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노 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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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멀티 엔터테이너.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퍼커셔니스트[18] , 편곡가, 프로듀서, 비트메이커[19] 이며, 배우, 문필가, 라디오 DJ, 방송인이다. 배우와 음악, 집필, 이 모든 분야에서 인디 및 무명 생활을 다 거쳐[20] 당시 대중가요 및 연예계를 꽉 잡고 있던 일본 아이돌 시장의 튼튼함 속에 파죽지세로 올라와[21] 대중적으로 모두 다 성공해보고 대히트를 찍어본 입지전적형 멀티 엔터테이너이다.
2019년, 종합 33만명을 동원한 '5대 돔 투어'를 예매 당일 전석 매진시키며 일본 내에서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 중 한 명[22] 으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코로나 사태 이후부터는 음악 및 배우 활동에 이전과 다른 다양한 변화를 주고 있으며, 2021년 아라가키 유이와의 결혼을 발표해 큰 화제가 되었고, 2023년 현재도 메이저 멀티 엔터테이너 중 한 명의 입지[23] 를 가지고 있다. 호시노 겐의 라디오 청취자가 10대부터 60대까지 있을 정도로 청년층부터 중장년층까지 고루고루 팬이 많은 연예인이기도 하다.
2. 위상 및 영향력[편집]
음악, 배우, 방송인, 작가 이 모든 부분에서 상을 타고 메가히트친 대표작들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멀티 엔터테이너 중 한 명이자, '2010년대 일본 음악'을 이야기할 때 호시노 겐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력이 상당했었던 인물이며, 요네즈 켄시와 함께 일본 남자 솔로 싱어송라이터 입지 확립의 재시작을 열었던 인물이다.
후술하겠으나 그가 2000년대에 데뷔한 후 그의 음악들은 당시 일본에 자리잡혀있는 대중적 음악과는 항상 거리가 계속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팝 아이콘이 되었고 영향력이 상당했었다는 점에서 Official髭男dism, 요네즈 켄시, YOASOBI, Creepy Nuts, imase 등 여럿 후배 아티스트와 뮤지션들에게 샤라웃을 받고 있다.
2.1. 인디씬 음악의 대중음악화[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음악적 특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블랙뮤직을 흡수하거나 차용하거나 해서 고유의 음악적 정체성으로 구축하는, 일본 비주류 및 인디음악씬에서 왕성하게 불고 있던 움직임'에 호시노 겐 또한 그 일원인 동시에 선두에 서 있었다. 그보다 더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음악작품들은 인디씬에 많겠지만, 호시노 겐은 '옐로우 뮤직'이라는 개념을 앞세워, 기존 블랙뮤직에서 그만의 필터를 통과시켜 일본의 대중음악 및 상업음악적 색채까지 적절하게 추가해 일본의 일반 대중들과 매니아적인 음악팬들을 모두 고려한 최대공약수적인 음악을 개척해나갔다.POP VIRUS 앨범은 "'음악적으로 공격적인 노래'는 대중이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단순한 변명으로 만들었다
YELLOW DANCER부터 Pop Virus까지의[25] 그 결과물들은 성공적이었고, 당대 일본의 아이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중적 네임드 팝 아이콘이 되었으며, 여럿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거나 샤라웃을 받는 OB 뮤지션이 되었다. 실제로 이 당시 그의 작업물들은 상업적 대중 음악씬은 물론이고, 인디 음악씬을 포함하여 설명할 때도 종종 사용되는 예시이다.
또한 지금의 인디 음악씬의 융성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SAKEROCK도 포함한 그 시기 작품의 영향이 많은 동시에, 최근에는 cero 등의 밴드 색채를 풍기는 밴드가 일반적이 되었으며, 호시노 겐이 데뷔 초기부터 항상 이야기해왔었던, 호소노 하루오미의 영향을 이야기하는 젊은 밴드가 증가했다. 이는 '호시노 겐이 한창 활동할 당시에 항상 이야기했으나 잘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생각이 이제는 점차 일반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2. 연예계의 돌연변이[편집]
배우를 하면서 음악을 하는 사람은 많이 있다. 다양한 재능을 구사하고 다양한 표현을 하는 사람이 많다. 개인적으로도 몇 명 알고 있다. 하지만 호시노 군의 표현 스타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뉴타입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이상한 자기주장이나 시비가 없는 것, '나, 뭐든지 해버리니까 멋있지'라고 하는 기운이 전혀 없다. 실로 냉정하게 행동하면서, 주위의 상황을 판단하고, 그러면서도 표현은 뜨겁게 하는 이상적인 표현자인 것이다. (중략) 그러면서, 마음의 뿌리 부분에는 걸쭉한 마그마가 끓고 있다.
그의 신체적인 조건은 일반적인 타 연예인들과 비교해봤을 때 키도 엄청나게 작으며, 얼굴도 잘생기지는 않았고, 몸매도 그다지 좋지는 않으며, 가창력도 좋지 않았던, 거의 일반인이다. 개그맨이나 실력파 배우가 아닐 경우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하는 연예계에서 이는 치명적인 단점이며,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혜택을 하나도 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불이익을 볼 가능성이 크다. 특히나 호시노 겐은 여럿 아이돌들이 한창 활동할 당시에 그 시장 속에서 몸집이 커졌기 때문에 더더욱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음악가, 배우, 문필가」등의 직함으로 활동하는 멀티 엔터테이너. 중학생 때 음악과 연극을 동시에 시작해, '어느 쪽으로 좁히는 것이 좋다'라고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양립을 계속해, 게다가 (20대에) 문필도 시작해 현재의 성공을 쟁취했다.
그런 호시노의 원동력이 되고 있던 것은, 주위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며 자각도 하고 있던 '재능이 없다'는 것. '재능이 없어도 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이 성공하면 굉장하다', '뛰어난 재능이 없으니까 여러가지 도전을 해 보자' 등의 생각이, 멀티 엔터테이너 호시노 겐을 만들어냈다.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그의 다채로움은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재능이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행동했기 때문에 길러진 셀프 브랜딩에 의한 것이 아닐까. (중략)
10년 전을 되돌아 보면, 서브컬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을 뿐[26]
전국적인 지명도는 없어 일본 전역의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기보다는 마니아틱한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타입일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그런 견해를 뒤집어, 불과 10년간 일본 전역의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이 2012년과 2013년에 2번이나, 지주막하출혈의 진단을 받고, 활동 휴식기를 피할 수 없게 된 것. 생명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활동의 폭을 좁히지 않고, 멀티 엔터테이너로 계속 되고 있었다.
레이와 시대에 들어와서 흔들리지 않는 호시노 씨의 활동 스탠스를 드디어 시대가 따라잡고, 코로나가 찾아옴으로써 그 대단함이 돋보인 것은 아닐까? '부담없이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은 친근감을 풍기면서, 막상 일이 되면, 다양한 스킬을 발휘해 간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호시노는, 엔터테이너 뿐만이 아니라 비즈니스 퍼슨에 있어서도, 레이와 시대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호시노 겐은 인기와 경력이 어느정도 쌓이기 전까지 '재능이 없다','하나에만 집중해'라는 소리를 주변에서 계속 들을 정도로 상황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음악과 연기의 연습을 중학교 때부터 같이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20대 배우생활은 순탄하지 못했으며, 30대가 되어서야 여러 신인상을 받으며 배우로서 인정받게 되었고[27] , 그가 메인스트림 싱어송라이터가 된 것도 30대 이후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넓은 연령층의 고정 팬층이 꽤 존재하며, 연예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방송이나 고정출연, 그리고 광고를 여럿 찍었을 정도로 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예인이다. 당시 연예계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사례여서 힐난하는 안티들도 꽤 있었으나, 호시노 겐이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1명의 성과라고 보기에는 힘든 그의 다양한 성과, 그의 '노력하는 재능'에 기반한 실행력과 태도, 연예계에서의 좋은 평판과 그걸로 쌓아온 방송계의 인맥들,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그의 매력 등 여러 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2.3. 서브컬 남자의 아이콘[편집]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서브컬 남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연예인이다. 서브컬은 흔히 서브컬처라고 하면 생각나는 오타쿠 문화가 아니라, 일본의 메이저 유행과는 거리가 있거나 대중적으로 선호되지 않는 다양한 문화에 몰두해 즐기는 취향이고, 그러면서도 오타쿠적 매체를 거부하거나 배제하는 건 아닌 이미지다. 굳이 따지자면 힙스터와 비슷하다. 그러나 호시노 겐은 서브컬의 '일반 대중들과 자신들의 구분', 즉 마이너부심과 좆문가 특성을 싫어해서[28] 이전부터 자신이 '서브컬', '멋쟁이'라고 하는 카테고리로 묶이는 것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의 행보를 보면, 대중성이나 유행을 따르지 않고, 개개인들만의 독립적인 생각을 더 가치있게 여기는 모습이 상당히 많이 보이는데, 그의 배우 활동 역할은 메이저적인 '멋짐'의 모습에 벗어난 역할이 많았고 비주류적인 감성[29] 이 많았으며, 그의 취향은 여담 문서를 참고해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다양하거나 혹은 마니아틱하다. 그러면서도 '~부심'[30] 처럼 남이 좋아하는 '특정 장르'를 폄하하거나 조롱하는 사람은 정말 싫어한다고.
꽤 다채로웠던 그의 음악적 행보에서는 인디 음악 또는 얼터너티브의 추구, 그 사람만의 고유한 색채, 끊임없는 변화와 변신의 추구, 마이페이스나 반골기질, idgaf[31] 등이 보이는 건 물론이고, 그의 음악은 당시 일본에 자리잡혀있던 대중적 음악과는 항상 거리가 있었다. 이는 2000년대는 물론이고, 호시노 겐이 대중적인 메인스트림 뮤지션으로 떠오른 2010년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2020년대에 와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2000년대 음악 생활인 SAKEROCK은 왕성하게 활동할 때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비주류적인 음악으로 매니악틱한 팬들을 꽤 보유하고 있던 인디밴드였다. 2021년에 SAKEROCK의 스트리밍이 풀리게 되었을 때, 호시노 겐은 SAKEROCK의 음악을 오랜만에 들으며 '유일무이한 소리를 제대로 만들고 있구나'라며 깜짝 놀랐다고 할 정도였다.[32]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은 미국적인 스타일과 호소노 하루오미적인 엑조디카, 그리고 일본적인 싱어송라이터의 정서가 합쳐진 음반이었고, 상술했으나 그는 2010년대에 '블랙뮤직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단순한 흉내나 그 질감의 추구 뿐만이 아니라, 일본인으로서의 세계관을 실현한 팝'인 '옐로우 뮤직'이라는 개념을 앞세워 여러 작업물들을 냈다. 이 작업물들은 호시노 겐을 그 당시의 국민적 팝 아이콘으로 만들어주게 된다.말할 것도 없이, SAKEROCK은 인스트루멘탈 밴드이다. 그런데 SAKEROCK이 하고 있는 인스트루멘탈은 유례가 없다. 장르적으로 기존의 인스트루멘탈 어디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스카? 아니다. 펑크? 아니다. 덥? 아니다. 퓨전[33]
? 아니다. 재즈? 아니다. 맘보[34] 도, 진타[35] 도, 쇼와 시대 가요의 배경 사운드도 아니다. 물론 이른바 포스트 록 같은 것도 아니다. 여기까지 쓴 '아니다' 음악 장르 중 꽤 많은 요소가 SAKEROCK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노래를) 들어본다면 알 수 있지만, 정확히 장르 그대로인 것은 하나도 없다.
불혹의 나이가 된 2020년대 이후에도, (그의 최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10~20살 차이나는 후배들과 같이 아직까지 현역으로 계속 뛰고 있기도 하다. '시대는 계속 변화하고 있고 내가 하는 음악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가치관과, 본인의 히트 친 음악들을 반복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의 특성상 예전과는 다른 접근으로.국민적 스타 호시노 겐과 쟈니스, 서로 대조적이기 때문에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2017.01.05)
그리고 원래 인디 음악에서 활동을 많이 했고, 얼터너티브함과 힙스터적 기질이 많이 있는 호시노 겐답게 여전히 일본 대중음악과 제이팝에서 흔치 않은 요소들이 많이 있다. 光の跡(빛의 흔적)은 요즘 대중음악의 추세에 반골기질이 생겨 지금 대중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을 거의 다 반대로 했다
3. 음악가[편집]
그의 대표적인 앨범들인 정규 4,5집 YELLOW DANCER와 Pop Virus 앨범은 2010년대 J-POP 메인스트림 팝 씬에서는 독보적인 스타일을 가졌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
한국에서는, 싱어송라이터 측면에서, 恋(사랑, 2016), Pop Virus(2018), 그리고 스파이 패밀리 애니메이션 1기 1쿨 엔딩곡인 喜劇(희극, 2022)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조금 더 깊게 파고들면, SUN, アイデア(아이디어), 不思議(불가사의), Week End 등이 그 다음으로 유명한 편이다[36]
3.1. 생애 및 활동[편집]
3.1.1. 유년기 - SAKEROCK 활동[편집]
원래부터 부모님이 굉장한 음악 애호가였다. 생계 때문에 사이타마현의 어느 한 동네에서 청과물 가게를 운영했던 서민 집안이었으나 부친은 재즈 피아노가 취미였고, 모친은 과거에 재즈 보컬리스트가 꿈이었던지라 산처럼 쌓인 재즈 레코드와 음악이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재즈가 완전히 그의 생활 속에 있었다. 어릴 때는 재즈와 여러 블랙 뮤직, 토미 플래너건, 니나 시몬, 마이클 잭슨의 노래 등을 많이 들었다고.
어릴 때 식탁에서 밥을 기다릴 때 젓가락을 양손에 하나씩 갖고 기다릴 수 없어서 식기를 젓가락으로 두드리고,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이에 부모님이 '그렇게 식기를 두드리고 싶다면 드럼을 두드려라'는 말에 드럼을 초등학생 때 배우기 시작했고, 이것이 음악 인생의 가장 첫 시작이라고 한다. #
집에는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었고 재즈 피아노를 간간히 쳐보기는 했으나, 호시노 겐은 중학교 때 다들 기타를 치기 시작하여 본인도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음악한다니까 부친이 쓰던 기타를 내주는 등 남들보다 시작하기 쉬운 환경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계속 들어왔던 재즈를 듣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에, 학창 시절 재즈를 듣기는 했으나, 자신의 취향을 공유하지 못하고 당시 거의 모두가 들었던 록을 연주하며 연습했다. 유니콘, B'z, KIRINJI, CHAGE and ASKA 등의 록 밴드 및 그룹들을 좋아했고, 집에서 혼자 블루 하츠의 곡들이나 익스트림(Extreme)의 「More Than Words」 같은 곡을 듣고 카피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호시노 겐은 소학교 시절 공황장애를 겪은 적이 있으며, 대인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었고, 엄청나게 내성적이었으며, 학업측면에서도 다른 학생들보다 부족했고, 위축되거나 맨날 땅만 보고 걸었던 시절이 많았다. 그렇게 일반 학교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그는 일반 학교를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시험 및 성적표가 없는 사립 대안학교인 지유노모리가쿠엔고교에 입학하여 연기와 음악 활동의 연습을 계속 병행한다. 자유로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기분은 초졸인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작곡은 고등학생 때 반에서 인기 많은 친구가 "겐, 기타 치는 거면 내 가사에 곡 좀 붙여줘"(源君、ギター弾けるんだったら、僕の詞で曲を作ってよ)라고 부탁해서 곡을 쓴 것이 최초. 이후 자기 곡도 여러 개 썼지만 부끄러워서 발표 같은 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라이브도 고3 때까지 부끄러워서 못 했다고.
음악을 본격적으로 한 건 20세 때 자신이 리더가 되어 고등학교 동급생을 모아 인스트루먼트 록 밴드 사케록(SAKEROCK)을 2000년에 결성했을 때부터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고등학교였다보니 각 멤버들의 색채는 강했고 악기도 일반적인 록 밴드의 구성과는 달랐다. 호시노 겐은 이 밴드에서 기타와 마림바, 만돌린, 그리고 일부 곡들의 작곡[37] 과 편곡 및 프로듀싱을 담당했다. 사케록이란 이름은 평소에 자신이 동경하던 마틴 대니의 앨범 중 한곡이었던 sakerock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밴드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SAKEROCK 문서 참고.
처음부터 인스트루먼트 밴드를 하려고 한 건 아니고, 원래는 오히려 유니콘처럼 시원시원하게 지르는 목소리를 좋아해서 곡도 그런 걸 썼지만 테이프에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들은 후 급좌절해 노래하고 싶다고 말을 못했다고 한다. 또한 클리퍼드 브라운&맥스 로치의 앨범「Study In Brown」에 수록되어 있는 'Cherokee'라는 곡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고 인스트루멘탈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H(호시노 겐): 음악도 연극도 중학교 때부터 쭉 하고 있어서요, '계속하면 언젠가 좋은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오토나케이카쿠에 들어간 때(2003)부터네요. 그때까지는 연기도 음악도 칭찬받지 못했고, '둘 중 하나만 해'라고 자주 들었습니다. 차츰 '연기 재밌네', '음악 좋네'라고도 듣게 되었어요.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2009)
SAKEROCK이 소규모 라이브하우스 공연을 이어가며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2004년 인디 소속사 겸 레이블인 KAKUBARHYTHM[40] 에 들어가게 되며, 그의 밴드 팬이던 영화감독 이누도 잇신의 부탁으로 2007년 아라시 주연의 영화 「황색 눈물(黄色い涙)」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담당하게 되고[41] , 후지 록 페스티벌과 SUMMER SONIC 등에 출연하면서 나름 상승세를 타던 인디 록 밴드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장르 불명의[39]
, 가사도 없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마성의 음악으로 많은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특히 R&B, SOUL 등 해외의 블랙 뮤직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J-POP으로 녹여낸 호시노 겐의 '옐로우 뮤직' 장르의 시작이 바로 여기, SAKEROCK의 음악에 있다. #
3.1.2. 솔로 데뷔와 지주막하출혈[편집]
노래는 여전히 서툴렀고, 가창력 또한 좋지 못했으나 '노래가 많이 서투르더라도 중요한 건 그저 부르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지,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 전혀 아니라고 답하고 있으며, 부끄러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2015년 4월까지는 SAKEROCK 활동을 병행했다. 싱글 3집 夢の外へ(꿈 밖으로)로 솔로로서 처음으로 음악 방송에 나가게 되었으며, 배우업과 음악업 모두 점점 궤도에 오르기 시작해도, 여전히 이전처럼 주변이나, 문필, 가수, 연기 등을 담당하는 업계관계자들로부터 '호시노 겐은 재능이 없다'라거나 '직업으로 하려면 하나에만 집중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렇지만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며 해내기 위해서 수면시간을 줄여가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SAKEROCK은 2015년 료고쿠 국기관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하면서 다음 생을 기약하며[42] 끝이 났다.죽는 것보다 살려고 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힘들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과 고뇌로 얼룩진 짐승의 길을 강제로 걷는 행위다. 그러니까 죽음은 열심히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닐까. 그 타이밍은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나는 마지막까지 발버둥치고 발버둥쳐서, 최고의 기분으로 엔딩 크레딧을 봐주겠다고 생각했다.
『되살아난 변태』 (2014)
3.1.3. '옐로우 뮤직'의 대중화와 대히트[편집]
SAKEROCK 해체 후 완전히 솔로로 독립한 바로 그 해, 호시노 겐은 아뮤즈로 소속사를 옮겼으며, 2015년에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솔로 가수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12월 2일 발매된 4번째 정규 앨범 「YELLOW DANCER」가 락인재팬의 헤드라이너로 등장, 첫날 판매량이 6만 장을 기록하더니 셋째날에는 10만장을 돌파하고 주간 오리콘 앨범 차트에서 1위를 달성하는 등 좋은 성과가 이어졌다. 거의 고사한 2010년대 일본 솔로 시장에서, 더군다나 남자 가수는 더 팔리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판매량이다. 이에 힘입어 2015년, 'SUN'으로 홍백가합전의 첫 출장을 달성했다. 이 YELLOW DANCER 앨범은 2019년에 뮤직 매거진이 선정한 역대 일본음악 100대 명반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cero의 「Obscure Ride」와 호시노 겐의 「YELLOW DANCER」, 이 2편은 양자의 디스코그래피에 있어서 분명한 전환점이며, 블랙뮤직의 흡수에 크게 방향을 튼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라고 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중략)
호시노 겐의 『YELLOW DANCER』와 더불어 cero의 『Obscure Ride』의 선행곡의 제목이 'Yellow Magus'였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인 동시성 현상이지만, 옐로우라고 의식적으로 자칭함으로써 블랙뮤직에 대한 거리감을 강제로 해방시킨 것, 또 그 대담함과는 달리 사운드 창조를 쿨하게 마주한 것, 양자의 그러한 도전이야말로 돌파구가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팝 음악의 지평을 개척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도망부끄의 시청률이 20%를 기록, 恋(사랑)의 실물 싱글 판매량은 31.8만 장, 음원다운로드 수는 200만을 돌파하고, 일명 '코이댄스'가 일본 전역을 강타해 여러 연예인 및 유튜버들이 커버하면서, 호시노 겐은 배우와 뮤지션 양쪽에서 모두 메가히트를 했다. 2016년 하반기는 호시노 겐의 「恋(코이)」와 RADWIMPS의 「前前前世(전전전세)」가 양분했다고 할 수 있다. 「恋(코이)」는 2017년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부른 곡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꾸준히 여러 라이브를 하고, 앨범 및 싱글을 발매하는데, 그 곡들도 「恋(코이)」만큼은 아니지만 히트를 치는 등 유의미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이러한 인기로 2015년과 2016년에 이어서 2017년 홍백가합전까지 3년 연속 출장했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공신력있는 조사인 2017년 오리콘 일본인 2만명이 좋아하는 아티스트 랭킹에 9위를 기록하고, 2017 닛케이 텔런트 파워 랭킹 종합 순위는 17위를 기록하며 상위권에 처음으로 진입했다. 2010년대 일본 아이돌 시장의 강세 속에 새롭게 히트 친 남성 솔로 가수가 잘 나오지 않고 있고, 솔로 싱어송라이터 시장에 주목을 덜하는 측면에서 상당히 유의미한 결과를 거뒀다.
그리고 추가로 2017년에 올 나이트 닛폰의 퍼스낼리티로서 처음으로 「갤럭시상 라디오 부문 DJ 퍼스낼리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2018년에는 일본 저작권협회에서 전년도 CD판매량, 디지털 다운로드, 가라오케, 착신음 다운로드 등을 종합하여 가장 많은 저작권 수입을 올린 곡에 수여하는 JASRAC 금상을 수상, 현재 사잔 올 스타즈와 더불어 소속사 아뮤즈의 주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이전부터 여러 예능[43] 이나 드라마에 꾸준히 참여해왔기에, 그렇게 호시노 겐은 2016년부터 2019년도까지, 일본 남성 솔로 싱어송라이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 내에서 건재했던 쟈니스 사무소 소속 아이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가지게 되었다.[44] 그리고 이미 스타가 되어버린 후 출시하는 5번째 정규 앨범 Pop Virus는, 앨범 발매 전부터 대중들의 엄청난 기대를 모으게 된다.
2018년 12월에 출시한 정규 5집 「POP VIRUS」가 주간 빌보드 재팬 앨범 랭킹 및 오리콘 앨범 랭킹 4주 연속 1위를 달성하고, 50만장 이상이 팔리며, Billboard Japan Hot Albums 2019년도 연간 2위[45] , 오리콘 2019년도 연간 4위[46] 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또한 발매 후 2019년 2월부터 일본 5대 돔에서 라이브 투어를 진행했다. 33만명을 동원한 '5대 돔 투어'를 예매 당일 전석 매진시키며 일본 내에서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 중 한 명으로 완전히 자리잡았으며, 역대 일본 남성 솔로 가수로서는 다섯 번째 5대 돔 라이브 투어 달성이다. 그리고 2019년 3월 스페이스 샤워 뮤직 어워드에서 4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최초의 아티스트가 되었다.「恋」, 「Family Song」,「アイデア」등이 포함된 5번째 앨범인 『POP VIRUS』는 호시노 겐에게 최초의 도달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작『YELLOW DANCER』에서 시도한 SOUL, R&B와 J-POP의 융합이라는 주제를 더욱 밀어붙여 현재 진행형인 서양음악 트렌드 (특히 참신한 리듬의 어레인지, 중저역을 강조한 사운드 메이크업)와 맞물리면서, 일본만의 팝 음악으로 승화시킨 'POP VIRUS'는 폭넓은 층의 청취자를 즐겁게 하는 동시에 마니아적인 음악팬들을 신나게 하는 이상적인 확산세를 보였다. 전국 5대 돔 투어 「호시노 겐 DOME TOUR 2019 POP VIRUS」에서도 엔터테인먼트성과 음악성을 공존시킨 무대를 펼치며, 호시노 겐은 완전히 일본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되었다. #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과 저의 영혼을 공명시켜 저의 음악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나의 문화, 나의 역사 속에서 나의 음악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3.1.4. 탈진증후군과 코로나 사태와 재시작[편집]
2020년, 한창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당시, '코로나 때문에 실제로 만날 순 없지만, 마음이라도 그러한 기분을 내는 컨텐츠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うちで踊ろう(집에서 춤춰요)를 무료배포 했으며, 여러 다양한 커버를 해달라고 추천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국내에서 여러 쇼츠 및 릴스가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일반인 및 유튜버 뿐만 아니라 오오이시 마사요시, 카메다 세이지, 미우라 다이치, 바나나맨 등 여러 아티스트 및 연예인들도 챌린지에 참여했을 정도로 당시 일본 내에서 음악 밈으로 작용했다. 11월 23일에는, 잡지 GQ 재팬에서 매년 선정하는 GQ MEN OF THE YEAR의 일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2021년 5월 19일 아라가키 유이와의 결혼 또한 발표하여 일본 국내는 물론 한국에서까지 화제가 되었으며, 9월 2일에는 Shang-Chi and the Legend of the Ten Rings: The Album의 수록곡 중 하나이자 Zion.T와의 합작곡인 Nomad가 공개되었다.Q. 예전에 호시노 씨는 'Same Thing'을 만든 것의 수확으로 '음악은 즐겁구나 하는 굉장히 순수한 것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을 꼽았습니다. "그것은 지금 제 안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고, 여기서 다시 출발선이 그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만약 이 후 거센 파도가 몰아쳐와도 바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안도감이 매우 큽니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문을 연 '창조'와 '불가사의'를 완성한 현재 호시노씨의 텐션이나 동기는 이야기한 「Same Thing」때의 감각의 연장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장소에 서 있는 느낌이 있습니까?
호시노 겐: 또 다른 장소인 것 같아요. 'Same Thing'에서 얻은 것들을 'Same Thing'과 같은 선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Same Thing'의 이전으로 돌아가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요. 다른 곳으로 가야 Same Thing에서 얻은 걸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사람을 만나면서 받은 것들을 그대로 같은 무대에서 꺼내 버리면 그냥 반복이 되는 것 같아서요. (중략) 예를 들어 이게 'Same Thing' 이듬해인 2020년이었다면 아직 같은 지평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1년 스케줄이 미뤄졌고, 그 사이에 다른 무대로 가는 기분 같은 걸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그런 상태로 제작에 임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호시노 겐이 이전까지 대히트할 수 있었던 곡들과 다른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으나, 빌보드 재팬 HOT 100 전체 1위를 찍거나, 새 싱글인 不思議/創造(불가사의/창조)가 첫날에만 약 10만장이 판매되고, 이런저런 일이 많아 모델프레스 선정 2021년 상반기 가장 활약한 연예인 1위, 2021 닛케이 텔런트 파워 랭킹 뮤지션 3위[47] 에 뽑히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음악상들을 받거나, 포트나이트의 사운드웨이브 시리즈에 참여하는 등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여러 출연과, 단독 라이브 투어도 좋은 성과를 보이며 꾸준히 열고 있다.
2022년 NHK E에서 새로운 교양 프로그램 호시노 겐의 음악 공론을 런칭하고 진행했다. 스파이 패밀리 애니메이션 1기 1쿨 엔딩곡으로 발매한 喜劇(희극)은 가혹한 현실과 그 속에서 태어나는 소소한 사랑에 대해 그려 첨예성과 포용력이 넘치는 사운드에도 호시노 겐의 세심한 고집이 담겨 있어 그의 새로운 시도를 상징하는 새로운 대표곡 중 하나가 되었으며, 아내인 아라가키 유이가 등장하는 고스트북 오바케즈칸의 주제곡으로 異世界混合大舞踏会(이세계혼합대무도회)를 발표했다.
3.1.5. 2023년 ~[편집]
2023년에는 TBS에서 중계되는 2023 부다페스트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경기 중계 테마곡인 生命体(생명체)를 발표했으며,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예능인 라이트하우스에 고정 출연진으로 출연하고 그 프로그램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담당했다.
또한 SUMMER SONIC 2023의 비치 스테이지에서 'So Sad So Happy' 공연을 큐레이트하고 프로듀싱 하여 여러 뮤지션들과의 합동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 라이브 영상은 녹화되어 12월 29일 오후 8시에 트위치 아마존 뮤직 재팬 채널에서 전달되었다. 그리고 12월 27일, 테마곡 4곡을 모은 싱글 13집 光の跡/生命体(빛의 흔적 / 생명체)를 발표했다.
2024년, 호시노 겐의 NHK 관 프로그램(이름을 건 방송) '오겐상과 함께'의 스핀오프적인 오겐상의 서브스크당이 정규 방송 결정이 나서 1월부터 3월까지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오도리의 올 나이트 닛폰 in 도쿄 돔'에 스페셜 게스트로 깜짝 등장해 와카바야시 마사야스와 콜라보 공연을 펼치고 간단한 토크도 했다. 곡은 이 두 사람이 같이 콜라보했었던 Orange와 Pop Virus (feat. MC waka)의 도쿄 돔 어레인지 버전. #
3.2. 음악적 특징[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음악적 특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래 나온 내용들은 분리된 문서의 일부 발췌 또는 요약이다.
솔로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거의 모든 곡들을 직접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했다.[48] 인디 밴드 SAKEROCK의 프로듀서 역할을 하기도 했었고, 이후로도 전반적인 편곡 및 프로듀싱을 담당하다보니, 호시노 겐 본인이 다룰 수 있는 것만 하더라도 2023년 기준, 기타, 마림바, 플랫 만돌린, 드럼, 삼선, 밴조, 베이스 기타, TR-808, 건반 악기, 신디사이저, MPC, DAW 등 다양하다.
가장 먼저 시작한 악기가 드럼이라 기본적으로 리듬과 비트를 중요시하며, 전체적으로 음악의 사운드를 상당히 복잡하거나 컬러풀하고 풍부하게 사용하면서도 부담없이 들을 수 있다[49] 는 큰 특징이 있다. 인디 밴드 시절의 곡들이 전반적으로 'BGM'적인 느낌을 주고, 복잡하지만 뭔가 어깨 힘 빠진 분위기의 곡들이 많았는데, 그 이후 본격적인 솔로 활동에서는 다양한 악기가 변칙적으로 들어가거나, 미묘한 변화를 계속 주면서 곡이 진행되지만 곡이 쉽게 술술 들리는 안정감을 준다.[50]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건강함과 담백함 속, 그의 고집이 담겨있는 리듬과 비트와 이색적인 사운드'가 그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
[ 자세한 내용 펼치기ㆍ접기 ]
깨끗한 음질로 전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노이즈가 맞는 곡이라면 음악에 일부러 잡음이나 노이즈를 남기거나, 역재생을 넣을 때가 있다. 특정 물건의 소리나[51] , 녹음 및 믹싱을 잘못했을 때의 그 이질적으로 튀는 공기 소리 같은 것[52] 이나 악기나 여러 사운드들의 역재생[53] 이 자세히 들어보면 군데군데 숨어있다. 그 외에도 여러 실험적인 요소도 집어넣는 경우가 많은데, 밴드 시절부터 생활 소음이나 여러 효과음과 함께 녹음해보는 건 물론이고, 도입부를 본인의 핸드폰으로 녹음한 걸 곡에 그대로 쓰거나, 노래 중간에 기타 솔로 대신 기타 튜닝 소리를 넣는다던가, 대화소리를 넣어본다는 등이 있다.
자신의 이야기가 너무 암울하기 때문에[54] , 가사에 본인의 과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넣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하며, 그 대신 '본인의 이야기에 기반하여 생성된 가치관'으로, 본인이 느끼는 풍경과 세상을 담아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치 시처럼 특정 주제에 대해 그가 바라보는 이미지(심상)을 떠올리게 한다. 문인다운 시적인 가사로 '문과 여고생들의 아이돌'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R&B, 소울, 힙합 등 블랙 뮤직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J-POP에 녹여내어 「옐로우 뮤직」이라는 자신의 장르를 개척해나가고 있다고 한다. 블랙 뮤직을 그대로 재현하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필터를 거쳐서, 일본인에게 친숙한 음악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옐로우 뮤직' 이라는 장르를 독자적으로 창출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현재는 호시노 겐이 이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현재 그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계속 현재 시대상을 반영하여 그가 영향을 받은 다양한 음악 장르를 다양한 접근 방식으로 재해석하거나 계승하고 있다.
자신의 히트 친 음악을 반복하는 걸 '뭔가 설레지 않는다'며, 비록 대중적인 반응이 좋지 않더라도, 여러 음악적 도전 및 도전하는 방향성의 다양화를 좋아하며 꾸준히 많이 하고 있다. '시대는 항상 변화하고 있고, 내가 하는 음악이 똑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걸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의 가치관이 반영된 부분.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같은 '가볍게 춤추기 좋은 팝 적인 곡'으로 의뢰가 들어와 제작에 착수했던 恋(코이)와 異世界混合大舞踏会(이세계혼합대무도회)는 전혀 다른 사운드를 보여주고 있다.
팝 적이면서도 댄스 음악의 요소를 넣어 몸이 가볍게 움직이는 곡들은 많지만, 그 중 일부에는 춤 안무가 들어가 있다. 수많은 커버 영상을 파생시킨 유명한 '코이댄스' 외에도, 2012년 꿈 밖으로, 2018년 아이디어, 2022년 이세계혼합대무도회 등이 있다. 더 자세한 예시와 관련해서는 이 곳을 참고. 이와 관련하여 가사에 '춤추는, 춤추자'라는 단어가 꽤 자주 등장한다. 시적인 정취나 메세지성/상징성을 내포한 가사가 많기에 이 단어 또한 특정 뜻을 함축한 표현으로 종종 쓰인다.
본인이 직접 언급했듯이 가창력이 좋은 보컬리스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음악 생활을 계속 해오며 점점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음역도 넓어졌다.[55] 고음은 대체로 가성으로 처리하고, '읽어주기 창법'을 자주 사용한다.[56] 중저음이 꽤나 편안하게 다가오는 음색을 가지고 있지만, 팝이나 여러 실험적인 측면 때문에 가성을 자주 사용한다. 대체로 가수 및 코러스가 악기 중 하나처럼 작용되며, 사용하고 있는 악기나 사운드에 더 집중하는 곡들이 많은 편.[57]
3.3. 빛 속의 어둠과 스타의 고독[편집]
관련 문서: SUN(호시노 겐)
음악적 변화의 첫 번째 과도기를 거쳐서부터는 긍정적인 태도와 밝고 희망찬 사운드에 맞는, 전체적으로 보면 즐거움을 나타내는 노래가 많아졌다. 그러나 그 건강한 사운드 속에는 상당히 어두운 부분이 계속 숨어있다.빛 속에 어둠이 있는 호시노 겐
어둠 속에 빛이 있는 요네즈 켄시
마냥 '낙관적인 밝음'이 아니라, 밝음 이면의 어두움을 인정하고, 암울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가사를 통해, 계속해서 보여주면서 밝은 사운드 속 어두움을 암시하거나, 밝음을 진지하게 다루기 위해 어두움을 표현하거나, 어두움과 밝음은 이분법적인 존재가 아니라 궤를 같이 한다 등을 이야기한다. '희극과 비극' 또한 마찬가지로, 희극 안에는 이미 비극이 포함되어있다라고 하는 그의 가치관에 맞게 가사가 씌여진다. '거짓'과 관련해서도 거짓(말)과 현실은 서로 부정하는 관계가 아닌, 거짓(말)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현실은 거짓(말)에 의해 비춰지는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무명시절 주변의 모든 것을 증오하고 꼭 성공하고 말겠다는 다짐부터 시작해서, 솔로 데뷔 초기부터 Pop Virus까지 그는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혼자 작업해오고, 혼자 셀프 프로듀싱을 계속해오며 결국 그는 큰 성공을 맛보게 된다. 그는 사람들 앞에 서는 기쁨,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재미 등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된 성취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고독했던 동시에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계속 스타로 대우받고 평가받는 것에 지긋지긋함을 느꼈다. 이는 그가 이때까지 긍정적인 태도와 건강하고 밝은 사운드 속 쓸쓸함과 외로움을 남몰래 녹여냈던 이유일 것이기도 하고, Pop Virus 직후 걸린 번아웃 증후군의 요인 중 하나였으며, 그가 새로운 자극을 찾아 새로운 음악 및 재시작을 하게 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재시작들은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내면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호시노 겐은 「恋(사랑)」의 히트 이후, 혹은 그보다 전부터, 스타로서의 중압과 싸워 왔다. 2015년 'SUN'에서 노래한 스타의 고독. 인류를 비추면서도 아무도 곁에 있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고독했던 태양(SUN)과 같은 마이클 잭슨에 대해 노래했던 호시노 겐은 스스로가 스타가 되어 결국 그 비극을 맛보게 되었다.
호시노 겐의 2015년 곡 「SUN」은, 이 히트로 홍백 첫 출장을 완수했을 정도로 캐치하고 즐거운 음악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고독이 새겨져 있다. 'SUN(=태양)'이라고 나타낸 것은 마이클 잭슨을 말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을 비추면서도 아무도 곁에 다가가지 못하는 팝스타의 고독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2018년 'アイデア(아이디어)'에서는 1절에서 스타로서의 겉모습을, 2절에서 숨겨진 자신의 진심을 노래하며 그 마음에 쌓인 고민을 풀어냈다.
'さらしもの(사라시모노)'에서는 세상에 자신을 제멋대로 해석받는 스타의 입장이 지긋지긋한 그의 내면을 쏟아내고 있다. 엄지손가락이나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마음대로 평가하는 청중. '나는 태양이 아니야, 빛나 보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봐주고 있기 때문이야'라고. #
- 나는 다시 태어났어 / 몇 번이고의 재시작은 / 다시 한 번 따분한 이 세상에서 놀기 위해서야
-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와 살아난[58] 이 의미는 / 그저 사는 게 아닌 노는 데에 있어
(2021)
3.4. 음악 스타일 변천 과정[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음악 변천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연관 인터뷰: 호시노 겐이 말하는 솔로 데뷔 10년, 시대와 싸워온 행보
2023년인 지금까지 호시노 겐의 음악 활동은 23년, 솔로 음악 활동은 약 13년 정도로, 처음 나올 당시에 '슈퍼 루키'나, '천재'는 전혀 아니었다. 시대가 계속 변화함에 따라, 제자리에 안주하는 걸 싫어하고 변화를 계속 추구하는 그의 음악적 가치관 특성상 그의 음악적인 스타일은 계속 변화해왔다.
그의 곡들은 세부적으로 본다면 아주 다양하게 섞여있지만, 아주 최소한으로 간략화해보자면 전체적으로 마이클 잭슨, 호소노 하루오미, 펑크, 디스코, 힙합, 모타운, 네오 소울, R&B 등 다양한 장르 및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받고, 오키나와 음악, 엔카 등 J-POP의 특징을 넣으며 다음과 같은 수순을 밟고 있고, 더 나아가 2020년대 이후 최근에는 더욱 더 여러가지 변화를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60]
3.5. 디스코그래피[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디스코그래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관련 문서: SAKEROCK/디스코그래피
3.5.1. 노래방 수록 목록[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노래방 수록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6. 콘서트 및 이벤트[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공연 및 행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 음악 참여[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출연 및 참여 작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음악의 역할이랄까, 예를 들면, '주제가가 뭘까?'라고 묻는다면 프로모션을 위해서는 사실은 아니고. 그때까지 있었던 모든 것을 그 악곡을 들으면 생각이 나서, 자기 안에서 정착시키고, 그 작품을 자기 안에 도입하는 작용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래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무엇인가? 라고 하면 물론 스태프분들을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 엔딩 크레딧에 왜 주제가가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그 악곡만 들어도 그 영화나 작품의 여러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고... 그러니까 저의 악곡이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의 토크라는 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전보다 더 자리 잡겠죠. 그래서 그게 전체적으로 작품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그건 넷플릭스가 가진 미디어 특성에 매우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넷플릭스 프로그램 라이트하우스에서 음악 제작 결정을 직접 한 이유에 대한 호시노 겐의 대답
3.8. NHK 홍백가합전[편집]
순서 항목의 경우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한 가수 자체의 순서가 아닌 특별기획으로 구성된 특별무대를 포함. 호시노 겐의 출장과는 별개인 오겐상의 홍백가합전 무대는 이 문서를 참고.
4. 배우[편집]
상대 배우의 옆에 존재하면서 서로 합을 맞추는 역할, 모태솔로 역할, 평소에는 우유부단하거나 순박하거나 가벼우면서도 한없이 진중할 땐 진중해지는 경향의 역할, (호시노 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 된 인물'[63] 의 역할, 어둠이나 사연 등을 숨기고 있는 듯 하면서 특정 인물의 행보에 대해 지켜보거나 남몰래 반응하는 역할 등이 꽤 많은 편이다.
배우로서도 다른 배우들에 꿀릴 것 없는 커리어와, 코믹부터 시리어스까지 소화하는 연기 스펙트럼과 팬을 가지고 있어 '배우 호시노 겐'을 먼저 알게 되거나, 혹은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4.1. 연혁[편집]
4.1.1. 데뷔(2003)와 신인상(2013)[편집]
중학교 시절에 음악 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관심을 가졌었는데, 고등학생 때 극단 오토나케이카쿠의 연극을 보고, 당시 내성적이었던 호시노 겐은 감동과 충격을 받아 이 극단의 워크숍에 참석하고, 연기에 대한 꿈을 강하게 가지게 된다.
그 후 음악활동을 병행하며, 오디션을 보고 일부 연극에 참여하며 그때마다 연기하는 나날을 보내던 중, 극단 오토나케이카쿠에서 '악기를 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게 되면서, 호시노 겐은 이 역할로 2003년, 무대 연극 『ニンゲン御破算』에 출연하였다. 이전에도 여러 연극에 참여하였으나, 이 작품이 첫 큰 무대였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토나케이카쿠에 배우로서 계약을 맺고 들어가게 된다.
드라마 쪽에서는 2003년 『WATER BOYS』(후지 테레비)에서 경음악부에 속해있는 부원이자 기타를 들고 나오는 호시야마 배역으로 데뷔했다. 극중 경음악부로 연주했던 곡들은 본인이 직접 작사ㆍ작곡했다고 한다. 첫 드라마 주연은 2007년, 『지난해 르누아르에서』라는 짧은 단편 드라마이다. 이 작품에서 겉으로는 대사가 거의 없지만 속으로는 여러 망상과 마음의 소리를 들려주는 나로 주변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표정이 변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후 『 타이거&드래곤 』(TBS), 『 게게게의 마누라 』(NHK) 등의 인기작들에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했다."그때 용기를 내서 소속사에 넣어 달라고 계속 사정했어요. 계속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더니 '좋아요.'라고 답하셔서. '이렇게 간단해도 되나?'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담판을 짓고 소속된 사람은 저뿐이래요."
이미 음악 활동을 하고 있던 호시노 씨는 "지금 밴드도 하고 있는데, 괜찮을까요?"라고 사장에게 물었다. 그러자 "전혀 문제없어. 오히려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 게 재미있지."라고, 그런 식으로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한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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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적인 공연, 영화, 드라마 외에 코미디 콩트에도 여러 번 나왔는데, 특히 LIFE!〜人生に捧げるコント〜(라이프! 인생에 바치는 콩트)[65] 에 시즌0(2012)부터 시즌4(2017)까지 고정 출연진 중 한 명으로 꾸준히 출연하며 여러 가지 캐릭터를 보여주고 망가지는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예시
4.1.2. 배우로서의 상승세와 히트[편집]
그렇게 배우로서 이름을 서서히 알리기 시작한다. 코우노도리 시리즈에서는 상당히 차가워보이지만 실상은 따뜻한 의사인 '시노미야 하루키' 역으로 아야노 고와 합을 맞추었으며, 처음으로 출연해보는 NHK 대하드라마인 사나다마루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역할을 맡았다.
그 이후에도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을 받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2017)에서는 '선배'역으로, 미래의 미라이(2018)에서는 '아빠'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플라쥬에서는 각성제를 사용해 체포당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나 셰어하우스 플라쥬에서 살게 되는 회사원인 '요시무라 타카오'역으로 wowow 드라마 첫 주연을 맡았다. 또한 「이사 다이묘!(引っ越し大名!)」 (2019)에서 카타기리 하루노스케 역을 맡아 제 43회 일본 아카데미상 배우부문 화제상을 받았다.작년 드라마 '코우노도리'에서 배우로서의 다양한 매력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츠자키의 성실하고 못생겼지만, 귀여움도 함께 살고 있는 절묘한 분위기를 내 주시는 것은 호시노 씨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부탁했습니다. (중략) 2명이 동거하는 가운데 프로 독신을 관철하려고 하지만, 조금씩 그녀에게 끌린다는, 그 츠자키의 내면을 호시노씨가 어떻게 표현할지, 기대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졌다가 엇갈렸다가, 그런 무뚝뚝한 마음을 밝고 애틋하게 표현해주는 것은 아티스트로서의 호시노 겐. 배우로서 그를 캐스팅할 때부터 느끼고 있었어서 주제가로도 섭외했습니다. (후략)
4.1.3. 역할의 변화 모색 (2020 ~ )[편집]
전반적으로 주인공의 주변 친구나, 호구, 귀여운 오타쿠, 모태솔로, 순박한 인물, 찌질하지만 인정이 있는 역할, 죄의 무게를 잘 눈치채지 못하는 서민, 웃거나 귀여운 매력이 있어 호감이 가는 역할, 망가지면서까지 열연을 보이는 B급 코미디성이 짙은 역할, 어딘가 미덥지 못한 역할 등을 주로 했었다. 그러나 이후 냉혈한, 마음 속 어둠을 숨기고 있는 인물, 관찰자 등 어릴 때와 다른 역할들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호시노 겐은 배우로서 언뜻보면 무기질적이고 무난한 인상이다. 다만 그가 창조하는 음악처럼 저온화상[66]
같은, 언뜻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 열정적인 면이 느껴진다. 젊었을 때는 그러한 면이, 순박하거나 모태솔로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냉정하게 보고 마음에 무언가를 안고 감정을 닫는 캐릭터로 이어졌고, 이제는 젊은 사람이나 동료를 한발 물러선 위치에서 지켜보는 입장 역할을 하는 인상으로 변해갔다. (중략)호시노가 배우로 인정받은 것이 2013년 영화 '묻지마 사랑'과 '지옥이 뭐가 나빠'. (중략) 그리고 2016년 '도망부끄'에서 연기한 '츠자키 히라마사' 역으로 대히트. (중략) 그런 호시노가 새로운 배우상을 구축한 것이, 2020년의 드라마 「MIU404」이다. (후략)
이와 관련하여 2020년, 자신의 라디오에서, MIU404에서 형사 역할을 해보며 새로 알아가는 게 굉장히 많다고 생각해서, 기존에 하지 못한 여러 직업의 사람들을 연기함으로써 여러 가지 일을 체험해보고 싶다고 언급했으며, 나쁜 인물이나, 히어로 등의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도 언급했다. 음악과 관련된 역할[68] 도 어디선가 해보고 싶다고 한다. #
이에 더해 2022년, 청춘 SF 정치 드라마인 『17歳の帝国(17세의 제국)』[69] 에서는 차기 총리 자리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욕망이 있는 내각관방 부장관[70] 이자 Utopi-AI 프로젝트의 핵심 매니저인 타이라 키요시 역으로, 배후자이기도 하면서, 주인공에게 충고해주고 도움을 주는 조력자이기도 한 복잡미묘한 인물을 맡았다. 조연으로 표기되었으나, 사실상 서브 주인공의 비중을 가지며 기존 그의 배우상과 차이나는[71] 역할로, 그의 연기 생활 및 배우상에 또 다른 설득력을 부여해준 캐릭터. 또한, 여학교의 별 OVA에서는 호시 미쓰히코 역으로 이때까지 맡았던 애니메이션 역할들과는 다른 목소리 및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어이없을 정도로 우연한 고백. 호기심과 고뇌가 동시에 존재하는 복잡한 인간성. 변박자다. 게다가 은은하게 츤데레 매력이 있어, 사랑스러운 하드보일드함은 오구리 슌과의 2인 연기 때 명료하게 나타난다. (중략)
오구리 슌을 후방지원하는 가드로서의 단짝감. 관계자와 자신과 가족의 과거를 바라보는 멀리서(소년시절부터)의 시선. 비극의 색채에 기대지 않고 현재의 가혹함을 받아들일 각오. 산뜻한 댄디즘. 심플하면서 다채로운 '사운드'가, 거기에 있다. #
4.2. 필모그래피[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출연 및 참여 작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3. 특징[편집]
타고난 실력파 배우의 이미지도 아니고, 발연기 배우의 이미지도 아니며[72] , 평범한 배우의 이미지도 아닌, 연기에 대해서 대중들마다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배우이다. 연기력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가 맡은 역들에 대해서 '음악가 호시노 겐은 배우 호시노 겐의 배역들을 표현할 수 없고, 그의 배역들도 하나같이 캐릭터가 다 다르다'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순박한 초식계 너드남과 능력이 뛰어난 냉혈한 형사를 보여준 그의 대표작들에 비해 한국에서는 다른 필모그래피가 그닥 많이 돋보이지는 않지만, 2020년 이전까지 개성이 넘치는 배역이나, 배우로서 상당히 부담스럽거나 다사다난한 배역을 많이 맡았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여럿 보다보면, 피칠갑되는건 기본이고, 망신당하거나 알몸이 노출되는 장면 외에도, 격한 키스씬과 베드신 연기 유경험자이기도 하며, 심지어 마약 하는 연기 유경험자이기도 하다. 연기 스펙트럼이 꽤 넓은 셈.
상술했으나 2020년 이후, 직접적으로 표출하지는 않지만, 마음 속에 깊은 어둠을 가지고 있는 배역들이 많아졌는데, 그래서 전반적으로 '조용하면서도 내면의 어둠과 슬픔을 표현하여 압도하거나 휘몰아치는 눈빛 연기'에 대한 호평이 많아졌다. #1 #2
5. 작가[편집]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전하는 것이 서툴렀기 때문에 22,23살(2003년) 때 '문필을 계속 하면 혹시 억지로 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편집자를 찾아다녔고 잡지의 난외에 100글자나 200글자로 잡문을 쓰는 일을 노개런티로 맡게 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당초에는 쓰는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점차 부탁되는 글자 수가 증가하고, 2009년에는 첫 에세이집 『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를 집필한다.
그리고 여러 에세이집이 30만 부 이상이 팔리고, '생명의 차창에서'는 여러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하고 북로그 에세이 부문 대상을 받으며 한국에서도 공식적으로 번역판이 들어오게 되었다.
5.1. 저서 / 대담집[편집]
5.2. 연재[편집]
- シアターガイド 「나의 이번 달」
- Quick Japan 「식물인간도 춤출 수 있는 음악」, 「오늘의 사이타마」
- 소년문예 「빙글빙글 파아코」
- 미래창작 vol.1 단편소설 「찻주전자」
- bounce.com[76] 「호시노 겐의 노래하는 소설」
- H (에이치) 「우메보시의 픽션 대마왕」
- 텔레비전 브로스「호소노 하루오미와 호시노 겐의 지평선의 상담」[77]
- TSUTAYA 프리 페이퍼 "VA" 「호시노 겐의 그리고 SAKEROCK은 계속된다」
- 매거진하우스 "ウフ"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 POPEYE 「무릎 위의 영화관」[78] , 「호시노 겐의 12명의 무서운 일본인」
- GINZA 「긴자철도의 밤」
- 다빈치 「호시노 겐의 잠자코 나를 따라와」
- 다빈치 「생명의 차창에서」
- AERA 「음악 이야기를 하자」
- AERA 「단둘이 이야기하자」
6. 그 외 활동[편집]
6.1. 방송인 활동[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출연 및 참여 작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야마다 이치로[편집]
자세한 내용은 야마다 이치로(그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SAKEROCK의 호시노 겐과, 영상 작가 '야마기시 세이타(山岸聖太)', 디자이너 겸 디렉터 '오오하라 다이지로(大原大次郎)' 이렇게 세 명이 2008년에 결성한 일본의 영상 프로덕션 유닛. 공식 유튜브
2009년에는, 야마다 이치로가 제작한 SAKEROCK의 MV 'ホニャララ(호냐라라)'가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SPACE SHOWER Music Video Awards'에서 BEST CONCEPTUAL VIDEO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래는 49초부터 나온다)
6.3. YELLOW MAGAZINE[편집]
자세한 내용은 YELLOW MAGAZINE+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수상 경력 및 음반 주요 기록[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수상 경력 및 기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작업량[편집]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게 되고 싶었습니다." (중략)
음악, 연극 등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다 보면 걸음이 느려진다. 같은 세대에 비하면 출연 편수와 곡은 적고 작품 내용도 한정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고 한다.
"뭐든지 자기 하기 나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것은 계속 도전하고 싶습니다."
Heroes File Vol.67 (2012)
멀티 엔터테이너임에도 불구하고 타 전업 아티스트들이나 연예인들의 작업량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작업량이 많다.호시노 겐이 현재와 같은 멀티 엔터테이너가 된 요인 중 하나로서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것은, 전례없는 행동력.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을 직접 계속 하고 있고, 라디오 진행, 집필, 여러 방송, 영상 기획 및 연출, 광고 및 예능까지 하고 있기도 하며, 필모그래피는 같은 세대의 전업배우에 비하면 조금 적은 편이지만, 배우업도 계속 하고 있다. 또한 팬들과의 이벤트나 공연 라이브, 토크 스트리밍 라이브도 종종 하고 있으며 콜라보나 협업 하는 사람들 또한 그의 멀티 엔터테이너적 행보 때문에 여러 방면에 걸쳐있다.
더군다나 연기 활동은 그 배역에 대한 해석과 몰입 때문에 음악 제작 활동과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호시노 겐 또한 喜劇(희극)을 만들고 있었던 당시 '17세의 제국'이라는 짧은 드라마에 참여했는데 이 드라마 촬영 당시에는 희극 악곡 제작을 하나도 잘 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년으로 솔로 데뷔 13년 차인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리믹스나 피쳐링, 콜라보 등을 제외하고 '정규 5개[79] 에, (EP같은 곡 횟수를 가진) 싱글 13개, 디지털 EP 2개, 디지털 싱글 9곡'이다. 물론 싱글 수록곡 중 일부가 정규 앨범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인디밴드 활동을 포함하여 20년을 보면 여기에다가 밴드 명의로 발매한 '정규 6개, 미니 앨범 1개, 사운드트랙 EP 5개'가 추가되는 셈이다. 거기다가 현재까지도 1년에 한 곡은 어떻게든지 무조건 만들어야하는 소소한 이벤트도 있다.
호시노 겐은 뜨기 전까지 '재능이 없다'와 '하나에만 집중해라'는 말을 자주 들었었지만, 그때 당시 소속사에는 '이런 일이 직접 왔다' 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스스로 직접 발로 뛰며 일을 찾고 일을 하고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실천력은 YELLOW DANCER와 Pop Virus로 음악적 측면, 상업적 측면 모두 대히트치고, 참여한 여러 드라마가 히트치며 성공한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2019년 번아웃 증후군이 왔을 당시 '그것을 타파할 다른 돌파구를 찾았다'는 그 결과물로서 Same Thing EP를 발매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80]
또한 2020년 코로나 사태로 대외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오히려 이 코로나 사태의 위기를 기회삼아 DAW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고 그 작업에 몰두하며 그에게 있어 또 다른 새로운 재시작을 표방했다. 실제로 호시노 겐의 2021년 이후 노래는 DAW로 제작된 것이 많은 걸 감안하면, 그의 전성기 때 만큼은 아니지만, 그가 10~20살 차이나는 후배들과 같이 아직까지 현역으로 계속 뛰게 만들어준 또 다른 발판이 된 셈.
2021년에는 결혼까지 해서 작업시간이 더 줄어들었고, 2021년 이후부터 본인만의 오리지널 곡들보다는 의뢰형식의 곡들을 많이 만들고 있지만, '의뢰를 받아 일을 만들면 곡을 더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의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9. 배우 아라가키 유이와의 결혼[편집]
아라가키 유이와는 2016년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에 함께 출연했으며, 이후 2020년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SP를 촬영할 때 재회한 것을 계기로 촬영을 모두 마친 후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시작했다고 한다. 결혼 발표 회견은 별도로 하지 않았고, 결혼식이나 피로연 일정도 현재는 미정이다. 아직 입적은 하지 않았으며, 향후 시기를 보고 입적할 예정이라고 한다.#배우란 힘든 직업이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남이 쓴 대사를 읊는다. (중략) 늘 거짓말을 한다. 인기를 얻으면 주변사람들이 떠받들어 주면서 누가 주의를 주지도 않는다. 그런 환경 속에서 다른 경쟁 배우들과 밑도 끝도 없는 의자 뺏기 게임을 치열하게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정신상태로 '보통'의 감각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기가 올라갈수록 정신은 고립되고, 분주함에 비례하여 에고 또한 비대해진다. 안 그려려고 노력해도 방자해지고 주변을 살피지 않게 된다. (중략) 점점 더 보통에서 멀어진다.
10대 때부터 활약해 온 그녀에게는 틀림없이 상상을 초월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으리라. 아마도 처음부터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터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일터에서 성취할 수 있는 성실함을 찾았고, 더 나아가 웬만한 배우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보통'이라는 상태를 스스로 손에 넣었다. (중략)
그래서 여기에 몰래 글로 칭찬하려고 한다. 부디 그녀가 크랭크업까지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당신은 정말로 근사한 보통 사람이야.
호시노 겐의 에세이, 생명의 차창에서 중
2023년 4월, 아라가키 유이가 '메자마시 TV'에서 호시노 겐을 언급할 때 '남편'이라는 호칭을 써서[81] 화제가 되었었던 적이 있다. # 호시노 겐도 2023년 라이트하우스에서 아라가키 유이를 '아내'라는 호칭을 써서 언급했다.
9.1. 관련 이야깃거리[편집]
일본을 강타한 히트 드라마에서의 인연이 현실에서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까지 크나큰 화제가 되어 여러 이야깃거리나 일화들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나 호시노 겐의 에세이나 호시노 겐의 올 나이트 닛폰으로 가끔씩 아라가키 유이와의 일화 등이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2 {{{#!wiki style="margin-bottom: -1.5%"
'''결혼 전'''}}}
- 호시노 겐은 살면서 여자에게 먼저 고백받은 적은 없고 항상 자기가 먼저 고백했다고 한다.
- 2016년 10월 말 라디오에서 '10년 정도 후의 장래희망은?'이라는 질문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바라건대 아이가 있고, 크고 못난 개와 살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 결혼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으로서 '욕을 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를 통해 사랑이나 결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결혼에 대한 열망이 전혀 없었다고.
- 이후 2020년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SP를 촬영할 때 재회한 것을 계기로 촬영을 모두 마친 후 결혼을 전제로 아라가키 유이와의 교제를 시작했는데, 그렇다보니 예능 등지에 같이 나올 때 교제 사실을 숨기고 예능을 찍는 경우가 많았었다.
+2 {{{#!wiki style="margin-bottom: -1.5%"
'''결혼 후'''}}}
- 결혼 발표 이후에 많이 나온 이야기 중에 하나는 사귀기 시작한 시점이 최소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SP 촬영 종료 시점보다 더 이전이라는 이야기다. 참고로 2018년에 이미 호시노 겐이 아라가키 유이가 사는 맨션[82] 으로 이사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호시노 겐이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2018년 이사 당시에는 아라가키 유이가 살고 있는 맨션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었다고 해명했다.#
- 두 사람이 2021년 5월 19일 결혼을 발표하면서, 비트코인을 포함한 암호자산 가격이 급락하여, 암호자산 시가총액 1조달러(당시 환율로 약 110조엔)가 순식간에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각키 쇼크'라는 도시 전설이 생겨나기도 했다.[83]
10. 어록 및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어록 및 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여담[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시노 겐/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19세 때부터 4년 정도, 삼선의 명수로 알려진 주인장 선술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 그는 매일 오키나와 민요를 듣고 류큐 무용을 배웠다. 밴드 시절에도 이 악기를 종종 사용했으며, 그의 솔로 곡에서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YELLOW DANCER」에 수록된 인스트루멘탈 곡인 Nerd Strut에서 이 악기를 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6] 컨트리 장르 등지에서 자주 사용되는 악기이다. 七拍酒(칠박주) 등의 악곡에서 볼 수 있다.[7] 그 중에서도 플랫 만돌린은 만돌린이 현대적으로 개량되어 컨트리 등지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악기이다. 밴드 시절 '일본풍' 느낌을 내기 위해 자주 쓴 악기로, 殺すな(죽이지 마라) 등의 악곡에서 볼 수 있다.[8] 호시노 겐이 가장 먼저 시작한 악기가 드럼이다.[9] 호시노 겐이 20살 무렵, SAKEROCK와는 다른 레게 밴드의 여성 보컬에게 불려 그 밴드의 베이스 담당이 될 것 같았지만, 그 밴드가 자연 소멸해 실현되지 않았다.[10] 호시노 겐의 음악 공론에서도 이 머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호시노 겐 본인이 엄청 좋아하고 귀엽다고 느끼는 머신이라고 한다. 집에서 하루 안에 혼자 곡을 만들어본다는 호시노 겐의 시리즈인 'House ver. 시리즈'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아주 자주 쓰이는 머신이기도 하다.[11] 기본 피아노나 신디사이저, 오르간, 토이 피아노 외에도 월리처 일렉트릭 피아노 등을 종종 쓴다. 그 악기가 사용된 대표적인 예시가 Sapiens. 또한, 2020년부터 DAW 곡 제작을 시작하고, 2021년 '不思議(불가사의)' 이후 작품을 거듭할수록 키보드의 존재가 커지고 있다. 이는 호시노 겐의 가장 큰 음악적 변화 중 하나.[12] SAKEROCK 해체 이후 소속사를 기존 인디 레이블이자 소속사인 KAKUBARHYTHM에서 아뮤즈로 옮겼다.[13] JVC 켄우드 빅터 엔터테인먼트 산하. 솔로에서의 활동 한정으로, SAKEROCK 작업물의 레이블은 2015년까지 KAKUBARHYTHM이었다.[14] 2016년 일본을 강타한 히트작인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와 코이가 한국에도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작중 안경을 쓰고 나오는 호시노 겐의 모습이 유재석을 연상하게 해서 '호시노 재석'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 이후에도 평상시에 닮았다기보다는 부캐일 때의 모습이 닮았다. # 유튜브와 구글에 호시노 재석을 검색하면 관련 검색 결과가 나올 정도.이와 관련하여, 우스갯소리지만, 호시노 겐이 일본의 대표적인 멀티 엔터테이너 중 한 명으로 자리잡았을 때 호시노 겐이 꽃미남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인기 있는 이유라는 칼럼이 나오기도 했다. 같은 맥락으로 일재석, 호재석이란 별명도 가끔 사용된다.[15] 한국에서도 유명했던 여배우인 아라가키 유이와 2021년 결혼했을 때 한국에서 생긴 별명으로, 팬들이 부른다기보다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드립 및 밈으로 불리는 별명이다. 같은 맥락으로 '최악의 배우', '각키 도둑놈'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이때는 '세금 더 내라'는 말이 바리에이션으로 나오기도 한다. 한마디로 일본판 '대한민국 3대 도둑 중 하나인 비와 연정훈' 같은 장난성 드립과 밈. 여담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