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지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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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지 왕조의 강역[1]
알라웃딘의 초상화

1. 개요
2. 역사
2.3. 할지 왕조의 쇠퇴와 멸망
3. 관련글



1. 개요[편집]


델리 술탄국의 두번째 왕조. 투르크계, 아프간인혼혈 할지족이 세운 이슬람 무슬림 왕조이다.


2. 역사[편집]



2.1. 잘랄 웃 딘 할지[편집]


노예 왕조 시절 델리 술탄 왕조는 튀르크계가 주류였고 할지족[2]을 비롯한 타 민족들은 비주류로 차별을 받았다. 할지인들은 노예 왕조의 마지막 강력한 술탄이었던 기야스 웃 딘 발반의 비(非)튀르크계에 대한 차별 정책으로 델리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자 대부분 벵골이나 비하르 지역으로 이주했다. 한편 군인으로 복무하는 비튀르크계 출신 병사들은 몽골 제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대부분 서북 지방에 배치되었다. 역시나 그곳에서도 할지족에 대한 차별은 존재했고, 할지인들은 속으로 노예 왕조와 튀르크계 귀족들에 대한 반감을 키워나갔다. 한편 술탄 발반은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귀족들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사병들을 몰수하는 등 튀르크계 귀족들의 힘을 크게 빼놓았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튀르크계 귀족들이 비튀르크계 민족들을 억누를 수 있게 해준 무력을 없애버린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결국 술탄 발반이 1286년 사망하고 제10대 술탄으로 어리고 유약한 무이즈 웃 딘 카이카바드가 즉위하자, 할지족 출신의 잘랄 웃 딘 할지가 노예 왕조를 멸망시키고는 왕위를 차지하여 할지 왕조를 세웠다.

할지 왕조는 튀르크계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권력구조를 유지했던 이전의 노예 왕조와는 달리 아프가니스탄 계열이나 타 인도 무슬림들에게 높은 관직을 제공하는 등 보다 관용적인 정책을 내세웠다. 잘랄웃딘이 새로운 술탄으로 등극할 당시 이미 그의 나이는 70세에 달하는 굉장한 고령이었다. 인자한 노인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잘랄웃딘은 온화한 성품과 유하고 자비로운 성격으로 유명했고, 덕분에 빠른 시간 내에 델리 시민들 다수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3] 그러나 일부 귀족들, 개중에서도 권력 핵심에서 밀려난 튀르크계 귀족들은 잘랄웃딘의 온화함을 유약하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옛 왕족들의 지도자이자 술탄 발반의 사촌이었던 말리크 카주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마니푸르에서 반란을 일으킨 말리크는 술탄을 자칭하며 델리로 진군했으나 어이없이 잘랄웃딘에게 패배했고, 이로 인해 노예 왕조의 복위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4]

노예 왕조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확고히 델리의 술탄이 된 잘랄웃딘은 반란 진압 얼마 후인 1292년 침공한 몽골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후에는 한창 확장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며 델리 술탄국을 위협하던 란탐보르 지방의 카하마나 왕국을 침공했다. 친히 군대를 이끌고 카하마나 왕국으로 진군한 잘랄웃딘은 만다와르, 자인 요새를 차례로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잘랄웃딘은 난공불락의 란탐보르 요새에 이르자, 요새 공략에 지나치게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이라 예측하고 란탐보르 공략을 포기했다. 술탄의 측근들은 잘랄웃딘의 결정에 크게 반발했다. 그의 사촌이던 아흐마드는 술탄이 란탐보르를 치지 않는다면 힌두교 소왕국들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라 경고했으나, 술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잘랄웃딘은 그대로 회군해 돌아갔다. 당연히 이런 관용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는 무슬림들도 존재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 잘랄웃딘의 조카이자 양아들이었던 알라 웃 딘 할지가 있었다.[5] 아와드의 총독이었던 알라웃딘은 잘랄웃딘의 관용정책에 반발했고, 잘랄웃딘이 카라를 방문하던 중 그를 살해한 후, 1296년 스스로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6]


2.2. 알라 웃 딘 할지[편집]


잘랄웃딘을 살해하고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한 알라웃딘은 상당히 무자비하고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즉위 이전부터 데칸 고원야다바 왕조의 데바기리 요새를 박살내며 전적을 세운 알라웃딘은 1296년 델리에서 술탄으로 즉위했다. 그는 자신의 측근이던 자파르 칸, 누스라트 칸, 말리크 카푸르 등을 고위 관료에 임명했는데, 이들은 모두 튀르크계가 아닌 토착 인도계 출신 무슬림들이었다.[7] 알라웃딘이 술탄으로 즉위한 직후, 당연히 전대 술탄을 살해하고 왕좌를 찬탈한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은 전국에 넘쳐났다. 라호르 일대는 몽골의 침략에 시달렸고, 물탄 지역은 잘랄웃딘의 아들이던 아르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알라웃딘은 빠르게 대응했다. 제일 먼저 물탄에 군대를 파견하여 아르칼리를 쳐죽였고, 델리의 궁정에도 숙청을 일으켜 자신을 편들지 않았던 수많은 신하들을 모조리 숙청했으며 남아있는 잘랄웃딘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거나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1297년 겨울, 차가타이 칸국몽골 군대가 침략해들어오자 알라웃딘은 군대를 보내 20,000명의 몽골 병사들을 학살했고, 그에 맞먹는 수의 몽골인들을 포로로 잡아 델리에서 공개처형해버렸다. 그는 또한 잘랄 웃딘 시절에 델리에 정착하며 살고 있던 몽골인들을 대량으로 살육했다.[8] 알라웃딘은 1305년, 2차례에 걸친 침공 작전 끝에 마침내 구자라트 지역을 정복했고, 이후 구자라트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때, 반란군뿐만 아니라 그들의 처자식들까지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몽골군은 1306년과 1307년에 걸쳐서 인도 북부를 계속 침공했는데, 알라웃딘은 30,000명에 달하는 기병들을 몰고 이들을 모두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의 위협이 사라지자 알라웃딘은 남인도 지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1308년에는 잘랄웃딘 시절 공략을 포기했던 데바기리 요새를 쳐서 함락시키고 야다바 왕조를 봉신국으로 삼았으며, 텔랑가나카카티야 왕조를 침공하고[9] 인도 남단의 판디아 왕국, 호이살라 왕국 등 부유한 힌두계 왕국들을 모두 무릎꿇리고야 말았다.[10]

알라웃딘은 정복 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에도 대단히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세금을 걷던 이전의 방식을 폐지하고 직접 국가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였으며,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고[11] 시장의 필수품 가격을 통제했다. 또한 사창가를 폐지하고 델리의 모든 창녀들을 강제로 결혼시켰으며, 도박, 마리화나 등 인간의 심성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알려진 대부분의 유흥업소들을 금지했다. 또한 왕권강화를 위해서 귀족들에게 제공되는 모든 특혜들을 폐지했다. 거기다 반란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귀족들 사이의 연회를 금지시키고 정략결혼 또한 자신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귀족들 사이에 스파이까지 심어둬서 그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도록까지 했다. 이와 같은 지옥같은 생활들이 나날이 이어지게 되어 귀족들은 도저히 반란을 일으킬래야 일으킬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한다. 하지만 이러한 독재 방책들은 임시방편의 수준밖에 될 수 없었고, 이는 결국 알라웃딘 사후 할지 왕조에 커다란 위험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알라웃딘은 재위 말년 편집증심해져 일부 측근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믿지 못하며 수많은 신하들을 보이는 대로 죽여댔다. 그가 유일하게 믿던 사람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최측근이었던 말리크 카푸르였는데, 카푸르는 의심병에 걸린 술탄을 뒤에서 조종하면서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등 자기 입맛대로 술탄국을 좌지우지했다. 알라웃딘은 1316년 1월 4일 밤에 사망했다.


2.3. 할지 왕조의 쇠퇴와 멸망[편집]


알라둣딘이 사망한 직후 카푸르가 술탄에 올랐으나, 당연히 사람들은 그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았고 카푸르는 몇 달도 되지 못해 술탄좌에서 쫒겨났다. 신하들은 카푸르 축출 이후 6세의 어린 시하브 웃 딘 오마르를 새 꼭두각시 술탄으로 옹립하고 그 형인 쿠트브 웃 딘 무바라크 샤를 섭정으로 세웠다. 그러나 쿠트브 웃딘 무바라크 샤는 반란을 일으켜 동생을 죽이고 술탄이 되었다. 무바라크는 유력 가문이었던 튀르크계 귀족인 말리크 가문의 가지 말리크를 펀자브군사령관에 봉하는 등 환심을 사려 노력했지만 그 역시 4년 만에 쿠스라우 칸 장군에게 암살당했다. 할지 왕조 최후의 술탄이었던 쿠스라우 칸은 반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힌두 출신의 노예였다. 그러나 뛰어난 무예로 술탄 알라웃딘의 눈에 들었고, 덕분에 알라웃딘의 원정군을 지휘하는 장군직에까지 오르는 등 인생역전에 성공한 인물이기도 했다. 1316년 알라웃딘이 사망하고 그 후임 술탄들이 연이어 궁정 쿠데타와 암살로 사망하자 쿠스라우 칸은 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보다가 술탄직마저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1320년 6월 술탄에 등극한 쿠스라우 칸은 알라웃딘의 직계 아들들을 포함한 할지 왕가의 일족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심지어 반이슬람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기존의 권력층들과 극한의 대립각을 세웠다. 당연히 무슬림 귀족들과 델리 술탄국의 관료들은 속으로 천한 힌두 노예 출신이라 혐오하던 쿠스라우 칸이 좋게 보일 리 없었고, 이에 반발한 신하들은 가지 말리크에게 새 술탄이 될 것을 요청했고, 가지 말리크는 델리로 진군해 찬탈자 쿠스라우 술탄을 죽이고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다. 1320년 가지 말리크는 술탄 즉위 후 이름을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로 개명하고 투글루크 왕조를 개창하여 할지 왕조는 멸망했다.


3. 관련글[편집]


[1] 짙은 초록색 영토는 직할령, 연두색 영토는 봉신국.[2] 아프가니스탄 일대로 이주해 대대로 정착해 살았던 튀르크계 민족.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토착 파슈툰족통혼하여 피가 많이 섞였던 혼혈이었고, 때문에 노예 왕조의 주류를 이루던 튀르크계 귀족들은 할지족을 튀르크인으로 영 인정하지 않았다.[3] 잘랄웃딘은 델리에 입성하고 왕궁에 들어간 이후, 자신은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며 상징적인 의미로 왕좌에 앉기를 거부하는 등 여러 퍼포먼스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겸손함의 대명사로 각인되었다.[4] 참고로 잘랄웃딘은 말리크를 처형했으나 반란에 동참한 나머지 세력들을 관대하게 처리했다. 심지어 포로로 잡힌 반란 지도부를 일부러 연회에 초대하기도 했을 정도.[5] 잘랄웃딘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알라웃딘을 데려와 키우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라웃딘의 결혼생활은 영 좋지 않았고, 알라웃딘은 하루빨리 잘랄웃딘의 영향력에 벗어날 생각에 빠졌다.[6] 알라웃딘은 이미 아와드 총독으로 재임할 때부터 잘랄웃딘을 살해할 생각이었다. 알라웃딘은 남쪽의 부유한 야다바 왕조의 수도인 데바기리를 침략, 막대한 양의 재물을 약탈했다. 알라웃딘의 전과에 기뻐한 잘랄웃딘은 친히 알라웃딘을 치하하기 위해 수행원 몇만 데리고 알라웃딘의 본진으로 향했다. 알라웃딘은 잘랄웃딘이 방심한 틈을 노려 그를 베고 수행원과 보좌 신하들을 모두 죽였다.[7] 알라웃딘의 능력 중심의 인사 덕분에 이미 노예 왕조 시절 주류를 차지하던 튀르크계 귀족들은 완전히 밀려났고, 그 자리에 토착 인도계 귀족들이 등장하면서 할지 왕조는 옛 노예 왕조에 비해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의 신하들을 기용할 수 있었다.[8] 사실 이들 중 상당수는 1292년에 북인도를 침입했다가 항복하여 델리에 살고 있었던 몽골 병사들이었다. 이 몽골 병사 3,000명은 전리품을 적게 받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1299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델리 술탄국의 군대에 의해 나흘 만에 진압되었다. 또한 이 반란에 분노한 알라웃딘은 몽골인 반란군의 아내와 아이들을 사로잡아서 아이들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찢어 죽였고, 아내들은 병사들한테 강간하게 한 다음 사창가로 보내버리는 잔혹한 처벌을 행했다. 이후 인도에는 가장의 반역이나 항명으로 가족들을 살해하는 연좌제 풍습이 자리잡게 되었다.[9] 이때 카카티야 왕조의 왕이 항복의 의미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단결정인 코이누르를 알라웃딘에게 바쳤다고 추정된다.[10] 한편 판디아 왕국 정복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몽골 출신 신하들이 판디아와 결탁하여 알라웃딘을 살해하려 시도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안그래도 몽골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몽골계에 대한 불신이 만연했던 알라웃딘은 당연히 이에 격분했고, 결국 델리에 거주하던 30,000명 정도에 달하는 몽골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11] 이슬람에서는 술을 금지하지만 인간 본성상 술과 알코올을 원천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당시 델리 술탄국에서는 술이 넘쳐났다. 심지어 알라웃딘 본인도 엄청난 애주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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