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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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사 용어
3. 형성
4. 부류
5. 해악
6. 역사 속의 암군
7. 가상의 암군
7.1. 전략 게임에서의 암군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암군()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일컫는 단어다.


2. 유사 용어[편집]


혼군(), 암주()와 동의어고, 사전에선 암군과 암주의 뜻을 「=혼군」이라고만 적기도 한다.

암군은 폭군과는 따로 보는 게 합당하다. 폭군은 신하와 백성들을 폭압적으로 대하면서도 통치 자체는 잘 하는 경우도 있다. 러시아이반 4세,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이 대표적이고, 신하들을 걸핏하면 숙청했던 홍무제영락제도 이런 부류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암군은 절망적일만큼 정치에 대해 무능해서 국가 막장 테크를 초래하는 행동 자체가 필수 요건이다. 이를테면 수양제는 폭군이면서도 암군이지만, 만력제처럼 암군이지만 폭군이 아닌 경우도 있다. 둘은 교집합이 있지만 서로를 포함하는 관계는 아니다.

때로는 암군이 폭군보다는 비교적 나을 수도 있는데, 아랫사람이 유능한 경우 그럭저럭 나라를 유지할 수는 있어서이다. 물론, 성군에 비빌 수준은 아니지만 최소한 폭군이 보이는 밑바닥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갈량 시절의 유선이 있다.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군주 본인은 어리석지만, 적어도 백성들에게는 온화하고 인자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솝 우화의 '왕을 원한 개구리들'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여기서 '암군'은 통나무, '폭군'은 천적인 두루미다.

물론 폭군은 그 문제점을 빠르게 인식하고 갈아치울 수는 있지만, 암군은 끓는 물의 개구리처럼 나라를 천천히 처치불능으로 망가뜨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암군이 더 문제가 있다고 보는 측도 있다.

3. 형성[편집]


세습제의 군주가 유능할지 무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투표로 가려 뽑은 대통령, 총리, 국회의원들도 무능한 자들이 있는 마당에, 가만히 있어도 핏줄 잘 타고난 대가로 거저 먹는 왕이란 게 한 나라의 역사에서 항상 유능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당연히 당대에도 이런 점을 감안해서 어린 시절부터 각종 정치, 역사, 인문학에 인성 교육까지 빡세게 시키면서 능력을 키웠다.

조선 왕조에선 '경연'이라고 해서 왕이 신하한테 꾸준히 재교육을 받았을 정도이다. 경연에서 오히려 신하들한테 재교육을 시킨 먼치킨들[1]도 있긴 하지만 그런 분들은 이 항목과는 거리가 머니 넘어가자. 이렇게 교육시켜서 최대한 왕의 능력을 키워서 능력에 책임감까지 갖추게 하려고 왕실과 신하들까지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해도 왕의 자질이란 것은 어떻게 보면 로또인 데다가[2][3] 교육으로 능력은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어도 인성이나 책임감은 어떻게 안된다. 궁전에서 차기 후계자로 태어나 곱게 자라난 왕조의 첫 번째 군주인 콤모두스연산군이 교과서적인 폭군이 되었다는 사실이 대표적이다.[4]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오냐오냐 해주면서 컸는데, 제아무리 세뇌에 가깝게 인성 교육을 시켜도 기본적으로 그냥 눈앞에 떡하니 있는 엄청난 권력을 자제시키면서 그에 따라오는 책임을 그냥 순순히 따르게 하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현대에서도 재벌 2세나 3세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조그마한 완장만 차도 거들먹거리고 일은 대충 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하물며 국가 지존의 자리인 왕이 되면 어떻겠는가?

그렇기에 어느 국가라도 왕정을 거쳤다면 거의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암군이 나타난다. 이는 후계자의 능력을 담보할 수 없는 왕정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근친상간이 성행한 유럽 왕실의 경우에는 왕으로서의 능력 정도가 아니라 카를로스 2세사마덕종처럼 아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장애를 가진 국왕도 가끔 즉위했다.

암군의 원인에는 노쇠도 있다. 보통 명군이었던 이도 말년이 되면서 매너리즘레임덕 등으로 암군의 진가를 드러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로 루이 14세양귀비에게 빠져 그간의 업적을 다 말아먹은 당현종, 청나라건륭제 등이 있다.

브라질 페드루 2세처럼 사실은 제대로 된 명군이 당대에는 암군으로 평가되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암군 또한 의외로 자질 자체는 명군 못지않은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비정상적인 왕권 강화로 일시적으로는 왕권이 강화되나, 제도 개혁을 제대로 이루지 않고 본인의 권력을 위해서만 움직인다는 점이다. 결국 그런 암군이 죽고 나면 구속력을 잃은 권력이 대체로 귀족이나 주변 왕족, 제후들에게로 넘어가버린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후반의 천황들은 조코(상황, 上皇)와 인세이 같은 비정상적 제도[5]로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권한만 후지와라 가문을 거쳐 무사들에게 넘어가 버려 명목상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라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은 무리한 왕권강화가 나중에 거대한 후폭풍으로 돌아와 나라를 뒤흔드는 사례는 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이 문제는 심지어 세도정치 혼란기의 원인을 제공한 조선 순조의 부왕 정조에게도 해당하는 문제일 수 있다. 보통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는 왕권의 강화가 개혁으로 인식되기는 하지만 이전보다 강화시켜놓은 왕권을 물려받은 후계자가 혼군이어서 총신들, 친인척들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대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예상보다는 빨리 죽은 경우가 다수인지라 '암군'이라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어느정도는 후계자의 능력에 의해서도 선왕의 암군 여부가 결정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는, 암군이 사후적 평가에 의해서만 좌우된다는 뜻은 아니다. 후계자 교육 또한 중요한 정치가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권력을 소유하고, 선정을 펼 기회가 주어졌는가도 중요한 전제요소이다. 암군이라고 평가되는 인물들은 충분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으면서도 그 권력을 국가 발전을 위해 쓰지 않은 자들인데, 그래서 강한 신권이나 대리청정으로 인해 사실상 장식이나 꼭두각시에 가까운 인물[6]들은 보통 암군으로 여기진 않는다.

암군의 옆엔 항상 간신들이 붙어다니기 마련이다. 당 현종 말년의 이림보, 양국충, 안록산, 인조김자점 등이 있다. 다만 고려의 암군들은 간신보다는 자신의 이상이 좌절되는 스트레스로 인한 경우가 많았는데 거듭되는 반란으로 지친 인종, 문벌귀족에게 좌절한 이후 술독에 빠진 의종과 무너져가는 나라를 되살려보려 노력했지만 평생의 반려이자 강력한 후원자인 노국공주가 사망하면서 실의에 빠져 결국 신돈에게 정국을 맡긴 공민왕이 대표적인 예이다. 대체로 이러한 암군들의 경우는 초기에는 잘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사를 멀리해 변해버린 왕들이 다수. 대체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암군들은 생각보다 흔했으며, 결국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암군이 되지 않는 방법 중 하나였다.

신라혜공왕 같이 단순히 실권이 없었던 군주를 암군이라고 단정짓긴 어렵다. 이런 논리대로면 고구려보장왕, 고려 후기의 임금들, 조선정종, 단종, 헌종, 철종, 순종 등도 죄다 암군이다. 물론 통념을 따르자면 그들에게서도 모든 책임이 없다라고 말할 순 없다. 어쨌든 그들은 왕정국가에서 국가의 톱인 왕이었지 않은가? 실권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게 면책되지는 않는다는 견해다. 단지, 여기서 정의한 타입의 '암군'이 아닐 뿐이다. 아비뇽 유수 시절의 교황들도 실권 없기로는 다 마찬가지다. 다만, 정종과 나이 어렸던 단종 이외의 조선 국왕들은 결코 실권이 없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애당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부터가 철저히 왕권에 기생한 것이었고 왕위의 향배에 따라서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것이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정권 교체라든지 고종 즉위 이후 안동 김씨가 별로 힘을 써보지 못하고 권력을 내놓은 것이 그 반증. 사실 그 시기 국왕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면 세도정치고 뭐고 바로 청산할 수도 있었을 만큼 조선의 왕권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것이었다.

의외로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암군이 아닌 경우도 꽤 된다. 오히려 왕조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자들도 있으며,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마지막 군주가 명군, 더 나아가 성군으로 평가받는 극단적인 케이스도 있다.[7] 예를 들어 후한헌제는 아예 실권이 없어 나라를 망치건 뭐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실권을 되찾기 위해 조조 암살을 계획하는 등 최후의 발악이나마 했다. 명나라숭정제원숭환 처형 같은 실책도 있으나 쇠퇴해가는 명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황제였다. 그가 마지막 황제가 된 것도 후계 가운데 총명했기 때문이다. 신라경순왕 역시 주적 후백제에는 있는대로 저항했고 가장 적절한 시기에 고려에 항복해 신라 백성 및 귀족을 지켰다는 평을 받으며, 고려공양왕도 고려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분석이 많다. 심지어 선정을 펼친 성군이었던 페드루 2세는 노예 해방에 대한 대지주의 불만으로 퇴위당했고 이후 왕정이 폐지되었는데, 쿠데타를 벌인 지배층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좀 더 포괄적으로 보자면 정상적인 계승이 힘들어 구원투수 형식으로 방계의 비교적 유능한 인물들이 왕위에 올랐고, 가능한 한 최후의 발악이라도 했지만 이미 대세를 뒤엎을 수 없던 상태였다. 왕은 아니지만[8]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도 재능은 있는데 실권이 없어 막부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고생했다. 심지어 브라질의 마지막 황제인 페드루 2세는 퇴위하는 날까지 국민들 사이에서 성군으로 칭송받았고,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군주인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아프간에서는 국부로 칭송 받는다. 다만 이러한 경우 거의 무조건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높은 확률로 전대나 전전대 임금이 암군이다.[9] 이러한 사례들은 군주로서의 능력은 떨어지지 않았으나 왕조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군주 한사람이 막을수는 없었다는 것으로 명군이나 암군에 의해 역사가 좌지우지된다고 보는 영웅사관에 대한 반례로서 자주 제시된다.

통념은 암군이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재평가 시도가 나타나는 암군들도 적지 않다. "실은 유능했는데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이 가해졌다."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식 평가나 "결과는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다."는 졌지만 잘 싸웠다식의 평가로 나뉘는데,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루이 16세, 일본도쿠가와 츠나요시 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역사학자들의 논쟁부터 시작해서 인터넷 역사 커뮤니티에서도, 이런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키배가 벌어지는 현상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이마저도 실드가 안된다면 '그래도 성격은 좋다.'라는 동정론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능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심지어 송양공, 건문제처럼 도를 넘은 선함으로 적에게까지 자비를 베풀다가 망해버린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에는 그 착한 인성도 무능함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이는 현대의 재해석만이 아니라 전근대에도 제왕학을 연구하면서 지적하던 부분이며, 송양공의 행적을 가리켜 송양지인이란 말이 나오는게 그 때문이다. 해당 군주 입장에선 그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없이 사치를 즐긴 군주'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던[10] 과거에 비하면 '성격은 착했지만 무능한 게 문제였던 군주'라는 평가가 차라리 덜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4. 부류[편집]


크게 보자면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아예 나라를 운영하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관심은 충분하고 의욕적인데 능력이 못 따라오거나 능력은 있으나 국가 상황이 너무 어려운 경우. 전자의 암군들은 주로 노는 일이나 취미생활에 전념하면서 국정은 신하들에 떠넘기는 등 아예 국정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추구하려던 일이나 업적이랄 게 아예 없다. 반면 후자의 암군들은 무언가 의욕적으로 국정을 하려고는 하는데 군주 자신의 능력 부족, 혹은 시대적, 국가적 상황으로 인해 삽질이 되거나 망하는 결과가 나와 암군이라고 불리게 된다.

가끔 이 두 가지 경우가 합쳐진 최악이 역사에 나타나기도 한다. 단순히 놀고먹는 걸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황음무도하여 매우 열심히(?) 노느라 국력이 크게 소모되는데, 정작 통치 자체도 열심히 하기만 하지 실정의 연속인지라 국력이 더욱 소모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사태가 벌어지는 경우이다. 대표적으로 수양제를 들 수 있다.


5. 해악[편집]


암군은 보통 무능하거나 어리석거나 삽질을 저질러 막장을 초래한다. 군주의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어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암군의 치세에는 나라가 망하거나, 망하기 직전이 된다. 반대로 능력은 부족하면서 쓸데없이 부지런하고 독선적이서 사단을 벌이는 왕도 암군에 속한다. 특히 왕조가 쇠퇴기에 접어드는 시기의 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전임자가 잘나거나 나라가 튼튼하면 대충 버티므로 여기에 포함시키지는 않는 편이다. 중국의 사서나 역사소설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야, 이 혼군아!"라고 욕하기 시작하면 갈 데까지 간 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왕정시대에 왕에게 욕을 한 신하는 보통 끔살당한다.

그래서 "명군 같은 암군이 더 위험하다."[11]란 말도 있다. 암군 재위 기간동안 국가적 모순이나 위기가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누적된 문제가 재위 말년이나, 사후가 되어서야 거대한 위협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며 막상 눈에 띄어 해결하려고 해도 어지간한 능력자조차 해결할수 없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게 된다.


6. 역사 속의 암군[편집]


  • 검증된 사람만 추가한다.
  •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을 경우나,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태국, 모로코,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완전한 입헌군주제하의 군주는 제외한다.
  • 공화정 체제의 지도자도 기입하지 않는다.
    • 독재자 역시 기입하지 않는다. 단, 군주에게 실권이 없는 국가의 실권자들(예: 막부 정권의 쇼군 등 전근대 일본의 실권자[12])이나 세습적 통치를 이어나간 독재자들(예: 북한김일성-김정일-김정은), 군주 없는 군주국의 섭정으로서 독재를 저지른 인물은 예외로 간주한다.

  • ★: 폭군으로도 평가를 받는 경우
  • ◆: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경우[A]
  • ◇: 육체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A]
  • ▲: 시해 또는 전사당한 경우
  • △: 폐위되거나 강제로 양위당한 경우
  • ◎: 역사 왜곡, 관점 차이 등의 논란이 있어 평가가 극명하게 갈려 암군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경우. 논란이 있는 경우 관점에 따라 충분히 명군이라고 볼 수 있다.


6.1. 동아시아[편집]



6.1.1. 한국[편집]



6.1.1.1. 삼국시대[편집]

  • 고구려
    • 모본왕(48 ~ 53)★▲◎ : 역사 왜곡일 가능성이 있다.
    • 차대왕(146 ~ 165)★▲ : 태조대왕의 아들들을 살해하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결국 명림답부에게 시해된다.
    • 봉상왕(292 ~ 300)★△
    • 고국원왕(331 ~ 371)▲ : 고구려의 잃어버린 40년으로, 훌륭한 군주인 아버지 미천왕이 한사군을 정복하며 고구려를 만주, 한반도 내 최강의 고대 국가로 완성해 놓은 이점을 이 무능한 아들이 다 날려먹었다.[13] 고국원왕 치세 동안 고구려는 별의별 난리들을 다 겪었으며, 심지어 고국원왕 본인은 친정 중 전사했다. 물론 그 당시 적국이었던 백제는 근초고왕이 통치하는 최전성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해도 고국원왕의 치세는 연달아 고구려에 부담을 안겼다. 특히 고대국가로서의 정비가 신라, 백제보다는 훨씬 빨랐다는 이점을 가진 고구려가 이 무능력한 왕 치하에서 헤매는 틈을 타 백제는 빠른 체제 정비와 마한의 반복속을 완료했고, 신라 역시 진한 지역을 거의 통합하여 내실을 다졌기에 고구려로서는 한반도 남부의 권력 공백 지역을 비교적 적은 수고로 복속할 골든 찬스를 통으로 날린 꼴이 된다. 이후 소수림왕, 고국양왕을 거쳐 광개토대왕때 돼서야 고구려의 전성기가 도래하기 된다.[14]
    • 문자명왕(491 ~ 519)◎: 선대의 전성기는 그럭저럭 유지했으나, 모순점을 많이 남겼다. 사실상 고구려 중후반기 침체기의 근원. 그러나 나라가 대놓고 기울지는 않았다는 점에서[15] ◎ 표시를 추가.
    • 영류왕(618~642)▲◎ : 지나친 친당정책으로 내부의 불만을 초래하였으며, 결국 그 대가로 본인도 죽임을 당한다. 이후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독재 체제가 되고 연개소문의 후계자 선정 실책이 곧바로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명장이었던 만큼 능력은 있었고[16] 마냥 폭군, 암군은 아니었기에 ◎ 표를 추가한다.

  • 백제
    • 진사왕(385 ~ 392)▲
    • 아신왕(392 ~ 405) : 적어도 보통 수준 그 이상 되는 임금이었지만, 너무나도 아집과 독선이 심했고, 더군다나 상대는 그 광개토대왕이었으니 더 큰 문제였다. 결국 고구려에게 매번 패배하였으며, 최후조차 전쟁에 휘말려 시해되었다고 추정될 정도이다.
    • 개로왕(455 ~ 475)◎ : 도림과의 바둑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와 도미 부부 설화로 암군이란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고, 그의 치세에 백제가 한성을 잃고 남쪽으로 패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러 연구를 통해 나름대로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썼다는 평가도 있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 치세라 상술한 아신왕처럼 상대가 너무 강했다는 쉴드도 한 몫 했다.
    • 동성왕(479 ~ 501)▲ : 집권 중후반까지만 해도 나라를 잘 이끌어갔지만 꾸준히 벌여온 왕권 강화 정책으로 인해 웅진 토착세력의 반발을 샀으며, 말년에는 신하들의 구휼 요청도 무시하고 궁에 틀어박혀 향락만 즐기는 등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듯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위사좌평에까지 임명하며 신임하던 신하 백가가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시해된다.
    • 의자왕(641 ~ 660)△◎ : 이에 대해서는 최종 승자인 신라 측의 조작이 아니냐는 의견도 꽤 있는 편. 하지만 부친 무왕 때까지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 것을 끊어낸 말년의 외교 판단으로 대당관계를 파탄내서 당과 신라의 양면 협공을 초래했다는 점은 명백히 비판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의자왕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앉히는 등의 무리한 왕권 강화 노력 때문에 백제 귀족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결국 예식진 같은 매국노에게 붙잡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을 강요당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 신라
    • 진지왕(576 ~ 579)△◎ : 방탕한 짓을 일삼다가 폐위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는 귀족과의 갈등 끝에 폐위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 선덕여왕(632~647) : 그녀의 치세때 신라는 최악의 내우외환의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전란을 마주한 상황에서 그 위기를 해소할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불사에 치중하여 국력 탕진을 가속화하는 등 여러 실책들로 인해 대중적 인식과 달리 학계에선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이다.




6.1.1.2. 남북국/후삼국시대[편집]

  • 통일신라
    • 혜공왕(765∼780)▲◎ :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그로 인한 왕권 약화로 인해 국정에 손을 놓은 조선 순조와 비슷한 임금이었다. 다만 한국 역사상 왕족들의 권한이 가장 컸던 나라가 바로 신라였고, 이후 왕족들이 계속해서 사직을 어지럽히는 반란을 수없이 일으켰으며, 왕족들의 사치가 극에 달했다는 비판이 삼국사기동국통감에 나왔다는 점에서 보면 왕족들도 혜공왕의 문제를 가볍게 뛰어넘었다는 관점과 문무왕의 정치를 본받아서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을 보면 완벽한 암군이라고 분류하기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참고로 혜공왕 사후부터 평생 태평성대만 누릴 것만 같던 신라도 점점 기울어 가기 시작한다. 통일 후 약 100년 후의 일이다.
    • 헌덕왕(809 ~ 826) : 사실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답이 없는 통일 신라 최악의 암군이다. 개혁을 실시하려던 조카 애장왕을 시해한 후 찬탈했지만, 백성들을 못살게 굴거나 기근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감에도 본인은 70대 관료랑 가야금 틀면서 춤이나 추는 등 가뜩이나 망가져 가던 나라를 본인의 향락과 실정으로 더 망가뜨리기만 하였고, 게다가 기근이 발생하고 도적 떼가 창궐하고 김헌창의 난과 같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며, 이 틈을 타 발해 선왕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핑계로 침략해 오는 등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재난이 있었지만, 왕 본인은 뭐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했고 하려는 노력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김헌창의 난을 재빨리 진압했다던지 뒷일을 염려하고 종축 중심의 방어 성곽을 구축해 암군으로 보기 어렵다는 측도 있으나, 그의 노력이 장보고의 난으로 일순간에 날아가버렸다는 점, 그리고 그것 만으로 왕으로서의 여러 행각들이 옹호받기 어렵다는 점에서 모진 비판을 피할 순 없다는 게 중론리며 결론은 논란이나 재평가의 여지라도 있는 다른 통일 신라의 암군 후보들과 달리 이 자는 빼도 박도 못할 암군이라는 것이다.
    • 진성여왕(887 ~ 897) : 흔히 매체에서의 언급 탓에 암군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기록만 가지고 마냥 암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미묘한 게 사실이다. 오히려 그녀에게 실책을 일방적으로 다 떠넘겼다는 평가 역시 공존하는 중이며 더군다나 이 무렵의 신라는 이미 진성여왕 즉위 전부터 답이 없어진 나라였다. 다만, 농민들이 각지에서 못 살겠다며 난을 일으키는 혼란기였음에도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해 혼란상을 나 몰라라 하고 방치만 한 점은 명백히 쉴드 여지가 적은 편이다.


  • 후백제
    • 견신검(935 ~ 936)▲△ : 다만, 이 쪽은 아버지 견훤의 무리한 후계자 선정에 대해 반발하는 입장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신검은 견금강이 왕위에 오르는 순간 목이 짤릴 것이 너무 명확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적국인 고려에 귀순하자니 딱 삼국지원담처럼 비참하게 죽을 확률이 100%였으며 과장이 아니라 아버지와 동생을 몰아내는 패륜을 저지르는 것이 그나마 신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 태봉
    • 궁예(901 ~ 918)★▲△ : 무리한 철원군으로의 천도, 관심법 같은 조악하고 엽기적인 왕권 강화 방식 등등으로 인해 호족들의 거센 불만을 샀고, 결국 그나마 믿었던 왕건배신쿠테타로 인해 참혹하게 몰락하고 만다. 그렇지만 지금은 역사학계 내에서 재평가 논쟁이 있다. 대표적으로 승자 왕건을 위해서 기록 축소나 인물평이 깎아졌냐는 논란. 하지만 말년을 제외하면 암군이 아니었다는 증거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는 의자왕과는 달리, 궁예는 오히려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점점 불리한 쪽으로 향하고 있다.


6.1.1.3. 고려[편집]

  • 정종(3대)(945 ~ 949)◎ : 처음부터 왕의 자리에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북쪽 호족[17]들의 도움을 받아 왕규의 난을 계기로 사실상 왕규 세력을 몰아내고 집권하였다. 하지만 재위기간 내내 자신의 즉위를 도운 왕식렴 세력에게 휘둘리다시피 했으며 왕권강화를 위해 시도한 서경 천도와 광군 양성은[18] 온갖 무리수가 난무한 탓에 왕권 강화는커녕 민심 이반만 불러오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9] 결국 얼마 있지 않아 재위 4년만에 죽고 동생이 뒤를 잇게 된다. 하지만 그가 죽는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기록이 있어 최종 승자인 동생 세력에 의해 기록이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20]

  • 목종(997 ~ 1010)◆△◎ : 초창기에는 적극적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자신을 지지해주어야 할 모후 천추태후김치양과 불륜을 저지른 걸로도 모자라,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를 왕위에 올리려는 짓까지 벌이자 멘탈이 나가버리면서 암군이 되었다. 게다가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엉뚱하게도 남색에 빠져버리면서 결국 강조의 정변제2차 여요전쟁을 일으키는데 일조하고 말았다.

  • 의종(1146 ~ 1170)▲△ : 무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암군이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는 임금. 그러나 의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더더욱 막장이었는지라, 의종 복위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는 게 아이러니다.[21]


  • 공민왕(1351 ~ 1374)▲◎ : 노국대장공주 사후 그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임금은 결국 정사에 소홀해졌고, 결국 홍륜에 손에 시해당하게 된다. 다만 공민왕 말엽의 난행이 기록되어있는 고려사가 조선 왕조에서 편찬되었기에 어느 정도 폄하되어 있을 여지가 크며 난행도 과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 우왕(1374 ~ 1388)▲△◎ :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이인임에게 휘둘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온갖 기행들이 세세히 기록된 것을 보면 멀쩡한 임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왜곡과 윤색이 가해지고 거기에 혈통 논란으로 폄하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동정은 가능할지언정 왕으로서 보인 행보에 대해서는 모진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특히 요동 정벌 시도만큼은 빼도박도 못하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6.1.1.4. 조선 · 대한제국[편집]

재위 기간이 짧았거나(정종, 문종, 단종, 예종, 인종, 경종 등) 힘을 쓸 수 없던 임금(정종, 단종, 철종[22], 순종 등)은 제외.

  • 세조(1455 ~ 1468)★◎ :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사정권이 쿠데타로 들어선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조를 잔혹한 숙청만 빼면 어떤 결점도 없는 성군으로 미화하는 경향이 강했고, 심지어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조차 '어쩔 수 없는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식으로 해서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세조가 처음으로 부정적인 면으로 재평가를 받을 때도 계유정난이라는 비인륜적인 행위와는 별개로 왕으로서는 명군이었다는 긍정적인 평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세조의 각종 취약점들이 재조명되면서 암군이라는 악평이 꽤 늘어났으며, 세조 따위를 명군이라고 평가하는 것부터가 조선시대의 진짜 명군들[23]에 대한 모욕이라는 평가도 은근 있다. 물론 세조는 군사정권 시절에 받은 명군이라는 평에 어울리게 긍정적인 업적도 꽤 남겼지만,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게 제대로 발목을 잡고 있다. 아버지이 기껏 만들어 놓은 국정 시스템을 뒤바꾸는 동시에 생각 없는 공신 우대 정책을 펼쳐서 한명회를 비롯한 권신들을 스스로 만들어 냈고, 재위 말기에 그나마 구성군 등 신공신을 등용해 구공신에 대한 견제책으로 삼았지만, 구공신 견제를 제대로 못한 실책이 컸다. 조선 중기의 국방력 약화 또한 세조의 군사적 실책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에 한창 미화될 때와 같은 찬양 수준의 호평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그러나 일단 긍정적인 업적들도 있다는 점에서 ◎표를 추가한다. 호불의 군주로서, 조선 선대 왕들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자칫하면 사라질 뻔했던 수많은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의 불교 문화유산을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준 점, 훈민정음이 널리 보급되게 한 점,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하여 일반 백성이 부패한 수령을 고소할 수 있게 한 점, 경국대전을 만들기 시작한 점들[24]이 좋게 평가를 받고 있다.

  • 연산군(1494 ~ 1506)★△ : 무오사화 이전까지만 해도 폭군은커녕 암군과도 동떨어진 군주였고, 무오사화 때 잠시 흔들리다가도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나름 진정되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 2년간 저지른 패악이 그 원인과 그 이전 10년의 행적으로도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갑자사화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쉴드가 있지만, 이게 뭔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성종의 두 후궁은 윤씨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으며[25], 조선시대의 율법으로는 부친의 후궁 역시 모친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해야 하므로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명백한 패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록상으로도 이미 연산군은 즉위 혹은 그 이전부터 모친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갑자사화는 윤씨의 죽음을 빌미로 양신을 숙청하고 전제권력을 얻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전제권력을 거머줬기는 했지만, 권력을 무분별하게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놀아재끼면서 권력남용을 했기에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 및 시스템을 망가뜨렸고,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 시대가 조선 시절 전체 중에 가장 왕권이 강한 시기였던 만큼, 이후에는 군약신강 기조가 이어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산군은 폐비의 소생인데다가 이후 중전이 된 정현왕후아들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즉위할 때도 모자란 데 없이 즉위하였다.

  • 중종(1506~1544)★◎ :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왕권 강화만을 위해 조광조, 김안로 등의 공신들을 꼭대기에서 고꾸라뜨리는 권력 암투에만 골몰하였다. 조광조와 김안로의 행적에 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지만, 권력의 최정점에서 한순간에 고꾸라트리는 식의 권력 암투로 인해 중종 재위 내내 수많은 사화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중종은 폭군의 대명사인 이복형 연산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 복성군까지 죽이기까지 했다.[26] 중종 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으로는 몰랐겠지만, 연산군 대에 개발된 연은분리법을 폐지한 것은 일본의 경제력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나비효과가 되어서 돌아왔다.

  • 선조(1567 ~ 1608)◆◎[27]:조선왕 중 연산군이 제일가는 폭군이라면 대중적으로는 선조는 조선 제일의 암군이다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인사를 포함해서 능력 자체는 조선의 역대 임금들 통틀어서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나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28]해서 대신들의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특진시키는 것을 밀어붙였다. 그야말로 임진왜란 이외에는 의외로 꽤 뛰어난 임금의 면모를 생각보다 많이 보였던 것. 동의보감 편찬 명과 훗날 대동법의 모태가 되는 대공수미법을 시행하여 민생을 살피기도 했고, 붕당을 적절히 이용해 취약한 정통성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등 준수한 내치를 이끌었다. 그리고 여진족이 강세해지자 노토부락을 정벌하는 등 임란 이외에는 외치에서도 평타 이상은 쳐 주고 있었다. 하지만 혼란의 포문을 연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장한 측면이 컸으며, 결정적으로 임진왜란의 활동은 전형적인 암군 그 자체이자 의심병 말기 환자의 행보라고 봐도 무방하다.[29] 충무공을 내리고 원균을 앉히는 결단은 어떤 의미로 봐도 실로 대단하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아들이랑 이순신이 잘 나가는 게 두려워서 끊임없이 견제를 놓은 찌질이이자 소인배였다. 참고로 광해군은 어차피 자기 아들이자 후사를 이을 인물이고[30], 이순신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인의 손으로 직접 등용해서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하는 것은 제 살 까먹기나 다름없는 한심한 짓이었다. 한 마디로 편협하고 옹졸한 인격을 가진 인물.[31] 무엇보다도 임란이 터지자 바로 파천을 궁리했던 점도 크게 까이는 부분이다.[32] 물론 위에 나온 내용처럼 초/중/후반부의 업적이 탁월한 임금이라서 전쟁 이전(목릉성세, 인재발탁)이나 이후(중립외교, 국가재건)에나 선견지명에 가까울 정도로 각종 정책과 국가 비전을 쏟아낸 점에선 임진왜란의 찌질한 모습만 없었다면 성군은 몰라도 통치 한정 명군은 될만한 의외의 인물이다. 공과가 양쪽 모두 엄청난 인물이지만, 연산군의 10년의 태평성대가 2년의 폭정을 덮을 수 없었듯이 기축옥사와 임란 7년의 추태 때문에 실제의 업적과는 별도로 '교육적으로 본받아선 안 될 암군', '리더십이 부족한 지도자의 병폐'라는 정도의 평이 어울린다.[33] 이외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는 평도 있다.

  • 광해군(1608 ~ 1623)★△: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연산군과 더불어 폭군으로 여겨져 왔고, 근현대에 와서는 재평가의 기류도 많았으나, 결국엔 연산군 급은 아니더라도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이 다수다. 세자 시절 광해군은 임진왜란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줌으로써 명군의 재목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는데,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34] 열심히 국가를 말아먹었고 결국은 폐출됐다. 따라서 광해군이 무익한 암군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긍정적인 총평을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특히 내정에서 가혹한 궁궐 공사로 재정파탄을 초래했으며, 세자였을때와 달리 민간 사회의 복구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고, 대동법 같은 산업 혹은 구휼정책에 대체로 시행 반대를 해왔으며, 많은 신하들과 왕족을 죽이는 옥사를 벌이고 국가를 망가뜨렸다. 특히 영창대군을 무리하게 죽이는 등 패륜을 일삼았고 간신배들을 끼고 살며 그 똥물에 본인도 자멸했다. 그럼에도 최근 일각에선 임진왜란을 비롯해 이순신 등을 주제로 한 영화드라마가 성행, 전술한 선조의 의심병 말기 환자짓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되었고, 마치 사도세자의 비극과 같은 류로 광해군도 저것에 악영향을 받은 바람에 미쳤을 것이라는 동정 여론도 많이 생겨났으나, 여전히 암군임에는 분명하고 후대나 선대에 비해서 딱히 낫다고 보기 어렵다.

  • 인조(1623 ~ 1649)★[35]: 다방면으로 말아먹었지만 특히 외정 측면에서 실책(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많이 저질렀다는 평가가 있다.[36] 정묘호란과 이괄의 난은 누가 봐도 자신의 실정으로 일어난 일이고, 병자호란 때는 아예 선전포고문까지 먼저 보내는 초대형 실책까지 저질렀다. 여기에 청이 병자호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로는 정묘호란으로 청나라가 숨통이 트여서 일어난 일이기에 결국 이것도 자신의 무능력으로 초래한 측면이 상당하다. 큰아들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으로 후계 구도와 효종의 계승 명분을 개판으로 만들어버린 결과 증손자까지 피해를 보게 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크다.[37] 내치 측면에서는 광해군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말년을 제외하고는 꾸준하게 한 게 없다. 나라를 말아먹은 자와 아무것도 안 한 자의 차이다. 또한 나라를 수차례 전쟁통으로 끌어내렸고 뜻있는 신하들을 수없이 죽였으며, 권신과 측근들을 꾸준히 등용하며 부정부패까지 유발, 광해군 시절보다도 더 많은 민란에 시달렸다. 광해군 및 북인의 부패와 만용을 타파한다며 인조반정을 일으켜놓고 사실상 똑같은 짓을 한 셈인데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연산군부터 인조까지 오랜 기간동안 암군 및 외세의 침입을 겪은 조선은 이 사람의 아들인 명군 효종대에 와서야 회복된다.

  • 순조(1800 ~ 1834): 세도정치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여 삼정의 문란을 방치한 왕으로 평가된다. 사실 순조는 인간적으로는 호인이었고, 정치적으로도 어지러운 시국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어느 정도 개혁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였던 영조와 아버지 정조처럼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정국을 주도하였던 선조들의 능력을 본인이 잘 따라가지를 못했고, 결국 끊임없는 난세에 지쳐버려 정무에 손을 놓아버렸다. 물론 고조할아버지였던 숙종 이래로 직계 선조들이 양난 후의 조선을 한 개인의 위엄쩌는 카리스마로 움직이게 만들어 놓은 운영체제에서, 험난한 정치적 풍파와 여러 암살 위협 속에서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영조, 정조와는 달리 순조는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즉위하여 초기부터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타이밍과 시절만 잘 만났더라면 암군 정도까지 평가받을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동정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세도 정치의 씨앗을 남긴 부왕 정조도 최근 들어서는 평가가 나빠지고 있다.[38] 어쨌든 결과론적으로 순조는 유능한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조선 몰락의 시초를 제공한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기다 자신의 왕위를 이어받아야 할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도중 23세에 요절한 것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

  • 고종(1863 ~ 1907)△◎[39]: 우유부단한 망국의 군주라고 까이거나 선대들의 실책을 떠안은 조국의 독립에 애를 쓴 비운의 군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일단 그 당시 ,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의 주변 상황도 그렇고 애초에 조선왕조실록철종 이후 고종실록, 순종실록 등의 편찬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나름 자주권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와 시대적으로 너무 불리했다는 점도 있지만, 아내를 비롯한 민씨 일가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 등등을 자주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벌하지 않아 방관하였고, 무엇보다도 명성황후의 조언 하나만 듣고 임오군란과 동학 농민 운동에 청군을 끌어들인 결정은 빼도 박도 못할 실책이다.[40] 또한, 러시아에 의존하여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는 러시아의 호응도 얻지 못하고 일본의 영향력도 전혀 줄이지 못한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결국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일본에게 균형추가 쏠리면서 사실상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어가는 상황에서 최소한 국권 피탈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려 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나[41][42], 사실상 일본으로 국권이 넘어가는 상황인지라 무위에 그쳤다. 그래도 나라가 망한 뒤에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자신의 아들 의친왕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1.1.5. 북한[편집]

이 아니므로 암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미 이 문서에는 쇼군 등의 다른 예도 있고, "군주"의 국어사전 뜻도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북한의 김씨 가문을 표현하기에 정확하니 특별히 추가하였다. 전제군주제 문서에도 북한의 예가 있다. 참고로 사실상 그 밑에 나오는 유송이나 카자르 왕조도 달성 못한 모든 군주가 암군이자 폭군이라는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한 왕조이다[43]. 모든 왕들이 성군인 것으로 유명한 부탄왕축 왕조와 완전히 정반대인 셈. 다만 체제 특성상 필연적으로 암군 내지 폭군일 수밖에 없다.

  • 김일성(1948 ~ 1994)★ :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6.25 전쟁을 일으켰으나 자국에 수많은 인명/경제적 피해만 남기고 목표 달성에 실패한다. 8월 종파사건숙청을 통해 인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독재정권을 만들어냈으며, 그래도 김일성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공산권의 원조를 받아 나라가 그럭저럭 굴러가기는 했기에 지금도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 평이 나쁘지는 않으나 곧바로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온갖 경제적 실책을 저질러 북한이 파탄국가가 되는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다.

  • 김정일(1994 ~ 2011)★ : 고난의 행군 등 경제적 파탄과 고립과 무능으로 인해 국가를 망가뜨렸다. 김일성 통치 말년에는 자신이 정권을 잡아서 사실상 실권자가 되었고, 끝내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해 3대 세습을 해낸 전형적인 독재자. 아버지 세대까지만 해도 개발도상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고 아니면 최소한 고난의 행군까지는 막을 수 있었던 북한 사회를 완전히 세계 최악의 빈국으로 말아먹고 각종 공사와 사치로 국고를 축냈다.[44] 잘 언급되지 않는 사실인데, 화전양면전술을 수시로 남발하여 국제적으로 북한이라는 국가에 대한 신뢰 자체를 삭제시킨 주역이기도 하다.[45]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유일한 업적은 핵개발을 통해 나라에 숨통이나마 붙여 놓은 것. 핵이 없었더라면 북한이라는 국가 자체가 주변국의 외압으로 이미 붕괴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 김정은(2011 ~ 현재)★ : 독재자이며, 서방 진영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긴 해도 내부적으론 큰 실책이 없다. 조선로동당 제8차 대회나 세포비서 대회에서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초상화를 치워버리는 등 개혁 시도를 보이며, 부패의 온상인 기쁨조를 해체하였고, 각종 토목사업을 통해 전 국토에 기초 인프라를 깔았으며, 군사시설을 농장으로 바꾸는 등 선대들의 막장 행보를 만회하려는 노력이 많다. 경제면에서도 장마당의 활성화, 러시아 및 중국과의 무역 등 개방 활로를 뚫으며 굶기는 해도 굶어 죽지는 않는 개선된 경제 상황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2차 고난의 행군 선포 후 위의 행적이 무색해질 정도로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아사자가 23년 기준 예년의 3배 가까이 증가하고, 자살자도 급증하는 중이다. #

6.1.2. 중국[편집]


  • 하나라
    • 걸왕(B.C.1652? ~ B.C.1600)◎: 다만 하나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은지라 애매한 감이 있다.

  • 상나라
    • 제신(B.C.1075 ~ B.C.1046)◎: 하걸상주라는 말이 나올 만큼 위의 걸왕과 함께 걸주로 엮이며, 성군의 대명사가 요순이라면 이들은 폭군의 대명사격이나, 현재는 명군과 거리가 먼 것과는 별개로 주나라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나치게 폄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 서주
    • 소왕(B.C.995 ~ B.C.977): 무리한 정복 전쟁으로 할아버지아버지가 이룩한 성강지치를 파탄내서 주나라의 쇠퇴를 유발한 장본인.
    • 여왕(B.C.871 ~B.C.841)
    • 유왕(B.C.781 ~ B.C.771)▲: 서주에서 동주로 전환하면서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린 장본인이자 유명한 포사 이야기의 주인공.

  • 춘추시대
    • 위선공(B.C.718 ~ B.C.700)
    • 위영공(B.C.534 ~ B.C.493):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춘추논어에서 대놓고 깔 정도로 무능한 군주다. 특히 말년에 후계자선정에서 진짜 한국에서 방영하는 일일드라마 수준의 정치암투를 벌여놓는데 크게 기여했다. 시호가 영공(靈公)인데 靈이라는 한자가 정신적으로 혼탁해서 나라를 망치는 군주에게 주는 시호로 역시 후한의 영제의 영도 바로 이 靈이다. 그만큼 위나라에서도 나라를 망친 군주라고 판단한 것.
    • 제양공(B.C.697 ~ B.C.686)★▲: 난세에 막장 군신이 들끓었던 춘추전국시대 뿐만 아니라 중국사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개막장 패륜 군주였다.
    • 관이오 사후 제환공(B.C.685 ~ B.C.643)▲
    • 제경공(B.C.547 ~ B.C.490)◎: 전성기에는 안영전양저를 중용하여 그럭저럭 나라를 꾸려가기는 했으나 후계자 선정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망명 공족 전(田)씨의 세력 확장을 방조하여 여(呂)씨가 끊어지는 원인을 초래했다.

  • 전국시대
    • 위혜왕(B.C.369 ~ B.C.319): 인사면에서 실정을 저질러 손빈, 공손앙 등의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이 타국에서 뜻을 이루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하서지방을 진나라에게 내주고 대량으로 천도하게 된다. 옛 수도권인 하동 지역은 이후로 진나라에 계속 털리다가 결국 반세기 이후 진나라에 완전히 뺏기게 된다. 제위왕과의 회견에서 보물 에피소드는 덤.
    • 초회왕(B.C.328 ~ B.C.299): 진나라의 연횡책에 넘어가 친진파를 중용하여 타국의 신용을 잃었으며 이마저도 진나라의 유인에 넘어가 억류되어 객사라는 최후를 맞게 된다.
    • 연혜왕(B.C.278 ~ B.C.272): 제나라 정복으로 잘나가는 악의를 시기하여 반간계에 넘어가 이를 내쳐서 결국 거의다 먹기 직전이었던 제나라를 토해내었다.
    • 조도양왕(B.C.244 ~ B.C.236): 간신의 참언을 듣고 염파를 내쳤으며 멀쩡한 적장자인 조가를 폐하고 총첩출신의 아둔한 조천을 세우는 등의 실책을 저질렀다. 장평의 대패 이후에도 그나마 나름 버텨오던 국가의 역량은 본격적으로 도양왕 대에 이르러 기울어지게 된다.
    • 송강왕(B.C.328 ~ B.C.286): 초기에는 주위 소국들을 정복하며 송나라를 전국칠웅에 버금가는 강국으로 키웠으나 시간이 지나며 교만해졌고 결국 본인 대에 나라가 망한다.
    • 제민왕(B.C.324/B.C.300 ~ B.C.284): 전국시대 진나라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제나라를 확실하게 말아먹은 암군이다. 초창기에는 그럭저럭 잘 다스렸지만 지속적으로 성과를 거두면서 점차 거만해지고 다른 국가들의 정치에 간섭하고 맹상군 등 명재상들을 내쫓으면서 제나라를 국제적 왕따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결국 악의가 이끄는 연나라 대군에 의해 제나라가 전국칠웅 중 가장 먼저 멸망할 뻔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부하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건 덤이다. 심지어 마지막까지 제정신 못 차리다 죽었다.
    • 제왕건(B.C.264 ~ B.C.221): 진나라와 가장 멀리 떨어진 지리적 이점을 누렸다지만 군왕후가 섭정하던 시절에는 그럭저럭 나라를 꾸려간 편이었다. 군왕후 사후 내부로는 후승의 전횡을 방조했고 외부로는 세객들의 말만 듣고 진나라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아 결국 망국의 군주로 전락했다.

    • 천하통일 이후의 말년의 시황제(B.C.247 ~ B.C.210): 최초의 중국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었으나 말년의 치세가 좋지 못하여 그의 사후 나라는 막장꼴이 되게 된다.
    • 이세황제(B.C.209 ~ B.C.207)★▲: 중국사 암군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막장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항우한테 관중이 함락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단 4년에 불과했다. 만약 그가 명군이었다면 오늘날 중국의 주류 민족을 가리키는 단어는 한족이 아니라 '진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초한쟁패기
    • 항우(B.C.206 ~ B.C.202)★: 용맹과 군사적 능력은 중국 역사상에서도 늘 거론될 만큼 막강했지만 정치 역량이 형편없었다.

  • 전한
    • 무제(B.C.141 ~ B.C.87)◎: 한나라의 황금기의 중심에 섰던 황제임은 부정할 수 없으나, 무리한 정복전쟁과 토목 공사와 지나친 신하 숙청으로 할아버지아버지가 이룩해놓은 문경지치를 파탄냈고 개인적으로 의심이 많은 성격 탓에 말년에는 무고의 화를 일으켜 태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 성제(B.C.33 ~ B.C.7)
    • 애제(B.C.7 ~ B.C.1) : 초기에는 개혁에 열의를 가지고 임하였으나 한계에 부딪혀 절망한 나머지 동성애에 빠졌다


  • 후한
    • 안제(106 ~ 125)
    • 환제(146 ~ 168)
    • 영제(168 ~ 189)★: 정치적으로는 당고의 금을 통해 자신에게 간언하는 청류파 지식인들과 신하들을 탄압했고 관직을 채소 등 물건처럼 팔아치우고 환관에게 휘둘려 사실상 후한을 멸망시킨 장본인. 이러한 막장 통치로 소제헌제동탁에게 휘둘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삼국지의 시작

  • : 원술이 칭제하고 세운 비정통 국가.
    • 원술(197 ~ 199): 변변한 능력도 없으면서 칭제하여 사방을 적으로 돌려 몰락했다.

  • 후한 말의 군벌들: 당시 후한은 동탁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고, 군웅들이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자사와 태수의 구분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각지의 군벌들은 자신의 자식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니 사실상 군주로 볼 수 있다.
    • 동탁(189 ~ 192): 엄청난 폭정으로 사실상 후한을 붕괴시켰다.
    • 공손찬(189 ~ 199): 폭정을 일삼아 몰락했다. 유우를 죽인 것은 원소에게 명분을 준 실책이었다.
    • 이각(189 ~ 198): 동탁 사후 곽사와 함께 중원을 초토화시켜 한나라를 완전히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 여포(192 ~ 198): 항우와 마찬가지로 정치 능력이 결락된 탓에 결국 조조가 하비성을 침수시키면서 사로잡혀 죽는다.
    • 원소(191 ~ 202)◎: 우유부단한 데다 독선적이고, 전풍저수의 계책을 듣지 않고 곽도의 말만 믿어 관도대전에서 패하고도 봉기의 모함을 듣고 전풍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죽이는 등 자기 자신의 과오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에만 급급했고 결국 조조 측으로 빠져나가기에 이른다. 여기에 저수의 만류에도 장남 원담을 폐출시켰으면서 청주의 지배권과 군권을 준데다 원상을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여 후계 구도를 꼬아버렸다. 그러나 유력한 군벌이었던 공손찬을 패사시키고 개판 2분 전이었던 하북을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시킨 정치력과 6년상과 반동탁연합을 결성하고 일족의 몰살을 동탁에 저항하는 명분으로 써먹은 쇼맨십, 관도대전 이전의 승리로 대표되는 군사적 능력만큼은 높이 평가받는다.
    • 원담(202 ~ 205): 원소의 장남이지만 폐출되어 원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정치력과 쇼맨십은 뛰어났으나 본인은 군사적 능력만 뛰어날 뿐 정치적으로는 무능했다. 청주 정복 후 뇌물을 주는 자는 병역을 면제하고 아부하는 자만 가까이 해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했다. 곽도와 신평의 부추김만 듣고 원상을 습격해 형제간 내전을 일으키고, 원상에게 패한 뒤 왕수의 만류에도 곽도의 조언만 듣고 형제간 조조를 끌어들이는 선택을 했는데, 이는 원가를 멸망시키는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결국 원상이 업성을 잃은 사이 원상을 공격해 원상의 군사들을 빼앗고 조조의 뒤통수를 쳐 기주의 절반을 차지했으나 결국 조조에게 공격당해 곽도와 함께 죽는다. 다만 앞에도 말했듯이 공손찬의 수하 전해를 격파하고 청주를 정복하는 면모를 보아 군사적 능력은 출중했다.
    • 원희(202 ~ 207): 아버지는 정치력과 군사적 능력 모두 출중하고, 형과 동생 역시 군사적 능력은 출중했으나 본인은 원상이 조조에게 패해 업성을 잃는 것을 방관하고 형 원담에게 패한 동생 원상을 받아들였으나 부하 장수들을 관리하는 것도 실패해서 부하 장수인 초촉장남에게 공격당해 동생과 함께 오환에 의지하게 되었다.
    • 유표(? ~ 208)◎: 당대를 살았던 많은 문관들은 큰 뜻을 가진 자라면 유표를 섬겨서는 안 된다고 평했다. 실제로 유표는 형주에 안주하는 데 급급했으며, 채씨 일가에 휘둘려 결점이 없는 적장자 유기를 내쫓다시피 했으며, 장선과 진생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는 데 실패하는 등 군사적으로 무능한 모습도 보였다. 그래도 정치적 능력은 상당했다.
    • 유장(194 ~ 219): 장로, 감녕, 조휘 등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거나 동주병의 소요에 미온하게 대응하는 등 무능한 모습을 보여 익주의 민심을 잃었고, 결국 유비에게 익주를 내주고 항복한다. 그나마 사람은 좋았다.
    • 고정(? ~ 218): 익주 남부에 살던 이민족인 수족의 왕인데 능력도 없으면서 촉한에 반기를 들었다 토벌당한다.

  • 삼국시대
    • 조위
      • 조조(추존)◎: 후한 말기에 여러 문제점을 개선하고 전임 권력자들의 폭정에서 후한 정권을 안정화시킨 것은 공이나, 본인도 장기적인 전략보다 빠르게 힘을 키우는 정책을 선호해 후대의 폐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성격적으로는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면이 있어 서주 대학살을 위시로 한 학살을 저지르거나[46], 여자 한 명 취하려다 아들조카, 부하를 잃는 참극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공신을 비롯해 눈 밖에난 인재들을 숙청하는 행보를 보였다. 게다가 한중 공방전 때에는 장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아 결국 하후연이 전사했음에도 오히려 하후연의 군재를 폄하하여 무마하려 했으며, 한중에서의 승기를 타고 관우가 북진해올 때에는 대오전선을 완전히 비우는 실책까지 저지른다. 결국 이런 실책들은 작게는 위의 통일을 막았고 크게는 정주민인 한족의 약화로 이후 5호 16국 시대가 열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조 본인은 실책을 저지르는 중에도 북방 이민족들을 약화시키기도 했고, 실책들도 그의 사후 유지를 이어받은 후대가 개선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에 조조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평가 받지는 않고 있다.
      • 조비(220 ~ 226)◎: 인성에 문제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비상시 황실의 방패막이 될 수 있는 황족과 외척을 지나치게 배척했으며[47], 구품중정제[48] 실시로 귀족 세력이 대대손손 관직을 해먹게 만들어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귀족들이 황권을 위협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또 아버지 조조의 삽질인 적벽대전이나 유비의 삽질인 이릉대전급의 임팩트가 없어서 그렇지 재위기간 동안 총 3번의 남정을 시도했으나 전부 손권에게 막혀 실패했다.[49] 게다가 정사를 돌보는 것보다도 수렵을 좋아하였고, 아첨하는 오질을 가까이 하고 간언하는 포훈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처형해버렸다.
      • 조예(226 ~ 239):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 위나라를 지키고, 내정도 여태껏 잘하더니 말년에 과한 사치와 향락을 부렸고, 계통이 불명확한 조방을 무리하게 후계로 지명하여 조상의 실정 및 이후의 고평릉 사변으로 이어지는 길을 닦아주었다. 또한 위서 양부전을 보면 조예는 일시적인 기쁨과 노함으로 신료들을 대하였으며, 자주 궁전을 짓느냐고 인부들을 대거 차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년에 타락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씨앗이 있었던 셈이다.
    • 촉한
      • 유비(221 ~ 223)◎: 오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이릉대전을 일으켰으나 그 전쟁에서 패배해 촉한의 인적 자원을 크게 상실했기에 암군이라는 의견이 있다. 고대의 전쟁은 통치자의 감정적인 사유로 인한 전쟁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 관우의 복수를 위해 일으켰다며 적절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고, 형주의 지방 행정력을 장악하기 위해 공안으로 천도하기까지 한 오나라의 시도나 오의 형주 지배력이 약할 때 유비에게 호응한 반란이 제법된 것을 감안해 무조건적인 유비의 실책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 유선(223 ~ 263)◎: 말년의 모습은 반박의 여지 없이 암군이다. 황호를 등용해 국정을 말아먹은 건 엄연히 실책이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위에 맞서기 위해 모이는 와중에 앞장서서 항복을 선언하였다. 다만 삼국지가 제갈량의 죽음 이후로 거의 생략이 되고 유선의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나지만, 유선의 치세는 장장 41년이나 되고 유선이 항복한 것도 제갈량 사후 무려 29년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말년에 암군으로 전락하기 이전에는 재상의 도움을 받아 무난하게 통치했을 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50]
    • 손오
      • 손책(192 ~ 200)▲: 원술의 밑에서 여강 태수 육강을 살해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이후에도 호족에 대한 강경책과 유화책을 균형 있게 사용하지 못하여 기반의 결집력을 약화시켰으며 오군 태수 허공을 살해해 피습당한 후에는 의심이 많아져 백성들에게 존경받던 우길선인에게 괜히 누명을 씌워 죽여버리는 바람에 원귀가 된 우길선인에게 죽임당했다. 이러한 문제는 차기 지도자인 손권이 육손을 포섭하면서 해결하였다.
      • 손권(200 ~ 252): 이궁의 변 이전에도 사섭 사후 교주에서 벌인 짓이나 여일 등 간신배를 신임하고 그의 말에 따라 충신들을 유폐하는 등 암군의 기질을 보였다. 그리고 외교에서도 실책을 저지르는데, 공손연을 끌어들여 대위전선을 형성하려 하였으나 사신들의 목만 날아가고 말았다. 고구려와도 비슷한 시도를 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 손휴(258 ~ 264)◎: 손침을 처단하기는 했지만 무능한 복양흥과 장포 등 가신들에게 휘둘려 새 정치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는 손호가 즉위하게 되는 나비효과로 이어지게 된다.
      • 손호(264 ~ 280)★△: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옹립한 복양흥과 장포를 숙청하였다. 재위 기간 내내 왕권 강화를 위해 손씨 친족들을 많이 죽였다. 이외에도 잦은 숙청, 잦은 천도, 잦은 연호 교체 등 전형적인 왕권 강화 행보를 보여 중신들과 작지 않은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오나라의 멸망이 단순히 폭군 손호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위나라-오나라 간 국경은 천혜의 요새인데 반해 촉-오 국경은 평지라서 촉나라가 진나라에 복속된 이후로 오나라는 훨씬 불리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51] 그래서인지 손호를 비롯한 망국의 군주들은 아주 막장이 아닌 이상 재평가 여론이 생기기도 한다.
    • 동연[52]
      • 공손공(221 ~ 228): 무능하여 조카에게 폐출당했다.
      • 공손연(228 ~ 238): 대놓고 위에 반기를 들고, 반대하는 신하들을 처형했다. 그 결과는 요동이 완전히 복속되는 것이었다. 237년의 교전에서 강을 낀 방어를 통해 관구검을 패퇴시킨 걸 보면 군사적 역량이 형편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므로 자충수가 맞는다.

  • 서진
    • 사마소(추존): 아버지는 매우 유능했고, 역시 정치적 수완은 뛰어났으나 본인은 그저 포악하기만 하고 무능했다. 거기에 현위황제를 살해하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음에도 본인은 여기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가충을 죽이는 대신 실행자인 성쉬와 성제형제에게 책임을 떠남기는 행동을 저질렀다.[53] 자기 자신도 이렇게 막장인데 유선을 비웃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이 사람의 아들이 사마염이다.
    • 사마염(265 ~ 290): 초대 황제이자 창업군주인 주제에 암군이다. 황제가 뇌물 수수를 일삼고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 오죽했으면 생전에 신하들로부터 환제와 영제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다만 재위 초반엔 태강의 치로 일컬어지며 호평받았다.
    • 사마충(290 ~ 301)◆

  • 5호 16국
    • 유요(319 ~ 328): 폭정을 벌였으며, 술에 취해 군대를 지휘할 정도였다.
    • 석호(334 ~ 349)★: 후조를 멸망으로 몰고 갔다.
    • 부견(357 ~ 385)▲◎: 말년에 자만으로 판단을 그르친 탓에 나라를 말아먹었고, 그 덕에 선비족이 다시 활개치게 되어 후연북위가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결국 요장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 모용보(396 ~ 398): 후연의 제2대 황제.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였고, 결국 난한의 반란으로 후연이 쇠퇴하는 계기를 만들어내었다.
    • 모용희(401 ~ 407)★▲: 후연의 제4대 황제. 수양제의 전생이 아닐까 정도로 폭군이자 암군이다. 게다가 상대는 광개토대왕과 북위의 탁발규 등이 활약하고 있었는지라, 상당수의 영토를 상실한 것은 덤이다. 다만 황제가 되기 전에는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함락시키는 군재를 보여주긴 했다.

  • 남북조시대
    • 동진: 사마진의 모든 황제들이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명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황제들이 다 암군이었다.
    • 환초
      • 환현(403 ~ 404): 능력도 없으면서 황제가 되었으나, 곧바로 유유에게 격파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동진 멸망의 씨앗이었다. 한당-한종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의 호부견자 사례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 : 창업 군주 유유, 그나마 내정을 제대로 하여 국가의 기틀을 잡은 유의륭,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던 마지막 군주 유준 제외하고는 무슨 저주라도 걸린양 암군과 폭군으로 도배가 된 최악의 막장 왕조였다. 유구한 중국사를 통틀어도 순위권 안에 들어갈 만큼 뛰어난 군재를 갖춘 위진남북조 시대 최고의 명장 창업군주 유유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황하 이남의 땅을 대부분 장악했고, 무엇보다 촉한 멸망 이후 오랫동안 대가 끊겼던 '한의 유씨 황실 복원'이라는 국가 이념까지 계승하게 돼, 한황실 400년의 치세를 겪어 '황제는 유씨만이 해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던 당시 중국의 민중들을 매혹할만한, 당대 기준으로 엄청나게 매력적인 대의명분까지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암군과 폭군들이 줄줄이 출몰한 끝에 59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유의륭 이후 정말이지 명군까지는 아니더라도 걍 범군 정도만 두세 명 정도 더 출현했더라면 우리가 아는 남북조 시대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북한백두혈통과 함께 부탄의 왕축 왕조와 정반대인 셈.
      • 유의부(422 ~ 424)★△▲: 정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황음무도한 암군이라 결국 폐위당했다.
      • 유준(453 ~ 464)★: 간언하는 자를 탄압하고 지나친 사치를 부려 국고를 바닥나게 하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였다.
      • 유자업(464 ~ 466)★▲: 사치향락과 근친겁탈에 빠져 온갖 기행을 저지르다 재위 1년 만에 살해당했다.
      • 유욱(466 ~ 472)★: 이 사람도 사치향락과 음란행위에 빠져 살았다.
      • 후폐제 유욱(472 ~ 477)★▲: 살인이 일상이던 미치광이 소년.
    • : 유송 못지않은 막장 왕조였다.
    • : 송, 제와 비슷하다.
      • 소연(502 ~ 549)◎: 본래 양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며 명군으로 평가받던 군주였으나 말년에 암군으로 타락하여 불교에 크게 심취하고 중앙의 귀족과 황족은 사치의 극한을 누리며 양나라를 말아먹었다. 이 때문에 양나라 중앙 군대는 무너져 내렸고 후에 후경의 난으로 감금되었다가 아사했다.
      • 효원제(552~555): 개인적으로는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긍정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했다. 서위가 수도를 포위한 상황에서 태평하게 백관들에게 노자를 강의하는 답없는 행보를 보였고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수집했던 책 14만권을 전부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 후경(551 ~ 552): 반란을 일으켜 양무제를 실각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 역량이 형편없었던 탓에 후경의 정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 반란으로 양나라는 사실상 망했다. 결국 이익을 본 것은 서위뿐이었다.
    • 북위
      • 탁발규(399 ~ 409)
      • 선무제(499 ~ 515): 제위 초반부터 외척인 고조에게 국정을 맡겼고, 이들에게 휘둘리는 정치를 했다. 자귀모사[54]라는 악습을 폐지한다는 점은 좋았으나, 문제는 그 수혜자가 바로 북위 후기를 말아먹은 주범인 영태후라는 점에서 이것마저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정책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효문제가 실시한 한화정책의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고 황족고관들의 사치를 방관하였다. 결국 그의 사후 북위는 육진의 난의 혼란에 휩싸여 휘청거리다가 동위서위로 분열하며 멸망하게 된다.
    • 북주
      • 우문윤(578 ~ 579): 엄청난 폭정으로 수나라 건국의 빌미를 제공했다. 명군인 우문옹의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다.
    • 북제

  • 수나라
    • 수양제(604 ~ 618)★▲: 능력만큼은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그 능력을 사치와 지나친 원정, 주색잡기에 사용하여 결국 나라를 말아먹었다.[55] 그래서 중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암군이자 폭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심지어 부황인 수 문제를 부하 장형을 시켜 시해하고 즉위하였다. 명군이자 성군인 아버지를 시해하고 암군이자 폭군인 아들이 즉위한 셈이다.

  • 당나라
    • 당태종(626 ~ 649)◎: 명군으로서 당나라의 첫 번째 전성기를 열었지만, 말년에 무리한 고구려 침공으로 당나라의 국력을 깎아먹은 점만큼은 중화권 내에서조차 혹평을 듣는다. 사실 고구려에 패한 것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렇지, 말년에 남긴 실책으로는 무리한 고구려 침공 뿐만 아니라 충신들의 간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후계자 문제 등에서 일을 그르친 것도[56] 있다.
    • 당중종(684, 705 ~710)▲: 흔히 위황후 일파에게 휘둘린 암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복위하자마자 돌궐의 흥기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708년에는 장인원으로 하여금 삼수항성을 쌓게 하고 또 튀르기시, 힐알사(키르기즈)와 동맹을 맺어 돌궐 포위망을 형성하였으나 돌궐 북벌이 실현되기도 전에 암살당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 성신제(690 ~ 705)◎: 내준신 등 혹리들을 통한 공포정치로 많은 사람을 숙청으로 죽였지만 이 일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몇가지 내치 관련 업적도 성공하였으며 그때에 백성들은 살기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성신제를 악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유교 때문에 긍정적인 면은 없애고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표현한 데다가 아예 황제가 아닌 황후인 '측천무후'라고 주로 불리는 등 많은 폄하를 당했기 때문에 폭군이라고 하기는 애매하다. 하지만 외치면에서는 완벽히 실패한 인물로 이 점 때문에 그녀는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당나라의 대표적 외교정책인 기미정책이 이 시기부터 파탄을 맞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발해가 탄생하고 토번이 흥기하였으며, 돌궐이 다시 부활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기미정책의 파탄으로 인해 당 중기~말기의 국방은 기존의 제도인 부병제로는 도무지 지탱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어 절도사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강해진 절도사들의 폐해로 인해 당나라는 끝내 멸망하였다. 어찌본다면 당나라가 절도사에 휘둘리는 데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래도 명재상 적인걸 등을 등용해서 당 현종 초기[57]에 당이 발전할 수 있게 기틀을 닦은 점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치세의 명군이자 난세의 암군, 혹은 내치의 명군이자 외치의 암군이라고 평가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천보 연간(742 ~ 756) 이후의 당현종(712 ~ 756): 간신 양국충에게 놀아나서 안사의 난의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반란 진압을 위해 본인이 퇴위하는 지경에 이른다.
    • 당숙종(756 ~ 762): 반란으로 엉망이 된 당나라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인물. 당 의종을 제외한다면 당 최악의 암군으로 불릴 만한 정도의 인물이다.[58]
    • 당대종(762 ~ 779): 거듭된 전란 속에서 내놓은 대책이라고는 절도사들의 권한을 인정해 번진할거 시대를 만든 것뿐이었고, 명장 곽자의에게 의존하면서 본인은 손을 놓는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곽자의에게 의존했다고 하지만 암군이라면 으레 명장을 의심해 숙청했다가 위기를 맞기 쉬운데 그런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고 어찌되었든 외적들을 자력으로 물려쳤고 권신들 통제도 성공해서 아버지보단 낫다고 평가받는다.
    • 당순종(805)▲: 처음에는 개혁에 열의를 가지고 임하였으나, 지병으로 완전히 백치가 되어 왕숙문 일파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다. 게다가 혁신파의 분열도 막지 못했다. 결국 아들 헌종의 묵인 하에 왕수징에게 살해되었다.
    • 당목종(820 ~ 824): 아버지 헌종이 원화중흥으로 살린 나라를 말아먹은 군주로, 제2차 환관 시대를 연 군주이다.
    • 당경종(824 ~ 827): 목종의 아들로, 똑같다.
    • 당무종(840 ~ 846): 도교에 심취하여 환관에게 놀아나는 당 조정을 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으며, 단약 중독으로 사망할 정도였다.
    • 당의종(859 ~ 873): 당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당나라 최악의 암군.
    • 당희종(873 ~ 888): 황소의 난이 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상격구와 도박에 빠지고 국정을 손에서 놓은 군주.

  • 연: 안록산이 칭제하고 수립한 나라.
    • 광렬제(756 ~ 757)▲: 범양에서 거병할 때만 해도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많은 관리들의 지지를 받아 하북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낙양을 함락시키는 등 굵직한 성과를 내었지만, 이때 칭제한답시고 진군할 시기를 놓쳐 당나라에 숨돌릴 시간을 주었다.[59] 그리고 휘하 군대의 학살을 방조해 민심이 돌아섰고, 본인도 말년에 포악해졌으며,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을 밀어주려다 안경서에게 시해되었다.
    • 안경서(758 ~ 759): 아버지 안록산을 죽여 반군의 구심점을 와해시켜버렸다. 기어코 사사명에게 시해된다.

  • 오대십국시대
    • 후량
      • 주전충(907 ~ 912)▲: 기껏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했건만 주색은 기본이고 자식들과의 갈등도 심해 아들들에게 살해당한다. 그나마 이존욱과는 달리 백성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 후당
      • 이존욱(923 ~ 926): 초반에는 주전충을 관광보낸 뒤 후량을 멸망시키고 주변 번진을 전부 쓸어버림으로써 후당을 개창하고 심지어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군도 격퇴하는 등 명군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안정기에 접어들자 해이해진 것인지 평소 즐기던 음주가무 및 연극으로 소일했고 내정에서도 막장 가도를 달린 끝에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 후진

  • 요나라
    • 요세종(947 ~ 951)★▲: 선대 왕들과 달리 외치 확장에 실패하였으며 알코올 중독자라서 폭정을 일삼았다. 결국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는데 기여해줬던 야율찰할에게 죽임을 당했다. 묘호가 세종인데 왜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는지 모를 정도로 암군이자 폭군이다.
    • 요목종(951 ~ 969): 야율찰할을 제거한 것과 시영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침입해오자 잘 막은 걸 말고는 업적이 전혀 없다. 요세종처럼 알코올 중독자인 데다가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 게으른 임금이라는 수왕이라고 할 정도니 말 다했다.
    • 요흥종(1031 ~ 1055)
    • 요도종(1055 ~ 1101)
    • 천조제(1101 ~ 1125)△


  • 송나라
    • 북송
      • 송휘종(1100 ~ 1126)★: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뛰어났으나, 중요한 건 이 사람의 신분은 황제라는 것이다. 금과 힘을 합쳐 요를 멸망시킨 뒤, 요의 패잔병을 끌어들여 금을 치려 했지만, 이를 듣고 화난 금 태조가 군을 몰아 쳐들어오자, 무책임하게 아들에게 제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물러났다. 그리고 결국 자신은 정강의 변이라는 굴욕을 겪었다.
      • 흠종(1126 ~ 1127)◎: 기껏 금나라와 화의를 맺어놓고 쥐뿔도 없는 신세에서 그걸 깨버려 정강의 변의 진짜배기 굴욕을 겪는다.[60]
    • 남송
      • 송이종(1224 ~ 1264) : 정신상태가 동양판 카를로스 2세라 볼 만한 송도종을 사랑하는 동생 영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후계자를 책봉시켰다.
      • 송도종(1264 ~ 1274)◆

  • 명나라
    • 성화제(1464 ~ 1487): 초기에는 대인배의 면모도 보여주고 혼란도 수습하는 등 긍정적인 행보를 걸었으나, 말년에 방술에 빠지고 만귀비를 비호하는 등 실정을 많이 저질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 명 4대 암군
      • 정덕제(1505 ~ 1521)◎: 혼자놀기의 진수. 그러나 이 양반은 국정운영에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재위기간 내내 놀기만 한 게 아니기 때문에 평가가 갈리며, 심지어는 명나라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밑의 3명의 황제와는 격을 달리하는 모습이 많았다.
      • 가정제(1521 ~ 1567): 명나라의 명대신 해서가 이 양반 앞에서 대놓고 연호 '가정'의 의미를 다르게 불러서[61] 깠으니 말 다했다.
      • 만력제(1572 ~ 1620)◇: 중국사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을 정도의 희대의 암군으로, 명나라를 무너뜨린 결정적 원인은 만력제가 30여 년간 정무에 손을 놓아서라고 후대의 역사서인 명사에서도 언급하기도 한다. 중국사 최초로 파업을 한 황제다. 자국이 우선인데도 조선에 병력과 구휼미를 무리하게 보내 고려천자라는 멸칭을 얻은 일아 파업을 시작한 만력제가 유일하게 정무를 펼친 일이다.[62] 자식을 차별하여 후계자인 태창제천계제의 권력이 불안정해진 결과를 낳았다. 건강이 좋지 않았고, 우울장애가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문화대혁명홍위병들이 그의 황릉과 유골을 작살내는 바람에 자세한 건 알 수 없게 되었다.
      • 천계제(1620 ~ 1627)◎◆ : 마에스트로. 동생인 숭정제는 실책은 있었을지언정 망국이 확실한 명을 구하려고 고군분투 했지만 자신은 정무에 무관심하고 목공에만 몰두했으며, 옛 금나라 황릉터를 마구잡이로 파헤쳐서 후금이 빡치는 실책을 만들었다. 다만 천계제는 할아버지인 만력제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과거와 사연이 있다. 해당 문서로.
    • 숭정제(1611 ~ 1644) : 형인 천계제에 비하면 책임감이 있고 열심히 했지만 성격적인 결함이 심했고 정말 무능했다. 이러다보니 각종 실책을 저질러 나라를 망하게 하는 큰 원인이 되어서 암군일수밖에 없다. 특히 숭정제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으나 조금이라도 좋은 판단력을 가졌으면 잘할수도 있었는데 본인의 아집과 실책으로 말아먹었으니 암군이라고 비난받을수밖에 없다.

  • 청나라
    • 건륭제(1735 ~ 1796)★: 과거에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자 중국 최후의 명군[63]으로 꼽혔으나, 부정적인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단지 선대의 유산을 잘 물려받았을 뿐인 암군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다. 무엇보다 말년은 척 암군. 추가로 백련교도의 난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도 건륭제다.
    • 도광제(1820 ~ 1850): 검소하고 청렴했으며 아편 척결에 앞장섰지만 그 외에는 무능했다.
    • 함풍제(1850 ~ 1861): 만장일치로 문종이라는 묘호가 아까운 청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함풍제 사후에 동치중흥이 없었다면 청나라의 멸망은 실제보다 더욱 앞당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 서태후(1861 ~ 1908)
    • 선통제(1908 ~ 1912, 1934 ~ 1945)△◎: 청나라 황제로 있을 때는 너무 어려서 허수아비라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으나, 만주국에서의 행적을 보면 충분히 암군이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애초에 만주국 자체가 일본의 괴뢰국이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자. 그런 의미에서 ◎표기도 추가한다.

  • 태평천국
    • 홍수전(1851 ~ 1864): 남중국의 중심 도시인 난징을 틀어쥐고 한 때 베이징 근처까지 원정군이 도달하는 등 체제 전복을 성공적으로 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실상은 청나라 내부가 워낙 병들어있어서 잠시 성취할 수 있었던 요행에 불과하였으며 홍수전은 사이비 교주 그 이상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석달개이수성 같은 걸출한 부하들을 두고도 끊임없는 견제와 숙청으로 자신의 세력을 끊임없이 깎아먹었고, 나라에는 도덕적 광신주의를 강요하면서 자신은 하렘을 건설하는 등 통치자로서 한심한 면모를 보였다. 결국 태평천국은 청나라의 대안 세력이 되지 못한 채, 한때의 대형 반란으로서 종식되고 만다. 홍수전에게 쑨원만큼의 역량이 있었다면 한족 국가 재건은 실제보다 더욱 앞당겨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중화제국
    • 위안스카이(1915 ~ 1916)△: 만약 그가 친위쿠데타로 황제가 된 일과 별개로 조구 1세처럼 훌륭한 업적[64]을 남겼다면, 한족 최후의 명군이라는 평가는 명나라의 홍치제가 아니라 위안스카이 본인이나 그 후손들 중 1명이 받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위안스카이는 이미 황제가 될 때부터 많은 저항에 부딪혀서 명군이 되고 싶어도 못 되었을 것이나 그가 황제가 되기 전의 행보를 보면 설사 순조롭게 황제가 되었더라도 명군이 될 순 없었을 것이다. 황제를 배신하고 제국을 배신하고 공화국을 배신

6.1.3. 일본[편집]


원칙적으로는 천황이 군주지만 가마쿠라 시대 이후 줄곧 공기였으므로 세습직인 막부쇼군을 포함한 일본 무사정권 최고지도자도 군주로 인정한다.



  • 가마쿠라 시대
    • 고시라카와 덴노(1155 ~ 1158)◎ : 권력 계승 및 유지를 위한 개인수양에는 관심이 없이 장기간의 인세이에만 열중하여 무가정권으로 실권이 넘어간 한 원인이 된다.
    • 고토바 덴노(1183 ~ 1198)◎ : 이 양반이 정치감각이 있었다면 일생일대의 삽질인 조큐의 난은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재위 당시가 3세~18세였기에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


  •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들 :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오닌의 난 이후 사실상 일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으므로, 다이묘들 또한 군주라고 볼 수 있다.
    • 오다 노부카츠(1582 ~ 1630)◎ : 이해할수 없는 실책을 일삼아 아버지가 이룬 패업을 사실상 말아먹었다. 그나마 친족들이 다 죽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홀로 유일하게 살아남고 마지막에 판단을 잘해서 다이묘 가문으로서의 명맥은 이어나갔다.
    • 모리 데루모토 : 우유부단한 성정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선 서군의 편을 들었으면서도 오사카 성 안에만 머물러서 우물쭈물하고 있었고, 그 결과 동군이 승리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감봉 조치로 인해 120만석의 대다이묘에서 29만 8천석의 다이묘로 추락했다.
    • 미요시 요시츠구 : 미요시 가의 중신들이었던 미요시 산닌슈마츠나가 히사히데세력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펼치면서 키나이 제일이었던 미요시 가문을 분열시켰으며,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게 토벌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 아사쿠라 요시카게 : 노부나가 포위망이 성립된 당시 다케다 신겐이 노부나가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때 적설을 핑계로 철수해버렸으며, 그 댓가는 자신과 아사쿠라 가문의 멸망이었다.
    • 다케다 카츠요리◎ : 신겐 사후 오다가와의 세력 격차가 커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나가시노 전투를 일으켰지만 대패하였고, 우에스기 가문의 내전인 오다테의 난에서 호조 측이 지원하던 카케토라를 외면해 죽게 만듬으로써 호조와 적대상태가 되어 다케다 멸망 당시에는 사방이 다케다를 적대하는 상태가 되었다.
    • 호조 우지마사◎ : 다케다 멸망 당시 괜히 관망만 했다가 다케다가 밀리고 있자 황급히 출진하였지만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어떠한 이득도 얻지 못했고, 이후 전국의 지배자로 떠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갈등을 일으키다 오다와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호조 가문을 패망으로 이끌었다.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도요토미 히데요시(1585 ~ 1598)★ : 임진왜란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 그리고 그 두 실책이 원인이 된 도요토미 정권의 멸망으로 일본사 두번째 암군 인증을 했다. 피는 피대로 보고 명분은 명분대로 잃었으며 집안은 집안대로 콩가루 만들어 결국 죽쒀서 개줘버렸다. 적이었던 선조치세의 명군이자 난세의 암군이었다면, 히데요시 본인은 난세의 명군이자 치세의 암군이었던 셈이다.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에도 막부가 일본을 완전히 안정시키는 데 실패했다면 일본은 제2의 전국시대를 맞이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고 도요토미 히데츠구 일가도 필요 이상으로 숙청하지 않으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견제에 집중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이후의 일본 역사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 에도 시대
    • 도쿠가와 이에나리(1786 ~ 1837)
    • 도쿠가와 이에사다(1853 ~ 1858)◇ : 하지만, 당시 일본을 방문하여 그를 알현했던 미국 공사 타운젠트 해리스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이에사다에게 뇌성마비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서 제대로 된 통치가 애초에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뇌성마비가 아니더라도 병약하여 항상 병석에 눕는 일이 않았던지라, 모든 국정을 중신들이 다 처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 일본 제국
    • 쇼와 덴노(1926 ~ 1989)★◎ : 같은 ◎표가 붙는 부레쓰 덴노, 요제이 덴노, 고시라카와 덴노, 고토바 덴노와는 달리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행보를 보더라도 충분히 암군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65]


6.1.4. 류큐[편집]


  • 슌텐 왕조
    • 기혼(1249 ~ 1259)◎△ : 재위 중에 재난이나 전염병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그 책임을 받아 당시 류큐 왕국의 섭정이었던 에이소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66]

  • 에이소 왕조
    • 타마구수(1314 ~ 1336) : 아버지가 명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부족했던 타마구수의 통치 능력 때문에 각지에서 반란이 터졌고, 결국 삼산시대가 시작되었다.
    • 세이이(1337 ~ 1354) : 에이소 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망군. 아버지 타마구수가 하도 삽질을 많이 해서 그의 치세에는 썩어버린 왕국을 복구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군벌들을 통합한 호쿠잔, 츄잔, 난잔의 등장으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 츄잔
    • 부네이(1398 ~ 1406)△ : 츄잔이 전성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도 실정을 해 강제로 퇴위당했다. 다만 재위 초반부는 명군이라고 불러도 충분할 정도로 전성기였다.

  • 류큐 왕국
    • 쇼네이 왕(1589 ~ 1620)◎ : 그의 치세에 류큐 왕국이 사쓰마 번의 침공을 받았다. 다만 도망치지 않고 사쓰마 번과 싸웠으며 이를 제외하면 그저 무난한 왕이었기에 암군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6.1.5. 몽골[편집]


  • 귀위크 칸(1246 ~ 1248) : 세계최강국 몽골 제국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리고 정복자로서는 최강이었으나 마지막 남송 원정에 엄청난 무리를 했다.
  • 몽케 칸(1251 ~ 1259) : 이쪽도 세계적으로 위대한 정복자이나 귀위크 칸처럼 마지막에 직접 남송 원정 시도를 하다가 남송제국의 거센 저항과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염병에 감염되어 사망한다.
  • 쿠빌라이 칸(1260 ~ 1294) : 남송 정복에 완전히 성공한 군인, 선봉장, 전쟁기계이자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사력을 가진 원나라를 건국하고 몽골제국의 최대 전성기를 이끈 대칸이라서 정복자, 전쟁기계, 명군 이미지가 엄청 강하지만 의외로 말년에 저지른 실책이 대원제국의 쇠퇴에 일조했다.
  • 원 혜종(1333 ~ 1370) : 대원제국의 군사 내전을 발발시킨 황제.


6.2. 동남아시아[편집]



6.2.1. 베트남[편집]




  • 월남(비엣남)·대남(다이남)
    • 응우옌 왕조
      • 가륭제(1802 ~ 1820) : 외세의 힘을 빌려 새 왕조를 세운 것에 따른 한계 탓에 프랑스의 식민지배의 씨앗을 남기게 되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쫓겨나서 시련을 겪으며 매우 곤궁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황제가 된 후에는 옛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장하고 무거운 세금으로 일반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오죽하면 오늘날 베트남에서 사실상 금지어 취급을 받을 정도다.
      • 바오다이 황제(1925 ~ 1945)△


6.2.2. 태국[편집]


  • 톤부리 왕조
    • 탁신 대왕(1767 ~ 1782)★◎ : 태국판 이존욱이자 궁예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다. 정신병에 걸린 이후부터 암군이자 폭군이 되었고,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 다만 그를 몰아내고 들어선 짜끄리 왕조가 그에 대해 역사왜곡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 짜끄리 왕조
    • 라마 6세(1910 ~ 1925): 태국의 명군이자 선대 왕인 라마 5세가 열심히 근대화로 발전시킨 태국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현실감각은 없고, 왕실의 위엄과 국가주의를 강조하는데에 눈멀어서 재정을 낭비하여 경제적으로 혼란을 야기했다. 이 때문에 절대왕정의 한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는 기사가 있고, 이 기사에는 본 왕의 실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 라마 10세(2016 ~ 현재)★ : 무려 전근대적 전제 왕권이 사라진 21세기의 암군이다.[67] 왕세자 시절부터 암군과 폭군 기질을 모두 보여서 태국 국내외로부터 우려를 받았지만 결국 즉위하였다. 심지어 전근대였으면 폐세자로 찍힐 사고들을 쳤음에도 부왕 푸미폰이 계승권을 지켜 주었다. 이 때문에 2020년에는 태국에서 군부독재 종식 운동과 함께 왕정 개혁 운동이 벌어졌다.


6.2.3. 미얀마[편집]


  • 한타와디 왕국
    • 라자다릿(1384 ~ 1421)◎ : 한타와디를 여러 나라의 공격으로부터 구하고 왕국을 안정시켰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받지만, 그 대가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 타카윳피(1526 ~ 1539) : 한타와디 왕국의 황금기를 끝낸 왕. 어렸을 때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노는 것만 좋아해 신하들에게 존경받지 못해 불안정한 통치를 이어갔고, 따웅우의 계략에 넘어가 유능한 장수를 처형시키는 등의 결정으로 한타와디를 암흑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다.


6.3. 서남아시아[편집]


  • 인도
    • 무굴 제국
      • 샤 자한(1628 ~ 1658)△ : 재위 초창기엔 확실한 명군이었지만 말년에는 확실한 암군이었다.
      • 아우랑제브(1658 ~ 1707)★◎ :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애매한 편이다. 인도 역사상 희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라는 점때문에 무굴 제국 해체에도 일조한 암군이자, 폭군이라는 지적도 많지만, 이걸 빼면 내정 면에서나 외치에서도 상당한 업적을 세워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뉜다. 일단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시크교 등의 많은 종교가 공존하는 인도에서 비(非) 무슬림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일삼은 면에서는 빼도박도 못할 폭군이다.[68]

  • 네팔
    • 네팔 왕국
      • 디펜드라(2001)★ : 네팔 왕실 학살을 일으켜 자기 가족들을 죽인 걸로 모자라 결과적으로 그 일 때문에 숙부인 갸넨드라의 즉위를 통해 네팔 왕국의 멸망 원인을 제공하게 된 것 때문에 현재까지도 네팔인들에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다.
      • 갸넨드라(2001 ~ 2008)★ : 형인 비렌드라의 개혁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고 전제 정치를 부활시키는 바람에 결국 조카의 만행으로 인한 혼란을 만회하지 못하고 네팔 왕국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 튀르키예
    • 오스만 제국
      • 바예지트 2세(1481 ~ 1512) : 개인의 종교적 귀의 때문에 주적이던 사파비 제국에게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고, 결국 아들인 셀림 1세에 의해 폐위되고 만다.
      • 쉴레이만 1세(1520 ~ 1566) :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어낸 명군이지만, 자식 관리가 완전히 엉망이었다. 황후 휴렘 술탄 등의 음모에 빠져 제국 국민 대다수의 인망을 얻고 있던 장남 무스타파를 반역죄로 처형(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했으며, 막내인 바예지드 역시 반역을 의심하여 처형. 결국 바로 아래에 나오는 셀림 2세가 뒤를 이었지만, 그 정체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처음 보는 막장 황제. 자식 문제뿐만 아니라 말년에 갈수록 황후나 그녀에게 빌붙은 관료들의 말만 믿고 유능한 신하를 처형장으로 보낸다거나, 부패에 찌든 신하를 재상으로 임명하는 등의 실책도 저질렀다.[69]
      • 셀림 2세(1566 ~ 1574) : 재상에게 정권을 넘긴 최초의 황제였으며, 직접 군사 지휘를 한 적이 없는 최초의 황제이기도 했다.[70] 황제를 대신하여 정치를 맡은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재능이 일단 합격 수준이었지만, 지방 총독이나 부재상이 되려면 반드시 재상에게 '선물' 을 바쳐야 하는 상황을 두 눈 부릅뜨고 보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영락없는 호구 인증. 이후에 황제의 권위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고 황제의 애첩이나 모후가 정치에 끼어들고 예니체리가 황제를 갈아치우는 등의 사태가 다 셀림의 치세에 그 싹이 텄다.
      • 이브라힘(1640 ~ 1648)◆▲△ : 실정으로 폐위 후 살해당했다.[71]
      • 메흐메트 4세(1648 ~ 1687) : 사냥에 골몰하여 국정을 소홀히 했다. 그러면서도 호전적인 성향을 억제하지 못하고 제2차 빈 공방전을 일으켰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 아흐메트 3세(1703 ~ 1730) : 이른바 튤립 시대라 불리는, 오스만 문화의 또 한 번의 중흥기를 이루어낸 군주였지만, 그 외의 능력은 형편없었다. 그의 시대에 오스만 제국은 매년 유럽 군대에게 털렸으며,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실정이었지만 그는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하렘의 후궁들과 놀거나 튤립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다.
      • 무스타파 4세(1807 ~ 1808) : 니잠 제디드 개혁을 꾀하던 셀림 3세를 유폐한 뒤 죽이고 부패한 예니체리의 후원으로 술탄이 되어 오스만 제국을 파탄냈다.
      • 마흐무트 2세(1808 ~ 1839)◎ : 오스만 제국을 좀먹던 예니체리를 숙청하고 니잠 제디드의 부활을 이끌어 제국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더 붙여놓은 것은 업적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시대에 이미 이집트 총독과의 관계가 악화된 결과 아들인 압뒬메지트 1세 대에는 고문 대 몰트케의 조언을 무시해 이집트가 사실상 독립해버리는 등 제국 쇠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게다가 마흐무트 2세의 치세 때부터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간섭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으며 이는 크림 전쟁으로 이어진다. 만일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돕지 않았다면 패전했을 것이고, 변수에 따라서는 오스만 제국의 멸망이 실제보다 더욱 앞당겨졌을 수도 있을 것이며,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가 오늘날 튀르키예 영토 이스탄불이 아니라 그리스 영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되었을 수도 있다.
      • 압뒬하미트 2세(1876 ~ 1909) : 크레타 상실(1897) 후 암군의 모습을 보였다.

  • 이스라엘
    • 이스라엘 왕국
      • 사울(B.C.1047 ~ B.C.1010)▲ : 죽음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성경인 사무엘기열왕기를 보면 자살했다고 나오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사했거나 아군[72]에게 살해당했거나, 혹은 진짜로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더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사울 문서로.
      • 솔로몬(B.C.970 ~ B.C.931):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말년의 실정은 중국의 당현종, 건륭제와 비견될만한 인물이다.
    • 유다 왕국
    • 예루살렘 왕국

  • 쿠웨이트
    • 자베르 3세(1977 ~ 2006) : 걸프 전쟁 당시 쿠웨이트의 군주로서, 걸프 전쟁 때 보여준 처신에 대해 말이 있다.

  • 오만
    • 사이드 빈 타이무르 알사이드(1932 ~ 1970)△ : 전근대적인 정책과 쇄국으로 국가를 후퇴시켜 공산주의 반군이 들끓게 되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아들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가 영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다행히도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는 명군으로 오만의 르네상스를 가져왔으며, 오만은 정치적으로도 아주 안정된 국가에 속한다.


6.4. 유럽[편집]



  • 로마 제국(서로마동로마 포함)
    • 칼리굴라(A.D.37 ~ A.D.41)▲◎ : 사후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고, 근친상간이나 국고 고갈 등은 후대 정적들과 호사가 수에토니우스의 조작으로 밝혀져 짧은 재위 대비 암군이라는 타이틀도 애매모호한 황제에 가깝다. 명군은 아니라도 로마사 전체에서 크게 문제있는 군주라 하기는 어려운 황제답게, 그가 취한 행정, 경제, 속주 정책 등은 당하는 원로원에게만 욕 먹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전체로 봤을 때는 프린키파투스(원수정)에 도움이 된 결단이 되었기 때문에, 후임 클라우디우스나 이후의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도 이 황제의 정책들은 계속 유지됐다.
    • 네로(A.D.54 ~ A.D.68)★◎ : 흔히 폭군으로 평가를 받지만 사실 암군+폭군에 가깝다. 물론 파르티아 문제도 잘 해결했고, 화폐 개혁에서도 성과를 냈기 때문에 최근 들어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국고 고갈이나 기원전 27년 이후 로마 제국의 조정 헌법 위반 등 각종 실책과 직방계 친인척, 아내들을 연달아 죽인 행적이나 고모이자 누이에게 근친상간을 시도했던 일들은 재평가 여지가 없는 악행으로 비난받고 있다.[73] 이런 이유로 네로는 기독교 박해 등 임팩트 있는 사건이 아니더라도, 오늘날까지 암군이자 폭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현제 중 한명인 트라야누스의 발언으로 네로의 재위 초반이 고평가됐지만 이 역시 겉으로만 정치를 잘 했을 뿐, 모후와 주변 권신들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며 각종 음모 사건이 연이어 터져 실제 평은 생각보다 좋지 못하다.
    • 비텔리우스(A.D.68)△
    • 콤모두스(180 ~ 192)★◆▲△ : 호부견자의 대명사로, 당대 로마인들에게 일찌감치 네로와 도미티아누스를 합친 무능하고 잔인한 폭군으로 대차게 욕먹고 암살 다음날 기록말살형 선포를 받았다. 다행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그의 성씨 안토니누스를 정통성 향상목적으로 자처하고 스스로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정치적 양자로 칭하면서 기록말살형은 해지됐다. 허나 세베루스를 시작으로 이후 로마황제, 원로원에게 "네로, 도미티아누스에 버금가는 암군+폭군"으로 공인돼, 사후에도 안 좋은 사례로 매일같이 욕먹었다. 어느 정도로 욕을 먹었는지, 그를 비난하고자 동시대, 후대인들은 이를 위해 콤모두스의 외조모 대 파우스티나, 모후 소 파우스티나, 숙부 루키우스 베루스까지 콤모두스 비난을 위해 왜곡, 묘사해 이들을 부도덕하고 음탕한 이들로 선전했다.
아버지 생전과 단독황제 등극 후 첫 2년 간은 무난한 황제였고, 공동황제 등극 전부터 원로원, 로마군에게 자발적으로 밝은 미래를 보장받은 후계자였다. 하지만, 맏누나 루킬라에게 콜로세움에서 암살당할 뻔한 이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어, 이후부터는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따라서 동시대 사람 디오 카시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콤모두스가 맏누나 루킬라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 속에게 폐인이 되고, 심각한 정신 질환으로 인해 모든 인생이 뒤틀린 불우한 삶을 살게 됐다고 약간의 위로까지 남겨줬다.
  • 엘라가발루스(218 ~ 222)▲ : 로마 제국의 77명 황제 중 최악의 인물 1위에 뽑힌 로마 최악의 암군. 실제 이 황제를 능가하는 사람은 동서고금 인류사에서 거의 없다고 평가받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알려진 칼리굴라의 이미지를 실제 그대로 한 암군으로, 대중들에게 서양판 연산군으로 유명한 네로, 콤모두스조차 초라해질 만큼 로마 제국과 이후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 남긴 해악이 상당하다.
즉위 직후부터 암살당한 4년 내내 일반인들이 상상해볼 법한 무법, 불법, 초인, 변태적 망상을 다 했다. 따라서 시체는 갈기갈기 조각난 뒤 테베레 강으로 통하는 하수구로 버려지고, 원로원과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근위대 모두에게 사실상 기록말살형에 처해져 로마 사회 전체에서 금지어가 됐다.
즉위 당시부터 성행위를 벌이면서 퍼포먼스를 하고, 해괴한 레반트식 신상을 로마 시 한복판에 세웠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희생자로 찍은 총독, 장군에게 자살을 강요해 죽이고, 국가 요직에는 아부꾼, 자신의 향락을 도운 후원자, 동성애인 등을 임명해 제국의 법과 질서를 흔들어 놓았다. 이후에도 여사제를 검열삭제 하고, 난교 파티를 하면서 이를 공개하는 등 온갖 기행을 벌였으며, 자신이 모시는 시리아 향토신 엘라가발 외의 모든 신들(심지어 유대교와 기독교까지)을 '엘라가발의 노예이자 종"으로 규정하고 이를 강요했다. 여기에 더해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할레를 한다거나, 제국 안의 원로원 의원이나 장군들을 성희롱 하면서 세베루스 왕조와 황제의 권위 자체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다. 참다 못한 외할머니가 아예 포기하고 대체자로 또 다른 외손자를 차기 황제로 일찌감치 낙점해버린다. 얼마 뒤,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제위경쟁자인 사촌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대놓고 조롱받은 뒤 본인이 도리어 근위대장과 병사들 손에 살해됐다.
  • 고르디아누스 3세(238 ~ 244) : 과거에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통해 훌륭하지만 운 나쁜 소년황제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실제 비문과 유적, 유물 등의 발굴과 연구 등으로 군인황제시대의 혼란을 장기화시킨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즉위 직후, 죽은 외조부와 외삼촌을 위해 북아프리카 내 유일한 로마군단을 강제해산시켜 이곳을 서로마 제국 분할 전부터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 제국 서방 방어선 침공 이민족들에게는 원칙없는 교섭 전략을 취해 문제를 일으켰다. 이 외에도 국가손해배상을 이상하게 바꿔, 로마 제국 이후 황제들에게 큰 짐을 안겼다. 다행히 장인 티메시테우스가 등장해, 더 큰 삽질은 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섭정인 장인이 급사한 뒤 무리하게 페르시아와 전쟁을 강행했다가 본인은 전사. 제위는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 손에 넘어간다.
  • 호노리우스(393 ~ 423) : 비록 즉위 당시 서로마 제국이 망가진 상태이긴 했으나, 고쳐보려는 시도조차 안 한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서로마 제국의 영웅이었던 스틸리코를 죽이고 고트족들의 침입 당시 요구사항을 들어주든 남은 병력을 모아서 결사항전을 펼치든지 대책을 찾은 게 아니라 괜한 자존심 때문에 천 명도 안되는 병사로 대책 없이 뻗대다가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가 철저하게 약탈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혼자 힘으로 제국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어떻게든 쇠퇴를 늦춰보려고 노력하기는커녕 멸망을 가속화시켰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암군이다.
  • 발렌티니아누스 3세(425 ~ 455)
  • 포카스(602 ~ 610)★▲△ : 서양의 수양제
  • 유스티니아누스 2세(685 ~ 695, 705 ~ 711)▲△ :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값을 가진만큼 능력은 뛰어나지만 그의 정신과 권력욕, 지나친 야망과 복수심이 모든 걸 말아먹었다.
  • 필리피코스(711 ~ 713):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나 정작 본인도 무능하여 이슬람과 불가리아의 침입에 무능력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 콘스탄티노스 6세(780 ~ 797)
  • 알렉산드로스 2세(912 ~ 913)
  • 콘스탄티노스 8세(1025 ~ 1028) : 최근의 연구로 재평가가 되고 있다. 해당 문서로.
  • 로마노스 3세(1028~1034)▲ : 바실리우스 2세의 사후 동로마 제국의 침체기를 열은 장본인.
  • 콘스탄티노스 10세(1059~1067)◎ : 문민 통치로 인해 당대에는 평가가 좋았으나 튀르크족의 침입에 대응해야할 군부가 약해진 상황에서 이를 재건하기는 커녕 오히려 군축을 통해 약해진 군을 방치하여 훗날 아나톨리아가 튀르크족에 의해 함몰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다만 인성은 훌륭했다는 점,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에서[74]◎표 추가
  • 미하일 7세(1067 ~ 1078) : "-1/4"이라는 특이한 별명이 붙었는데, 이는 그의 재위기간 동안 화폐 가치가 3/4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 안드로니코스 1세(1183 ~ 1185)★▲△ : 사실상 로마 제국 멸망의 제일공신.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씨앗[75]도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결국 시민들에게 폐위된 뒤 비참하게 죽었다.
  • 이사키오스 2세(1185 ~ 1195) : 안드로니코스 1세가 폐위되면서 시민들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군사적 능력은 좋았지만 관직을 시장의 채소처럼 판매하여 동로마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 알렉시오스 3세(1195 ~ 1203)△◎ : 형제를 폐하고 찬탈함으로써 정통성 문제를 불러일으켜, 도처에서 내분과 반란을 불러일으켰고 외교적 고립을 가속화했다. 매관매직으로 인해 군의 약체화가 절정에 달하는 가운데, 4차 십자군의 공격을 받아 거금을 챙기고 수도를 버린[76]황제로, 일반적으로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그가 처해있었던 상황이 워낙 안 좋았던지라 동정론과 재평가가 없지는 않으나, 이러한 '재평가'는 세간에 최악의 황제로 알려져 있는 포카스나 안드로니코스 1세, 이사키오스 2세에 대해서도 학계 일각에서 재평가가 시도되는 것과 비슷한 케이스일 뿐이다.
  • 알렉시오스 4세(1203 ~ 1204) : 4차 십자군을 제 손으로 불러일으킨 인물로, 매국노 취급을 받는다.
  • 알렉시오스 5세(1204)
  • 미하일 8세(1261 ~ 1282) : 니케아 공동 황제로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이라는 과업을 이룬 덕분에 명군처럼 보였지만, 동로마 황제로서의 재건 과정에서 과도한 증세로 많은 아나톨리아 로마인들의 불만을 샀고 권력 쟁탈을 위해 당시 11살이었던 황제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고 폐위시켜 큰 비판을 받으며 황가의 정통성을 추락시켰고 서방 세력과 외교에서 많은 실책을 저질러 제국이 고립되는 결과를 불러오는 등, 실상은 암군에 가깝다. 차라리 요안니스 4세가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제국을 다스렸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 환도는 좀 늦어질지언정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여러 폐단은 생겨나지 않고 제국은 수십 년 가량 더 존속했을 수 있다.
  • 안드로니코스 2세(1282 ~ 1328) : 전임 황제이자 아버지가 만든 난장판을 수습하느라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 중에서도 해군 해체는 가뜩이나 외우내환에 시달리던 제국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 요안니스 5세(1341 ~ 1376, 1379 ~ 1390, 1390 ~ 1391) : 상술한 미하일 8세가 제국 멸망의 문을 열었던 암군이라면 요안니스 5세는 그 문을 열린 채로 고정해버린 장본인이다. 비록 흑사병과 오스만의 흥기라는 불운도 있었지만 가만히 있던 요안니스 6세를 건드려 내전을 일으켰고 이것이 제위기 내내 이루어진 건 명백한 실책이다. 다음 군주인 마누일 2세가 유능하지 않았다면 제국은 반세기 빨리 멸망했을 것이라 여겨질 정도의 암군.

  • 바티칸
    • 교황령
      • 스테파노 6세(896 ~ 897)
      • 요한 12세(955 ~ 964)
      • 베네딕토 9세(1032 ~ 1044, 1045, 1047 ~ 1048)
      • 보니파시오 8세(1294~1303)
      • 식스토 4세(1471~1484)
      • 인노첸시오 8세(1484~1492)
      • 알렉산데르 6세(1492~1503)[77]
      • 레오 10세(1513 ~ 1521)
      • 율리오 3세(1550~1555)
      • 바오로 4세(1555~1559)
      • 우르바노 8세(1623~1644) : 갈릴레이 재판 때문이 아니라 그 특유의 고집불통적 성격과 독선 때문이다.

  • 영국
    • 잉글랜드 왕국
      • 플랜태저넷 왕조
        • 리처드 1세 (1189 ~ 1199)◎ : 암군으로 평가받았으나 군주로서의 능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오히려 훌륭한 모습을 보인 적도 많기에 ◎표를 추가한다. 그러나 무리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국내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다.
        • 존 왕(1199 ~ 1216) :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도,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도 모두 답이 없는 막장 군주였다. 그나마 초기에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귀족들의 압력에 억지로나마 마그나 카르타라는 중요한 유산을 남기긴 했지만 그게 전부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국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권 1순위인 인물은 '존'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있다.
        • 헨리 3세 (1207 ~ 1272)△
        • 에드워드 2세(1307 ~ 1327)▲△ : 배넉번 전투에서 털렸다.
        • 에드워드 3세(1327 ~ 1377) : 프랑스 왕위를 빼앗아 가려고 백년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 리처드 2세(1377 ~ 1399)△ : 정치 감각이 처참하게 결여되었다.
      • 랭커스터 왕조
      • 요크 왕조
      • 튜더 왕조
        • 메리 1세(1553~1558)★◎ : 그녀의 종교정책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녀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와 외교적인 부분에 대해서 문외한이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인 펠리페 2세가 결혼동맹을 근거로 영국군의 파병요청을 하였는데, 당시 신하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하다가 영국 최후의 대륙이라고 불렸던 칼레 항구를 프랑스에게 영원히 빼앗기게 되었다. 칼레 항구는 지리적인 이점 외에도 양모 수출에 3분의 1을 담당할 정도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라서 이후 재정 위기 상황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녀가 죽은 후에 즉위한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가 역대급 명군이라 칭찬받을만큼 뛰어난 정치능력을 보여준 덕분에 그녀의 암담한 정세능력이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결코 국가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당연히 이러한 점들로 인해 그녀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 스튜어트 왕조
        • 찰스 1세(1625 ~ 1649)▲△◎ : 찰스 1세가 폭군이었다든가 무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입헌군주제를 반대하고 전제군주제를 선봉하고 있었던 것 때문에 평가가 그렇게 된 것이다. 당시 영국의 정치 상황은 무작정 국왕이 독단적으로 정무를 수행하기엔 무리가 따랐는데, 찰스 1세는 이를 유연하게 대응할 정치 감각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우직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왕정 자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게다가 재정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 제임스 2세(1685 ~ 1688)△☆◎ : 다만 현재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매우 유능하고 근면한 군인이요 행정가였으나 정치가로서는 한계가 있었던 인물 정도로 재평가받고 있다.
    • 스코틀랜드 왕국
    • 잉글랜드 연방
      • 크롬웰 정권 : 크롬웰 부자의 직위였던 호국경은 본래 전근대 영국에서 섭정을 맡은 귀족(방계 왕족 제외)이 받는 칭호였으므로, 크롬웰 정권은 왕 없는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의 섭정 체제였다고도 볼 수 있다.
        • 올리버 크롬웰(1653 ~ 1658)★◎ : 올리버 크롬웰이 청교도 근본주의에 입각한 공포정치로 민심을 잃는 바람에 결국 크롬웰 정권이 2대만에 멸망하고 영국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만 1290년에 잉글랜드 밖으로 추방당한 잉글랜드 유대인의 후손들이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있게 하고, 기존의 전근대적 군대를 근현대적 군대로 발전시킨 군사적 업적을 남기는 등 긍정적인 면모도 없지는 않아서 ◎표가 붙었다.
        • 리처드 크롬웰(1658 ~ 1659)◎ : 아버지와 같은 폭군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에 비해 국가지도자 및 군사지도자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던 탓에 결국 크롬웰 정권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 윈저 왕조
        • 에드워드 8세(1936) :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망각하는 등[78] 무개념이었던데다 나치 부역 논란까지 남겼다.[79][80]

  • 프랑스
    • 프랑스 왕국
      • 발루아 왕조
        • 장 2세(1350~1364) : 왕으로서 완전히 무가치했다는 평을 들었다.
        • 샤를 6세(1380~1422)
        • 프랑수아 1세(1515~1547)
        • 앙리 2세(1547 ~ 1559)◎
        • 샤를 9세(1560 ~ 1574)
        • 앙리 3세(1574 ~ 1589)▲ :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으로 2년 즉위하기도 했는데,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도 나라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음주와 도박으로 소일하다 돌아간, 도대체 왜 왔는지 모를 인간 취급받고 있다.
      • 부르봉 왕조
        • 루이 14세(1643 ~ 1715)◎ : 스스로 태양왕이라고 칭하고 콜베르를 등용해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하지만 업적은 고작 이 뿐이다. 검소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 외에도 수많은 전쟁으로 재정을 파탄내는 상황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증축했다.[81]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기술자들인 위그노들을 유출시켰다.[82] 제 나라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를 스페인 군주로 앉혀 스페인을 위성국화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영국만 좋았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을 만든 셈이다. 물론 반대로 프랑스를 당대 유럽에서의 최강국으로 끌어올린 군주이기는 하다. 이렇듯 긍정적인 면모도 존재하는 점에서 ◎표가 붙었다.
        • 루이 15세(1715 ~ 1774) : 퐁파두르 부인에게 그저 휘둘리기만 했다. 그 사례로 3부인 동맹에서 촉발된 7년 전쟁을 들 수 있다.
        • 루이 16세(1774 ~ 1792)▲△◎ :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부정적 재평가가 나오면서 루이 16세의 성품과 능력이 긍정적 재평가를 받긴 하지만, 그래도 혁명을 촉발시킨 원인이 그에게도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루이 16세를 옹호하는 측에서도 바렌 사건은 쉴드쳐주지 않으며 그의 능력으로 혁명을 막기란 불가능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 샤를 10세(1824 ~ 1830)△
    • 노르망디 공국
      • 노르망 왕조
        • 로베르 2세(1087 ~ 1106)△ : 만약 그가 잉글랜드 왕위를 노리지 않고 노르망디 본토에서의 내치도 잘했다면 노르망디는 잉글랜드와 완전히 별개의 나라가 되어 잉글랜드와의 동군연합이 아닌 독립국가로서 좀 더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플랑타주네 왕조
        • 리샤르 4세(1189 ~ 1199)◎ : 잉글랜드 국왕으로서의 평가와 마찬가지.
        • 장 1세(1199 ~ 1216) : 노르망디 공국의 육지 영토를 모조리 상실해버렸다. 그나마 채널 제도를 지켜내긴 했지만 이마저도 육지가 아니라 섬이라서 사실상 그의 치세에 노르망디 공국이 멸망한 거나 다름없다.


  • 독일
    • 신성 로마 제국
      • 바츨라프 4세(1378/1376 ~ 1419/1400)
      • 루돌프 2세(1576 ~ 1612)
      • 페르디난트 2세(1619 ~ 1637) : 그의 아집과 광신, 불관용으로 끝낼수 있었던 30년 전쟁을 장기화시켰다. 이로 인해 나라가 피폐해졌고 결국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북독일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83]
    • 바이에른 왕국
      • 루트비히 2세(1864 ~ 1886)△ : 인간성은 소탈했지만 군주로서는 정치에 무관심했으며, 거기에 성 만들기에 대한 지나친 집착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루트비히 2세 본인이 폐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 빌헬름 2세(1888 ~ 1918)△ : 즉위하자마자 비스마르크를 내치고 제국주의 정책을 강화했다.[84] 이로 인해 영국이 독일을 견제하기 시작했으며 독일은 고립되어 갔다.[85] 더군다나 고립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식민지를 지배하겠다고 칭다오를 공격해서 청나라로부터 99년 동안 조차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고,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일어난 헤레로족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1914년에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정세를 오판해서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데 일조하였으며[86], 제1차 세계 대전 중반부터는 실권을 루덴도르프에게 내주고 꼭두각시가 되었다. 결국 킬 군항의 반란과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해 제정이 폐지되고 퇴위된 후에는 네덜란드로 망명했으나 호시탐탐 독일 제국의 복원을 노렸다. 다만 내치에 한정하면 때때로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독일 제국의 경제력을 대영제국에 준하는 수준까지 향상시키는 등의 모습도 있었지만, 무리하게 세계 정책을 추진하다가 다 말아먹었다.

  • 폴란드
    • 폴란드 왕국
      • 얀 1세 올브라흐트(1492 ~ 1501) : 코스민 숲 전투에서 대패했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받는다. 고작 전투 하나 패배했다고 이런 평가를 받는 게 박하다고 생각할수 있지만, 그가 재위기간에 한 일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 암군보다는 무능한 군주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1501 ~ 1506) : 점점 권력을 넓혀가는 귀족과 그들은 반대하는 귀족들의 싸움을 막지 못했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1648 ~ 1668)◎ : 폴리투의 가장 실패한 군주라는 평가도 있지만, 조국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 용감한 군주라는 평가도 있다.
      • 아우구스트 2세(1697~1706, 1709~1733) : 외세의 영향력 확산을 막지 못했다.
      • 아우구스트 3세(1733~1763) : 재위기간에 사치를 즐겨 폴리투를 암흑의 길로 영도한 장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
      •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1764~1795)△◎ : 현대까지도 평가가 가장 갈리는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파보면 업적도 많지만, 폴란드 분할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암군으로 평가받는데, 스타니스와프 2세의 재위기는 이전의 군주인 아우구스트 2, 3세가 싼 똥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사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천재로 보는 것이 맞다.

  • 스페인
    • 압스부르고 왕조[88]
      • 펠리페 2세(1556 ~ 1598)◎ : 원주민 노예제 폐지, 콩키스타도르 개혁, 레판토 해전 승리, 포르투갈 합병 후 동군연합 체제 형성 등 많은 업적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책도 커서 알짜배기 땅인 네덜란드를 상실하였다. 또한, 그의 치세에 스페인의 재정이 여러 차례 파탄났으며[87], 부왕과 마찬가지로 가톨릭만을 고수하는 종교적 보수주의를 추구했다. 게다가 무적함대가 드레이크 경에게 대파되었고, 이로 인해 사실상 스페인은 열강에서 탈락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표를 추가한다.
      • 펠리페 3세(1598 ~ 1621) : 압스부르고 왕조 최악의 암군.
      • 카를로스 2세(1665 ~ 1700)◆◇ : 암군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그래도 나라를 살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펠리페 2세 이후로 쌓인 폐단 + 카를로스 2세 본인의 신체적&정신적 한계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 보르본 왕조[90]
      • 카를로스 4세(1788 ~ 1808)
      • 말년의 페르난도 7세(1808, 1813 ~ 1833)
      • 이사벨 2세(1833 ~ 1868)
      • 알폰소 13세(1886 ~ 1931) : 국내의 여러 불안과 소요를 해결을 오로지 모로코 식민지화 등 팽창주의로만 풀으려고 했고 제대로 된 해결은 하려 들지 못했/않았다. 게다가 리프 전쟁 초반의 패배에 대한 책임 회피용으로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89] 장군의 군사독재를 허용하면서 완전히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만다. 결국 폐위당하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들어섰으니, 스페인 내전의 씨앗을 제대로 뿌린 셈이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1936 ~ 1975) : 왕 없는 왕국의 섭정 신분으로 스페인국을 이끌었다. 하지만 무자비한 철권 독재 정치를 폈을 뿐만 아니라 정적들을 나치에게 무너진 프랑스로 보내고 이들을 나치가 학살하는 것을 도왔다.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검열과 공포 통치를 실시했다.

  • 포르투갈
  • 이탈리아
    • 토스카나 대공국
    • 양시칠리아 왕국
      • 페르디난도 2세(1830 ~ 1859) : 재위 초반에는 친자유주의 성향과 국가 현대화 노력으로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내 보수화되어 자유주의 세력을 탄압하였고, 시칠리아 혁명 무력 진압과 그에 이은 대대적인 정치범 탄압은 국내외의 지지가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 양시칠리아 왕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 이탈리아 왕국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1900 ~ 1946)△ : 즉위 직후 국내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문제 해결은커녕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등 팽창에만 골몰하였다.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은 졸전을 거듭했지만 오스만군의 더 큰 졸전으로 겨우 이겼음에도 군사력을 증강시키려는 노력은 일체 없었고, 오히려 제 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졸전만 치르고 영토는 조금밖에 얻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내어 사회주의 운동이 터지는 결과를 마련했으며[91]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자'를 바랐다.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검은 셔츠단이 일으킨 쿠데타를 진압하지 않고 사실상 무혈 입성시켰기에 추축국의 전쟁범죄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 심지어 이탈리아가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막상 이탈리아는 2차 대전 기간 졸전만을 거듭하여 오히려 민폐만 끼쳤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본인은 결국 패전이 가까워지자 무솔리니를 실각시키지만 이미 이탈리아는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전쟁 중에도 패전을 거듭하자 저항하려는 생각조차 없이 남부지방으로 피신을 하는 행보를 보인다. 결과적으로 2차대전 패전 후 분노한 국민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었고 자신은 물론 왕세자였던 아들까지도 살아있을 때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못했다. 게다가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조 왕위 요구자들도 파시즘 신봉 및 선조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무사안일한 행보 때문에 자국민들한테도 좋지 못한 대우를 받는다.[92]



  • 벨기에
    • 레오폴드 2세(1865 ~ 1909)★ : 콩고 자유국 군주로서의 행적은 말할 것도 없이 폭군의 행보였으며, 벨기에 본토에서는 명군이었다는 주장이 많지만 사실 벨기에 국왕으로서의 평가도 마냥 좋지만은 않다. 자신의 정부를 위해 도가 지나친 수준의 사치를 부린 탓에 검소한 성향의 벨기에인들에게는 평가가 좋지 않았으며, 복지에 있어서도 매우 소홀했다. 무엇보다 플란데런(플랑드르)의 네덜란드계 벨기에인들을 무시하고 소외시킨 점 때문에 벨기에에서 프랑스계와 네덜란드계의 마찰이 더욱 심각해지는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되었다. 심지어 콩고 자유국을 지키려고 정부와 국회를 무시한 점 때문에 자국에서도 폭군, 독재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 콩고 자유국 군주로써의 잔악한 행위로 인해 벨기에가 나라망신을 당한 것은 덤. 벨기에를 초콜릿 강국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자신의 탐욕 때문에 덤으로 얻게 된 것.

  • 오스트리아
    • 합스부르크 제국[100]
      • 카를 6세(1711 ~ 1740) : 이 시기에 아버지인 레오폴트 1세의 업적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또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씨앗을 남긴 것도 명백한 실책이다.
      • 페르디난트 1세(1835 ~ 1848)◆ : 합스부르크 가문판 사마충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실제로 그의 치세대에 통치는 메테르니히와 그의 일가친척들이 도맡아했다. 결국 1848년 혁명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자 조카인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양위하고 제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 프란츠 요제프 1세(1848 ~ 1916) : 1848년 혁명 이후 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전제적 통치로 일관했으며, 1848년의 혁명을 계기로 드러난 자국의 허약한 군사력을 다시 강화시키는 데 무관심했다.[93] 그 결과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대패하게 되고, 제국의 주요 영토인 헝가리에서 소요사태까지 발생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헝가리 귀족들과 대타협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도 전제적 통치를 고수하면서 제국의 위기를 가속화시켰다. 또한, 그는 제국역량 강화에 매우 소홀히 하였는데, 동시대 프로이센과 그 후신인 독일제국이 산업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반면[94], 프란츠 요제프 1세 시대에 제국 내의 산업 지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이스트리아 반도 정도였고 나머지 지역은 낙후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95] 게다가 그는 보스니아 합병 문제로 삼제 동맹을 깨뜨려버리는 우를 범한다. 또한, 독일에 과잉 의존했으며, 독일 제국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카이저에게 빈번한 조언조차 하지 않았다.[96] 그는 오로지 자기권력 지키기에만 집중했으며[97],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던 조카를 멀리하는 모습을 보여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짓들만 벌였다.[98] 또한, 1914년에 사라예보에서 조카가 살해당하자, 이를 핑계로 세르비아 왕국몬테네그로 왕국을 병합하기 위해 군사력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전쟁을 도발했다. 결국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벌여[99] 국가를 파탄냈으며, 그의 사후 즉위한 황제인 카를 1세는 대단히 유능하였으나, 그의 치세대에 제국이 살아날 가능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 헝가리
    • 헝가리 왕국
      • 울라슬로 2세(1471/1490 ~ 1516) : 헝가리 왕국을 단 4년 만에 말아먹은 헝가리 역사상 최악의 암군.
      • 호르티 미클로시(1920 ~ 1944) :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내륙국의 제독인 이 사람은 명목상으로 왕정을 유지하지만, 정작 군주가 됐어야 할 카를 1세오토 황태자가 헝가리의 군주가 되는 것을 가로막고 이를 이용해 독재를 했다. 트리아농 조약 이후의 상황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고[101][102], 2차 대전 때에는 추축국으로 가담한다.[103] 그래도 후임이 워낙 막장 전범이기에 평가가 마냥 박하지만은 않기도 하다.


  • 루마니아 왕국
    • 카롤 2세△(1930 ~ 1940) : 자신의 정부를 위해 국가의 1년치 예산에서 20%에 가까운 보충 예산을 편성하고 사치를 부리는 행각을 자행했다.[104] 이러한 막장 통치로 결국 총리 안토네스쿠의 압력으로 퇴위하였다. 한편, 안토네스쿠는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협력한 파시스트들을 숙청해버리는 등 능력은 있는 인물이었으나, 이 인간은 줄을 잘못 서서 루마니아를 파탄냈다.

  • 불가리아 왕국
    • 페르디난트 1세(1908 ~ 1918) : 무리한 욕심으로 발칸 전쟁에서 영토를 잃고, 1차 대전에서 불가리아군의 세르비아에서의 학살을 야기한 장본인이다.


6.5. 아프리카[편집]


  • 이집트 왕국
    • 파루크 1세(1936 ~ 1952) : 사실상 영국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실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국민들을 마구 억압한 건 아니지만 각종 기행을 일삼은 탓에 이집트 내에서의 이미지가 크게 떨어졌고 암군 취급을 받는다.

  • 에티오피아 제국
    • 이야수 5세(1913 ~ 1916) : 기독교(정교회) 국가인 에티오피아에서 친이슬람 정책을 펼치고 친독정책을 펼치는 등 정치감각이 결여돼 기어코 폐위되었다. 다만 에티오피아 내 무슬림들에게는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며, 이들은 오히려 이야수 5세가 폐위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경향이 강하다.

  • 줄루 제국
    • 샤카(1816 ~ 1828)★◆ : 남아프리카의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들소 전략'이라는 전술을 창안한 뛰어난 지략가였던 샤카는 줄루 제국을 건국하고 매우 빠르게 그 세를 넓혔으나, 홀어머니를 여의고 정신병에 걸려 폭군이 된 뒤 백성들이 농사짓지 못하게 만들어 기근에 시달리게 하거나, 임산부들과 임신한 소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잔혹한 기행을 벌이는 암군이 되었다. 이 때문에 샤카의 두 이복동생이 그를 암살하게 된다.

  • 중앙아프리카 제국
    • 보카사 1세(1976 ~ 1979)★△ : 대통령이었다가 친위 쿠데타를 통해 군주가 된 것은 위의 나폴레옹 3세와 비슷하지만, 나폴레옹 3세와 달리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도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으며 군주로서의 역량 또한 나폴레옹 3세에 비하면 0에 수렴했다. 심지어 황제가 반정부 인사들을 직접 때려 죽이던 판이었으니 폭정은 폭정대로 휘두르면서 나라를 위한 긍정적인 업적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결국 황제 즉위 3년 만에 프랑스가 지원한 쿠데타가 발생하며 제국은 1대 3년이라는 매우 짧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6.6.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편집]


비록 암군이긴 하나 암군이라고 하기엔 논란이 있는 경우들 중, 암군 쪽에 좀 더 기울어진 암군들은 윗 문단들에 서술, 반대로 거의 반반이거나 별 일이 거의 없었거나 긍정적인 면모가 충분히 많은 암군, 관점에 따라 충분히 명군이라 할 수 있는 경우는 여기에 서술.

  • 한국사
    • 고구려
      • 안원왕(531 ~ 545)◎: 사실 기록상으로 실정을 벌인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도량이 넓었다는 긍정적인 뉘앙스의 평가가 있을 정도. 그런 것처럼 재위 중반까진 그냥 평범히 보냈다. 다만, 이 과정에서도 직접 친정했다가 백제에게 역관광을 허용, 말 그대로 개발살나기도 했고, 말년에는 추군과 세군 측의 왕위 계승 다툼에 휘말려 결국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막을 힘도 없었는지 궁궐 문을 잠군 채 수수방관하기만 했다고 한다. 물론 상술했듯이 이미 부왕 문자명왕 때부터 고구려는 쇠퇴할 기미가 보였는지라 안원왕 한 명만의 잘못으로 몰빵해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 양원왕(545 ~ 559)◎ : 이쪽도 할아버지 문자명왕으로부터 내려온 실책을 떠안은 것에 가깝다.
    • 신라
      • 선덕여왕(632 ~ 647)◎ : 그녀의 치세때 신라는 최악의 내우외환의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위기를 마주한 상황에서 그 위기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더욱 키워나갔다. 하지만 불교 후원과 김춘추 세력을 끌어들어 신라가 삼국시대의 최후의 승자가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표를 추가한다.
    • 발해
      • 대현석(872 ~ 894?)◎ : 사실 이 무렵의 발해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지 한참 지난 상태라서 마냥 암군으로 칭하기는 어렵다.
      • 대인선(906? ~ 926)◎ : 이 쪽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망국의 군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암군 취급을 받고 있는 셈이다.
    • 고려
      • 성종(981 ~ 997)◎ : 자신의 명군 시절 개혁을 말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그러한 말년의 실책(특히 노비환천법)은 후대의 문벌귀족들이 고려 사회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에 입각해 노비환천법 등 친공신 정책을 무조건 좋게 평가하였고 특히 조선의 공신 우대가 절정에 달했던 세조 치세에 고려 성종의 친공신 정책을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고려 성종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점 없는 명군에 가까웠으나, 현대에 고려 성종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명군이었으나 나중에는 폭군까지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암군에 가까운 모습으로 타락했다는 부정적 재평가가 나오고 있다.
      • 인종(1122 ~ 1146)◎ : 물론 갑자기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점과 그 당시엔 문벌귀족들의 힘이 너무 막강해져서 제대로 된 실권을 휘두르기 힘들었다는 탓도 있었지만, 이자겸에게 휘둘린 나머지 고려의 멸망 당시까지 이어진 첫 쇠퇴기를 열었다는 점에서는 옹호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유신지교 15개조를 발표하는 등 능력은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인성은 훌륭하였고 국정을 돌보는데 최선을 다했기에 암군으로서 평가하겠냐는 등 논란이 있다.

  • 중국
    • 당나라
      • 당고조(618 ~ 626)◎: 무능력한 배적을 감싸고 돌면서 이를 위해 중신 유문정을 처형하였다. 게다가 당 건국 초에 설인과 등 유력 군벌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나중에 태종으로 즉위하는 이세민의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3남 이원길의 좋지 않은 행실들을 그저 묵과하였다. 결국 이러한 불공정한 처사와 돌궐의 침입이라는 명분이 맞아떨어져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다. 다만, 그 기록이 아들인 태종측의 주장으로 쓰여있는지라 역사왜곡이라는 시선도 있다.
    • 남송
      • 송고종(1127 ~ 1162)◎: 악비 문제로 많은 지탄을 받는 군주이나[105] 소흥화원이나 남송관요 등을 만들어 남송의 문화융성에 꽤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보면 업적을 꽤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황 휘종의 적장자인 형 흠종의 귀환을 가로막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06]
    • 명나라
      • 정통제(1435 ~ 1449, 1457 ~ 1464)◎: 토목의 변 이전, 난신 왕진에게 휘둘렸던 영종. 그래도 천순제로 복위하자 정신을 차리고 간신들을 처단하고 우겸의 일을 제외하곤 괜찮은 정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청나라
      • 가경제(1796 ~ 1820)◎: 강희제 시절부터의 성세가 워낙 임팩트 있어서 치하에 나라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한 가경제가 암군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가경제가 특별히 무능했다는 부분은 없고, 오히려 건륭제가 남긴 문제들을 그럭저럭 수습했다. 다만 화신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내탕금으로 축적한 일만은 옹호하기 어려운 편이다.

  • 태국
    • 라마 9세(1946 ~ 2016)◎ : '태국 민주주의의 최후의 기둥이 되었던 명군', '허울뿐인 입헌군주제일 뿐, 군부와 짜고치는 전제군주 독재자' 등의 평가가 갈리는 군주이다. 최근 태국의 민주주의가 점점 후퇴하는 경향과 후계자 선정을 매우 잘못하는 바람에 점점 평가가 나빠지고 있다.


  • 프랑스
    • 발루아 왕조
      • 프랑수아 2세(1559 ~ 1560)◎ : 애초에 재위기간이 1년밖에 안되는데다 불과 16살에 요절해서 뭐라도 해볼 껀덕지도 없었다.
    • 부르봉 왕조
      • 루이 18세(1815 ~ 1824)◎ : 적어도 동생보다는 나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샤를 10세는 관용 없이 절대왕정을 무조건 고수하려는 입장이어서 오죽하면 그가 후사가 없을 때 차라리 루이 18세가 최대한 장수해 샤를 10세가 왕위에 오르는 걸 늦추는 것을 바랐을 정도.
    • 부르봉-오를레앙 왕조
      • 루이필리프(1830 ~ 1848)◎ : 개인적인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으며, 높은 신분의 귀족임에도 검소하게 지내는 등 긍정적인 면모가 있어 샤를 10세의 폐위 이후 입헌 군주정 체제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술트 내각과 기조 내각의 실책을 제어하지 못했으며, 이로인한 불만은 프랑스 2월 혁명과 제2제국의 도래를 불러왔다. 샤를 10세처럼 완전히 무능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무리인 측면도 있어 ◎표를 추가한다.(마리우스의 할아버지도 손주녀석에게 "왕의 잘못이 아니라 꼬붕이 패거리들 탓이다"라고 했다.[107])
    • 프랑스 제1제국, 프랑스 제2제국
      • 보나파르트 왕조
        • 나폴레옹 1세(1804 ~ 1814, 1815)△◎ : 19세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의 전 유럽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나,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대륙 봉쇄령을 반포해 역으로 고립을 자초한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나폴레옹 일파들과 군대는 폴란드나 독일 서부지역을 제외한 전 유럽 지역을 약탈하고 폭정을 저질렀으며, 이는 피지배민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여기저기서 나폴레옹 지배에 반발하는 봉기가 발생하게 된다.[108]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꽃피우기는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대륙봉쇄령을 어긴 러시아 제국을 응징하겠다고 원정을 단행했다가 대패했으며 이는 제1제국의 몰락의 계기로 작용한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길 수 있었던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본인의 실책과 휘하 원수들의 불화 등으로 영국의 아서 웰즐리와 프로이센의 블뤼허 등 반불연합군의 명장들에게 패했다. 그래도 프랑스 내 민심은 잘 휘어잡았으며, 가족들이 사치스럽게 지내는 와중에도 본인은 검소했다. 말년에 여러 실책들을 저질렀으나, 거의 전 유럽을 제패하여 유럽의 모순을 깨뜨리고, 라틴아메리카 독립에도 영향을 주는 등[109]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당대 인물들의 평은 호불호가 모두 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에 대해 전쟁의 신 그 자체(Der kriegsgott selbst.)라고 극찬했고, 헤겔 역시 유럽의 낡은 체제를 부수는 그를 긍정하는 평을 남겼으나, 베토벤 등 그가 황제가 된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그의 행보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다. 장 란이나 루이니콜라 다부같은 유능한 원수들을 발탁해 중용한 것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나폴레옹 3세(1852 ~ 1870)△◎ : 내치에 있어서는 나름 업적을 남겼지만 크림 전쟁 개입 등으로 제국 쇠퇴의 빌미를 제공했고 프로이센 왕국과의 외교 문제에서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신도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됨으로써 비참하게 몰락했다.[110] 게다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아노 1세를 멕시코의 괴뢰 황제로 두어 북아메리카에 영향력을 확보하려다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되면서 오히려 멕시코에서 프랑스의 평판이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전반적인 국정 운영 능력도 큰아버지[111]에 비해 부족한 편이었다.


  • 불가리아
    • 보리스 3세(1918 ~ 1943) :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로 뇌이 조약으로 인해 파탄난 불가리아 차르국을 떠안았다. 2차 대전에 추축국으로 가담했다는 실책도 있지만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담했다는 평도 있으며 추축국에 소속되었음에도 히틀러에 소소하게 반기를 들다가 결국 1943년에 암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 불가리아는 국민군단연합이라는 나치의 괴뢰국이 된다.

  • 스웨덴
    • 칼 12세(1697 ~ 1718)◎▲ : 반면 명장이라는 평도 존재한다.
  • 러시아
    • 로마노프 왕조
      • 니콜라이 1세(1825 ~ 1855) : 가장 중요한 시간(국민들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열광하던 시절)에 개혁을 포기하고 억압 정치를 실시했다. 그 결과 크림 전쟁이 발발해서 러시아 제국이 패전하는 결과를 맛보았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재정상태를 망치게 된 것도 니콜라이 1세의 책임이 크다.
      • 알렉산드르 2세(1855 ~ 1881) : 러시아 입장에서는 명군이자 성군이지만 식민지 폴란드에서는 가혹한 통치로 그를 증오하였고 이 때문에 마리 퀴리는 학생 시절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자 환호했다.

  • 덴마크
    • 올덴부르크 왕조
    • 글뤽스부르크 왕조
      • 크리스티안 10세(1912 ~ 1947)◎ : 동시기 폴란드마냥 주민투표의 결과에 불복하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역의 합병을 지시하고, 이에 반대한 수상을 해임하고 내각을 해체시키는 등 부활절 위기를 야기하는 한편, 독일과 덴마크 간의 관계를 해칠 뻔했다. 이를 계기로 덴마크 왕국도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침략자인 나치 독일을 상대로 무언의 저항을 하기도 했다.[112]

  • 오스트리아
    • 합스부르크 왕조
      • 레오폴트 1세(1658 ~ 1705)◎ : 외교적으로 유능한 인물이고 업적이 상당하기는 하지만, 합스부르크 스페인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고 프랑스와의 스페인 분할을 꾀해 스페인에서의 합스부르크에 대한 평판이 악화되는 계기를 초래하고, 슈트라스부르크가 그의 시기에 프랑스령 스트라스부르가 되었으며,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무리하게 착취해 반란에 직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 마리아 테레지아(1740 ~ 1780)◎ : 느슨한 연합체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강력한 개혁 정책을 통해 하나로 묶은 것은 분명 그녀의 업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가 암군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그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거나 일으킨 차례의 큰 전쟁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113], 오히려 막대한 전비만 소모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부담을 안겨주었다.[114] 또한, 여성 군주임에도 여성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자신의 통치철학인 금욕주의, 도덕주의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115],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죽고난 후에는 통치의욕을 잃는 모습을 보여 기껏 강화시켜 놓은 황권을 깎아먹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식농사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공동 통치자인 첫째 아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116], 특정 자식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 어머니로써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그녀는 느슨한 연합체인 합스부르크 제국을 하나의 국가로 묶은 업적이 있으며, 이를 통해 그녀는 당대에 국모라고 평가받았으므로 ◎표를 추가한다.

  • 스페인
    • 보르본 왕조
      • 말년의 후안 카를로스 1세(1975 ~ 2014) : 명암이 크게 갈리는 왕. 스페인 군부의 꼭두각시로 내세워질 운명이었으나, 프랑코의 후계자인 블랑코 제독이 암살당하는 등의 행운을 틈타 실권을 장악한 뒤 프랑코 체제를 해체하고, 이에 반발하는 쿠데타를 진압하고, 재분열의 위기를 맞이한 스페인을 왕의 권위를 이용해 진정시켜 2차 스페인 내전의 위기를 넘기고, 마지막으로는 절대왕정이었던 스페인 왕가의 실권을 내려놓고 민주정을 확립하는 등 명군의 명모를 보여 스페인 민주주의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으나 재위 말년에 보츠나와에서 벌인 사치와 향락이 발각되면서 사실상 반강제로 퇴위했고, 퇴위 뒤에도 발각된 스캔들 때문에 기록말살형에 준하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공화정 복귀여론까지 돌 지경. 아들이자 후임자인 펠리페 6세가 개념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스페인 제3공화국이 들어섰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117] 그나마 나라를 말아먹은 것도 아니고, 나라를 말아먹을 만한 권력은 이미 재위 초에 스스로 다 내려놨으니 나라망신으로만 끝난 것이 다행.


  • 에티오피아
    • 하일레 셀라시에(1930 ~ 1974)△ : 말년에 사치에 빠진 탓에 결국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을 제공한 꼴이 되었다. 다만 이는 과장도 많이 섞여 있으며 이탈리아로부터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이끌어냈고 경제성장, 6.25 파병 등의 공로가 있으므로 대체로 명군으로 보는 추세이다.


7. 가상의 암군[편집]


  • 가담항설 - 선대 왕, [118]
  • 감수성 - 감수왕
  • 갓 오브 하이스쿨 - The King[119]
  • 괴도 조커 - 알라딘 국왕[120]
  • 눈물을 마시는 새 - 권능왕
  • 더 위쳐 시리즈 - 데마벤드 국왕
  • 던전앤파이터 - 팔메리어 황제[121], 팔메리어 4세[122]
  • 라이온 킹 시리즈 - 스카[123]
  • 록맨 제로 시리즈 - 엑스[124]
  • 리그 오브 레전드 - 비에고[125]
  • 리어왕 - 리어왕
  • 롤랑롤랑 - 윌리엄
  • 롤링스타즈 - 바키
  • 마기 - 아부마드[126]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 오딘[127], 트차카
  • 마하바라타 - 유디슈티라
  • 마법천자문 - 암흑상제[128], 옥황상제(애니)[129]
  • 말레피센트(영화) - 스테판 왕
원작이 아닌 실사영화에 나온다.
  •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 - 브륀 왕국의 팔롱 왕[130], 피그넬리아 아르샤빈[131], 발렌티나 그링카 에스테스[132]
  • 머메이드 멜로디 피치피치핏치- 아쿠아 레지나[133], 루치아[134]
  • 무적코털 보보보 - 반들반들리나 4세
  • 무한도전 - 대왕[135]
  • 메이플스토리 - 선대 신왕, 헤카톤, 샤렌 3세, 이아손
  • 메카드 시리즈
  • 베르세르크 - 미들랜드 국왕
  • 붕괴: 스타레일 - 쿠쿠리아 랜드, 시릴 랜드
  • 성전사 단바인 - 프라온 엘프
  • 소피루비 - 멀구나 왕국 국왕
  • 스타크래프트 2 - 아크튜러스 멩스크[136], 말라쉬[137]
  • 신격의 바하무트 GENESIS - 샤리오스 13세, 샤리오스 17세
  • 신비아파트 시리즈 - 이안[138], 순훤왕
  • 신비한 별의 쌍둥이 공주 1기 - 해님나라, 달나라[139], 이 외의 5개국 국왕들. 브라이트[140]
  • 십이국기 - 봉왕 추타츠
  • 십이야(웹툰) - 이원[141]
  • 쓸쓸하고 찬란하神 - 도깨비 - 왕여[142]
  • 아르슬란 전기 - 이노켄티스 7세[143], 고타르제스 2세[144], 오스로에스 5세, 안드라고라스 3세, 키리카라 2세[145]
  • 아카메가 벤다! - 황제[146]
  • 아바타 - 오자이[147]
  • 악역 영애물 - 원래 공략 대상자들 정확히는 A라는 왕자가 B라는 히로인에게 연애를 하며 C라는 약혼이 되어있는 영애에게 파혼을 날리는 클리셰인데 대부분 암군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악역 영애물 작품들중 공작영애의 소양에드거 르 타스메리아는 연애결혼을 한답시고 정실을 직위가 낮은 백작가의 샬리아와 결혼. 하지만 정략결혼으로 들인 후처가 샬리아를 독으로 암살하고 이후 무기력증에 빠져 왕국에 지대한 혼란을 초래시킨다. 아들 중 차남에드워드 톤 타스메리아가 이 후처의 자식인데. 게임상 이야기로는 여주인공 유리와 같이 잘먹고 잘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이야기지만 일본 현대인이 악역 영애로 전생된 공작영애의 소양에서 보여준 모습은 이놈이 왕이 되면 암군 그 자체가 100%라고 확신되는 무능의 끝판왕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타국과 분쟁중인 와중에도 무료급식을 내어주면서 군대를 없애자는 미친짓거리를 하려고 한다. 그러고서 사치를 하는건 덤. 더 심각한건 공작가가 힘이 커졌다고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영지를 부수면 그대로 전부 자신 손에 다 들어오는 줄 아는 정치감각따위는 눈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준다. 이에 파생된 악역 영애물 대부분 원 공략대상자(왕자)들이 이런 케이스다.
  • 악한 기사 - 몬트왕국 국왕
  • 앵그리버드 시리즈 - 킹 피그
  • 야인들의 마피아게임 3편 - 알파고
  •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 - 레오 3세[148]
  • 얼음과 불의 노래 - 아에니스 1세, 비세리스 1세[149], 아에곤 2세, 바엘로르 1세, 아에곤 4세[150], 아에리스 1세, 아에리스 2세, 로버트 바라테온, 조프리 바라테온, 발론 그레이조이
  • 엘든 링 - 만월의 여왕 레날라
  • 엘릭 사가 - 엘릭[151]
  • 워르테니아 전기 - 루피스 여왕[152]
  • 워크래프트 시리즈 - 오스마르 가리토스, 가로쉬 헬스크림, 실바나스 윈드러너
  • 워해머 판타지 - 루드뷔크 2세, 보리스 골드게더, 디터 4세, 칼레도르 2세[153]
  • 원신 - 훌리야[154], 라이덴 쇼군[155]
  • 원피스 - 루브니르 국왕
  • 은하영웅전설 - 은하제국프리드리히 4세[156]
  • 은혼 - 도쿠가와 사다사다
  • 이계진입 리로디드 - 젝센가드 라텐베르크
  • 임금님전대 킹오저 - 라클레스 하스티[157], 이로키[158]
  • 작약만가: 서리꽃 - 황봉림
  • 진격의 거인 - 칼 프리츠[159]
  • 조이드 제네시스 - 지인
  • 제로의 사역마 - 올리버 크롬웰[160], 필립 3세[118], 죠세프[161], 빅토리오 세레발레[162]
  • 젤다의 전설 - 가논돌프
  • 테일즈런너 - 앙리 1세[163], 앙리 3세[164]
  • 파이널 판타지 XV 유니버스 - 레기스 루시스 카일룸[165]
  • 프린세스 - 비욘 카칸 표르도바[166]
  • 트로이 - 프리아모스
  • 드래곤 퀘스트 다이의 대모험 - 아르키드 국왕[167]
  • 태조 왕건 - 궁예[168]
  • 프리큐어 시리즈
    • 해피니스 프리큐어! - 블루[169]
    • 스타☆트윙클 프리큐어 - 스타 프린세스[170]
  • 해적전대 고카이저 - 총사령관 왈즈 길
  • 황후가, 돌아왔다 - 리오넬
  • 황후의 품격 - 이혁
  • 히어로메이커 - 뭉클리아[171], 골드 수저[172], 베르미누 3세[173]
  • 히노와가 간다! - 창해국 왕[174], 천랑국 왕 즈노우[175]
  • UFO로보 그렌다이저 - 베가 대왕
  • 은하전국군웅전 라이 - 라코우
  • 버림 받은 황비 - 미르칸 루 샤나 카스티나, 회귀전의 루블리스 카말루딘 샤나 카스티나
  • Fate/Grand Order - 이문대의 왕들, 리처드 1세
  • 포켓몬스터 XY - 아리 공주


7.1. 전략 게임에서의 암군[편집]


군주제의 국가를 운영하는 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보통 군주 각각이 몇 가지 능력치를 가지며 이것이 게임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군주라는 것이 그냥 약간의 버프, 디버프 정도만 주는 경우라면 별 상관이 없지만 군주의 능력치가 게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 플레이중인 국가에 암군이 들어선다면 게임 진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기도 한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시리즈 - 게임 내 대부분의 국가가 군주제이기에 랜덤한 확률로 랜덤한 능력치의 후계자가 등장하여 왕위를 잇게 된다. 그런데 군주 능력치에 따라 받는 포인트가 게임 내 거의 모든 행동에 대량으로 소모되어 사실상 돈보다도 중요한 메인 자원이기에 암군이 등장하면 참 골치아프다. 보통 능력치 총합이 6(가령 2/2/2) 미만일 경우에는 심각한 암군으로 취급한다. 다른 변수를 제외하고 비교한다면 능력치 최하의 군주(0/0/0)와 최고의 군주(6/6/6)를 둔 나라는 기술개발만 할 경우 속도가 3배나 차이난다.

  •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 국가를 플레이한다기보다는 중세 영주 개개인을 플레이하는 것에 가까운 게임 특성상 캐릭터 능력치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며 능력치가 쓰레기인 캐릭터가 계승받는다면 난이도가 급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상속법과 각종 음모를 통해 능력치 구린 자식을 죽이거나 투옥하거나 하는 등 플레이어들은 온갖 수단을 써서 암군의 등장을 막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하다보면 이것이 게임의 메인 컨텐츠 중 하나인 것 같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 토탈 워 시리즈 - 전반적으로 군주 능력치가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특히 시기상 현대에 가까운 배경을 가진 작품일수록 군주보다는 개별 장군들의 영향이 크며 원하지 않는 군주를 갈아치우기도 어렵지 않다. 물론 영향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 꽤 큰 패널티를 가진 왕도 가끔 나온다. 작게는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의 수입 및 민심 감소부터, 크게는 모든 영토에 디버프를 걸어버리거나 외교에 페널티를 주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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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종, 정조. 그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태종 또한 과거 장원 출신으로 대단한 학식을 보유해서 경연관들을 당황시키는 모습을 여럿 보였다.[2] 똑똑한 것과 리더의 자질은 일단 별개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을 다루는 정치력이라는 건 아무리 공부로 능력을 채워넣는다고 한들 결국은 재능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대표적인 예시로 고구려 미천왕이 있는데, 어린 시절 이후로 평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소금장수로 살아오다가 혈통 하나만으로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낙랑군을 축출하고 후대에 이어지는 고구려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명군으로 분류된다.[3] 또한 모든 암군들이 다 그런건 아니지만, 차라리 군주가 아니라 아예 다른 직업을 가졌으면 오히려 유능했을 암군도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후한 영제(장사꾼 또는 사업가), 송휘종(예술가), 천계제(목수), 네로(전차 경기 선수), 콤모두스(검투사), 루이 16세(학자) 등.[4] 심지어 이 두 명은 성군으로 칭송받는 선왕을 아버지로 두었고, 초반에는 본인의 능력도 결코 무능하지 않았고 심지어 각각 12년의 재위기간 전반기에는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했으나 후반에는 그 정치력을 대규모 숙청에 활용하고는 군왕의 책임감을 망각하고 제멋대로 살기 시작하면서 비가역적인 폐해를 남기고 물러나게 된다. 이들은 '숙청과 황음으로 국가의 전성기를 끊어놓은, 궁궐에서 태어난 첫 후계자'라는 점에서 평행이론 수준으로 전형적인 사례이다.[5] 퇴위한 상황이 금상 천황의 후계자 결정에 개입하여 천황의 사망 이후 마음에 드는 또 다른 자기 아들을 차차기 천황으로 삼으면서도 기존 천황의 후손들이 그대로 계승권을 갖는 등의 복잡하고 비정상적인 천황직 계승이 반복되면서 나중에는 누가 천황으로 즉위하든지 정통성에 컴플렉스가 생기는 정말 개나소나 권신 등 외부 세력의 지지를 받으면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남북조시대의 싹이 이미 그 이전 시대에 자라고 있었던 것. 심지어 나중에 남북조로 나눠지는 두 계통이 10년씩 번갈아가면서 천황직을 계승하는 등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한다.[6] 고려고종, 조선 철종 등이 있다.[7] 대표적인 케이스가 후술할 페드루 2세와 무함마드 자히르 샤다.[8] 일본의 왕은 엄연히 천황이었다. 하지만 천황이 워낙 허수아비라서 실질적인 일본의 왕은 막부의 장군(쇼군)이나 다름없었다.[9] 예를 들자면 후한 환제, 영제. 고려의 우왕, 명나라의 만력제. 다만 자히르 샤의 경우는 딱히 전대의 실책 때문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쿠데타로 쫓겨났고, 이후 나지불라의 독재 및 탈레반의 만행으로 나라가 왕정복고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것이다.[10] 암군을 무조건 만악의 근원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성 같은 것은 재발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11] 이 표현은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에서 사마휘방덕공유표를 평하면서 한 말이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당나라현종이나 청나라건륭제, 조선 세조 역시 명군 같은 암군이라 할 수 있다.[12]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쇼군이 아니었다.[A] A B 당연하지만 이런 군주는 어쩔 수가 없다. 장애에 의한 실수 또는 무능을 일방적으로 탓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13] 반면 알렉산드로스 3세시황제와 같이 다른 국가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한 조상의 업적을 잘 이어받은 훌륭한 후손 군주들도 존재하는데, 고국원왕은 이와 대비된다.[14] 40년이 얼마나 긴 시간이냐면, 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왕의 재위 기간을 전부 합친 정도이다. 그만큼 큰 시간을 날려먹었단 것.[15] 실제로도 문자명왕 다음왕인 장남 안장왕은 문자명왕 시기의 침체를 극복하고 전성기를 유지했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지만[16] 다만 장군으로써의 능력과 국왕로써의 능력은 별개이다.[17] 패강진 일대 호족들과 서경총관이었던 왕식렴 세력을 일컫는다.[18] 물론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거란의 침략을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거란은 송나라를 치기 전 배후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19] 오죽하면 그가 죽자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다.[20] 그의 사후 자식이었던 경춘원군이 광종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21] 그 예가 김보당의 난. 주도자인 김보당의 경우 평소 의종의 실정에 비판적인 인물이라서 무신정변 당시에는 무사했었던 것이다.[22] 권력 자체는 가지고 있었지만 왕위 계승과는 먼 농민으로 살던 과거 때문에 제왕학을 배우지 않아 권력을 쓰는 법을 몰랐다. 왕이 될 준비가 안 되었던 사람이 왕이 된 것이라 힘이 있어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말년에 그나마 왕으로서 준비가 되었을 때는 당시 실권자 세력이었던 신 안동 김씨 탓에 철종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23] 태조, 태종, 세종, 문종, 성종,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이들 중 숙종은 무려 단종을 복권시킨 군주이기도 하며, 아들 영조는 김종서를 복권시켰다.[24] 이 4가지 업적 중 훈민정음이 널리 보급되게 한 것과 경국대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두 업적들은 모두 손자 성종 대에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린 감이 있다.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 시절 만들어진 법이고, 세조가 쿠데타로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이를 폐지한 것이다. 이 법이 부활한 것은 성종 시절로, 이에 애민정신이 상당했던 세종이 이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부민고소금지법이 사실상 성종 시절에 만들어진 법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25] 게다가 애초에 성리학 군주 끝판왕인 성종이 엄연히 왕위에 앉아 있는 마당에 후궁 주제에 중전인 윤씨한테 감히 대들었다가는 그 즉시 끔살 당했을 것이다. 당장 후궁은 자신의 친자한테도 무조건 존칭을 써야 했다.[26] 패륜의 대명사인 증조부 세조와 이복형 연산마저도 자신의 친자식들은 끔찍히 아꼈다. 애초에 왕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와 중종 단 둘밖에 없다. 그나마 자식을 굉장히 미워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인조까지 셋이다. 소현세자는 청이 소현과 원손들을 볼모로 인조의 왕권을 위협했고, 사도세자는 아예 정신병자가 되어 도저히 왕위를 이을 수 없는 상태였다.물론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도 인조, 영조의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복성군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아 죽은 셈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적장자 인종이 18세로 성년이었기에 혈통 면에서 밀리는 복성군을 죽여야만 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27] 임진왜란 이전부터 심질(心疾) 즉, 조현병이 있다고 스스로 고백했고, 날이 갈수록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28] 인재풀로는 가히 조선의 올스타급 능력자들이 많이 모인 세종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세종의 경우 신하들이 능력이 있어도 뭔가 성격이 무지막지하게 드세다던가 뇌물, 친인척 비리 은폐같은 부정부패를 저지르기도 하며 기껏 세종 본인이 최선을 다해 만든 문자를 대놓고 반대하는 등, 온갖 사건사고를 시도때도없이 치고 말도 안 들어먹어서 임금 입장에서는 참 컨트롤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던 반면, 선조는 또 그렇지도 않아서 휘하 신하들이 전쟁통에 휘말려도 끝까지 국가와 임금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점을 보면 인재 보는 눈 하나만큼은 정말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도 수위로 꼽을만하다. 당장 선조의 최고의 인사 업적인 이순신만 해도 전쟁 중 선조의 끝없는 의심과 견제에 시달리면서도 죽을 때까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분골쇄신했다.[29] 실제로 조현병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피해망상이 더욱 심했다.[30] 어차피 즉위할 왕자인데 왜 굳이 견제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임란 발발의 책임으로 신하들이 선조가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야 한다는 상소가 많았기 때문이다.[31] 실록에 보면 선조는 류성룡, 신잡, 윤두수 등의 대신과 삼사의 대간들에게서 '필부' 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신하가 왕에게 필부라 함은 유배나 참형을 면치 못할 발언이고 실제 선조를 제외한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필부라는 소리를 들은 왕은 없다. 근데 그런 발언을 그것도 자주 들었다는것은 임란때 선조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는지, 그리고 왕권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32] 세간의 평대로 선조의 파천이 결과적으로는 일본군을 당황시켜 시간을 끄는 등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항전 한번 시도해보려 하지도 않고 일단 도망가려는 자세는 군주로 실격이며, 무엇보다 언제고 요동으로 어가를 옮겨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입조하려 했던 점은 도저히 커버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차라리 선조를 적극적으로 실드칠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머리는 좋다 혹은 결과는 좋았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이 짓거리를 세번한 인조보다는 나을 수 있다. [33] 선조는 전쟁 도중에도 지능 하나는 비상했으나 그게 스스로 국가를 파탄내며 이득을 취하는 행동이라서 찌질이로 욕을 먹는 것이고, 40여 년 통치하면서 지능적인 분야 한정으론 항상 우수한 능력을 보인 2개의 얼굴을 가진 임금이다. 하지만 교육적으로 워낙에 본보기가 되기 어려운 국가 지도자인지라, 그냥 무능한 바보라고 가르치는 케이스가 많았다.[34] 선조의 찌질한 견제와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광해군의 흑화에 한몫했다는 의견도 있다.[35] 소현세자 문제에 한해[36] 그렇지만 병자호란의 책임은 그의 외교 정책만이 아니라 청나라의 경제 상황의 악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오수창 교수와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가 '역사평설 병자호란'이라는 곳에서 주장한다.[37] 청나라가 소현세자와 원손을 이용해 왕위를 은근히 견제했지만, 애초에 세자가 볼모로 끌려간 것 자체가 인조의 무능함이 원인이다.[38] 정조가 비상한 두뇌를 가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똑똑하다고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법이다.[39] 이외에 퇴위당한 후 시해당했다(▲)고도 하는 주장이 있다. 이는 민간에서가 아닌 학계에서 나온 주장이다.[40] 고종이 임오군란에 청군을 왜 끌어들였는지는 애매하지만, 동학농민혁명에 청군을 끌어들인 결정은 교차검증까지 되는 사실이다. 이게 왜 문제인가 하면, 제물포 조약에 의거해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잡아먹을 수 있는 건덕지를 줬기 때문이다.[41] 국권 피탈을 막으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독립운동가 수준의 활동에 그쳤고, 황제로서의 직위와 영향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고종이 더욱 영리하게 나섰다면 아내처럼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42] 황제로서의 직위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에는 을사조약의 힘이 크다.[43] 단, 3대인 김정은의 경우는 평가가 갈리기에 향후엔 재평가의 여지가 있다.[44] 탈북자들 중, 김일성을 호평하는 사람은 있어도 김정일은 모두가 악평할 정도[45] 이는 현재에도 이어져 후대 김정은의 외교에까지 발목을 잡고 있다.[46] 서주 대학살 말고도 관도대전 후 원소군 병사 생매장, 왕필이 살해당한 후 관리들에게 OX 퀴즈를 내어 O를 택한 관리들을 학살하기도 했다.[47] 이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소외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조창, 조식, 하후상이다. 자신의 동생인 조창조식을 죽이거나 소외시킨 것은 그나마 황권 강화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핑계라도 댈 소지가 있으나, 하후상을 죽게 만든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 가뜩이나 황실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외척과 황족들을 배제하고 방계친척 위주로 그것을 대체한 상황에서 하후상이 죽자, 유사시 황실을 보호할 수 있는 방패막 역할을 할 인물은 조진, 조휴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며, 이는 두 인물이 죽을 경우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전무하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진, 조휴가 연달아 죽은 후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조상자신의 아버지숙부에 비하면 함량미달의 인물이었고, 결국 조상 일파가 사마의 일파에 의해 숙청당하자 위나라는 바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48] 제안한 사람은 진군이지만, 실행을 명한 건 조비다.[49] 다만 위-오 국경은 천혜의 요새라는 것을 감안하기는 해야 한다.[50] 그런데 유선은 장완 병사후 새로 재상이 된 동윤의 간언을 못마땅해하며 진지와 황호를 가까이하였다. 아무래도 황권 강화를 꾀하려다 역으로 환관에게 잠식당한 모양이다.[51] 실제로 전대 황제인 손휴도 촉의 멸망 이후 나라 걱정을 하다가 요절했다.[52] 표면상으로 위에 복종했으나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53] 황제 살해는 아버지나 형도 명분을 위해 하지 않았던 일이다. 심지어 황제가 자신을 암살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폐위하는 선에서 끝냈다. 결국 이로 인해 진나라 황실은 정통성 결여라는 치명적 약점을 안게 되었으며, 사마염 사후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군약신강 상황에 처하게 된다.[54] 태자의 생모를 죽이는 제도[55] 이 개짓이 얼마나 심했는지 아버지 수문제가 난세를 정리하자마자 최고치로 끌어올린 국력을 당태종정관지치 시대에도 수문제의 국력에 한참 못미칠 만큼 중국을 수십 년에서 백 년 가까이 퇴보시켰다.[56] 장남이 문제를 일으켜 폐태자되자 4남을 밀어주다가 종국에는 9남인 당 고종을 밀어주었다.[57] 어디까지나 초기 한정이다.[58] 굳이 의종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국가를 재건하려는 의지도 없이 대놓고 말아먹은 의종과는 달리 적어도 황제로서 노력은 했다는 것 정도이지만, 결과는 앞에서 말했듯이 파멸적이었다.[59] 그런데도 홍농, 장안동관까지 함락되었느니 당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60] 휘종이 참사를 열었지만 흠종이 잘 수습했다면 송나라는 요나라 시절보다도 더 기어야 하지만 화북일대는 보존할 수 있었겠지만 흠종의 실책 때문에 정강의 변이란 대참사가 터졌다. 당장에 이름의 어원이 된 '정강'은 그의 재위기에 쓰인 연호다.[61] 원래 의미는 도타울 가(嘉), 아름다울 정(靖)인데, 같은 발음의 다른 의미로 집 가(家), 깨끗할 정(淨)이라고 바꿔 불렀다. '집이 깨끗하다' 라는 의미인데, 청소를 해서 깔끔한 게 아니라 가난해서 집안에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다.[62] 조선이 망하게 두었으면 본토가 전란에 휩싸일 것이 뻔했으므로 그의 판단이 옳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본국은 전혀 돌보지 않아서 다 말아먹은 것이다.[63] 현재는 후술할 내용대로 건륭제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면서 아버지인 옹정제가 실질적인 중국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족 왕조에 국한하면 명나라의 홍치제가 마지막 명군이다.[64] 이 때문에 알바니아에서는 민주화 이후 왕정복고 국민투표도 있었고 2013년 당시에는 왕정복고 찬성 여론이 64%나 되었다.[65] 통제파의 폭주를 그저 방관하고, 확전을 허락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정말 완전히 실권이 없었다는 상당수 일본 극우들의 주장과 달리 쇼와 덴노는 완전한 꼭두각시는 아니었다. 그 예가 바로 2.26 사건이다. 일본 제국 군부의 힘이 강했던 것이지 쇼와 덴노의 힘이 약했던 게 아닌 셈이다.[66] 다만 기혼이 망군이 아니었고 에이소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67] 사실 태국은 명목상 입헌군주제지 사실상 전제군주제에 가깝다. 왕가와 군부가 한통속이기 때문.[68] 아우랑제브의 이 탄압이 나중에 마라타 동맹의 난을 불러오고 이는 영프 등 서구 열강의 침투를 가속화했다.[69] 쉴레이만 대제 사후 오스만 제국의 명군은 무라트 4세가 유일하다. 대제 말년의 실책이 나라를 기울게 한 셈이다.[70] 오스만 제국은 유목민 전사 집단에서 출발한 나라이며, 이러한 전통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에 따라 오스만의 황제는 전사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수틀리면 직접 전장으로 향할 것이 요구되었으며, 실제로도 창건자 오스만 1세로부터 쉴레이만 1세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사를 직접 지휘해 본 경험이 최소 한 번 씩은 있었다.[71] 은 명군인데, 본인은 아니었다. 다만 형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을 모조리 숙청했기에 정신병을 얻은 것은 감안해야 한다.[72] 앞에 나온 성경을 보면, 아말렉 출신 병사가 다윗에게 내가 당신의 원수인 사울을 죽였다라고 입을 털다 다윗의 명에 의해 죽었다는 내용이 나온다.[73] 네 황제의 해를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가 구멍 낸 국고를 회복하기 위해 오줌세 같은 자잘한 간접세까지 만들어 징수해야만 했고, 네로가 방치한 로마군 입영 문제 등도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개선됐다.[74] 당시에는 이사키오스 1세의 반란으로 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심한 상황이었고 재정악화로 인해 군비 지출을 늘리고 싶어도 늘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재정이 개선된 이후에도 군을 재건하려는 시도조차 안한 것은 옹호해주기 어렵다.[75] 라틴(서방)인 대학살[76] 물론 이건 단순히 수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구원병을 요청하기 한 것이었으나 수도가 위험에 빠진 상황에서 황제로서 수도를 떠난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었다.[77] 세속 정치가로써는 교황령 최고의 명군이지만, 종교적 관점으로 보면 최악의 부패 교황이자, 종교 개혁의 불씨를 키운 최악의 암군이다.[78] 미국인 이혼녀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해 그녀를 왕비로 세우려 했지만 당연히 의회와 영국 국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시달려 끝내 왕위를 동생 조지 6세에게 넘기고 퇴위했다.[79] 당시 영국은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연합국으로 참전해 수많은 군인들을 잃고,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문자 그대로 나치라면 치를 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때 왕이었던 사람이 나치를 옹호하고 있으니 그 반응은 가히... 정작 동생 조지 6세는 버킹엄에 있다가 폭격에 죽을 뻔한 적도 있을 정도로 필사적으로 전쟁을 수습하고 영국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잦은 스트레스와 폭연으로 결국 폐암에 걸려 형보다도 먼저 죽었다.[80] 다만 폐암에 걸려 죽은 것은 조지 6세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에도 아돌프 히틀러처럼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고 경고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조지 6세는 그걸 다 무시했다.[81] 궁전 증축 자체는 그리 큰 재정 낭비는 아니었지만 여러 악재 속에서 궁전을 지은 것은 실책이 맞다.[82] 단, 역으로 개신교권 국가에서 가톨릭 망명객을 수용했기에 마냥 손해는 아니었으며, 낭트 칙령의 폐지 자체는 루이 13세 시절부터 특권을 남용하여 지속적으로 왕권과 충돌하였던 위그노 세력을 꺾고 절대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의 일환이기도 했다. 당대 프랑스 여론 또한 이 결정을 지지했다.[83] 그리고 아들 페르디난트 3세부터는 합스부르크 가문도 독일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반쯤 포기하고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세습 영토에 집중하기 시작했으니 독일 역사오스트리아 역사가 갈라지는 원인까지 제공한 셈.[84] 대표적인 사례로 모로코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마찰을 두 차례 빚은 것이 있다.[85] 다만 삼제동맹은 비스마르크의 역량 덕에 성사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86] 어느 정도로 오판했나면, 분명히 정황상 세계대전급으로 커질 조짐이 보이는데도 황제라는 사람이 개인요트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87]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나오는 막대한 재원을 담보로 재정을 빌려 쓴 결과 스페인은 아메리카산 자원의 중간 경유지로 전락했다.[88]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89] 이 사람의 아들이 스페인의 파시스트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이다.[90]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91] 이 참전도 어이가 없는게 당시 모든 정치세력은 중립을 희망했는데 혼자 아득바득 참전을 우기며 비상대권을 쓰겠다고까지하며 참전을 결정했다.[92] 그의 증손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판테온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알다시피 판테온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도 묻혀 있다. 만약 에마누엘레 3세가 판테온에 묻힌다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나라 망친 손자 꼴 보기 싫다고 온갖 쌍욕을 퍼부을 지도 모를 일이다. 본인도 희망해서 판테온에 묻힌 건 아니다만 그래도 본인은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업적이라도 있지 이 인간은 왕으로 있으면서 남긴 업적은커녕 제 할아버지의 이름에 먹칠만 한 인간이니...[93]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헝가리의 반란은 결코 진압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크림 전쟁 때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러시아의 통수를 친다.[94] 심지어 1880 ~ 90년대에 이르게 되면 독일의 산업역량은 이미 산업혁명의 종주국인 영국과 강대국인 프랑스를 추월할 정도였다.[95] 특히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제국 내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손꼽혔으며, 지역민들조차 굶주림이 가득한 땅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 지역에 대한 착취는 실로 엄청났다. 이 사실을 반영해서인지 하츠오브아이언4의 the great war redux모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갈라치아 지역 착취라는 나쁜 국민정신이 붙어있다.[96] 독일 제국이 무너지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97] 본인의 존재가 제국의 구심점이었는데도 전제적인 권력 수호에만 급급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98] 심지어 본인의 존재만이 제국을 그나마 결속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음에도 자신의 사후 제국이 운영될 수 있게 할 체제를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퇴보에 불과한 대타협에 만족한 것은 최대최악의 실책이었다.[99] 대전쟁 확대는 빌헬름 2세의 책임이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등용해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더욱 파탄낸다.[100]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황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므로 이에 포함시켜 서술[101] 헝가리는 1925년에 초인플레이션으로 기존 화폐를 갈아엎고 헝가리 펭괴를 발행해 화폐로 사용했다. 그 펭괴화 역시 대전 말의 초인플레이션으로 폐지되어 새로운 화폐가 발행되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102] 부르겐란트가 오스트리아에 할양되고, 트란실바니아 전역을 루마니아에 넘겨주어 영토가 많이 축소되었고, 수복 운동이 일어난 상황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103] 뮌헨 협정과 빈 중재 등으로 남부슬로바키아와 북트란실바니아, 카르파테니아-루테니아 등을 챙겼지만 전후에 다시 상실한다.[104] 이 보충된 예산은 국왕의 정부가 별장을 사는 데 사용되었다.[105] 사실 악비 자체가 너무 과대평가되었다는 평도 많다. 악비라는 인물의 평가에 따라 송고종명군으로 보느냐, 암군으로 보느냐가 갈린다.[106] 물론 이는 어쩔 수 없었다. 고종의 즉위 자체가 휘종과 흠종의 동의가 없었고 정통성도 이들보다 딸려서 이들이 귀환하는 순간 고종은 정통성 문제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 심하면 그 갈등 끝에 폐위되거나 죽을 수도 있고.[107] 그런데 사실 이런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다. 왕이 문제고 왕정 자체를 몰아내야한다라고 명분을 세우면 국가 전복 시도로 찍혀 목이 짤리기 딱 좋다. 그래서 왕을 직접 비난하지는 못하고 그 신하들이 무능하니 왕에게 국민의 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을 봉기의 목적으로 내세운다. 당장 동학농민혁명도 이를 봉기의 목적으로 내세워서 전근대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는 평도 듣고 있다.[108] 대표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있다. 이 전쟁 덕에 나폴레옹 군대는 항상 전쟁을 치를 때 이중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109]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위성국으로 삼은 틈을 이용해 라틴아메리카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110] 본인의 실책과 비스마르크의 노련한 외교술의 결과였다.[111] 사실 유전학적으론 큰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자세한 것은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 문서로.[112] 이 시기의 일화중 하나로 나치 독일은 왕궁에 독일 깃발을 걸어두었는데 그게 꼴보기 싫었는지 독일에 그 깃발을 내릴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럼 내일 군인 1명을 동원해 강제로 내리겠다고 했다. 이에 독일이 그럼 그 군인을 총살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그는 "그 군인은 짐이 될 것" 이라는 말로 입닥치게 만들었다. 결국 크리스티안 10세가 원한대로 독일 국기는 내려졌다.[113] 물론 전쟁의 근본 원인은 프로이센의 도발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이 선전포고도 없이 슐레지엔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7년전쟁때는 표트르 3세라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악재도 있었다.[114] 그 전비가 오스트리아의 11년치 예산이었으며, 만약 남편인 프란츠 1세의 재력이 아니었다면 오스트리아는 이때 망국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115]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와중에 쇤브룬 궁전을 건축하는 모습, 100여년 전 자국을 멸망위기에서 구해준 국가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멸망시키는 모습이 그 사례라고 볼 수 있다.[116] 이러한 일이 생긴 이유는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살리카 법에 의거하여 남성만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제국도 원래는 살리카법에 따라 남성만이 제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던 카를 6세가 국사조칙을 통해 이를 폐지함으로써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위·헝가리 왕위·보헤미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117] 물론 펠리페 6세도 카탈루냐 독립파에 대해 지나치게 강경한 발언을 했다는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적어도 흑화한 후의 아버지에 비하면 개념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118] A B 앙리에타의 할아버지. 전쟁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명장이지만 내정은 엉망이었다. 때문에 본편 시점에서 트리스테인은 패권 국가에서 지역 강국으로 위상이 하락했다. 마자리니가 없었으면 아예 약소국까지 추락했을 것이다.[119] 5부에서는 전형적인 악당인 이미지이지만 6부에서 밝혀진 사실은 나름 사정이 있어서 차악을 선택했던 것이다. 해당 문서로.[120] 34화 요술램프 편에서 등장.[121] 예언자의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가 광룡 히스마로부터 펠 로스 제국을 넘어 아라드 전체를 구해낸 제국의 두 영웅인 카잔오즈마악마화시키고 추방하였고 이에 원한을 품은 오즈마로 인해 사후 위장자들이 판치며 제국 전역이 혼란에 빠지며 100년간 검은 성전이라는 전쟁에 휘말린다.[122] 검은 성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지만 나라는 약해질대로 약해진 뒤였고 이를 어찌저찌 막아보기 위해 검은 성전 때 제국을 도와준 수쥬국을 배신하고 전쟁을 벌였지만 대패하여(이후 수쥬국은 이를 경험삼아 국력과 군사력을 꾸준히 키운다.) 그의 치세 이후 펠 로스 제국은 후속 국가인 데 로스 제국에 의해 붕괴된다. 즉, 이쪽은 암군이라기엔 선대 팔메리어가 싸놓은 똥이 너무 거대했다는 불운이 컸다.[123] 자신의 형인 무파사릉 죽인 건 물론 심바에게 가스라이팅을 함으로 인해 그토록 집착하던 프라이드 랜드의 왕의를 찬탈한 건 좋았으나 문제는 자신을 따라 줬던 하이에나에게 약속도 안 지킨 거, 마지막에는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토사구팽한 점으로 인해 자신을 따라 줬던 부하들이 적으로 돌아선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원하던 왕위 자리에 올랐음에도 정작 통치는 개판으로 한 건으로 인해 그토록 지배하고 싶었던 프라이드 랜드가 멸망 태그를 탄 것도 모자라 대책도 전혀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심바를 죽이는 데 성공했어도 앙심을 품거나 복수에 이를 가는 다른 사자들이나 하이에나들의 복수의 칼날들에 직면했을 것이다. 또 꼬라지를 보면 그토록 원하던 나라를 완전히 지배하는 데는 이미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고 사실상 이러한 만행이 자신의 명까지 재촉한 셈이니 암군이라고 불려고 할 말이 없다.[124] 단, 암군 짓을 저질렀던 레플리로이드 한정이지만 어느 흑막과는 다르게 인간들에게 한해서는 성군이다.[125] 비록 자신이 원해서 왕이 된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연애에 빠져 업무를 지나치게 소홀히 했고, 연인이 죽자 그녀를 부활시키겠다는 그릇된 욕망으로 타락하여 평화롭게 지내던 섬과 자신의 왕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다.[126] 황제국 은행가의 입발림에 넘어가 자국 경제를 황제국에게 의존시키게 되었고 국가의 모든 통상권이나 외교권 제공권 각종 이권을 팔아 사치를 부렸다. 이로인해 왕족 귀족을 제외한 바그다드의 국민들은 굶주리게 되고 더이상 팔아먹을 국가의 권리가 없어지자 국민을 노예로 수출한다는 미친 짓거리를(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미친 짓거리 맞다. 전쟁포로나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민을 노예로 파는것이니)하려다가 친동생 사부마드와 이복동생 알리바바의 혁명으로 폐위된다.(이 둘이 아니었으면 반란으로 피의 축제가 벌어질 뻔했다.) 그후 추방되어 트란 섬에서 트란 문화를 연구하는데 이놈이 한 짓중 국민 노예수출이 라는건 독자들 입장에선 꽤 비판받는 일이라 후일담이라도 존재하길 바랬지만 완결이 날때까지 후일담은 없었다. 만화 마기가 비판받는 이유중 하나.[127] 이래저래 평가가 갈리는 편이긴 하나, 결국은 어디까지나 아스가르드를 통치하고 자식들을 사랑하려는 의도, 딱 그것 하나만 진심이었을 뿐, 그 수단은 여러가지로 잘못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128] 마음이 없는 자로 절대악 그 자체이다.[129] 사람은 좋은데 능력이 부족해 대마왕에게 쩔쩔맨다.[130] 원래부터 막장이던 브륀 왕국을 분열시킨 경이로운 암군이다. 특히 후계자 문제를 아주 막장으로 해두었는데 지딴에는 왕비랑 딸을 지킨답시고(단 브륀 왕국에서는 딸 밖에 못낳는 왕비는 경시되고 왕녀는 계승권이 아예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공주로 태어난 자식을 남장시켰다. 자기 대에서 일어난 내란은 변경귀족의 활약으로 종식되었으나 결국 그 문제로 인해 사후에는 여왕의 정통성 가지고 내란이 일어나게 된다. 사실 냉정히 보면 왕국을 위해서 딸이 찬밥 먹는다 해도 왕비 이외의 측실을 두어서 후계자 문제를 제대로 해두었어야 했는데 딸 핑계를 대면서 넘어가 버렸다. 사후에는 그 딸이 여왕이 되어서 팔롱이 싼 X을 치우는데 고생하게 된다. 간혹 독자들 중에서는 그 딸 레긴도 암군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레긴은 암군이 아니라 전대 왕 팔롱이 왕국을 막장으로 만들어서 지지하는 세력이 아주아주 약했다...[131] 왕은 아니지만 왕 다음 권력을 가진 공녀로 일단은 독립되어 자치권을 행사할수 있는 공국의 수장이다. 무력은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 식견이나 외교파악하는 능력은 거의 0에 가깝다. 참고로 전쟁에서 한번 졌다고 무책임하게 자살해버린다.[132] 팔롱이나 피그넬리아에 비하면 양반이고 자신의 공국의 통치는 그럭저럭 한 공녀이나 최종목표가 지스터스 7국 지배와 같은 음모를 꾸며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다. 이 때문에 소피야 오베르타스와의 관계는 매우 나빠지고 만다.[133] 이쪽은 바다의 여신으로, 7개 바다를 통치하는 능력과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실책으로 사라의 만행과 루치아를 포함한 머메이드 프린세스들이 가쿠토(해신) 일당에게 공격당하거나 나라를 잃는 상황을 방치했다.[134] 이쪽은 주인공으로 aqua 편 한정이다. 선대 아쿠아 레지나에게 악영향을 물려 받았는지 외동딸 루키아에게 세이라의 문제를 떠넘기고, 루키아 일행이 로란에게 공격당하는 상황을 방치했다.[135] 무한도전 춘향전 특집 때 설정 상 이몽룡 포지션으로서 과거 시험에 응시한 멤버들에게 문제를 출제하는데, 문제는 시험장에서 과거 응시자들을 앞에 두고 먹방을 찍는다거나, 용안이 뭔지를 몰라서 무식쟁이 인증을 제대로 하는 등, 왕으로서 영 아니올시다스런 모습만 보여줬고, 그러면서도 답을 틀린 멤버들의 얼굴에 먹칠을 해대는는 심술을 부렸다. 결국 시험의 말미에 전원 정답을 맞춘 멤버들에게 역관광당하여 온 얼굴에 먹으로 낙서칠당하는 보복을 당했다.[136] 지략과 정치술, 전투력, 지휘력, 행정력 등의 능력 하나는 세계관에서 손에 꼽는 탑클래스이다. 기술력, 경제력에서 훨씬 떨어지는 켈모리안 연합 하나 제대로 제압 못하는 테란 연합의 무능한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냉혹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 적을 너무나 많이 만들었고, 덕분에 폭압적이고 가혹한 정치를 펼치는 것은 기본에, 심지어 황태자(후계자)인 아들마저 정적으로 몰아 죽이려 든 것은 크디큰 패착. 결국, 아들을 포함한 자신이 만들어 낸 적들 때문에 자치령은 끊임없는 외부 침공에 시달렸고, 그 중 최악의 적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게다가 최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멩스크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치령과 신민들을 자신을 위한 소모품으로 생각했고, 후계자인 아들까지 죽이려 하는 등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라를 팔아먹었을 위인이었다.[137] 능력도, 무력도 출중하지만 자신이 섬기는 이 탈다림을 장기말로 쓰고 버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섬기는 광신도였고,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려고 했다. 결국 보다못한 알라라크댈람을 끌어들여 라크쉬르 대결을 벌여 폐위와 동시에 살해당한다.[138] 성격 자체는 상냥하고 선량하며 아직은 14~15세 정도 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이지만 1기 19화까지는 뱀파이어 왕으로써의 책무를 버리고 방랑하고, 왕가의 보물인 루비 반지도 멋대로 훔쳐 인간인 가은이에게 선물로 주는 등 완벽한 암군이었다. 거기에 인간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의 왕인데도 흡혈하기 싫다고 왕의 책무를 버린 걸로 추정되어서 뱀파이어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답이 없는 왕이다. 다행히 현재는 정신을 차리고 인간과 뱀파이어의 공존을 위해 왕으로써 노력하고 있고 성과도 꽤 거두었지만 6년 뒤인 고스트 시그널에서는 자신을 해치려 하는 카뮬라와 브리지트의 계략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옆에 붙여 놓는 등 다시 암군끼가 도진다.[139] 문마리아 여왕은 혼수상태라서 정황을 파악할수 없었다.[140] 흑화 이후 한정.[141] 애초에 모친이 이원을 앉힌 것이지 이원 본인이 원한 자리는 아니였다. 왕자 시절 세자를 부러워하긴 했지만 가장 부러워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정함이었지 왕좌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원의 이러한 배경을 알고 동정하는 독자들과는 달리 작중의 백관들과 백성들에게는 그저 정사를 돌보지 않고 폭정을 일삼는 암군일 뿐이었다.[142] 이 사람이 황제로서 한 일은 간신인 박중헌에게 놀아나면서 충신이자 명장군이던 김신을 자기보다 인기가 많단 이유로 질투심에 눈이 멀어 반역자로 몰아 자결하게 하고, 그의 누이이자 자신의 황후였던 김선을 비롯한 김신의 일가친척들을 몰살시킨 후 정사는 돌보지 않고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일 밖에 없다.[143] 이 사람은 그야말로 세계관 최악의 암군이다. 무능한 주제에 괜히 툭하면 끼어들기만 해 잘 될일 다 망쳐 동생 기스카르한테 걸림돌만 되었다. 특히 악당 보댕이 이 사람의 멍청함을 이용해 각종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나라일을 얼마나 개판으로 했는지 그가 죽은 뒤 나라는 개막장이 된다.[144] 다만 맨처음부터 암군은 아니었고 나라를 발전시킨 최고의 명군이었다. 그러나 왕실의 혈통이 끊길것이라는 예언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편집증이 생겨 미신을 신봉하고 며느리를 겁탈하는 패륜을 저지르며 이를 만류하는 신하들을 파면하면서 암군이 되었다.[145] 다만 끝에는 후계자 결정을 잘한편이었다. 특히 장남이 워낙 막장이어서 정식 후계자로 임명하지 않아 그가 병이 들어도 장남이 함부로 권좌를 차지하지 못했고 나중엔 정상인 차남을 후계자로 임명하여 나라를 보존할수 있었다.[146] 나이도 10대 초중반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어리고, 심성도 착하지만 어떤 돼지에 의해 암군이 되어버린다. 다행히 사형을 당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147] 비록 초반에는 승승장구 했지만 결국 무리한 전쟁과 패전으로 불의 제국을 거하게 말아먹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의 아들인 주코가 수습을 잘하여 100년이나 세상을 유린한 전범국가임에도 여전히 불의 제국을 강대국으로써 존중받는 국가로써 유지하였다. 즉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성군인샘. 다만 패전 문제는 본인의 능력부족은 아니다. 무리한 전쟁이라고 했지만 그 전쟁은 할아버지 대부터 100년간 이어오고 있었고 선대들 업적도 있지만 본인 대에 이르면 승리를 목전에 둘만큼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코믹스에서는 전후문제로 골치썩이는 아들이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 즉 암군은 맞는데 무능한 암군은 아니다. 능력을 나쁜데 써먹어서 문제지...[148] 첫 등장했을 때도 멍청하다는 것은 물론,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최악이라는 게 나왔지만 연재가 진행될수록 군주로서의 자질이 매우 의심되는 행동만 보이는 것은 물론 정당한 후계자인 알폰소에게 열폭하여 견제를 하는 멍청한 모습만 보이고 있다.[149] 나라는 그럭저럭 잘 다스렸지만 후계자 문제 때문에 암군으로 평가된다.[150] 타르가르옌 왕조 최악의 암군으로 일컬어진다.[151] 마검 스톰브링거의 영향도 있지만 황제로서 한 처신을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암군이다. 이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라까지 말아먹었고 본인도 평생 마검 스톰브링거한테 이용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된다.[152] 라이트 노벨로 나오는 여성 군주중에서 암군 오브 암군으로서 선왕 사후 즉위 때는 오르트메아 제국의 계략으로 게르하르트 공작이 사생아 제 2왕녀를 지지하게되어 내전이 일어났는데 불리한 전세에서 주인공 미코시바가 크게 활약하여 역전시키지만 측근인 미하일이 호승심에 닥돌하다 게르하르트 공작파에 붙잡히는 일이 벌어진다. 내전의 주범인 게르하르트 공작은 미하일을 거래로 2왕녀를 인정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루피스는 그 거래를 수락한다.....측근 하나 때문에 내전의 원흉을 제거하지도 못하고 즉위 했는데 내전에서 활약한 미코시바는 믿을수 없고 그렇다고 약속 지켜서 왕국 밖으로 보내버려 타국에 등용되면 잠재적 위협이 되어버린다는 논리로 내전에서 활약한 영웅에게 남작 작위를 주고 미개발 오지에 보내버린다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근데 이건 타인이 제안한 방법을 그냥 그대로 따라한거다..몰랐다 해도 내전의 원흉에게!) 덤으로 내전에서 삽질해서 근신받던 미하일은 측근이라고 2달만에 복직시켜 버린다. 내전에서 미코시바의 활약으로 끌여들인 중립파는 당연히 이같은 여왕의 행보에 제대로 된 충성을 줄수 없었고 더구나 측근이라는 놈들이 죄다 무인출신이라 명령만 내리고 닥달하는 식이라 내란 이후에도 로제리아 왕국은 피폐해져 버렸다.[153] 사정을 알아보고 배상만 했다면 전쟁을 피할수 있었는데 오만한 성격으로 인해 드워프와의 전쟁을 일으키고 말아 패하며 본인의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엘프 왕국도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이 패배로 인해 엘프가 건설한 식민지들도 모두 상실하여 올드 월드에서 엘프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154] 이쪽은 성품이랑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마신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무력이 없어서 도망만치다가 결국 백성의 손을 빌려 (사실상의)자살을 선택했다.[155] 마신임무 2장 3막 이전 한정. 마신 임무 2장 이후로는 군주로서 점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156] 정무에 큰 관심이 없고 유흥에 몰두하는 등 공식적으로는 암군이 맞다. 하지만 이따금 날카로운 뜻이 담긴 발언을 하는 등, 평면적인 암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2차 창작 등에서는 실제로는 유능하지만 제국의 막장 상황에 회의를 가지고 차라리 멸망하길 원했다는 해석도 나온다.[157] 백성들이 지제국 버그나라크에게 습격당하고 있는데도 도와주지 못할 망정 자신은 이를 이용해 나머지 4개국인 은코소파, 이샤바나, 곳칸, 토후를 합병할 계획을 하고 있다. 이는 기라가 반역자가 되어 라클레스를 끌어내리고 왕이 되기로 한 계기가 된다.[158] 15년 전, 신의 분노 사건 당시, 토후의 모든 식량을 독점하여 국민들이 기아에 시달리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진실은...[159] 이쪽은 타국의 백성들이 불쌍하답시고 자국민을 버렸다.... 그 자국민들이 거인의 힘으로 타국의 백성들을 노예로 부려먹고 자기들끼리 내전이나 벌이는 등, 쌓은 업보가 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 세대까지 저지른 죄악을 묻어 버리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후손들이 외부에서 보낸 무지성 거인들에게 죽어 나가고, 부전의 맹세로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식으로 후계자들을 세뇌하면서 시조의 거인의 힘을 못쓰게 해 타국의 보복을 막을 정도의 정당방위도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타국의 백성들을 위한 행동들이 결국은 타국의 백성들과 세상의 파멸을 불러왔고 동시에 계속되는 혼란만을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고야 말았다. [160] 그냥 꼭두각시. 셰필드가 없을때 트리스테인 게르마니아 연합에 겁을 먹었다.[161] 허무의 마법사라서 왕태자 시절때는 4대계통 마법을 못썼고 이를 모르는 주변은 마력이 없다고 평가해 모친마저 없는 자식 취급하였다. 훗날 비교하던 동생을 암살하게 되고 그 허무함에 무기력하게 지내다가 사망한다. 능력적으로는 암군이 아닌데 결과는 자신의 왕국 갈리아의 초토화[162] 교황인데 재앙(대륙이 하늘로 떠버리는 현상)을 막겠답시고 세계 이주라고 하여 태평하게 살고있는 주인공측 세계(지구)를 정복하려고 했다! 공중전 최강이라는 알비온 용부대가 고작 구식유물에 가까웠던 제로센 1기에게 털리고 수많은 군대조차 어쩌지 못하는 요르문간트를 티거 하나로 상대가 되는 수준으로 말이다! 앙리에타가 지구세계와 대화를 할 생각 없냐고 물었을때는 대화로는 평화를 이룩할수 없고 기습공격 운운했다. 앞에 있는 죠세프는 최소 자국 하나만 망쳤는데 이놈은 최소 다섯 국가를 지옥으로 만들 뻔했다. 지구 침공을 제외해도 왕인 타바사를 납치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였다.[163] 이 인물의 커다란 실책으로 인해 아들은 악당의 숙주가 되고, 딸은 사망, 손자는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앉아 여러 문제들을 혼자 떠맡는 등 동화나라는 물론이고 가족들에게 큰 민폐를 끼쳤다.[164] 인품은 선하지만 왕으로써 제대로 한 일들은 별로 없다. 다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실종, 고모의 사망 등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앉아 홀로 여러 문제들을 떠맡은 상황이었다는 걸 감안해야 하며 그나마 왕으로써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165] 인품은 훌륭하나, 왕도 인섬니아의 시민들과 킹스글레이브 단원들 입장에서는 암군으로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자신이 어리석은 왕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본인도 인정한 부분.[166] 작중에서는 끊임없이 성군으로 미화되지만 실상은 수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비는커녕, 후궁도 될 수 없는 미천한 신분의 여자를 정비로 삼아 나라 전체를 내전으로 몰아넣은 명백한 암군이다.[167] 딸과 사위, 외손자에게 저지른 악행 때문에 본인은 물론 백성들이 몰살되고 왕국까지 파멸했다. 또한 그동안 인간을 수호하는것을 사명으로 여긴 사위 바란이 이로 인해 배신감을 크게 느끼고, 제대로 타락하여 마왕군에 들어가게 되어 다른 인간 국가들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168] 드라마상에서는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북벌만 추구하는 암군의 모습이 추가되었다. 현실의 궁예도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드라마상의 모습은 작가의 창작이 꽤 들어갔다.[169] 비록 왕은 아니지만 지구의 신인 위치에서 블루의 작중 무능함과 뻔뻔해 보일 태도 덕분에 러블리를 포함한 프리큐어들이 아니였다면 자신이 연관된 왕국과 지구는 끝장 났었을 수준이었다.[170] 전작의 블루와 마찬가지로 무책임한 우주 여신들이다. 이매지네이션의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우주에 뿌렸고, 행성들 일부가 멸망당하거나 무언가를 의존하는 상황을 방치했다.[171] 성국의 성황으로(성국은 투표로 뽑는다.) 성품은 좋은 편이나 타인을 의심할줄 몰라서 개혁으로 나라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상소에 곧이대로 믿어 성국을 더욱 피폐하게 되었다. 그렇게 신하들의 계략에 의해 이용당하던 중 현자의 충고에 성국의 상황을 아주 뒤늦게 알게 되고 자진 퇴위하여 투표를 통해 다음 성황은 제대로 된 성황을 뽑을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무산되고 만다. 변호하자면 성국의 부패가 쌓이고 쌓인게 너무 커서 뭉클리아는 커녕 평타치는 군주라고 해도 커버가 불가능했던 상황.[172] 성국의 뭉클리아 다음의 성황이자(허수아비인 제로경은 퇴위되었다.) 최강의 검 성국의 초대 성왕이다. 출신은 상급기사 출신으로 이름 그대로 금수저다. 히어로 메이커 세계관의 이어 후술할 베르미누 3세와 맞먹는 암군이며 결과로 따지면 성국을 아예 아작내 버리고 신이 인류에게서 성법을 거두는 설령 성국이 막장이 아니어도 커버가 불가능한 암군이다.[173] 제국의 황제로 골드수저와 다르게 멀쩡하게 돌아가는 제국을 즉위 2년만에 내란 상태로 만들었던걸 보면 질이 더 나쁘다. 즉위 초기 공물 안바친다고 세날에 쳐들어갔는데 세날은 이길수 없다는 군경험자인 힐리스의 직언에도 쳐들어갔다가 대패해 겨우 살아돌아왔다. 그 상황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폐륜왕의 이간질에 넘어가 자신을 지키는 힐리스를 죽이려고 했다!(힐리스는 원정으로 대패한 베르미누를 지키다가 오른팔을 잃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힐리스 휘하의 기사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지민들을 학살하였고 지왕의 혼을 풀려는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 결국 이번에는 제대로 빡친 힐리스가 근위대 100명을 1초컷으로 날려버리고 베르미누에게 마지막 직언을 올린 뒤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봉인된 지왕의 혼을 홀로 지킨다. 이후 힐리스와 인연이 깊었던 이복형제 후안이 제국의 충신 힐리스를 죽였다며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힐리스가 없어 후안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후 외척인 숙부 머튼경에게 의지하다 장식뿐인 자리에 올라 명분으로만 이용당하면서 약을 먹고 폐인이 된다. 덧붙여 베르미누 전대 황제는 평민인 힐리스를 제대로 기용해 왕권을 강화했다. 사후 베르미누 3세가 아닌 제국의 미친 황제로 불린다.[174] 약소국인 자국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해상 패권을 추구하다가 천랑국을 자극해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패전으로 나라가 멸망하자 포로가 되어 참수된다.[175] 간음이 일상인데다 매우 잔혹하여 점령지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포로를 팽살하는 것을 즐긴다. 본작의 최종 보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