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 공방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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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자
2. 누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했나?
2.1. 유비
2.2. 손권
3. 그 외 논란거리
3.1. 형주 정벌에 누가 더 큰 공헌을 했는가?
3.1.1. 손권군의 교전 기록
3.1.2. 유비 세력의 영향력
3.2. 손오 정권의 대전략은 무엇인가?
3.3. 국경선 연장으로 인한 방비 문제
3.3.1. 장강 방어선 관련 반론
3.4. 회남과 강릉의 비교
3.4.1. 회남의 중요성?
3.4.1.1. 반론
3.4.2. 회남은 비어있었는가?
3.4.2.1. 반론
3.4.3. 손권의 관심사는 회남 지역이었을까?
3.5. 서주 논란
3.5.1. 반론
3.6. 1강 2약
3.6.1. 반론
3.7. 왜 번성 공방전이 중요했나?
3.8. 명분과 세력비율
3.9. 외교 문제
3.10. 조조의 형주만이 상업이 발달했고 풍요로운 것이다?
3.11. 형주 관리
3.11.1. 반론
3.12. 관우에게 형주를 맡긴 것은 최선이었나?
3.13. 관우의 죽음
3.14. 과연 관우의 독단으로 북진을 했는가?
3.15. 타이밍
3.16. 관우에게 혼인을 제의한 것이 그릇된 행동인가?
3.17. 관우가 혼인을 받아들였다면 손권이 뒤치기를 할 일은 없었다?
3.18. 미방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3.18.1. 반론
3.19. 형주의 상실로 촉한천하통일은 좌절되었나?
3.19.1. 반론
3.20. 형주소유와 북벌을 누가 더 잘 했는가의 문제


1. 역사학자[편집]


팬덤사이에서는 최고의 장작인만큼 역사학자들의 썰도 이래저래 갈린다. 일단 진수의 경우엔 보통 억울하게 죽었을 경우 애석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인데(대표적인 예가 군주에게 밉보여서 죽은 문관들) 관우의 경우는 관장마황조전 평에서 오히려 패망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또 여몽에 대한 평도 여몽전에서 그저 그의 전술을 높게 평가한 것이 전부였다. 또한 오나라 위소가 작사한 관배덕(關背德) 통형주(通荊州)에서 오나라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 당연히 관우가 먼저 잘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홍무제도 이때의 일을 말하며 걍 관우가 멍청해서 당했을 뿐이라며 디스.

후출사표에서는 제갈량이 오나라가 먼저 맹약을 어겼다고 하고 있으나 위작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출사표 문서 참고.

호삼성은 육손이 여몽에게 관우를 공격하자고 제의한 것을 가지고

영웅들이 보는 것이 대략 같으니 여몽이 그 뜻이 깊다는 것을 안 이유다.

라며 여몽과 육손을 영웅으로 보고 관우를 공격하자고 한 뜻이 서로 같다고 평가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오나라에 부정적인 평을 내린 다른 역사학자들의 얘기도 들어보자, 우선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평을 보면

만일 손권의 형인 손책이었다면 오히려 이 기회를 타고 중원에 진출하여 위의 세력을 뒤흔드는 결전을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권은 바로 형이 관찰한 대로 창업주가 아니라 수성의 인물이었다.

그는 형주의 거의 전역을 장악하여 양자강 중.하류를 영토로 하였기 때문에 안정성은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방정권이 퇴보정책을 취하면 그 다음에는 멸망이 기다릴 뿐이다.


삼국지집해에도 촉서에는 내용이 실려있으나 관우가 저럴 줄 몰랐냐? 다른 애들은 관우 잡으려고 여러명 동원했구만 왜 관우 혼자 싸우게했냐?[1] 촉에서 대비가 소홀한게 아니라면 진수가 자세히 몰랐던거 아니냐? 같은 내용이 대부분. 단, 익양대치에 대해서는 통감집람을 언급하며 유비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왕무횡, 이안계의 경우는 영웅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칭찬한 호삼성과는 반대로 조조가 바로 공격했다면 강동이 무너졌을 것이라며 여몽의 계책을 비판했다. 이안계는 노숙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라고 한 건 단점이 아니며 만약 두 영웅이 서로 다투었다면 조조만 이로웠을 것이라고 했다. 왕무횡은 애시당초 남군을 유비에게 빌려줬으니, 정보는 남군을 지킬 수 없다고 근심했고 조조가 오직 유비만을 꺼리는 것은 천하가 모두 아는 바였기에 그의 힘을 빌려 조조를 막고자 한 것이라며 여몽의 형주공격은 공이 아니고, 강동의 패업을 무너지게 할 뻔한 짓이라고 까지 평가했다. 또 조조와 맞서려한 주유와 노숙을 이후를 생각하지 않은 여몽에 견줄 바는 아니다라고 했고 형주를 얻은 이후 오가 계속 위에 굴복했는데 촉과 계속 동맹했다면 이랬겠느냐 비판했다. 한모려는 여몽이 먼저 손유 동맹을 깼다고 보고 먼 근심을 걱정하지 않고 가까운 이익을 달게 여겨 공을 탐내다 어둠을 불러들여, 나라를 그르치게 함이 적지 않다고 했다.

하작의 경우에는 노숙이 있을 때는 조조가 정정했기에 같이 조조를 방비해야했으나 나중에는 조조가 늙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상류를 취했어야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노숙이 10여 년만 더 살아 있었더라도 촉오 동맹은 굳건했을 것이고 한실은 충분히 흥할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동양사 스토리텔링의 일인자로 불리는 재미 중국역사학자인 리둥팡은 손권의 선택이 틀렸다고 평가하고 노숙만이 제대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호주의 역사학자 Rafe De Crespigny는 '부도덕적이지만 똑같이 부도덕적인 상대들에게 거둔 눈부신 전적'라고 평했다.

In many respects he was now back on the path of policy which his former adviser Lu Su had recommended. In the intervening period, however, he had seized all of Jing province, humiliated Liu Bei, and out-manoeuvred both Cao Cao and Cao Pi. Honesty and good faith had been in short supply, but it was nonetheless a brilliant record against equally tough and unscrupulous oppo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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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fe De Crespigny


한편 촉나라의 인물인 요립의 평이 주목할 만하다.

군대는 원정을 나서려고 하는데, 당신들은 이 일을 주의 깊게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 유비는 한중을 손에 넣지 못하고 오나라로 달려가 그 나라 사람들과 남쪽의 세군을 다투었는데 결국 세군은 오나라 사람에게 주게 되었고, 헛되어 관리와 병사들을 수고롭게 하였을 뿐 이익 없이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중략)

후에 한중으로 진군하여 관후는 죽고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었으며, 상용(上庸)은 패배하여 헛되어 한쪽 지방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관우가 자신의 용맹함과 명성에 기대어 병사를 인솔하는 정확한 법칙이 없었으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돌발적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앞뒤로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병사들을 잃게 된 것입니다.

관우도 상랑(向朗)과 문공(文恭)처럼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문공은 치중(治中)이 되었지만 기강이 없었고, 상랑은 이전에 마량 형제를 숭상하여 그들을 성인이라고 하였으므로 현재 장사(長史)가 되어서도 항상 도에 부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삼국지』「요립전」


그러나 삼국지 요립전에 있는 제갈량의 탄핵문을 보면 평소에 터무니없이 과장된 비판을 하는 인간이다.

장수교위 요립은 자신을 존대하고, 선비들을 평가하며 국가에서는 현명하고 달통한 인물을 임용하지 않고 평범한 속된 사람을 임명하였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며, 또 만인을 인솔하는 자는 모두 소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황제를 비방하고 여러 신하들을 헐뜯고 명예를 훼손시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국가의 병사들은 훈련을 통해 정예가 되었으며 대오는 조직화되고 군령을 준수한다고 말하자, 요립은 머리를 들고 지붕 끝을 보며 분연히 안색을 바꾸어 말하기를, '무슨 말할 가치가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양이 무리를 어지럽히면 해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요립은 높은 지위에 기대고 있으니, 보통 사람 이하는 그의 진위를 식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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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요립전」재갈량의 평가



2. 누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했나?[편집]


역시나 조익의 의견에 따라 이 부분에 있어서 오서는 조작됐고 후의 기록들은 그 조작된 기록을 보고 쓴 잘못된 내용이라 여겨 무시하면 걍 오나라의 잘못으로 끝나는 문제이니 따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시간대 별로는 이미 위에서 설명했으니 그것을 이제는 세력별로 나눠서 기술합니다.


형주 문제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유비와 손권의 목표 의식과 세력 운영의 경향성의 차이에서 오는 '동상이몽'이 갈등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2.1. 유비[편집]


  • 유비가 관우에게 형주를 전적으로 일임하고 오나라와 분쟁을 해도 내버려둔 것.

물론 유비 역시 입촉 이후에 익양대치, 한중공방전, 익주 정벌 후 혼란했던 익주의 내정정리로 매우 바쁜 상황이었기에 일일이 모든곳에 신경 쓸 상황은 아니었다. 당장 215년 이후 219년 한중공방전의 완료까지 한중-익주 경계에선 지속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반면 오나라 전선에선 여몽이 속은 형주병탄을 원했지만 겉으로나마 일부러 친분을 다지는 척을 하고 있었던 겉으로만 보면 평화로운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익양대치 당시 너무나 손쉽게 3군을 손권에게 넘겨줬을 때, 유비가 직접 공안까지 왔었기에 마음만 먹었으면 충분히 교체할 수 있던 상황이다.

  • 관우가 손권의 결혼 요구에 사자를 모욕하며 거부한 것.

개인 간이라도 결례인 판에 세력 간의 외교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다만 관우도 여기에 대해서는 명백히 할 말이 있는데 우선 이 사건 전, 손부인이 유비가 없는 틈을 타서 유선을 납치하여 오로 도망치려했던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유선은 구해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유비 측과 손권 측 사이에 결혼에 관한 문제로는 감정이 상할대로 상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또 다시 자기 딸을 시집보내라는 말은 관우의 입장에서는 좋게 보일 소지가 없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밑에 손권 측 잘못에서도 설명하지만 서로 상부상조했고 유비군도 열심히 싸워서 형남4군을 얻었는데도 마치 손권이 유비를 불쌍히 여겨 도와준 것마냥 행세하고 형주 전체를 빌려준 것처럼 행세하는 등등 지속적으로 유비 측의 어그로를 끌었다. 익양대치에서 막말 안 한 게 다행일 정도. 또한 이런 일은 수장인 유비에게 먼저 말하는게 당연하다는걸 생각하면 관우입장에서는 유비와 자신을 이간질시키려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 관우가 손권을 담비 새끼(담비는 강동 지역의 인물들을 비하해서 부르는데 사용되던 말로 지역차별/인종차별[2]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라며 모욕하고서는 다음은 너네를 정복하겠다며 엄포를 놓아 전선을 이중으로 만든 것.

단, 이것은 전략의 기록으로 아래에서도 나오지만 배송지는 이 기록을 비롯해 관우가 오나라가 지원을 요청했다는 기록들 자체를 믿기 힘들다고 한다. 애당초 손권을 경계하던 관우가 손권에게 전력을 요청한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오히려 그러면 동맹군이라는 명목으로 형주에 들어와 손 쉽게 형주를 접수할 수 있는데 여몽은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관우의 방어선을 어떻게 뚫어야 하나 고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치통감의 편저자들도 이에 공감했는지, 아니면 자료가 더 있었는지 관우가 손권측을 상대로 도발적인 언사를 했다는 얘기는 결혼 요청 거부시도 밖에 기록하지 않았다. 단 이와는 별개로 당시 오나라 인사들의 발언을 보면, 오나라에서는 유비는 몰라도 관우에 대한 위협론이 적지 않게 대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 입장에서는 오히려 오나라 측에서 촉한 측 형주를 위협하고 있는 마당에 적반하장으로 느꼈겠지만 말이다.

  • 관우가 군량이 부족하다며 상수 경계 상관에서 식량을 마음대로 가져간 것.

  • 오나라의 익주 침공을 막은 것.

특히 이 부분은 다만 겉으로는 유장의 동맹임을 천명하며 손권에게는 친족이 다스리는 익주를 칠 수 없으며 그럴 바에야 산에 들어간다는 말을 해놓고 본인이 꿀꺽한 것이 문제다. 난세에 잘못된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손권은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 관우와 미방의 갈등을 해결하려 하지 않은 것.

아래사람을 많이 관찰했던 유비의 특성상 관우와 미방의 불화나 이상조짐을 느꼈더라면 미리 인사조치를 해두는 게 나았을 것이다. 물론 공신이 배신하리란 건 알기 힘든 일이지만, 미방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된다. 물론 익주와 형주 사이에 거리가 있어 유비가 두 사람과의 불화를 알고 일일이 참견하기에는 무리였긴 했지만 말이다.

위 실수들을 보면 잘잘못을 떠나 관우가 손권을 동맹으로도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손부인의 횡포가 극심하다고 제갈량이 불만을 토로했다는 기록이나 유선을 납치하려다 장비가 이끈 군사들과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을 보면 유비 진영 전체에 손권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비 역시 조조에 대해선 상당히 철두철미하게 행동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되게 손권에 대해선 경시하고 관우에게 일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손권은 유비보다 훨씬 어린 데다, 유비 스스로가 손권에 대해서 자기가 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산양공재기에 있고 오가 육상전에서 약한 것을 직접 보았기에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치한 익양대치로 양측 간 갈등이 끝났으니 손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한중전의 승리로 기세가 오르기도 했고. 하지만 오는 생각보다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결국 유비의 방심은 천하삼분지계를 틀어지게 만든 큰 원인 중 하나가 된다.


2.2. 손권[편집]


  • 적벽에서 분명 동등한 동맹군의 입장으로 싸웠음에도 유비를 자신의 장기말 및 방패막이로 이용하려 한 것. 주유는 미수에 그쳤지만 여기에 더해 유비를 타락시키고 유비세력을 흡수하려 했다. 적벽대전 첫 대면부터가 주유 쪽이 그렇게 좋게 나간 것도 아니었고 주유가 자기 붙잡아두고 견제하려는 걸 이미 제갈량의 파악으로 유비도 뻔히 다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는 대놓고 주유가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냐는 발언을 손권에게 함으로서 주유를 견제하였으며 손권과의 면담 이후 나는 손권의 밑 사람이 아니라고 유비가 대놓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포했다는 일화나, 주유 밑에서 일했던 방통에게 손권 세력의 2인자인 주유의 이 책략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이것은 제갈량도 예측한 바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며 나는 쟤들이 내가 필요할거라 생각해서 서로간 협상을 위해 갔는데 쟤들은 나를 곤경에 몰아넣으려 수작질을 벌인다고 유비가 말하는 걸 보면 유비는 거의 이때부터 손권이 제대로 된 동맹이라는 대한 신뢰를 거두고 언제든 손권이 마음만 먹으면 나를 이용하거나 뒷통수 쳐서 종속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손권이 주유의 청을 거절하긴 했지만 대놓고 손권 세력의 2인자 및 다른 이들도 유비의 종속화를 제안했다는 점은 유비에게 시사하는 부분이 매우 컸을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유비가 손권에게 가진 불신의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유비 항목 5의 익주를 공략하는 것을 거절하며 막았다는 부분도 이를 보면 다시 볼 수 있는데 실제 다른 이들은 동맹인 손권과 같이 촉을 공략해 보자고 제안했지만 손권이 촉을 친다는 핑계로 우리를 방패막이로 내세우거나 딴 맘 먹고 형주 먹으면 큰일이니까 들을 필요가 없다는 은관의 주장이 나오자 유비는 이를 재깍 수용했다. 이를 보면 주유의 사건으로 인해 유비는 손권 세력을 거의 제대로 된 믿을 수 있는 동맹으로 진심으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손권이 익주를 취하려다 유비의 제지로 그만 둔 것은 손권이 유비를 존중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유비가 용납하지 않는 상황에서 유비의 세력권을 배후에 두고 촉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유비가 적극적으로 이를 막으려 들지 않았다면 유비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형주로 들어가려 했던 점에서 짐작 할 수 있다. 유비가 처음에는 말로 좋게좋게 반대함에도 손권군은 억지로 유비의 의사를 무시하고 형주로 진입하려 했는데 손권이 유비의 의사를 존중했다면 동맹이 이렇게 말하니 적당히 물러나야지 생각하는게 맞지 이렇게 나올 수는 없는게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주유의 계책을 거부한 것도 손권이 유비를 존중했기에 주유의 의견을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은 유비를 이용해야 한다 생각했기에 그런 것이 맞다. 실제로 손권이 노숙의 말을 들은 이유도 유비를 배려해서가 아니다. 형주 인심이 우리를 따르지 않고 유비를 따르고 있으니 조조 상대로 유비를 우리의 방패막이로 삼자 이게 목적이었다.

  • 이런 동맹에 대한 불신은 손부인의 역할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권은 무장병사와 관리들을 손부인이 가지고 다니게 했고 침소에서도 이들을 대동해 유비를 위협하며 두려워하게 했으며 주둔지 옆에 오나라 관리와 병사가 아예 따로 성을 짓고 주둔하며 감시하는 상황을 만들고, 결정적으로 그녀를 시켜 유비가 없을 때 유선을 납치하게 했다.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다. 손권은 말이 결혼동맹이지 실제로는 손부인을 자신의 대리인으로써 유비의 감시역으로 붙여놓은 것이며 유비 세력을 여차할때 자신이 핍박할 수 있도록 제어 장치를 만들었던 셈으로 실제로 유선 납치시도를 통해 이것을 사실로 드러내었다. 유비가 세력이 크지 않아서 참은 거지 동맹 수장을 핍박하고 세력 내부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수장의 후계자를 납치하려 한다는 것은 사실상 상대 세력을 제대로 된 동맹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며 언제든지 동맹을 핍박하기 위해서 작정할 계획을 짜놓고 있다는 것을 동맹 세력에게 대놓고 드러낸 것이므로 전쟁의 사유로 충분한 사안이다. 유비에게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급인 사건으로 손권 항목의 1을 거의 확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이에 대해서 유비 측의 대오 온건파인 제갈량마저 대놓고 우리 주공을 손부인이 핍박하려 든다며 불만을 품었을 정도로 손권의 사주를 받은 손부인의 전횡은 상당히 심각했다.

  • 관우를 도와주기로 하고 안 도와준 것. 단, 이것은 전략의 기록으로 배송지는 여몽이 형주로 들어갈 때 몰래 들어갔는데 구원 요청을 받았다면 몰래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며 전략의 기록에 의문을 표한다.

다만 손권이 담비 새끼라는 지역 차별 발언을 듣고도 본인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관우가 참 순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난세에 배신이든 약속 위반이든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유비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것이 성공하면 좋은 판단인 것이고 실패하면 나쁜 판단인 것이다.

  • 빌려준 것은 남군이지만 형주 전체를 빌려준 거마냥 행동하면서 파촉을 정복한 유비가 형주를 안 돌려준다고 유비가 자력으로 점령했던 지역을 힘으로 뺏은 것.

다만 이 경우는 손권이 적벽에서 조조에 대항함으로서 원래 좋게 지내던 조조와 사이가 틀어졌지만, 정작 얻은 이득이 없다는 점에서 동맹인 유비가 익주를 얻었으니 우리에게도 보상을 달라는 식으로 보면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형남의 규모가 크긴 하지만 남군을 얻은 것은 주유이며, 남군을 얻지 못했다면 적벽은 조조의 침공을 막아낸 것, 그 외에 가지는 의미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조조의 수군이 대파되었지만 언제든지 강릉과 한수에서 재건해서 쳐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형남 4군 통제를 위해서 남군은 필수적이며, 익주의 유비와 양주의 손권이 형주를 갈라 먹는 것은 장기적으로 힘든 일이다. 유비에게 남군이 없다면 형남 4군은 사실상 월경지가 되며, 손권에게 형남 4군이 없다면 남군은 조조와 전선만 늘어나고 형남의 인구는 얻지 못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군과 형남 4군은 한 덩어리로 묶일 수밖에 없으며 적벽과 남군에서 조조를 몰아내는데 주 역할을 한 손권과 형남 4군을 자력으로 얻은 유비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형주 전체를 탐했다고 마냥 손권을 욕할 수도, 형주를 돌려주지 않았다고 마냥 유비를 욕할 수도 없는 일이다.


3. 그 외 논란거리[편집]



3.1. 형주 정벌에 누가 더 큰 공헌을 했는가?[편집]


예주(豫州-유비)의 군이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했으나 지금 돌아온 전사(戰士-병사)와 관우의 수군(水軍)이 정갑(精甲-정병) 만 명이고, 유기(劉琦)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삼국지』「제갈량전」#


흔히 제갈량의 이 발언을 근거로 유비가 적벽대전 당시 2만명의 군사를 동원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2만의 병사는 어디까지나 호왈일 뿐이다. 저 대화 당시에는 손권도 10만 군사를 동원할 수 있다고 얘기했으나 실제로 동원한 병력은 그보다 적었다. 저 발언만으로 손권과 유비가 3만:2만으로 비슷한 군사를 동원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그대의 말이 옳지 않소. 본시 장판에서 예주(豫州 유비)를 살펴보았을 때, 예주의 군세는 일교(一校 한 부대)를 이룰 만한 병력에도 차지 않았고, 계략과 사려는 이미 다하였으며 전의도 기세도 모두 무너진 상태로, 멀리서부터 도망쳐 숨고자 생각할 뿐으로, 도저히 그것(위군을 격파하여 형주를 손에 넣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소.

『삼국지』「노숙전」 주석, 「오서」에서 인용 #


오히려 노숙은 장판에서 본 유비의 군사는 한 부대를 이루지도 못할 정도의 규모였다고 말한다. 이 역시 익양대치 당시 관우에게 한 말이므로 과장이 섞여있을 수 있지만, 제갈량의 말대로 1만 명이나 되기에는 무리라고 볼 수 있다.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공은 정기(精騎-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長阪)에 이르렀다.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공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선주는 한진(漢津)을 비껴 달려가다 관우의 배를 만나 면수(沔水-한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자(長子)인 강하(江夏)태수 유기(劉琦)의 군사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夏口-한수가 장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선주가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결친했다.

(중략)

손권은 주유(周瑜), 정보(程普)등 수군(水軍) 수만을 보내 선주와 힘을 합해, (주24) 조공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그 주선(舟船-배)을 불태웠다.

(중략)

유비가 물었다,

“지금 조공을 막으려면 치밀하게 계책을 세워야 할 것이오. 전졸(戰卒-병졸)들은 얼마나 있소?”

주유가 말했다,

“3만 명입니다.”

유비가 말했다,

“적은 것이 애석하오.”

주유가 말했다,

“이 정도면 부리기에 충분합니다. 예주(豫州)께서는 저 주유가 적을 격파하는 것을 보기나 하십시오.”

(중략)

유비는 비록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유를 남다르게 여겼으나 내심 반드시 북군(北軍-조조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서로 어긋나게 뒤에 남아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進退)의 계책으로 삼았다. - 「강표전」

(중략)

주유가 남군(南郡)태수가 되자 (장강) 남쪽 기슭의 땅을 갈라 유비에게 주었다. 유비는 따로 유강구(油江口)에 영채를 세우고 그 이름을 공안(公安)으로 고쳤다. 북군(北軍-조조군)에 복종한 유표의 관원, 병사 중 다수가 배반하고 유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유비는 주유가 나누어 준 땅이 작아 백성들을 안돈하기에 부족하다 하여 다시 손권에게서 형주의 몇 개 군(郡)을 빌렸다. - 「강표전」

선주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또한 남쪽으로 4군(四郡)을 정벌했다. 무릉(武陵)태수 김선(金旋), 장사(長沙)태수 한현(韓玄), 계양(桂陽)태수 조범(趙範), 영릉(零陵)태수 유도(劉度)가 모두 항복했다.

『삼국지』 「선주전」 #


유표가 죽고 조공이 형주(荊州)를 평정하니, 선주는 번(樊)으로부터 장차 남쪽으로 가 장강을 건너려 하며, 따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타고 가게 해 강릉(劉表)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공이 추격하여 당양(當陽) 장판(長阪)에 이르렀고, 선주는 한진(漢津)으로 비스듬히 나아가다 때마침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구(夏口)에 도착했다.

(중략)

손권이 군대를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았고 조공이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封拜)하니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삼국지』 「관우전」 #


이 날, 깃발을 세워 무리를 모으니 갑사 1만여 인, 말 1천여 필, 배 3천 소를 얻었다. 단계의 죽목을 꺼내와 함선을 꾸미고 띠로 기우니 일이 갖추어졌다. 제장들이 노를 다투니 여승진이 먼저 준비한 것을 꺼내와 배마다 2장씩 주니 다투던 자들이 쉬었다.

『자치통감』


자치통감의 기사는 양무제 소연의 거병 시점이다. 양무제와 삼국시대 사이에 수군의 구성이 크게 달라졌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1척 당 병사의 수는 비슷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배 3천 소에 병사 1만명이다. 비슷한 비율로 어림잡아 보면 많게 잡아 900척이라 했을 때 3천명, 적게 잡아 100척이라 했을 때 340여 명이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1만명에는 턱도 없다.


유표가 죽고 조공이 형주(荊州)로 들어오자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으로 달아났다. (※ 208년의 일) 조공이 하루 낮, 하루 밤을 추격하여 당양(當陽-형주 남군 당양현) 장판(長阪)에 이르렀다. 선주는 조공이 갑작스럽게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처자식을 버린 채 달아났고, 장비로 하여금 20기(騎)를 이끌고 뒤를 끊도록 했다. 장비는 물가에 의지한 채 다리를 끊고는 눈을 부릅뜨고 모(矛)를 비껴 잡으며 외쳤다,

"내가 장익덕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가름하자!"

감히 접근하는 적군이 아무도 없었고 이 때문에 마침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선주가 강남을 평정한 뒤 장비를 의도태수(宜都太守)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임명하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했고, 그 뒤 남군(南郡)(태수)로 전임시켰다.

『삼국지』 「장비전」 #


손권이 크게 기뻐하며 주유(周瑜), 정보(程普), 노숙(魯肅) 등 수군 3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에게로 나아가 힘을 합해 조공에 맞서게 했다.

조공은 적벽(赤壁)에서 패하자 군을 이끌고 업(鄴)으로 돌아갔다. 선주는 마침내 강남(江南-장강 남쪽)을 거두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賦稅)를 거두어 군실(軍實-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삼국지』「제갈량전」


반면 손권군의 규모는 수만이라고 묘사되며 오주전, 주유전에서는 3만이라고 언급된다.

Rafe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비는 하구에서 50km 정도 하류인 번구로 이동해서 유기와 합류한다. 제갈량의 과장이 섞였을 가능성이 높은 발언에 따르면 유비가 만 명, 유기가 만 명을 이끌고 있다 했으니 그래도 꽤 많은 숫자를 이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들의 군사 질과 사기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한수에 있던 수군은 관우가 이끌고 왔지만 그에 비해 훨씬 컸을 가능성이 높은 강릉에 있던 양쯔강의 수군은 조조에 손아귀에 들어갔다. 따라서 유비와 유기가 이끌던 연합병력이 조조의 군세를 상대로 버틸 가능성은 0%에 가까웠고 믿을 수 있는 기록인지는 의문이지만 유비의 경우 수평선을 바라보며 손권군의 도달을 하염없이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중략)

화공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든, 이 충격으로 인해 조조군이 흔들릴 때, 주유는 때를 놓치지 않고 경무장 병력으로 조조를 쳤고, 이로써 조조군은 완전한 혼란에 빠져 조조는 퇴각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에 대해서는 화용도에서 병들고 약한 자들이 짓밟혀 죽었다는 얘기나, 조조군이 배를 적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불을 질러 자침시켜야 했다는 애기가 전해진다. 물론 이 이야기가 사실일 수 있지만 상당수의 형주군 들은 배와 무기를 가지고 상대방에 항복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조조는 원정 계획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지만 강릉에 상당수의 병력을 남겨놨으며, 원래 유표의 수도인 양양에도 또 다른 병력을 남겨두었다.

다만 역사와 연의를 비롯한 전래극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역사에서는 주공헌자가 주유와 정보가 지휘한 손권군이며, 치명타는 황개의 화공선이 날렸다는 점과, 조조 진영을 휩쓴 전염병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기록은 주유와 그곳에 달린 배송지의 주석에서 확인되며, 삼국지 위서에서는 아주 약간의 정보만이, 촉서에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많은 정도만 확인될 뿐이다.

오서 주유전에 실린 강표전에는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병 때문에 스스로 배를 불태우고 퇴각했을 뿐인데 주유가 명성을 얻었다고 불만을 표하고 있다. 이게 강표전에서 말한 것처럼 주유를 깎아내리려는 시도일 수도 있으나 이런 편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당시 주유가 적벽에서의 공으로 막대한 명성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산양공재기의 경우 초기기록 중에는 특이하게도 유비에게 적벽의 주된 공적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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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손권군의 교전 기록[편집]


이때 유비는 조조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생각하였는데, 당양(當陽)에서 노숙과 만나 함께 상의하고 계획하여 나아가 하구(夏口)에 주둔하고는 제갈량을 파견하여 손권을 알현토록 했다. 손권은 곧 주유와 정보 등을 파견하여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두 군대는 적벽(赤壁)에서 만났다.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이미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처음 한 차례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주둔했다. 주유 등은 남쪽 해안가(南岸)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黃蓋)가 말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불리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군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

또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 함께 전진했다. 조조군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 군사를 돌려 남군(南郡)을 지켰다.

영웅기(英雄記)에 말하기를 “조조(曹操)가 진군(進軍)하여 강(江) 위쪽에 이르러 적벽(赤璧)을 따라 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가 없어 대나무 뗏목[竹排]을 만들게 하여 부곡(部曲)들로 하여금 그것에 타게 하였다. 한수(漢水)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와 큰 강으로 나왔고 포구(浦口)에 (뗏목을) 대어 놓고 아직 건너가지 아니하였다. 주유(周瑜)는 또 밤에 몰래 경선(輕船-날랜 배)과 주가(走舸-노를 젓는 큰 배) 100척으로 하여금 (조조군의) 뗏목을 불 지르게 하니 조조는 이에 밤을 틈타 달아났다.” 하였다. - 태평어람 권771

영웅기(英雄記)에 말하기를 “주유가 강하(江夏)에 주둔하였는데, 조조(曹操)는 적벽(赤璧)을 따라 강남(江南)으로 건너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가 없어 대나무 뗏목[氵+箄]을 타고 한수(漢水)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와 포구(浦口)에 이르렀으나 아직 건너가지 아니하였다. 주유(周瑜)가 밤에 몰래 경선(輕船-날랜 배)과 주가(走舸-노를 젓는 큰 배) 100여척으로 하여금 배마다 50명을 두어 노를 젓게 하고 사람마다 횃불을 들게 하여, 불을 가진 사람 수천 명을 배 위에 세우고 (조조군의) 뗏목으로 모여 들었다. 도착하여 이내 (조조군의 뗏목에) 불을 놓았는데 불이 붙자 배를 돌려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 개의 뗏목에 불이 일어나니 불빛이 하늘을 비추었고, 조조는 이에 밤을 틈타 달아났다.” 하였다. - 태평어람 권868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江陵)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유와 정보는 또 남군으로 진군하여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각군은 대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직 싸움을 하기도 전에(주) 주유는 감녕을 보내 공격하여 포위당했다.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결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이하는 배송지의 주석이다.

오록吳錄에서 이르길 : 유비가 주유에게 이르길 :

“조인이 강릉성을 지키는데, 성 안에 양식이 많아, 괴로운 재앙이 되기에 충분하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夏水)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삼국지』 「주유전」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유에게 2천명을 추가해달라는 유비의 발언이다. 제갈량의 말대로 2만명을 보유하고 있었더라면 고작 2천명을 빌릴 필요가 없다. 유비의 병력은 2천명을 빌리는 것이 유의미할 수준으로 적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해, 또 주유와 노숙 , 정보 등이 서쪽으로 오림(烏林)에서 조공을 격파하고, 남군에서 조인을 포위했다. 익주의 장군 습숙(襲肅)이 군대를 들어 내부(來附)하니, 주유가 표를 올려 습숙의 병사를 여몽에게 더해주라고 했는데, 여몽은 습숙이 담력이 있어 쓸 만하다고 크게 칭하고 또 귀화를 사모해 멀리서 내부해 왔는데 의리상 마땅히 늘려주었으면 늘려주지,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손권이 그 말을 칭찬하며, 습숙의 병사를 돌려주었다.

주유가 감녕을 시켜 이릉(夷陵)을 앞서 점거하게 하자, 조인은 군사를 나눠 감면을 공격하니, 감녕은 곤궁하고 위급해져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병사가 적어 (이 병사를) 족히 (구원하기엔) 나눌 수 없다고 하니, 여몽이 주유와 정보에게 말하길

"능공적(凌公績; 능통凌統의 자가 공적公績입니다.)을 남기고 저와 당신들이 가면, 위급한 포위를 푸는 것은 세력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제가 보장컨대 능통은 능히 10일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라 했다. 또 주유에게 병사 3백인을 나눠 파견해 땔나무로 험한 길을 끊어버리면, 적이 패주할 때 적의 군마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주유가 이 말을 따랐다.

군대가 이릉에 도착하자, 그날로 교전이 벌어졌는데, 죽인 자가 절반이 넘으니, 적이 밤에 도망쳤다. 가다가 땔나무에 막힌 길을 만나니 기병들은 모두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다. 병사들이 추격하여 말 3백 필을 얻었고, 배에 싣고 돌아왔다. 이에 장수와 병사의 형세가 절로 배가 되었고, 이에 강을 건너 둔영을 세우고 적과 서로 공격했다. 조인인 패주하니, 마침내 남군을 점거하고 형주를 위무, 평정하고 돌아왔다.

편장군에 배수되었고, 심양(尋陽)령을 맡았다.

『삼국지』 「여몽전」 #


주유와 더불어 좌우독(左右督)이 되어서, 오림(烏林)에서 조공을 격파하고, 진군하여 남군(南郡)을 공격하여 조인(曹仁)을 패주시켰다.

비장군(裨將軍)에 배수되고 강하태수를 맡아 사이(沙羨)현을 다스리니, 식읍이 4현이었다.

『삼국지』 「정보전」 #


건안(建安) 중엽에, 주유를 따라 적벽(赤壁)에서 조공을 막을 때, 화공(火攻)의 계책을 세웠는데, 이에 관한 말이 『주유전』에 있다.

무봉(武鋒) 중랑장으로 배수되었다.

『삼국지』 「황개전」 #


후에 중랑장으로 주유 등과 함께 조공을 막아 격파하고 또한 여몽과 함께 남군을 습격해 취하니,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하고, 영창(永昌)태수가 되었다.

『삼국지』 「한당전」 #


후에 주유와 정보와 함께 적벽에서 조공을 막고, 남군에서 조인을 공격하였다. 형주가 평정되자, 병사를 거느리고 잠(岑)에 주둔하였다.

『삼국지』 「주태전」 #


이후에 감녕은 주유를 수행해 오림(烏林)에서 조조를 대항하여 무찔렀다. 남군에서는 조인을 공격했지만, 공략시키지는 못했다. 감녕은 먼저 곧장 이릉으로 진군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가서 그 성을 얻었으며, 들어가서는 고수했다.

그 당시 수하에는 수백 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새로 얻어서 1천 명을 채웠다. 조인은 곧 5, 6천 명을 시켜 감녕을 포위하도록 했다. 감녕은 며칠간의 계속된 공격을 받았으며, 적은 높은 누각을 세우고 성 안으로 비가 내리는 듯이 화살을 쏘았다.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오직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담소했다.

사자를 파견하여 주유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써서 장수들을 인솔하여 포위를 풀었다.

『삼국지』 「감녕전」 #


조조가 적벽에 이르자, 여범은 주유 등과 함께 공격하여 무찔렀으므로 비장군으로 임명되고 팽택태수를 겸임했으며, 평택•시상•역양을 봉읍으로 삼았다.

『삼국지』 「여범전」 #


손권군의 여러 장수들이 적벽, 남군에서 조조와 전투에 참가한 기록이 있는 반면 유비군은 교전 기록이 전무하다. 유일한 예외가 후술할 서황전, 이통전에 나오는 관우이지만 패전이다.

또한 만총(滿寵)과 함께 한진(漢津)에서 관우(關羽)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江陵)에서 주유(周瑜)를 쳤다.

『삼국지』 「서황전」 #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이통은 부대를 인솔하여 관우를 공격하고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는데,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삼국지』 「이통전」 #


형주(荊州) 평정에 종군했다. 조인은 행(行)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되어 강릉(江陵)에 남아 주둔하며 오장(吳將) 주유(周瑜)를 막았다. 주유는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고 전봉(前鋒) 수천 명이 처음으로 당도했다.

『삼국지』 「조인전」 #


조인전에서는 남군을 공격한 주장이 주유로 나온다.

공이 적벽(赤壁)에 이르러 유비와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했다. 이때 큰 역병이 돌아 관원과 군사들 중 죽은 이가 많았으므로 이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유비가 마침내 형주(荊州)와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郡)들을 차지했다. [69]

[69] [산양공재기] – 공의 선함(船艦-싸움배)이 유비에 의해 불태워지자 군을 이끌고 화용도(華容道)로부터 걸어서 귀환했는데, 진창을 만나 길이 통하지 않고 또한 하늘에선 큰 바람이 불었다. 지친 군사들까지 모두 풀을 짊어지고 진창을 메우게 하여 말이 지나갈 수 있었다. 지친 군사들 중에 말과 사람에게 밟히고 진창에 빠져 죽은 이가 매우 많았다. 군이 빠져나온 뒤 공이 크게 기뻐했다. 제장들이 묻자 공이 말했다,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 다만 계책을 쓰는 것이 부족하고 늦구나. 만약 일찍이 불을 놓았다면 내가 비견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후 유비가 불을 놓았으나 미치지 못했다.

『삼국지』 「무제기」 #


여러 전들을 종합해 보면 적벽에서 조조를 격퇴한 것은 주유이며 유비군은 조조가 후퇴할 때 전과를 확대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손권군의 장수들이 적벽과 남군에 참전한 것이 확인되는 반면, 유비군은 오직 유비와 관우만이 싸운 기록이 존재하며 장비가 1000명의 군사를 받은 기록이 있을 뿐이다. 종합해 보았을 때, 남군 공략도 주유가 주공이며 유비는 어디까지나 조공에 불과했다.

형남 4군을 유비가 점령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형남 4군을 지키기 위해선 강릉은 필수이다. 강릉이 없다면 조조군은 장강의 수로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형남을 침공할 수 있다. 주유가 강릉을 점령하지 못했다면 적벽대전은 단지 조조군의 침공을 격퇴한 것에 불과하며 형남 4군을 장기적으로 지킬 수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적벽과 남군에서의 승전은 어디까지나 주유의 공헌이 더 크며, 형남 4군 정벌도 '유비가 점령했으니 유비 것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3.1.2. 유비 세력의 영향력[편집]


그러나 유비 세력이 형주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하면 곤란하다. 직접적인 공헌은 적어도 유비 세력은 형주에 영향력이 있어서 군사적인 조력 이외에도 도움이 된다.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도 알 수 있듯이 유비는 유표의 객장으로 있으면서도 가만히 시간이나 때우지 않고 형주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남군은 신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에 유비의 명성이 많이 알려졌을 것이다. 유비가 유종이 항복하고 나서 강릉으로 이동할때 10만의 백성들과 같이 도주한 지역이 강릉과 멀지 않다.

유비 세력이 일부만 주유군에 조력해도 주유군은 유비세력의 영향력을 활용이 가능하다. 비슷한 예시로 조조가 정욱의 권유를 무시하고 객장인 유비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서주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며, 정욱은 비슷하게 유비가 오나라로 도망치자, 손권이 유비를 죽일 것이라 예측하는 사람들과 달리 "유비의 도움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으니 그의 힘을 빌어 자신들을 막으려고 들 것이다" 라고 예측했고 이는 들어맞았다. 저 당시는 유비가 형주에서 격파당하고 오나라로 도망친 시점이었으니 단순 군사력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지언정, 군사 외의 부문에서 유비 세력이 손권 측에게 상당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볼 수 있다. 여포와의 전쟁에서 조조가 유비를 동행시킨 이유도 유비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여포를 수월하게 처리하기 위해서였고, 주유도 마찬가지다.

노숙이 유비에게 남군을 양보한 것도 이런 이유였을 것이며 실제로 조조가 유비가 남군을 차지하자 경계했다.


3.2. 손오 정권의 대전략은 무엇인가?[편집]


옛날 주나라의 도가 쇠약해지자 제(齊)와 진(晉)나라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고, 왕실이 편안해지니 제후들이 제 직분을 다하였습니다. 지금 그대께서 선친의 뒤를 이으시고 용맹하다는 명성이 있으시니, 만약 단양에 들어가 오회의 병사를 수습하여, 형주와 양주를 하나로 한다면 적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강에 웅거하고 위덕(威德)을 떨치며, 여러 나쁜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한실(漢室)을 바로잡아 보좌한다면, 그 공업은 제 환공(桓公)이나 진문공(文公)과 같을 것인데, 어찌 다만 외번(外藩)에 그치겠습니까? 바야흐로 지금은 세상이 어지럽고 다난(多難)하니, 만약 일이 성공된다면, 마땅히 같이 일한 사람들과 함께 남으로 구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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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손책전」주석, 장굉이 손책에게#


옛날 한고제(高帝)가 마음을 다하여 초의 의제(義帝)를 존중하여 섬기려고 했으나,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없었던 것은 항우(項羽)가 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조조는 옛날의 항우와 같습니다.

장군께서는 어찌 환공과 문공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 왕실은 다시 일어날 수 없고, 조조는 신속하게 제거되지 않습니다. 장군을 위한 계획은 오직 강동을 차지하고 천하의 변화를 살피는 것입니다. 기업의 규모가 이와 같으면, 또 의혹을 초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북방에는 진실로 힘써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힘써야 할일이 많을 때를 이용해 황조(黃祖)는 소멸시키고, 나아가 유표(劉表)를 공격해 장강 유역을 차지하여, 자기 소유로 만든 연후에 제왕이라고 칭하고, 천하 통일을 꾀하는 것, 이것이 한고제의 사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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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노숙전」, 노숙이 손권에게#


주유, 여몽이 모두 함께 추천해, 손권이 우대함이, 옛 신하와 같았다. 감녕이 계책을 늘어놓길 :

“지금 한漢의 제위는 나날이 쇠미해지고, 조조曹操는 더욱 교만해져, 끝내는 찬탈할 것입니다. 남형南荊의 땅은, 산과 언덕의 형세가 유리하고, 강과 내의 흐름이 통함이, 참으로 이 나라의 서쪽 형세입니다. [3]

저 감녕이 이미 유표를 봤는데, 생각은 이미 심오하지 않은데다, 자식은 또한 변변치 못해, 대업을 이으며 터를 전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지존至尊께서 응당 이를 서둘러 헤아려야 하니, 조조보다 뒤쳐져 이를 도모하셔선 안됩니다.[4]

이를 도모하는 계책은, 의당 먼저 황조를 취하는 것입니다. 황조는 지금 연로한데다, 늙어서 정신이 흐릿함이 이미 심하고, 재물과 양식은 모두 부족하고, 좌우는 속이고 농락하며, 재물의 이로움에 힘써, 이사吏士를 범하며 탐하여, 이사들은 원망하고 있고, 배와 전구戰具는, 폐기됐는데도 경계하지 않고, 경작에는 태만하며, 군에는 정해진 군의 편제도 없습니다.

지존께서 지금 가신다면, 그들의 무너짐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한번 황조군을 격파하고, 북을 치며 나아가 서쪽으로 가서, 서쪽으로 초관楚關을 점거하면,[5]

[6] 대세가 더욱 넓혀져, 곧 점점 파촉巴蜀을 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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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감녕전」, 감녕이 손권에게#


형초땅은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으며, 강물의 흐름은 북쪽으로 흘러내리고, 밖으로는 장강과 한수를 두르고 있고, 안으로는 험준한 산이나 구릉이 있으며 견고한 성이 있고, 기름진 평야는 만 리나 되고, 관리와 백성들은 풍부합니다. 만일 이곳을 차지하여, 소유한다면, 이것은 제왕의 자본이 될 것입니다.

지금 유표는 죽었고, 그의 두 아들은 평소 화목 하지 못했고, 군대 안의 장수들은 각각 두 패로 나뉘어져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유비와 같은 천하의 영웅이 조조와 불화가 있어 유표에게 의탁했지만, 유표는 그의 재능을 질시하여, 중용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유비가 유종, 유기와 화합하여 서로가 협력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루만지어, 우호로써 결맹을 맺어야 하지만, 만일 그들 사이가 서로 멀어진다면, 마땅히 새롭게 계획하여, 대사를 달성하여야 합니다.

저는 명을 받들어, 유표의 두 아들에게로 가서 조문하고, 어울러 그 군대 안에서 실권을 지고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유비에게 유표의 부하들을 어루만져 같은 마음 한뜻으로 함께 조조에게 대행하도록 설득하기를 바랍니다. 유비는 반드시 기뻐하며, 명을 다를 것입니다. 만일 성공한다면, 천하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즉시 가지 않는다면, 아마 조조가 먼저 기회를 잡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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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노숙전」, 유표 사후 노숙이 손권에게#


노숙魯肅이 주유를 대신하게 됐는데, 곧 육구陸口로 가려 하며, 여몽의 둔영 아래를 지났다.

노숙의 생각은 아직 여몽을 가벼이 여겼는데, 어떤 이가 노숙에게 말하길 :“여장군의 공적과 명예가 나날이 높아져, 옛 생각으로 대할 수는 없으니, 군께선 의당 그를 방문하셔야 합니다.”

마침내 가서 여몽을 방문했다.

주연이 무르익었을 때, 여몽이 노숙에게 묻길 :“군께선 중임을 받으셔, 관우와 이웃이 되셨는데, 장차 어떠한 계략으로, 뜻밖의 일을 방비하실 겁니까?”

노숙이 단박에 응답하길 :“때가 되면 알맞은 것을 시행할 것이오.”

여몽이 이르길 : “지금 동서가 비록 한 집안이나, 관우는 진실로 곰과 호랑이인데, 계책을 어찌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어서 노숙을 위해 5가지 계책을 짜 주었다.

노숙이 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 그의 등을 치며 이르길 : “여자명, 나는 경의 재략이 미치는 바가 여기까지 이를 줄은 몰랐소.

마침내 여몽의 모친에게 절하고, 결합해 친구가 돼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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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여몽전」, 여몽이 관우를 칠 계획을 노숙에게 들려줬고 노숙은 이를 높이 평가했다. 노숙은 여몽의 계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南三郡長吏)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關羽)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呂蒙)을 파견해 선우단(鮮于丹), 서충(徐忠), 손규(孫規)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巴丘)(주)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陸口)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零陵太守) 학보(郝普)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益陽)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孫皎), 반장(潘璋)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침 조조가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마침내 형주(荊州)를 나누어 동쪽 지역인 장사(長沙), 강하(江夏), 계양(桂陽)을 손권에 속하게 하고 서쪽 지역인 남군(南郡), 영릉(零陵), 무릉(武陵)을 유비에 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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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노숙전」


후에 노숙魯肅을 따라 익양益陽을 지키며, 관우關羽를 막았다. 관우가 3만 명을 가졌다고 칭하고, 스스로 정예 5천 명을 가려, 현의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보내고, 밤에 건너고자 한다고 일렀다. 노숙과 여러 장수가 의논했다. 감녕은 당시 3백의 병사가 있었는데, 이에 이르길 :

“다시 5백 명을 저에게 늘려주시고, 제가 가서 그와 대적하게 하신다면, 관우는 제가 기침하고 침을 뱉음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고, 물을 건너도 저에게 사로잡힐 것이라고 보장합니다.”

노숙이 곧 천 명의 군을 뽑아 감녕에게 더해주니, 감녕이 바로 밤에 갔다. 관우가 이를 듣고, 머무르며 건너지 못하고, 병영을 지으니, 지금은 마침내 이곳을 관우뢰關羽濑라고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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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감녕전」, 노숙은 익양대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직접 공안으로 돌아와서 관우를 파견해 세군을 쟁취하도록 했다. 노숙은 익양(益陽)에서 관우와 서로 대항했다.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여 각각 병마를 백보 밖으로 주둔시키고, 단지 장군들만이 단도를 갖고 함께 만났다. 노숙은 관우를 여러 차례 질책하여 말했다.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요.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소.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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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노숙전」, 익양대치 당시 노숙이 관우에게#


그리고는 관우를 만나러 나갔다. 관우가 말하기를

"오림(烏林)의 전역에서는 좌장군(左將軍 유비)은 군중에 몸을 두시고, 주무실 때에도 갑주를 풀지 않으셨으며, 협력하여 위를 격파하였던 것이오. 어찌 우리가 고생한 것을 무로 돌려 한 뼘의 땅이라도 빼앗길 수 있겠으며, 족하(足下 노숙)는 무슨 연유로 (우리의) 토지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오?"

라 하였다. 노숙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지 않소. 본시 장판에서 예주(豫州 유비)를 살펴보았을 때, 예주의 군세는 일교(一校 한 부대)를 이룰 만한 병력에도 차지 않았고, 계략과 사려는 이미 다하였으며 전의도 기세도 모두 무너진 상태로, 멀리서부터 도망쳐 숨고자 생각할 뿐으로, 도저히 그것(위군을 격파하여 형주를 손에 넣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소.

주상은 예주가 몸을 둘 곳조차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토지나 휘하의 힘을 보태 주시기를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며, 그가 세력을 돌볼 수 있도록 비호를 더하여 그 곤란을 구제하셨소. 헌데도 예주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은의에 등을 돌리고 호의를 저버렸소. 지금 이미 서쪽의 주(익주)를 (스스로 몸을 기댈 곳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주의 땅까지 차지하려 하다니. 이는 범부라 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행위로, 어찌 군주란 자가 할 바이겠소!

내 듣기로는 탐욕을 따라 움직이며 의를 버리는 것은 필시 재난을 불러오는 것이라 하였소. 그대는 중임을 맡았음에도 분수를 모르면서 도리를 지키거나 의를 받들어 보필하지도 못하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군세를 의지하여 힘을 겨루고자 하나, 부곡(군대)이 이미 흐트러졌음에도 어찌 겨루어 이길 거라 생각하오?"

관우는 이에 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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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노숙전」주석, 「오서」에서 인용, 익양대치 당시 노숙이 관우에게#




3.3. 국경선 연장으로 인한 방비 문제[편집]


여몽은 형주를 점령하면 수비선이 탄탄해진다는것을 손권에게 고했고, 실제 역사상으로도 맞는 말이다. 육항 또한 손호에게 이릉[7]을 잃으면 오나라 전체가 위험해진다고 하고 진수 또한 과연 육항이 걱정한 것처럼 되었다며 이 말이 맞음을 인정한다.

일본의 미야자키도 아예 장강 수비 라인은 구축할 수 있었고, 그것이 유일한 획득(성과)이라고 했을 정도로 장강의 중류를 오나라가 차지하면 방어선이 탄탄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여몽의 방어선 구상은 미완성으로 끝났는데, 오나라는 진소가 양양(襄陽)을 아주 잠시 동안 정복했지만 유비가 침공해오자 포기한 이후로 조위(曹魏)로부터 다시는 빼았지 못해서 장강의 수로를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제성(白帝城)은 촉(蜀)이 점유한 상태로 남았지만 백제성의 옆에 있는 무현(巫縣)은 손오 정권이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손권의 형주 공략이 성공적이라고 평하려면 양양까지 확보했어야 한다. 일시적으로 점거에는 성공했으나 결국 유비의 침공 당시 포기하면서 결과적으로 확보에 실패했다.


3.3.1. 장강 방어선 관련 반론[편집]


양양이 없다면 강릉이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양양에서 강릉까지 장강이라는 고속도로가 뚫려있다고? 그동안 양주에서는 손만 빨고 있나? 일단 강릉을 공략할 때 수군이 없다면 적군은 장강을 통해서 계속 보급이 가능하다. 강릉 공략을 위해서는 수군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수의 수군이 강릉으로 가기 위해선 일단 한수를 타고 내려가서 하구에 도달한 후, 다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때 오나라가 한수-장강 합수구를 장악하고 위나라가 강릉 공략에 실패하면 위나라의 수군은 말 그대로 개죽음 당하는 것이다. 조비가 1차 남정 때 괜히 강릉, 동구, 유수구 세 방면으로 군대를 보낸 것이 아니다.

진나라의 오나라 정벌의 경우에는 익주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진나라의 침공 당시 양양의 수군을 막지 못했다고 오나라 내내 양양 수군을 막지 못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송이 망할 때도 몽골이 이미 파촉을 차지한 상황이었다. 고로 진나라와 몽골의 사례는 양양 없이 강릉만 차지했기 때문에 손오 정권의 장강 방어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또 오나라 입장에서 강릉이 없다면 위나라든 촉나라든 그대로 장강을 건너 강하, 무창을 공격할 수 있다. 이는 수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할 때도 보이는 모습이다.

정리하면 강릉과 양번을 둘 다 차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적국한테 파촉이 없다면, 강릉만 소유해도 장강 방어선은 작동한다. 강릉과 양번이 둘 다 적의 소유라면 강동 정권의 패망은 시간 문제다.


3.4. 회남과 강릉의 비교[편집]


사실 위나라오나라의 대립구도에서 형주가 주 격전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합비는 말할 것도 없고, 유수구 전투석정 전투 등 두 나라 사이에서 발발한 주요 전투는 대개 회남-양주(楊州) 방면에 집중됐다. 오히려 형주 - 양주 방면에서 발발했던 적벽 대전 같은 경우가 이례적인 경우이며, 이는 형주 세력의 잔당이었던 유기-유비가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대립상은 남북조 시대의 북조와 남조의 대립구도에서도 나타난다. 전진동진을 치기 위해 벌인 비수대전 역시 회수 방면에서 벌어졌으며 물론 거대한 전역인 만큼 모용수를 통한 형주 방면의 부공과 요장의 촉에서 출발하는 진공 역시 존재했으나 전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쪽은 회수 쪽의 주공이었다. 수나라진나라(陳)를 멸망시킬 때도 장강을 바로 건너 건강(건업)을 기습하는 루트를 활용했다. 비록 악비한세충의 활약으로 구사일생하긴 했으나, 남송 초기 남송금나라에게 속절없이 밀릴 때도 회수 방면에서 금나라 군이 남송의 수도인 임안으로 쳐들어와 송 고종이 임안을 버리고 바다로 도주한 사례도 있다.

즉 형주가 강동의 방어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른바 "목줄", 즉 주된 방어 거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두 나라의 대립은 이후 벌어질 남조와 북조 싸움의 프로토타입이었던 것이다.

추가로 손권 본인이 계속 합비 쪽으로 친정한 것을 보면 손권의 주된 관심사는 서주도 형주도 아닌 과거 원술의 근거지였던 합비 - 회남 방면으로 여겨진다. 이 지점을 뚫고 중원에 진출하는 것, 혹은 최소 회수 - 회남 방면을 차지해 오나라의 중심지인 건업(남경)을 위시한 장강 삼각주를 방어할 완충지대를 확보하려는 게 손권의 목표 중 하나인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후 육조시대의 왕조들과 후일의 남송을 비롯해서 회하 인근 - 회남을 차지하지 못한 강남의 남조 왕조는 오나라가 유일하다. 심지어 동진 이래 육조 최약의 왕조였다는 조차도 진욱 시절에 10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회남 일대를 차지한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형주는 손권의 부친 손견의 한이 서린 땅이고 또 실제로 동맹을 배신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남형주를 병합한 탓에 손권이 형주에 무지 집착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조비 즉위 초기의 불안정한 정국을 틈타 불시 기습과 조비의 판단 착오가 겹쳐 일시적이나마 여몽의 플랜인 번성 - 양양 라인을 확보해 놓고도 결국엔 유지가 어렵다며 버리기까지 했다. 위에서도 언급되지만 당시 여몽이 무슨 생각으로 위나라와 촉나라를 동시에 상대하며 양번과 영안을 다 먹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건지 의문스럽다.

후일 육손손권의 명령을 받아 양양을 공격하려다 사전에 들통나자 그냥 포기하기도 했고, 주연이 조중을 비롯해서 이 지역을 자주 찔러보았고 번성까지 포위한 적(작피의 역)도 있지만 작피의 역 당시에도 사마의가 바로 군대를 끌고 오자마자 주연은 한 달만에 그냥 도망갔다. 영안 - 양번 - 이릉 / 강릉이 연결되는 장강 중류 삼각방어 거점을 완성하려고 한 여몽 혹은 익주 - 형주 - 양주를 모두 아우른다는 후일 형성된 남북조 시대 남북구도의 프로토타입인 천하이분지계를 주창한 주유라면 모를까[8] 손권의 주된 관심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두 전선에 대한 손권의 관점이 정확히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순수하게 병력비만 놓고 보면 형주 전선의 오군이 양주 전선에 투입된 오군보다 훨씬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장 234년 전역 당시 합비에 투입된 오군이 호왈 10만이었던 것에 반해 양양을 공격한 육손제갈근의 군사는 1만이었다.

이후 형주 쪽 주력이었던 주연에 대항한 위군도 수천 명 이상을 넘지 않았던 것을 보면 1만 단위를 전후로 한 병력이 계속 유지되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심지어 제갈탄의 난 당시에는 왕창이 먼저 강릉 전선에 선공을 걸어 주적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다만 위서 제왕기 주석 간보 진기에 따르면 오나라가 작피의 역 때 5만명을 동원했다고 나온다.

손권은 형주 뒷치기를 하는 순간 당연히 유비의 보복성 침공을 예상해야 했다. 조조는 천하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고 나머지 절반을 유비손권이 나눠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손권이 반목을 하고 전쟁을 벌인다면 과연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보나마나다.

그러나 목표가 천하통일인지 할거인지도 불분명한 손권의 경우 형주는 본인의 마스터 플랜 바깥영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형남 점령의 궁극적 목적도 이릉 - 강릉 라인의 장강 중류 수로를 확보해서 본인의 근거지인 장강 삼각주의 방어를 강화하려는 다소 소극적인 수준의 문제의식의 발로에 가깝다.

오나라의 경우에는 사천에서 진격해 형주를 점령하고 장강 중류를 장악해 그 물길을 타고 내려간 서진의 공격에 멸망한 케이스지만, 상술했듯 이건 이릉과 강하에서 제대로 수비를 못한 오나라의 자동문 인선이 문제이고, 후일 역사에서 반복되는 전투 양상을 보면 형남과 회남 가운데 어느 지역이 더 강동 방어의 핵심인지는 누가 봐도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북조가 남조를 공격하는 주된 루트를 살펴보면 장강 중하류에서 수로를 타고 내려가는 패턴보다 강북에서 곧바로 회수 - 장강을 건너 다이렉트로 강남에 진격하고자 하는 패턴이 더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회남지방은 회수의 지류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고, 호수가 많다. 북쪽이 차지하고 있으면 진류(연주), 허창, 여남(예주), 서주의 군세가 모이는 곳이다. 그리고 손오 대부분의 공격이 회수 인근을 노린 집중 공격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분명해지는 것이고. 그 반대로 오의 군사가 그곳으로 진격할수 있다는 얘기도 되는 법이다. 하물며 배를 띄우는 수군에 있어서는 항상 오가 우위였기도 하다.

반대로 회남이 위나라의 영토라면, 오-광릉의 변칙 루트 하나를 제외하면 오나라의 북벌 루트는 회남 방면으로 제한되어 버린다. 당연히 위나라는 여기만 방어하면 되고 알토란 중원을 든든한 후방기지로 둘 수 있게 된다.

즉 장강 삼각주 방어에 있어서 형남 장강 중류 확보보다 회수-장강 사이에 위치한 회남이라는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게 더 중요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게 더 유리하다라는 주장이다. 이 시기 오나라는 장강 주요 물길만 장악한 상태고 위가 유수구를 강하게 압박하면 수군 전력을 죄다 유수구로 집결시켜야만 수비가 가능했다. 그래서 조비의 1차 남정 당시 유수구에서 도하 협박하면서 형주 주요 거점들을 죄다 공격하니까 조비 본대의 유수구 도하를 막는 대가로 형주 거점들을 죄다 공성당하게 방치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하듯, 대군을 이끌고 바다처럼 장대한 장강 하류를 도하하는 건 만만한 시도가 아니긴 하지만, 일단 그 고비를 넘어서기만 하면 곧바로 강남의 중심지가 펼쳐진다. 공격하는 하북 정권의 입장에서는 이 회남 - 장강 하류를 건너는 최단거리 공격 루트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지사다.

파일:회수.jpg
일단 화북에서 내려오면 1차적으로는 번성이, 파촉 지역에서 내려온다면 이릉이 막고 있으며 이 두 곳이 모두 뚫리더라도 2차적으로 강하에서 수비가 가능하다. 만약에 이곳이 모두 허무하게 뚫린다면 수비를 진짜로 무능하게 했거나 담당자가 공대 내부의 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유수구가 뚫리면 그냥 그대로 건업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을 봐도 1차적인 목표가 어디인지는 확실해 보인다. 즉 촉한의 중심지인 사천평야 방어에 있어서 한중 분지 일대의 확보가 필수적인 것처럼 오나라의 중심지 장강 삼각주의 방어에 있어서 회남 일대의 확보는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또 지도에서 나오듯이 회수 서쪽과 강하 북쪽은 산맥으로 둘러쳐 있다. 즉 회수 일대는 천혜의 방어선인 것이다.[9] 회남지방은 습지가 많고 지류가 많아서 기병 굴리기 힘든 지형이다. 오가 수춘을 먹고 몇년 유지할 수 있다면 수춘에 대규모 수군기지를 지어서 회수에서 수군 굴리면서 막으면 된다.

바로 합비가 왜 중요한가를 보면, 합비 - 거소 - 유수구를 통한 장강 진입이 가능한 곳이다. 손권의 중앙 진출(그 과거의 손책의 허창 습격)을 위해서 합비-수춘 라인을 확보해야 비수 → 회수 → 와수를 통해 초를 공략하여 진류/허창 모두 노릴수 있기 때문이다. 회수에 대한 부분은 앞서 말한 회수 방어라인에서 나오듯, 광릉방향으로 가게되면 서주(하비)까지 노릴수 있다. 추가로 장강이북의 오나라 군대는 여강에 군대를 주둔하여 갇혀있는 꼴이다. 그들이 수춘까지 정복하기 위해서는[10] 육안이던, 합비던 공략을 마쳐야만 한다. 위의 입장에서는 합비가 함락되는 순간 이미 회수 이남 방어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서주와 회남을 장악한 후 촉보다 먼저 하북에 먼저 진입해서 자리잡으면 오나라촉한보다 명분이 약할지언정 절대 국력은 더 강해진다. 그리고 지리적 이점으로 허창을 먼저 노릴 수 있으므로 유사시 헌제를 옹립하는데 성공한다면 명분에서도 뒤지지 않을 수 있다. 이건 실패해도 위나라의 회남, 서주 라인을 흔들어 오나라가 위나라의 압력에 맞서 더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니 회남, 서주 라인 공격이 오나라 입장에서 최선의 수였다. 허창을 노린다는건 곧 예주를 얻을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위나라 예주의 주요 도시들은 회수의 지류들에 있다. 오나라가 회남을 장악하고 수춘에 대규모 수군기지를 짓는다면, 위나라 예주지역 전체가 오나라의 수군 공격에 노출되는 것이다. 풍요로운 예주가 후방기지가 아니라, 예주 전체가 언제 오나라가 공격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허창이 있는 예주는, 후한서 인구 600만명이 넘어 익주와 형주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주이며, 수많은 명사의 고향이며 곡창지대고, 인구밀도도 매우 높다. 이 곳이 손권 수군의 공세에 노출되고, 촉한이 관서와 형북(상황에 따라서 관중까지)을 장악한다면, 위나라의 압도적 우세가 많이 흐려진다. 손권 입장에서는 천하가 셋으로 나뉜 상황을 오래 유지시켜야 겠고,(위-오만 남거나 한-오만 남으면 오나라가 털릴 게 뻔하니까) 그러려면 위나라의 국력을 당연히 좀 깎아 놔야 했어야 했다.

당장 남조가 공세를 펼칠 때는 양번을 확보했을 때가 아니라 회수까지 도달했을 때이다. 조적의 북벌, 환온의 3차 북벌과 유유의 북벌, 진경지의 북벌은 모두 회수를 따라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들의 기록을 보면 분명 북벌인데 군대가 북쪽으로 올라간다기보다는 회남을 중심으로 동진, 서진하는 경향을 띈다. 회하와 거기에 이어진 지류들을 진격로로 삼아 서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갔다가 하니까.

환온은 3차 북벌에서 변수, 청수, 황하를 이용해 진격로와 보급선을 확보하면서 낙양을 노렸다.

유우는 회수를 이용, 산동반도남연을 멸망시키고 다시 회수와 여러 지류들을 이용해 낙양과 장안까지 장악한다. 진경지는 회남 지방(수춘)을 장악하는 것으로 북벌의 신호탄을 끊었다. 낙양까지 치고들어간 것도 어디까지나 하남에서 호뢰관으로 서진, 이를 돌파하고 낙양을 점령한 것이다. 양양은 철수로에 불과했다.

즉 공세로 전환하는 핵심 지역은 강릉이 아니라 회수를 활용할 수 있는 회남 지역이다. 여기를 안정적으로 거머쥐면 낙양에서 산동까지 모조리 사정권 안에 들어간다. 강릉은 어디까지나 장강 수로의 독점적인 운용을 위해 존재하는, 방어적인 의미가 강한 거점이다.

위진남북조 시대를 종결낸 수문제의 통일은 강릉이 어디 손에 있느냐와는 무관하다. 전력차도 압도적이었을 뿐더러 회남에서 곧바로 기습적으로 장강을 도하해 경구를 점령한 후 중산으로 나아가 건강을 직격하는 것이었지 강릉에서 수로를 타고 서진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패선의 무대책이 아니었으면 시도도 되지 않을 공략에 당한 것이다. 애초에 왕조는 거기까지 버틴 게 놀라운 왕조이다. 건강 인근만 장악한 상태에서 출발해 북주북제의 공격을 5회나 격퇴하고 장강 하류 인근 완전 장악에다 회수까지 나아가기도 했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번성 공방전 시점에서 손권의 선택은 근시안과 조급함의 소산이라는 평을 피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굳이 형남을 빨리 병합하려고 성급한 액션을 때릴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이전 합비 공방전장료에게 당한 게 많기에 그 후유증으로 당장은 회남으로 북진할 의욕이 안 생겼을 수는 있다. 그러나 천적인 장료는 양번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니[11] 장료관우를 막기 위해 합비를 떠났을 때 공백지나 다름없던 합비 - 회남 방면을 기습해 확보하고 제갈량제갈각의 북벌 노선으로 둘이서 동시에 위나라를 공격하면 서로 득이 생긴다.


3.4.1. 회남의 중요성?[편집]


일단 회남이 없을 때 유수구가 뚫리면 곧바로 수도를 노릴 수 있다는 말은 과언이다. 둘 사이에는 장강이 존재한다. 장강 하류는 바다와 다를 바 없을 정도의 폭을 자랑한다. 이를 단순히 강을 건너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할 때 수도를 직격한 것? 당시 강릉은 수나라의 괴뢰 정권인 후량의 영토였다. 그렇다고 수도 직격만으로 진나라를 정벌했나? 그것도 아니다. 영안, 양양, 강릉 등에서도 동시에 군대를 움직였다. 애초에 수나라가 사천, 강릉, 양양, 회남을 모두 장악하고 있던 시점에서 펼친 원정을 손오 정권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무리이다.

회남을 잃었을 때 북쪽 정권이 남조의 수도인 건강으로 직격하는 것을 장강이 건너기 쉬워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수도를 직격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북조가 회남을 장악한 시점이면 높은 확률로 국력에서 남조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남과 형주를 비교해 보았을 때, 형주의 중요성이 훨씬 높다. 상술했듯이 회남-양주는 장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형주-양주는 장강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싸워야한다. 역사적으로 회남 없이 버틴 남조 정권은 있었으나 형주 없이 버틴 정권은 없었다.

春,正月,張永等棄城夜遁。會天大雪,泗水冰合,永等棄船步走,士卒凍死者太半,手足斷者什七八。尉元邀其前,薛安都乘其後,大破永等於呂梁之東,死者以萬數,枕屍六十餘里,委棄軍資器械不可勝計;永足指亦墮,與沈攸之僅以身免,梁、南秦二州刺史垣恭祖等為魏所虜。

467년 봄, 정월, 유송의 장수 장영 등이 밤에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폭설을 맞아, 사수의 얼음이 합쳐졌기에, 장영 등은 배를 버리고 걸어서 도주했는데, 사졸 중에 얼어죽은 자가 태반이었고, 수족이 끊어진 자가 7~8할이었다. 북위의 장수 울원이 그 앞에서 맞이했고, 북위의 장수 설안도가 그 뒤를 꾀하여, 여량의 동쪽에서 장영 등을 대파시켰고, 죽은 자가 만여 명에, 드러누운 시체가 60여리에 걸쳤고, 버린 군자와 기계가 셀 수 없었다. 장영도 발이 떼어졌고, 유송의 장수 심유지와 더불어 겨우 몸을 건졌고, 유송의 양, 남진 2주자사 원공조 등이 북위에 잡혔다.

上聞之,召蔡興宗,以敗書示之,曰:「我愧卿甚!」永降號左將軍;攸之免官,以貞陽公領職還屯淮陰。由是失淮北四州及豫州淮西之地。

황제가 이를 듣고, 유송의 장수 채흥종을 불러, 패전의 서신을 보이며, 말하기를, "나도 괴롭지만 경은 심할것이오!"

장영은 좌장군으로 강등당했고, 심유지는 해직되어, 정양공으로서 영직하여 회음으로 돌아와 주둔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회북 4주에서 예주의 회서에 이르는 영토를 상실했다.

(중략)

秋,八月,乙酉,勰部分將士,與永並勢擊伯之於肥口,大破之,斬首九千,俘獲一萬。伯之脫身遁還,淮南遂入於魏。

500년 가을, 8월, 을유일, 북위의 친왕 원협이 부곡의 장수와 병사를 나누어, 북위의 장수 부영과 더불어 나란히 기세로 남제의 장수 진백지를 비구에서 쳐서, 대파시키고, 9천 급을 참수하고, 1만 명을 포획했다. 진백지는 몸을 빼서 도망쳐 돌아갔고,회남이 드디어 북위의 영토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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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中


동진의 경우 화북 지역이 사분오열된 상태로 조위가 화북을 통일한 삼국시대와는 큰 차이가 있다. 전진의 침공을 비수에서 막아낸 것도 일회성 사건이지 장기적으로 대치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본격적으로 남북의 대치가 일어난 것은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이후이다.

남조가 북위에게 회북을 상실한 것이 467년, 회남의 상실은 500년으로 회수를 기준으로 버틴 시간은 약 33년이다.

그 이후 육진의 난 당시 양나라진경지가 북벌을 감행했지만 이주영에게 패했고 북제가 멸망할 때 다시 올라가면서 일진일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회남을 완벽히 장악하고 요새화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수나라한테 진나라가 멸망한 것이 589년이니 약 89년 간 장강 하류가 방어선이었다.

물론 북위에서 내분이 일어나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고 북제와 북주로 이어진 것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손오 정권이 강릉을 얻은 후 멸망까지 61년을 버텼으며 조비의 1차 남정을 기준으로 해도 57년을 버텼다. 남조가 회남을 상실했을 때는 형주를 소유한 상태였다. 형주까지 있었음에도 33년만에 회남을 잃었다. 형주가 없었으면 더 빨리 잃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위에서 회남을 소유해 본 적이 있다고 언급된 진나라는 32년만에 망했다.

남북조시대에는 회남에서 일진일퇴하는 국면이 다수 보인다. 회남을 확보하는 것은 상술했듯이 수도인 건업/건강의 방위를 위해서이지 수비가 쉬운 지형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북쪽에서 회수로 합류하는 지류들은 대다수 ↘방향으로 흐른다. 후술할 내용처럼 공격 나가기 쉬운 지형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공격 받기도 쉽다는 뜻이다. 회남을 차지하는 순간 허, 여남, 초 등 예주, 연주의 주요 도시로부터 몰려오는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성공해야지만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이 맹공을 남형주 없이 오월 지방의 인력과 자원만으로 지켜낼 수 있을까? 북위가 형주를 소유하고 있는 남조의 회남을 점령하는데는 고작 33년이 소요되었다. 강릉을 점유하고 있었음에도 북조의 공격으로부터 쉽게 방어할 수 없었다. 남형주의 인력과 자원마저 없는 상황에서 회남을 지켜내기 위해선 결국 지휘관의 재능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인재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배출될 수 있을까?

전국시대 초기의 위(魏)는 천하에 감히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이는 이회, 서문표, 오기 등의 인재와 위문후라는 걸출한 군주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문후, 서문표, 이회가 죽고 오기가 나라를 떠나게 되자 50년도 채 되지 않아 오기가 얻은 서하 땅을 전부 진(秦)에게 넘겨주었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제(齊)가 가장 강력했다. 이는 환공관중이라는 걸출한 인재들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고 난 뒤 제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넓은 토지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강국으로 남기는 했지만 다시는 환공의 패업과 같은 업적을 이뤄내지 못하고 진(晉)한테 밀리는 2인자 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관중의 요지에 자리잡았으며 상앙의 변법으로 체제를 개혁한 진(秦)은 어땠는가? 소진이 이끄는 오국 합종군은 함곡관에서 격파되었다. 광장이 이끄는 제, 위, 한 삼국 합종군에게 함곡관이 점령당하고 황하 이동의 땅을 한과 위에게 돌려주며 굴욕적인 화친을 했으나 다시 일어났다. 신릉군이 합종군을 이끌고 몽오의 군대를 격파하고 함곡관까지 몰아붙였으나 합종군이 해산되자 다시 일어났다. 춘신군이 이끄는 합종군 역시 함곡관까지 몰려왔지만 해산되고 진은 다시 일어났다.

진나라는 언제나 함곡관에서 산동의 합종군을 막았다. 만약 진이 위나라의 하동 땅을 먼저 경략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을 나서 초나라의 남양을 차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양은 함곡관과 같은 요새로 막을 수 있는 땅이 아니다. 결국 오랜 시간에 걸쳐 소모전이 일어나고 한번 밀린다면 힘들게 얻은 남양 땅을 잃을 것이다.

장기적인 할거를 위해서는 뛰어난 장수에게 의존하기보단 방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손권과 여몽이 지속적으로 뛰어난 장수가 필요한 회남이 아닌 장강의 방어 시스템을 완성할 수 있는 강릉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회남이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핵심 지역은 맞다. 회수의 지류를 타고 예주, 연주, 서주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만으로 합비를 공격했어야 한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조의 북벌인 환온의 북벌, 유유의 북벌, 원가북벌, 대통북벌 전부 남조가 최소 강릉은 소유하던 시점이라는 점을 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온의 북벌은 총 3차례 이루어졌는데 1차는 환온 본인은 강릉에서 출발하여 양양, 남향까지 올라가 관중을 노렸고 한중에서 자오곡을 따라 관중을 습격했다.

2차 역시 강릉에서 출발하여 완까지 북상한 후 낙양으로 들어갔다.

유유의 북벌 또한 회남 지역에서만 치고 올라간 것이 아니다. 양양, 회남, 팽성에서 별개로 출발한 것이 유유의 북벌이다.

이들의 북벌은 단순히 회남에서 치고 올라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강릉을 먹는 것보다 회남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손권이 회남을 먹었을 때의 판도인 오월+회남을 장악한 상태에서 시행한 북벌을 예시로 들어야 한다. 오월과 회남 뿐만 아니라 형초와 파촉까지 장악한 상태였던 남조의 북벌을 예시로 드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오월과 회남만을 장악한 사레는 전국시대 말기의 초나라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도 형초 지방에서 일어나 회남과 오월을 점령했으나 후에 형초 지방을 상실한 사례이지 오월에서 일어나 회남을 차지한 사례가 아니다. 게다가 초나라는 언영을 상실한 이후로 계속 내리막이었다.

정리하면 회남과 오월만을 든 상태에서 오월과 형초를 차지했던 손오 정권보다 더 잘 버틴 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위-오 간 분쟁이 주로 회남에 있었던 것은 단순히 회남이 더 중요해서가 아니다. 당시 강릉 주변에는 운몽택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습지가 존재했으며 강하와 무창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이 습지는 온갖 전염병의 근원으로 북방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실제로 조조는 208년에, 조비는 223년에 전염병에 크게 얻어 맞았다. 이러한 요소를 무시하고 단순히 회남 지역에서 전투가 많이 일어났으므로 회남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확증편향에 불과하다.

우선 양양 공방전을 예시로 드는 사람들이 망각하는 것이 당시 송나라는 강릉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주공방전에서 손권의 가능한 선택지는 회남과 남군 2개이지 양양이 아니다. 관우가 양양을 점령할 뻔했다고? 먼저 수몰된 번성을 점령하지도 못한 공성 실력으로 양양성을 점령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양양성이 자발적으로 항복해야 하는데 강건너에서 적군이 대패해 물에 빠져죽는 상황을 목격한 양양성의 수비병들이 과연 항복을 할까? 관우가 양양을 점령할 수 있었다 생각하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

그리고 양양 공방전을 예시로 드는 것이 잘못된 것이 양양에서 벌어진 다른 전투들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장 십육국시대의 전진만 해도 양양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남송의 양양 공방전은 남송이 잘 막은 것이지 양양이 천하의 요충지라 버틸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물론 양양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인 것은 맞지만, 요충지라도 지키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제 역할을 할 수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삼국지만 보면 진창, 합비, 검각 이런 곳이 난공불략의 요새 같지만 실제로는 역사 속에서 손쉽게 점령당한 적이 더 많은 곳이다.

이궁지쟁과 고평릉사변이 비슷한 시기여서 오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공격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주장의 경우, 이궁지쟁은 생각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이궁지쟁은 오나라 내부에서 상위층 몇명만 날아간 사건이지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 사건이 결코 아니다. 당시 외정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특히 246년에는 주연이 조중을 공격해 큰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동흥제 전투는 이궁지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손권이 죽은 직후 벌어졌는데 오나라가 대승을 거뒀다.

형남의 물자는 직접 회남으로 투입한다기보다는 국가의 총 국력이 증가한다는 뜻이다. 형남과 강릉을 차지하면 그 지역만으로 어느정도 세력을 형성할 수 있고 이 말은 본거지 양주의 국력을 회남에 집중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남북조시대 동안 남조가 겪은 혼란은 오나라의 혼란보다 몇배는 치명적이었는데, 북조는 이 기회를 틈타 멸망시키지 못했다. 혼란스러울 때 침공 안 당해서 오래 유지했다기엔 남조 국가들은 오나라보다 훨씬 운이 좋았던 것이다.

사마소가 촉한을 공격한 이유는 오나라가 안정되어서가 아니다. 촉한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마소가 직접 '강유가 답중에 있고 한중이 비어있으니 공격할만 하다'라 말했다. 권력 강화가 따라온 것은 맞지만 개전 원인은 강유의 방어 전략 수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파촉의 백성들이 촉한을 그리워했다는 것은 근거없는 추측에 불과하며 종회의 난은 촉한 멸망 후 1년도 되지 않아서 종결된 사건이기 때문에 특별히 어수선해질 것은 없다. 독발수기능의 난 역시 이 때문에 오나라 공격이 늦춰졌다 말하기엔 독발수기능이 죽은 시점보다 오나라 정벌 시점이 더 이르다. 가충이 오나라 정벌을 반대했다고? 등애도 촉나라 정벌을 반대했다. 그리고 280년에 오나라 정벌 하기 전까지 오나라를 공격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당장 서릉 전투만 해도 육항이 성공적으로 방어해내지 못했으면 장강의 수로가 훤히 열리게 되는 상황이었다.


3.4.1.1. 반론[편집]

강릉을 보유하여 오랫동안 생존했지만 사실이지만 어느정도는 결과론이다. 몽골과 남송이 벌였던 양양 공방전을 고려하면 강릉의 방위력은 양양과 번성에 한참미치지 못한다. 인선 문제나 나라의 내부 사정으로 손쉽게 돌파당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애초부터 회남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군, 무릉, 영릉을 점령한다는 논리도 문제가 있는데 남군, 무릉, 영릉의 군사들과 물자들은 강릉을 방위를 위해서 회남에 투자시키기 어렵다. 남군, 무릉, 영릉은 회남보다도 강릉에 거리가 가깝다. 형주를 없으면 회남을 수호하지 못한다는 예시들은 결과론에 가깝다.

거기다가 오나라는 위나라 다툼에서 운이 좋았던 경우가 있는데 오나라가 혼란에 빠졌을때 위나라도 내부 사정이 좋지 못했다. 이궁지쟁이 발생한 시기와 고평릉 사변 시기가 어느정도 비슷하다. 그리고 제갈각의 자멸해서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는데 제갈각 사망 이후에 사마사는 장집과 이풍을 비롯한 반사마씨 세력과 마찰이 있었고 255년에 관구검과 문흠이 반란이 일어나고 255년에 사망했다. 사마소는 사마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라서 당황했으며 사태를 수습하는라 정신 없었다. 손휴손침을 제거하고 258월 12월 8일에 권력을 잡아서 잡았다. 손휴가 손침을 제거하고 나서 오나라는 완전하지 않지만 어느정도 안정시켰는지 사마소가 263년에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침공한 나라가 오나라가 아닌 촉한이다.

행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촉한의 멸망 이후에도 약 26년이나 생존했는데 서진의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았다. 오나라를 침공하는데 중요한 교두보인 익주는 촉한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배력을 강화시키는데 고생했을 것이며 종회의 반란으로 성도에서 전란이 발생해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독발수기능의 난으로 오나라에 침공할 여유다 없었고 사마소가 사마염을 보좌시키기 위해서 준비한 인재인 가충이 오나라 정벌에 부정적이었다. 이런 행운들을 살펴보면 오나라가 과연 우수해서 역대 남조 국가들보다도 오래 유지한 사실이 오나라가 뛰어나기 때문인가?


3.4.2. 회남은 비어있었는가?[편집]


장료가 회남에서 형주로 빠졌으므로 이 틈을 노려 북벌을 했으면 합비를 얻는데 성공했을 것이란 말은 사건의 선후 관계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애초에 조조가 장료를 번성으로 돌린 것은 손권과 밀약을 맺은 이후이다. 만약 형주를 노리지 않고 합비를 노렸으면 장료를 합비에서 뺄 일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손권이 밀약을 지키지 않고 합비를 공격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조조군은 장료가 번성에 도착하기 전에 서황이 자력으로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조인이 관우를 추격하지 않은 것은 혹시나 관우가 손권과 협력할 가능성을 염려해서였다.

장수들은 모두 좋아하였으며,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북쪽의 지원군 또한 도착하여 힘을 합쳐 크게 싸웠다.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나라의 배가 면수(沔水)를 점거하여 양양(襄陽)은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그때 손권(孫權)이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조인은 장수들을 모아서 상의했는데, 모두 이렇게 말했다.

“지금 관우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쫓아가면 반드시 체포할 수 있습니다.”

조엄이 말했다.

“손권은 관우의 연이은 싸움의 어려움을 틈타서 그 배후를 습격하려고 했지만, 관우가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군대가 양쪽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순종하는 말로 봉공(奉公)을 원하고 나와서는 틈을 타고 변화를 이용하여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려고 할 뿐입니다. 지금 관우는 이미 고립되어 달아났지만, 또 그가 손권의 심복이 될 걱정거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만일 패하여 달아난 자를 깊숙이 추격한다면, 손권은 관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재앙을 일으킬 것입니다. 왕께서는 반드시 이 점을 깊이 헤아리셔야만 됩니다.”

조인은 그래서 전투태세를 풀었다. 태조는 관우가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추격할 것을 걱정하여 과연 긴급히 조인에게 칙령을 보냈다. 그것은 조엄의 계책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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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조엄전」


만약 손권군이 합비를 공격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 형주 방면의 군사를 합비로 돌린다.
이 경우 삼국의 정세는 관우의 양번 공략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조조와 손권이 회남에서 대치하게 된다.

  • 조인군은 남하하고 별개로 합비로 지원군을 보낸다.
이 경우 조조군이 강릉을 탈환하며 합비를 지켜낼 수 있다. 합비의 공략은 비교적 쉬워지겠지만 장료는 고작 7천의 병사로 합비를 지킨 이력이 있다.

어느 쪽이든 손권에게는 안좋은 결과다. 반면 형주를 공격하면 강릉 이남을 장악할 수 있고 남형주의 인구는 강동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았다.

합비를 먹었어도 문제다. 중국은 서고동저의 지형으로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회남과 강동을 점유해도 회수와 장강은 서쪽에서 흘러오기 때문에 수도권이 그대로 직격된다. 심지어 회수의 지류들은 서북쪽에서 동남쪽 회수로 흘러온다.

이런 지형적인 이유로 인해 중국사에서 동과 서가 대립할 때 성한동진마냥 국력의 차이가 큰 것이 아니라면 항상 서쪽이 승리했다. 전국시대에는 형주의 초나라월나라가 그랬으며 진나라와 초나라가 그랬다. 남북조 시대를 마무리한 북주 역시 서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몽골이 남송을 점령할 때도 양양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무너졌다.

회남 지역은 북쪽에서의 침입을 막을 때 유용하지 서쪽에서 오는 공격에는 취약하다. 그 예시가 전국시대 진나라의 멸초전인데, 진나라는 회수를 타고 내려가 초나라의 수도인 수춘을 점령한 후, 강동의 잔존 세력들을 토벌했다.

소위 장강 방어선이라 부르는 전략과 회남 지역은 어디까지나 남북으로 갈라져 대치할 때의 전략이다. 동서로 갈라져 대치할 때 강동 정권이 회남을 차지하는 것은 전혀 방어선을 형성할 수 없다. 관우가 손권을 대하던 태도를 보았을 때, 손권은 관우가 양번을 점령하고 유비의 세력이 강해져도 유비군이 본인들과 우호적일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미 익양대치 때 무력충돌 경험이 있는 것이 양 세력이다. 유비가 우호적으로 나오면 다행이지만 적대적으로 나오면 손오 정권의 목숨은 위태롭다. 조조와의 대치는 남북대치이지만 유비와의 대치는 동서대치이기 때문이다.

첫째, 장료는 양양까지 가지도 않았다.

둘째, 여몽의 환성 공략은 여몽과 감녕의 활약으로 순식간에 끝냈기에 장료가 구원오기 전에 처리 가능했던 것이지 조금만 늘어졌으면 합비 공격과 같은 양상이 되는 상황이다. 이 말은 합비를 환성처럼 재빠르게 점령하지 못한다면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애초에 수춘-합비 거리보다 합비-환 거리가 훨씬 멀다. 환은 전혀 합비의 근처가 아니다.

셋째, 합비는 제갈각의 20만 대군을 상대로 지원군 없이 100일 넘게 지킨 전적이 있다.

넷째, 환성 둔전은 243년에 제갈각도 했지만 사마의가 정벌하러 오자 죄다 불태워버리고 시상으로 물러난 곳이다.

다섯째, 장료는 마피에서 조조와 회합했는데, 마피에서는 여수를 따라 회수로 들어가 재빠르게 합비까지 귀환할 수 있다. 반면 합비에서 환까지 가기 위해선 장강을 장악하지 못한 조조군으로서는 육로로 가야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강도 없다. 진군속도가 훨씬 더딜 수밖에 없다.

여섯째, 합비를 먹는다 해도 이미 관우가 번성에서 털린 시점에서 조조군의 주력은 합비로 몰려올 수밖에 없다. 조조군에게 있어 환성의 입지와 합비의 입지는 결코 같지 않다. 합비가 아군의 최전선이라면 환성은 적진 한복판에 있는 거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제대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3.4.2.1. 반론[편집]

그러나 여몽이 교묘한 심리전으로 관우를 교란한 사실을 고려하면 밀약을 맺고 뒤통수치는 전개도 가능하다.

그리고 양번과 합비까지의 거리가 어느정도 있어서 신속하게 귀한하기 어려우며 장료의 군대는 양양까지 행군하는라 피곤했기 때문에 귀환 속도는 양양에 도착하는 속도보다도 많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탈환과 방위는 방향이 다른 문제다. 장료는 합비 방어전에서 손권에게 굴욕을 선물한 것은 사실이지만 방어전에 해당된다.

예를들면 합비 근처에 환성이라는 중요한 영토가 있는데 여몽이 손권에게 내버려두면 위협이라고 해서 점령한 곳이다. 진서 왕혼열전을 읽어보면 오나라가 북방과 전쟁하기 위해서 중요한 장소.서진의 양주자사 왕혼이 응작을 보내 회남의 모든 군사를 통솔하여 그들을 쳐부수라 명령했고. 오군의 모든 별둔을 깨트리니 불사른 비축 군량이 백팔십여만 곡, 볏모가 4천여 경, 배가 6백여 척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중요했다. 선제기를 읽어보면 사마의가 제시한 동요 공략 작전에서도 환성을 언급했을 정도로 방어전에도 중요했다. 그런데 장료는 환성을 구원하러 출동했지만 환성이 점렴되자 퇴각했다. 장료가 있는 합비와 환성의 거리가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위나라는 장료에게 명령해서 환성을 탈환하지 않았다. 장료가 양번으로 파견되어서 환성 전투보다도 지원이 늦을게 뻔한 상황이다. 합비를 점령하고 장료에 대한 방위망을 구축하는 시간은 충분히 있다.


3.4.3. 손권의 관심사는 회남 지역이었을까?[편집]


이 역시 날조다. 정사만 읽어봐도 손오 정권의 대전략은 형초 지역을 장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손책전」, 「노숙전」, 「감녕전」 등에서 전부 오월과 형초를 장악해야 한다고 말하지 형초보다 회남이 우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유나 여몽이면 몰라도 손권의 관심사가 형주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대체 근거가 무엇일까? 주유, 노숙, 여몽을 중용한 것은 손권이 아니라 다른 인물인가?

유수구, 합비 쪽이 주요 전장이다? 그러면 손권이 유비가 차지하고 있던 형주 쪽에서 조조와 싸워야 할까?

그렇다면 형주를 장악한 이후는 어떨까?

(223년)5월, 손권은 장군 하제(賀齊)에게 명하여 미방(糜芳)과 유소(劉邵) 등을 지휘하여 기춘을 습격토록 했다. 유소 등이 진종을 생포했다.

(중략)

(226년)가을 7월, 손권은 위 문제(魏文帝)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하(江夏)를 치고 석양(石陽)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돌아왔다.

(중략)

이 해(233년), 손권은 합비 신성(合肥新城)으로 진격하며 장군 전종(全琮)을 파견하여 육안(六安)을 정벌하도록 했지만, 모두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중략)

(234년)여름 5월, 손권은 육손(陸遜)과 제갈근(諸葛瑾) 등을 파견해 강하(江夏), 면구(沔口)에 주둔하도록 하고, 손소(孫韶)와 장승(張承) 등에게는 광릉(廣陵), 회양(淮陽)으로 진군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대군을 인솔하여 합비 신성(合肥新城)을 포위했다. 이 당시, 촉의 재상(蜀相) 제갈량(諸葛亮)이 무공까지 병사를 이끌고 나왔으므로, 손권은 위 명제(魏明帝)가 멀리 나갈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위 명제는 병사를 보내 사마선왕(司馬宣王)을 원조하여 제갈량에게 대항하고, 직접 수군을 이끌고 동쪽 정벌에 올랐다. 위 명제가 수춘(壽春)에 도착하기 전에 손권은 퇴각하여 돌아왔고, 손소 역시 공격을 멈췄다.

(중략)

2년(239년) 봄 3월, 손권은 사자 양도(羊茞), 정주(鄭冑), 장군 손이(孫怡)를 요동으로 가게 하여 위나라 수장 장지(張持), 고려(高慮) 등을 공격하게 하여 남녀를 포로로 잡았다.

(중략)

(241년)여름 4월, 위장군(衛將軍) 전종(全琮)을 파견하여 회남(淮南)을 공략하도록 하고 작피(芍陂)를 무너뜨리고 안성(安城)의 곡식 창고를 불태우고 그곳의 백성들을 거둬들였다. 위북장군(威北將軍) 제갈각(諸葛恪)이 육안(六安)을 공격했다. 전종과 위나라 장수 왕릉(王淩)이 작피에서 전쟁을 했는데, 중랑장(中郎將)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거기장군(車騎將軍) 주연(朱然)이 번성(樊)을 포위하고, 대장군(大將軍) 제갈근(諸葛瑾)이 조중(柤中)을 취했다.

(중략)

6년(243년) 봄 정월, 신도군(新都)에서 백호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제갈각(諸葛恪)이 육안(六安)을 정벌하고, 위나라 장수 사순(謝順)의 진영을 격파시켜 그의 백성들을 수용했다.

『삼국지』 「오주전」 #


가화 5년(236), 손권은 북쪽을 정벌하려고 육손과 제갈근에게 양양(襄陽)을 공격하도록 했다.

『삼국지』 「육손전」 #


적오 5년 (242), 조중(租中)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 장수 포충(蒲忠)과 호질은 각자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대항했는데, 포충은 요충지를 차단시켜 주연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고, 호질은 포충을 위해 계속적으로 지원했다. 이 때 주연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먼저 사방에서 나와 공격했으므로 위나라 군대가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불러들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주연은 수하의 현재 있는 병사 8백 명을 이끌고 역습했다. 포충은 싸움이 불리하게 되었고, 호질 등도 모두 물러났다.

손씨(손성)의 이동평(孫氏異同評)에서 이르길: 《위서》와 ‘강표전(江表傳)’에서는 경초 원년(237년)과 정시2년(241년)에 두차례 출정하였으며, 호질과 포충을 격파시킨 것은 경초 원년이라고 했다. 《위지》는 <위서>에 의거하여 호질 등이 주연에게 격파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직접 주연이 물러갔다고 말했다. 《오지》에서는 적오 5년(242년), <위서>에서는 정시 3년(242)에 위나라 장수 포충이 주연과 싸웠는데, 포충은 싸움에서 불리했고, 호질 등은 모두 물러갔다고 했다. 《위지》의 <소제기>에도 <손권전>에도 이 해는 평온했던 것으로 서술됐다. 이것은 진수가 오나라의 가화 6년(237년)을 적오 5년으로 잘못 생각한 것뿐이다.

9년 (246), 주연은 재차 조중으로 출정하였다. 위나라 장수 이흥(李興)등은 주연이 깊숙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보병과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주연의 퇴로를 끊었다. 주연은 밤에 출격하여 이홍 등을 반격했다. 주연의 군대는 승리하고 돌아왔다.

『삼국지』 「주연전」 #


(237)손권은 대장 주연(朱然) 등 2만 명을 파견하여 강하군(江夏郡)을 포위하였지만, 형주자사 호질(胡質) 등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므로 주연은 퇴각하였다.

『삼국지』 「명제기」 #


이상은 정사에 나오는 강릉 점령 이후 손권의 북벌들이다.

223년: 기춘
226년: 강하 석양
233년: 합비 신성, 육안
234년: 합비 신성, 광릉, 양양[12]
237년: 강하
239년: 요동
241년: 작피, 육안, 번성/조중
243년: 육안
246년: 조중

번성/조중 방면이 3번, 강하 방면이 3번, 회남 방면이 4번, 요동과 광릉 방면이 각각 1번씩이다.

회남을 공격한 것은 4번으로 양번 방면으로 나간 횟수와 큰 차이가 없다. 이마저도 단순히 합비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을 동시에 공격함으로 병력의 분산을 노렸다.

이것만 보더라도 손권이 합비, 회남에 집착했고, 형주를 등한시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5. 서주 논란[편집]


여몽에 부정적인 평가로는 손권이 차라리 방어 병력이 없는 서주를 먹으면 된다는 말이 있다. 사실 오나라 내부에서 서주로 진출하는 계획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일단 손책이 한 차례 서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손권 역시 서주목을 칭하였다. 이러한 계획이 아예 없었다면 반대로 여몽이 반박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이 또 상황이였던 것이, 조조의 위왕즉위 이후, 위나라에서는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다분했고, 한중공방전 이후, 개국공신인 하후연은 전사했으며, 위나라는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황이였다. 이에 촉은 관우가 형주에서 북진하여 위에 있는 반란군들과 혼란을 야기하며 충분히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조조는 합비에서 방어하고있던 하후돈, 장료관우를 마크했다. 다시 말해 당시 합비는 빈집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몽은 서주로 진출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여몽은 서주를 공격하면 취할 수 있으나 기병이 잘 다니는 곳이라 7~8만으로도 못 막는다고 확정해 버린다. 강릉을 먹으면 장강 앞에 강릉이라는 보호막이 하나 더 생기고, 형주 남부까지 있으니 협공이 가능하다. 결론은 약한 육군으로 건업 방어를 유지, 강화하고 무모한 침략을 통한 역관광을 피하기 위해서 오의 영토확장은 고작 강릉 방면밖에는 없었다는 것.

여몽의 발언은 '현재로서는 서주를 먹을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후한서 군국지에서 제왕세기의 인용에 따르면 244년 위나라가 파악한 오나라의 병호는 13만 2천, 진양추에 기록된 오나라 멸망시의 병호가 23만이었다. 이 당시 오나라의 총동원 병력은 10만 내외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7~8만이면 동원 가능한 병력의 거의 대부분이다.

즉, 촉에서의 공격은 아예 없다고 가정하고 전 병력을 서주로 돌린 다음에도 유수오에서 매번 조조와 싸워야 했던 여몽은 이를 지킬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원래 지방세력의 집합체 성격이 강한 오나라의 성격까지 고려해보면 서주를 공격해서 유지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은 현실적인 판단이다.

확실히 형주를 손에 넣어 장강 방어선을 확립한다는 것은 오나라의 안정에 중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당시 세력구도는 위라는 절대강자에게 촉과 오가 뒤로는 어떤 관계였든 서로 힘을 합쳐서 견제를 하는 관계였고 그렇게 해도 총 전력으로서는 촉과 오가 밀렸다.

아무리 막타를 가한 것이 관우가 위나라 번성 포위망을 푼 다음이라지만, 결국 서주 공격을 통한 협력을 안 하고 강릉을 점령한 것은 여몽이었다. 관우 쪽에서 먼저 여러가지 구실을 제공했다고 하나 오나라에서 먼저 유비가 스스로 얻은 땅을 내놓으라 하고 손부인을 시켜 유선을 납치하게 하며 어그로를 엄청나게 끌었다. 이로써 위나라는 위풍의 난과 각지의 반란, 관우의 공격 등으로 천도 논란까지 나오던 곤란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이 여파로 유비와 장비를 비롯한 촉나라는 매우 큰 손실을 입었고, 결국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북벌을 하며 한중에서 출발하는 방법만을 사용하게 된다. 다만 한중은 진령의 산길이 모이는 곳으로 기산도, 진창도, 포야도, 당낙도, 자오도 등 다양한 진출 경로가 있으며 한수를 따라 내려가면 상용에 도달하기 때문에 한 가지 루트로 고정되었다는 말은 과장이다.

여몽이 일단 형주를 손에 넣고 나면 다시 필요성에 의해 촉과 관계 정상화를 꾀해서 오나라 우위의 삼국정립의 구도를 유지해갈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적중했다. 유비 사후 제갈량은 결국 다시 오나라와 손을 잡았다. 오와 촉의 인구를 합치면 위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다만 명장이기는 했지만 그 시각은 천하보다는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평가처럼 지방세력의 세력 보존을 우선시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결과론적인 판단이다. 만약 오나라가 장기적으로 할거하는데 성공했다면 '천하 통일이라는 허황된 꿈을 꾸지 않고 실리를 택해 지역 할거를 도모했다' 이런 식으로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오히려 오나라는 존재 기간 내내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나 일격에 무너진 나라로 여몽의 전략은 결코 근시안적이지 않았으며 주유, 노숙, 여몽의 형양겸병 전략은 위진남북조 시대 내내 남조의 주요 전략이었던 건강-무창 체제의 프로토타입으로 멀리 내다본 전략이었다.

전국시대의 전국칠웅 중에 하나인 제나라는 서주와 청주만 방어하면서 나라를 오랜시간동안 지켜냈기에 여몽이 말한 서주는 방어하기 힘들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당시 중국의 정세를 오판한 것에서 비롯된다.

  • 첫째, 제나라의 핵심지역은 서주가 아니다.
제나라는 군을 설치한 다른 열국들과 달리 5도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5도에는 제나라의 수도 임치[13], 즉묵[14], 그리고 거[15], 평륙[16], 아[17], 고당[18] 중에 3개를 골라 넣는다. 6개의 도시 중 청주 소속이 3개, 연주 소속이 2개, 서주 소속이 1개이다. 서주 소속인 거 또한 서주 내에서 북쪽에 편향되어 있다. 제나라의 중심지는 어디까지나 태산 북쪽의 평야와 태산 언저리이지 팽성, 하비와 같은 서주 남부가 아니다.

제민왕이 송나라를 정벌하고 사수 일대를 차지했으나, 연나라의 반간 소진이 제나라에게 어그로를 끌려는 계책의 일환이었고, 결국 악의가 이끄는 5국 합종군에게 나라가 일시적으로 멸망한다. 이후 사수 일대는 위나라와 초나라가 차지한다.

  • 둘째, 당시 화북은 분열 상태였다.
전국시대에 산동[19]에는 5개의 나라가 분열되어 있었다. 북방에는 연나라가, 하북 평원에는 조나라가, 태산과 황하 사이에는 제나라가, 하남과 상당에는 한나라가, 조, 제, 한 사이에는 위나라가 존재했다. 조조의 위나라가 산동과 관중을 차지한 삼국시대와는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능하다.

  • 셋째, 기병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전이다.
중국사 최초의 기병은 조무령왕이 호복기사 개혁을 단행하면서 등장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말의 크기도 작은 편이었고 기병 전술이 발달하지도 않았다. 반면 조조는 북방 유목민을 용병화하면서 강력한 기병 전력을 보유했다.

제나라와 손권은 전혀 다른 상황으로 비교가 불가능한 케이스다. 제나라를 예로 들어 서주에서 버틸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확증편향에 불과하다.


3.5.1. 반론[편집]


가장 먼저 조조가 합비의 장료를 번성으로 보낸 것은 손권과 밀약을 맺은 후이다. 그리고 조조군은 손권군이 강릉을 기습 공격하기 전에 이미 서황이 자력으로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 상황에서 합비를 공격한다? 양번의 포위를 푼 조조군은 합비에 집중할 수 있고 결국 이전의 합비 공방전과 비슷한 형세를 보일 것이다.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병력의 손실은 필연적이다.

반면 형주의 경우엔 관우와 미방의 불화가 있었고 여몽은 병력의 손실 없이 형주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관우를 도와 합비를 공격하여 관우는 양번을, 손권은 회남을 얻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유비 세력은 회수와 장강의 상류 지역을 차지하며 지정학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유비가 천하를 통일하던 조조가 통일하던 아니면 둘의 세력이 대치하던 손권의 세력은 들러리로 전락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회남과 강동만 갖고서 버틴 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실제 역사대로 형주를 얻었을 경우엔 유비 세력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며 조조 세력을 상대로는 장강에 기대 방어할 수 있다. 실제로 오나라는 형주를 점령하고 61년을 갔으며 진나라가 익주를 소유하기 전까지의 공격은 모두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삼국의 인구를 보면

  • 오의 인구는 적오 5년(242년) 당시 호(戶) 52만 3천, 남녀구(男女口) 240만[20]
    멸망(280년) 당시 호 52만 3천, 관리 3만 2천, 병(兵) 23만, 남녀구 230만[21]

  • 촉의 인구는 멸망 당시 호 28만, 남녀구 94만, 대갑장사 10만 2천, 관리 4만[22]

* 위의 인구는 경원 4년(263년), 촉을 병탄한 후 94만 3423 호, 구 537만 2891 명, 촉의 인구를 빼면 66만 3423 호, 443만 2891 명[23]

오와 촉의 인구를 합치면 70만 3천 호, 324만 ~ 334만 명, 관리 7만 2천, 병사 33만 2천으로 위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24] 한실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유비의 세력이 조조와 협력할 가능성은 굉장히 낮으므로 장강에 의지하여 방어한다면 충분히 독자 정권을 수립할 수 있는 국력이다.

손권이 훗날 "만일 천하가 태평하다면, 두 군주가 나누어 다스려도 또한 좋지 않겠소!" 같은 발언을 하며 대일통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손권의 목적이 대일통이 아닌 지역 할거였을 경우, 형주 공략은 남쪽에 할거하면서도 유비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준 오히려 최선의 수였다고 평할 수 있다.


3.6. 1강 2약[편집]


손권의 선택을 긍정하는 근현대의 교수들도 1강 2약의 구도에서 2약이 1강을 냅두고 서로에게 상처만 입히며 1강이 상처를 수습할 시간을 준 상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손오 세력이 형주를 얻어서 획득만 이익만 설명했지 1강 2약을 고착시킨 나비효과라는 불이익을 불러왔다는 점은 침묵했다. 1강 2약으로 흘러간 문제에 관해서는 제대로된 반론이 없다.


3.6.1. 반론[편집]


우선 손권의 형주 공격으로 유비-손권 양군이 입은 피해는 관우의 죽음이 전부다. 손권은 형주에 거의 무혈 입성했고, 시점도 관우의 양번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이다. 즉, 이 행동이 1강 2약을 고착시켰다 볼 수 없다.

오히려 1강 2약을 고착시킨 것은 유비의 이릉대전이다. 역시 손권군은 별 피해가 없었으나 유비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자멸한 것이다. 또 손권은 이릉 직후 조비의 대규모 남정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애초에 1강 2약이라는 말은 손권에게 의미가 없다. 유비와 달리 손권은 얼마든지 조조, 조비한테 칭신할 수 있었고 실제로 조비한테 칭신해 오왕이 되었다. 한실 복위? 그런건 유비한테나 중요한 것이다. 오히려 유비가 손권이 1강 2약 체제를 악화시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배짱을 부린 상황이라 볼 수도 있다. 그렇게 1강 2약을 악화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했으면 한신을 흔쾌히 제왕으로 봉한 유방처럼 형주를 손권에게 넘겨줬으면 되는 일이다.


3.7. 왜 번성 공방전이 중요했나?[편집]


직설적으로 말해, 적벽대전 이후 천변만화하던 천하 정세가 영구히 정지하게 된 시점이 여몽의 형주 점령 직후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야기가 좀 묘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맹이었던 촉한에게 어그로라는 어그로를 다 끌어서 이릉대전이 발발, 촉한과 동오는 양패구상의 형태로 퇴락해버려 삼국시대는 1강 2약의 구도로 고착화됐다.

관우의 군대가 번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조조의 반응이 어땠던가. 당시 번성을 지키고 있던 조조의 장수는 위나라 최고의 장수라는 조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방덕, 만총, 조엄 등 충분히 유능한 보좌들이 형북에 포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 조조는 우금 등이 이끄는 7군과 서황에게 배속된 12영을 연속으로 대 관우 전선으로 파병했다. 거기에 조조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으며, 손권과의 교섭이 끝난 이후엔 하후돈과 장료를 중심으로 한 강동 전선의 장수들과 서주-청주에 주둔하던 장패의 군사들까지 소환한다. 앞서 도읍을 옮길 논의까지 있었던 것까지 합쳐 보면, 조조의 반응은 이미 상식적인 선을 넘은 것이 된다.[25][26]

당시 형주는 주유와 조인의 강릉 쟁탈전에서부터 시작하여 청니 대치, 익양 대치 등 여러 차례의 국지전을 겪는 바람에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관우가 여몽을 경계해 예비 병력을 남겼다는 기록까지 감안하면, 관우군의 규모는 기껏해야 4만을 크게 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정설. 이렇게 보면, 아무리 관우가 만인지적의 용장이자 유비 휘하 최고의 장수라 한들 조조가 그렇게까지 두려워 할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 아무리 용맹이 뛰어나고 군재가 좋다 한들 일단 이끄는 군의 규모가 위협적인 다음에야 크게 대비를 할 일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시각을 좀 더 넓혀 본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번성전을 번성에 국한된 전장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승기를 잡았던 한중 공방전의 연장선상에 놓고 번성전을 본다면 어떨까.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를 꺾고, 나아가 한중왕을 자칭한 사건은 피아를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거대한 충격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어떤 세력에게도 크게 못 미치던 최약체 방랑 군벌이, 불과 수 년의 영토 확장 끝에 최강자라는 조조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의의는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물론 조조에게 있어 실리적인 피해량을 따지자면 적벽전보다는 상황이 나았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자면 그게 아니올시다였다는 건데, 적벽전 직후로는 당장 중시해야 할 전선이 합비와 형북 일대 뿐이었겠지만, 한중전 직후로는 판도가 변해도 너무 크게 변한 시점이었다. 당장 형주에 관우가 있고, 강동에는 손권이 있다. 사실상 서쪽과 남쪽 전체가 적인 상황에 대전급 규모의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그 한 번의 패배로 끝날 일이 아니라 차후 전역에서의 어마어마한 피해를 예고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27]

이렇게 보면, 조조가 양번 전선에 전력을 다했던 것은 관우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 뿐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중에서 이미 한 차례 꺾인 판국이다. 여기에 천에 하나라도 번성이 관우에게 깨뜨려진다면, 그리하여 관우에 대한 호응 반란 세력의 준동이 거세진다면, 더하여 기세를 탄 유비와 손권이 각기 서쪽과 동쪽에서 북진을 시도하게 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위나라 최후의 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조조는 자신이 구축해왔던 세력의 사활을 걸고 각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어찌 됐건 제갈량은 출사하면서부터 형주와 익주의 동시 공격을 제안했던 바 있고, 손권이 표면적으로는 유비와 동맹 관계였음을 상기한다면, 위나라를 상대로 한 세 방향에서의 대대적인 공세가 결코 허황된 꿈만은 아니다.

여기에, 손권이라면 몰라도 유비 입장에서는 그 때가 조조에 대한 최대의 공세로 나갈 수 있었을 마지막 시점이었다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손권은 상대적으로 젊다 쳐도, 조조와 유비는 이미 노인장 소리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던 데다, 관우를 비롯한 휘하의 주력 장수들도 노쇠를 걱정할 때였다. 아직 주력 멤버들이 건재할 때, 자신이 이끄는 세력이 절정기에 다다랐을 그 때가 유비 입장에선 최고의 기회였던 동시에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승세를 탄 시점에서 확실히 조조를 몰아붙이지 못하면, 최소한 중원의 판도에 개입할 수 있을 만큼의 상황을 만들어 놓지 못한다면 기회를 날려먹는 거고. 아무리 조조가 적벽과 한중에서 몇 차례 꺾였다 한들, 그의 영토와 장수진과 병력은 여전히 천하 최강이었다. 그 불리하기 짝이 없는 전력비를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바로 관우의 북진이었다고 생각하면, 조조가 번성전에서 펼쳤던 이중 삼중의 대응책은 결코 과민 반응이 아니다. 당장 만총부터가 조인과 제장들을 만류하며 어떤 말을 했던가.

물론 이는 전부 가정과 추론에 불과할 뿐, 실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못했다. 관우는 양양을 포위하던 도중에 강릉 함락으로 물러나야 했으며, 여몽은 형주(정확히는 형남 한정)를 공격하여 영구히 자국 영토화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비는 이릉대전이라는 초유의 복수전을 감행했지만, 이 또한 곪고 곪았던 양국의 상처가 최악의 형태로 발현된 것일 뿐 위나라를 상대로 하는 합종에 있어선 그 어떤 이익도 주지 못했다. 손해만 잔뜩 안겼을 뿐 아니라 자신의 나라까지 망하게 할 뻔 했으니. 비록 제갈량이 어떻게 수습에 성공하긴 했지만, 결국 촉한은 그 리스크를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극복하지 못하고 삼국 중 가장 약한 나라로 주저앉게 된다.

이런 세력 약소화와 손해가 유비 입장에서만 논할 것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는지도 모른다. 사실 관우의 북진은, 손권에게도 충분히 어느 정도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앞선 선례를 보면, 원소와 조조가 서로를 노려보는 동안 손책은 서주를 공격하고 허창을 급습하려 했고, 주유는 적벽 직후의 조조가 세력 정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양/형/익주를 겸병하고 마초와 손을 잡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손권의 상황도 그에 못잖았다. 익주에 유비가 있고 형주에 관우가 있었으며, 실제로 조조는 엄청난 힘을 기울여 그 둘을 막기 위해 분전하고 있었다. 전략적 여건이라면 손권에게도 분명 기회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손책/주유와 손권의 선택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고 ...

물론 서쪽에선 제갈량이, 동쪽에선 육손과 주연 등이 수 차례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다. 기산에선 사마의가 패배했고, 석정에선 조휴의 위군이 만 단위로 깨지는 등 강한 타격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북진은 위나라의 각 전선에 대한 위협은 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제갈량과 주유가 각기 내놓은 대전략이나 마초, 관우의 행동처럼 전략적으로 거대한 변동을 일으킬 만한 요소에는 이르지 못했다.

조조라는 초세의 영웅이 순욱 같은 대전략가/대정치가의 보좌를 받고, 조인하후연 등 유능한 장수들이 영토 확장에 앞장을 서는 등, 수십 년 넘게 기반을 다진 위나라 ... 그 압도적인 국력 앞에서 유비와 손권이 이끄는 세력의 역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스타트 지점 자체가 달랐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한들, 전략적인 여건과 각 세력의 합종이 받쳐만 준다면 얼마든지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수 차례에 걸쳐 증명된 바 있다. 당장 십만 단위로 조조군을 수장시킨 적벽전만 해도, 근간을 잃고 도주하던 처지의 유비와 당시까지만 해도 지방의 중소 군벌에 불과했던 손권이 힘을 합쳐 이뤄낸 협동의 결정체가 아니었던가.

나아가 한중전에서의 조조군 격퇴와 관우의 북진, 이에 호응하는 지방의 반란 세력들, 거기에 시점이 어긋난 일이긴 했지만 위풍의 난과 같은 내부 모순들까지 결합된다면, 그러한 세력/국력의 격차를 전략적 구도 위에서 뒤집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한나라를 비롯한 숱한 제국 창업의 인과가 그러한 수순을 밟았다. 당장 조조만 해도 맞서는 게 불가능하다는 원소를 꺾고 나라를 세운 예가 아니었느냔 말이다.

그러나 관우가 번성 공략에 실패하고, 손권과 유비의 불안정한 동맹이라는 곪고 곪은 상처가 이릉대전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터지면서 천하 정세의 변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단순히 위나라가 한 위기를 넘기고 끝난 게 아니라, 정세를 뒤집을 만한 전략적 요소의 출현이 완전히 끝장이 나고 만다는 이야기다. 결국 위나라는 여전히 최강의 세력으로 군림하게 됐고, 내분 끝에 남겨진 오와 촉의 국력은 ...

단순히 촉이 좋고 유비가 좋고 관우가 좋아서, 그런 그들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손권과 여몽을 욕하는 건 절대로 잘못된 일임이 확실하다. 손권이 무슨 유비의 아랫사람도 아니고 그 좋을 일만 하라는 논리가 도대체 말이 되나. 더군다나 위나 오나 촉이나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냐의 문제지, 결국 모두가 경쟁자이고 종국에는 적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유비나 손권이나 몰랐을 리도 없고.

다만, 손권과 여몽이 택한 형주 급습을 굳이 비판한다고 하면 저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선택이 낳은 삼국 정립의 형태가, 당장의 세력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라면 이득일 것이되, 천하라는 구도 위에 놓고 평가한다면 어떻게 봐도 오촉 양국에 득이 될 게 없다는 점──천하의 통일을 목표로 하든 세력의 유지를 목표로 하든──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국력의 비율은 고정되어 더는 움직이지 않았고, 위나라에 대한 두 나라의 공격은 결국 국지전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손권(+여몽) 의 형주 급습에 대한 비판의 핵심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손책의 북진이나 주유의 서진이나, 여몽이 거론했던 서주 공략의 선택지만큼 어려웠을 일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책과 주유는 그 리스크를 알고서도 최선에 도전했고, 여몽은 차선을 선택했다는 것이 전후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이 형주 영유권 분쟁에서 (그 주체가 유비와 손권이었다곤 해도) 살살 관계를 주물러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결과를 내버린 쪽은 결국 위나라였다는 건데, 나름대로의 연횡책이었달까. 연합의 합종을 위해 소진의 역할을 맡을 만한 역량을 지닐 인물로는 첫손에 노숙이 있고 두손에 제갈량이 있었다지만, 전자는 요절했고 후자는 이릉 후에야 외교 전략적 능력을 발휘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봉추가 살아서 익주 지방에서 정치를 하고 복룡이 형주에서 동오와 외교를 했다면 세력 구도가 어떻게 됐을지도 재밌는 이야깃거리이다. 그렇게 촉한과 동오의 갈등이 뒤로 미루어지고 관우가 번성을 공략할 때 동오에서도 서주를 공격했다면 양면 전선에서 조조는 매우 고달팠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손권은 이런 선택을 했기에 동오는 이후로 한 번도 합비를 넘지 못 했고 장강 이남에서 틀어박혀 있었으며 제갈량은 기산에 나아갔음에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 하고 끝내 오장원에서 생을 마감하니 역사는 결국 쿠데타를 일으킨 사마씨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3.8. 명분과 세력비율[편집]


유비는 유기의 보호자라는 명분이 있었고 유표 세력과 7년간 통교했으며 유기는 유비의 참모 제갈량을 중시했으며 영웅기에 따르면 유표가 병에 걸렸을때 영(領)형주자사에까지 올랐다.

유비와 손권은 계약관계가 아니라 힘을 합쳐 조조란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운 동맹관계로서 이건 학자들이 인정하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정설이다. 손유동맹은 서로가 없으면 서로 조조에게 멸망당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관계이다. 다만 유비쪽이 조조에게 어그로를 끈게 많고 세력도 손권에 비해 열세였으므로 유비가 훨씬 아쉬운 건 사실이긴 하지만, 노숙의 말 따라 과연 항복한 군주의 삶이란 어떨까? 장수를 예로들면 장수는 원소와 결전 이전에 항복해서 세력의 균형을 잡는데도 도움이 됐고 후방의 요지의 군벌이라 지형적으로도 요긴한곳의 군주였다. 실제로도 장수는 몇천호의 고위직이었으나 조비때 자살당하고 그 아들은 반란혐의로 숙청당했다. 그래도 장수는 천하의 대세가 기울기전에 항복했고 그 이후에 유비나 손권이나 유표나 유장같은 군주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광고판같은 역할이기도 해서 더 대우받은건데 그것도 군주의 한번의 트집으로 자살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것이다, 그리고 만약 손권까지 항복한다면 남은 세력은 유장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금방 항복하거나 정벌되면 광고판 역할도 의미없는 것이다. 그냥 화려한 방에 살면서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고사는 죄수나 다름없다. 유비 역시 싸우던가 도망치던가 라면 손권 역시 싸우던가 도망치던가 뿐이다.

적벽의 해전에서부터 시작해 유비군은 육상전에서도 활약했는데 이들의 합세가 아니었다면 조조를 물리칠 수도 강릉성을 차지할 있었을지가 의문인 손권이다. 유기야 선주전 보면 유비 1만 유기 1만인데다 표도 유비가 유기를 형주자사로으로 올리고 사후 추대도 유비인 점에서 유기가 유비보다 어떠한 우위도 없는데다가 유비는 유표가 병들었을때 영형주자사로 올랐었고 나중에 강하태수였던 유기를 형주자사로 올렸으니[28] 유비가 유기의 휘하이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손권의 경우 손권이 유비를 두려워 하고 여동생을 바쳐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한 점을 보아 완전한 종속관계로 보진 않았겠지만 형주 내놔, 익주 침공 시도나 무례한 외교 행위 등 전반적으로는 유비를 아래로 손권이 봤다는 시각이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유비는 경구에 형주를 감독하겠다고 다녀와 강릉을 얻은 후 두번 다시 손권을 만나지 않을것이며 그의 밑에 서지 않을것이라 주변에 선언하면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우리는 손권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기도 했다.

게다가 유표의 아들 유기를 흡수하고 유표의 구신과 구병의 투항까지 유비가 형주를 차지할 명분은 완벽한데다 형남 4군을 얻고 유비는 순식간에 대세력으로 성장한다, 손권도 환성 제외하곤 사람이 없어 유명무실한 여강 제외하곤 단양 오 회계 예장 겨우 4개군에 주유에게 겨우 1만을 준 엇비슷한 레벨의 군주이다. 형남 4군은 동오 4군과 인구도 비슷한데다가 전쟁의 피해도 입지 않아 수만의 병력을 육성할 수 있는 땅이었다, 동맹관계이긴 하지만 유비가 형남 4군과 공안을 차지하고 유표의 옛 병력과 여강의 수만 부곡을 얻은순간 손권은 유비쪽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는 손권이 유비를 형주목으로 인정하고 여동생을 바쳐 우호관계를 굳히려는 데서도 설명된다. 실점유를 한것도 유비지만 유표의 구신 중에 손권에게 자발적으로 투항한 인물이 없으며 노숙이 강릉을 빌려주면서 말했듯이 형주군민들도 만족들에게도 당시 손권은 민심을 얻지 못했다. 유비를 손권이 안 커지게 막을 수 있음에도 키웠다기 보다는 여건상 못 막을 시기라고 보는게 신빙성이 높다. 점령을 막을 여력이 있었는데 안 막고 명분상 우위인 유비를 이 정도로 키워놨다면 주유전의 손권이 주유와의 대화를 통해 유비를 경계하는 모습에도 상충된다. 차라리 유비가 커져서 먹을 수 없으니 노숙의 입장처럼 함께 있으면서 최대한 이익을 보자, 조조가 있는 이상 지금은 출혈을 감수하면서 형주를 먹긴 힘들고 나중에 삥을 뜯자라고 인식한게 적당할 것이다. 촉한 내 인식인 자력으로 얻은 땅이라는 촉서 기록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또 세력비율로 보자면 제3자의 눈으로 봤을 때도 손권이 유비보다 그정도로 큰 우위였는가 말하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후한서 군국지 기준으로 남군 강하 형남 4군이 회남 없는 양주 인구랑 400만명 정도로 엇비슷하다. 남군공방전 끝난 뒤면 유비도 남군 빼고 다 가진 상황임으로 후한서 군국지 기준 이 정도만 해도 300만 넘는 인구로 호락호락한 상태가 아니다. 인구 수는 삼국시대 때 많이 감소하지만 세력이 비슷하다는 추론은 할 수 있다. 자기와 비슷한 몸집까지 키워놓은 상대를 두고 '저 사람은 나와 종속적인 연합 관계이다'라 한다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명분은 후달리는 상황에서 말이다. 적벽대전 때 직후엔 양쪽의 세력 차가 많이 날 때이긴 하지만 이후 유비가 형남 4군을 손쉽게 흡수하고 손권이 합비공방전 때 원군이 온다고 하자 상황 확인도 하지 않고 급하게 퇴각한 상황으로 보면 남군공방전에 동원한 수만명이 형주 방면에 동원가능한 최대 전력이라 보여진다. 수만명으론 유비와 조인을 둘 다 상대할수 없고 유비 없이 조인과의 전투가 승리할지 장담도 없다. 한마디로 합비, 강릉을 공격하는것만으로도 손권은 여력이 없었으며 유비와 손권이 손을 안 잡고 서로 싸우는 각이 세력이 큰 손권에게도 안 나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세력비로 보아 조조를 앞에 둔 상황에서 동맹 관계를 벗어난 속국이나 무조건 밑으로 기어들어가야는 전력으로 볼 정도로 적다고 할 수 없다.유비가 손권을 거기장군 영(領)서주목으로 추천하는 표를 올렸고 손권은 그 답례로 유비를 영(領)형주목으로 올렸으며 유비가 나중에 경구로 와서 형주를 감독하겠다, 즉 강릉을 빌리겠다고 한 것도 순순히 수락했다. 이는 유비에게 퍼주는게 아니라 형주에게 인심을 잡지 못했고 방어선을 줄이기 위함이다. 또 반조조라는 명분도 사실 유비가 제공해준 것이다. 조조의 치세 20여년동안 유비는 반조조의 간판이었으니까. 더군다나 형주는 손권과 무관한 유표의 땅으로 유기의 뒤를 이은 유비가 자립할 명분은 충분하다.


3.9. 외교 문제[편집]


유비는 손권과의 외교를 소홀히했고 결국 이 때문에 관우의 독단으로 인해 형주를 잃었다는 인식이 있다. 실제로 익주 입성 이후 손권측이 사자를 보낸적은 있어도 유비가 사자를 보낸것은 이릉대전 이후에나 있었던 일이다.

이 일만 보면 유비가 손권과의 외교에서 소홀히 하고 동맹국 군주를 모욕하고 쌀을 멋대로 가져가는 관우를 통제하지 않아 형주를 잃었다고 인식하기 쉽고, 유비의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차라리 유비의 직신에 가까운 방통서서가 죽지 않거나 잡히지 않아 관우를 보좌하기라도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 유비에게 이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오나라라도 외교 문제에 있어서 촉한만큼의 문제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적벽대전 이후 정사의 기록으로 볼때 유비는 분명 대위 전선의 사령관의 형태로 직접 싸운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당시 병력 동원력에 있어서조차 적벽대전 당시에도 유비손권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당시 형주 전역의 위의 사령관인 조인을 공략하던 것도 주유유비, 이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진행한 일이었고 이후 유비 자신의 병력으로 형남 4군의 치소를 공략하여 지배한 것도 분명히 정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3등분된 강하군의 가장 큰 영지를 차지하고 있던 것도 유비였다. 즉 남형주에서 사실상 남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형주 행정은 남군 공방전 기간 동안 손권과는 독립된 동맹 세력인 유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심지어 역사학계 의견 가운데는 아예 '오에게 남군을 대여받았다는 내용도 오측이 낸 날조다' 라는 의견도 있으며 대여가 사실이더라도 형주의 남군만을 대여했던 것이다. 아무리 정사를 확인해도 유비가 지배한 지역 중 남군을 빼고는 오의 병력이 유비를 돕거나 주도적으로 지역을 공략한 부분을 찾기 어렵다.

형주전역 중 남군 공방전 당시 유비가 독립된 사령관의 입장에서 군을 지휘하지 않았다면 관우와 악진의 대치, 주유와 장비의 진공 등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주유가 손권에게 유비 억류 후 관우장비를 자신의 휘하로 두어 전투할 수 있다면 대사를 안정할 수 있다고 한것으로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남군 공방전 당시 주유에게 관우장비의 지휘를 할 수 있는 명령권이 존재했다면 그냥 관장을 자기 마음대로 동원해도 되나 주유는 그러지 못했고 당시 병력과 장비를 교환하자는 유비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금 우리가 볼 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유비의 좌장군 직책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나 손유 동맹 당시 유비가 손권을 거기 장군 영서주목으로 상표하기 전까지만 해도 양군의 최고 직위는 유비의 것이였다. 세력이 작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관위가 아니었다. 공안 역시 주유가 주고 싶어서 준 것이 아니라 유비주유와 함께 남군을 공략했는데 그 전리품이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기에 땅을 떼어서 준 것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후 유비가 공안을 주도로 삼은 이후 땅이 좁자 경구로 직접 손권을 만나러가 형주를 감독하기를 요구했고 이는 다시 말해 강릉을 빌리겠다는 말로 결국 주유가 죽은 후 노숙에게 남군 전체를 빌려썼는데 이후 익양대치는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오나라의 행태도 그다지 정상적이진 않았다. 먼저 관우와 노숙의 대치로 노숙제와 관우뢰가 세워진 이후 관우노숙의 대화 중 관우가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여 익양대치가 유비 측의 잘못이다라고 하는 것도 매우 웃기는 부분이다. 정사를 본다면 유비는 분명 자신의 군세로 형남 사군을 공략했고 형남 4군 공략 이전에도 이미 강하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오에게 실제로 대여한 영토는 남군(강릉)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지도를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운데 강하와 형남 4군을 이어주는 주도의 역할로 남군이 지리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손권 역시 조조를 막기 위해서 유비를 이곳에 주둔시키길 원했고 이렇게 서로 간의 이해 관계가 맞아서 대여고 뭐고가 있었지 어디에 노숙 말대로 일방적인 시혜가 있었는가 말이다.

분명 남군 일부만을 대여했음에도 노숙손권은 이를 형주 전역의 대여로 바꿔버렸는데 즉 자기네들이 적벽에서 이겼고 유비를 구원해 줬으니 유비가 형남 4군을 얻은건 자기들 덕이라는 논리다. 물론 여기서 처음에 유비가 없었으면 자신들이 조조를 막을수 없다고 인정한것은 입 싹 씻는다. 정작 여태까지의 사건 전개와는 전혀 다른 오나라 측의 일방적인 주장만 있을 뿐. 이래서 노숙관우의 대치시에 문답으로도 이를 설명할 수 없고 남군의 반환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강하와 다른 지역의 강탈이 되는 상황도 명백하다. 남군을 빌릴 때 유비손권을 만나 땅을 얻기를 요청하고 주를 관할하겠다고 청했다지만 정작 그때 손권이 빌려준 것, 유비가 얻고자 한 땅은 남군의 일부이고 유비가 제압하거나 가지고 있던 다른 형주 전체가 아니다. 당시 형주목은 명목상으로나 실질상으로나 유비였다. 이는 유비가 남군 공방전에 가담한 것을 거의 기술조차 하지 않으려 든 오나라 쪽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고(오서 주유전) 손권 자신도 유비가 자신을 거기장군 영서주목으로 삼자 유비를 영형주목으로 삼는등 유비가 형주목이라는 걸 인정한 상황이었다.

손권은 여기에 대해서 어떠한 태클을 걸거나 한 바가 없으며 오히려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까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토지를 유비에게 나누어 주면 안된다는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비에게 자신들이 지배하는 형주(남군)을 빌려주어 조조와 대적하게 하자는 노숙의 남군 대여를 승인하는 모습을 보였다.(오서 노숙전) 조조와 대적하기 위한 몸빵으로 삼았을 때는 형주 지배권에 대해 별 말이 없더니 유비가 서촉을 얻고 세력이 강대해지자 형주 전체가 자기 것이라고 우긴 것이다. 유비는 익주를 얻은 후 이런 손권의 행태에 량주를 얻으면 형주를 다 주겠다고 했지만 결국 익양대치 때 형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병력으로 맞선것을 볼 수 있듯이 손권 측의 형주 관련 억지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을 돌리려고 했다는게 분명하다.

물론 손권을 속이고 자기가 단독으로 파촉을 꿀꺽 삼킨 유비의 잘못도 크고, 손권이 저렇게 조폭같은 짓을 할 때 유비도 빌린 남군을 돌려주지 않았으니 유비의 잘못도 물론 있다. 그러나 까놓고 말해서 손권이 처음 남군을 빌려줬을 때도 대체 언제까지 남군을 돌려달라고 제대로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다짜고짜 아직 유비 세력이 익주를 얻고 정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거의 막무가내식 반환 통보만 있었을 뿐이다. 물론 정확하게 언제 돌려줘야 하는 시기를 잡지 않은건 처음부터 유비의 잘못도 있다. 하지만 이 당시 손권은 유비 본인의 생애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 그렇게 믿을만한 동맹이 이미 아니었던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애당초 손권이 유비를 상대로 동맹으로서 신뢰감을 주지 못했던 것은 매한가지다.

또한 오의 익주 진공의 경우 유비주유가 처음 계획을 입안 후 진공 도중 사망할 때까지도 해당 계획을 반대하지 않았다. 유비 본인의 생애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이때는 강릉을 얻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후 손유의 영안 진공시에 반대를 했다고 나오는데 이 반대의 사유를 선주전에서는 신의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강릉을 이미 얻은 상태에서 손유의 3만군으로 영안 돌파가 무리인 상태에서 영안 돌파 실패시 이후의 감당은 온전하게 유비에게 전가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 주유의 진공은 반대하지 않았으나 손유의 진공은 반대한 것도 이런 이유.

유비라고 처음부터 손권과의 동맹에서 허술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유비손권은 분명 손권의 세력이 강성했으나 호족 연합체의 정권의 모습을 한 오나라보다는 군사적 집중도가 압도적인 유비의 군세가 전투에 좀 더 효과적이었고 그 때문에 적벽대전부터 유비가 앞장서서 싸우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관직은 잡호 장군이었던 손권에 비해 유비는 사방 장군인 좌장군으로 관위도 유비가 더 앞섰다. 유비는 손권을 거기 장군 및 서주목으로 조정에 직접 상표하였고 손권 역시 영형주목으로 유비를 인정하는 등 세력의 우세를 정리하는 역도 맡아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적벽대전 당시 급할때는 동등한 동맹처럼 대하다가 나중가면 손권 측은 유비를 말이 동맹이지 실제로는 핍박하고 있었다는 것, 삼국지집해에는 대놓고 유비의 본거지 공안에 오나라의 관원, 군사들을 손부인이 다수 데리고 들어와 유비의 성 근처에 성을 쌓고 대치했으며 유비가 항상 이를 두려워했다는 막장 기록이 나오며 이쯤 되면 이건 정략 결혼이 아니라 감시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 익양대치 전 손부인유선을 볼모로 오에 데려가려고 했던 행위도 사실 말도 안 되는 건데 볼모의 언급도 없이 한 세력의 후계를 이런 식으로 납치하려 한 행태는 그 개막장으로 유명한 춘추전국시대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어처구니없는 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 측이라고 언제까지나 손권을 좋게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대치 직전 여몽은 장사, 계양, 영릉을 공략했는데 당시의 내용을 보면 손권이 장사와 영릉과 계양에 태수를 보냈으나 관우가 이들을 쫓아보내니 화를 내어 병사 2만과 여몽, 여대 등에게 형남을 공략하게 했다라고 나온다. 이것도 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으로 당시 유비손권은 분명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형주를 지키는 도독 관우와의 마찰을 유비와 해결하지 않고 바로 군사를 보냈고 결정적으로 그 군대가 관우가 있는 남군, 원래 돌려 받아야 하는 남군이 아닌 유비가 자력으로 쟁취한 형남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즉 인접한 동맹 세력의 제대로 방비되지 않은 국경을 대놓고 침공한 것인데 당시 형남의 태수들만 보더라도 제대로 된 장수 없이 문관들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설마 동맹을 공격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는 손권이 얼마나 유비 측의 형주 지배를 우습게 보고 계획적으로 형주를 공격할 작정을 하고 사실상 모두 자기 땅이라고 우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익양대치만 봐도 여몽의 2만이 형남을 정벌중일때 관우의 3만과 노숙의 1만이 대치한다. 뒤에서 유비의 5만이 백업중이었고. 만약 유비가 조조에게 칭신하고 오를 같이 정벌하자는 제안, 즉 손권이 관우를 칠 때했던 똑같은 스탠스를 취한다면 관우의 최후 대신 손권의 최후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권은 유비는 절대 조조와 손잡지 않을거란걸 알고 있었고 그러니 3만의 관우군에 1만의 노숙군을 보낸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오는 촉은 무조건 자신과 손을 잡아야한다는걸 알고 있었고 그걸 기반으로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유비가 형주를 주겠다는 식으로 말한 것도 손권의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동맹이 파탄나 고립되는게 두려워 없는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한 것이고, 유비가 촉을 정벌하고 어느정도 세력비가 대등할 때도 손권이 형주소유권 분쟁을 걸었던 건 이런 외교스탠스의 차이를 감안한 결정으로 보여진다.

어쨌거나 여몽의 형남 공략 성공 이후 유비가 군세 5만을 들어 형주로 내려오자 익양대치를 끝내고 바로 협상을 하여 형주를 두 개로 나누어 영토 분쟁을 끝내며 오의 영역에 가까운 강하의 지배 영역과 장강 방어선을 위한 장사와 계양은 손권이 원래 형주의 주도였던 무릉과 영릉, 오에게 대여했었던 남군은 유비가 가져가게 되는 것으로 영토 분쟁은 모두 끝난 것이다. 손권 입장에서는 남군을 내주었지만 강하, 장사, 계양 등 원래 자신의 영토가 아닌 지역 세곳을 단숨에 꿀꺽 삼킬 수 있었다. 이런 동맹을 상대로 좋은 말이 쉽게 나온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인 것이다. 익양 대치 이후 형주의 영토 분쟁은 다른 말이 나올 수 없게 일단락이 되지만 정사의 내용만 가지고 볼 때도 손권유비는 정상적인 동맹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동맹 관계였으며 유비라고 딱히 공명정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맹으로서의 오의 행태는 정상적인 동맹 세력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뢰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할 수 있다.

그 감정이 유비 세력의 2인자인 관우라는 인물에 대표되어 집중되어 나타나긴 했지만, 당시 이런 오나라의 행태에 대한 불쾌감은 유비의 최고 책사인 제갈량을 비롯해 유비군 중역 대부분이 공유하는 감정이었다.[29] 이전 손부인의 유선 납치로 유비 휘하의 장수들의 손권에 대한 인식이 바닥인 상태에서 결혼 동맹을 제시했으니 당시 관우의 위치에서 저런 식의 반응은 분명 외교적인 결례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까놓고 손오 측도 노숙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동맹 외교를 할 생각조차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익양 대치에서 한쪽만의 책임을 물려면 두 세력 간에 각각의 실수가 비슷한 정도로 발생하거나 한쪽의 실수가 다른 한쪽의 실수를 전부 합친 것만큼 커야 하는데 이 두 가지 전부 손권유비보다 더 낫다고 할 상황은 어디에도 없다.

손권의 익양 대치 전까지 유비에 대한 대우는 아래와 같다.

1. 결혼 동맹을 빙자, 동맹 세력 본거지 코앞에 병력 주둔
2. 동맹 세력의 후계자의 납치 시도
3. 동맹 세력의 경계 기습
4. 대여한 영토외의 다른 영토까지 넘기라고 요구

유비가 손권에게 저지른 외교적 결례는 다음과 같다.

1. 남군의 반환을 미룸
2. 익주의 공략을 거부함
3. 손권이 파견한 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관우가 쫒아냄

심지어 장사, 영릉, 계양의 경우는 빌린 땅도 아니며 이는 모든 사서에 유비가 자신의 군으로 직접 점령한 땅인 것이 기록되어 있다. 병력이라도 빌렸으면 이해를 하지만 손권적벽대전 당시 많아야 3만의 병력을 동원했을 때 유비는 최저 2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행동하면서 이후 유비와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고 명백히 땅을 정확히 둘로 나누어 분쟁을 완전히 종료했음에도 관우의 무례함을 명분으로 삼아 동맹을 배신하고 관우를 죽이고 유비의 형주 영토를 빼았고 이후 형주에 대한 군사행동을 하는 유비에게 우리보다 조비를 공격해라고 서신을 보내자 배송지가 서신에 쓰인 글자가 아깝다고 평할 정도였으니 더 말이 필요할까. 결과적으로 형주 공방전을 거쳐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대패하여 오의 기존 유비가 지배하던 형주 지역에서의 오의 지배권을 온전히 확보하게 되나 이것도 너무 무리수가 많은 것이었다. 육손이 손권에게 말한 것처럼 유비가 수륙병진으로 나왔더라면 이릉 전역을 패배할 수도 있었으며 이는 단순하게 형주의 상실만이 아닌 오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사안이기도 한 것이다.

당시 세력의 호오를 떠나 형주 전역에서 보여준 손권의 행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해가 간다면 관우의 무례한 행동에 손권이 분노했다는 것인데 손권은 정작 관우의 무례함에 한번도 그 주군인 유비를 상대로 직접적인 항의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관우 말고 다른 사람으로 도독 교체 요구를 한 적도 없다. 그저 형주 강탈의 명분으로만 이용했는데 진짜 유비와 정상적인 동맹관계를 맺으려고 생각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3.10. 조조의 형주만이 상업이 발달했고 풍요로운 것이다?[편집]


상용-양양 사이에 상업이 발달했고 조조가 가지고 있는 형북만이 손권유비가 가지고 있는 형남보다 풍요로웠다는 의견이 있는데 도저히 출처를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찾아낸 것은 주연전 주석의 조중 땅이 풍요롭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상업의 발달과는 무관하다.

더욱이 풍요롭기 그지 없다는 양양번성조비손권이 무섭다며 불태워서 완충지로 삼아 버린다. 이때도 사마의는 "양양은 수륙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라고 표현을 하지만 양양이 풍요롭다던가 상업이 발전했다던가 등의 말은 하지 않는다. 손권이 진소를 보내 점령하자 다시 조인을 시켜 재점령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풍요로운 땅을 불태워서 버릴 수 있을까? 문빙이 점령하고 있던 강하는 치소의 위치도 추정하는 정보가 거의 없는 곳.

만약 남양 땅의 풍요로움을 말하자는 거였다면 장수조조에게 항복한 이후로 쭉 조위의 땅이었으니 거론할 가치가 없다. 또 형주의 인구가 줄어든 것은 주유조인이 전쟁하면서 쑥을 재배하고 유비가 열심히 키워놓으려고 했으나 다시 손권이 망쳤기에 그랬다는 말이 있으나 기록 역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그나마 확인 가능한 것이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부분인데 이건 비단 오나 형주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다.

다만 남양-양양-남군 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풍요롭고 개발이 잘 되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일단 기본적으로 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물을 대기 쉬운 곳, 즉 강을 기점으로 시작된다는 것과[30] 양양 지역은 조조가 침공하기 전까지 유표가 무려 20년 간 형주의 주도로 다스려 왔다는 점,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남양의 인구수는 후한에서 제일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라는 점과 화북과 다이렉트 연결되어 중원 지역의 발달된 농업 기술을 도입하기 쉬웠다는 점을 보았을때 그 바로 옆인 양양의 경우는 개발이 잘 되어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서의 기록 역시 장강 이남 지역의 경우는 남군을 제외하고 기록 자체가 대단히 적다.

참고로 왜 있을 이냐면, 조비의 명을 받고 조인이 양양을 불태우던 시점에서는 양양은 이미 황폐화 되어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단 조조가 형주를 침공할 당시 유비가 10만 단위의 군민을 이끌고 신야에서 남하했었으며, 형주 공방전 때는 관우가 번성으로 북상하면서 이 지역은 아예 물에 잠겨버리기 까지 한다. 거기에 다시 오나라가 양양을 다시 점령했다가, 조인서황이 이 지역을 재탈환했는데 이 정도면 아무리 풍요롭던 지역이라도 쑥밭이 안 되는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장수에게 식읍을 내릴 때도 아직 1천 호를 채우는 사람이 없는데 장소가 처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말이 있으며 장제는 상소를 올려 현재 백성들의 수는 한나라 시대의 커다란 한 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거기다가 진군이 올린 내용 중 일부를 봐도 인구가 예전의 한군과 같다고 하고 있다.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두서의 상소를 봐도 열 개 주가 한 개 주에 불과하다고 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 형주의 인구가 영제 때보다 줄어든 것은 당연하다.[31]

3.11. 형주 관리[편집]


이 설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무릉만이 문제인데 주요 근거가 촉한 세력은 이민족들과 매우 친했다는 것과 그들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는 것과 이릉대전마량이 비단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오계만이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친분을 맺어 마량이 거주하는 치소까지 현지 주민들 주도하에 건설하게 한 것(수경주)이다.[32] 이에 대해서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만 마량 가장 가까운 군대가 익양에서 유비의 지원군을 막고 있던 보즐.

또한 무릉의 종사였던 번주가 무릉의 이민족과 영합하고 습진과 약속을 정해 거병했다가 손권에게 격파된 이후 습진은 다시 영릉의 7개현을 점령하고 소릉태수를 칭하면서 군대를 이민족 지역의 경계에 주둔시켰으나 이전에 관우 수하에 있던 부하 중 반준이 당시 이을 토벌했다. 영릉과 계양의 군대는 결국 유비에게 호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비 퇴각 후 보즐에게 진압되었다고 한다.

즉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했던 형남 4군 중에서 3군이 유비가 진격하자 호응하려고 했다는 의미고 이 지역의 상당수의 무릉만이들이 여기에 호응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이렇듯 보즐과 반준이 형남 일대에서 대대적인 친촉 반오 세력 봉기에 맞서 군사 활동을 한 정황이 있는데 마량이 후퇴 중 혼란에 죽었다는 것은 맞겠지만 꼭 무릉만에 죽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그리고 적어도 이런 상황을 보면 유비가 적벽부터 형주 공방전, 이릉대전까지 형주 인심을 오나라보다 더 잘 잡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유비 10만 형주 민간인 남하 사건을 굳이 대지 않더라도 당장 노숙부터가 유비에게 땅을 빌려줘야 한다는 명목 중 하나가 이 지역에서 오나라가 민심을 못 잡았다고 대놓고 실토하는 마당인데 더 설명이 필요한지? 물론 관우 공격 이후 여몽이 남군에서 군율에 엄정하고 관용을 베푸는 통치로 인심을 안정시켰다지만 그 순간에도 육손은 촉 휘하 형주 각지의 저항 진압 및 항복 작업, 호족들이 이끄는 이민족 토벌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유비 통치 시기에 유비가 직접 무릉에 주둔했고 이 시기 무릉만이 촉 상대로 변란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으며 어쨌거나 이릉대전 당시 무릉만이가 촉한 쪽에 호응한 것은 사실이다. 무릉만에 한정하지 않고 이민족들로 범위를 넓히면 남군 공방전 때 관우가 패한 다음에 남군(南郡)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33]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하는 등 결코 관우도 이민족 통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시당초 남군 위에 있던 고을과 부락이 위나라에 항복하는데 이 근처에 사는 만이들이 위나라에 항복하는 건 전쟁 중인데 관우의 통치와는 상관없이 충분히 있을만한 일이다.[34]

관우의 정치에 대해 좋은 말을 찾는다고 하면, 여몽육손에게 형주를 치기 위한 의도를 설명하면서 했던 짐짓 했던 말인[35]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가 있지만 이 말 하나로 관우의 통치를 세세히 살핀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36] 사대부나 일반 병졸 쪽으로 나가면 장비전에는 관우가 사대부에게는 교만하지만 병졸들에겐 잘해주었다라 되어 있다.

다만 이후 남군성 사람이 처음엔 여몽의 진입에 반발하여 계략을 짜다가 진압당한 장면을 보면 관우의 통치가 민심을 처음부터 이반시킬 정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관우가 통치하던 백성들이 여몽이 남군을 점령하고 평소보다 은혜를 후하게 베푸는 정치를 펴 다스리자 병사들에게 이를 말하기까지 한 부분은 그만큼 여몽의 군정이 탁월한 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익양 대치 때는 장사, 계양의 두 군이 여몽의 편지 한 장에 항복한 것을 관우의 통치 문제로 보기도 하나 애시당초 이 두 군이 항복한 것은 편지 한장에 그냥 넘어간 게 아니라 손권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한 상태에서 군을 동원해 편지로 항복시킨 것이므로 통치 문제로 보긴 어렵다.

학보가 여몽의 공갈에 속아 항복했으며 관우가 죽을 때는 사인이 우번의 내응이 있다는 말에 항복하고[37] 미방은 아예 내통하여 형주의 수비가 쉽게 뚫리도록 도움을 주어 이게 형주가 바로 항복하는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부하들의 행보를 보면 인선 쪽에서 부족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나 형주 탈취 당시 저항하거나 촉으로 도주하거나 협조를 거부한 관우의 관리들도 있었고 몇몇 관리는 관우가 죽은 다음에도 저항했으므로 꼭 그렇다고만 볼 순 없다. 그리고 공신 반열에 들고 유비의 인척이었던 미방의 내통을 과연 누가 예상하겠느냐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거기에 이것에 대해 애초에 이러한 책략은 공격 시작하고 부랴부랴 준비해서는 신속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익양 대치나 관우 공격 때의 신속한 점령은 손권이 미리 형주 일대에 광범위한 정보 공작을 펼쳐서 만일의 상황에 대비 해두었던 성과를 얻은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미방의 내통이 형주 탈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만 봐도 그러하다.


3.11.1. 반론[편집]


다만 '이민족과 좋게 지냈다=관리를 잘했다'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강경책과 온건책의 차이이지 누가 더 잘한 문제가 아니다. 손오 정권에서 이민족 반란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전부 진압되었으며 반란이 진안된 땅에는 새롭게 현이 설치되어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당시 산간 지방은 이민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쪽에서 내려온 한인들도 적지 않았다. 손오 정권은 반란을 진압한 후 이들을 전부 호구에 집어넣어 관리에 들어갔다. 형주 자체를 잃을 정도의 대규모 반란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존에는 관리하지 못하던 지역을 새롭게 얻은 것으로 고평가 요소이다.


3.12. 관우에게 형주를 맡긴 것은 최선이었나?[편집]


당시 유비군 내에서 관우는 주로 비상시에 최고 사령관인 유비의 별동대 및 대체재로 여겨졌던 정황이 있다. 실제로 유비는 자신이 병력을 이끌지 않을 때에는 대부분 별도의 군을 관우에게 통솔하게 했다. 서주에선 하비에 진수하게 했고 형주에선 별도의 수군을 이끌게 하고 이후에도 형주에 진수시키면서 독자적인 군권을 주었다. 유비가 용인술이 굉장히 뛰어났으며, 한중에서는 한중태수 자리를 장비가 아닌 위연한테 줬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순히 관우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서 형주를 맡긴 게 아니라, 관우가 충분히 단독으로 형주를 지켜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많이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관우는 전성기 형주의 1/3도 안 되는 강릉, 무릉, 영릉 삼군의 병력으로서만 천하를 진동시켰다. 북쪽에선 위가 있고번 동쪽엔 오가 있고 전선이 2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오에서는 여몽이 기회를 엿보았고 위도 조인이 번성을 지키고 언제든 서황, 장료등이 치고 내려올지 모르는데다 주요 참모, 장수진은 익주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물론 관우가 손권과 외교를 잘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그 동맹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방어하기 유리한 양번에 집착했다.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다면 강릉보다는 막기 쉬울 것이라 판단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관우가 전장에서 보여준 능력을 생각하면 정치와 외교 문제만 없었다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실제로 번성까지 위협하고 면수를 장악해 양양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단계까진 성공하기도 했고.

삼국의 형세가 정립된 이후 한 지역을 진수하는 일개 장수 가운데 세력의 2인자로서 제후급, 준군벌급으로 세력을 갖추고 한 지역을 진수한 장수는 거의 관우 정도이다. 비율로 봤을때 위나라의 수춘에 주둔한 사령관들 역시 만만치 않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력상의 비율이나 세력내에서의 위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관우는 여기서 홀로 유비의 익주 진공 이후 상대적으로 역량이 떨어지는 2선급 장수들을 수습해서 홀로 뭐든지 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물론 유비 역시 이걸 모르지 않아서 상용을 점거하고 행여나 있을 원군요청에 대비케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관우의 역량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형주에 누가 오던지 관우라면 막을 수 있다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여몽은 관우가 진수하고 있는 형주지역을 정면으로 뚫어낼 생각을 하지도 못했으며 육손을 이용해서 관우를 안심시키고 진수된 병력들을 북쪽으로 실어오르게 하고, 위나라와 손을 잡고, 배신할 마음을 품은 미방을 몰래 회유하여 방어선을 약하게 하고 나서야 간신히 형주를 뒷치기 할 수 있었고 그나마 남군을 점령하고도 내부적인 저항에 직면에야 했다. 분명 이런 여몽의 계략은 대단한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이 정도의 사전준비와 내부에서의 배신 계획 없이는 관우가 원정나간 형주도 정면에서 함부로 치지 못했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다.

형주 세력은 사실상 유비와 주력 세력이 입촉을 하고 안정화 시키는 과정에서 독립적인 군벌로 남게 되는 거나 다름없는데 이 때 아무리 고려해봐도 관우 말고 그러한 역할로서 형주를 맡을 인물이 없다. 현실의 조직에서는 게임처럼 그냥 능력치 높은 애 맡기면 되는 게 아니라 세력 내 서열이나 정치적인 균형이나 입지 등 여러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동오와의 동맹 균열은 유비 쪽에도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워서 오직 관우 혼자 깽판쳐서 동맹이 깨진 게 아니다. 누가 간다고 오나라랑 친할 수 있을까? 관우가 손권을 개라고 한 것은 연의에 나오는 내용일뿐이고 오나라에게 직접적으로 문제 일으킨건 상관에서 쌀 가져간건데 이때 이미 오나라는 뒤통수 칠 준비하고 있었다.[38] 관우가 양양정복 직전까지 갈 때 관우도 외교적인 결함을 보였지만 손권이 유비 관할 형주도 내놓으라고 우기기 해서 어차피 터질 문제였다.

가장 중요한 건 능력보다 신의라고 할 수 있다. 마냥 손권과 친하게 지낼만한 인사를 형주에 박아넣으면, 유비 배신하고 손권에게 붙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촉과 형주는 지형적으로 동 떨어진 곳이고 그런면에서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박아 넣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런 면에서 관우에게 맡긴것이다.

당시 상황에선 관우보다 잘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애초에 조인의 북형주군이 남하 준비 중이었고 북형주군 털리자마자 지체없이 우금의 7군을 모아 내려보내는 거 보면 대대적으로 조위가 형주 공격준비 중이었는데 여기에서 북형주군+우금 7군 족히 10만은 넘을 위군을 제압할 만한 인물이 촉에 또 누가 있었을까? 실상 관우는 오나라에 뒤통수 맞기 직전까지 내내 승전보만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번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서황에게 패해서 포위가 풀렸다고 해도 치명적인 타격이나 이런 건 아니라서 그냥 적당히 물러나서 대치 전선만 세워도 위나라에 엄청난 압박이 가는 상황이었던 것. 이렇게 잘 나가던 상황에서 오나라의 공격으로 형세가 급변하고 성도에 있는 촉 입장에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기기만 한다고 보고 보내오던 장수가 하루아침에 멸망 직전의 상황으로 몰려버린 것이다. 고대 시대의 통신력을 생각해보면 대처할 틈도 없이 지나치게 상황이 급변해 버린 것. 입촉과 한중 공략을 위해서 유비의 주력군이 전부 다 서천 쪽으로 떠난 상황에서 관우는 형주에서 새로이 손수 키워낸 병력들만 가지고서 익양대치 등 오나라의 압박과 조조의 7군을 모은 대규모 공격을 상대로 형주를 방어해내고 되려 7군 수몰 후 번성을 포위하면서 역공을 가하는 상황까지 밀어붙인다. 거기서 오나라의 공격으로 상황이 바뀌어버린 거라 군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로 몰락한 것이라는게 더 맞는 설명이다.

나관중의 소설이 원말 명초의 시대적 관점이 많이 들어가서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데 저 시대는 중앙집권 성격이 상당히 약했던 시절이다. 당시의 형주가 그냥 땅도 아니고 3국의 주요 전장무대였는데 지역 군벌, 호족 단속도 해야하고 군사적 성과도 내야 하고 참 어려운 지역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독립하거나 조조에게 붙어버리기 쉬운 지역이기도 했고, 충성도나 짬밥 생각하면 유비 세력 중에선 관우 밖에 적임자가 없었을 것. 그럴듯한 모사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당시로서 인선 자체는 적합했다. 상황 자체도 좋지 않았다. 지원군들은 뭔 군악대로 싸운다고 오질 않고 다른쪽에선 군량을 태워먹고 있고 위군만 후발대까지 합치면 적벽이래 최대군이 남하해고 있고[39] 오나라까지 뒤통수 날리려 오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리고 강릉 주위만 쥐고 있는 촉군이 아무나 강하게 공격한다고 형주의 절반인구를 쥐고 있는 조인을 줘패고 완편시 7군을 괴멸시키는게 가능하겠는가. 애초에 지원군만 제대로 왔거나 최소한 오의 뒤통수만 없어도 양번 중 양양은 취하거나 아니면 후퇴는 가능했다.[40]

또 정치적인 문제가 오로지 관우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남군 영토 대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어물쩍 뭉개고 넘기려고 해서 오나라의 반발을 산 유비, 애초에 대여해준 남군도 아니고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한 지역까지 내놓으라고 강짜 부리고 어쨌든간 익양대치로 합의해서 북진을 위한 군사거점만 빼고 다 반환받은 상태에서도 뒤치기를 감행한 손권도 촉오 동맹 균열에 큰 잘못이 있다. 형주를 지원하기 위한 최중요 거점이었던 상용에서 유봉과 맹달의 갈등으로 인해 지원군이 출전하지 못함, 익양대치로 이미 합의 끝난 상황에서 끝내 뒤치기를 감행한 오나라, 애초에 동맹에 균열이 가는 단초를 남긴 유비까지 형주 상실은 관우 혼자서 책임을 뒤집어쓰기에는 억울한 상황인것이다.

초반 공격을 강하게 하면 어느 정도 점령이 된다고 한다지만 관우의 형주군이 우금의 7군 격파 이후 사망 및 탈주 빼고 포로로 잡은 병력만 3만이다. 우금의 전체 군 규모가 관우의 형주군보다 훨씬 컸을 거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을것이다. 우금이면 조조군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급의 명장이었는데 병력의 열세에서도 그걸 상대로 그렇게 완파하고 도리어 조인을 번성에 가둬놓고 두들기는 상황까지 몰아넣었는데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하튼 세력 내 서열, 정치적 관계, 형주 호족 세력에 대한 제어, 군사적 명성까지 포함해서 유비가 아닌 조조든, 손권이든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관우를 인선했을 것이다.

관우는 결국 조인을 격파하지 못하나 이것은 전적으로 당시 관우가 지니고 있던 형주군의 역량미달 때문의 문제도 만만치 않다. 관우의 후방에 있던 미방과 부사인, 반준은 각각 후방에서 물자를 지원하는 일을 맡거나 치중종사임에도 관우가 만족할만한 보급을 해준바가 없다. 물론 이건 관우의 행정적 보급능력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단순히 치고 넘어갈수도 있다. 그러나 위나라의 장수들과 비교해보자. 예컨데 장료가 창희를 토벌할때 시간이 지체되자 우금은 군량을 계속 보내주어 마침내 함락시킨다. 양번 당시에도 조인이 수세에 몰리자 조조는 정예 7군과 우금, 방덕, 서황을 보내고 이들이 격파되거나 구원에 실패하자 조조 본인도 증원을 간데다 장료와 하후돈마저 부르기에 이르고 청주-서주에 있는 장패의 군사들까지 동원하였으며 관우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서황에게도 계속 지원병력을 보내고 손권까지 동원해 관우의 뒤를 치려는 계획까지 짠다. 단 한명을 상대하기 위해서 위나라가 이렇게 동원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는 사례는 후일 촉의 제갈량과 강유, 오의 제갈각 정도를 제외하면 없으며 이들도 관우가 받은 지원보다는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위나라를 상대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비가 미리 상용에 진수시켜둔 유봉과 맹달은 서로 군악대 가지고 싸우기만할 뿐 관우의 지원 타이밍을 아예 씹어버린것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상황이다. 보급과 지원에 있어서 관우군과는 완전히 천지차이인 것이다.[41]

조조군의 자잘한 전투성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증원에 힘입어 얻은 승리가 꽤 되며 조조군은 조조의 지휘하에서 지속적으로 물량의 지원을 통한 승리를 거둔바가 꽤나 많다. 번성공방전도 이와 비슷한 예라고 할 것이다. 당장 위나라 최고위 상장 하후연의 예를 보더라도 단독 전투로는 마초에게 대파당한 적이 있고 조조가 장안에서 밍기적 거리면서 지원이 끊기자 한중공방전에서 필사적인 저항을 해보았으나 결국 살해당한다. 조조는 그런 그의 군재를 폄하하면서 자신의 책임문제를 은폐하려 했지만 실제로 무도방면을 유비가 차지하지 못한건 전쟁 초기, 한중군 총사령관 하후연의 신속한 전술적 조치 덕분이었고 장합이 수많은 병력을 장비에게 날려먹어 한중군 전력이 약화된 와중에도 유비의 총력전에 수개월 이상 버티며 조조가 그나마 한중에서 유비와 싸울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이런 마당에 관우가 결국 번성을 얻지못하고 서황에게 뚫린걸 단순히 장수의 역량문제로 국한 될 수 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동맹과의 마찰이 예상되는, 상관의 쌀을 털어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는데 더 말할게 없을 것이다.

3.13. 관우의 죽음[편집]


관우전 주석에 기록된 촉기에서는 손권이 그를 살려주어 조조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좌우에서 '범의 새끼는 기를 수 없다'며 만류하여 결국 죽이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일화가 있다.[42]

배송지는 이를 두고 "임저에서 강릉까지(여몽과 손권이) 2-3백리 거리인데 어찌 때에 맞춰 관우를 죽이지 않고 바야흐로 그 생사를 의논할 여유가 있었겠는가?"라며 사실성에 의문을 표했고 반장전 등에서는 단순히 사로잡혔다가 참수되었다고 나온다. 다만 여범전에는 주석이 아닌 본문에 손권이 물시계와 해시계를 가져다 두고 관우가 붙잡혀 오기를 기다리니 여범의 예측대로 붙잡혀 왔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여기서 배송지의 평등을 따라 관우여몽이 독단적으로 죽였다고 하면 '몸값이 비싼 포로'라는 교섭카드를 왜 스스로 버렸을까? 일단 누가 됐던 관우를 참한 것이라면 관우를 수하에 두고 쓴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는 일단 제쳐놓고 관우의 오만함과 더불어 유비가 형주에서의 세력을 재수복하려고 침공할 명분을 주지 않고, 포로로서 가치가 있는 관우를 왜 죽였냐는 의문이 남는다. 형주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포로로 잡은 우금을 살려두고 나중에 송환함으로서 위나라에게 잘 보이려고 한 적도 있는 손권이다. 하물며 그 유비의 오른팔격인 관우이겠는가.

일단 정말 손권이 참수를 명령했는지는 둘째치고 정말 여몽의 지휘 하에 참한 것이라면 여몽이 당시 풍습대로 포로를 죽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수준의 인물이었거나, 자기 이름 한번 날려보고자 나라에 짐을 떠넘긴 꼴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관우가 생포된 당시 치명상을 입어서 회생의 가능성이 없었다거나, 관우가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자결을 했다는 식으로 짜맞추는 경우도 있다.

또 관우를 사로잡은 자는 반장의 사마 마충이며, 반장은 재물욕/공적 욕심이 매우 많아 재물이 많으면 부하를 죽여서라도 취했다는 기록이 있었고 법령을 어기는 일도 잦아 이를 몇번이고 손권에게 보고했지만 손권이 공적 때문에 옹호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반장이 포로로 잡은 관우를 공적에 눈이 멀어 독단적으로 살해했다는 의견도 있다.

파탄날대로 파탄나긴 했지만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동맹국의 장수'를 먼서 급습해서 죽인다는 것이 어떤 관점에서 보건 굉장히 껄끄러운 일이기에, 당시 오나라의 군가 '관배덕, 통형주'를 참조하면 당시 동오에서는 이것을 한오(漢吳) 동맹국 간의 분열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우가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이 잘못이며 공격의 원인이 되었다고 둘러댄 내부적으로 수습하는 명분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오직 관우만을 배신자(관배덕關背德), 촉오 양국을 이간질 하는 비열한 자(통형주通荊州)로 폄하하고 있으며, 형주 침공의 원인을 전적으로 '관우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관우 잘못이 아니면 '손권이 관우가 북벌하는 틈을 타 치밀하게 뒤통수를 노리고'라고 말하는 꼴이 되어 버리기도 하니까.[43]

결과적으로 이 대처는 이릉대전을 촉발시켰다. 관우의 죽음이 사실상 가장 큰 실책.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동맹국의 개국공신에 유력장수인데 포로로하여 협상할 생각은커녕 사로잡자마자 바로 처형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14. 과연 관우의 독단으로 북진을 했는가?[편집]


결과적으로 이는 뒤에 오나라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북진을 하여 실패가 되었기에 번성을 공격한 것이 관우의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형주에서의 북진이 제갈량의 융중대에 포함된 촉의 국가전략인 만큼 관우를 평가하고 사건의 전후 관계를 완전히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북진을 꾀했는지 사서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당시 유비한중 공방전을 승리해서 기세가 좋은 상태였고, 조조는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만약에 관우의 북진이 성공한다면 형주의 방어선을 강화함과 동시에 관중과 형북 양면에서 조조를 압박해서 수월하게 대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패한다 해도 조조가 형북을 신경쓰는 틈을 타서 관중으로 밀고 들어가도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판단을 유비가 내렸는지 관우가 내렸는지다.

만약 유비가 지시했거나 사전에 협의가 있었다면 관우의 북진과 함께 유비 또한 관중으로 북진하는 움직임을 보였어야 하는데, 유비가 군을 북진시키거나 북진을 준비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유비가 형주로 군대를 보내서 관우를 지원하는 방법도 있고 실제로 상용에 유봉맹달을 보내 그곳을 점령함으로서 관우를 지원할수는 있게 되었으나 문제는 이 두 사람이 관우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

관우의 진격과 후퇴는 불과 몇 달 만에 발생한 일이라 한중에 있던 유비가 한중을 정비하느라고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시간이 짧아서 미처 지원하지 못했다는 것은 유비는 관우의 북진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조조와의 전면전을 시작하는 것은 관우가 독단적으로 시작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군사 활동이다. 관우가 독자적으로 조조와의 전면전을 시작한다면 내부에서도 상당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고 유비로서는 상당히 심각한 상황인데, 형주 내부에서도 관우를 개인적으로 원망한 사람들이 있을 뿐 북진을 반대하는 인사와의 갈등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유비의 반응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실 이 부분은 유비가 사전에 알았건 몰랐건 조용히 있을 상황이 아닌데 유비의 반응이 이상할 정도로 없기 때문에, 유비가 명령했다고 해석하건 관우의 독단이라고 해석하건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현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건 독단인지, 유비가 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이건 삼국지 집해 등에 수록된 역사학자들의 의견도 그러한데, 각자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을 제시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한 문제다.

어찌됐던 간에 실패한 전략인지라 이걸 관우의 독단이라면 관우를 까내리게 되고 독단이 아니면 유비를 까야하니 촉빠들끼리 싸우는 모습도 볼 수 있는 부분. 결국 여기에 대해 제갈량이 관우를 죽였다는 음모론까지 나오게 되지만 해당 설은 밑에 고우영 삼국지 문단을 보도록 하자.

이에 대해 중국에선 장쭤야오의 유비평전의 "관우유비제갈량의 뜻을 받아" 일으킨 것이라는 말과 허쯔취안의 삼국사(三國史)의 "관우는 양양과 번성을 공격하는 문제를 유비제갈량과 협의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는 등 평가가 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또 뤄지푸의 경우는 유비가 군사 명령을 내릴때는 항상 견遣, 별견別遣, 령令, 유留, 사使와 같은 사역형 동사를 썼지만 양번 전투에선 관련 사역동사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독 작전이라고 했다. 유비가 자신이 군대를 부리거나 지령을 내릴때 사서에 표현되는 단어는 遣, 留, 使 로 표현되는데 해당하는 단어가 씌이지 않고 自 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관우 스스로 침공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

이러한 관점에서는 관우의 출병 목적이 본격적인 북진이라기보다는, 형북 일대의 영토를 조금 넓히려는 소규모 작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한 마디로 관우가 출병한 것은 본디 형북쪽에 대한 단순한 견제나 기선 제압 정도의 의미인데 7군 수몰 + 번성 함락 직전이란 엄청난 호기가 갑자기 닥쳐오자 관우가 무리를 했다는 의견이다. 갑작스레 닥쳐온 호기에 관우손권이 형주 땅을 노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리를 했고 초전의 엄청난 승리가 결과적으론 관우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관우가 독자적으로 양양-번성을 차지하려 했다고 본다. 이에 대한 이유로는 아마도 익주 점령 및 한중 점령 등으로

  • 양양이 남쪽으로의 관우, 서쪽으로의 한중/상용의 유비군세, 동쪽으로는 손권 군세에 둘러쌓인 형태이었으며
  • 익주 및 한중 점령 시에 황충의 활약(하후연 참살), 장비의 활약(탕거에서의 장합 격퇴), 마초의 활약(유장 항복), 조운/제갈량의 활약(익주 점령)에 비해 자신이 한 것은 없다는 것에 대한 공적을 세우기 위함
  • 양번 포위 시의 병력을 보면 (조인전에 나오는 수천의 군세) 양양태수 여상의 병력을 합하더라도 1만이 안되는 군세이므로

좋은 조건에서 본인이 양양/번성을 함락함으로 인한 한중-상용-양양의 한수 line 의 점거를 통한 융중대라는 큰 목표의 기초를 이루기 위함의 이유로 보인다는 것이다.해당글 출처

관우유비가 한중왕으로 등극한 후 조인을 공격할 때[44] '가절(仮節)'을 받고 있어 어느 정도의 독자 행동이 용인되는 상태였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관우유비와의 사전 협의 없이 갑자기 군사 작전을 벌였다는 해석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 가절은 그 정도로 강력한 권한이 아니며, 관우의 관직은 형주 지역의 도독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유봉전에서 관우가 상용의 유봉, 맹달에게 구원을 올 것을 명령하고, 유봉과 맹달이 거절하자 유비가 이를 원망했다는 기록을 보면 유비 역시 관우의 움직임을 상당 부분 묵인했거나 동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관우가 구원을 명령했다는 언급이 있고, 관우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비는 유봉과 맹달을 심히 원망했으며 유봉은 상용을 잃은 다음 직접 유비에게 왜 관우를 지원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상용을 잃고 맹달을 잃은 죄를 추궁받아 죽어야만 했다. 군법만 적용하지 않았다 뿐이지, 유비는 이 문제로 유봉에게 책임을 지울 생각이 만만이었던 것. 다만 이건 촉한의 후계자 문제와도 관련이 있어서 살짝 애매한 문제이긴 하다. 맹달까지 두려워서 위나라로 도망갔다는 점에선 개연성이 높지만 말이다.

형주 내에서 국지전이라고 해도 사방팔방 일어난 위나라 반란 세력의 봉기 배후에 관우의 존재가 있었던걸 보면 관우는 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전역을 최대한 이용해 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 형주군의 역량으로만 위군 전부를 상대하는건 무리고 따라서 최대한 위군이 신경쓰지 못하도록 사방팔방 반란을 부추겨 판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이게 위나라 멸망 전까지 비유된 건 관우의 이런 공작 때문이라는 것.

관우가 최후까지 면수 지역을 놓치지 않고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관우는 7군 수몰 이후 최소 양양까지는 확보해둔다는 마음 가짐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상용의 공략 자체가 관우의 관할인 자귀현(秭歸縣)에서 관우의 휘하에 있던 맹달이 북진하면서 상용을 유봉과 함께 탈취한 만큼, 이런 예방 전쟁을 치루는 관우를 지원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정황은 다분하다고 보여진다.

여기에 선주전 주석에 보면 유비한중 공방전 종료 이후 익주 전역과 한중에 이르는 지역에 역참과 군사 기지를 연이어 줄줄이 세웠다는 기록이 발견되는데 이 부분은 유비가 다음 전쟁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며 관우가 북진을 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혹은 관우가 면수에서 계속 고착 상태로 위군을 끌어들일 블랙홀로 만든다면 융중대의 기획안처럼 익주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옹양주 방면으로 뛰쳐나올 생각이었을 공산도 다분하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보면 번성 공방전 당시 유비의 움직임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45][46]

한편 유비관우가 형주 일대를 뒤흔들어주기를 원했고 그렇게 명령했다는 시각도 있다. 한중에서의 전쟁을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이끌기 위함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 의견에선 관우는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뿐이라고 본다. #

3.15. 타이밍[편집]


조조가 죽고 조비가 후한을 찬탈한 220년이 북벌의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론 조조가 죽고나서 북벌은 우리가 알고있는 북벌보다 파괴적일 수 있다. 그러나 타이밍은 결과론의 일부다. 북벌을 알고 있는 우리야 넓은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저기는 말 그대로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말마따나 배신당한 거 다 빼고 가정하면 완 근방의 남양까지 압박했을 테고 허창을 목전에 두면 한실 해방의 기치를 실현한다는 대의도 직접 천하만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위치 상 그렇게 되면 조조도 항우가 그랬듯 옹양주를 신경쓸 수 없게 되는 구도가 나온다. 전선 넓이에 따라서 솔직히 묘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조조가 언제 죽을지는 후세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지 당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후세인의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야 관우 북진 이후에 여몽이 죽고 조조가 죽은 걸 안 거지 그 당시에 그걸 알 수 있었을까? 당시 상황을 보면 한중 공방전에서 촉이 승리하고 상용까지 집어삼키고 유비가 한중왕에 정식으로 등극하였고 여기에 남양에서 후음의 반란까지 일어난 상황이다. 이걸 그냥 지켜만 보는 게 더 이상하다. 그 당시로만 보면 최적의 진격이다.

타이밍이 최악이라는 평가도 있다. 익주가 한중 공방전으로 숨을 가다듬고 있을 때 치고나간 것은 잘못이며 힘을 비축해 수년 후에 치고나가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한중공방전과 번성공방전은 거의 동 타이밍에 일어난 사건인 만큼 양측에서 치고 나가 어느 한 전선에만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익주와 형주의 연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순 추측에 불과하다.

게다가 당시 위나라는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만큼 관우가 치고 나가기 충분했다. 오히려 위나라가 반란을 진압하고 안정기에 들어서면 언제 치고 나갈지 알 수 없게 된다. 즉 반란 세력과 연계해 위나라를 끊임없이 혼란하게 하고, 그 사이 숨을 가다듬은 익주가 치고 나간다면 융중대의 완성이다.

하지만 당시 유비 세력은 융중대의 핵심인 손권 세력과의 연대가 전혀 되고 있지 않았다.

관우의 북벌의 문제는 관우가 우금의 7군이 수몰되자 포로로 삼고 대장마저 사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양번을 점령하는 전과 확대에 실패함에 있지, 관우와 유비 사이의 교감이나 익주의 지원이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 관우가 급변하는 전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급속도로 무너지면서 유비가 대처하지 못한 것이지 유비가 관망한 것은 아니다.

오를 냅두고 왜 북상했느냐면 이건 간단하다. 설마 동맹을 파기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촉에서 오의 배신을 예측한 인물이 과연 몇 명이었을까? 기껏해야 도발이나 대치 정도는 연례행사에 가깝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익양대치가 결과론적으로 동맹파기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으나 어쨌든 영토는 분할했다. 단 관우 본인은 오나라의 배신을 염두에 두어 여몽을 견제했고 형주에서 봉화로 알리면 바로 집에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문제는 내부와 외부의 태만과 배신이었다.

하지만 내부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은 관우다. 개국공신인 미방을 하대해 놓고 대비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관우의 능력부족이라는 것이다. 또한 조조 측에서 손권이 배신할 것이라는 정보를 흘렸음에도 서둘러 회군하지 않고 밍기적댄건 관우다. 동맹국의 군주를 지역 비하 발언을 사용하며 모욕하고 동맹국의 군량을 털어갔음에도 손권이 배신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 손권이 실제로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은 관우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관우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 북상을 한 것이다. 한중 공방전으로 세가 꺾였던데다 후음의 난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용에서 유봉이 뭘 하고 있는지 과연 알고 있었을까? 상용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원군만 요청한 것이다.

이 또한 유비 세력 내부에서 제대로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결론은 타이밍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전략이 총체적 난국으로 익주의 유비, 상용의 유봉과 맹달, 강릉의 관우는 전혀 협력이 되지 않았다. 유비가 거주하던 성도는 사천 분지 내에서도 서남쪽에 치우쳐 있다. 상용, 강릉과 연계가 힘들다는 뜻이다.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조조의 세력 내부에서 반란이 터지던 시기에 북벌에 박차를 가하지 않고 관우의 북벌을 관망하고 있던 유비 또한 비판에서 피해갈 수 없다.


3.16. 관우에게 혼인을 제의한 것이 그릇된 행동인가?[편집]


먼저 이것이 겹사돈 부류에 들어가기에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하게 아닌 것이 일단 관우는 좋게 봐줘야 의형제고 조조손권 같은 경우는 손씨 - 조씨 결혼을 세 번을[47] 했기에 겹사돈이라고 안 맞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것은 관우의 딸을 인질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인데, 이건 말 그대로 관우를 엄청난 딸바보로 만들어서 공과 사도 구분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행위다. 간단하게 손씨와 조씨도 서로 결혼으로 상대쪽에 친척이 있었지만 싸움을 해댔는데 말이다.

이로 인해 파생된 결혼으로 유비관우를 의심하게 만들 계획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또한 유비를 너무 낮춰보는 행위다. 손권만 하더라도 제갈근을 의심하지 않았고 위정반준장완이 이형 관계라며 무고했을 때도 오히려 위정의 관직을 삭탈했는데 하물며 유비관우의 관계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하나는 관우가 이리 예측할 줄 알고 손권이 일부러 개전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이리 했다는 설이 있다. 이건 사서에도 그냥 한 줄로 관우한테 서로 결혼하자고 했더니 거부당했다를 가지고 추측한 것에 불과하다. 상관의 쌀을 멋대로 취한 것처럼 사서에 개전 명분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육손이 관우를 방심하게 만드는 것처럼 계획하고 행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사실 애시당초 그냥 관우의 성격 문제와 손권에 대한 불신으로 손권의 결혼 동맹 자체에 나쁜 감정을 가져서 부정적으로 바라봤다고 한다면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관우는 오측 인물들이 자신의 사기와 힘을 믿고 거꾸로 뒤엎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손권과의 결혼 동맹은 이미 유비와 손부인의 결혼을 통해 유비 측 인사들이 위협적으로 봤고 결국 손부인이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을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던 것을 조운제갈량이 저지한 적이 있으며 관우는 당시 형주에 있으면서 무례하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손권 측이 혼인 관계를 청산한 상황을 똑똑히 지켜본 사람이다. 애시당초 유비 측 인사들이 손부인을 보면서 손권과의 결혼 동맹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사서에도 나오는 사실이니 딱히 추측거리라고 볼 여지도 없고 이 시기 관우는 오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 봉수대를 쌓고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손권이 갑자기 이제는 촉의 2인자인 자신과 사돈이 되자고 하자고 나온 것이다. 관우의 입장에서는 대놓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손권의 이런 행동이 표리부동하며 자신이 어찌 나올지 시험하려 든다고 볼 여지가 충분히 있는 셈.

손권관우에게 혼담을 청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이 무렵 손권은 서주자사(徐州刺史) 행 거기장군(行 車騎將軍) 이었으므로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에 오르기 전에는 아무래도 혼인 동맹을 요청하기에는 관우와 손권의 격이 걸맞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고 관우가 전장군(前將軍)에 배수된 이후인 219년 가을 이후로 보인다.

3.17. 관우가 혼인을 받아들였다면 손권이 뒤치기를 할 일은 없었다?[편집]


사실 이 부분도 애매한 구석이 있다, 상관 군량 유용이나 혼인거부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나 이미 오래 전부터 손유동맹은 익양대치 등으로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는 데다가 애시당초 정사 여몽전에 대놓고 여몽이 관우는 믿고 기대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칭하면서 형주를 얻어 방어선을 더 굳게 만들 것을 청하는 등 처음부터 형주를 공격할 생각을 품고 있었고 겉으로만 관우를 방심시키기 위해 친근하게 대했다고 나왔다. 손권과 여몽은 노숙이 죽은 이후 처음부터 관우를 치려고 계책을 짰다고 나와 있기 때문에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관우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관우가 봉화대 등을 준비해 오에 대해서 대비한 것이나 오의 형주 진공이 말 그대로 전광석화에 뒤처리까지 깔끔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손권이 한 번 무시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즉흥적으로 결정내렸다고 볼 수는 없는 셈이다. 애시당초 당시 촉-오 동맹은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 있었으니 이런 계책이 나왔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었고 겉으로 관우와 우호를 맺으려고 시도한 것이 바로 저 혼인 건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다만 관우가 우호적으로 나오는가 적대적으로 나오는가 역시 동오 입장에서 동맹을 유지할 것인지 깰 것인지에 대해 중요한 고려사항인 것은 당연하다. 손권 측이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는 이유로 관우가 손권을 모욕하건 존중하건 상관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관우는 손권이 노리는 형주를 점거하고 있는 동시에 조조 세력과의 완충지대인 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조와 관우를 비교하는데 있어서 관우가 오에 공공연하게 적대적이라는 점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사실 손권 측이 형주를 노리고 있다는 점은 익양대치 이래로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유비측이 그걸 몰라서 손유동맹이 불안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혼동맹이란 것도 깨면 그만이기는 하다. 북연, 성왕도 그러다 깨졌다. 결혼동맹이 있었다고 해서 손권이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물론 오나라 입장에선 침략에 빌미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관우의 실책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3.18. 미방이 배신하지 않았다면?[편집]


여몽전과 동소전, 서황전을 대충 조합해 보면
1)손권이 은밀하게 "나 기습할거임 이거 관우에겐 비밀임" 편지 보내고
2)동소가 "이거 관우에게도 알려주면 우리가 이득" 조언하고
3)서황이 그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에게 쏘아보내고
4)관우는 주저하면서 돌아가지 않고
5)이후 서상과 여건 등이 합류한 서황이 관우의 포위를 풀어버리는
순서로 보인다. 그러니 서황에게 패하기 전에도 손권이 올 거란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미방의 배반까지는 몰랐겠지만.

그리고 관우나 손권의 뒤통수를 치는 대신 어부지리를 노리며 관망하자고 동소가 조언했고, 또한 이후 조조의 행적을 보더라도 관우가 퇴각한다 해서 굳이 뒤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강릉성은 애초에 유-손 연합군이 포위공격을 했을 때조차 1년이나 버텼던 곳으로 합비만 못하더라도 요새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관우가 워낙에 물자와 병사들을 죄다 빼 갔지만 그래도 기본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미방이 충성을 다해 버텼더라면, 관우가 결국 번성의 포위를 풀고 남하했을 것이고, 그러면 강릉에서 동오와 결착냈을 것이며 조조는 유비와 의 군대가 싸우는 틈을 타 어부지리를 보기 위해 기다렸을 것이다.

문제는 조조가 220년 1월에 죽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조의 죽음으로 위나라는 빠지고, 유비가 지원군을 이끌었다면 성패는 모르는 일이었으리라.


3.18.1. 반론[편집]


미방은 애초에 군수물자를 제대로 보급하지 않은 것에 질책받는 것이 두려워 동오에 투항했다. 적어도 사인처럼 버텨 보려던 기록도 없다. 만에하나 미방이 투항하지 않았더라도, 형주 상실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3.19. 형주의 상실로 촉한천하통일은 좌절되었나?[편집]


결과적으로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 제갈량의 융중대관우의 죽음과 형주 상실로 깨지고 이후 촉한의 천하통일이 좌절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다. 워낙 형주가 그만큼 중요한 땅이었기에 제기되는 이야기로 확실히 이로 인해 그동안 순조롭게 진행되던 촉한의 대전략은 처음으로 좌초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아직까지 촉한의 천하통일이 완전히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촉한에게는 두 가지 선택 방향이 있었다. 하나는 후일 제갈량의 북벌처럼 한중에서 진천(양주-옹주)으로 진격하여 북벌을 시작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주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유비 본인은 형제와 같았던 최측근 장수 관우의 복수라는 명분이나 사섭을 통한 남만 자극이나 유장의 아들 유천의 익주자사 임명 건 등 손권의 도발 때문에 열받아서 후자에 더 집착했고, 조운 같은 다른 중신들은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형주는 어쩔수 없으니 북벌을 시행하자는 입장으로 갈린채 이릉대전은 시작되었고, 시작은 좋았다. 무릉의 이민족들도 포섭했고, 옛 형주 지역에서 관우의 잔당들의 호응까지 있었으며, 여몽 사후 다른 오나라의 장수들은 유비에게 격파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평지가 시작되기 전인 장강 삼협의 산지였고 평지가 시작되는 이릉에서 격파되면서 말 그대로 입구컷당했다.

촉한은 이 이릉대전의 패배로 북벌을 위해 준비한 많은 물자, 병력, 인적 손실을 겪어야 했으며 건국군주 유비마저 이 전투의 패배로 마음의 병을 얻어 얼마후 승하하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런 면에서라면 확실히 촉한의 천하통일 가능성을 낮춘 건 단순히 형주의 상실 때문이라기보단 그 과정에서 촉발된 이릉대전의 실패 때문이 더 크다.

만약 여기서 5년을 더 기다려 이 자원들로 남만을 평정하고 황제 유비의 친정으로 옹양주를 공략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말아먹고 5년간 뼈빠지게 재건한 촉한의 군세로도 촉한의 북벌은 순식간에 관중을 진동시킬 수 있었다. 유비가 남긴 유산들과 제갈량의 천재적인 소질로 나라를 5년만에 최대한 재건시켜 놓은 덕분이었다.

하물며 유비가 이 자원을 그대로 보존한 채 제갈량을 대동하고 직접 옹양주를 공략했다고 하면 그 파급력이 어땠겠는가? 물론 당시 유비의 나이가 묫자리나 셀 나이인 환갑이 넘었다는 게 문제지만 이릉대전이 없었다면 남만평정-북벌까지의 시간이 단축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물론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으므로 IF에 불과한 시나리오지만, 향후 제갈량부터 시작해 강유에 이르기까지 촉한의 눈물나는 북벌사를 생각하면 이 부분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손해를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지, 형주의 상실로 인한 피해가 작다는 것이 아니다. 당장 제갈량의 융중대는 하북과 중원을 장악해 하나로 만듬으로서 천하의 대부분을 장악한 [48]를 상대하기 위해 익주에서 장안으로, 형주에서 완성을 넘어 낙양으로 진격해 양한의 수도를 동시에 석권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비록 적벽대전과 익양대치로 위와 오에게 야금야금 빼앗겨 관우의 북정 당시에는 원래 형주의 삼분의 일만 남았지만, 이전부터 나중에 있을 북벌의 핵심 공격루트로 일찌감치 내정되어 있던 곳이었다. 이러한 형주 지역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촉한의 대전략을 처음부터 다시 구상하게 만든 큰 피해다.[49] 유비가 중신들의 만류에도 동정을 시행한 건 이런 면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50]

그렇기에 후일 융중대 붕괴 이후 제갈량의 북벌한고조의 고사에 따라 기습으로 진행하거나 아니면 동맹인 오와 연계하거나 강족, 족, 선비족 등 이민족과의 연계를 생각하면서 진행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촉한은 형주의 상실로 첫 번째 타격을 입었으며, 이릉대전으로 그 타격이 더욱 공고화되고 서서히 국운이 기울어져 갔다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도 촉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서까지 발버둥쳤지만, 결국 대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3.19.1. 반론[편집]


다만 형주의 상실이 촉에게 큰 손실이었단 말은 반만 맞았다. 형주의 인구와 자원은 분명 상실했다. 하지만 손권의 형주 정복 과정에서 유비군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입힌 전투는 없었다. 유비군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입힌 것은 관우가 서황한테 질 때 벌어진 일이다.

손권이 형주를 장악하며 관우가 죽긴 했으나 반조조세력인 유비와 손권을 합쳐서 보았을 때, 손실은 유비와 손권 양 세력의 관계악화, 그리고 관우, 관평 등의 사망 이 정도다. 형주는 손권이 큰 손실없이 그대로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유비군에게 진짜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힌 것은 유비의 분노로 인해 벌어진 이릉 전투이다. 이 이릉 전투마저도 손권군은 큰 손실 없이 막는데 성공했다. 그 외에 꼽자면 관우, 법정, 장비, 황충이라는 군부의 핵심들이 4년만에 줄줄이 죽어나간 것인데 관우의 죽음을 제외하면 형주와 무관하다.

결국 제갈량이 북벌하며 고생한 직접적인 이유는 이릉 전투와 장군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8만의 군대를 동원했지만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수많은 장교들과 마량 같은 인재를 잃었다. 이릉 전투의 원인이 손권의 배신 때문이라고는 하나, 유비의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안 일어날 수도 있는 전투였다.

이릉 전투가 후대에 미친 악영향이 하나 더 존재한다. 조비가 양양을 불태우고 완으로 전선을 후퇴하자 손권은 위나라가 버린 양양을 점거한다. 하지만 유비가 침공해오자 폐허가 된 양양까지 지키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포기하고 만다. 유비가 이릉 전투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오히려 형주 공방전 이전보다 반조위세력의 영토는 넓어졌으며 장강을 완전히 점거할 수 있었단 것이다. 물론 조위가 후에 탈환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삼국시대 내내, 조위와 손오는 수비 측은 영토 보전에 성공했으며 공격 측은 점령에 실패했다. 이 점을 생각하지 않고 손오의 육군은 약하다라는 근거 없는 프레임에 갇혀 금방 잃었을 것이라 하는 것은 적절한 추측이 아니다. 이런 식의 논리면 오히려 손오의 육군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둔 적이 없는 촉한이 양번을 점령했어도 다시 잃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3.20. 형주소유와 북벌을 누가 더 잘 했는가의 문제[편집]


촉빠들과 오빠들의 논쟁거리 중 하나로 형주를 가지고 있었던 두 나라 중 누가 더 형주를 가지고, 나아가 북벌자체를 누가 더 잘했는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오나라팬들의 입장은 이렇다. '관우의 북벌 역시 양번공략을 실패했고 오나라는 육손, 제갈근, 주연등이 형주에서 열심히 북벌에 매진하였지만 결국 실패한것은 매한가지다. 누가 가지고 있었던지 형주 북벌은 둘 다 실패했으며 나아가 양주를 가지고 있던 오나라나 익주를 가지고 있던 촉한 역시 각각 양주와 익주를 이용한 북벌엔 실패했으니 북벌을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오나라가 북벌횟수가 많으니 삼국의 형세로 보면 오나라가 촉나라보다 더 강했다.'

이에 대한 촉나라팬들의 입장은 이렇다. '우선 유비부터 북벌로 한중을 빼앗았으며 관우의 북벌은 단 한번의 호기를 잡아 7군 수몰을 이용해 대승을 거두었고 적어도 손권의 뒤치기 전까지는 양양을 굳건히 포위하는 등 그 기세를 잃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형주 문제를 논하면서 촉한의 북벌 자체를 폄하하는데 제갈량은 무도, 음평을 얻기라도 했고 강유 역시 단곡의 패배 이전까지 양주를 거의 손에 넣을 뻔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따져서 촉이나 오나 북벌을 실패한건 사실이나 이쪽도 할말은 있다.'

하지만 손권의 뒤치기 전까지 양양을 굳건히 포위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 왜곡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사 삼국지 서황전과 무제기를 보면 손권이 남군을 기습 공격한 것은 관우가 서황에게 패하면서 병력 부족으로 양번의 포위를 풀고 내려온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 조엄전을 보면 서황이 번성을 포위를 해체한 이후에도 관우는 여전히 양양을 포위했다. 조엄전에서는 관우의 양양 포위가 해체한 것은 여몽의 습격 이후다. 정사 자체가 위나라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것과 조엄전의 기록을 합쳐서 고려하면 서황전과 무제기와 기록은 과장이다.

[1] 대표적인 예로 유봉이 지원군을 안 보내준 것을 든다.[2] 오월 지방 자체가 전통적인 화하의 영토가 아닌 오-월-초 등 남방 민족의 영토였던 점에서 인종차별이라고도 볼 수 있다.[3] 호삼성이 이르길 : 오의 서쪽에 있으며 상류에 근거한 형세임을 이른 것이다.[4] 통감에선 “지존께선 응당 이를 서둘러 도모하셔야 하니, 조조보다 뒤쳐져선 안됩니다”라고 썼다. 호주 胡注 : 만약 먼저 유표를 도모하지 않으면, 필시 조조가 도모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5] 호삼성이 이르길 : 초관은, 한관扞關이다. 촉蜀이 초를 정벌하니, 초가 한관을 지어 이를 막았기에, 초관이라고 일렀다.[6] 노필이 살피길 : 한관은, 위지 문기 文紀 황초黃初 3년 주에서 인용한 위서 魏書 에 상세히 보인다.[7] 손권이 이릉을 서릉으로 개명했다. 대략 강릉 서쪽에 위치한다.[8] 참고로 남북조 시대 남조 중 익주 - 형주 - 양주를 모두 아우르는 걸 넘어서 회수와 서주 일대, 일시적이지만 관중까지 차지한 적이 한 번 있는데 유유가 북벌로 얻은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북위에게 밀리면서 결국 전부 상실한다.[9] 하지만 춘추시대에 오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할 때는 이 대별산맥을 넘어서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초군은 그대로 무너졌다.[10] 수춘은 허창까지 이어지는 물길의 나누어 지는 요지이다.[11] 근데 관우는 그 전에 서황에 의해 사총에서 격파된다. 이에 조조는 장료를 양릉파에 주둔시킨다.[12] 「육손전」에서 제갈근이 "주상은 이미 돌아왔고, 적군은 한편을 붙잡아 우리의 실정을 전부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점에서 손권이 친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손전」의 기록에 의하면 236년이지만, 손권이 친정한 것은 「명제기」와 「오주전」 둘 다 234년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육손전」의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13] 청주 제국 임치현[14] 청주 동해국 즉묵현[15] 서주 성양군 거현[16] 삼국시대에는 연주 동평군 동평륙현[17] 삼국시대에는 연주 제북국 동아현[18] 기주 평원군 고당현, 다만 전국시대에는 황하가 후한 시절보다 더 북쪽으로 흘렀기 때문에 삼국시대에 옮겨진 기주보다는 황하가 흐르는 길이 바뀌기 전인 전한 시절에 소속되어 있던 청주 소속으로 보는 것이 옳다.[19] 효산의 동쪽[20] 『진서』「지리지」[21] 『삼국지』「삼사주전」 배송지 주에서 손성의 「진양추」 인용[22] 『삼국지』「후주전」 배송지 주에서 왕은의 「촉기」 인용[23] 『후한서』「군국지」 유소 주에서 「제왕세기」 인용[24] 물론 위나라의 병사수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민호는 큰 차이가 없다. 당시 위, 오에선 민호와 병호가 따로 관리되었다.[25] 물론 천도 논의는 무마된다. 사마의와 장제에 의해.[26] 만일 관우가 양양-번성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면, 다음은 신야와 완을 노릴 것이 분명했으며, 그 위에는 여남이 있고, 여남의 바로 북쪽이 당시 도읍인 허도다. 괜히 조조가 업으로의 천도를 생각한 게 아니다.[27] 그리고 실제로 형주의 관우는 한중전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 시점에 북진을 개시했다.[28] 이는 형주를 다스렸던 유표의 아들이 후계자이며 자신은 그의 후견인임을 강조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29] 손오와의 동맹을 그 누구보다 중시한 제갈량조차도 법정 상대로 손부인에 이런 행위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을 정도다.[30]아메리카마야 문명이나 아즈텍 제국처럼 아닌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아프로유라시아 대륙에서는 그랬다.[31] 물론 배송지는 이렇게 한 주 수준으로 인구가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으나 어차피 이들이 욕하는 것은 후한서 군국지와 비교해서 형주 인구가 떨어졌다고 욕하는 것이다. 즉, 배송지 말대로 해당 사료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하게 되면 인구가 줄었다고 욕하는 비교 자체가 잘못된 것.[32] 자치통감에서 이릉 대전의 기사 뒤에 마량도 오계만에서 죽었다고 표기하고 있다.[33] 무릉만 보다는 면중만일 가능성이 높기에 따로 서술[34] 유비가 통치하던 시절에도 황개가 무릉만이를 물리치는 등 유비가 그들을 건드린 기록은 없지만 이미 무릉만이들은 통치 세력에 반발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것은 당시 무릉이 손권 땅이라고 하거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215년 이후 기록이라고 하면 해결된다.[35] 이 부분에 대해 자치통감 호삼성의 주석에선 둘러댔다는 설을 지지한다.[36] 사실 여몽관우는 용맹하다던가, 학문을 좋아하고 강직하고 웅대하고 남에 위에 서길 좋아한다던가, 매섭고 빼어난 장수라고 판단했다던가 하는 식으로 관우에 대해서 고평가한 적은 전에도 있었다. 관우를 상대로 겉으로나마 우호를 닦아 기회를 엿본 것도 이런 관우가 다스리는 형주에서 오를 철저히 경계하고 방비하니 이를 방심시키기 위함이었다.[37] 그러나 사인은 오서 측 기록해보면 분명 성을 처음엔 지켰다고 되어 있다. 분명 관우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사실이었긴 하나 무조건 배신자로 몰기엔 무리가 있다.[38] 중국 역사를 보면 군량문제 때문에 항복병들 그냥 생매장 하는일이 발생하는데 그래도 관우는 인성은 좋은 사람이어서 우금의 항복병들을 받아줘서 군량 압박을 받았다. 어찌보면 관우가 인정이 많아서 일을 망친거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39] 실제로 조조는 합비에서 장료를 빼서 마피에 주둔시켰다. 서황마저 패한다면 다음으로 투입될 장수는 장료였던 것이다.[40] 관우가 면수를 온전히 장악해 양양이 고립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최소 양양은 함락되었을 것이다.[41] 물론 3만명의 포로를 잡아 그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미방의 경우 전쟁 이전에도 본인이 관리하는 남군성의 군수물자를 태운 화재에 책임이 있었고 손권, 여몽과 내통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관우전에도 남군의 미방과 공안의 사인이 애당초 관우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나온다.[42] 연의에서는 그 좌우에 있던 장수가 좌함이라 적고 있다.[43] 그리고 이를 감안하면 오는 관우를 애초에 죽일 생각이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가 살아서 촉으로 돌아가 오의 잘못을 고한다면 오의 형주 침공은 약간의 명분조차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며 이는 형주의 민심이 매우 험악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입막음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44] 화양국지에 이때라고 기록해두고 있다.[45] 당시 유비는 한중 일대를 수습하고 한중과 익주의 연결을 굳건히 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기지 설치와 역참의 배치를 일으키고 있었다. 즉, 유비가 진두 지휘하면서 익주와 한중을 연결하는 작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와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의 대군을 상대할 만한 군사를 즉각적으로 동원하는 것은 시기상으로 어렵다고 보여진다. 특히 10월까지 조조는 장안에서 머물렀는데 유비는 비상시 장안에 머무르고 있는 조조의 재침공을 견제하고 여차하면 치고 나갈 준비도 해야 하는 포지션이다. 우금 군의 수몰은 분명 촉의 찬스가 맞다만, 조조가 장안에 눌러 앉아서 유비가 한중에서 기어나오지 않도록 견제하고 있었고 재침공도 대비해야 하는 포지션에 있었다.[46] 수경주에 따르면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라고 되어 있다. 여몽전에도 관우는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다고 했는데 이는 관우가 강릉으로 돌아가면서 시간을 끌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관우서황에게 패하고 양양을 굳건히 포위하다가 강릉 함락 소식을 듣고 10월에 맥성에 곧바로 주둔한 게 아니라 시간을 끌면서 강릉에 먼저 도착하였고 강릉을 함락시킬 수 없자 맥성으로 간 것이다. 이런 정황상의 증거를 보건데 관우가 맥성에 주둔한것은 11월 ~ 12월 경쯤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 관우가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기엔 이미 사방이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다. 관우의 소식을 유비가 마지막으로 받아본 것은 10월경으로 추정되고 이후에는 오나라에 포위되어 전령을 보낼 상황이 안 되었을 공산이 크다.[47] 손광, 손분, 유수구 전투 후에 한 번 더.[48] 하지만 당시 인구수를 보면 위:오+촉=4:3 정도의 비율로 반조위세력이 결코 압도적인 열세가 아니었다.[49] 그렇기에 성공 가능성이 확 떨어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후 촉한의 북벌 루트는 누가 봐도 눈에 들어오는 뻔한 공격루트인 장안-양옹주 방향으로 제한되었고, 제갈량의 군재 부족과 더불어 북벌 실패의 요인이 되었다. 위를 흔들 수 있을 제2전선만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졌을 수 있다.[50] 그 외에도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관우를 비롯해 장비, 황충, 법정 등 뛰어난 장수와 모사들이 연이어 세상을 떴고 자신도 많이 늙었다. 여러가지로 후계인 유선을 생각해서라도 꺾인 분위기의 환기와 안정된 기반을 남겨야 한다는 일념 역시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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