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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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다민족국 전쟁부 장관
한스 안톤 빌헬름 프리드리히 쿤트
Hans Anton Wilhelm Friedrich Kundt


출생
1869년 2월 28일
독일 노이슈트렐리츠(Neustrelitz)
사망
1939년 8월 30일 (향년 70세)
스위스 루가노
국적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볼리비아,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복무
독일군 / 볼리비아군
1888년 ~ 1918년 / 1921년 ~ 1933년


1. 개요
2. 생애
3. 평가



1. 개요[편집]


독일 육군 장교 출신이다. 1921년 볼리비아로 귀화하여 차코 전쟁에서 볼리비아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2. 생애[편집]


1869년 2월 28일 북독일 연방의 노이슈트렐리츠에서 태어났다. 1888년 임관했다. 1908년 볼리비아의 군사 고문으로 파견되어 교육 담당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쿤트는 유능한 부대 훈련관으로서 명성을 얻으며 볼리비아의 정치엘리트와 군부의 지지을 얻으며 영향력을 넓혔다. 1911년 그는 프로이센 육군을 참고하여 볼리비아 육군의 재편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독일로 귀국했고 종전 후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1921년, 쿤트는 민간인 신분으로 볼리비아로 돌아와 볼리비아 육군 참모총장과 전쟁부 장관직을 제의받았다. 우선 볼리비아로 귀화하고 장군으로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다. 1911년에 시작된 육군 조직 개편을 계속했고 1923년 전쟁부 장관직을 맡았다. 하지만 1930년 에르난도 실레스 레예스 대통령이 쿠데타로 실각하자 쿤트도 망명을 떠나야 했다.

1932년, 파라과이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다니엘 살라망카 정부는 다시 쿤트를 불러왔고 다시 육군 참모총장과 전쟁부 장관직을 맡았다. 쿤트는 유럽과 미국의 현대식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여 볼리비아군의 현대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차코 전쟁이 발발하자 볼리비아의 탱크와 기갑 차량은 그란차코의 지형에서 진격하기에 매우 적절하지 않았고 고장나거나 파괴되었다. 또한 공군의 항공 정찰보고를 경시했고 그 외 여러 문제점으로 졸전을 거듭한 끝에 결국 1933년 12월 12일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쿤트는 볼리비아를 떠나 독일로 돌아왔다. 1939년 8월 30일, 스위스 루가노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평가[편집]


쿤트는 행정업무나 교육업무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전략적 능력은 매우 평범했다. 또한 우직하게 정면 공격만을 선호했는데 이는 볼리비아군의 패착이 되었다. 또한 차코 전쟁 발발 전, 지형 탐색 등을 위한 시간이 많았음에도 소홀히 했고 이는 그란차코 지형에 대한 이해도 부족으로 이어지며 기갑 전술이 실패로 돌아가는 원인이 되었다. 군사 작전을 직접 지휘하는 것을 선호했고 볼리비아 장교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는데 부족한 전술 이해도와 잘못된 판단, 참모진의 조언 경시가 맞물리며 볼리비아가 전쟁에서 패배하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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