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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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장위위원회 구성
4. 여담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25년 7월 3일, 평안북도 선천군 월봉리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졸업 이후 공사장에서 노동하다가 해방 이후 낙원기계제작소 전기로공, 기계제작공으로 일했다. 6.25 전쟁 중에 전쟁물자를 만드느라 똥꼬쇼를 했다고 한다.

1956년 9월에 기계공업성 경제계획국장에 임명되었다. 1959년 11월, 승리자동차공장 지배인에 임명되어 4차 당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6천대의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공을 세웠다고 한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기계총국 부국장, 1963년 3월, 남포조선소 지배인에 임명되었고 1965년 2월, 건재공업성 부상에 임명, 1966년 11월 제2기계공업상에 임명되면서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되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제2기계공업상에 유임되었다. 1968년 4월, 중앙당학교로 진학하여 1년간 공부한 후 1969년 내각 사무국장에 임명, 1970년 7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만금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중앙인민위원 및 정무원 부총리 겸 기계공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3년 9월 20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에서 해임되어 정무원 사무장에 임명되었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을 지냈다. 북한에서 발표한 략력을 보면 1974년 7월에 다시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1976년 5월 16일, 23시 50분에 오랫동안 투병한 끝에 52세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공동 명의로 성명을 발표, "홍원길동지는 일편단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충성다하여온 혁명전사였다. (...) 실로 홍원길 동지는 자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그 어떤 어렵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 끝없이 충직하였으며 수령님의 가르치심 따라 조국의 부강발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력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칭송했다. 김일성이 직접 장의위원이 되는 등 매우 성대히 대접받았다. 조선대백과사전에도 "5차대회에서 제시된 3대기술혁명과업수행에서 돌파구로 되었던 3만대의 공작기계생산투쟁과 금성뜨락또르공장을 현대적으로 꾸리기 위한 투쟁에서 로동계급 출신의 일군답게 충실히 일하였다. 특히 무산광산과 김책제철소 확장공사에 대한 지도성원으로 파견되여서는 자신의 한몸을 돌보지 않고 공사기일을 앞당기기 위해 헌신분투하였다."라고 아주 좋게 쓰여 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이 조성되자 거기에 안장되었다.


3. 장위위원회 구성[편집]




4. 여담[편집]


홍원길의 딸 홍선옥은 여맹 부위원장, 대외문화련락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5. 참고문헌[편집]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조선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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