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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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Josemaría Escrivá de Balaguer


파일: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jpg

본명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이 알바스[1]
(Josemaría Escrivá de Balaguer y Albás)
출생
1902년 1월 29일
스페인 왕국 아라곤 바르바스토르
사망
1975년 6월 26일 (향년 73세)
이탈리아 로마
직업
사제, 성직자치단 설립자
문장
파일: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문장.png

시성 정보 ▼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눈 위의 발자국
2.2. 유머 넘치는 젊은 신부님
2.3. 오푸스데이를 "보다"
2.4. 스페인 내전과 종교박해
2.5. 성 십자가 사제회 설립
2.6. 오푸스데이의 발전과 확장
2.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리교육 여행, 죽음
3. 시복·시성
3.1. 기적
4. 어록
5. 저서
6. 관련 기도문
7. 기타



1. 개요[편집]


성 호세마리아는 일상생활 안에서, 특별히 직업 활동을 성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으며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성인입니다.[2]

ㅡ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성 호세마리아는 하느님과 마치 모세처럼 친구끼리 하듯이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경지에 이르고 평범한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성인이었습니다.[3]

ㅡ 교황 베네딕토 16세 (추기경 재임 시절)


성 호세마리아는 보편적 성화 소명을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구자였습니다.[4]

ㅡ 교황 프란치스코


20세기 스페인 출신의 가톨릭 사제이자 성인.

오푸스 데이 설립자로, 평신도와 재속 교구 사제들의 영성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유명하며, 그로 인해 "일상생활의 성인"이라고도 불린다.

2. 생애[편집]



2.1. 유년 시절, 눈 위의 발자국[편집]


1902년 1월 9일 스페인의 아라곤 지방 바르바스트로에서 아버지 호세 에스크리바와 어머니 마리아 돌로레스 알바스의 여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그 해 1월 13일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굳건한 신앙과 그리스도인다운 덕행, 잦은 고해성사영성체, 기도를 향한 굳은 의지,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에 기초한 삶의 모범을 통해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활기차고 건강하며 정직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든지 마음을 열고 모든 근심걱정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호세마리아를 격려해 주었고, 항상 그의 질문에 애정을 갖고 다정하게 응답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1910년에서 1913년 사이에 그는 3명의 누이동생이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고, 소규모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에 따른 재정적인 문제로 1915년 그의 가족은 인근 마을인 로그로뇨로 이주하였다.

1918년 겨울, 호세마리아는 자신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어떤 일을 경험했다. 그 해 주님 성탄 대축일에 로그로뇨에는 많은 눈이 내렸는데, 어느 날 그는 눈 위에 얼어붙은 발자국을 보았다. 그 발자국은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한 수사의 맨발 발자국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호세마리아는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어떻게 희생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고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2.2. 유머 넘치는 젊은 신부님[편집]


호세마리아는 로그로뇨 신학교에서 사제직을 위한 과정을 시작했고, 1920년 사라고사에 있는 교황청립 신학대학에 들어가 사제품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했다.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제의와 장상의 허락으로 사라고사의 대학에서 시민법도 함께 전공하였다. 그의 관대하고 활기 있는 성품과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정직하고 침착한 성격은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의 경건한 생활은 동료들에게조차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학문적 열정 또한 동료 신학생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22년, 20살의 나이에 사라고사 대주교에 의해 신학교의 감독 또는 학사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시간을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보냈고, 이는 그의 영성생활이 성체성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는 매일같이 기둥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찾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성모님께 전구하였다.

1924년 11월 27일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했고, 그해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3월 28일 사라고사의 성 가롤로 신학교 성당에서 디아스 고마라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이틀 후 그는 기둥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경당에서 첫 번째 장엄미사를 집전하였고, 3월 31일에는 보좌신부로 발령받은 교구의 작은 시골마을인 페르디게라로 이동하였다.

1927년 4월 소속 교구장 대주교의 승인을 받고 시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이 학위는 스페인 수도에 있는 중앙 대학에 의해서만 주어졌었다. 마드리드에서 그의 사도적 열정은 그를 다양한 계층의 학생, 예술가, 노동자, 학자, 사제들과의 만남에로 인도했고, 많은 시간을 어린이들과 도시 외곽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보내게 했다.

동시에 호세마리아는 어머니와 젊은 동생을 키우기 위해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법률을 가르치며 여러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여동생, 어린 남동생을 부양하기 위해서 사목을 안할 때는 학원에서 법학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어야 했다. 교구의 지원과 미사 봉헌금으로는 부족했다.

이 당시 성심의 사도 자매회가 운영하는 복지기관인 환자재단의 지도신부로 사목하면서 도시 빈민들과 병원의 불치병 환자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목하였다. 그 당시를 회상하며 호세마리아는 가진 건 '유머' 밖에 없는 혈기와 열정 넘치는 사제였다고 회고하곤 했다.


2.3. 오푸스데이를 "보다"[편집]


기도와 묵상은 호세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좀더 깊이 생각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1928년 10월 2일 수호천사 기념일에 그 당시 교구사제들의 피정 지도 사제로 활동 중이던 호세마리아 성인은 천사의 모후 성당 종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때 그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오푸스데이를 '보는' 환시를 체험한다.

사회 모든 계층 사람들이 특히, 평신도들이 자신의 신분을 바꾸지 않고도 세상 한복판에서 일상적인 일의 성화를 통해 사도직을 실천하고 완덕에 도달할 수 있도록 오푸스데이(Opus Dei)라는 단체를 창설하였다. 오푸스데이는 라틴어로 ‘하느님의 사업’이라는 뜻이다. 약 2년 후, 1930년 2월 14일 하느님께서는 또한 오푸스데이가 여성들 안에서도 전파될 수 있도록 미사 집전 중에 호세마리아 신부를 일깨워주셨다.

그 순간 이후 호세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남녀들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도록 양육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자신을 혁신가나 개혁가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압도되고 교회에 지속적인 활력을 주시는 성령에 의해 쇄신되어 이웃을 사랑하고 일상생활 안에서 거룩함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오푸스데이의 존재 이유라고 보았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그의 뜻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들이 그러했다. 그는 그들의 마음 안에 모든 이에게 봉사할 수 있는 진정한 결심을 굳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세상의 지식과 문화가 사회 전체를 복음화하기 위한 열쇠가 됨을 깨달은 그는 1933년 대학 안에 ‘DYA 아카데미’라는 센터를 열고 이듬해 사회 복음화를 위해 ‘영성적 고려’라는 책을 처음 발간했으며, 그 이후 372권의 책을 더 출판하였다.


2.4. 스페인 내전과 종교박해[편집]


이렇게 오푸스데이가 그 첫 걸음을 내디디는 동안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마드리드에서도 심각한 종교 박해가 일어났지만 호세마리아 신부는 기도와 인내 그리고 사도적 열정으로 이에 맞서 나갔다. 이 시기는 교회에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영성과 사도직이 성장하고 희망이 빛을 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1939년 내전이 끝나자 그는 스페인 반도 전역에서 사도직 활동에 대한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는 많은 대학생들과 함께 사회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를 모셔다주며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깨닫도록 해주었다. 특히 내전으로 인해 야기된 스페인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용서와 사랑, 평화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많은 주교들이 교구의 성직자와 평신도들 위해 그의 강의를 청했고, 수도회 장상들 역시 그러했다.

그는 1941년 스페인 동북부 레리다에서 사제들을 위한 피정 강의를 하던 도중 오푸스데이의 사도직 안에서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기도 했다.


2.5. 성 십자가 사제회 설립[편집]


1943년, 호세마리아 신부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교구사제들의 삶에 육화시키기 위한 성 십자가의 사제회를 오푸스데이 안에 설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1944년 6월 25일 3명의 공학자가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인 복자 알바로 델 포르티료(Alvaro del Portillo)는 설립자를 계승하여 오푸스데이의 단장이 되었다. 성 십자가의 사제회는 교구사제와 사제직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영성적 형성과 활동에 있어서 지역교회의 사목자들과 조화를 이루었고, 교구사제로 머물며 오푸스데이의 정신을 실천하는 성 십자가의 사제회에 참여하는 교구사제들은 더욱 많아졌다.


2.6. 오푸스데이의 발전과 확장[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호세마리아는 오푸스데이의 정신을 보편교회 전역에 전파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의 사도직 활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6년 그는 오푸스데이에 대한 교황청의 승인을 얻기 위해 로마로 본부를 옮겼고, 1947년 2월 24일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데크레툼 라우디스’(decretum laudis, 특별법)에 의거해 가승인을 받았으며, 3년 후인 1950년 6월 16일 교회의 최종 승인을 받아 교황청 직속 재속회가 되었다. 이로써 자신의 노동과 자선 그리고 기도로써 오푸스데이의 사도적 활동에 동참할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 비가톨릭 신자와 심지어 비그리스도인까지도 오푸스데이의 협력자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호세마리아 신부는 오푸스데이 본부를 로마에 안착시킨 후 교회가 원하는 곳에서 봉사하며 사도좌와 교계제도에 더욱 일치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건강상의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전 세계로 사도직 활동을 확장했고, 이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증인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행하는 것이 참된 덕목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위대할수록 세상은 작아지기 마련이다. 세상 모든 곳에서 주교의 부르심에 따라 자신의 사도직 안에서 복음화를 위한 사명을 수행하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이 흘러넘치도록 하려는 그의 소망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매우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시행되었다.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 농업 종사자를 위한 학교, 대학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병원과 의료센터 등 그의 활동은 종종 끝도 없는 바다와도 비교되었다.


2.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리교육 여행, 죽음[편집]


교황 성 요한 23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을 발표했을 때 호세마리아는 이 공의회가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공의회의 심의 결과로서 교회의 교도권은 거룩함에로의 보편적 부르심, 거룩함과 사도직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전문적인 일, 현세의 노동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가치와 합당한 제한, 내적 생활의 중심이자 기초로서의 미사 성제 등 오푸스데이 정신의 기초적인 측면들을 확인했다.

호세마리아는 공의회의 자문위원으로서 수많은 교부와 전문가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공의회에서 선구자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오푸스데이의 활동을 통해 공의회의 가르침과 일치하여 공의회의 정신을 촉진하도록 부지런히 일했다. 하지만 그는 조직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일상생활을 통해 거룩함을 얻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깊은 내면의 생활을 위해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모든 것은 기도가 되고 또한 모든 것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기 때문이다. 즉 모든 종류의 일이 기도가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기도가 되고 사도직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호세마리아가 생각한 사도직의 기초는 세상 한가운데서 얻은 그의 내적인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기도와 성사로써 자라나고 성체성사를 위한 강렬한 사랑으로서 표현되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많은 교리교육 여행 일정을 수행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항상 단순하고 친밀한 목소리로 하느님과 성사, 그리스도인의 헌신, 노동의 신성함, 그리고 교회와 교황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1975년 6월 26일 정오 호세마리아는 작업실에서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그 당시 오푸스데이는 이미 모든 대륙에 전파되었고, 80개 나라에서 6만여 명이 넘게 활동하고 있었다.


3. 시복·시성[편집]


호세마리아 신부의 사망 이후 많은 사람들이 교황에게 시복시성을 청했고, 1981년 심사가 시작되었다. 1992년 5월 1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수많은 순례자들 앞에서 그의 시복식을 거행했고, 2002년 10월 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교황은 30만 명이 운집한 시성식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상생활의 중심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새 성인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3.1. 기적[편집]


1981년 2월 19일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전구를 통한 공식 기적 사례가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1976년 콘셉시온 보울로 루비오라는 수녀가 희귀병인 지방종증을 앓았던 중에 그녀의 가족이 병의 치유를 위해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에게 전구를 청하였고, 놀랍게도 병이 순식간에 치유된 일이 일어났다.

1993년 3월 15일 교황청 시성성에 한 통의 서신이 도착하였다. 그것은 1992년 11월에 불치병으로 불리는 방사선 피부염에 오랫동안 시달리던 마누엘 네바도 레이 박사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전구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지는 이 기적은 시성성에 의해 유효하다는 판정을 받았으며 2001년 12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정식 재가를 받음으로써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에 대한 시성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4. 어록[편집]


그대가 그리스도를 찾게 되기를.

그대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기를.

그대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기를.


정말로 성인이 되고 싶습니까?

매 순간의 작은 의무들을 실천 하십시오,

즉 할 일을 다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하십시오.


높은 건물 꼭대기에 있는 금빛 풍향계가 되려고 갈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아무리 반짝인다 해도, 그것이 아무리 높다 해도, 건물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데는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땅 속 토대 밑에 숨겨진 주춧돌이 되기를. 바로 그대 덕분에 그 건물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5. 저서[편집]


《길》 (1939)
《영적 성찰》 (1934)
《거룩한 묵주의 기도》 (1934)
《우엘가스의 대수녀원장》 (1944)
《에스크리바 몬시뇰과의 대화》 (1986)
《그리스도께서 지나가고 계시다》 (1973)
《하느님의 친구들》 (1977)
십자가의 길》 (1981)
《교회와 사랑》 (1986)
《밭고랑》 (1986)
《대장간》 (1987)


6. 관련 기도문[편집]


〈호세마리아 성인에게 청하는 9일 기도〉

주님, 거룩하신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당신의 종 호세마리아 성인에게 무수한 은총을 베푸셨나이다.

그를 오푸스데이 설립을 위한

가장 믿음직한 도구로 선택하시어

저희들의 일상의 의무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수행함으로써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나이다.

주여, 간구하오니 저희가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기쁘고 단순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교회와 교황님 그리고 모든 영혼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믿음과 사랑의 빛으로 세상의 모든 길을 비추게 하소서.

호세마리아 성인을 통하여

저희가 당신께 구하는 기도를 들어 주소서.

(기도 지향) 아멘.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이 이어진다.



7.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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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전에는 "몬시뇰 에스크리바"로 불렸으나, 시성 이후에는 "성 호세마리아"로 주로 불린다.[2] 호세마리아 성인 시성 미사 강론 中 (2002.10.06.)[3]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기고문 中 (2002.10.06.)[4]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와 신학 사상 심포지움에 보낸 편지 中 (2013.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