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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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能
638년 2월 27일(정관 12년 2월 8일) ~ 713년 8월 28일(선천 2년 8월 3일)
1. 개론
2. 진실은
2.1. 반론


1. 개론[편집]


중국 선종(禪宗) 불교의 육조(六祖)이다. 혜능의 이야기와 그의 설법을 엮어 책으로 낸 것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이다.

영남의 신주 출신(현재의 중국 광동성)으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以生起心(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했다.

불교에 귀의하기 위해 오조 홍인(五祖 弘忍)이 머무르던 풍무산에 찾아가 절의 행자로서 8개월간 나무꾼 일을 하고 불경을 들으며 생활했다. 홍인은 자신을 받아주길 청하는 혜능에게 "남만인(남쪽 오량캐)이 어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라고 물었고[1], 이에 혜능은 "불성에 남북의 구분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해서 행자로 머물 수 있었다.

하루는 홍인은 의발[2]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게송을 지어오게 했는데 제자 중 가장 깨달음이 깊었던 신수(神秀)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벽에 붙였다.

몸은 보리수[3]

마음은 명경대라[4]

부지런히 털어내어[5]

먼지[6]

일지 않게 하리라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動拂拭

勿使惹塵埃


홍인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신수의 게송대로 수행할 것을 명하면서도, 정작 신수에게는 따로 "문턱에는 이르렀으되 이를 넘지는 못했다."라고 평했다.[7]

이를 본 혜능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그 아래에 붙였다.[8]

보리는 본디 나무가 아니요[9]

명경 또한 대(臺)가 아니다[10]

본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디서 티끌이 일어나리오[11]

菩提本無樹

明鏡亦非台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이를 본 오조 홍인은 다른 제자들이 혜능을 해할까 염려하여 "이 게송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이를 지운 뒤[12], 밤에 그를 불러 의발을 전하니 혜능은 그날 밤으로 절을 떠났다. 다음 날 의발이 혜능에게 넘어갔음을 알게 된 제자들은 격노하여 혜능을 추적했으나 잡을 수 없었다. 이 중 군인 출신의 '혜명'이라는 법명을 가진 한 제자가 거의 혜능을 잡을 뻔했고 혜능은 "의발이 탐난다면 가져가시오"라면서 의발을 두고 도주하였다. 혜명이 의발을 집어들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에 혜명은 혜능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돌아온 혜능은 설법을 해 주었고, 혜명은 감명을 받아 물러났다. 혜명은 훗날 혜능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의 법명을 피휘하여(이름에 같은 '혜'자가 겹치는 것을 피하여) '도명'이라 고쳤다.

도주한 혜능은 세속 사람의 모습으로 은둔하다가 광주의 법성사(法性寺)에 들어갔다. 어느 날 인종 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을 보고 한 승려는 '저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른 승려는 '저것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혜능은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인종 법사는 정체를 물어보았고, 혜능은 자신의 정체를 말하고 의발을 보여주었다. 이에 인종 법사와 다른 승려들은 혜능에게 예를 표하고, 혜능에게 정식으로 비구계를 내리고 삭발하였다. 이 것으로 혜능은 공식적인 육조가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은 이후 신수를 중심으로 한 북종선과 혜능 문하의 종단인 남종선으로 갈리었다.

2. 진실은[편집]


위의 내용들은 한국 불교, 더 나아가 동북아 선 불교계에서 최근까지 주류였던 이야기들이다.

왜 이렇게 표현하는가 하면,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혜능이 선종의 적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황에서 출토된 회창 법난 이전/육조단경 편찬 이전의 선종 문헌 자료들에서는 하나같이 신수를 정통으로 놓고 있다. # 또한 신수 역시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당대에 높은 고승이자 당 황실과 귀족들의 초청을 자주 받아 여러 법회를 열고 화엄학을 기반으로 선종 사상을 발달시킨 인물이다. 현재까지도 선종이 사상적인 부분에서는 화엄종의 영향이 크다는 것만 봐도 신수의 영향을 알 수 있다. 돈오와 점수의 일치 역시 신수가 일찍이 주장했던 것이다. 지금도 신수의 후예격인 능가선법(楞伽禪法) 계열에서는 신수를 6대조로, 그 제자 보적을 7조로 본다.

그런데도 신수가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은 후대의 문제였다.
북종선 자체가 후대로 올수록 점점 입지가 쇠약해지고 신수의 문하의 법맥이 5대밖에 가지 못한 데 반해 남종선파는 크게 득세하였고, 그 시작은 혜능의 제자였던 남종선의 7조 하택 신회가 '남종은 돈오고 북종은 점수다'라고 주장하면서 신수를 폄하하고 달마의 직계제자로 자신의 스승 혜능을 6조로 내세우고 혜능의 업적들을 부풀리고 미화하기 시작한 것. 하택신회가 본래 신수의 제자였고, 10대 때 혜능 밑으로 간 것도 제자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한 신수의 권유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13]
참고로 하택신회는, 안록산의 난 당시 군대에 끌려가기 싫어하는 백성들에게 승려가 되는 도첩(승적)을 대량으로 팔아 그 돈을 당 황실에 바쳐 환심을 사고 정치계 인맥을 넓혔다.

그러나 이후 혜능의 다른 제자인 남악회양 밑에서 나온 마조도일의 홍주종이 당나라 불교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선종의 주류가 된 남종선 자체가 혜능의 또다른 제자들인 남악회양과 청원행사, 그리고 회양의 제자인 석두희천과 청원행사의 제자 마조도일을 시작으로 오가칠종으로 갈라지면서 각자 7조를 내세우면서 자신이 중국 선종의 공인된 7조가 되려던 하택신회의 꿈은 깨진다.[14][15] 이 때문에 지금도 선종의 법맥을 논할 때 육조혜능까지는 공통적이고 일반에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후로는 의견이 분분하고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16]

이러한 추세는 경전을 경시하고, 체계적인 수행 이론보다는 대중성에 치중한 남종선이 압도적으로 세를 불려 북종선을 점차 흡수하고, 남종선에서 후대 선종의 주류를 차지하는 조동종, 임제종 등이 다 남종선에 기반을 두다 보니 자연히 남종선을 띄우고 북종선 계열을 천대하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굳어져 버린 것. 이게 본격적으로 깨어진 것은 현대에 들어 불교학이 발달하고 돈황 문서들이 출토된 이후이다. 신라에도 8세기경 처음 들어온 선종은 북종선 계통이었다.

현대에는 간화선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 북종선이 새로이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나 남종선이 주류가 된 이후 오래 전부터 비판되던 승려들의 막행막식[17] 비판 부분에서도 다시 빛을 보는 추세. 깨달음 자체를 강조하는 남종선이 주류가 된 이후, 선종 승려들의 막행막식 문제에 대한 지적은 상당히 뿌리가 깊다.


2.1. 반론[편집]


현재 북종선의 신수가 재평가받고 있고 또 실제로 그는 당나라 황실과 조정대신들한테서 존경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혜능이 아닌 신수를 정통으로 삼고 있다'라고는 결론 내릴 수 없다.
또한 하택신회가 문제가 많고 또 혜능이 널리 알려진 게 전적으로 하택신회 때문이라는 뉘앙스로 위에서는 서술되어 있는데, 북종선도 재평가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그것보다는 선종이 이후 조동종, 임제종 등 수많은 걸출한 명안종사(明眼宗師)들을 배출한 영향이 크다.
그리고 하택신회가 잘못이면 하택신회를 비판해야지 같은 남종선 계열인 홍주종과 신회를 대립구도로 모는 것은 합당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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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까지 광둥성남월 지방과 문화적 및 민족적으로 동질감이 컸기에 남만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2] 가사와 바리때로, 불교에서 제자에게 정통을 삼기 위해 전하는 것이며 초대 달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전한다. 달마는 2조 혜가에게 6대에 이르러서 의발 전수가 끝날 것이라 예언했다.[3] 사념처 수행 중 신념처를 상징한다.[4] 사념처 중 심념처를 상징한다.[5] 올바른 계행과 정진력이 동반된 수행을 상징한다.[6] 번뇌를 상징한다.[7] 불교 수행에서 몸과 마음을 계행과 정진으로 깨끗이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의 본질을 보다 투철하게 통찰(위빠사나)해내기 위해서이다. 통찰하고 나면 몸에도 마음에도 고정된 자성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신수는 계행과 정진만 언급했을 뿐, 통찰을 마친 후의 결론에 대해서는 딱히 게송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홍인은 이를 간파해내고서 이렇게 평했다.[8] 본인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글을 아는 다른 사람에게 대필시켰다고 한다.[9] 보리수의 어원이 된 '보리(bodhi)'가 본래 불교적 깨달음을 의미한다는 점을 이용한 언어유희이다. 육신에 자성이 없음을 상징한다.[10] 마음에도 고정된 자성이 없음을 상징한다.[11] 몸에도, 마음에도, 수행에도, 번뇌에도 모두 자성이 없어 무언가를 따로 이루고자 집착할 바가 없음을 알았음을 선언하는 게송이다. 이는 반야심경의 요지와도 맥락이 같다.[12] 재밌게도 불교적으로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13] 사실 깊이 파고 들어가면 달마 항목에 나오듯이 선종 자체가 실증적인 정통성 면에서는 아무런 정통성이 없다.[14] 일단 당나라 조정에서는 당나라 덕종이 선종의 7조로 인정하고 신룡사라는 절에 비석과 예찬문을 만들어 놓으면서 인정하긴 했다.[15] 여담으로 규봉종밀의 경우 홍주종이 직계가 아니라 주장했지만 이 사람은 중국 화엄종의 5조면서 동시에 자신이 하택신회의 하택종의 적통을 이었다고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 대에서 법계가 끊어지면서 중국 화엄종의 맥이 단절되고 만다.[16] 참조 기사:하택신회 선사 ‘공인’…홍주종 득세로 잊혀.[17] 莫行莫食. 선종 승려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