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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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명
마츠모토 코헤이(松本亘平)
본관
연주 현씨[1]
출생
1921년 5월 2일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 도리동
(현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도리리)[2]
사망
1981년 4월 6일
경상북도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동부아파트
(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동)
묘소
국립신암선열공원 제1묘역-51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현영만은 1921년 5월 2일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 도리동(현 경산시 하양읍 도리리)에서 아버지 현봉수(玄鳳洙)와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의 1남 6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진량면 신상동(현 진량읍 신상리)로 이주하였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이던 1940년 12월 1일, 그는 같은 학교 학생인 조소영·김병욱(金炳旭) 등과 함께 대구부 대봉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소재 히데키 카즈마사(宇田和正)의 하숙방에 모여 항일결사 무우원(無憂園)을 조직하였다. 이 결사는 민족의식을 고취할 목적으로 조선문학의 연구를 통한 문화향상 및 경제적 성장에 힘을 쏟았는데 겉으로는 종교단체 내지 저축장려단체로 가장하여 조직을 운영했다. 조직의 구성은 집행장 아래 문예·종교·경제·총무부 등의 7부를 두었는데 현영만은 총무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동지포섭에 노력하여 조직의 확대를 꾀하는 한편, 「무우원」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으며 또 항일의식의 내용을 담은 인쇄물을 발간하면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듯 무우원의 주요간부로 활동하였던 그는 1941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경산군 진량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무우원의 사업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항일 비밀결사 무우원의 활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43년 6월에 체포되었다. 그후 그는 1944년 6월 16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곧 출옥하였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살다가 1981년 4월 6일 수성구 범어동 동부아파트 자택에서 뇌일혈별세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으며,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본래 가족묘원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국립신암선열공원 제1묘역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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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승선공파 28세 병(柄) 항렬. 족보명은 현병문(玄柄文).[2] 인근의 동서리와 함께 연주 현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