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마르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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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마르티나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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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국가대표팀 주장

예르지 부와노프
(1931~1935)

헨리크 마르티나
(1935~1936)


유제프 코틀라르치크
(1937)


파일:Henryk Martyna.jpg
이름
헨리크 율리안 마르티나
(Henryk Julian Martyna)
생년월일
1907년 11월 14일
사망년월일
1984년 11월 17일 (향년 77세)
국적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출신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라쿠프
포지션
풀백, 포워드
신체조건
167cm / 85kg
등번호
-[1]
소속팀
코로나 크라쿠프 (1924-1928)
레기아 바르샤바 (1928-1936)
KS 바르샤비앙카 (1937-1939)
국가대표
27경기 / 4골 (1929-1936)

1. 개요
2. 생애[2]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1.1. 초창기
2.2.1.3. KS 바르샤비앙카
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1. 개요[편집]


폴란드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3][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마르티나는 1907년 11월 14일, 크라쿠프의 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바르트워미웨이 노보르보르스키(Bartłomiej Nowodworski)[4] 기숙사 학교를 다녔고 1922년에 졸업했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2.2.1.1. 초창기[편집]

마르티나는 1920년부터 오르젤 크라쿠프(Orzel Kraków)에서 축구를 했고 1923년부터 1927년까지는 상과 대학에서 공부했다.

1924년부터는 코로나 크라쿠프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2.1.2. 레기아 바르샤바[편집]

1928년, 마르티나는 군복무를 위해 레기아 바르샤바로 이적했고[5] 8월 12일, 포곤 르부프(Pogoń Lwów)와의 시합에서 데뷔했다. 결과는 1대1이었으며 이 경기에서 마르티나는 센터 포워드로 뛰었지만 코칭스태프의 판단에 의해 최후방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마르티나의 포지션 변경은 처음엔 그를 크게 실망시켰지만 나중에 그는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와 30년대 폴란드 축구계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으니 이것은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데뷔 시즌에 마르티나는 리그 28경기 중 12경기에 출전했다.

1929년 4월 14일에 있었던 포곤 르부프와의 경기에서 마르티나는 부상을 입었지만 게임을 끝까지 소화했다. 그럼에도 팀의 0대2 패배는 막을 수 없었다. 5월 9일의 바르타 포즈난(Warta Poznań)전에서는 난투극 끝에 마르티나가 퇴장당했고 팀은 1대3으로 패했다.

6월에 마르티나는 비스와 크라쿠프의 독일 투어에 임대 형식으로 참여, 2게임을 뛰었다. Vfp 라이프치히전에선 페널티 킥으로 득점을 올렸지만 크라쿠프는 1대2로 패했다. 8월에는 레기아 바르샤바에 복귀해서 PSV 에인트호번전에 출전, 3대1로 승리하는데에 기여했지만 다리 타박상으로 정작 리그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1929년 10월 20일의 포곤 르부프전에서 마르티나는 리그 첫 골을 기록했고 11월 10일의 루흐 호주프(Ruch Chorzów)전에서는 경기중에 공격 포지션으로 이동, 골을 넣고 다시 풀백으로 복귀하는 활약을 펼쳤지만 팀은 1대2로 패했다. 그리고 그는 11월 24일 투리스투프 우치(Turystów Łódź)전에서 골키퍼 스타니스와프 스콰르친스키(Stanisław Skwarczyński)와 같이 퇴장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레기아 바르샤바는 4위로 시즌을 마쳤고 마르티나는 23경기에 출전, 2골을 넣었다.

1930년 7월의 폴로니아 바르샤바와의 바르샤바 더비에서 마르티나는 페널티 킥을 얻어냈지만 팀은 1대3으로 패했다. 그리고 8월에는 레기아 바르샤바의 새 홈구장인 폴란드 육군 경기장의 개장 경기에 참가했다. 상대는 CF 에우로파 바르셀로나였고 레기아는 1대0으로 승리했다. 1930년 11월 1일, ŁTSG 우치와의 시합 중에 마르티나는 후고 뷘시(Hugo Wünsch)에게 파울을 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사타구니 부상을 당해 들것에 실려 나갔다. 마르티나는 이 시즌에 22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1931년 시즌 개막전. 레기아의 상대는 ŁKS 우치였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마르티나는 상대팀 선수와의 충돌로 인해 경기 종료 10분을 남기고 퇴장을 당했다. 6월 6일의 바르샤비앙카와의 경기에선 페널티 킥을 얻어냈지만 커리어 첫 자책골도 넣어서 팀의 2대4 패배를 막지 못했다. 11월 29일, 포곤 르부프전에서 마르티나는 부상으로 인해 잠시 피치를 비웠지만 경기를 끝까지 소화하는 투혼을 보였다. 레기아는 해당 시즌에서 3위를 차지했고 마르티나는 21경기에서 1골을 넣었다.

1932년 6월 26일 경기의 상대는 포곤 르부프. 마르티나는 경기중에 공격수로 포지션 변경을 했고 페널티 킥으로 골을 넣었지만 레기아는 1대2로 패했다. 레기아는 5위에 그쳤고 마르티나는 21경기 3골의 성적을 기록했다.

1933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마르티나는 레기아의 주장으로 임명되었고 4시즌동안 주장직을 소화했다. 그에 걸맞게 그는 첫 두 경기에서 연속골을 기록했다. 7월 16일의 포곤 르부프전. 그는 상대 선수와의 충돌로 인해 후반에 10여분간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충돌 후 잠시 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 여파로 인해 레기아는 0대2로 패배했다. 7월 23일의 하코아 비엔나(Hakoah Vienna) 전에서 레기아는 1대2로 패했는데 마르티나는 다리 부상으로 전반 6분 만에 아웃되었다. 이 부상으로 마르티나는 2달간 피치를 비워야 했다. 레기아는 6위로 지난해에 비해 순위가 한계단 내려갔고 마르티나는 2달의 결장으로 인해 14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4골을 넣어 팀 내 득점 순위 3위에 올랐다.

1934년 4월 22일. 마르티나는 가바니아 크라쿠프(Garbarnia Kraków)전에서 자책골을 기록했다. 6월 29일의 비스와 크라쿠프전에서 마르티나는 페널티 킥을 얻어냈고 레기아는 3대2로 승리했다. 레기아는 5위에 그쳤지만 마르티나는 22경기에서 5골을 기록, 팀 내 득점 3위의 기록을 남겼다.

1935년 5월 5일. 포곤 르부프전에서 마르티나는 파울로 인해 퇴장 당했다. 마르티나를 포함한 레기아 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주심은 퇴장 판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에 레기아 팀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나가버렸고 경기는 0대1로 패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으로 마르티나는 3개월의 리그 출장 정지와 1년간의 주장직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7월 17일의 SK 아드미라 빈과의 친선 경기에 잠시 징계가 풀린 것을 제외하면 징계 경감은 이뤄지지 않았다. 마르티나는 8월에서야 리그에 복귀할 수 있었고 이 여파로 해당 시즌에서 레기아는 9위, 마르티나는 9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마르티나와 레기아와의 동행은 다소 어이없이 끝났다. 1936년 10월, 마르티나는 여객선 바토리(Batory)호의 선장 스테판 노박(Stefan Nowak)으로부터 미국에서 열리는 폴란드계 미국인 스포츠 클럽과의 투어 경기를 치르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시즌중이었던 터라 비밀리에 미국에 가야 했고 선수들은 승객 명단에 없어서 선원으로 명단에 등록 후 미국에 가야 했다. 이 와중에 마르티나는 요리사로 등록되었다. 마르티나는 11월에 폴란드로 돌아왔지만 레기아 구단에서 이 사실을 알고 참가 선수들에게 2년간의 자격 정지를 내렸다. 그리고 레기아 구단 역시 시즌 내내 부진하다 꼴찌인 10위로 시즌을 마치면서 리그 역사상 첫 승강제의 희생양이 되었다.[6] 마르티나는 레기아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16경기 3골의 성적을 남겼다.


2.2.1.3. KS 바르샤비앙카[편집]

마르티나의 레기아 시절 동료였던 요제프 나브로트(Józef Nawrot)의 첫 번째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레기아에서 쫓겨난 후 즐기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찾았다. 그러다 바르샤비앙카의 클럽 회장이었던 레오폴드 괴벨(Leopold Goebel) 대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6천 즈워티의 이적료에 바르샤비앙카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의 바르샤비앙카 데뷔전은 1937년 5월 2일의 바르타 포즈난(Warta Poznań)전이었고 팀은 1대1로 비겼다. 바르샤비앙카는 1부 리그 7위의 성적을 거뒀고 마르티나는 7경기에 출전했다.

1938년 5월 1일, 마르티나는 폴로니아 바르샤바와의 경기에서 페널티 킥으로 바르샤비앙카에서 첫 득점을 올렸다. 팀은 8위, 마르티나는 16경기에 나가 1골을 기록했다.

1939년 6월, 마르티나는 폴란드 육군 경기장에서 열린 멀리차기 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이 대회에서 53미터의 기록으로 2위를 차지했다. 7월에는 알렉스 제임스가 주최하는 축구 강사를 위한 3주간의 캠프에 참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리그 중단 직전에 바르샤비앙카의 순위는 9위였고 마르티나는 9경기에 출전했다. 그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는 8월 20일의 비스와 크라쿠프전이었고 바르샤비앙카는 2대4로 패배했다.


2.2.2. 국가대표[편집]


마르티나의 대표팀 데뷔 경기는 1929년 8월 4일의 체코슬로바키아전이었다. 데뷔골은 1931년 10월 25일,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프리킥 골을 넣음으로써 기록했다.

마르티나는 한 차례씩 월드컵올림픽에 참가했다. 월드컵에서는 193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참가했지만 대회 준우승팀이 될 체코슬로바키아에 밀려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후 그는 베를린 올림픽에도 참가해 3경기에 출전, 폴란드의 4위에 기여했다. 그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는 1936년 10월 4일의 덴마크전이었고 폴란드는 1대2로 패했다. 마르티나는 27경기에서 총 4골을 넣었다.


2.3. 이후[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마르티나는 폴란드 침공바르샤바 봉기에 참여했다.

마르티나는 1939년 9월에 모들린(Modlin) 전투에 참전했지만 요새가 함락되면서 포로로 잡혔다. 그는 이와바(Iława)의 포로 수용소에서 11월 17일까지 머물렀고 수용소에서 나온 후엔 바르샤바에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그러면서 라도시체(Radość) 클럽에서 축구 시합을 뛰기도 했다. 이후 바르샤바 봉기에 참전했던 마르티나는 진압과정에서 다시 포로로 잡혀 프루슈쿠프(Pruszków)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석 달 후 탈출에 성공했다.

전후에 고향 크라쿠프에 돌아온 마르티나는 축구 관련 경력을 더 쌓지는 않고 대표팀의 은퇴 멤버로 지내는 데에 만족하고 가끔 법원이나 검찰청의 축구 클럽 코치로 지냈다. 1946년에서 1950년 사이에 그는 인쇄 회사의 공동 소유주이자 크라쿠프에 있는 상점의 주인이었고, 1951년에서 1978년 사이에는 크라쿠프의 Mariacki 5에 위치한 상점의 관리자로 일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사회 협회의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조직의 크라쿠프 서클에서 오랫동안 회장을 역임했다. 1971년 그는 민족통일전선의 지방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마르티나는 키에 비해 체중이 상당히 많이 나갔던 선수였지만 빠르고 점프력이 좋았다. 그는 킥력이 좋아 5~60미터 정도의 롱패스로 공격수에게 전달, 상대의 골문을 위협하는 플레이를 즐겼으며 페널티 킥프리킥 전담 키커로 활약했다. 하지만 기술이 뛰어나거나 자신보다 더 빠른 선수에게 다소 상성이 좋지 않았는데 이런 경우에 종종 위험한 파울을 범하는 약점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신체적으로 강했고 거친 플레이도 마다하지 않아 독일 언론에서 불독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1552-1625. 폴란드의 군인.[5] 레기아 바르샤바는 원래 군인팀이었다. 시작도 마니에비체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만든 클럽이었다.[6] 1949년에 레기아 바르샤바는 엑스트라클라사 승격에 성공했고, 그 이후로는 리그 우승을 15회 차지하면서 폴란드 축구계의 명문팀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단 한 번도 강등을 당한 적이 없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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