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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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전적인 모양새의 합죽선. 국가무형문화재 128호 다산 김동식 제작.

1. 개요
2. 역사
3. 제작 공정
4. 합죽선의 종류
4.1. 겉대 치장에 따른 구분
4.2. 속살에 따른 구분
4.3. 선두 모양에 따른 구분
4.4. 종이에 따른 구분
4.5. 기타
5. 합죽선 구입 및 관리 요령
5.1. 구입
5.2. 관리
6. 무형문화재
7. 문제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합죽선()은 부채의 일종으로 대나무의 겉껍질로 을 만들고 한지를 붙여 만든다. 접었다 폈다 하는 쥘부채인 접선(摺扇)의 일종이며 대나무의 겉대 두 쪽을 맞붙여 살을 만들었다 하여 합죽선이라 부른다.

접선 중 가장 품격이 높은 부채로 일반 접선과는 다르다.[1] 기본적으로 대나무의 겉껍질 두 쪽을 민어부레풀[2]로 붙여 하나의 살을 만드는 이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다. 현재는 접부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명사라 접부채라면 그냥 '합죽선'이라고 통칭하면서 일반 접선과 구분하지 못하는 예가 허다하다.[3]

공정이 상당히 복잡하여 조선시대에는 각 공정별로 육방(六房)이라는 곳을 두어 각 공정 별 전문가로 하여금 공정을 처리할 정도였다. 근대에 들어서 전통 합죽선의 경우 숙련공이 부채 하나 만드는데 약 100일이 소요된다고.

부채의 기본 기능은 본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는 데 쓰지만, 합죽선에는 산수화(山水畵)·사군자(四君子) 등을 그려넣어 미술적 또는 골동품적 가치를 더할 수도 있다. 근래 생산되는 중저가형 합죽선은 기계로 가공한 것들이 많다.[4] 일부 무형문화재가 직접 제작한 합죽선은 거의 수공이며,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굉장히 비싸다.

특산지는 전주. 전주의 마스코트 캐릭터인 맛돌이와 맛순이도 이 합죽선과 태극선을 기본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2. 역사[편집]



서술하기에 앞서, 합죽선은 접부채의 일종일 뿐 접고 펴는 모든 접부채가 합죽선인 것은 아니다.[5][6] 합죽선의 기원은 접부채보다 불분명하므로 심도 있는 연구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래 서술된 내용은 접부채와 합죽선이 혼용되어 있으므로 독자의 주의를 요한다.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도화견문지에는 “고려에서 들어오는 접첩선을 사용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7]
또한 1123년에 송나라 서긍이 고려에 와서 보고들은 바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고려도경”에는“고려인들은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다니는데 접었다 폈다 하는 신기한 것이다” 고 감탄한 내용이 있다. 이로써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뿐만이 아닌 여러 용도로 쓰였음을 알수 있다.
일본 기원설로는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우리 나라의 기물로서 일본의 것을 모방한 것이 많은데, 접는 부채도 고려는 일본에서 배웠고 중국은 고려에서 배워갔다.”는 내용이 있다.
열하일기에 의하면 접선이 일본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부챗살에 종이를 붙여 접었다 펴서 실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접부채는 당시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부채를 만드는 솜씨는 더욱 발달하였는데, 고유의 쥘부채와 방구부채는 외국과의 주요 교역 품으로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 10년4월에 왕은 명나라 사신에게 쥘부채 100자루를 주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통문관지”에 따르면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신이 일본에 갔을 때 국교품으로 부채를 상당수량 가져가 전달하였다. 조선시대의 부채는 단순히 생활용품에서 나아가 의례용품이나 예술품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4년 10월 24일 을유 1번째기사

'허침이 아뢰기를, "갓(笠)을 꾸미는 데 모두 금은(金銀)을 쓰니, 그 값이 거의 면포 4, 5동(同)에 이르고, 선자(扇子; 부채) 값이 또한 8, 9동에 이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알겠는가?"'

성종 때의 대신 허침이 왕자들의 사치를 고발하는 대목인데 실록에는 부채라고만 되어 있고 합죽선이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왕자들이 극도로 사치스런 소재로 부채를 만들어 자기 부를 과시했거나 아니면 왕이 직접 보지 못해서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 걸로 봐서 허침이 과장했을지도 모른다. 합죽이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합죽선에 대한 묘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전북 무형문화재 엄재수 선자장의 말에 따르면, 성종 시절 면포 8, 9동의 가격은 대략 백미 3섬, 즉 240kg 정도 된다고 한다. 게다가 이 접선은 중국으로 넘어가면 더욱 뻥튀기가 되어 황금으로 거래한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3년 6월 25일 정사 1번째 기사

예조 판서 신상이 아뢰기를, "지금 좌무위(左武衛)에게 회답으로 준 물건을 보건대, 일본 물건과 값을 비교하면, 3, 4분의 1에 불과하오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의리에 박한 것 같습니다. 더욱 광초(光綃)는 가치가 면포 8, 9필에 해당하며, 부채는 비록 중국에서도 1자루 가치가 황금 2냥쭝에 준하니, 그 값이 지극히 중한데, 지금 호조에서는 광초 1필을 면포 2필에 준하고, 부채 5자루를 정포 5필에 준하였으니, 실로 이는 너무 가볍습니다. 비록 본값에 준하지는 못할지라도 절반으로 주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광초 1필에 면포 5필로 준하고, 부채 1자루에 포자 1필로 하여 다시 마감하여 아뢰라." 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접부채의 가격은 접부채가 화려해지는 조선 후기가 아닌 조선 초기에도 비쌌다.

신분에 따라 제약도 심해서 왕족은 50개 속살, 사대부 이상은 38개 속살을 쓸 수 있었으며 그 이하는 살 수가 낮았고 평민은 칠접선이나 합죽선 같은 고급 접부채를 쓰지 못해 일반 접선을 이용했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한 자는 고리에 부채 전용 노리개인 선추를 달지 못했다. 이처럼 접부채를 보면 신분을 대충 알 수 있다고 하니 현대로 치면 손목시계 정도일까.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영조정조 시대에 이르러 접부채는 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겉대를 바다거북의 일종인 매부리바다거북(대모)의 등껍질로 말아 싼 대모선이 등장했고 당시에는 구하기 매우 힘든 물소로 만든 외각선 및 내각선, 전주 특산품인 반죽(斑竹)을 이용한 반죽선 및 이대선, 삼대선 등 부채의 종류 또한 굉장히 다양해졌다. 시간이 더 흘러 양반들이 부채를 이용해 자기를 과시하는 게 지나쳐 대밭이 황폐화되고 평민들의 시름이 깊어지자 조정에서는 부채의 살 수를 줄이고 합죽을 하지 말 것, 크기는 어느 정도 이하여야 할 것 등을 고지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 합죽선이 처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합죽(合竹)이라는 단어가 실록에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정조실록 18년 11월 27일이며, 대나무 부채에 대한 폐단을 논하며 외각(外角), 합죽, 칠지(漆紙)를 금하자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다른 문헌도 합죽이라는 단어가 실려 있으나 해당 문헌을 기록한 시기는 거의 대부분 영정조 시대 근처다. 합죽선 유물이 주로 발견된 연대 또한 이와 비슷하므로 적어도 그 이전부터 합죽선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어느 연구 자료에는 합죽선은 오골선(吳骨扇) 혹은 조선 골선(朝鮮骨扇)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듯하다.[8] 일본 도쿠가와시대에 이 조선골선을 모방하여 부채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증거 자료만 조금 더 뒷받침된다면 합죽선의 최초 등장 시기는 1600년대 혹은 그 이전으로도 거슬러 올라가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이후 화려해진 부채의 미가 일제강점기 때 값싼 부채의 보급으로 찾는 이가 줄어들고 양반 계층이 몰락하여 맥이 잠시 끊겼다. 무형문화재 엄재수 선자장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의 부채와 비슷하게 속살에 칠을 올린 칠접선은 조선으로 대량으로 들여와 제작 기법이 단절됐지만 일본에 없는 합죽선[9]은 되려 일본 자본이 지원을 하여 고위층의 선물용이나 수출용으로 계속 제작해 왔다고 한다. 칠접선과 합죽선 둘 다 최고급 부채임을 생각하면 합죽선이라도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합죽선 기법도 퇴색해 갔다. 박물관에 남아 있는 유물을 판단하면 192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조선시대 부채의 기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나[10], 그 이후 부채들은 크기가 작아지고 모양새도 전과 같지 않아졌다. 게다가 장인들은 글보다는 손에서 손으로 기술을 전승하기 때문에 그 화려했던 기법들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해 왜소한 부채들만 남게 된다.

해방 후 몇몇 장인들이 다시 합죽선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나 잃어버린 기법들을 복원하지 못해 그저그런 부채들만 만들다가 자동기계의 도입과 베이클라이트 같은 신소재의 등장으로 부채의 가격은 획기적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부채의 품질은 매우 조악해졌고 그 와중에 옛 것을 찾아 제대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무형문화재들은 자신의 작품에 여러 의미를 붙여 가치를 높이고 있다. 무형문화재 고 이기동 선생의 말에 따르면, 합죽선은 고려시대 한 대사에서 유래한다. 출가한 후에도 속세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한 수양이 덜 된 대사가 외로운 수행 중의 노리개 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합죽선을 접어 둔 모양이 여자의 육체와 흡사한 것은 대사가 기녀를 염두에 두고 손으로 가지고 놀 것을 생각한 것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손잡이 부분은 머리이며 양쪽으로 연결된 고리는 비녀를 뜻하고, 그 다음은 가슴 부분이며 아래로 둥그스레 흰 부분은 치마를 의미한다. 그리고 합죽선에 인두로 새겨 넣는 무늬는 박쥐, 국화와 쪽매화가 있다. 박쥐무늬가 뜻하는 것은 박쥐의 활동이 밤이듯이 남녀가 눈이 맞으면 밤에 만난다는 것이고, 국화는 서리 올 때 피어 눈을 맞으며 지는 꽃으로 여자의 절개를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쪽매화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기동씨가 소장한 약 250여 년 전의 합죽선에 쪽매화 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역사를 지닌 셈이다.[11]

오늘날에는 전라북도 전주에서만 합죽선이 만들어지고 있다.


3. 제작 공정[편집]


앞서 서술하였지만 합죽선은 6개의 제작 공정을 거쳐 생산된다. 그리고 그 공정을 담당하는 곳을 '방'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육방'이다. 육방에서 하는 작업은 다음과 같다.
파일:합죽선 제작과정 1.jpg
초조방 - 대나무를 잘라 얇게 깎아낸다.
정련방 - 민어의 부레를 삶아 만든 부레풀로 대껍질 두 개를 하나로 붙여 살을 만든다.
낙죽방 - 속살과 변죽(겉대)에 인두로 문양을 그려 넣는다.
광방 - 광을 내고 속살을 매끄럽게 한다.
도배방 - 부채의 종이를 붙인다.
사북방 -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식용 고리인 사북으로 부채를 머리를 고정한다.
파일:합죽선 제작과정 2.jpg

4. 합죽선의 종류[편집]



아래에 서술한 부채의 종류는 현재 무형문화재들의 작품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그 치장 및 재료나 기법, 외형에 따라 나눈 것이다.


4.1. 겉대 치장에 따른 구분[편집]



  • 다절선(多節扇) - 겉대에 마디가 많은 부채. 죽절선이라고도 한다. 최근에는 마디 수가 많을 수록 고가로 친다. 대략 20절 이상. 전통 방식이지만 마디 수가 적은 분죽이나 마디가 많아 화려한 맹종죽을 주로 사용한다.

  • 외각선(外角扇) - 겉대에 케라틴 재질을 올린 부채. 소뿔이나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주로 사용한다.
    • 소뿔을 쓰면 우각선(牛角扇)이라고 하며 소뿔 안쪽에 그림을 그리면 화각선(華角扇)이라고 한다. 유물로 남은 화각선은 조선말 ~ 일제강점기초에 만들어졌다. 화각장 이재만 선생의 말에 따르면 화각은 궁중에서 썼던 것이라고 한다.
    •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쓰면 대모선(玳瑁扇)이라고도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대모홍접선(玳瑁紅摺扇)이라는 유물이 존재한다. 부채 중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나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가 워낙 귀한 재료라서 이것을 부채에 올리면 왕의 귀에 들어가는 모양이라 제대로 자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39권, 영조 10년 9월 24일 병신 2번째기사
이때에 홍치기가 대모(玳瑁)로 부채를 만들어 윤유(尹游)에게 선사하였으므로 서명형이 논핵하였는데, 사문하자 마침내 그런 사실이 없는 것으로 귀결(歸結)되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지만, 홍치기라는 사람이 정말 대모선을 만들지 않았는지, 대모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았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내각선(內角扇) - 겉대 안쪽에 뿔 및 기타 재료를 덧댄 부채. 현재 유물이 존재한다. 이 내각은 선두까지 이어져 있어 겉대의 모양새를 잡아 주는 역할도 한다.

  • 나전선(螺鈿扇) - 겉대에 흑칠을 한 뒤 나전을 붙여 만든 부채. 유물이 존재하며 해당 유물에는 끊음 기법으로 수복다남자(壽福多男子)라고 씌여 있다.

  • 반죽선(斑竹扇) - 대나무 중 얼룩이 진 것[12]을 사용하여 겉대에 올린 부채. 만기요람에 오십죽백반첩선(五十竹白斑貼扇), 사십죽백반첩선(五十竹白斑貼扇) 등으로 나오는데 여기의 반(斑)이라는 글자가 바로 얼룩 대나무로 추정하고 있다.

  • 어피선(魚皮扇) - 겉대에 물고기 껍질을 말아싼 부채 문헌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창작품에 가깝다. 최근 몇몇 선자장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제작했다. 가오리나 상어의 껍질을 이용한 어피선은 굉장한 단단함을 자랑한다.


4.2. 속살에 따른 구분[편집]



  • 백접선(百摺扇) - 백 번 접힌다고 하여 백접선이라 부르지만[13] 문헌에 등장하는 정확한 명칭은 오십죽백첩선(五十竹白貼扇) 혹은 오십죽흑칠첩선(五十竹黑漆貼扇)이다.[14] 살 수가 50개라 오십살백접선이라고도 부른다. 만기요람에 이 오십죽백첩선을 왕 및 왕대비전, 혜경궁에게 진상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며, 일성록 순조 편에는 공주에게도 진상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주로 왕족이 썼을 것으로 추정한다. [15]


4.3. 선두 모양에 따른 구분[편집]



  • 어두선(魚頭扇) - 선두의 모양이 물고기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끝이 약간 뾰족하다.

  • 사두선(巳頭扇) - 선두의 모양이 뱀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어두선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선두의 끝이 약간 뭉실하다.

  • 승두선(僧頭扇) - 선두의 모양이 스님(중)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 승두선은 그 특유의 둥그런 모양 덕분에 펴지는 각도가 좁은 부채일 때 비교적 손이 편안하다고 한다.

  • 유환선 (有環扇) - 선두 사북에 고리가 있는 부채. 보통 부채는 고리가 달려 있고 여기에 선추를 달아 쓴다.

  • 무환선 (無環扇) - 선두 사북에 고리가 없는 부채.


4.4. 종이에 따른 구분[편집]



  • 유칠선(油漆扇) - 종이를 기름에 먹인 부채. 그냥 기름을 먹이는 게 아니라, 특수하게 제조한 가공유를 바른다. 그 기름 제조 비법은 이미 실전되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명유(明油)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였다.

  • 협변선(狹邊扇) - 부채를 폈을 때 종이가 펴지는 각도가 180도 미만인 것. 대체적으로 140도 이하를 협변선으로 친다.

  • 광변선(廣邊扇) - 부채를 폈을 때 종이가 펴지는 각도가 180도 이상인 것. 흔치는 않지만 가끔 보인다.

  • 대륜선(大輪扇) - 별선(別扇)의 일종으로 종이가 표지는 각도라 360로라서 그 모습이 차바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햇볕가리개 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4.5. 기타[편집]



최근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을 바탕으로 무형문화재들이 접부채에 대한 특징을 정리하는 중이다. 조선시대 말기 이전까지의 합죽선은 겉대에 마디대 치장을 하였고 속살에 옻칠한 칠접선은 겉대에 말아싸기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로 가면서 이 기법들이 혼재되어 칠접선 기법이 합죽선에도 적용되곤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중인 갓피홍지합죽선이 그 좋은 예이다.


5. 합죽선 구입 및 관리 요령[편집]




5.1. 구입[편집]


합죽선은 손에서 가지고 노는 쥘부채이므로 가급적 인터넷 쇼핑몰보다는 매장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이 좋다. 내 손에 맞지 않으면 부채를 부칠 때 과도한 힘이 들어가 오히려 더 더워질 수 있으며 가지고 노는 재미가 없다. 공방, 하다못해 지업사 같은 곳에서라도 내 손에 맞는 부채를 직접 쥐어 보고 구입하면 된다. 합죽선 공방은 전주를 필두로 담양, 인사동과 종로 등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인사동이나 종로의 기프트샵에는 싸구려 중국산도 있으니 주의. 명확하게 '국산/전주 합죽선 주세요.'라고 해야 한다. 안그러면 가끔 오죽선 비스무리한 퀄리티의 중국산을 내오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

싼 게 비지떡이라고 값이 쌀 수록 품질 또한 조악해진다. 특히 수공예품은 더더욱 그러하다. 합죽선은 종이만 교환하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기물이므로 오래 쓸 것 또한 생각해야 한다. 제대로 된 작품을 구매하고 싶으면 무형문화재가 직접 제작한 작품 구입을 문의하면 되나, 가격은 상상 이상이므로 신중을 요한다. 이 정도 명품급 합죽선은 외국 선물용으로의 수요가 더 큰 편.


5.2. 관리[편집]


민어부레풀로 속살을 접합하였으므로 비를 맞히면 민어부레풀이 떠서 못쓰게 된다. 비를 맞히지 말아야 하며 또한 겨울에 보관 시 부채 앞 끝을 고무줄로 감아 오동나무 상자 등에 보관하면 좋다. 종이가 찢어졌다 하여 냅다 버리지 말고 공방에 가서 종이를 교환하자. 대략 5천원이면 교환할 수 있다.

속살 한두개가 쪼개졌다 해도 그 부분만 뺄 수 있으니 이 또한 공방에 가 보자.

떨어뜨리면 부채가 상하므로 관리에 주의를 요하며 부채를 펼 땐 소리꾼들처럼 부채 끝을 잡고 떨어뜨리듯 쫙 펼치면 종이가 매우 빨리 상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옛날의 소리꾼들이 썼던 부채는 합죽선이 아니다.). 펼칠 땐 점잖게, 접을 때도 조용히. 물론 펴고 접는 것은 자기 취향이다. 어디까지나 '오래 쓰고 싶을 경우'에 한한 문제. 본인이 세게 펴고 싶다면 세게 펴라. 찢어졌을 때 부채 탓만 안하면 된다. 애초에 접었다 펴는 물건의 특성상, 자주 접었다 폈다하면 일찍 상하는건 마찬가지.

주머니에 넣으면 주머니의 안감이 부드러운 경우 부채 속살의 나뭇결이 거꾸로 들고 일어날 수 있다. 가방 안에 넣거나 손에 들고 다니자.


6. 무형문화재[편집]


부채를 제작하는 장인을 선자장이라고 부른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 128호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 부분의 기능보유자는 아래와 같은데, 중요무형문화재 및 지방무형문화재에서 그 보유자(속칭 인간문화재)에 대해서, 공예 분야의 겨우 '기능보유자'로, 공연분야의 경우 '예능보유자'로 칭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 - 2015년 선자장이 중요 무형문화재 128호로 등록된 이후 김동식씨가 처음으로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엄재수#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박계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명예보유자 박인권 : 이전 무형문화재 선자장이었으나 아들인 박계호씨에게 계승한 이후로 명예보유자로 지정되었다.


7. 문제[편집]


예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문헌에는 부채 종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만 있을 뿐 그 상세한 모양새는 기록에 없으며, 근래에 발견된 유물들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무형문화재들이 고증 오류를 빚곤 한다. 특히 삼국시대, 고려시대 합죽선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 이전에 합죽선이 없다는 주장에 힘이 많이 실리고 있지만, 유물이 없어서 그렇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복원 합죽선이라고 판매하는 합죽선들은 고증이 되지 않은 것이다. 복원품인데 무슨 부채를 복원했는 지 모르면 근본 없는 것이 되고만다. 따라서 복원품 및 재현품이라는 부채를 구매할 때에는 반드시 그 원형 유물이 존재하는 지 확인 할 필요가 있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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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중에 많이 돌아다니는 '오죽선' 역시 바로 이런 일반 접선이다.[2] 이 민어부레풀을 어교(魚膠)라고 하며, 동물의 뼈나 가죽으로 만드는 아교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3] 혹시라도 합죽선을 구입하고 싶을 때는 '전주 합죽선'이라고 직접 말해주어야 한다.[4] 제품의 특성상 그 역시도 공장제 '수공업' 형태로 대량생산되는 것이다.[5] 일반인은 많이 헷갈려 하며 심지어 판매자조차 오죽선 등을 합죽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6] 민선, 민합죽선, 오죽선 등은 합죽선이 아니다.[7] 여기의 접첩선은 접고 펴는 접부채를 뜻한다.[8] 엄재수. "한국 전통 부채의 역사적 고찰 및 디자인 접근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전주대학교, 2019. 전라북도[9] https://www.breaknews.com/622729 [10] 박물관에 전시된 합죽선 겉대 안쪽에 용산공작주식회사 라 찍힌 합죽선이 있는데 이 부채는 기증자가 일본에서 구입한 것이며 따라서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됐음을 나타내는 것이다.[11] 이는 이기동 선생의 재해석일 뿐 정설인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 합죽선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12] 오죽이 완전히 까맣지 않고 얼룩이 진 것일 수도 있고, 왕대 중에 얼룩진 개체도 일부 존재한다.[13] 정확히는 98번 접힌다.[14] 백첩의 백(白)은 종이가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흰 종이임을 의미한다. 일백 백(百)이 아니다.[15] 임금만이 백접선 썼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니는데 위 문헌에서 볼 수 있듯 사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