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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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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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Henry Ford


파일:800px-Henry_ford_1919.jpg

출생
1863년 7월 30일
미시간 주 그린필드 타운쉽
사망
1947년 4월 7일 (향년 83세)
미시간 주 디어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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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기업인
활동
1891년 ~ 1945년
신체
178cm
정당

(1918년 이후)

(1918년 이전)
아버지
윌리엄 포드 (1826 ~ 1905)
어머니
메리 리토갓 오언 (1839 ~ 1876)
형제자매
존, 마가렛, 제인, 윌리엄, 로버트
배우자
클라라 제인 브라이언트 포드 (1888년 결혼)
자녀
장남 에드셀 포드 (1893 ~ 1943)
재산
현재 가치 기준 약 220조원
종교
개신교(성공회)[1]
서명
파일:1280px-Henry_Ford_Signature.svg.png
1. 개요
2. 생애
3. 어록
3.1. 국제유대인(The International Jew)
4. 반유대주의적 행보
6. 선거 이력
7.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존 달린저[2]

라는 소년이 헨리 포드와 토론하던 중 소년은 평소부터 존경해 오던 노인인 포드가 교육제도에 대해 상당히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년 존 달린저는 포드에게 “할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현대’(modern)란 말예요.”라고 쏘아붙였다. 그 말을 들은 포드가 자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얘야, 그 ‘현대’를 발명한 게 나란다.”


포드 모터 컴퍼니를 설립한 기업인이자 기술자이며 세계 최초로 자동차의 대량 양산에 성공한 인물이다. 위의 대화에 나오는대로 현대(modern)의 발명가.

존 데이비슨 록펠러앤드루 카네기, 존 피어폰트 모건 등도 억만장자로 불리지만 생존 당시의 재산이 10억 달러를 넘지는 못했다. 생존 당시에 보유 재산이 10억 달러를 넘긴 사람은 헨리 포드가 처음이다.[3]

1919년 포드 자동차의 창립 시에 자금을 보탰던 다른 주주들로부터 주식을 전부 사들여 포드 사는 100% 헨리 포드의 소유가 되었다. 다만 얼마 뒤 장남 에셀에게 42% 아내 클라라에게 3%의 주식을 양도하여 본인은 55%만을 보유했다. 1903년 포드 자동차 창업 당시에 자금을 대었던 주주들은 1919년 주식을 양도할 때 정확히 2500배로 불려서 1만 달러를 투자한 사람은 2500만 달러를 받아갔다.


2. 생애[편집]


1863년 미국 미시간 그린필드 타운쉽에서 윌리엄 포드와 메리 리토갓 오언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형제자매로 2명이 더 있었으나 사산되었다.

토머스 에디슨과 교우관계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기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참고로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려터진 마차를 타고 오느라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업계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후 에디슨 주식 회사에서 일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자신의 가솔린 자동차 개발 계획을 발표했을 때, 에디슨은 그것을 듣고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테이블을 쾅 치고는 "자네 듣던대로 현명하군. 생각대로 가솔린 자동차를 만들어보게."[4]라고 격려했다고 하나, 원래부터 전기만 연구하고 살던 에디슨은 곧 잊어버렸다고 한다.[5] 그런데 포드는 에디슨이 지금껏 아내말고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이해해준 두 번째 사람이었기에 크게 감명받았다.

이후에도 포드는 아내의 도움으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을 딴 포드 모터 컴퍼니를 세웠다.

중간에 회사를 선전하기 위해서 레이싱 경기 등에 참여해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포드미국 최대의 회사로 만들어준 자동차 포드 모델 T는 에디슨이 발명한 에디슨 전지를 채용했다.

아무튼 그가 제작한 포드 T형은 값싸고 안전한 좋은 차였기에 여러 계층에서 사랑받게 되었다. 포드 T형의 성공으로 미국 자동차 업계의 시초점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너무 포드 T형에만 집착한 나머지 후발주자인 제너럴 모터스, 크라이슬러에게 선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그 유명한 검은색이기만 하다면 어떠한 색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라든가.[6] 놀랍게도 T형은 당시엔 냉장고보다도 싸게 살수 있었다. 물론 당시 냉장고가 그만큼 비쌌다는 이야기도 된다.

1913년에 컨베이어 벨트 생산 방식을 만들어 대량 생산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유명하다. 사실 이것이 헨리 포드의 가장 큰 업적이자 산업 혁명의 정점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산업 혁명으로 얻어진 인류의 급격한 기술적 성과를 대중에게 널리 보급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조차 공장에서 찍어내는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는 신급으로 추앙받는다. 심지어 달력도 포드력을 쓴다.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이 노동자들의 불만을 가져오자 그는 대신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대폭 상승시켜 불만을 무마시키고자 했다. 그래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자 격렬하게 반대했다.[7]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포드의 일당 5달러 임금 도입의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일단 컨베이어 벨트 등 일련의 기술 발전 덕분에 노동자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라 기계를 잘 다룰 줄 아는 숙련공의 존재가 중요해졌다. 많은 노동자들은 이제 임금만 잡아먹고, 회사에 필요없는 존재였고, 이들에게 일일이 기계를 다루는 법을 교육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또한 숙련공들은 일당에 따라서 공장을 옮기는게 예사였고, 이건 품질관리와 생산력이라는 측면에서 공장주들에게 골치거리였다. 이를 한 방에 해결한게 바로 1914년 일당 5달러 정책이었다. 필요없는 인력은 해고하되, 필요한 인력에게는 고임금과 단축된 근로시간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되니 오대호 근처의 모든 숙련공들이 포드 공장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다른 공장들은 포드 자동차만큼 임금을 줄 수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계산적인 '애사심'이라는 것이 생겼다, 또한 이런 숙련공들 덕분에 생산성은 올라가게 되었고, 품질 컨트롤도 일정하게 되었다. 참고로 본격적으로 자동차 노동자조합이 탄생하고 노사간의 갈등이 격화된건 1930~40년대지 이 때(1910년대)는 아니였다. 이 과정에서 마피아가 개입해 톰슨 기관단총으로 농성 중인 노동자 집단을 향해 실탄을 사격하기도 했다.

단, 알아둘 것은 처음에 포드가 5달러 일급을 주었을 때는 포드 자동차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타 업체들이 숙련공을 빼앗긴다고 엄청 걱정했고 포드 공장 정문에는 여기서 일하게 해달라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그 때는 일자리 달라는 사람들이 문을 넘어서 공장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경비를 많이 고용했다고.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숙련공에게 그 정도의 임금도 주지 않을 정도로 미국의 노동 시장이 막장이었다는 이야기다.[8] 얼마나 임금이 적었으면 숙련공들이 컨베이어 벨트의 부품이 되기 위해 담을 넘었을까. 실제로 일급을 5달러로 올린 2년 뒤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포드 종업원들의 주택 가격 총액은 325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로 늘어났고 평균 예금 액수도 196달러에서 750 달러로 늘어났다. 포드는 바로 중산층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는 너무나 획기적인 일이라 당시 시사만평 같은데서는 포드의 노동자들이 모피를 입고 기사가 모는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포드 공장에 일하러가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또한 헨리 포드는 주 5일제 40시간 근무를 최초로 실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산업혁명 이후 착취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에겐 여러모로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

한편 그는 반유대주의자였다. 나치즘에도 호감을 가졌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생일선물로 5만 달러 수표를 보내기도 했고 유대인을 매우 싫어하여 동갑내기 재벌인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이 의견으로 친하게 지냈다. 나치 독일공장을 세우기도 했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일 정부에게서 파괴된 공장에 대한 보상금도 받아냈다. 또한 나치즘을 지지하는 외교관과 외국 저명인사들에게 주어지는 훈장인 독일 독수리 훈장 중, 최고등급인 독일 독수리 대십자 훈장(the Grand Cross of the German Eagle)을 1938년 그의 생일날 받기도 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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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사로부터 독일 독수리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는 헨리포드(가운데 인물). 1938년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포드 회사는 나중에 미국 포드/유럽 포드로 나뉘었다. 미국 포드가 미국스러운 고배기량 대형 차량을 제작하는데 반해 유럽 포드는 유럽스러운, 작고 적절한 자동차. 포드 F 시리즈포드 몬데오의 느낌 차이를 생각하면 쉽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상당 부분을 포드의 저서인 The International Jew(국제유대인)에서 그대로 베껴서 쓴 부분이 많다. 다만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책자는 포드가 소유했던 신문사였던 '더 디어본 인디펜던트'의 기사들을 묶은 것이고, 포드는 이 책자로 인해서 법정에 섰을 때 반유대적인 기사가 '더 디어본 인디펜던트'에 실리는 것을 몰랐으며 자신이 '국제유대인'의 저자가 아니라고 증언했다. 다만 이는 믿기 힘든 것이, 말했다시피 '더 디어본 인디펜던트'는 헨리 포드가 소유한 신문사였고, 그 신문사는 헨리 포드가 승인하지 않으면 기사를 내지 않았던 어용언론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국제유대인'이라는 책은 400여페이지에 달하고 유대인 자본가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유대계 자본가의 문제점을 상세히 비판한다. 나의 투쟁 일부는 이 책을 베낀 내용이다. 이 책을 읽고 감동한 히틀러는 본인이 집권하기 전까지 실물 크기의 헨리 포드의 초상화를 사무실에 걸어놓고 있었다.

헨리 포드는 유대인만 싫어했지, 다른 인종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차별을 보이지 않았다. 디트로이트가 원래 흑인 인구가 많은 곳이었지만 포드 공장은 다른 디트로이트의 공장들보다 흑인 노동자가 월등히 많았고 급여나 승진에서도 전혀 차별이 없었다. 다만 감독으로 승진한 흑인에게 지시받을 수 없다는 백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자주 일으키는 바람에 흑인들과 백인들의 작업공간을 나누기는 했는데 그래도 급여는 백인과 완전히 동등하게 지급했다. 또한 장애인 고용도 많이 했는데 심지어 맹인이나 두 팔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그들도 똑같은 급여를 받았다. 자동차 조립 공장에서 두 팔이 없는데 뭘로 일하나 싶을지 모르지만 두 발로 밟는 일만 했다. 이렇게 장애인이 할 수도 있는 일은 장애인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렇게 흑인과 장애인에게도 선구적인 경영자였지만 여성 노동자에게는 남성보다는 낮은 급여를 줬다.

정부 관계의 여자와 관계를 끝낼 때 참 너저분한 방식을 선호했는데, 한 정부가 지겨워지면 자신의 측근 아무나한테 넘겨 반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나마 포드의 제안을 따라 결혼하는 게 정부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포드의 측근이면 전부 회사 고위직들이었으므로 호화스런 생활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10] 그래도 인생 최고의 결정은 본부인과 결혼한 것이었다고 한다.

에반젤린 코트 달린저(Evangeline Coté Dahlinger, 1893 ~ 1979)라는 여인[11]과의 사이에 존 코트 달린저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에반젤린 코트는 16살에 속기사로 포드에 입사해서 19살에 부서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 때 이미 포드의 정부가 되었던 걸로 보인다. 이후 포드의 운전사였던 심복 레이 달린저(1885 ~ 1969)와 결혼했다. 레이 달린저는 포드사의 시험 운전사였는데 시험 운전사라고 해도 실제 시험 운전시에 구체적인 평가도 안 하고 좋다 나쁘다 정도밖에 말하지 않을 수준이었는데 높은 급료와 토지와 저택 등을 받고 있었다. 1923년 에반젤린은 30세의 나이에 그가 세운 헨리 포드 병원 산부인과에서 존 코트 달린저를 낳았는데 출산 당일에 헨리 포드가 직접 병원에 나타나자 산부인과 직원들이 전부 놀랐다고 한다. 그 뒤에 에반젤린에게는 하녀. 하인, 요리사, 정원사, 경비원 등이 딸린 저택과 토지에다 경주마 레이스가 두 개나 딸린 경주마 농장 등이 주어졌고 태어난 아이가 한 달도 안 됐을 때 살아있는 조랑말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에반젤린은 공공장소에서 헨리 포드와 함께 있는 사진도 제법 찍힐 정도로 공공연하게 정부로 행세했지만 헨리 포드는 아내인 클라라 포드의 주위에는 그들 모자가 절대 나타나지 못하게 했는데 클라라 포드가 뒤에는 손자들이 놀러오면 나이가 비슷한[12] 존도 불러다 같이 놀게 하곤 했다고 한다. 존 코트 달린저가 포드의 사생아라는 사실은 주변 사람들에게 공공연한 사실이었는데 의외로 존 코트 달린저가 헨리 포드의 사생아가 아니라 에반젤린의 법적인 남편이었던 레이 달린저의 아이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레이 달린저는 에반젤린과 결혼한 뒤에 같은 침실을 사용했고 존이 태어난 뒤에 각방을 썼는데 레이 달린저는 존이 자기 아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는지 존을 굉장히 아꼈고 존도 자라서 사실을 알게 되기 이전까지 레이 달린저를 진짜 아버지로 알았다고 한다.[13] 훗날 존이 쓴 책에서 존이 어머니 에반젤린에게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묻자 에반젤린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바로 입을 닫았다. 존은 자기 친아버지가 헨리 포드라는 뜻으로 해석했지만 헨리 포드의 전기 작가 로버트 레이시는 에반젤린도 존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한 게 아닐까하고 추측했다.

레이 달린저는 1969년, 에반젤린은 1979년에 사망했다. 존 달린저는 1978년에 'The secret life of Henry Ford'(헨리 포드의 비밀의 삶)'이라는 책을 냈으며, 1984년 다니엘 다르쉬크 토마스의 총격으로 향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당시 결혼도 안했고 자녀도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나름 평화주의자로 반전운동을 하기도 했다.

더불어 살아생전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자동차를 만들던 프레스턴 터커의 야심작 터커 톨페도를 견제하기도 했다.[14]

미국 디트로이트 근처 디어본(Dearborn) 출신으로 해당 도시에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전시물은 당연하게도 자동차가 많지만, 헨리 포드가 수집한 물건들을 가져다 놓았는데, 농기구 및 스팀 엔진은 물론, 소화기류 무기(서부 영화에 나오는 무기들), 가구류 부터 심지어는 기관차, DC-3 여객기 등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한다. 심지어는 집도 존재. 여러 방면에서 덕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기했던 대로 반유대주의자나치즘에도 호감을 가졌다는 점 때문인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아예 히틀러와 같은 템플 기사단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어쌔신 크리드 2의 퍼즐을 풀다 보면 그가 동료 기사단원 토머스 에디슨에게 보내는 편지를 볼 수 있는데, 쪼잔하게도 에디슨에게 받은 에덴의 조각으로 노동자들을 세뇌시켜 일당이 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는 실제로 일당을 삭감하는 짓을 한 걸 자랑스럽게 적어 놓았다. 이후 그 에덴의 조각은 포드가 유럽에 있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보냈고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헨리 포드는 그 시대의 기업가들 중에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노동자들의 권익을 신경 쓰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템플러였다는 설정이 의아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역시도 장기적으로 보면 사업가의 수완이자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유비소프트 직원들의 식견이 돋보이는 설정이다.

현대 의학에도 특이한 기여를 했다. 의료 드라마 등에 보면 종합병원에서 병원 의사들이 집단으로 모여 종합 진단을 하는 광경을 간혹 볼 수 있는데 이걸 만든 사람이 헨리 포드다. 당시만 해도 큰 병원이든 작은 병원이든 이런 식으로 집단으로 진단한다는 개념이 없었는데 헨리 포드가 자신의 이름을 딴 헨리 포드 종합병원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자기네 병원의 의사들에게 여럿이 모여 함께 종합적으로 진단하도록 명령했고 효과가 좋아서 이후 다른 병원으로도 퍼져나갔다. 여러모로 현대 문명에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자신의 명차인 포드 T형을 제외한 다른 차량들의 생산을 회의적으로 여기며 프로젝트를 방해했는데, 이 때문에 새롭게 제작될 수 있었던 차들이 그의 입김으로 통과가 불허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특정 시간에 공장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틀어서 모두 신발을 벗고 춤추라고 하는 등의 당최 이해할 수도 없는 기행도 벌였다고. 그러다가 직원들이 포드를 설득하여 마지못해 제작을 승인하여 1927년에 만들어진 차가 세계 다수의 국가에서도 라이센스 생산되며 T형의 명성을 그대로 이어간 "포드 A형"이다.


3. 어록[편집]


"만약 제가 사람들에게 원하는게 뭔지 물었더라면, 그들은 더 빠른 말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5퍼센트가 아니라 95퍼센트를 위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15]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저는 심지어 기계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에게 여가는 시간 낭비 혹은 사치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생략...) 저희 회사의 직원들은 일이 끝난 후의 여가 시간을 알아서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점은 지난 수년간 실시된 각종 실험을 통해 증명된 사실입니다. 이틀간 충분한 휴식을 취한 직원들은 슬기롭고 예리한 마음가짐으로 자신들의 몸 뿐 아니라 마음까지 자신들의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저희는 보아왔습니다.[16]


"공장 근로자들이 하루 10시간 일하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 나라 산업계는 지속 가능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품을 소비할 시간이 없어지니까요. 예를 들어 공장 노동자가 동 틀 때부터 땅거미 질 때까지 일한다면, 자동차를 쓸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루 8시간 근무가 번영으로 가는 길을 열었듯이, 주 5일 근무는 더 큰 번영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될 것입니다."

(...생략...)

"여가가 산업계에 가져오는 긍정적인 영향은 소비에 대한 수요를 늘리는 것입니다. 오랜 노동에 지쳐있고 여가를 누리지 못하는 근로자들은 최소한도의 소비만 합니다. 사업은 물건을 사고 파는 것입니다. 물건은 오직 수요를 충족함으로써 팔 수 있습니다. 수요가 충족되려면 일단 수요가 있어야 합니다. 수요는 대부분 여가 시간에 발생합니다. 하루에 15~16시간씩 일하고 돌아온 근로자는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자고 배를 채우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원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원할만한 시간이 없으므로, 가장 기초적인 수요만 가지게 됩니다."[17]


"상품과 서비스를 인질로 가격을 조작해서 돈을 버는것을 '투기'라고 한다."


"돈만 있으면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을때까지 독립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가장 확실한 담보물은 지식과 경험, 능력이다."



3.1. 국제유대인(The International Jew)[편집]


파일:디어본인디펜턴트.jpg
이하의 내용은 헨리 포드가 언론에 기고한 내용 중 일부이다. 1920년 봄부터 언론 사업도 시작하여 주간지 디어본 인디펜던트를 창간하여 이 언론 지면을 통해 통권 91호에 걸쳐 몇몇 유대인 자본가의 나쁜 행태에 대한 온갖 비판과 문제점을 투고했다.

파일:국제유대인 한국어판.jpg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들만 모아 네 권짜리 책자로 재간행한 것이 소위 《국제유대인》이라는 책이다. 포드의 《국제유대인》은 1922년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당료 중 하나인 발두어 폰 시라흐는 이 책이 나치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자신은 《국제유대인》을 읽고 반유대주의에 눈떴다고 증언했다. 포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한 줄이나마 언급되는 유일한 미국인이기도 하고 나치 독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다만 제2판부터는 포드를 언급한 내용이 삭제되었다. 뮌헨에 있는 히틀러의 사무실에는 포드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자신들만의 목적을 위해 이 나라와 저 나라를 싸움 붙이는 유대인 국제은행가들과, 부와 권력의 자리에 앉기 위해 이 나라와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반란과 혁명을 선동하는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분명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다." [18]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그들에 순종하는 비유대인들을 내세우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그들의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있다. 이 비유대인 전위대들은 유대인들이 직접 나설 경우와는 달리 비유대인 대중의 의심을 사지 않고도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대인들이 밀어준 정치인이 어찌하여 그들에게 불순종할 경우에는 무슨 '스캔들'이 터져 나오고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며, 경우에 따라 '탄핵'되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이 선호하는 정치인은 과거가 있는 인물이다. '과거'가 없으면 선거자금에 관련된 그 무엇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밀어주고자 하는 정치인의 약점을 사전에 철저하게 캐두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세상에서 오늘의 미국 정부처럼 국제 유대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국이 이런 일을 했다’, ‘독일이 저런 일을 했다’고 떠들지만 사실 그 모두는 유대인들이 한 일이었다... 요즘 미국인은 전 세계에 타락하고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들로 알려져있다. 왜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금권(金權)이 이 나라에 집중해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천재성은 땅 대신 사람을 벗겨먹고 산다는 것이다. 다른 민족의 사람들처럼 땅을 일구거나 천연자원으로 상품을 생산하여 삶을 꾸려가는 대신 그런 일을 하는 다른 민족들의 피를 빨아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들판과 공장에서 땀을 흘리는 일은 다른 민족들에게 맡겨둔체 유대인은 이들이 거둔 결실을 착취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기생적인 천재성이다...."


"내가 국제유대 금융권력에 반대하는 이유는 모든 전쟁의 배후에는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승리하거나 패배하건 간에 돈의 권력은 항상 승리한다. 그 어떤 전쟁도 이들 없이는 시작되지 않고 그 어떤 전쟁도 이들의 허락없이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이들에 맞서는 이유는 이들은 조국도 없으면서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때문이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평화주의를 내건 단체들은 그저 표면 위에서 목청을 돋울 뿐이다. 국제금융자본이 모든 국가위에 군림하는 누상정부(樓上政府)로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국제금융자본은 평화적인 산업이 아니라 전쟁으로 돈을 번다. 이러한 근원을 파헤쳐 이들을 대중에게 노출시키고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면 평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국제적 돈의 권력은 유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정치 문제의 근원에 유대인이 있다고 해서 유대인을 국제정치에서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돈 문제의 근원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의 금융계 진출을 금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본래의 목적대로 금융이 산업을 섬겨야지 유대인의 관념대로 산업이 금융을 섬기게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대다수 사람들은 미국의 화폐 발행 구조와 은행 시스템에 대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내가 장담컨데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19]


"놀리는 모든 땅에 높은 세금을 매겨야 한다. 그래야 땅 소유자들이 땅을 가지고 생산적인 일을 한다."



4. 반유대주의적 행보[편집]


1920년대에 포드는 디어본 인디펜던트라는 주간신문을 기획했다. 여기에 실린 반유대주의 기고문은 출판되었고 독일에서도 발행되었다. 하인리히 힘러도 이를 애독했으며 히틀러도 포드의 초상화를 갖다놓을 만큼 존경함과 동시에 포드의 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 여파로 미국 유대인 단체가 포드 제품의 불매운동을 벌일 정도였고 포드 자신은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할 정도였다. 이후 포드는 반유대주의 의견 표명에 사과 및 의견 철회를 했지만 그 진정성이 의문스러우며 1938년에는 나치 독일이 외국인에게 수여할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포드뿐만 아니라 미국의 몇몇 기업들은 반유대주의 성향이 강했는데 1940년 6월 26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는 독일 상공인 대표단이 나치 승전 축하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GM의 고위 간부 제임스 무니 등 미국 기업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7월 1일 뉴욕에서는 또 다른 축하 연회가 열렸다. 미국 석유 기업 텍사코의 토길드 리버 회장이 주최한 행사였다. 이 자리에는 제임스 무니,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 등이 참석했다.

미국의 자동차 기업과 석유 기업이 나치 독일의 승리를 축하한 이유는 자신들, 즉 GM과 포드의 독일 자회사들이 생산한 트럭, 탱크, 비행기, 그리고 텍사코와 스탠다드 오일이 제공한 디젤유, 윤활유, 고무 등 전략물자가 없었다면 나치의 전격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미루어 미국의 대기업가들은 나치의 서유럽 점령에 대해 찬동했던 것이다. 물론 미국이 참전할 때부터는 나치와 연을 끊었다.

히틀러의 군수 담당 장관을 지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서전에서 나중에 미국 기업이 제공한 합성석유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결코 폴란드 침공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 역사가 브래드포드 스넬은 스위스 은행들의 나치 협력, 즉 나치가 유대인들로부터 강탈한 금을 숨겨준 사실을 언급하면서 "나치는 스위스 은행의 협력이 없었어도 폴란드와 러시아를 침공할 수 있었겠지만, 제너럴 모터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미국의 통신업체인 ITT, 정보기기업체인 IBM이 제공한 최첨단 통신 및 정보처리 기술은 나치 전격전의 성공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다만 2차대전을 보면 미국 산업계는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소비에트 연방의 군수산업에 죄다 한 발씩 걸쳤다. 대공황 시기의 미국 기업들이 자기 판로를 가릴 리가 없었으니.

어쨌거나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포드는 군수기업으로서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었다.


5.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포드 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1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미시간


212,487 (48.47%)
낙선 (2위)


7. 이야깃거리[편집]


  • 헨리 포드 이야기 중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시골 학교 선생님이 피아노를 사기 위해서 1000달러 기부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 며칠 뒤 헨리 포드가 그녀에게 봉투를 주었는데 거기에는 10센트 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화가 나겠지만 그 선생님은 땅콩을 10센트 어치를 산 다음 수확한 땅콩을 판 돈 일부를 매년 헨리 포드에게 전해주었다. 5년 뒤에 그 여선생이 피아노를 살 수 있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감동해서 만달러를 보내주었다는 이야기다.[20]
  • 블라디미르 레닌이 낙후된 소련의 기술발전 및 경제성장을 위해서 신경제정책을 시행했을 때, 보다 발달된 서방 기업들의 대대적인 투자를 유도하고 소련에 공장을 차릴 수 있도록 했다. 조건은 노동자들을 소련인으로 고용한다는 것이었는데 서방 자본으로 인프라 마련 + 숙련공 양성이라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포드는 이때 대규모로 소련에 투자한 사람 중에 하나로 당대 자본가 중에서도 워낙 거물이라 잘 알려져 있다. 이 정책은 성공적이라 몇년 지나지 않아 소련에서는 수많은 포드 T형 자동차들이 붉은 광장에서 오가기 시작하고 소련은 미국의 기술자 없이도 스스로 트랙터를 제조해낼 수 있을 정도가 된다.[22]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온 소련의 기갑물량이 가능케 한 것도 사실 포드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 다만 여기에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있었는데, 포드 자동차가 워낙 소련에 많이 생기다보니 관용차가 죄다 포드[21]였기 때문에 대숙청 시기에는 포드차 = 끔살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당시 소련 내의 서술 등에서 '밤에 집 앞에서 검정 포드차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정도의 서술이 나오면 그건 NKVD가 와서 사람을 잡아갔다는 말과 같았다. 즉 밤에 찾아오는 포드차 = NKVD 였던 것.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등에서 문득 검정색 포드차가 수상하게 나타난다면 '아, 누구 코렁탕 먹는다는 미장센이다.' 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포드 AA형의 라이센스형인 GAZ-AA는 훗날 제2차 세계대전에서 T-34, 모신나강 등과 더불어 소련군에게 큰 승리를 가져다준 1등 공신이 되었다.
  • 현 포드 자동차를 설립하기 전에는 캐딜락의 전신인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Detroit Automobile Company)에서 일한 적도 있다. 이 회사는 자신의 이름을 딴 헨리 포드 회사(Henry Ford Company)로 잠깐 이름이 바뀌었다가 투자자들과 싸우다 포드가 결국 회사를 떠났다. 그러고 나서 캐딜락이 된것이다.
  • 닷지와도 인연이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서로 의견도 잘 맞고 사이도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창업자들인 닷지 형제들과 의견 마찰로 사이가 틀어져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고 한다.
  • 사생아를 제외한 헨리 포드의 적장자인 에드셀 포드는 2차대전 기간 중 과로와 브루셀라증으로 인한 위암으로 1943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인 헨리 포드는 아들의 사망 직후에 잠시 경영에 복귀했지만, 곧 장손이자 에셀 포드의 장남인 헨리 포드 2세한테 경영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에셀 포드는 슬하 3남 1녀를 두었다.
  • 1918년 선거에서 미시간주 상원의원 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려고하다가 경선에서 패하자 공화당을 탈당하고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결과는 헨리포드가 간발의 차이로 낙선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아들 에드셀 포드가 군대에 안 가지 않은 것이 논란이 되어서 이 당시 헨리 포드의 이미지에도 타격을 주었고 당선자인 트루먼 뉴베리도 선거운동 과정에서 이때 선거운동하면서 돈을 이것저것 끌여다 쓰면서 사치스럽게 선거운동했다가 결국 이 때의 일로 부패의원으로 낙인찍혀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의원직에서 사퇴하는 엔딩을 맞았으니 양쪽 다 도움은 안 된 결과라 할 수는 있겠다 할 만하다.
파일:헨리 포드와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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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환생에 대한 믿음을 같이 지니고 있었다. / "Religion, politics, and ideas of Henry Ford", hollowverse.com[2] 아래에 나오는, 에반젤린 코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헨리 포드의 사생아다. 이 대화를 나눌 당시 존 달린저는 자신이 헨리 포드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3] 록펠러와 카네기 둘 다 20세기 사람이고 당시는 금본위제로 포드와 두 사람과의 시대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다. 하지만 역대 최고의 부자를 따질 때는 항상 록펠러, 카네기가 정상권에 오르내리는 반면, 포드는 이런 최고 부호 순위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이는 당대 미국의 총 GDP에서 그 사람의 재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따지기 따져서 역대 최고의 부자를 논하기 때문이다. 카네기의 전성기 재산이 당시 미국 GDP의 2.2%, 록펠러는 대략 2% 정도로 본다. 때문에 역대 최고의 부자는 록펠러가 아니고 카네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카네기와 록펠러가 동시대 사람인데다 카네기가 재산을 좀 더 일찍 정리해 버리는 바람에 좀 더 오래 활동했던 록펠러가 재산이 조금 더 많았기 때문에 대개 역대 최고의 부자를 따질 때 록펠러를 1위로 뽑는다. 순수하게 물가 대비로 따지면 역대 최고는 전성기의 빌 게이츠다. 2000년 기준으로 대략 1200억 달러로 순수 물가 대비로는 록펠러의 재산은 전성기 빌 게이츠의 1/6 정도다.[4] 그 당시의 자동차는 증기 자동차였기 때문에 차가 가다가 멈추면 물 길어와서 넣고, 물이 수증기가 될 때까지 10분을 기다리고,다시 가는 것을 반복했다. 그리고 당시 석유 산업에서 수요가 높았던 것은 난방용 등유였고 가솔린은 등유를 만들고 남은 부산물 취급을 받았기 때문,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은 당대의 기준으로 혁신이라 할 수 있었다.[5] 에디슨은 자기가 만든 축전지로 전기자동차를 만들었다. 그 실물 중 하나가 한국 강릉 참소리박물관에 있다. 포드가 T형을 대량생산하지 못했다면 이후 전기자동차 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6] 일설에 의하면 다른 색도 얼마든지 칠할 수 있었는데, 검은색이 가장 쌌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슷하겠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자동차를 내놓기 전에 도색한 페인트를 말려야 하는데 그 중에도 검정색이 가장 빨리 말랐기 때문에 썼다고도 한다. 하지만 포드는 회사에서건 밖에서건 사람들에게 "검은색은 고객들이 원하는 색"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7] 당시 철강 공장 노동자들이 하루에 12시간을 일하고 1달러를 받았는데('시급'이 아니라 '일당'이다!), 포드는 노동자들에게 하루에 8시간 일을 시키고 5달러를 주었다. 단순계산만 해봐도 기존 시급의 약 7.5배를 준 셈이니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임금인상인 셈. 다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냥 일반적인 노동자들은 평균 9시간 일하고 2달러 34센트를 받았다고 한다. 이 자료가 정확하다면 당시 철강 노동자들은 더욱 더 열악한 환경에 있었던듯. 다만 이건 1914년 이전이다. 그 이후에는 일당 5달러 준 것은 맞다. 이 역시 위키피디아에 있는 내용이다. 참고로 이 일당 $5(2016년 기준으로 미화 $120다)은 헤드헌터적인 성향이 강했다.[8] 이 시기가 자유방임주의 정책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경제학자나 정치인들에 의해 미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강도 귀족이라는 말이 횡행하고 독과점 기업에 의한 착취가 일상다반사였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트러스트는 해산되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노동조건이 획기적으로 나아진 수준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것. 오죽하면 사회주의 혁명이 미국에서도 이뤄질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소설 강철군화가 나온 배경도 그러한 시대 상황으로 인한 것이었다.[9]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유대인들은 독일차와 더불어 포드제 차량도 잘 타지 않는다. 대부분이 한국제 차를 타고 미국제 차는 제너럴 모터스를 주로 애용한다.[10] 당시 서양 상류층에서는 비교적 흔한 방식이었다. 정부는 호화스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니 좋고 수하는 미인과 결혼하는 데다 승진이라든가 저택 같은 보너스가 따라오고 최측근으로 도장을 찍는 게 되니 양쪽 다 윈윈인 셈이다. 나폴레옹도 바라스의 정부였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그렇게 결혼했다. 여기에는 일단 결혼한 뒤에는 그 정부와 관계하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다지만 그걸 다 지킬 리가 있나.[11] 프랑스계 미국인이다.[12] 장손인 헨리 포드 2세보다는 훨씬 어렸고 막내 손자인 윌리엄 클레이 포드 시니어보다 두 살 많았다고 한다.[13] 에반젤린이 비슷한 시기에 헨리 포드, 레이 달린저랑 했다는 얘기다.[14] 사실 터커 톨페도는 당시 기준에선 너무 첨단 기술을 많이 도입해서 시제품 테스트를 할 때 냉각수가 새고 후진이 안되긴 했다. 게다가 이 차가 개발되던 시점이 하필 1947년. 막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이라 미국 정부에서도 자원낭비 or 투자사기라고 의심할 정도였다.[15] 이 아이디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후 포드는 승승장구하지만 롤스로이스, 벤틀리, 부가티같이 상류층을 타깃으로 한 수제작 자동차들이 모두 파산을 겪거나 휘청거리다 인수된 것을 생각하면 헨리 포드의 아이디어는 신의 한 수.[16] 밑에 나오듯 포드는 노동자 복지에 상당한 투자를 하였다. 물론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생산비용 절감 등으로 아낀 것도 크지만, 그렇게 원가절감을 해도 노동자 복지에 신경을 전혀 안 쓰는 기업들이 21세기에도 많음을 생각하면 헨리 포드 자신이 노동자 복지에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포드가 시장지배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숙련공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근로자 복지라는 당근을 선택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도 시장지배적 위치에 있는 현대차나 삼성전자 등의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월급이 훨씬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특히 주5일 근무를 도입한 이후에는 노동자들의 직업 만족도도 늘어나고 유의미한 생산성의 증가를 이끌어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17] 생산성의 증가가 회사 차원에서 직원 복지를 통해 얻는 이득이라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근로자에게 여유 시간을 줌으로써 비롯되는 수요의 창출은 산업계 전반에서 얻는 이득임을 말하고 있다. 이 새로운 수요를 통해 규모가 커진 대표적인 산업 분야로는 예를들어 여행 산업이 있다. 그리고 여행에는 차가 필요하다. 그래서 미쉐린 같은 타이어 회사도 미쉐린 가이드를 출판하는 것이다.[18] 미국 내에서도 반유대주의는 극심했다. 미국의 로스차일드 대리인 제이콥 쉬프는 러시아 내의 유대인을 박해하고 반유대주의적인 제정 러시아로마노프 왕조를 무너트리기 위해 레닌트로츠키를 지원했다. 쉬프가 볼셰비키에 당시 2천만 달러 가량을 지원했다. 나치독일은 유대인-공산주의자의 관계를 언급하며 포드처럼 이 둘을 끝없이 비난했다.[19] 훗날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비슷한 말을 했다.[20] 정확히는 베리 칼리지의 창립자인 마사 베리 여사의 이야기다. 다만 구체적인 액수는 불명이고, 전해지는 버전마다 다르다. (포드에게 돈을 요청한게 언젠지 불확실하지만 그녀가 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19세기 말~20세기초라고 치면 당시 천달러는 2020년 기준 수만달러에 달했다. 물론 당시는 피아노 자체도 수백달러 이상 나갈 정도로 고가였다.) 어떤 버전은 구체적 액수를 명시하지 않은 것도 있고, 어떤 버전은 그녀가 땅콩으로 1500달러 어치를 벌자 헨리 포드에게 10센트에 대한 배당금을 줬다고 전하고, 어떤 버전은 무려 백만달러를 요청했으나 너도나도 기부금을 요청하는 터에 질린 포드가 10센트만 주었고, 훗날 피아노를 살 정도로 돈을 모은 다음 포드에게 그의 배당금을 전해주자 감동한 포드가 백만달러를 기부했다는 것도 있다. 어찌됐건 현재도 존재하는 Berry College가 과거 마사 베리 여사가 창립한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는 것 자체는 100% 사실이고, 베리 여사가 포드에게 기부금을 요청한 것과 땅콩 수확, 훗날 헨리 포드가 기부금을 전해온 에피소드는 (액수는 각자 다르지만) 여러 매체에서 전하는 만큼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21] 정확히는 가즈의 GAZ-A 혹은 후속작인 GAZ-M1. GAZ-A는 포드 A형의 완전 라이센스 생산품이고 그 후속작인 포드 B형을 개량한 게 GAZ-M1.[22] 다만 소련에서 자가용의 대중화가 이루워지기 시작한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스탈린 시절에는 공업력 몰빵정책때문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자가용 보급정책에 소흘해질수밖에 없던데다가, 흐루쇼프 들어서도 자동차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것은 아니었기때문이었다. 그나마 1960년대 후반에 라다가 설립되고 나서야 사정이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