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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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진교(韓鎭敎)
이명
한에녹

송계(松溪)
생몰
1887년 1월 16일 ~ 1973년 12월 12일
출생지
평안남도 중화군 풍동면 능성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한진교는 1887년 1월 16일 평안남도 중화군 풍동면 능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베이징으로 망명했고, 1919년 6월에 상하이로 이주하여 해송양행(海松洋行)을 설립하여 경영하면서 그곳에서 나온 수익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했다. 또한 홍성린, 선우혁과 협의하여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이후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벌였으며, 1918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金奎植)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활동하였다. 1919년 1월에는 상하이에서 서병호, 여운형, 김구, 선우혁, 이광수, 한원창(韓元昌), 김순애, 안정근, 조동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이후 1919년 3.1 운동 발발 후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그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서 임시사무소를 차리고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김동삼, 조영진(趙英鎭), 조용은(趙庸殷), 여운형, 최창식(崔昌植), 윤현진, 신익희, 이광수, 신석우·조동호, 선우혁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그 결과 1919년 4월 10일에 상하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다가 평남 중화군 조사원(調査員)으로 임명되어 그 지방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실태 등을 조사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였으며,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펴는 기반을 다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20년 11월 9일에는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으로 교민들의 자치 및 복지향상에 기여하였으며,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에 가입하여 한중 양국민의 공동 항일전선을 구축하였다.

1921년 5월 임시정부가 혼란을 일으키자, 그는 이탁, 차이석, 송병조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 기성회를 조직하고 그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이듬해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만들어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뚜렷한 효과는 보지 못하였다. 또한 1924년 9월 8일에 개최된 대한적십자회 정기총회에서, 그는 김구, 이유필(李裕弼), 신현창, 김규식, 김인전, 이규홍(李圭洪), 정애경(鄭愛敬) 등과 함께 상의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2월 21일에는 신한청년당 이사장에 김규식을 추대했고, 자신은 여운형, 서병호, 김철 등과 함께 이사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7월, 그는 염온동, 엄항섭, 최창식, 송병조 등과 함께 '임시정부 경제 후원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또한 1930년 3.1절을 기념하여 민족통일운동의 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안창호, 이동녕, 조완구,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 국민당을 조직했다.

이후에도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그는 충칭에서 8.15 광복을 맞이한 뒤 고향에 돌아갔지만 북한이 급격한 공산화로 치닫자 월남했고,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정치와 인연을 끊고 영락교회에서 장로로 지냈다. 1973년 12월 12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한진교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개신교 신자였던 그의 저서는「진리종(眞理種)」,「영원한 복음」(1947년 작) 등이 있다.[1]
[1] 이 두 서적으로 인해 주류 개신교단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