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라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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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라르손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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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라르손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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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축구인


파일:LArsson_Barca_Return.jpg

이름
헨리크 라르손
Henrik Larsson[1]
출생
1971년 9월 20일 (52세)
스웨덴 헬싱보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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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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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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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보베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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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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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8cm, 체중 76kg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코치
축구 감독
소속
선수
회가보리 BK (1988~1992)
헬싱보리 IF (1992~1993)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93~1997)
셀틱 FC (1997~2004)
FC 바르셀로나 (2004~2006)
헬싱보리 IF (2006~200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7 / 임대)
로아 IF (2012)
회가보리 BK (2013)
감독
란스크로나 보이스 (2009~2012)
회가보리 SK(2013 / 수석코치)
파을켄베리스 FF (2014)
헬싱보리 IF (2015~2016)
엥엘홀름 FF (2018~2019 / 수석코치)
헬싱보리 IF (2019)
FC 바르셀로나 (2020~2021 / 코치)
국가대표
106경기 37골[2] (스웨덴 / 1993~2009)
가족
아들 조르단 라르손

1. 개요
1.1. 상세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4.3. 수훈
4.4. 출전 기록
5. 여담



1. 개요[편집]


스웨덴축구 선수 출신 지도자.


1.1. 상세[편집]


UEFA 유로파 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3] 볼 컨트롤, 보디 밸런스, 브레인 3가지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어 그 파괴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교과서적 골잡이. 별명은 그늘 속의 히어로[4]FIFA에서 붙여준 작은 연못에 사는 큰 물고기[5]가 있다. 다른 별명으로는 Magnificent7다.

178cm로 타겟형 최전방 공격수 치고는 비교적 단신이었지만 예술적인 볼터치와 트래핑을 선보이며 상대 수비진을 파고들었고, 탄탄한 체격에서 나오는 완벽한 보디 밸런스로 장신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헤더 능력도 탁월하여 "헤더는 키로 하는 것이 아니다."란 말을 널리 퍼뜨리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여기에 엄청난 축구 아이큐와 탁월한 멘탈을 겸비하니,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을 보여줬다. 그 냉정&침착한 판단력은 다른 선수들에게서 쉽게 보기 힘든 특별한 것이었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패스와 슈팅, 공간침투 능력은 호나우지뉴 조차 풀지 못하던 전술적 제한성까지 풀어 주었다. 단 한사람의 존재만으로도 공격 지역에서 엄청난 공간창출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셀틱 시절의 감독이었던 마틴 오닐이 라르손에 대해 남긴 말은 아주 유명하다. "라르손이 스코틀랜드에서만 통할 거라 생각해온 사람들도 적지 않으나, 나는 그가 어떠한 장소에서든 골을 터뜨릴 수 있음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라르손은 이 말이 맞다는 것을 그라운드 위에서 골로 확인시켜 주었다. 축구판에서 아주 유명한 명언인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가 100% 어울리는 선수 중 하나.

여담으로 아버지가 서아프리카의 카보베르데 출신이다. 웃지 못할 이야기로, 2002 한일 월드컵 이전 선수 투표에서 20위를 차지한것까지는 좋았는데 국내언론의 병크로 중원의 사령관으로 소개되었다.[6]

골을 넣고 난 뒤 혓바닥을 내미는 특유의 세레모니가 있는데, 이는 라르손이 마이클 조던의 광적인 팬이라서 따라한 거라고 한다. 마이클 조던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아들 이름까지 조르단으로 지었다. 아들 조르단 라르손도 아버지를 뒤이어 현재 축구 선수로 활동 중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편집]


1988년 만 17세의 나이에 스웨덴 리그 회가보리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조금씩 경험을 쌓으면서 성장세를 보인 라르손은 약관이 된 1991년 (컵대회 포함) 32경기에서 15골을 기록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가능성을 인정받고 고향 팀 헬싱보리스로 이적한 라르손은 61경기에서 무려 51골을 집어넣는 대활약을 펼치며 스웨덴 리그 최고의 골잡이로 우뚝섰다.

1993년 네덜란드의 명문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이적한 라르손은 4시즌 동안 총 149경기에서 42골을 집어넣었다. 1997년 스코틀랜드 최강 팀 셀틱 FC로 둥지를 옮긴 라르손은 이 곳에서 전설로 거듭난다.[7] 첫 시즌 44경기에서 16골을 뽑아내더니 두번째 시즌이던 1998-1999 시즌에는 51경기 35골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99-00 시즌 올랭피크 리옹과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정강이뼈가 부러지는[8] 끔찍한 부상을 입었다. 서른이 다된 라르손에게 축구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라르손은 위기에 강한 남자였다. 충실한 재활로 7개월 만에 부상을 털어버리고 더욱 강해져서 팬들 앞에 다시 섰다.

그는 이후 4시즌 간 201경기 161골을 기록하며 4년 연속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라르손과 함께한 7년간 셀틱은 4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스코티시컵 우승, 2번의 스코티시 리그컵 우승을 차지했다. 셀틱이 배출한 월드클래스 선수.

2004년 서른을 훌쩍 넘긴 라르손은 스페인 라리가의 명문 구단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라르손은 빅리그용 선수가 아니다', '이미 전성기가 지났다'라는 혹평을 내놓았지만, 그는 오히려 라리가 선수들에게 한 수 가르치면서[9] 바르셀로나의 라리가 2연패(2004/05, 2005/06 시즌)에 공헌했다.

2004/05 시즌 바르셀로나는 라르손과 사무엘 에투를 동시에 영입했는데 감독인 레이카르트의 선택은 젊은 유망주 에투였다. 에투는 초반 움직임에 비해 골을 넣지 못하며 생각보다 적응 기간이 더 필요해 보였고, 라르손은 이 때 서브로 출전하면서도 90분당 득점 수치에서 다른 선수들을 확실히 앞서는 뛰어난 골 결정력을 보여 준다. 결국 레이카르트 감독은 기존의 호나우지뉴 - 에투 - 지울리의 공격진을 호나우지뉴 - 에투 - 라르손의 공격진으로 변화를 준다. 지울리는 뛰어난 돌파력을 바탕으로 한 윙어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해 내었으나, 높은 축구 지능으로 중앙 공격수부터 윙어, 처진 스트라이커까지 수행 가능하고 때로는 호나우지뉴의 자리까지 어느 정도 메울 수 있는 라르손의 조합이 에투의 역량을 끌어 내고 팀의 공격력을 크게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파괴력 있는 호나우지뉴 - 에투 - 라르손의 삼각 편대는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에서 라르손이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면서 오래 가동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부상에서 돌아 온 라르손은 2005/06 시즌 바르셀로나의 2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도 큰 공을 세웠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아스날과의 결승전에서 2도움으로 2-1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수적 우위에 있었음에도 바르셀로나의 경기는 잘 풀려 나가지 않았고 분위기는 아직 1:0으로 앞서고 있는 아스날의 것이었다. 후반 75분 줄리아누 벨레티와 함께 교체 투입된 라르손은 감각적인 2어시스트로 바르셀로나가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결국 빅 이어를 들어 올렸다.[10]

바르셀로나의 팬들이 팀을 거쳐 간 수많은 역대 공격수들 중에서도, 팀을 위해 뛰었던 기간도 길지 않고 그나마 부상으로 쉰 기간도 있는, 라르손을 높은 순위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이유는 이러한 활약들 때문일 것이다.[11]

셀틱과 바르셀로나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라르손은 2006년 고향 팀 헬싱보리로 금의환향했다. 그러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라르손을 눈여겨 보았던지라 맨유로 임대되었다.

2006-07 시즌 뤼트 판니스텔로이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고 주전 공격수 루이 사하가 시즌 중반 이후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되자 대형 공격수 부재로 고민하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라르손이라는 깜짝 카드를 꺼내들었고, 라르손은 임대 가서도 전설이 되었다.

라르손과의 계약은 단기 임대 형식이었는데 겨울에는 휴식기를 보내는 스웨덴 리그였기에 맨유는 그 기간에만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려는 목적이었다.[12] 비록 3달 남짓의 기간 동안 많은 골을 넣어주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순간 골을 넣어주고 경기의 흐름을 바꿔주는 움직임으로 맨유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적잖이 기여했다. 그의 활약에 매료된 맨유 팬들은 시즌 종료까지 임대를 연장하라고 부르짖었고 퍼거슨 감독도 적극적인 구애의 손짓을 보냈지만 라르손은 소속팀 헬싱보리 IF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고사했다.

그리고 고향 팀으로 돌아가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 주다가, 2009년 10월 28일 유르고덴스 IF와의 리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프로 통산 768경기 434골, 유럽대항전(챔피언스 리그+유로파 리그) 통산 106경기 59골을 기록했다.


2.2. 국가대표[편집]


파일:스웨덴 불가리아 라르손.jpg

22살의 나이로 1994 미국 월드컵에 출전해 스웨덴의 3위 입상에 공헌했으며[13]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나이지리아전에서 2골을 몰아쳐 스웨덴이 죽음의 조(나이지리아, 잉글랜드, 아르헨티나)[14]를 1위로 통과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 16강에서 당시 돌풍의 팀 세네갈과 만나 탈락했다.[15]

유로 2004에서 4경기 3골을 기록하며 스웨덴의 8강행에 앞장섰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도 조별리그 잉글랜드전에서 천금같은 동점 골을 넣으며 조국을 16강에 올려 놓았으나, 16강전에서 독일을 만나 2대0으로 패배 후 쓸쓸하게 퇴장했다.[16] 유로 2008에서는 러시아에 패해 아쉽게 예선에서 탈락했고, 이후 프레드리크 융베리가 국가대표에서 은퇴하자 대표팀 주장에 선임되어 2010 남아공 월드컵 지역 예선까지 치렀으나 덴마크포르투갈에게 밀려서 4번째 월드컵 출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예선 탈락에 그쳤다. 이후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고 얼마 뒤, 현역에서도 물러났다. 그는 노란 바이킹의 전설, 2000년대 최고의 스웨덴 축구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가 복귀한 경험이 두 차례 있다.[17]

첫 번째 은퇴는 2002 한일 월드컵 마친 직후였는데 이유는 아들이 아빠와 함께 노는 시간이 적다고 해서라고. 유로 2004를 앞두고 스웨덴 국민들이 복귀 서명 운동을 하고, 총리가 개인 의사이지만 복귀 희망을 공개적으로 밝혔는데도 요지부동 꿈쩍을 하지 않았다. 결국 예선은 라르손 없이 치러졌으며, 본선 대회 직전 전격 복귀 의사를 밝힌다. 그 사이 큰 아들이 아빠가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2006 독일 월드컵 이후 2번째 은퇴를 선언했지만 코칭스태프의 설득 끝에 유로 2008을 앞두고 다시 국가대표에 복귀했다.

여담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라탄과 라르손이 함께 국대에서 활약한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즐라탄이 유망주를 벗어나 대선수로 크고 있을 무렵, 라르손은 이미 노장 선수였기에 즐라탄이 좀더 일찍 태어났거나 라르손이 조금만 더 젊었으면 스웨덴의 국대 성적도 더 좋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그 둘의 호흡은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고, 그 즐라탄도 '라르손의 경기력은 내가 함께 해왔던 선수들 중 최고' 라고 인정할 정도. 포스트 플레이로 수비라인을 분쇄하면서 공간을 열어주는 즐라탄과 완벽한 바디밸런스와 순간적인 뒷공간 후려치기로 수비라인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라르손의 조합은 어느 국가의 공격진에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라르손은 키가 그다지 크지 않음에도 헤더를 매우 잘 하면서 선호하는 선수이고, 즐라탄은 키가 큰데도 발재간을 이용한 다양한 슛을 선호하는 특징이 있는 선수이다. 빅&스몰이기는 한데 평범하지 않은 빅&스몰.

UEFA 유로 대회 해트트릭의 영광을 쿨하게 포기했다.[18] 유로 2004에서 라르손이 기록한 4경기 3골 중 2골은 사실 복귀 첫 경기인 불가리아전에서 나왔는데 1분 사이에 2골을 몰아 넣은 라르손은 팀이 페널티킥을 얻자 이를 다른 선수에게 양보한다. 경기 후 라르손은 "내가 한 골을 더 넣는 것보다 젊은 선수가 이런 큰 경기에서 골을 넣는 경험을 얻은 것이 중요하다. 스웨덴 국가대표 축구팀이 강해질 것이다."라고 인터뷰했다. 교체로 들어와 페널티킥을 넣은 젋은 선수는 바로 즐라탄이며 이 골은 즐라탄의 메이저대회 첫 골이다.

아쉽게도 스웨덴은 라르손의 대체자를 키워내지 못했고, 유로 2016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즐라탄도 클럽에서의 활약에 비해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은 라르손에 미치지 못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지도자 과정을 밟기 위해 선수시절 활약했던 셀틱으로 돌아가 경험을 쌓고 싶다는 의견을 표력하기도 했으나, 은퇴한 지 두 달 뒤인 2009년 12월 스웨덴 2부리그 클럽인 란스크로나 보이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란스크로나 보이스는 헨리크 라르손의 고향 팀인 헬싱보리의 전통적인 라이벌 팀이었기 때문에 란스크로나의 취임이 스웨덴 내에서는 꽤나 화제였다고 한다.

2010 시즌 4-3-3 포메이션으로 시즌 초반에는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줘 승격에 대한 기대를 받았으나 리그 5위를 기록하여 승격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팀 내 보드진은 이런 성과에 만족하여 헨리크 라르손과 1년 연장 계약을 맺었다.

2011 시즌에는 2부 리그 팀임에도 스웨덴의 국가대표 선수를 영입하는 등 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라르손은 1부 리그 승격을 장담하였으나 정작 2011 시즌에는 2부 리그에서 10위를 기록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다. 팀 내 서포터들의 항의에 라르손은 선수로 컴백하여 경기를 뛰어볼 생각도 했지만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포기 하였고 팬들의 불만에도 구단은 라르손과 1년 연장계약을 체결하여 2012 시즌에도 팀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나 2012 시즌 리그 6위를 기록, 리그 승격권인 3위와 승점 15점차를 보이며 2012시즌에도 승격에 실패했고 라르손은 란스크로나 보이스와 연장계약을 하지 않고 팀을 떠난다.

2013년에는 4부 리그 팀인 회가보리 SK의 수석코치직을 맡았고 팀이 강등 위기에 빠지자 직접 선수로 복귀하여 강등을 막겠다고 나섰다.#

2014 시즌에는 2부 리그에서 갓 승격한 파을켄베리스 FF를 지휘하여 리그 11위로 끝마쳤다.

2015년 3월부터 친정팀 헬싱보리 IF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2015 시즌 성적은 리그 8위로 마감하였다. 2016시즌은 8승 5무 17패 승점 29점을 기록하여 리그 14위를 기록해 헬싱보리는 승강 플레이오프 치르게 됐다. 11월 17일과 20일에 수페레탄(2부 리그) 팀 할름스타드 BK와 플레이오프를 가졌는데 11월 17일 1차전 원정경기에서 1:1무승부를 기록, 원정 득점의 이점을 가지고 20일 홈경기를 치렀다. 0:0 무승부를 기록하다가 82분 헨라크 라르손의 친아들인 조나단 라르손의 득점으로 2:1 우위를 지켜 1부리그 잔류에 성공하는가 싶더니 경기 종료 직전 할름사타드 BK의 마르코 마티상에게 87분 페널티킥, 90분 필드골을 허용하여 순식간에 1,2차전 합계 2:3 역전패를 기록 헬싱보리는 결국 수페레탄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그리고 강등 확정 3일 후인 11월 23일 헬싱보리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스페인 현지 시간 8월 20일, FC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한 로날드 쿠만의 부탁을 받아 알프러트 스뢰더르와 함께 과거에 몸담았던 바르셀로나에 코치진으로 합류했다.


4. 기록[편집]



4.1. 대회 기록[편집]









4.2. 개인 수상[편집]


  • 유러피언 골든슈: 2000-01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4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골: 2004
  • 굴드볼렌[19]: 1998, 2004
  • 스웨덴 올해의 공격수: 2001, 2002, 2003, 2004
  • PFA 스코틀랜드 올해의 선수: 1998-99, 2000-01
  • SFWA 올해의 선수: 1998-99, 2000-01
  • SPFA 선수단 선정 올해의 선수: 1998-99, 2000-01
  •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1998-99, 2000-01, 2001-02, 2002-03, 2003-04
  •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2000년 9월, 2002년 11월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3
  •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7
  • 스웨덴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2005


4.3. 수훈[편집]




4.4. 출전 기록[편집]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유럽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9
회가보리 BK
스웨덴 디비전 3[20]
21
1
-
-
-
-
-
-
1990
회가보리 BK
스웨덴 디비전 3
21
7
-
-
-
-
-
-
1991
회가보리 BK
스웨덴 디비전 3
22
15
-
-
-
-
-
-
1992
헬싱보리스 IF
스웨덴 디비전 1[21]
31
34
-
-
-
-
-
-
1993
헬싱보리스 IF
알스벤스칸
25
16
5
1
-
-
-
-
1993/94
페예노르트
에레디비시
15
1
12
5
-
-
-
-
1994/95
페예노르트
에레디비시
23
8
9
1
-
-
6
7
1995/96
페예노르트
에레디비시
32
10
4
1
-
-
7
1
1996/97
페예노르트
에레디비시
31
7
4
0
-
-
6
1
1997/98
셀틱 FC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35
16
4
0
5
3
2
0
1998/99
셀틱 FC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35
29
5
5
0
0
8
4
1999/00
셀틱 FC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9
7
0
0
0
0
4
5
2000/01
셀틱 FC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37
35
6
9
2
5
5
4
2001/02
셀틱 FC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33
29
3
2
1
0
10
4
2002/03
셀틱 FC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35
28
2
2
2
2
12
12
2003/04
셀틱 FC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37
30
5
5
1
0
15
6
2004/05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12
3
0
0
-
-
4
1
2005/06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8
10
4
4
-
-
10
1
2006
헬싱보리스 IF
알스벤스칸
15
8
5
4
-
-
-
-
2006/07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7
1
4
1
0
0
2
1
2007
헬싱보리스 IF
알스벤스칸
22
9
1
0
-
-
9
9
2008
헬싱보리스 IF
알스벤스칸
27
14
1
0
-
-
2
0
2009
헬싱보리스 IF
알스벤스칸
20
7
1
0
-
-
4
3
2012
로아 IF
스웨넨 디비전 3[22]
1
0
-
-
-
-
-
-
2013
회가보리 BK
스웨덴 디비전 2[23]
1
0
-
-
-
-
-
-


5. 여담[편집]


  • 소속팀에서의 번호와 대표팀에서의 번호가 다르다. 소팀에서는 늘 7번을 달고 뛰었고 대표팀에서는 늘 11번을 달고 뛰었다. 대부분 번호를 고를 수 있는 위치였을텐데 아마도 본인이 선택한 듯 하다. 셀틱에서 7번을 달고 뛰다가 바르셀로나로 왔을 때 하비에르 사비올라가 7번을 가지고 있어 한동안 17번을 달고 뛰다가 얼마 안 되어 사비올라가 이적하자마자 7번을 가졌다. 이 17번은 맨유에서 임대 선수 생활을 했을 때도 잠시 달았다. 이 때 7번을 달고 있던 맨유 선수를 "케이크 위의 데코레이션 같이 화려한 선수이다"라고 실력과 태도를 동시에 평한 적이 있다.

  •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국가대표팀 은퇴와 복귀도 그러하고 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고 포스트도 적은 SNS의 상당 부분도 가족이 차지한다. 딸은 승마를 하고 아들은 축구를 한다.

  • 양 옆구리에 각각 딸 '아넬 라르손'과 아들 '조르단 라르손'의 이름을 한자로 적은 타투를 가지고 있다. 한자의 발음과 시기로 보아 아마도 2002년 월드컵 때 일본에서 새긴 것으로 보인다. 2002년 스웨덴은 월드컵 조별리그를 일본에서 치렀다.

  • 같이 스웨덴 대표팀에서 뛰었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도 친한 사이라고 한다. 그의 언급에 따르면 호나우두가 즐라탄의 우상이었다면 라르손은 즐라탄의 멘토였다고. 즐라탄이 유망주였던 시절에도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선배로서 여러 조언들도 해주었다고 한다.[24]

  • 유로 2004의 첫 경기에서 라르손의 활약에 힘 입어 스웨덴은 불가리아를 5:0으로 완파한다. 경기 후 스웨덴에서 한 노인이 차량 사고로 비탈로 떨어졌는데 라디오로 이 경기 중계를 들으며 힘을 내어 버텨 구조 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 헤더로 골 넣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로 2004 최고의 골에 선정된 골도 어려운 헤더골이다. 멋진 골이어서 리플레이가 계속 보여지는 와중에 두 번째 골을 감각적으로 넣었다. 두 골의 시간 차이는 1분이다.

  • 외유내강형의 사람으로 보인다. 본인은 강한 의지와 노력을 보여 주고, 늘 팀과 동료에게 공을 돌리며,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진정한 남자다.

[1] ˈ/hɛnrɪk ˈlɑːʂɔn/.[2] 대표팀 역대 득점 4위.[3] 56경기 40골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UEFA컵에서 UEFA 유로파 리그으로 이름이 바뀐 현재에도 깨지지 않고 있다.[4]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셀틱 시절을 알고있는 올드 위닝팬들은 라르손은 당시 그늘속의 히어로 라 불렀다 이는 빅리그의 그늘에가려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아쉬워하는 의미였지만 이후 30이 넘은 나이에 라리가의 바르셀로나로 이적해 그의 클래스를 증명하였고 이후 맨유로 단기임대 되어 많은 국내 축구팬들에게 본인의 이름을 알렸다.[5] 2001년 라르손이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할 당시, 빅리그 소속의 다른 선수에게 시상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자 FIFA에서 남긴 말이라고 한다. 사실 유로피언 골든슈 자체가 빅리그에 배수 적용을 하는 조정이 있는데도 그걸 뚫고 수상한 것이다.[6] 당시 해축 정보를 찾기가 지금처럼 쉽지 않아서 생긴 웃지못할 이야기.[7] 2002년 팬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셀틱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현역 선수로는 유일하게 포함되었고,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선정된 바 있다.[8] 영상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다리가 거의 두동강이 났다.[9] 사무엘 에투 曰, '라르손은 수비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10] 앙리는 팀 패배 후 "사람들은 호나우지뉴와 에투를 이야기하지만 나는 오늘 그들을 보지 못했다. 내 눈에는 라르손만 보였다. 경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선수가 있는데 라르손이 그것을 보여주었다" 라고 말했다.[11] 라르손은 유니폼 판매량에서도 늘 팀 내 3위 안에 들었다고 한다.[12] 미국 MLS에서 뛰는 유럽 출신의 선수들이 비시즌 기간 단기 임대로 유럽에 복귀하는 것과 비슷하다. 데이비드 베컴, 랜던 도노반, 로비 킨, 티에리 앙리 등이 대표적인 예.[13] 3위 결정전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3번째 골을 터뜨렸다.[14] 바티스투타의 눈물을 기억한다면 이 대회이다. 역사적으로 앙숙인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축구 라이벌 잉글랜드와 스웨덴, 아프리카 축구를 알린 나이지리아. 우승후보 1순위 아르헨티나는 고국의 경제 사정으로 선수들이 자비로 참가했으며 국민들에게 축구로 위로를 전하고자 했었다. 다만, 그 다음 대회에 바티스투타를 엔트리에서 제외했고 아르헨티나는 그때부터 살아나기 시작해서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유럽예선에서 스페인을 플레이오프로 밀어내고 본선 직행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6-0으로 대파하고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숫제 결승까지 올라갔다.[15] 이 경기는 스웨덴의 라르손과 세네갈의 디우프의 일기토 수준의 경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재미있는 경기였다. 골대를 맞힌 세네갈은 골대에 맞은 공이 골문으로 들어가 골든골로 이겼고, 그 직전에 골대를 맞혔으나 공이 골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스웨덴은 패했다.[16] 독일 수비수 크리스토프 메첼더에게 밟혀서 페널티킥을 얻어냈으나 크로스바 위로 날리기까지 했다.[17] 마이클 조던을 좋아하는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18] 직접 넣었다면 역대 7번째의 영예.[19] 스웨덴 올해의 축구 선수[20] 당시 스웨덴 4부리그.[21] 당시 스웨덴 2부리그.[22] 스웨덴 5부리그, 1999년 스웨덴 리그 명칭 변경에 따라 디비전 1이었던 2부리그는 수페레탄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디비전 1은 3부리그, 디비전 2는 4부리그, 5부리그는 디비전 3으로 변경.[23] 스웨덴 4부리그, 1999년 스웨덴 리그 명칭 변경에 따라 디비전 1이었던 2부리그는 수페레탄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디비전 1은 3부리그, 디비전 2는 4부리그, 5부리그는 디비전 3으로 변경.[24] 즐라탄의 자서전에 나온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즐라탄이 아약스로 이적할 때 갑자기 엄청난 인기와 관심이 쏟아지자 부담감을 느껴 라르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미 스타 선수였던 그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알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 그러자 라르손은 "즐라탄, 이건 네가 혼자 해결해야 해. 스웨덴에서 지금까지 너만큼 엄청난 관심도를 받은 선수는 없었어." 라고 조언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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