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폰 몰트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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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1880년~1890년대 독일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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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Generalfieldmarschall
파일:DR_Generalfeldmarschall_1918.gif

육군
원수
헬무트 폰 몰트케 | 프리드리히 3세 |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 | 에트빈 폰 만토이펠
{#fff 상급대장 [br]{{{-1 ''Generaloberst''[br] [[파일:KHeer_OF9_GenOberst_(Bayern)_1918.gif
육군
상급대장
빌헬름 1세명예 원수
병과대장
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
파일:General_(Wurttenburg).gif

육군
병과대장
한스 폰 뷜로명예보병대장
해군
대장
-
중장
Generalleutnant / Vizeadmiral

육군
중장
-
해군
중장
-
소장
Generalmajor / Konteradmiral

육군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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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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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군 육군 원수
헬무트 폰 몰트케
Helmuth von Moltke


파일:external/media-2.web.britannica.com/9939-004-FE4A6BB6.jpg

이름
Helmuth Karl Bernhard von Moltke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1]
출생
1800년 10월 26일
신성 로마 제국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 파르힘
사망
1891년 4월 24일 (향년 90세)
독일 제국 베를린
가족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조카)
직업
군인, 작가
복무
덴마크 왕국군 (1818 ~ 1819년)
프로이센군(1819 ~ 1871년)
독일 제국군 (1871년 ~ 1888년)
최종 계급
육군 원수
주요 참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서훈
푸르 르 메리트
기사 검은 독수리 훈장
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상
대철십자 훈장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프로이센군 입대 이후
2.3. 프로이센의 참모총장
3. 군사학적 영향
4. 기타



1. 개요[편집]


"Kein Plan überlebt die erste Feindberührung."

적과의 첫 접촉 이후까지 살아남는 계획은 없다.[2]


19세기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의 군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더불어 독일 통일의 1등공신으로 추앙받는 인물. 오늘날 세계 각국의 군대에서 채택하고 있는 근대적인 참모본부 제도를 정립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훗날 그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되는 조카와 구분하기 위해, '대(大)몰트케'라고 부른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800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의 파르힘(Parchim)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빅터 폰 몰트케로 덴마크군의 중위였다(아버지도 독일인이지만 덴마크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주소이전(?)을 하며 아예 덴마크군에 들어갔다).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3],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일찍 집을 나와 11세에 덴마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수석졸업 후 1818년에 덴마크 육군 소위가 되었다. 하지만, 덴마크 육군은 별로 그에게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몰트케는 덴마크군 경력이 인정되지 않는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군적을 바꿔 프로이센 왕국 육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2.2. 프로이센군 입대 이후[편집]


1822년 프로이센군 육군 소위가 된 몰트케는 프로이센 전쟁학교에 입학, 3년간 수학하고 1826년 졸업했다. 능력을 인정받은 몰트케는 베를린 참모본부에서 1년간 근무한 후 1833년 중위가 되었으며 총참모부에 배치되었다. 이때 몰트케의 군사적인 역량은 빌헬름 왕세자를 비롯한 자신의 상관들이 알았다. 1835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진급 직후 6개월의 휴가를 받은 몰트케는 남유럽 및 동유럽을 여행하게 됐는데, 코스탄티니예를 방문했을 때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마흐무트 2세의 요청으로 오스만 제국군의 현대화를 도왔다. 1838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아나톨리아 주둔군의 군사고문이 되었으며, 이집트에서 일어난 메흐메드 알리의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은 몰트케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며 결국 알리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몰트케는 온갖 고초 끝에 겨우 도망쳐 1839년에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오스만 여행기와 당시의 전쟁 상황을 담은 책을 출판해 명성을 얻기도 했다. 영어에 능통한데다 글쓰기에 소질이 있어서 18개월동안 무려 9권의 책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출판사가 출판하지는 못하였다.

1840년에는 베를린의 프로이센 육군 제4군단의 참모장교가 되었고 여행 경험을 살려 소아시아 일대의 지도를 제작했다. 같은해 결혼을 하였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지만, 자손을 낳지 못하였다. 또한 이 시기 함부르크-베를린 간 철도건설 작업의 감독관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철도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하는 등 일찍부터 철도의 중요성을 깨달은 인물 중 하나였다.

이후 몰트케는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몰트케는 로마에 있던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의 부관이 되었다. 로마에 있는 동안 로마의 지도를 만들어 1852년 출판하였다. 이후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2세대관식에 참여하였다.


2.3. 프로이센의 참모총장[편집]


1857년 10월 29일 소장이 됨과 동시에 프로이센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역임하자마자 개편을 준비하였고, 1858년부터 1859년까지 참모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이는 빌헬름 왕세자알브레히트 폰 론 전쟁장관의 도움을 받았다. 전쟁이 과거의 주먹구구식에서 점차 정밀하고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참모부 소속장교들을 전문교육기관에서 양성하는 제도를 도입시켰다. 이 덕분에 전문적이고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참모들은 다른 국가 장교들에 비하여 작전 수행의 일관성과 체계성을 획득했고 이것은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이어지는 대승리의 주 요인이었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군 참모는 몰트케가 30년간 참모총장으로 근무하며 크게 기여했다라고 평가받는다.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프로이센의 계획은 프로이센군을 싸우게 하기보다는 베를린에 그대로 뒀다. 결국 1864년 4월 30일 몰트케는 독일 연방군의 참모장으로 파견되었다. 2개월 간의 휴전 후 독일군은 알스 섬에서 덴마크군을 공격했다. 결국 덴마크와 독일 연방은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2.4.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편집]


이후 보오전쟁이 발발했을때, 몰트케가 세운 철도와 통신망을 활용한 전술이 위력을 발휘했다. 프로이센군의 숫자가 오스트리아 제국군보다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몰트케는 산업혁명이 낳은 기술들을 활용한 자신들의 군대가 더 강하다고 판단하였으며, 에두아르트 보겔 폰 팔켄슈타인의 군대는 병력과 탄환이 떨어진 하노버 왕국을 금방 점령하였다. 남독일군을 몰아낸 이후, 팔켄슈타인은 보급의 문제로 더이상 진격하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몰트케와 빌헬름 1세는 진격명령을 내렸지만, 상대방의 항복만 기다리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몇몇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노버 왕국의 항복을 받아내기는 했다. 독일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의 연합 세력을 정리한 몰트케는 이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에 160km떨어진 채로 주둔해있던 두 개의 군을 이용해 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오스트리아의 루트비히 폰 베네덱의 군대는 몰트케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진격하였지만, 정작 베네덱의 목표는 멀리있던 프리드리히 왕세자의 제 2군이었다. 그렇게 몰트케는 쾨니히그레츠 전투를 이끌었지만, 정작 본인은 오스트리아군의 퇴각을 막지 못해 더 큰 성과를 얻지 못해서인지 그 전투에 실망했다. 어찌 됐든 몰트케는 보오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평화조약에서 빌헬름 1세는 빼앗은 작센 왕국의 영토와 더 많은 땅을 원하였지만,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개입이 두려워 반대하였다. 몰트케는 빌헬름 1세에게 프랑스도 점령할 수 있는 계획을 제시했지만 당장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몰트케는 30,000 마르크를 하사받았다.

이 전쟁은 몰트케의 전술이 잘 드러난 전쟁이다. 몰트케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영감을 받은 사람이고, 전략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용적인 기술로 생각하였다. 과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지속적인 공격 개념을 개량했는데[4], 특히 정면공격보다는 적군을 포위한 후 궁지에 몰린 적군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먼저 정면 공격을 하게 만든 후 적군을 무력화시켜 신속히 전쟁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적보다 많은 아군을 신속히 동원해 전역에 투입하고 각 군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일찍이 산업혁명이 가져온 변화를 이해한 그는 철도와 전신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들을 적극 활용하는 작전을 계획했다.[5] 그가 애용했던 전략 중 하나는, 우선 적의 병참선을 끊은 후 적이 병참선을 다시 연결하러 왔을 때, 적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그의 미래를 내다본 이러한 통찰력은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주었다.

2.5.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그 이후[편집]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보오전쟁에서의 공 덕분에 또한번 몰트케의 작전은 의심없이 채택되었다. 몰트케의 계획은 모든 군대를 마인츠의 남쪽으로 집결시키는 것이었다. 3개의 군으로 나누어 전부 마인츠의 남쪽에 두었다. 만약 프랑스군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중립을 무시하고, 쾰른이나 라인강의 아무지점으로 진격할시, 독일 제국군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몰트케는 스트라스부르 근처보다는 메스에 대부분의 군대를 둘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몰트케는 스당 전투를 지휘하였고 승리로 이끌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rte_zur_Schlacht_bei_Sedan_%2801.09.1870%29.jpg
1870년 9월 1일, 스당 전투 당시 병력배치
프랑스 해군 육전대해병대 등으로 증원되고,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끄는 12만의 대군이 메츠 요새로 진군했으나, 새로운 프로이센군이 메츠로 가는 길을 막아섰고,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 끝에 돌파가 여의치 않자 프랑스군은 일단 가까운 스당 요새로 후퇴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몰트케는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물샐틈 없이 스당 요새를 포위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요새를 향해 화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었고, 이 포격에 실질적인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었던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이 중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지휘계통이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악착같이 포위망 탈출을 위해 노력했으나 특히 4차례에 걸친 기병돌격은 프로이센군 포병의 십자포화에 실패로 돌아갔고[6], 애당초 임시로 들어간 스당 요새에 식량이나 탄환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을 리도 만무했다.

파일:external/www.akg-images.de/AKG73670.jpg
스당의 항복.[7]
거기다가 프로이센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개시하니, 9월 1일, 나폴레옹 3세가 항복했다. 나폴레옹 3세가 겁쟁이가 아니라 애초에 스당 요새로 쫓겨들어간 순간 별 대책이 없었다. 병력도 적고 화력도 프로이센군이 강했기 때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BismarckundNapoleonIII.jpg
스당 전투 이후 비스마르크와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
1878년 빌헬름 캄프하우젠(Wilhelm Camphausen) 작품,
나폴레옹 3세는 항복을 하면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에게 자비를 구하려고 했으나 비스마르크가 이를 막아섰고, 결국 아무런 관용 없이 장교를 제외한 병사는 모두 무장 해제당하고 포로로 잡혔다.

몰트케는 보불전쟁에서의 공으로 대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독일 제국군의 첫번째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스당 전투에서의 공으로 몰트케는 백작 칭호를 받았다. 그후 보불전쟁 승리 이듬해인 1872년 프로이센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는 영예를 누렸고, 푸르 르 메리트 대십자상을 받기도 하였다.

전쟁 승리 이후 1879년부터 노령으로 인한 은퇴를 요청하지만 황제는 몰트케에게 군에 대한 공적이 너무 위대하여 경이 살아 있는 한 퇴역을 고려할 수 없다고 하며 사직 요청을 지속적으로 반려했다. 이때부터 황제가 계속 참모총장으로 붙잡으려고 알프레트 폰 발더제를 참모차장으로 임명하여 업무를 경감시켜 주었으며 조카인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까지 부관으로 붙여서 은퇴를 계속 막았다.

1883년에는 황제의 칙령으로 언제든지 평시에도 황제를 상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참모총장이 육군본부의 예속되는 것이 보통의 일이었지만 몰트케는 예외적으로 군의 장비 문제에 한하여만 통제받았으며 나머지 사항은 육군본부에 예속되지 않았다.
파일:Helmuth_Karl_Bernhard_Graf_von_Moltke.jpg
참모총장으로 역임 중의 몰트케
1888년에는 30년동안 재직한 참모총장 직에서 물러났다. 독일제국군의 차기 참모총장은 알프레트 폰 발더제 기병대장이었다.[8] 1890년 90세 생일에 황제 빌헬름 2세와 독일 각국의 제후들 군 고관들이 성대한 축하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듬해 1891년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비스마르크처럼 빌헬름 2세와 그의 측근들이 보였던 호전적인 군국주의를 경계했고, 1890년에는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독일 의회에 몸소 출석해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때 몰트케는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범위가 어마어마할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몰트케는 그 다음해 사망했으나 그의 선견지명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3. 군사학적 영향[편집]


정치가 군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으며, 군의 독립적인 작전 전개를 기동전의 생명이라고 여겼다.

임무형 지휘 체계에 입각한 군의 분산 이동을 통해 전장의 중심 내선에 병력을 집중시킨 후 전선의 중점을 타격해 포위 섬멸[9]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작전적 기동전은 이후 후대 도이칠란트군의 주요 교리가 되었다.

작전전술의 범주에 포함시켜 전략-작전-전술의 체계를 새로이 정립시키기도 했다. 다만 작전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0]

4. 기타[편집]


  • 그가 죽은 지 15년 후인 1906년, 조카 소(小)몰트케가 그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되었다. 그리고 삼촌의 업적을 다 깎아먹었다. 헬무트 폰 몰트케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조카가 그 이름을 물려받았다.

  • 인터넷에서 '몰트케'란 이름으로 검색하면 1) 장발에 수염없는 깔끔한 장군, 2) 대머리에 콧수염이 달린 장군의 모습이 동시에 나와서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본 항목에 나오는 대(大)몰트케는 전자다.

  •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독일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영어[11], 튀르키예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의 8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고 한다.

  • 취미는 모차르트 음악 감상, 고급 시가 피우기를 즐겨 하였으며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독서였다.

  • 프로이센 종신 상원의원으로 재직시 참모총장이었지만 상원의원으로서 종종 제국의회에서 연설을 하였는데 특히 군사의 관한 문제에 대하여 정부입장을 잘 이야기 하였으며, 연설은 간결 명료하게 하고 남에게 피해를 안끼치는 성격이라 의회에서 평판이 좋았다.

  • 전술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는 임기응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아무리 잘 짜여진 전술, 작전상의 계획이라도 첫 총성이 울리는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 라는 격언을 남겼다. 잭 웰치가 이 말을 인용했으며, 마이크 타이슨이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주둥이에 한 방 얻어맞기 전까지는."으로 고쳐서 말한 것이 유명해졌다.


몰트케의 육성

  • 가장 옛날에 태어난 사람의 음성녹음의 주인공[12]이자 18세기에 태어난 사람 중 유일무이하게 후손들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13]이기도 하다[14]. 폰 몰트케는 1889년 파리 엑스포가 끝난 이후 독일측에서 베르너 폰 지멘스의 후원으로 축음기 시범을 보일 당시 녹음을 해본 사람 중 하나로[15], 1889년 10월 21일에 4개 실린더에 음성녹음을 남겼으나 2개의 실린더는 망실되고 나머지 2개만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첫 녹음(0:05~2:10)은 축음기의 발명을 치하한 후 파우스트의 한 구절을 낭독한 것이고, 다른 녹음(2:10~4:10)은 햄릿 제1막 제3장 중 일부를 낭독한 것이다. 이는 폰 몰트케가 19세기 기준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적 관점으로도 상당히 장수한 인물이라 누린 복인 셈이다. 참고로 이 녹음은 오랫동안 유실되었다가 1957년에 발견되었으나, 한동안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졌다가 2011년에 폰 몰트케의 육성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고는 2012년 1월 30일, 1889년 10월 7일에 녹음된 비스마르크의 육성 녹음과 함께 대중에 공개되었다. 참고자료 아이러니하게도 평소의 폰 몰트케는 과묵한 성격이여서 별명이 '위대한 침묵의 사람(der große Schweiger)'이었을 정도였으나, 이 녹음 덕분에 18세기에 태어난 사람 중 유일하게 후대 사람들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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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6 13:58:21에 나무위키 헬무트 폰 몰트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폰몰트케'가 되지만 오랫동안 '몰트케'로 알려졌기에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2] 일반적으로는 "아무리 훌륭한 전투 계획이라도 첫 총성이 울리는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라는 의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3] 원래 꽤 잘 사는 가문이었는데, 프랑스의 침공으로 인해 그들의 시골에있는 별장은 불탔고, 그들의 본가는 약탈당했다.[4]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사용하였던 방법이다.[5] 철도와 전신의 군사적 효과는 앞서 미국남북전쟁에서도 입증된 바 있었다.[6] 스당 요새에서 포위를 뚫으려고 프랑스 기병대의 자살에 가까운 돌격이 몇 번 이어지자 빌헬름 1세는 "진정 용감한 사람들" 이라며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7] The Capitulation of Sedan.[8] 훗날 의화단 전쟁에서 8개국 연합군의 총사령관을 맡는 그 사람이다. 다만 공화국의 군대인 프랑스군과 미군은 귀족 계급에 황제의 신하였던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9] 적의 궤멸이 아니라, 적을 무력화하는 것이다.[10] 이후 작전을 전략, 전술을 연결하는 보다 구체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정립 및 체계화한 것은 20세기 초 소련의 알렉산드르 스베친이 작전술(operational art)을 주창하면서 이루어졌다.[11] 아내로부터 배웠다고 한다.[12] 쉽게 말해 프란츠 슈베르트와는 나이 차이가 3살, 알렉산드르 푸시킨과는 나이 차이가 1살밖에 나지 않는 사람이 후대에 음성 녹음을 남겼다는 것이다.[13] 이와 유사한 케이스로는 17세기에 태어난 사람 중 유일무이하게 사진을 남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리칭윈이 있지만, 이쪽은 생년에 논란이 있다.[14] 참고로 음성녹음을 남긴 여성 중 가장 옛날에 태어난 사람은 영국빅토리아 여왕(1819년생)이다.[15]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당시 시범 녹음에 참가하였으나 몰트케보다 15살이나 어렸다.[16] 사실 축음기에 음성 녹음을 남긴 18세기 출생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1891년 9월 19일자 '모닝 콜(The Morning Call)'이라는 신문에 따르면 1890년 1월에 호레이쇼 페리(Horatio Perry, 1790~1891)라는 100세 노인이 축음기에 자신의 유년기를 회고하는 말을 녹음으로 남긴 바가 있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그 녹음은 유실되었다. 참고자료 만약 그 녹음이 남아있었다면 1700년대생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서 1600년대생의 사진을 보는 것만큼이나 의의가 매우 높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