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렬 교수 피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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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렬(洪性烈, 1935.3.15 ~ 2001.10.25)
호는 범초(凡草), 66세
1. 배경[편집]
2001년 10월 25일,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에서 증산도 신도 3명이 증산도 행정실장의 지시를 받고 前 증산교 본부 종령이자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구 예산농업전문대학) 교수인 홍성렬과 그 부인을 살해한 사건. 결코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며, 내막을 알려면 무려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강일순 계통 종교들에서 벌어진 내분의 뿌리를 살펴야 한다.
1.1. 이상호,이정립 형제와 안세찬[편집]
증산계통 종교의 교조 증산 강일순(1871~1909)에게는 여러 제자가 있었으나, 그중 가장 큰 교단을 만든 이는 단연 차경석이었다. 차경석이 세운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한때 300~500만 신도를 헤아렸다고 하니, 식민지 조선의 당시인구를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다.
보천교 간부 중 이상호ㆍ이정립이라는 형제 신앙인이 있었다. 이상호는 한학에 밝았고 이정립은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다. 보천교에서는 처음에는 강일순을 천사(天師)라고 부르며 신앙대상으로 삼고 개벽을 기다리며 도통을 바랐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심지어 교주 차경석조차 도통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차경석은 옛 스승이자 교조인 강증산을 기만적인 도인이라 생각하여 배제하고, 자기 아버지 차치구를 옥황상제로 모시며 교리와 의례를 유교화하여 보천교를 새로운 종교로 바꾸려고 하였다. 당시 보천교 고위간부였던 이상호ㆍ 이정립 형제는 이에 반발해 보천교 혁신운동을 일으켰으나, 차경석의 대응에 위협을 느끼고 만주로 피신하였다. 1936년에 차경석이 숨을 거두자 다시 국내로 들어와 강일순의 3번째 부인 고판례를 모시고 동화교를 개교했다.
한편 충청도 서산 지역의 부호로서 안병욱이라는 보천교 신자가 있었다. 안병욱의 장남 안세찬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증산을 신앙하는 가풍 속에서 자란다. 안세찬의 회고에 따르면, 12세 때 '홀연히 영성이 열리는 큰 체험'을 하고 자신이 강증산의 뜻을 이으리라 다짐했다고 한다.[1] 일제 치하였던 당시 안세찬은 징용을 피해 집을 나와 중국 및 만주 등지를 유람하며 견문을 쌓았다고 한다.
한편 이상호ㆍ이정립은 고판례와도 사이가 틀어져 결별한다. 이 무렵 안세찬은 해방을 맞아 자신과 함께 종교사업을 같이 할 동지를 찾아다니는 와중에 두 형제와 접촉하였다.
1.2. 증산교 본부의 설립과 6.25전쟁[편집]
그렇게 이상호·이정립과 안세찬은 함께 '대법사 증산교'를 개교한다. 대법사 증산교의 중심간부들은 오행에 따라 토주土主ㆍ 금주金主ㆍ 수주水主ㆍ 목주木主ㆍ 화주火主라 이름 붙인 5명이었는데, 이상호는 토주, 이정립은 목주, 안세찬은 수주였다. 불과 20대 중반에 불과하던 안세찬이 핵심 5인방에 들었음은 대법사 증산교에서 안세찬의 비중이 매우 컸다는 뜻이다. 교단 창립 직후 대법사 증산교는 의통제작에 착수하는데, 의통이란 다음과 같다.
강일순은 생전 자신의 사후 대병겁 창궐을 경고했는데, 믿거나 말거나 이 대병겁은 세균병, 바이러스병이 아니라 신장(神將)이 인간의 혼을 뽑아가는 신병(神病)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병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의통인패(醫統印牌)라는 신물 한 벌을 남몰래 제자 박공우에게 전수하며 무진戊辰년 동지冬至에 기두起頭하며 묻는 자에게 전하라고 명한다.[2] 또 다른 기록에는 “무진년 동지에 기두하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의통인패 한 벌을 전하라, 그가 세상을 구원할 자니라.”[3] 라고 했다. 그리고 박공우가 무진년 동지에 만난 이가 바로 이상호다. 박공우는 이상호가 바로 십수년 전에 스승 강일순이 자신에게 말한 '무진년에 기두하는 자'라고 짐작했고, 이상호에게 의통인패를 전했다고 한다. 증산계통 종교문헌을 추적해 본다면 이상호는 의통을 전수받았을 확률이 높다. 이상호는 개벽이 곧 목전이라고 생각하여 위하여 자기가 아는 의통제작법을 안세찬 등 교내 간부들에게 전수했다. 이때 의통제작에 필요한 경면주사 등은 부호의 아들이었던 안세찬이 상당수 부담했다고 한다.
그렇게 교세를 확장해 나가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법사 증산교 지도부는 6.25 전쟁이 강증산이 예고한 개벽이 드디어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의통인패 등을 배부하였다. 그러나 전쟁만 있고 병겁이 없음을 보고 뒤늦게 개벽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증산교 지도부는 안세찬 쪽에 분배했던 의통인패 및 호신의통, 호부의통을 회수하고자 했지만 안세찬은 응하지 않았다.[4]
아무튼 6.25 전쟁을 계기로 이상호 형제와 안세찬은 서로 결별한다. 이후 이상호가 1966년에 사망하자 동생 이정립이 교주직을 승계받아 죽을 때까지 증산교의 교주로 지내다가 1968년에 사망한다. 이정립이 살아생전 가장 아끼던 후배 신앙인이 바로 본 사건의 피해자 홍성렬이다. 이상호ㆍ이정립 형제가 모두 사망하자 안세찬은 증산교를 찾아와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하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대전에서 독자적으로 교단을 창교했으니 현재의 증산도이다.
1.3. '범증산교사'와 증산도[편집]
증산교와 증산도는 그 뿌리가 같기에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증산교와 증산도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얼어붙은 계기가 홍성렬의 '범증산교사(1994, 범증산교연구원)' 출간이었다. '범증산교사'는 강증산 사후 강증산의 친딸이 세운 교단(증산법종교), 제자 혹은 제자의 제자등이 세운 교단(미륵불교, 문공신 교단, 안내성 교단 등등...)의 역사를 홍성렬이 직접 답사를 해가며 자료를 수집해 펴낸 역작이다. 그런데 안세찬, 안중건의 증산도에 대해서는 목차를 제일 뒤에 배치했고[5] 이상호ㆍ 이정립 형제와 안세찬이 만났을 당시,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나고 20여 년 후 안세찬이 다시 증산교를 찾아왔을 때의 이야기는 그간 안세찬ㆍ안중건 부자가 증산도 신도들에게 말했던 내용과 크게 달랐다. “범증산교사”의 증산도사의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2.운산(雲山) 대법사(大法社) 간부와 불화(不和)
대법사(大法社)는 신묘(辛卯 1951)년 음력 2월에 원평 장승백이에서 호신부(護身符)와 인패를 만들 때 인육(印肉)의 제조에 필요한 경면주사(鏡面朱砂)15근을 운산이 자기의 연원(淵源)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공주(公州) 부여(夫餘)지방에서 거출하여 냈고,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의 책임을 맡아 자긍(自肯)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운산이 호신호부(護身戶符)의 배부(配付)와 의통구호단의 인원배정(人員配定)을 자기의 연비(連臂)에 유리하도록 짠데다가 장승백이에서 만든 호신부와 인패를 자기 연비 교인들을 시켜 모두 가져 갔으므로 경상도(慶尙道)의 이원호(李元浩)같은 이는 '충청도 사람만 사람이냐 만일 안세찬(安世燦)연비의 의통구호단이 경상도에 내려오기만 하면 그냥두지 않겠다'고 분개했다.
당시 지방별로 많은 교인을 거느린 대연원주격(大淵源主格)인 경상도(慶尙道)의 이원호 배동찬(裵東燦), 경기도의 원제철(元濟喆) 유흥고(柳興?), 충청도의 김종렬(金鍾烈)등은 운산(雲山)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사건건(事事件件)대립하게 되자 운산(雲山)은 자기가 많은 교인을 포교하여 교세를 떨치게 하였고 의통인패의 제작을 가능케 하였으며 의통구호단을 조직해 놓으니 이 공로는 인정해 주지 않고 교주 청음과 남주는 자기에게 대드는 두령들 편을 들어 자기를 몰아 내려 한다고 오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오해는 교본부(敎本部)에서 박복만(朴福萬)을 시켜 자기를 해치려 했다고 까지 항의하게 되었으니 운산(雲山)이 청음(靑陰) 남주(南舟)밑에서 교(敎)를 함께 신봉할 수 없게 되어 신묘(辛卯 1951년)년 가을에 대법사(大法社)를 떠났다. 이로써 운산은 을유(乙酉 1945)년 9월 19일 대법사 창립에 참가한 이후 6년여간 몸담아 종교활동을 해온 대법사와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다,
대법사을 나온 운산은 공주군(公州郡) 유구(維鳩)에서 직조기(織造機)를 놓고 인조견사(人造絹紗)를 을미(乙未 1955)년까지 짰다. 병申 (丙申 1956)년에는 대전시(大田市) 중동(中洞)으로 이사하여 상업(商業)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그 후에는 한의술(漢醫術)로 자녀의 학비를 보탰는데 넉넉지 못한 살림을 하면서도 커가는 자녀들에게 자기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고 관심을 보이는 어린 아들들에게 여늬 사람과 다른 가정교육을 시켰다.
3. 운산의 용화동(龍簧) 재출입(再出入)과 연원논쟁(淵源論爭)
운산은 신묘(辛卯 1951)년 가을에 대법사를 떠나 교단과 외면한채 은둔(隱遁)생활을 하고 있다가 23년만에 다시 나와 증산교인과 접촉한 것은 갑인(甲寅1974)년 봄이었다.
운산이 오랜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전에 자기의 연원지역(淵源地域)으로 생각되는 충남(忠南)의 아산(牙山) 서산(瑞山) 예산(禮山)등지에 가서 한말 가운데 대법사 창교주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남주(南舟) 이정립(李正立)을 비난하고 대순전경(大巡典經)의 장절(章節)가운데 신빙성이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한 말은 전에 대법사(大法社)에 다니던 교인들로서는 수긍할 수가 없었다. 운산이 말하기를 자기가 대법사 창립에 참가하여 종교활동을 할때 청음(淸陰) 남주(南舟)에게 지도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동지적(同志的)인 것이었다고 하였는데 8.15광복후 대법사를 창립할 때의 운산의 처지는 그런 것이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8.15광복후 대법사창립에 참가한 운산은 임술(壬戌 1922)년 7월 22일생인 24세의 청년이었고 청음은 무자(戊子 1888)년 2월 27일생으로 57세요 남주는 을미(乙未 1895)년 2월 19일생으로 50세였으니 운산에 있어서 청음, 남주는 부집(父執)의 존장(尊長)이었다.
더욱이 청음, 남주 두분은 보천교(普天敎)의 방주(方主)였었고 보천교를 나와서는 대성(大聖)의 성훈(聖訓)과 성적(聖蹟)을 찾고 엮어 대순전경(大巡典經)을 간행하여 무진(戊辰 1928)년 동지(冬至)에 동화교(東華敎)를 세웠다가 계미(癸未 1943)년 8월에 체포되어 8.15광복후에 출옥한 교계(敎界)의 중진(重鎭)이었으니 연령으로 보나 신앙의 열력(閱歷)으로 보나 운산과 청음,남주 두 분이 평등한 동지적(同志的)인 인간관계가 성립되기는 어려웠으리라 보여지며 대순전경의 상당한 부분이 신빙성이 없다는 말에는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경전의 권위(權威)까지 허물고 무엇을 가지고 종교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그의 종교적 양식(良識)을 의심하게 되었다.
운산이 과거에 자기의 연비가 많았다고하는 증산교의 아산지부와 서산지부의 월례회에 참석하여 그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앞으로 증산교 대법사(甑山敎大法社)는 연원주 중심으로 교단조직을 개편하여 새롭게 종교운동을 전개하자고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어떤 교인을 말하기를 '운산이 20여년전에 자식을 낳아서 팽개쳤다가 그 자식이 천신만고끝에 성장하여 사람 구실을 겨우 하게 되니 나타나서 내가 네 아비니 나에게 효도를 하라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운산이 청음, 남주의 인격을 격하(格下)하고 자기의 연원주(淵源主)가 종도(從徒) 이치복(李致福)이라고 하면서 옛 연원주인 자기를 중심으로 뭉치라는 말에 크게 반발한 것이었다. '운산이 23년전 포교할 때 교인들에세 청음, 남주를 따라 증산대성(甑山大聖)을 믿으라 했지 우리 보고 언제 이치복(李致福)을 따라 증산대성을 믿으라 했느냐 엄밀하게 말하면 23년전의 운산은 용화동 청음, 남주 앞으로 교인을 인도한 지로사(指路使)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운산이 자신의 연원주가 청음, 남주가 아니라고 한다면 청음,남주를 연원주로 생각하는 교인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했다. 또 한편으로는 23년간 교단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연비교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내가 그대들의 연원주니 나를 중심으로 뭉쳐서 종교운동을 하자고 하는 것은 그가 그간 수도해서 고덕대현(高德大賢)이 되었을 지라도 하기 어려운 말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옛 연비되는 교인들과 모든 일을 상의하여 일을 하자 했어야 옳았다고 했다.
위와 같은 의론이 분분하면서도 몇몇 교인들은 옛 정을 생각하여 대전시 대사동에 있는 운산의 집을 오갔지만 아산 서산지방의 교인들과 운산과의 마음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운산은 을묘(乙卯 1975)년 10월 초순에 용화동을 방문하여 원로교인들이 있는 사석(私席)에서 자기의 소신을 말했으나 공감(共感)을 얻지 못했고 박기백(朴耆伯)같은 이는 운산의 주장이 경위를 가리지 못하는 억지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병진(丙辰 1976)년 동지(冬至)전날밤 교인 2백여명이 모인 도방(道房)에서 운산은 발언할 기회를 얻어 이제까지 가슴속에 품어온 신념과 울울한 심사를 장시간 피력하였는데 이 때 말한 얘기 가운데에도 교단을 초기부터 지켜온 도인들이 들을 때 긍정(肯定)하기 어려운 내용이 너무 많았다.
“내가 교단을 떠날 때 그 때 간부들에게 때가 있으면 내가 또 오리다. 교단을 잘 지키소 했는데 이제 와 보니 교단이 망했습니다. 이것은 교판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임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가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연원회의를 열고 세 다섯의 사정위원을 뽑아 교인들의 자격을 새로 부여해야 합니다. 내가 이 단체의 매듭을 지려고 왔습니다. 교판은 연원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대자연의 질서가 도덕이요 우주정신이 도덕률(道德律)이므로 체천측지(體天則地)한 우리 인사(人事)도 도덕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천지공사(天地公事)의 근원도 도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판은 연원주를 타도하고 교단의 주도권(主導權)을 쥐려고 하니 교단이 망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연원주없는 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농사 지은 것을 뺏어가는 것은 도적놈입니다. 내가 내 공로를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마는 젊은 청춘을 다 받쳐 많은 사람을 포교해 놓은 것은 누가 쌀거두어 먹으라고 해 놓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연원을 따지자면 이치복(李致福)씨 연원입니다. 나는 청음선생과 동지적인 입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불초 안세찬이 고약한 마음이 있다면 벼락을 맞게 해주십시오. 내가 유종의 미를 거두려 했지만 내가 이룬 단체에서 망신을 당했습니다. 나는 부모처자를 돌보지 않고 포교하여 많은 교인을 모으니 박복만이 같은 사람은 나를 해치려 하였습니다. 그 지도자가 나쁩니다. 동지끼리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나는 끝에 가서 출교명령(黜敎命令)을 받았습니다. 단체라는 것은 운영의 묘(妙)가 있어야 합니다.“
위 글은 그 당시 운산(雲山)이 말한 긴 이야기의 초록(抄錄)가운데에서 일부를 발췌(拔萃)한 것이기 때문에 운산(雲山)의 소신을 다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할는지 모르나 어떤 주장이 교단을 지켜온 교인들을 긴장케 하였는가는 짐작할 수 있다.
운산의 말을 들은 원로 교인들은 그가 피력한 이야기들의 부당성을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운산이 창교주(創敎主) 청음 이상호, 남주 이정립과 불화(不和)하고 교단의 간부들과 대립하여 떠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누구에게 '때가 있으면 내가 또 오리다. 교단을 잘 지키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논평하고 싶지도 않다.] 하였고 '이제와 보니 교단이 망했습니다. 이것은 교판이라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임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가야 합니다.' 했는데 자기야 말로 출교명령을 받아 나가서 20년 이상을 도장에 왕래하지 않은 사람이 교인대중을 어떻게 보고 교단이 망했느니 사표를 내라느니 할 수 있느냐. 신앙을 꾸준히 하다가도 5년 이상 도장에 나오지 않고 교인으로서 의무를 하지 않으면 다시 입교식을 하는 것이 우리 교단의 통례(通例)로 되어있다.
이런 통례로 본다면 아니 이런 교단의 통례를 구태어 들지 않고 일반 상식으로 봐도 안세찬은 교인대중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안세찬이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한 말이라고 볼 수 없고 무엇이 씌어대서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연원주없는 교단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농사 지은 것을 뺏어가는 것은 도적놈입니다' 라고 한 말은 증산대성(甑山大聖) 다음에는 청음, 남주 두분을 하늘처럼 믿고 입교한 교인들에게 '안세찬 내가 청음, 남주 밑에서 포교하고 일은 했지만 나는 연원을 따지면 이치복씨 연원이니 20년전에 나에게 도를 받은 이나 그 연비들은 나를 연원주로 받들어 일을 하자' 고 하면 그 말을 누가 옳게 보겠는가]라 하였다.
운산(雲山)은 그 뒤 몇 차례 용화동에 와서 같은 내용의 발언을 여러 교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했으나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고 아들 중건(重建)을 시켜 색다른 교리강좌를 하다가 제지 당하였으며 연비교인들을 무례하다고 꾸짖다가 충돌하여 폭언이 오고가니 이로부터 왕래가 끊기게 되었다.
아산(牙山) 서산(瑞山) 공주(公州)지방의 교인으로 운산(雲山)과 인연이 깊어 그를 동정하는 몇몇 교인들은 그가 20여년 후에 다시 도장에 나왔더라도 겸허하게 지금까지 교단을 지켜온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여러 원로교인들과 상의해서 신앙생활을 계속할 의향을 밝혔으면 용화동에 다니는 옛 교인들의 호감을 사서 뜻밖에 교권을 쉽게 장악했었을 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했다.
운산(雲山)이 오랫동안 은거하였다가 다시 용화동에 나가서 옛 연비와 손을 잡고 새로운 종교 활동을 전개하려다가 신념의 차이로 좌절(挫折)하자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 범증산교사 증산도사 -
범증산교사 출간을 계기로 증산교와 증산도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고, 안세찬ㆍ안중건 부자는 홍성렬을 두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곤 했다. 안중건의 설교 중 일부는 증산도 발간 월간지 “증산도 문화소식[6] ”지 1999년 10월에 개재되었다. 공식지라서 최대한 순화한 표현임을 알아두자. 저작권 보호를 위해 스캔본은 생략하고 16년 후 플래카드 재판 판결문에서 인용한 부분만 알아보자.
난법은 역사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그 뿌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중략) 지금 제 3변 도운에도 난법자들이 활개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증산도는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다. 잘 알다시피 증산도에 대해 크고작은 흠집내기, 상처내기를 일삼고, 증산도의 도통맥과 도의 연원과 뿌리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더욱이 문제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증산도에서 도를 받은 자들이라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홍성렬 김탁[7]
같은 자다. (중략) 홍성렬(1935년 생, 65 세)은 『범증산교사』 등의 책자를 통해 가장 집요하고 악랄하게 상제님 도정 집행을 방해하는 훼도자라 할 수 있다.
대전지법2014고정661 판결문 11p
그런데 홍성열이 범증산교사를 출간한 이후 서울에서 신원 미상의 괴한들에게 폭행당한다. #아카이브 훗날 증산도 신도들에게 살해당한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테러도 증산도 신도들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크다.
2. 범행과 검거[편집]
2.1. 이●●의 살인교사와 장○○, 심○○, 이○○의 범행[편집]
2001년경, 증산도에는 장○○이라는 신도가 있었는데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행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장○○은 어떠한 계기로 홍성렬이 나쁜 사람임을 알고 죽이겠다고 결심하고는, 증산도 본부에서 행정실장이었던 이●●를 찾아가 자기 뜻을 전한다. 당시 행정실장은 증산도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였는데, 이●●가 홍성렬 살인을 지시했음이 훗날 밝혀졌다. 이●●는 장○○에게 같은 증산도 신도인 심○○를 소개시켜주었다. 심○○는 범행이 두려워 같은 신도였던 이○○에게 범행을 제의해 홍성렬 살해를 시행할 3인조를 구성하였다.
이후 3인은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에 있는 홍성렬의 집 주변을 여러 차례 사전답사하고, 한 명이 홍성렬을 인근 외딴 곳으로 유인해 살해하기로 공모했다. 이○○은 2001년 10월경 증산사상에 관심있는 대학생인 척하며 홍성렬을 만나 친분을 쌓고 내부구조를 익혔다. 2001년 10월 25일 저녁 6시경 이○○은 홍성렬을 찾아가 저녁식사를 대접한다는 명목으로 장○○, 심○○가 대기하는 곳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아내 정○이 만류하므로 홍성렬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대신 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이○○은 밖으로 나와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렸다. 이에 3인은 이○○이 음료수 박스를 들고 홍성렬의 집으로 들어가면 나머지 2인이 따라들어가 범행하기로 계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7시 30분경 이○○은 음료수 박스를 갖다준다는 핑계로 다시 홍성렬의 집으로 찾아갔고, 나머지 2인은 집 마당 앞에 대기했다. 음료수를 주고 이○○이 집을 나설 때 홍성렬이 2인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자 이○○은 홍성렬의 얼굴을 때려 기절시켰다. 그런데 최초에 살인을 마음먹었던 장○○은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겁이나 도망쳤다. 이때 남편의 비명소리를 듣고 홍성렬의 아내 정○이 달려나오자, 이○○은 정○의 목을 손날로 가격해 기절시켰다. 그리곤 안방으로 들어가 자기들 이름이 기재된 방명록을 찢었는데, 이때 이○○의 지문 일부가 방명록에 남았다. 이○○이 방명록을 찣는 동안 심○○는 보도블럭으로 홍성렬과 정○의 머리를 내리치고 목뼈를 부러뜨려 확인사살했다. 그리고 피해자 부부의 시신을 마당 옆 창고에 대강 수습하고 도망쳐 나온다. 부부의 시신은 다음날 사위가 발견하였다.
훗날 경찰조사 및 재판 증언에 따르면 장○○은 이○○에게 살인의 대가로 50만 원씩 3번 150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2.2. 이●●의 자살과 미궁에 빠진 수사[편집]
피해자가 대학교수이자 지역의 유명인사인 터라 초미의 관심 속에 수사가 진행되었다. 현장감식 끝에 경찰은 방명록의 쪽지문[8] 과 머리카락 수십 점을 증거로 채취했다. 그러나 쪽지문으로는 주민등록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해 신원을 특정할 수 없었다. 인근 거주자 및 우범자, 방문자들의 DNA를 검사해봐도 현장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의 DNA와는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관련 학자들은 조속한 수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 "종교학자 테러" 수사 촉구 (경향신문, 2002년 1월 31일) #
2.3. 반전, 3인조 살인범 잡히다[편집]
미제사건으로 남은 지 9년 후인 2010년 초, 대한민국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개발한 첨단 지문감식기법을 적용해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쪽지문을 입력해 보았다. 새롭게 개발된 기술을 통해 쪽지문을 보이지 않는 융선 부분을 추정, 복원했더니 일치율이 가장 높은 지문은 역시 살인범 이○○의 것이었다. 드디어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이씨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 2010년 3월 16일, 경기도 안성의 한 PC방에서 담배를 피고 나가는 이○○의 재떨이에서 DNA를 채취해 분석해보니 살인현장에서 발견된 머리카락과 동일인임이 밝혀졌다. 경찰은 이○○을 체포해 관련증거를 제시해 추궁한 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고 공범 장○○, 심○○도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2010년 4월 13일, 예산경찰서는 홍성렬 살해사건의 용의자 3명을 잡았다고 발표했다.
언론에서는 주로 '전직 교수부부 살인사건' 정도로 알려졌고 증산계통 교단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홍범초 살인사건', '홍사건' 등으로 통한다. 아래 링크 뉴스기사들을 전부 살펴보면 '증산도'라는 교명을 피해 '증산교' 또는 '종교단체'라고만 썼다.
- 과학수사의 힘…9년 만에 덜미 잡힌 '종교살인' (SBS 뉴스, 2010년 4월 13일) #
- 지문 자국이 밝힌 9년 전 살해사건! (YTN, 2010년 4월 13일) #
- 9년 미궁에 빠진 종교 지도자 부부 살해범 검거 (뉴스타운, 2010년 4월 13일) #
- 9년만에 깨어난 지문, 살인자 찍다 (동아일보, 2010년 4월 14일) #
- 집념과 과학수사, 9년 전 살인사건 해결 (스포츠한국, 2010년 4월 30일) #
- 홍성열씨 부부 변사체로 발견 (예산뉴스 무한정보, 2010년 10월 27일) #
프로파일러이자 20대 국회의원 표창원이 사건에 관해 여러 편 글을 썼다.
종교적 배후를 의심할 만한 살인사건의 분석과 피의자 면담조사를 맡은 적이 있다. 이 종교는 일반에서는 이단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전국에 교당을 가지고 았을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그런데 한 신도가 자신들의 교단의 정통성에 대해 계속 문제를 제기해온 전직교수를 살해한 것이다. 경찰은 정황상 살인을 교사한 배후가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피의자는 처음부터 입을 닫아버리고 "다 내 책임이 다. 그냥 처벌해 달라"며 진술을 거부했다
이런 경우는 말문을 열고 대회를 시작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알겠으니까 얘기나 좀 하자 당신에 대해 좀 알고 싶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사건과 관련이 없는 주제로 대화를 시작해 상대방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피의자도 이미 자신의 행동이 옳지않음을 알고 있었고,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부분은 일단 접어두고 심리적 부담이 낮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가장 즐거웠던 기억, 꿈, 취미 등에 대한 대화는 누구와 나눠도 부담없는 소재다. 특히 이 사건의 피의자는 어릴 때부터 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인물로 해당 종교 역시 책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잠깐 잊어버리고 그간의 억눌려 있던 상황을 벗어나 대화의 주도권을 쥐어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을 살인범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라포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리면 대화의 내용을 점차 사건 발생 시점으로 근접시킨다. 그러면 분위기가 조금씩 침울해지고 조용해 지긴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열어놓은 문이 있으니까 갑자기 돌변할 수는 없다. 한번 열린 문이 다시 닫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사안이 사안인 만큼 심리적 저항이 있긴 하지만,이 역시 일정 한계점에 이르게 되면 결국은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 그는 결국 종단의 중견 간부가 자신을 불러 사건을 사주했음을 털어놓았다.
숨겨진 심리학(2011.3 표창원, 토네이도) 160,161p
위 글로 보건데, 표창원이 3인 중 한 명을 직접 대면한 듯하다.
비교적 최근에 쓴 기사도 있다. 표창원은 이 기사에서 홍성렬을 '한국의 살만 루슈디'라고 표현했다. 참고
- 교단의 적 없애러 살인까지 저질렀나 (한겨레, 2013년 9월 8일) #
2.4. 재판[편집]
1심[11] 에서 장○○은 12년형, 심○○,이○○은 18년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12] 에서 장○○은 10년형, 심○○,이○○은 16년형으로 일부 감형되어 현재 대전교도소에 수감중이며 장○○은 2020년 만기 출소했고 나머지 범인은 2026년 출소할 예정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살인사건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다. 2010년 3월 26일, 증산도에게는 불행 중 다행으로 천안함 피격사건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 한 달 이상 전국 언론을 채운 대형사건 보도에 살인범 체포뉴스쯤은 완전히 묻혀버렸다. 그런데 이 사건은 증산도 내부에서 재조명되었다.
3. 플래카드 재판[편집]
3.1. 안병섭·안정주의 증산도 쿠데타와 플래카드 게시[편집]
안세찬은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고 대부분이 증산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나 3남 안중건(안경전), 4남 안병섭(안원전), 5남 안정주가 교단 발전에 크게 힘썼다. 안세찬은 2011년에 3남 안중건에게 후계를 맡기고 2012년에 만 89세 일기로 사망한다.
그러나 안병섭과 안정주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형 안중건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당시 증산도 내부는 이른바 '대두목' 이자 '태극제'[13] 로서 강증산ㆍ고판례와 더불어 거의 신앙의 대상에 가까웠던 안세찬이 개벽이 되기도 전에 사망하자, 신도들은 실망과 충격에 휩싸였다.
교주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과 증산도의 변화를 바라는 전현직 신도들이 다수 있었기에 안정주의 쿠데타는 잠시나마 일부 신도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안정주는 홍성렬 살해사건에 관한 플래카드 문구를 선정해 서울, 대구, 부산, 울산, 강원 등 전국 각지에 게시하게끔 지시했으니 다음과 같다.
증산도는 홍성렬 살인교사, 집단폭력, 성금 비공개를 국민 앞에 사죄하라!
2013년 4월 (증산도교육문화회관 및 전국 주요도시)
홍성렬 사건 진실규명, 성금 및 재정공개, 말도수 등 도전조작 진실규명 촉구!
2013년 5월 4일 (증산도교육문화회관 앞)
증산도는 증산도 쿠데타의 주동자인 안정주를 포함한 플래카드 게시자들을 명예훼손의 혐의로 전국적으로 고소했다. 검찰은 이들 모두에게 50~100만원에 약식기소했고 대전에 거주하는 안정주, 강동훈, 노상균은 이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신청했다.[14] ,[15]
3.2. 살인범 장,심,이의 출석과 고소 취하[편집]
이 재판은 안정주가 기존에 피소된 사건[16] 에 병합되어 심리되었다. 검찰의 공소는 위 3인이 홍성렬 살인사건뿐만 아니라 증산도가 집단폭력을 가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해 증산도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었다.
피고들은 모두 진실규명을 위한 공익적 목적으로 플래카드를 게시했기 때문에 이는 위법성조각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홍성렬 살인범이 모두 증산도 신도이기는 했지만, 증산도 지도부와의 연결고리에 대한 증거는 부족하였다. 이 때문에 재판의 흐름은 살인의 배경에 대해 알아보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노상균은 피고이자 동시에 증인으로서 과거 자신이 증산도의 수석간부로 재직시 관여했던 폭행사건과 동료 간부들이 자행한 폭행사건에 대해 증언했다.[17] 그리고 이 모든 폭력 및 테러는 교주 안중건의 결재 없이는 성립될 수 없음을 강변했다.
재판부는 평범한 명예훼손 사건이 아님을 눈치채고는 살인범 3명에 대한 증인신청도 채택했고, 법정이 꽉 찬 가운데 장, 심, 이가 출석했다. 이 자리에서 위에 인용했던 1999년 10월 증산도 문화소식지가 증거로 제출되었다. 장○○와 심○○은 문화소식지에 기재된 대로, 실제로 안중건이 증산도 신도들 앞에서 홍성렬에 대해 악평한 적이 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재판부는 고소인인 안중건마저 증인으로 채택해 살인사건과의 관련성을 심문하고자 했다. 형사소송법상, 친족이 관련된 재판에는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18] 증산도는 이 점을 들어 증인채택을 취소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안중건을 법원에 강제구인하기로 결정되었고 공판일 직전에 증산도는 소를 취하했다. 판결문을 인용해본다.
증산도에 반기를 드는 이들을 처벌받게 하려다 도리어 아주 불리한 재판기록을 남겼으니 혹 떼려다가 하나 더 붙인 격이다.2014고정661 사건
1) 2014고정661 명예훼손 사건의 공소사실 중 나항은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내용에 불과하여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가 없어 공소사실 자체로 범죄로 되지 아니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상당하다.
2) 가항의 공소사실 중 ① '집단폭력' 부분은 증인 고○○, 노상균의 각 법정진술 (증산도 행정실장 이○○의 지시를 받고 증산도 신도 고○○ 등 네 명이 김○이라는 사람을 집단으로 폭행하였고, 이후 증산도 대표자인 안중건으로부터 100만 원의 사례금을 받았으며, 노상균이 증산도 수석 수호사일 때 신도들을 동원하여 이○○, 임○○, 최○○ 등을 납치·폭행한 사실이 있으며, 강○○ 수호사는 김○○라는 사람을 쇠파이프로 내리쳐 폭행한 사실이 있음)에 의하더라도 사실인 것으로 보이며, ② '홍성렬 살인 교사' 부분은, 홍성렬 살해 사건의 정범인 장○○, 이○○, 심○○는 모두 증산도의 독실한 신자들이었고, 살인 교사범인 이○○은 증산도사상연구소의 행정실장으로 신앙이 깊고 주요 보직에 있던 간부였으며(장○○은 이○○으로부터 활동비 150만원을 받은 사실이 있음),증인 노상균의 법정진술(안중건 등이 도훈이라는 교육을 통해 '천지에 정의가 있다면 어떻게 홍성렬 같은 놈이 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겠느냐, 우리 신도 가운데 정의로운 사람이 한 명만 있다면 어떻게 홍성렬이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느냐라 는 발언을 한 바 있음) 및 증산도 문화소식(1999년) 중 안중건 기고글 "개벽의 혼불, 제세핵랑군"등 증거에 의하면 증산도 교단에서 (증산도를 비판하던) 홍성렬을 제거할 것을 암묵적으로 지시하였다고 볼 정황이 여럿 존재하므로,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 만으로는 2014고정661호 사건 공소사실 가항과 같이 피고인들이 적시한 내용이 허위 라는 점에 관한 증명이 부족하다고 볼 여지가 상당하다.
3) 그러나 이 사건 각 명예훼손죄는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 할 수 없는 죄(형법 제307조 저12항,제312조 제2항)인바, 피해자 재단법인 증산도유지 재단은 이 사건 공소제기 이후인 2015. 3. 12. 위 사건과 관련하여 피고인들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의사를 표시하였으므로,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6호에 의하여 피고인들에 대한 위 사건의 공소를 기각한다(형식적 소송조건의 흠결이 있는 이상, 법원은 유·무죄 선고를 할 수 없고, 공소기각의 재판을 하여야 한다. 대법원 1994. 10. 14. 선고 94도 1818 판결 등 참조).
대전지법2013고정717 판결문 10~11p
3.3. 플래카드 민사재판[편집]
증산도는 형사고소와 동시에 김병철, 강동훈, 노상균에게 각각 2천만 원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그러나 손해배상의 근거인 형사사건에서 패소함이 결정적이라 1심[19] 에서 패했고 항소심[20] 에서도 패소했다. 상고심[21] 에는 국내 유수의 법무법인을 수임했음에도 기각되어, 현재 홍성렬 살인사건 규명을 요구하는 플래카드와 관련된 모든 민,형사재판은 증산도의 패배로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