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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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명칭
2. 설명
3. 한국의 해태
3.1. 한국 해태의 특징
4. 해태가 모티브인 캐릭터



1. 개요[편집]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동아시아의 상상의 동물이다.


1.1. 명칭[편집]


해치라고도 한다. 한자로는 또는 獬라고 쓰고 독음은 해치 또는 해태, 두 가지로 읽는다. 혹 海駝(해타)라는 표기도 쓰이는데 이는 해태라는 발음에 끼워맞춘 군두목 표기(한자부회)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원말은 해치이고 해태는 와음(訛音, 잘못 전해진 음)이라고 하고 있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해타(海駝)에 주격 조사 '이'가 결합하여 굳은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모두 사실이 아니다. 海駝(해타)라는 표기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쓰이지 않으며, 한자의 의미과 무관하게 한국어 발음 '해태'에 끼워맞춘 표기이므로 본말전도된 오류이다.

廌·豸는 원래부터 "치"와 "태"의 복수 한자음을 갖고 있다. 광운에 수록된 음운을 보면 이렇다.

한자
한국 한자음
반절(反切)
중고음[1]
표준중국어
일본 한자음
廌·豸

池爾切
ȡʱie̯, ɖˠiᴇ
zhì


宅買切
ȡʱai, ɖˠɛ
zhài
タイ

간단히 정리하자면 당초 ‘해치’의 ‘치(豸)’에서 ‘ㅊ’은 구개음화되기 전 원래 ‘ㅌ’ 발음이었고, ‘ㅣ’ 역시 당초 ‘ㅐ’와 유사한 발음이다. 아마도 같은 발음에서 분화되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현재까지 ‘豸’의 독음 표기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 이미 일실된 손면(孫愐)의 『당운(唐韻)』일문(佚文)에 보이는데, ‘宅買切(택매절)’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반절(反切)표기법에 따라 앞글자의 자음과 뒷글자의 모음을 합쳐보면 발음은 ‘태’가 된다. ‘豸’의 讀音 문제에 대해서는 김언종, “해태”고 , 『韓國漢文學硏究』, 42,2008, 464-466쪽 참고.

廌 : 解廌, 獸也. 似山牛, 一角. 古者決訟, 令觸不直. 象形, 从豸省. 凡廌之屬皆从廌. 宅買切

廌는 해태라는 짐승이다. 소를 닮았고 뿔이 하나다. 옛적에 송사를 판결할 때 (해태로 하여금) 정직하지 않은 쪽을 들이받게 하였다. 상형자이다. 豸의 생략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릇 廌부에 속하는 것은 다 廌로 이루어져 있다. 반절음은 이다. (설문해자 권10 廌부)


중국에서는 xièzhì, 일본에서는 カイ로 읽고 있어서 池爾切(치)에 해당되는 독음이 표준이지만, 한국에서는 宅買切에 해당되는 '해 쪽이 우세하다.


2. 설명[편집]


파일:external/www.purplesea.idv.tw/nEO_IMG_R0013864.jpg
북위 때에 만들어진 해태 토우
사자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갈기가 났고 수염이 달렸으며 코가 크다. 가장 큰 특징은 이마에 솟은 큰 뿔 하나. 악인을 보면 머리의 뿔로 받아 버린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요순시대에 태어나 중국 동북지방에 살며, 신선이 먹는다는 멀구슬나무 잎사귀만을 먹고 산다고 전한다.

<승아>에서 이르길 해치는 불짐승으로서 멀구슬나무 잎사귀를 먹고 청결한 것을 좋아한다.

《乘雅》曰。獬豸火獸也。食楝葉。其喜潔也。蛟龍木蟲也。畏楝葉。激其怒也。

(한국고전번역원/오주연문장전산고/萬物篇/鳥獸類/獸/獅狻麑辨證說 【附獬豸】)

그래서 해태의 초기 이미지는 상단의 토우처럼 앞으로 길게 뻗은 외뿔로 형상화 되었다.

법(法)이라는 단어가 중국의 해치에서 나왔다. 중국 한의 양부가 지은 『이물지』에서 최초로 그 묘사를 찾을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동북 지방의 황량한 땅에 어떤 짐승이 사는데 이름을 '해치'라 한다. 뿔이 하나이고 성품이 충직하다.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사람들이 서로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문다." 하였다. (법률이 아닌 일반적 법도)을 의미하는 한자인 법은 원래 '해태가 물처럼 고요하게 판단해서 틀린 상대를 받아버린다는 의미'인 고자(古字) 였다. 하지만 너무 복잡해서인지 해태 치가 빠진 글자가 통용되었으니 지금의 법法자이다.
파일:external/img.blog.163.com/2035064081619527263.jpg
명나라 시기 해태 흉배
중국에서는 신양(神羊), 식죄(識罪)라고도 부른다. 영어로 Unicorn-Lion(외뿔사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형태가 상당히 다양하게 나온다. 기본적으로 사자가 결합된 형태도 있지만, 중국에서 친숙해진 해태의 주된 형상은 기린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래서 해태의 몸에서 용이나 기린과 같이 비늘을 묘사한다.

일본은 코마이누를 참조.

3. 한국의 해태[편집]


파일:external/blog.joins.com/4db61e903109e.png

누군가는 한국의 해태 석상에 뿔이 없는 이유를 해태라는 영물 자체가 천자(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이기에 한국의 해태는 대개 뿔이 전부 다 사라진 형태를 띠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린에 가까운 형태도 사용할 수 없었기에 사자에 가까운 해태를 만들고 뿔이 없으니까 해태가 아니라 사자라고 우긴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해태의 모티브는 중국 진나라(晉) 당시 월지국에서 조공한 사자이다. 특히 기린과 유사하다는 얘기를 토대로 묘사된 해태는 '양'의 형태를 따서 뿔이 두개로 묘사된다. 일례로 중국에서 '해치관'에 대한 논쟁을 하는데, '해태는 뿔이 하나인 일각수(一角獸)인데 해치관의 형태는 뿔이 두 개이므로 이는 잘못이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물론 이는 의복에 국한된 논쟁이나 중국에서조차 이전까지 해태는 뿔이 두 개 돋은 '양'으로 인식되는 등 형상을 두고 다양한 묘사가 있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에 그대로 넘어와서 한국의 해태는 일각수로 묘사되기도, 신양이니까 말린 뿔 2개가 달린 짐승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뒤죽박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에서조차 해태의 형상을 두고 일각수냐 이각수냐 논쟁이 있었다. (정성권, 해치상(獬豸像)의 변천에 관한 연구 - 광화문 앞 해치상의 탄생과 조성배경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51, 2013) 181-189쪽 참고.)

그리고 신양으로 인식한 바는 조선 후기 황성신문 기사로도 남아있다. (1899년 2월 25일 《皇城新聞》 爾雅續箋四則), (1929년 《별건곤》 23호, 민병한의 경성 팔대문과 오대궁문의 유래)
파일:통도사해태.jpg
파일:62284026.2.jpg
통도사 탱화에 묘사된 해태
파일:광화문 앞 해태상.jpg
광화문 앞 해태상의 뿔 표현
고려시대 제작된 해태모양 연적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창건된 통도사 탱화의 해태는 안으로 말린 뿔을 가지고 있고 1981년 신안선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해태모양 연적에서도 해태 뿔이 2개로 묘사된다. 광화문 앞에 놓인 해태 역시 안으로 말린 2개의 뿔 자욱을 가지고 있다. (정성권, 「해치상(獬豸像)의 변천에 관한 연구 : 광화문 앞 해치상의 탄생과 조성배경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51, 2013.) 위의 사진에 나오는 경복궁 월대 서수(瑞獸) 정수리에는 말린 문양이 없고, 광화문 해치에는 있으므로 뿔자욱으로 추정된다.
파일:external/b98700ecf9315f4405bd025ed5b673307fcc46ac4cb8bdd58cfcc46a41ddcf99.jpg
민화 속에 등장하는 해태는 이름의 한자부터 '海陀'에 물을 다루는 인식이 반영돼 화재를 막아 주는 영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정조 때에 편찬된 동국세시기는 당시의 세시풍속을 전하는데, 정월이면 대문에 용이나 호랑이를, 부엌문에는 해태를, 광문에는 개를,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중문에는 닭을 그려 붙인다라고 전한다. 민간에서는 해태를 중국에서 건너와서 정의구현의 상징으로 사용된 해태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특히 화재를 막고 물을 다루는 영수라는 인식은 19세기 전까지는 볼 수 없다가 나중에 발생하였다.

민속에서는 해치라고도 하며, '해님이 파견한 벼슬아치'라고도 불렀다. 물론 이는 민간어원에 더 가까운 것으로 한자어 해치를 한글로 풀어서 새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법의 상징이라는 본래 위치보다 화기를 억누르는 친숙한 영수로서 더 유명하다. 나쁜 놈들 잡아서 혼내 주는 이미지가 더 널리 퍼진 것만 봐도 한국의 해태가 얼마나 민중과 가깝고도 익살스러운 영수로 변형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파일:소방관깃표장.png
화기를 억누른다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소방관 정복의 깃표장 디자인으로 사용되고 있다.


3.1. 한국 해태의 특징[편집]


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동물답게, 그 상징성 때문에 국회, 경찰청, 대법원, 대검찰청은 물론이고 일산 사법연수원에도 해태의 상이 세워져 있다. 서울대학교 근대법학교육백주년 기념관 앞에 있는 '정의의 종'에도 새겨져 있는데, 여기 해태는 학교 교수의 주장으로 뿔이 있다. 덕분에 이 조각상은 원판인 일각수 석상과 더욱 닮았다. 한국에서, 이러한 해태 문양은 관리의 단령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법을 관장하는 사헌부의 수장 대사헌은 관복에 해태가 수놓인 흉배를 달았다.
파일:story_1214_3-crop.jpg
조경(생몰년 1541-1609)의 무덤에서 출토된 해태 흉배
광화문 앞에도 한 쌍 놓여있는데, 이것은 해태가 법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경복궁을 지을 당시 관악산이 품고 있는 화기를 불을 먹는 해태를 통해 억누르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고종실록을 보면 하마비와 궁내외 경계 표식으로 사용하려고 갖다놓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교하기를, "대궐 문에 해태(獬豸)를 세워 한계를 정하니, 이것이 곧 상위(象魏)이다.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는데, 이것은 노마(路馬)에 공경을 표하는 뜻에서이다. 조금 전에 출궁할 때 보니, 종승인(從陞人)이 그 안에서 말을 타던데 이것이 어찌 사체(事體)와 도리(道理)에 맞겠는가? 전후에 걸쳐 신칙한 하교가 얼마나 엄중했는데도 한갓 형식이 되어버렸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어떻게 기강이 서겠는가? 지금부터는 사헌부에서 규찰하여 계문(啓聞)하라." 하였다.

敎曰: 闕門立獬豸爲限, 卽象魏也. 朝臣不得騎馬於其內, 此爲式路馬之意. 俄於出宮時 見之, 則從陞人之乘馬於其內, 是豈事體道理乎? 前後飭敎, 何等截嚴, 而徒歸文具, 如此而何以立紀綱乎? 從今以後, 憲府糾察啓聞.

고종실록 7권, 고종 7년 10월 7일 기해 2번째기사

원래는 사헌부의 상징으로 광화문에서 50 m 정도 떨어진 육조거리에 있던 것을 옮겼다. 그리고 해태상 자체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해서 경복궁을 중창할 때 새로 만든 것이다. 이때 경복궁 재건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에 경복궁의 화재 얘기가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에도 해태상은 조선총독부 건물 앞으로 이동했다가, 결국 한국전쟁 이후에 광화문을 재건하면서 해태상도 현 위치로 옮겼다.

즉 본래는 사헌부 앞을 지키면서, 지나다니는 관리로 하여금 정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계하는 역할이었다. 사헌부의 장관인 대사헌의 흉배에도 해태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이 이동 명령을 내려 한국 사람들에게는 더욱 친숙한 동물이 된 것이다. 근정전의 돌난간에도 있는데, 여기 해태는 새끼를 데리고 있다.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 있는 해태상 아래에는 포도주가 묻혀져 있다고 한다. 원래 국회 해태상은 1975년 의사당 준공 무렵 해태제과에서 기증받은 것이다. '해태30년사'에는 '국회 해태상은 국회의사당 준공을 기념하여 당사가 3천만 원을 들여 조각, 국회사무처에 기증한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해태주조에서 생산하던 노블와인이라는 상표의 백포도주를 해태상 아래 각각 36병씩 72병을 묻었다고 전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국회 100주년이나 남북통일 시 나누어마실 것이라고 한다.

국회의사당의 해태상에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준공 당시 국회사무총장으로 재직했던 선우종원 변호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해태상 건립은 고증 자문위원이었던 소설가 월탄 박종화가 제의해서 사작되었다고 한다. 박종화는 유명한 소설 여인천하를 집필한 작가이다. 도지원, 전인화, 강수연 주연의 사극으로 유명세를 탔으며, 제1공화국의 부패상을 빗댄 해석으로 유명하다. 또한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의 원작소설인 '세종대왕'의 작가이기도 하다.

월탄 박종화가 "의사당을 화재에서 예방하려면 해태상을 세워야 합니다. 조선시대 경복궁이 큰 화재로 전소된 뒤 복원공사 때 해태상을 세워 이후 화재를 예방한 바 있습니다" 라며 건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예산이었다. 고민 끝에 해태상이 해태제과의 상징이기도 해 박병규 사장에게 건립 협조를 구했더니 박사장이 흔쾌히 기증에 응했다고 한다. 조각은 당시 서울대 이순석 교수가 맡았다. 관련 기사.

눈이 나쁜 사람을 '해태 눈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정을 방지한답시고 궁 앞에 앉아있어도 탐관오리가 들끓는 현실을 비꼬는 의미에서 붙였다는 설이 있다.

오세훈이 처음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만든 왕범이가 흑역사가 되면서 2009년에 새로 만들어진 서울특별시 대표 캐릭터 해치도 해태에가 모티브가 된 캐릭터다.

한남대교 남북단에도 다리 입구에 해태 석상이 각 1쌍씩 있다.

또한 국민건강보험공단 마스코트인 건이와 강이의 모델이기도 하다.

해태와 관련된 것으로 야심작 정열맨의 해태파도 유명하다.

한때 디자인 서울 관련해서 무분별한 디자인 산업에 반대한 대학생들이 '해치맨'이라는 캠패인을 벌인 적이 있었다. 해치가면을 쓰고, 팻말을 들고다니거나, 홍보물을 패러디하는 스티커를 붙이는 등의 모습을 UCC로 찍어 올리곤 했다. 이에 대해 공공시설을 파괴한다고 소환장도 온적이 있는듯 하다.

해태가 티베탄 마스티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환상종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오수견이라는 마스티프종이 한때 있었음을 생각하면 신빙성이 없진 않다. 이렇듯 한국의 해태는 민중적인 이미지로 전승되었다.
파일:kaida.jpg
일제강점기에 많이 팔린 담배로 <카이다> 상표가 있었는데 모델이 바로 해태. 카이다는 海駝의 일본식 발음이다. 근대문학을 보다 보면 가장 싸구려 담배인 마코(Macaw)보다 한 등급 높은 담배로 자주 얼굴을 내민다.

4. 해태가 모티브인 캐릭터[편집]



정확히는 해태의 파생형인 코마이누지만, 해태의 성질도 가진다.
한국인에게는 해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중국이 모티브인 판다리아의 안개 특성상 진짜 해태보다는 돌사자가 모티브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도 해태는 있지만, 설명되어 있듯 중국 해태는 기린과 같이 뿔이 있다.
전자는 하리하라 대륙 하슬라 지역에 위치한 네임드 몬스터고, 후자는 2014년 설날 한정판매 탈 것. 둘 다 딱 보면 해태다.
기전수의 모티브가 동아시아의 상상의 동물인데, 그렇게 되면 모티브는 사자이면서 동시에 코마이누/해태가 된다.
원래 이 둘의 모티브는 코마이누, 국내 더빙판 일부에선 이 코마이누를 해태라고 번역하였다. 근데, 그 둘의 생김새가 어떤 사진으로 비교하느냐에 따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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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번째는 칼그렌, 두번째는 정장상팡의 재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