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비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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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비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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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세리 A 올해의 팀



2007 코파 아메리카 MVP
호비뉴


호비뉴의 기타 정보

[ 펼치기 · 접기 ]
연도별 전 세계 축구 이적료 1위
2007
페르난도 토레스
(3800만 €)

2008
호비뉴
(4300만 €)


2009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9400만 €)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파일:호비뉴 브라질.jpg

이름
호비뉴
Robinho

본명
호브송 지소자[1]
Robson de Souza
출생
1984년 1월 25일 (40세)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비센치
국적
[[브라질|

브라질
display: none; display: 브라질"
행정구
]]
| [[스페인|

스페인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행정구
]]

신체
172cm / 체중 68kg
포지션
축구 선수 (윙어[2] / 은퇴)
소속
선수
산투스 FC (2002~2005)
레알 마드리드 CF (2005~2008)
맨체스터 시티 FC (2008~2010)
산투스 FC (2010 / 임대)
AC 밀란 (2010~2015)
산투스 FC (2014~2015 / 임대)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2015~2016)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16~2017)
시바스스포르 (2018~2019)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 (2019~2020)
산투스 FC (2020)
국가대표
100경기[3] 28골 (브라질 / 2003~2017)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소개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플레이 스타일
5.1. 장점
5.2. 단점
6. 논란 및 사건사고
6.1. 성폭행 사건
7. 여담



1. 소개[편집]


브라질 국적의 前 축구 선수.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네이마르 주니오르의 어린 시절 우상이자, 한때 제 2의 펠레로 불렸던 선수였으나 불성실한 자기 관리로 대성하지 못했던 선수로 잘 알려져 있다.


2. 클럽 경력[편집]



2.1. 초창기[편집]


2002년 산투스 FC에서 프로에 데뷔했다. 데뷔 초부터 브라질 리그 기록을 연거푸 갈아치우며 엄청난 활약을 펼쳤으며 펠레자신의 후계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4]


2.2. 레알 마드리드 CF[편집]



파일:호비뉴 레알 마드리드.jpg


134경기 35골 27도움


2005년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했다. 이 때 루이스 피구가 쓰던 등번호 10번을 받았으니 어느 정도 기대를 모았는지 잘 말해 준다. 그리고 기대에 걸맞는 활약을 해 주었고, 특히 1월과 2월에만 8골을 넣으면서 팀의 크랙 역할을 맡았다. 다만 2월 이후 득점이 5월 4일이 되어서야 나왔다는 게 흠이다.[5] 어찌되었든 데뷔 첫 시즌에 51경기 12골을 넣으며 갈락티코 세대를 이을 주역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떠오르는 신예였던 리오넬 메시와 자주 비교될 정도였다. 특히 호비뉴는 브라질과 레알 마드리드 소속, 메시는 아르헨티나와 바르셀로나 소속이었기에 팬들이 이 둘을 많이 비교했다.

하지만, 2006-07 시즌을 앞두고 자신을 데려온 페레즈 대신 라몬 칼데론이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부침을 겪게 된다. 칼데론 회장과 함께 부임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단순하면서도 실리적인 접근 방식을 택하는 감독으로 변칙적인 플레이 리듬과 개인기가 강점이던 호비뉴와는 맞지 않았고, 이 시기 호비뉴는 주로 교체 자원으로 뛰었다. 06-07 시즌에는 41경기 8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카펠로 감독이 재미없는 축구를 펼친다는 이유로 해임된 이후 부임한 베른트 슈스터 감독의 밑에서 호비뉴는 반전의 기회를 얻는다. 2007/08 시즌 슈스터 감독은 그 해 코파 아메리카에서 6골을 넣으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호비뉴에게 공격의 전권을 맡기는 한편[6] 수비 부담에서 해방시켜 공격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었고, 호비뉴는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듯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팀을 2년 연속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7] 07-08 시즌에는 리그 32경기 11골, 국왕컵 2경기, 챔스 6경기 4골, 기타 2경기 등 총 42경기 15골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그러나 누구나 레알의 다음 에이스는 호비뉴라고 생각하던 이 때, 칼데론 회장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영입하기 위해 '호비뉴 + 현금'을 트레이드 카드로 내미는 위엄을 선보였다.


2.3. 맨체스터 시티 FC[편집]


53경기 16골 12도움


2008년 여름 이적시장을 후끈 달군 이 트레이드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마음이 돌아선 호비뉴는 레알의 재계약 제의를 거절하고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와 가장 먼저 연결된 팀은 첼시로 호비뉴에게 아낌없이 돈을 퍼부을 준비가 된 첼시와 선수의 신뢰를 잃어버린 채 가격 흥정만 하던 레알 마드리드, 사실상 얘기는 다 끝났고 첼시의 유니폼 들고 사진만 찍으면 끝난 상황으로 보였지만 이적 마감인 9월 1일, 호비뉴는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했다.[8] 당시엔 많은 축구 팬들이 호비뉴가 맨체스터 시티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헷갈린 것이 아니냐고 농담이 있었다. 당시 맨시티는 로만의 인수 이전 첼시와 같은 위상이었기 때문이다.

돈만 많은 졸부 클럽이라며 조롱받던 맨체스터 시티에게 전환점이 된 영입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나, 실제 호비뉴의 영입은 인수 당일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탁신이 팀을 팔아넘기려 하면서 이런저런 루머는 흐르고 있었으나 인수의 주체가 만수르라는 사실이 확정난 것은 이적 시장 마지막 날로,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팬들에게 알려진 일이었다. 이후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세계적인 스타 호비뉴의 영입까지 성사된 것. 출근하러 나가면서 중동 왕자가 팀을 샀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와서 텔레비전을 틀어 보니 호비뉴가 영입된 꼴.

이후 맨체스터 시티는 성공할 때까지 수많은 추가적인 영입을 거쳐야 했으나, 저런 드라마틱한 스타트를 끊은 것이 호비뉴이기 때문에 본인의 활약은 기대에 못 미쳤고 이적 자체도 돈 때문에 이뤄진 흔적이 역력했는데도 지금까지 상징적인 영입으로 회자되는 것이다.

맨체스터 시티 이적 초반에는 대활약을 하였지만[9] 이후 영국 생활 부적응 및 주전 출장 문제[10]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겹치며 산투스로 임대를 가게 된다. 결국 맨시티에서는 리그 기준 41경기 14골, 국내 컵 대회 및 대륙컵 종합 53경기 16골에 그쳤다. 이적 당시 받았던 기대와 초반 활약상에 비하면 매우 아쉬운 결과.

2008/09 시즌: 41경기(선발 40경기) 15골 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30
1
14
5
유로파 리그
10
10
0
1
4
합계
41
40
1
15
9

2009/10 시즌: 12경기(선발 8경기) 1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0
6
4
0
3
FA컵
1
1
0
1
0
EFL컵
1
1
0
0
0
합계
12
8
4
1
3

2.4. 다시 산투스 FC[편집]


산투스에서 예전의 날카로운 모습을 되찾으면서 다시금 호비뉴의 거취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호비뉴는 산투스에서 계속 뛸 마음이 있었지만, 맨시티는 임대를 연장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2010년 8월 30일 AC 밀란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2.5. AC 밀란[편집]


2010-11 시즌 시작 전 AC 밀란으로 이적한 후 몇몇 경기에 교체 출전했는데, 이런저런 트러블로 인해 월드컵 이후 훈련을 못한 것 때문인지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폼이 올라오며 날카로운 드리블과 패스 능력으로 AC 밀란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되었다. 그렇게 2010-11 시즌, 레알 마드리드 시절의 폼을 되찾으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였고 리그에서만 14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세리에 A 우승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2011-12 시즌 초반에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가 부상이 회복되고 나서 알렉산드르 파투, 안토니오 카사노 등이 부상으로 아웃되며 많은 경기에 출장하고 있다. 또한 리그 경기 유벤투스 FC전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면서 살아나는 듯 했으나, 이후에는 그냥 후반전에 대타로 나오면서 간간히 몸을 푸는 것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지난 시즌에 비해 매우 부족했던 활약상이다.

2012-13 시즌에는 리그 23경기에 출장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보다도 부진했고 교체 출전이 많아서 존재감이 부족했다. 점차 팀 내에서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2013-14 시즌 리그 첫 경기에 선발로 기용되면서 뜬금없이 부활하더니 현재 팀의 주전 공격수으로 기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리그 8라운드까지 2골 4도움으로 좋은 활약을 하고 있다. 챔스 조별리그에서는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다!! 비록 메시에게 동점골을 먹히며 1:1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지만, 카카와 함께 어떻게 공격 루트를 만들어 내며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즌 초반 리그 성적이 영 좋지 않다.

그리고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본인도 팀과 함께 다시 부진에 빠지며 예년과 비슷한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고, 팀은 최악의 시즌을 보내며 다음 시즌 구상에서 멀어질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14년 8월 7일 산투스 FC로 다시 임대되었다.


2.6. 산투스 FC 3기[편집]


AC 밀란이 임금을 지불해 가며 임대를 보냈고 호비뉴는 산투스 FC에서 3번째 생활을 보내게 됐다. 데뷔전에서는 패배했지만 33경기 11골을 기록해 임대 선수 치고 꽤 좋은 활약을 펼쳤다.


2.7. 광저우 헝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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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광저우 헝다에 입단했다. 국내 축구 팬들은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충격과 공포로 여기는 분위기.

리그 후반기로 접어든 시점에 이루어진 이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고, 리그 9경기 3골을 기록했다. 팀당 외국인 선수 3명 + 아시아 쿼터 1명으로 외국인 선수 등록 제한이 있는 ACL에서는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2015 시즌 종료 후 반 년 만에 중국을 떠났다.


2.8. 클루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편집]


이후 스완지 시티 FCEPL 클럽들과 브라질 여러 클럽의 관심을 받았고, 결국 중국을 떠난 지 10일 만에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 입단하며 브라질로 돌아갔다. 계약 기간은 2년이며 주급은 약 1억 7천만 원이라고 한다.

첫 시즌에 30경기 12골 8도움을 기록[11]하며 득점 공동 5위, 도움 공동 4위에 등극하며 완전히 부활한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팀의 리그 4위에 기여를 하며 리그 베스트 11에 당시 떠오르는 공격수인 가브리에우 제주스와 공격수 부문에서 함께 투톱에 뽑혔다.

2017 시즌에는 30경기 7골을 기록하며 무난한 모습을 보여줬다.


2.9. 시바스스포르[편집]


2018년 1월 쉬페르리그 소속 시바스스포르에 입단했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이며, 등번호는 70번을 받았다.

예니 말라티야스포르와의 원정 경기에서 후반 교체 출전으로 데뷔전을 치렀고, 두 번째 경기인 카이세리스포르와의 경기 역시 교체 출전하여 터키 리그 데뷔골을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반 시즌 동안 14경기 4골을 기록하며 무난한 활약을 보이며 팀의 7위에 기여했다.

2018-19 시즌에는 전반기에 16경기 8골 2도움을 기록하며 곧 30대 중반이 맞나 싶을 미친 기록을 보였다.

이후 2019년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로 이적했다.


2.10.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편집]


32경기 4골이라는 아쉬운 활약을 보였고 2020년 8월 7일, FA 신분이 되었다.


2.11. 산투스 FC 4기[편집]


산투스로 3번째 복귀가 10월 10일(현지시각) 확정되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팀을 위해 월급을 1,500헤알(한화 31만원)만 받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10월 16일(현지시각) 계약이 종료되면서 복귀한 그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성폭행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어 산투스의 스폰서들이 거세게 반발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호비뉴는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로 불명예 은퇴를 하며 커리어 통산기록은 여기서 마감한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2003년 7월 13일, 골드컵 멕시코전을 통하여 A매치에 데뷔하였고, 2005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독일 조별리그에서 A매치 데뷔골을 넣었다.

이후 계속해서 대표팀에 발탁되며 2006 FIFA 월드컵 독일2007 코파 아메리카 베네수엘라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2006년 월드컵에서는 득점은 커녕 카카, 호나우지뉴 등 초호화 공격진 멤버들에 밀려 벤치만 달구고 있었고, 브라질은 8강에서 노장 플레이메이커 지네딘 지단이 이끌던 프랑스에게 무릎을 꿇으며 8강에서 탈락했다.

2007 코파 아메리카에서 6골을 기록하며 득점왕과 MVP를 수상했고, 브라질 역시 우승했다.[12] 당시 브라질은 카카호나우지뉴가 휴식을 이유로 대회 참가를 고사했고, 제 호베르투까지 국가대표 은퇴 선언을 하면서 전력 공백이 있었던 데 반해 아르헨티나는 풀 전력으로 나와서 브라질의 우승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호비뉴는 좌측 프리 롤을 맡았는데, 카카와 호나우지뉴가 없었던 게 오히려 호재로 작용했다. 카카, 호나우지뉴, 호비뉴 모두 왼쪽에서 중앙으로 들어가는 플레이를 즐겨 하는 선수들이고 셋을 한꺼번에 경기에 내보내면 동선이 겹쳐서 역효과가 나는 문제점이 있었다.[13]

개막전에서 멕시코에게 0-2로 완패한 브라질이었지만 호비뉴는 칠레와의 2차전에서 해트트릭을 몰아쳤고, 에콰도르와의 3차전에서도 PK로 결승골을 터뜨리며 브라질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브라질이 조별리그에서 기록한 4골이 모두 호비뉴의 발끝에서 나왔다. 칠레를 다시 만난 8강전에서도 호비뉴는 2골을 추가했다. 우루과이와의 준결승전과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에서는 득점하지 못했으나 상대 수비진의 집중 견제를 받으며 동료 공격수들을 서포트했다.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후 국대 소집이 뜸하면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도 출전을 못 하며 잊혀졌다가 2016년에서 보인 리그에서의 좋은 활약에 힘입어 2017년 다시 국대에 발탁,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그의 생일인 2017년 1월 25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브라질과 콜롬비아의 샤페코엔시 추모 경기가 그의 100번째 A매치가 되었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은 A매치 주간이 아니었던 날에 경기가 열렸던 탓에 해외파 소집이 어려워 국내파 위주로 팀을 구성하였고, 호비뉴도 소집되었다.

비록 자기관리도 전혀 안 되었고, 사고도 많이 치고, 기복도 심해서 대성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아드리아누 이후로 이름값에 못미치는 스트라이커만 있던 브라질 공격진에서 한줄기 빛과 소금이 되어 주었으며 브라질에 단 일곱 명밖에 없는 센추리 클럽 가입자가 되었다.[14]

2017년 이후 아예 소집이 안되고 있어 자연스럽게 은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4. 기록[편집]



4.1. 대회 기록[편집]










4.2. 개인 수상[편집]




5. 플레이 스타일[편집]



5.1. 장점[편집]


부드러운 터치에 기반한 화려한 드리블이 호비뉴의 가장 큰 장점이다. 화려함만 놓고 보면 국대후배인 네이마르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특히 스텝 오버의 숙련도가 매우 뛰어났는데, 부드럽게 구사하는 스텝 오버가 그의 시그니쳐였다.[15] 헛다리 짚기라고도 불리는 기술인 스텝 오버는 웬만한 축구 선수라면 한 번쯤은 사용하는 흔한 개인기이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했던 선수는 드물다. 호비뉴의 스텝 오버의 특징은 스텝 오버 자체의 기술적 완성도도 뛰어났지만, 스텝 오버 이후 연계되는 후속 개인기의 다양함과 숙련도도 매우 뛰어났다는 점이다. 호비뉴는 스텝 오버 이후 인사이드로 치고 나간다거나, 스텝 오버 이후 드래그 백, 플핍 플랩 등 다른 개인기를 연계해서 사용했다. 이러한 화려한 드리블로 당시 십대 후반의 리오넬 메시와 함께 리그 내 최고의 드리블러로 평가받았다.

컨디션 좋은 날에 보여주는 플레이는 좁은 지역에서 밀집한 수비수들을 화려한 개인기를 사용하며 가볍게 뚫고 나가는데, 정말 눈이 즐겁다. 삼바 축구로 대변됐던 브라질의 화려한 개인기 위주 플레이의 정수를 보여줬던 선수. 이런 스타일의 선수들이 그렇듯이 볼을 질질 끄는 경향이 없던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팀플레이가 떨어지는 선수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수비수들 쏠리게 만들어놓고 침투하는 다른 공격수들에게 패스하는 등 축구지능과 센스도 가지고 있었다.

현역 선수들 중에서는 같은 브라질 국적의 루카스 모라와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평이 많다. 하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이 둘의 플레이스타일은 꽤나 다른 점도 많다. 모우라는 호비뉴처럼 화려한 발재간에 치중한 드리블보다는 기본기에 좀 더 충실한 스타일이며, 스피드도 모우라가 더 빠르다. 모우라는 현 소속 팀에서 윙어로 주로 출전하는데, 호비뉴 또한 윙어 포지션으로 플레이는 가능했으나 본인이 선호하지 않아 레알 마드리드 시절부터 맨시티 시절까지 감독과의 불화가 잦았고 자연히 폼 저하로 이어졌다. 호비뉴가 가장 선호하던 포지션은 주로 투톱에서 약간 처진 중앙 공격수 위치. 그리고 클래스를 떠나, 멘탈은 확실히 사생활도 깨끗하고 감독과의 불화도 잘 일으키지 않는 모우라가 훨씬 좋다.


5.2. 단점[편집]


다만 최전성기 시절에도 월드클래스 기준으로는 득점력이 상당히 떨어졌고, 킥력도 약한 편이었다.

윙어로 뛰기에는 스피드도 느린 편이었다. 스프린터나 스코어러 타입이라기보다는 유려한 드리블로 수비진을 뒤흔든 다음 공간이 생기면 동료 선수에게 패스를 하여 기회를 만드는 타입이다. 실제 패스 센스도 좋은 편.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 등 2000년대 최고의 슈퍼스타들과 네이마르, 루카스 모우라, 간수로 대표됐던 2010년대 초반의 유망주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주었어야 할 호비뉴, 아드리아누, 파투 등이 모두 기대만큼 성장해주지 못하고 멘탈 문제 등의 이유로 나락을 가버리면서 한동안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암흑기가 이어졌다.


6.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6.1. 성폭행 사건[편집]


2009년 리즈의 나이트클럽에서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보석으로 석방된 후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2013년 밀라노에서 알바니아인 여성에게 집단 성폭행에 가담한 혐의로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호비뉴는 변호인을 통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나는 성폭행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고, 혐의에 대해 이미 방어권을 행사했다"며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호비뉴가 친구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얘 지금 꽐라 됐다"라고 말한 내용이 증거로 인정되면서 2017년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허나 브라질과 이탈리아 간에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실제 이탈리아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호비뉴, 성폭행 혐의로 징역 9년 선고 이탈리아 당국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호비뉴에 대한 체포 공조 요청을 했다.

2020년 12월 11일에 원심 그대로 징역 9년이 확정 되었다. # #

이후 2차례 항소했으나 모두 패소하여 결국 2022년, 징역 9년형과 보상금 6만 유로가 최종 확정되었다. # 호비뉴, 징역 9년 확정

브라질인이 타국으로 인도되는 걸 허용하지 않는 브라질 헌법 덕에 감옥살이는 안할 것으로 추정되나 앞으로 그의 유럽 방문은 어려울 듯하다.

이 사건 때문인지 그의 인스타그램 댓글 창은 막혀있다.

전 AC밀란 스타 호비뉴, 3년만에 '복귀 모색'→伊법원 9년형 확정에 '꼼수' 이탈리아 사법 당국은 2023년 2월까지 브라질 당국에 호비뉴를 인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브라질 헌법 5조에 따라 자국민의 해외 인도를 거부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법은 호비뉴가 브라질을 떠나기로 결정하면 법이 집행된다. 브라질 당국은 이탈리아의 요청에 공식적으로 거부를 할 것인지 아니면 호비뉴를 보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호비뉴는 이를 피하기 위해 브라질 산투스를 기반으로 하는 포르투게사 산티스타와 복귀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2월 18일에 이탈리아 정부가 브라질 정부에게 형 집행 요청을 했다. 그리고 형을 집행하는 대로 브라질에서 복역할 것이라고 한다.

3월 8일에 브라질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내렸다. #

그리고 3월 18일에 호비뉴의 변호인이 유죄 판결 절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7. 여담[편집]


  • 별명은 초딩요. 상당한 동안일 뿐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칭찬이나 자신에게 적합한 포지션에 배치하면 맹활약하지만 팀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하거나 자신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주면 부진하는 면이 강하다. 다양한 경우가 생길수 있는 프로의 세계에서는 팀을 위해 희생을 요구 할수 있고 더 뛰어난 실력자가 온다면 자연스레 밀릴수 밖에 없는데 그런 상황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는건 프로로서 낙제점이다.

  •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영입할 수도 있었고 한다. 산투스 유스 시절 브라질에 스카우트하러 갔던 수원 스태프가 당시 16세였던 호비뉴를 보고 영입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가격도 그가 생각하기에는 적절했다. 그러나 윗선에 보고를 하자 겨우 16세를 그 가격에 영입할 수는 없다는 반응이 돌아왔으나 리그가 열려 17세가 된 호비뉴는 전반기에 교체로 뛰더니 후반기에는 산투스에서 풀타임을 뛰었다고 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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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망스어게르만어권의 인명이나 지명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센터 포워드, 세컨드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등의 포지션도 소화할 수 있다.[3]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전 8위.[4] 펠레가 자신의 현역 시절을 바쳤던 산투스를 방문했을 때, 훈련 도중 한 메마른 아이의 엄청난 활약을 보고 잠시 훈련을 중단시킨 그는 "눈물이 다 나오는구나. 널 보니 내 생각이 난다."며 그 아이를 격려했다. 그 아이가 바로 호비뉴였다고 한다.[5] 애초에 호비뉴는 골을 많이 넣는 스타일이 아니다.[6] 라인업만 보면 오른쪽 윙어 자리에 배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윙어를 두지 않은 채 중앙에서 뛰는 호비뉴와 2명의 중앙 공격수로 변칙적인 3톱을 구성했다. 호비뉴는 전 시즌에 카펠로와 불화가 있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카펠로가 자신을 전형적인 윙어로만 쓰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7] 2007년 발롱도르에서 9위를 기록했다. 이것이 최고 발롱도르 순위 기록이다.[8] 첼시의 CEO인 피터 캐넌이 호비뉴의 영입을 공개적으로 자신하는 발언을 하고, 런던에서 뛰고 싶다고 화답하는 호비뉴. # 심지어 첼시 공식 스토어에 호비뉴의 유니폼이 올라와 있는 해프닝까지 벌어질 정도로 당시 호비뉴의 첼시 이적은 단순한 찌라시로 보기 힘든 측면이 많았다. 이적시장 막판에 첼시가 맨시티의 35m보다 더 높은 이적료를 제시했지만 레알은 챔스에서의 부메랑을 우려해서 당시만 하더라도 챔스를 진출하지 못한 맨시티로 이적시켰다.[9] 당시 감독인 마크 휴즈는 호비뉴를 세컨드 스트라이커 자리에 배치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이는 전 시즌 맨시티 공격의 핵심이었던 공격형 미드필더 엘라누가 한 시즌 만에 후보로 내려가는 문제를 낳았다.[10] 마크 휴즈가 경질되면서 새로 부임한 로베르토 만치니가 호비뉴에게 왼쪽 윙어를 맡게 하였고 카펠로와 이 건으로 싸웠던 적이 있던 만큼, 이번에도 호비뉴가 거부하면서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11] 컵대회와 주립 리그까지 포함하면 25골로 당해 최다골이다.[12] 2007년이 호비뉴의 최전성기였다. 06-07 시즌 전반기보다 후반기 활약이 더 좋았고, 리그 우승에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까지 했으며 그 활약이 07-08 시즌 초반까지 이어졌다. 07-08 시즌 후반기에는 아르연 로번과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다.[13] 2006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8강에 그친 건 카카와 호나우지뉴가 공존이 되지 않아서 공격진의 시너지가 나지 않았던 것도 컸고 끝끝내 대표팀에서 둘의 공존은 실현되지 못했다.[14] 호비뉴와 비슷하게 자기관리가 최악이었던 호나우두, 호나우지뉴도 1~2경기 차이로 아깝게 센추리 클럽 가입에 실패했다.[15] 심지어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너무 많은 스텝오버를 했다'는 이유로 경고를 받은 적도 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브라질리언 드리블러.[16] K리그가 이런 식으로 놓친 선수로는 이 외에도 안드리 셰브첸코, 마리오 만주키치, 잭슨 마르티네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