 시작된다고 하였고, 30대에는 이걸 취소하고 기원전 4세기에 삼조선이 분립했다고 하였는데, 환단고기에선 이 둘을 모두 가져다 쓰다 보니 생긴 문제다.[45] 하다라는 의미에 해당하는 부분은 모두 할 위(爲)로 되어 있으니 해석에 참고[46] 이유는 당시의 물자생산력이 현대보다 부족했던 것과 행정력의 한계로 인해 인구집계를 정확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국가가 통계상 인구 1억을 최초로 돌파한 사례는 중국 송나라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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