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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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연혁
2.1. 초기
2.2. 중기
2.3. 후기
3. 문화
3.1. 종교
3.2. 문학
3.3. 복식
3.4. 풍습
4. 한국사와의 비교
5. 나무위키에 등재된 헤이안 시대 인물
6. 대중문화 속의 헤이안 시대
6.1. 헤이안 시대에 쓰인 작품
6.2.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1. 개요[편집]


平安時代

일본의 시대 구분. 그 기간은 간무 덴노헤이안쿄(현재의 교토)에 천도794년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마쿠라 막부를 연 1185년 혹은 고토바 덴노로부터 정이대장군(쇼군)을 제수받은 1192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

나라 시대에 확립된 율령제와 토지공령제가 무너진 시기이기도 하며, 끌어올렸던 천황 가문의 권력이 외척에게 넘어갔다가 원정이 전개된 시기이기도 하다.

2012년 11월 13일에 작성된 행 출처에 대한 비밀을 여기에서 밝힐 수 있다.[2]


2. 연혁[편집]



2.1. 초기[편집]


초기(794~858)에는 황권 강화와 중앙 집권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천황허수아비가 아니라 진짜로 세계 다른 나라들처럼 임금 노릇을 해봤던 일본사의 얼마 안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견당사가 중지되고(894), 대외 교류가 규슈다자이후에 제한되면서 국풍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귀족 문화가 발달했다. 흔히 한국에서는 백제와 일본이 친했고 신라는 일본과 사이가 나빴다는 쪽으로 알려져 있지만, 통일신라는 백제만큼은 아니라도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 내내 활발하게 대규모 사절단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했다. 통일신라가 무너지기 전 9세기까지는 장보고로 대표되는 국제 사무역은 어느 정도 활발했으나, 일본 서부가 신라 해적에 탈탈 털려 학을 떼고 10세기쯤 되면 사무역도 감소. 후백제는 일본에 옛 백제 시절 인연을 상기시키며 적극적으로 일본에 통교 요청을 했지만 전부 대마도에서 문전박대당했고, 고려 왕조와도 건국 후 약 100여 년간 공식 교류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가나서체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 3대 격식(三代格式)이라 불리우는 고닌캬쿠시키(弘仁格式), 죠칸캬쿠시키(貞観格式), 엔기캬쿠시키(延喜格式)와 같은 법령의 편찬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간무 덴노는 지방관제를 개혁하고, 군제 역시 개혁하여 상비군제와 모병제적인 군제로 전환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였다. 이 군은 도모(伴)씨 같은 유력 가문이 후지와라 가문에게 몰락한 후 점차 무사씨족이 담당하게 되었는데, 미나모토노 요리미츠(源賴光) 등이 유명하였다.

2.2. 중기[편집]


중기(858~1068)에는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이래로 후지와라씨가 천황의 외척으로 섭정(셋쇼)과 관백(간파쿠)을 독점하면서 귀족정치로 변모했다. 중기 후반부터는 939년 타이라노 마사카도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각기 동서에서 일으킨 쇼헤이 - 덴쿄의 난을 시작으로 도호쿠를 중심으로 변방에서 늘 에조반란이 끊이질 않았고, 특히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경우는 스스로 '신코'(新皇, 신황)를 자칭할 만큼 격렬했다. 이때의 반란으로 (뒤에 쇼군의 유래가 되는) 700년대의 정이대장군이 잠시 940년에 부활하기도 했다. 이때의 쇼군은 후지와라노 타다부미(藤原忠文)였다.

또한 율령제의 핵심인 왕토사상과 토지공령은 이미 헤이안 초기부터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는 개인들의 능력차나 귀족 지방관의 탐학과 수탈, 개척지 귀속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권력자들이 개척지를 약탈하기도 했고, 국가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토지경작자들이 대귀족이나 대사원에 자신의 토지를 바치고 예속되어버리는 현상도 계속 증가하였다.

그리고 중앙권력은 나라 시대 말부터 외척 가문이자 실권 가문으로 대두하였던 후지와라(藤原) 셋칸케(摂関家)가 실권을 장악하여 셋칸정치(摂関政治)를 펴면서 장원을 기진받아 일본 최대의 장원 소유 귀족으로 대두하였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일부 천황들의 개혁 시도를 좌절시켰다. 천황에 협력하던 하급귀족 출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같은 뛰어난 인재도 후지와라 가문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당했고, 후지와라에 거슬리거나 후지와라의 외손이 아니던 천황이나 동궁이 폐립되는 등 헤이안 시대는 후지와라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황가가 권력을 회복했던 인세이 시절에는 도리어 도바 상황 때부터 인()이 장원소유주로 대두하여 사회문제를 악화시켰다. 이들 셋칸케를 중심으로 가문에 따른 관위 임명이 고착화되었으며, 중앙 권력은 후지와라 가문과 황족 가문이 장악했다. 그리고 사회문제 악화로 인한 반란 및 사원의 강소 등을 진압하기 위해 황손이었던 무사씨족들이 중용되었고, 이들이 후에 무가정권의 주역이 되었다.

반란이 일어난 경우 무사 씨족의 수장을 지방관이나 토벌대 장군으로 파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토지소유자인 지방의 무사들과 지방관으로서 지방 권력을 쥐었던 유력 무사씨족의 수장이 유착하여 봉건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중앙의 후지와라씨의 셋칸정치는 이런 변천을 막지 못했고, 오히려 11세기 고정된 세율의 조세 부과 및 각 쿠니()별 수취와 같은 세제 개편을 통해 봉건화를 촉진시켰다.

지방은 토지소유자들이 점차 국가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하여 10세기 타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의 반란이나 해적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반란 등이 이어졌고, 카와치 겐지이세 헤이시, 히데사토류 후지와라씨 같은 무사 씨족들이 이를 진압하여 공을 세우면서 점차 성장하였다. 지방은 지방관인 고쿠시(国司, 국사)들이 지방 유력자들과 협조 및 견제하면서 중앙에는 조세만 보낼 뿐 반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였고, 귀족이나 무사 씨족들, 지방 유력 가문들이 고쿠시가 되면서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토지를 가진 지방 무사들과 봉건적 관계를 형성했다.

혼슈(本州) 동북부에서는 조정군과 원주민 에미시(蝦夷) 간에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전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 에미시 세력은 8-9세기를 거치며 점차 야마토 정권에 정벌되었으나, 혼슈 최북단인 아오모리 일대에서 무츠 아베씨데와 기요하라씨를 비롯한 잔존 세력이 11세기까지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으며, 전9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3년의 역(後三年の役) 이후에는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 오슈에서 반독립적인 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이들을 정벌하는 장군명 중 하나였던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은 훗날 무가 정권의 최고 권력자의 관직이 되었다.

2.3. 후기[편집]


후기(1068~1192)부터 섭관가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천황이 양위하여 조고(상황, 태상천황太上天皇(다이조 덴노)의 약어. 사실상 죠-코라고 읽는다.)로서 원정(院政, 인세이)을 펼쳤다.

사실 양위 자체는 간무 덴노(재위 781~806) 다음인 헤이제이 덴노(재위 806~809) 때부터 있었을 만큼 흔했다. 하지만 그 직후 구스코의 변(810)으로 헤이죠쿄로 다시 복귀하려는 헤이제이 조고[3]의 계획이 사가 덴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 출가하는 등 실체적인 힘을 가진 천황은 드물었다.

그러나 우다 덴노(재위 887~897. 이후 출가) 이래 170년 만에 후지와라씨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고산조 덴노(1034~1073, 재위 1068~1073)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고산조 덴노는 장원을 대거 정리하여 국가로 환수하고, 무너져가던 율령제도의 정비를 도모하였으며 그 수족으로서 중하류 귀족과 지방관들을 등용하는 등의 정책을 펴 국정을 안정시켰는데 이는 엔큐의 선정(延久の善政)으로 칭송받았다. 이로서 장원제의 폐단이 완화되었고, 국고가 충실해졌으며, 셋칸케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다.

고산조 덴노는 자신의 자손이 황통을 잇게 하고자 하여 양위를 실행에 옮기는 도중 4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후 황위를 계승한 아들 시라카와 덴노(재위 1073~1086, 상황으로 1086~1129)는 무려 아들 호리카와 덴노(재위 1086~1107, 요절), 손자 도바 덴노(재위 1107~1123, 이후 양위), 증손자 스토쿠 덴노(재위 1123~1142)[4]까지 3대 42년을 상황으로 있으면서 77세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시라카와와 도바 재위시에는 후지와라 셋칸케(摂関家)에서 내분이 발생한 데다 그 씨장자가 어리거나 무능하여 그 위세를 꺾을 수 있었다. 여기에 스토쿠 덴노가 아직 어렸기에 권력은 새로운 인(院)이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도바도 역시 할아버지 시라카와가 죽은 1129년부터 1156년까지 27년간 실권을 휘둘렀다. 도바인은 자신의 장원 확대에 몰두하여 기존의 개혁을 무위로 돌렸으며, 민생 악화와 지방의 봉건화를 촉진시켰다. 율령에 기초한 조정 정치의 왜곡과 자의적인 측근정치, 상황의 사욕 추구는 민생의 악화와 함께 황실의 권위나 정치의 정당성도 점차 악화시켰다.

이때 조고(上皇)가 일종의 사병이었던 무사들에게 권력을 주면서 무사 씨족이 성장하여, 타이라씨와 미나모토씨가 두각을 나타내게 됐다. 그리고 그들이 상쟁한 결과 가마쿠라 막부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 시초라 할 수 있는 것이 도바 법황[5]의 죽음 직후 벌어진 도바의 아들 고시라카와 덴노(後白河天皇)와 스토쿠 조고(崇德上皇) 사이의 무력충돌에서 천황 측이 승리한 1156년의 호겐의 난(보원保元의 난)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10일간의 소규모 싸움에 불과했다. 졸지에 수괴가 된 스토쿠는 당시에도 실권이 없었고, 난의 정황도 몰라 아들 시게히토도 놔두고 도망갈 만큼 허둥거렸다. 되려 이 사건은 반도바 성향 무사들의 우발적인 사건에 가까웠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반대파를 일소하려는 고시라카와 천황과 그 측근 신제이 등의 술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이후의 헤이지의 난 등이 겹치면서 황실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수도의 군사 치안권이 타이라 일족에게 집중되게 되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필두로 하는 헤이케는 공경 외척 가문으로 승격했고, 수도 교토 인근의 무사들과 봉건적 주종관계를 확립했다. 또한 송나라와의 교역을 주선하며 막대한 부를 쌓아 황실이나 후지와라 가문을 능가하는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조고를 유폐시키고, 자신의 외손이었던 안토쿠 덴노를 옹립할 정도의 권세를 과시하였으나, 키요모리 사후 동국에서 궐기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무가정권을 수립하면서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인세이, 타이라노 키요모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항목 참조.


3. 문화[편집]



3.1. 종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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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노 세이메이가 이 시대의 인물이며 금기모노노케를 중히 여겼던 이 시대의 풍조를 대변하고 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뭘 하든간에 음양사에게 길흉을 점치게 했으며, 자신이 있는 곳이 음양도에 따라 불길한 방위라면 잠시 남의 집에 가 겸사겸사 바람도 피우고 있는 것이 일상사였다. 또 질병이나 흉사가 모노노케의 짓이라고 생각해 병을 앓게 되면 승려를 초빙하여 경을 읽고 귀신을 퇴치하게 했다.

불교도 융성하였으며, 거대 사찰들은 귀족들과 황실의 지원을 받아 크게 성장하였다. 황실이나 후지와라 같은 대귀족들이 사찰을 발원하기도 하였으며, 이들 사찰들은 그런 가문들의 지원세력이 되었다. 점차 사찰들은 막대한 장원의 소유, 지주의 세습, 유민들을 모아 승병을 조직하는 등의 문제를 나타내게 되었으며, 헤이안 말기에는 이들 승병을 동원한 거대 사찰들의 횡포가 문제되었다. 이런 문제는 전국 시대 말까지 지속된다.


3.2. 문학[편집]


한편 후지와라 씨가 자신의 가계 안에서 섭관(섭정관백)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을 천황의 왕비 비빈으로 바치면서 당대의 재녀들을 모아다가 시녀로서 섬기게 했기 때문에, 그 시녀들에 의해 세계 최고(最古)의 소설겐지모노가타리를 비롯해 마쿠라노소시, 일기 등 많은 문학 작품이 쓰여졌다. 다른 모노가타리 문학도 쏟아져나왔는데, 타케토리모노가타리도 이 시대 작품.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일기인 미도칸파쿠키(御堂関白記)[6]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 당시에 다이고 덴노(897~930)가 명령해서 엮은 책이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이다.


3.3. 복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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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중기, 즉 견당사 폐지 이전까지는 나라 시대와 마찬가지로 중국풍의 옷을 입었다. 국풍 문화의 급진으로 일본의 풍토에 맞게 옷이 변형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널리 알려진 헤이안시대의 복식이다. 현대에도 천황을 비롯한 천황의 근친들이 전통행사 때 입는 옷은 이 시대 복식.

특히 무녀복 비슷한 바지인 하카마 위에 12겹의 겉옷을 껴입고 치마까지 두르는 쥬니히토에는 이 시대 시녀들의 제복이기도 했다. 습한 여름에는 평상복으로 히토에바카마(単袴)라고 해서 코소데를 입지 않은 알몸 위에 하카마를 입고 그위에 홑옷을 걸쳤다. 하카마는 허리에 묶어서 가슴을 드러내거나 가슴 위에 묶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머리카락긴 것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에 견당사 폐지 이전까지만 해도 올리고 다녔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길렀다. 간혹 관례와 같은 큰 행사가 있었을 때에는 머리카락 일부를 올려 빗과 비녀, 기타 장신구로 장식했다.

반면 지체 있는 귀족 여성들은 가벼운 평상복만 입고 있는 주제에 거동하는 것을 품위없게 여겼다. 신사에 참배가거나 어디 초대받아 놀러나가는 것 외에는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에는 두발, 특히 상투를 그대로 드러낸 차림을 창피한 것으로 여겼다. 현대로 치면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과 동급인 셈. 때문에 남성들의 경우 관[7]이나 에보시를 반드시 써야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었다고 간주되었다. 고려, 조선이나 중국 또한 머리카락을 드러내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고, 모자를 구입하기 힘든 하층민도 최소한 머리띠는 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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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하는 방식에 눈썹을 밀고 새로 그리는 마로 눈썹 형태가 유행했다.[8]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매우 기괴해 보이겠지만, 이빨을 새까맣게 칠하는 오하구로 또한 유행해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시행되었다. 이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화장을 하고 다녔는가 보고 싶으면 노멘을 보면 된다.


3.4. 풍습[편집]


이 시대의 결혼 풍습은 여자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다가 마침내 그 거처에 드나들어 합궁을 하고, 그것이 삼일 연속 이어지면 결혼으로 인정받는 형태였다. 여성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결혼한 후에도 자신의 저택에 살았다. 이런 혼인 형태를 카요이콘(通い婚)이라고 한다. 다만 정실부인이 되면 남자 집으로 들어가 남자의 집안 살림을 돌보기도 했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의 거처에 드나드는 호색을 풍류로 여기는 시대였지만, 사실 여성 입장에서는 남자가 올 줄 예상도 못한 상태에서 남자가 들이닥쳐 성행위를 맺고 가는 요바이도 많았다. 현대로 치면 주거침입 및 성폭력, 성폭행이지만 가부장적인 고대 사회에서는 이것도 여성의 처신 문제나 연애 사건인 것처럼 여겨졌다. 겐지모노가타리를 보면 이 시대의 이런 성풍습에 대해 알 수 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남자가 여자의 방에 몰래 들어와 밤을 지새고 나가지만, 셋째 밤부터는 공인된 사이가 되어 부모가 예물을 마련하고 연회를 여는 것으로 결혼식을 갈음했다. 이때 부부는 '미카요노 모치라는 작은 떡을 나눠 먹었는데 연을 끊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씹지 않고 먹었다고 한다.[9]

상류층 여성은 함부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남들을 만날 때도 발을 친 상태로 만나야 했다. 실제로 몸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대단히 불편한 복장[10]을 하고 다닌데다 행동의 제약도 심했다.

다만 이는 상류층 여성 한정이고 중류층 여성은 의외로 사회 진출의 기회가 많았다. 글재주가 뛰어난 여성이 궁중에 시녀로 출사하여 문학 활동을 하며 이름을 떨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무라사키 시키부, 세이 쇼나곤 등이 있다. 결혼하거나 자식을 낳은 이후에도 궁중 출사가 가능했으며, 법회 참석 등의 명목으로 나다니기도 했다. 아무래도 남성들은 대체로 자신의 부인이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꺼렸지만. 마쿠라노소시를 보면 이런 부분에 대해 까는 대목이 나온다.


4. 한국사와의 비교[편집]


한국사남북국시대 중엽에서 고려시대 중엽과 겹친다. 한국사의 국왕으로 대비된다면 신라 원성왕발해 강왕의 치세에서 고려 명종 치세와 겹치는 시기로 대략 400년에 달한다.

흥미로운 건 원성왕 때 신라는 하대의 혼란을 추스렸고, 발해 역시 초기 혼란기에 접어든 직후 선왕 때에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또 무신정변이 일어나 무신정권이 들어가는 시기도 1170년으로 타이라 가문까지 포함한 일본의 군사정권 성립과 상당히 겹친다.[11]

또한 9세기 중후반은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으로 신라구들이 이웃 국가인 일본을 대규모로 약탈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5. 나무위키에 등재된 헤이안 시대 인물[편집]




6. 대중문화 속의 헤이안 시대[편집]


일본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센고쿠 시대, 막부 말기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시대이다. 수라의 각에 나온 작가의 후기에 의하면, 센고쿠 시대, 막말과 함께 일본의 3대 로망의 시대라고 한다.

시대 분위기나 풍습도 그렇고, 이 시기에 나온 문학 작품도 동양 판타지에로게, 순정만화 등에 써먹기 좋은 설정이 꽤 많아서 그런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나 만화 등 서브컬처물이 꽤 있다. 특히 음양사가 나오는 퇴마물이나 요시츠네로 대표되는 군웅할거가 나오는 겐페이 전쟁이 나온다면 이 시대가 배경이다. 퇴마물 쪽에서는 아베노 세이메이미나모토노 요리미츠의 요괴퇴치담이 주된 소재이고, 전쟁물 쪽으로 보면 헤이안 말기의 무인(武人) 가문인 겐지와 헤이케의 건곤일척 승부를 다룬 겐페이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일본인들이나 외국인 입장에서는 뭔가 더 고풍스러운 중세 일본풍 판타지 로망을 자극하는 시기인 듯. 또한 당대 여성이 이 시대를 묘사한 문학작품이 많기 때문인지, 순정만화나 여성향에서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 와카를 좋아해서 오직 헤이안 시대만을 좋아하는 부류도 있다.

이렇게 일본 역사와 관련된 게임들은 한국의 게이머가 플레이하기에는 일본 게이머에 비해 진입장벽이 높다. 역사를 기반으로 한 창작물에서 일본 역사를 모르면 캐릭터가 왜 이런 드립을 치거나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 역사와 관련된 게임들이 중국 역사, 특히 삼국지가 한국인들에게도 인지도가 매우 높은 관계로 한국 게이머들의 진입장벽이 중화권 게이머들만큼은 아니어도 많이 낮은 편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닌자 슬레이어에서는 세계관 배경으로 언급되며, 닌자들이 나타나 모탈들을 카라테로 지배하던 공포의 시대였다고 한다. 이후 에도 도쿠가와, 마츠오 바쇼와 같은 강대한 워로드들이 나타나 닌자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12] 닌자들은 하라키리 리추얼을 통해 소울만을 킨카쿠 템플로 어센션시키고 사라져 모탈의 시대인 에도 시대가 시작됐다.


6.1. 헤이안 시대에 쓰인 작품[편집]


(국내 출판 기준)
  • 겐지모노가타리 : 일본 최초의 고전소설이자, 세계 최초의 하렘물(!)이다. 그리고 인물들의 심리묘사까지 다룬 소설 형태로 보면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 마쿠라노소시
  • 타케토리모노가타리
  • 카게로 닛키(국내 출판명은 청령일기) : "하루살이 일기"라는 뜻으로, 섭관시대의 전성기를 이끈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또 다른 부인이 가네이에와의 결혼생활에 관해 쓴 일기. 저자는 미치츠나노하하, 말그대로 "미치츠나의 어머니"로 불린다. 그리고 가네이에를 대차게 깠다
  • 미도칸파쿠기(御堂関白記) : 헤이안 중기 권력자로서 딸 넷을 천황에게 시집보내 세 명의 외손자를 천황으로 올렸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20여 년간 썼던 일기이다. 당시의 정치와 언어, 귀족의 생활모습에 대한 중요 자료로 인정받는 기록으로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호죠지셋쇼기(法成寺摂政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며 대표적 이름인 미도칸파쿠기도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미치나가는 칸파쿠에 오르지는 않았다.
  • 오치쿠보 모노가타리 : 헤이안 판 신데렐라. 계모에게 학대당하던 아가씨가 고귀한 신분의 쇼쇼를 만나 행복해진다는 아침 드라마 스토리이지만, 연구자들이 추정하기로 상류 귀족보다는 중하류 귀족이 즐겼던 작품으로 쇼쇼가 계모와 가족들을 지독하게 골탕먹여 복수하는 골계담이나마지막에는 진실을 밝히고 효도한다. 그걸로 납득하나 싶지만 주인공 오치쿠보의 시녀 아코기가 크게 활약하는 묘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당시 중하류 귀족들의 흥미나 관심사를 짐작할 수 있다.
  • 헤이케모노가타리 : 완성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이지만 내용은 헤이안 시대 막바지의 겐페이 전쟁이 소재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승리보다도 동생 요시츠네나 타이라 일족의 몰락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는, 그야말로 판관편애의 전형. 애당초 판관편애라는 말 자체의 유래가 바로 미나모토 요시츠네에게서 나온 말이다.
  • 사라시나 일기: 저자는 스가와라노 다에스케의 딸[13]로 52세에 남편과 사별 후, 자신의 반생을 돌아보는 의미로 일기를 작성했다 말한다. 일기 초반부에 어린시절 아버지의 부임지에서 떠나 헤이안쿄로 상경하는 여행길이 일기의 반을 차지하며 나오는데, 헤이안 시대 이동수단이나 도로 등 지리를 참고하는 자료로 쓰인다.


6.2.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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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85년이 가마쿠라 시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은 사무라이 계층의 독립성을 강조했을 때의 시각이며 1192년을 가마쿠라 시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은 천황의 역할을 강조하는 역사 인식이다.[2] 古代日本語ではマ行で現れるものが多い。[3] 그의 헤이조쿄(平城京)에 대한 애착(?)때문인지 헤이제이 덴노(平城天皇)의 추호(追号)나라노미카도(奈良帝)란 별칭은 헤이조쿄에서 유래했다.[4] 사실 증손자가 아닌 시라카와 덴노의 사생아였다는 이야기가 당대 기록으로 있다. 이렇게 되면 스토쿠는 나이는 16살 어렸지만 사실상 도바의 어린 숙부뻘이 된다. 물론 정설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5] '호우오우'(호-오-, 法皇), 출가한 조고(상황). 공교롭게도 교황을 일본은 로마 법왕이라고 한다.[6] 이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것인데 실제 미치나가는 칸파쿠(関白)가 된 적이 없다.[7] 옛날 일본 초상화 속에서 남성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그것. 나라시대에 전래된 복두가 변형된 것으로, 일본어로는 칸무리라고 한다.[8] 위의 왼쪽 사람은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뮤지컬 신겐지모노가타리에서 고키덴 뇨고 역을 맡은 쿄우 미사(京三紗), 오른쪽 사람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에서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를 연기했던 야마모토 코지. 전자의 눈썹 같은 경우에는 좀 더 현대적으로 표현된 편이다.[9] 이것 때문에 헤이안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씹지 않고 먹었는지 사소한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근데 실제 크기를 보면 바둑돌보다 조금 큰 정도로, 입 안에서 조금 우물거리면 삼킬 수는 있는 크기다. 이때 여자의 부모는 남자 신발을 껴안고 자는데, 다른 엉뚱한 데 다니지 말고 우리 딸에게만 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10] 쥬니히토에 참조. 항목에도 나와있듯 평소에 쥬니히토에를 입고 다닌 것은 아니고 평상복은 몇 겹 안 되긴 했지만, 옷 자체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데다 머리도 바닥까지 질질 끌릴 만큼 길렀다.[11] 1. 제국으로 대변되는 기존 율령제가 무너진 시대에 그 외곽에서 남북국과 헤이안 초기의 일본이 번성 -> 2. 다시 율령체계가 아예 붕괴됨에 따라 빚어진 혼란기에 한국은 후삼국시대, 일본에서는 셋칸시대가 무르익었으며 -> 3. 북송고려의 번영이 시작될 때 중흥이 시작되었으며 -> 4. 북송과 고려의 문벌체제가 다시 망하는 정권교체기에 헤이안 시대 역시 끝났다고 보면 대강 시대적 맥락이 맞는다.[12] 원래 닌자와 모탈의 신체 능력적인 차이는 무시무시하지만 당시 닌자들은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영원한 지배를 계획하던 소가 닌자를 중심으로 다들 정치질에만 열중하고 카라테를 단련하지 않는 바람에 많이 약해져 있었다.[13]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도모야스의 딸로 카게로 닛키(청령일기)의 저자의 이복 여동생, 그러나 다에스케가 두번이나 지방관에 부임했을 때 따라가지 않았고, 남편이 히타치 지방에서 헤이안쿄로 돌아왔을 땐 며칠 후 비구니로 출가했다. 그랬기에 저자는 아버지를 따라 부임지로 함께 온 새어머니와 친했고, 소녀시절 새어머니에게 와카와 문학을 배우는 것이 일기에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