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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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
홍콩
香港特別行政區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1. 개요
2. 단순 비교
3. 정치
3.1. 북한 관련
3.2. 탈북 루트
4. 양국 간 여행
5. 문화 교류
5.1. 홍콩 문화 애호
6. 대한민국과의 관계
6.1. 친한적인 면
6.2. 반한적인 면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홍콩의 외교관계.

냉전 시대 홍콩은 대한민국과 같은 제1세계에 속해 있었기에 상당히 오래 전부터 민간교류가 활발했다. 홍콩은 영국령이라는 특수한 환경속에서 서구문물을 빠르게 수용하며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한국의 홍콩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홍콩은 한국과 문제를 일으킬 수 없는 구조였으며 홍콩인도 한국을 나쁘게 보지 않고 반 중화인민공화국 성향이 강한 한국인들도 오히려 홍콩은 다르다거나 심지어는 하루 빨리 독립하라면서 편들어 주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홍콩은 왕조 시절 남중국으로 한국과 주로 충돌한 북중국, 즉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한/수/당나라나 북방 기마민족인 거란,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과 다른 실체였으며 실제로 남중국인들도 저 몽골이나 만주족에게 핍박 당했었다. 당장 원나라 때 최하층 남인이나 청나라변발을 거부해 성 하나가 통째로 몰살당한 소위 도성도 거의 홍콩의 조상인 남방인들이었다. 지금도 한국 국방에 있어서 북중국의 세력을 위협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애초에 남중국인들이 한반도까지 육로로 쳐들어오기에도 너무 멀다.

단교 이후의 한국-대만과 달리 홍콩의 경우는 여전히 호감을 느끼는 한국인이 많으며, 반중 성향의 한국인들 중에서는 우산 혁명 당시 지지를 표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국에서도 6월 항쟁민주화 투쟁을 벌였던 역사가 있기에 중국 정부의 홍콩 민주주의 훼손시도에 대해 비판적일 수 밖에 없으며, 홍콩 측에서도 한국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벤치마킹하고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투쟁을 지지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한 모양이다. 실제로 홍콩의 한인 유학생들이 우산 혁명에 많이 참여하기도 했다. 블로그 리뷰

참고로 한국은 후진국이었던 시절에도 홍콩에 30일 간 무비자 체류가 가능했고,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한 2000년부터는 90일로 무비자 체류 일수가 늘었으며 선진국에 진입한 2005년부터는 워킹홀리데이 협약을 맺었다. 한국 여권은 홍콩 이민국에게 있어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과 함께 공신력 높은 여권으로 입국 시 별다른 질문도 없고, 각종 비자도 자격만 되면 금방 나온다. 원론적으로는 비자 발급이 까다로운 곳이 홍콩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 여권은 그나마 타국에 비하면 수월하다.

그리고 동북아시아라는 변방에 치우치고, 외국과 직접 교류가 힘든 한국에게 있어 외국, 특히 중국 및 동남아시아의 교류 플랫폼을 홍콩이 제공해 준다. 홍콩은 면세 지역이라 홍콩을 거치는 중계무역이면 그만큼 관세가 절약되며,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행선지와 싼 가격의 항공권도 홍콩에 있고, 국제 정세에서도 특별히 척 진 나라가 없는지라 중재지로도 알맞다. 특히 이러한 이점을 살려 중국으로 가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 당장 중국의 사드 보복 때 한국 기업들은 중국으로 직접 진출이 잘 안되자 홍콩을 통한 진출을 많이 꾀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중국의 이런저런 까다로운 규제 등을 피해 홍콩으로 우회해서 중국에 가며 대부분 이를 권장하는 편이다. 영어가 통하고 거리가 가까운 것이 가장 큰 장점이며 중국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지위만은 그 누구도 대체 불가능하여 다른 나라들도 홍콩이 꼭 필요하다. 그 외 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역시 한국에서 직접 접근하기 힘든 특수시장도 홍콩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 기업들의 진출도 자연히 잦아 농협식품은 2019년 6월 7일에 홍콩의 윌슨그룹과 가공식품을 유통 및 홍보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2020년 8월 4일에 대우건설은 홍콩 현지 건설사와 조인트벤처를 구성해 홍콩 북부 신계 지역 내 판링 우회도로 공사를 수주했다고 밝혔다.#


2. 단순 비교[편집]


항목
대한민국
홍콩
면적
100,412km²
1,105km²
인구
51,705,905
7,428,887
1인당 GDP
$31,940
$48,829
명목 GDP
$1조 7,209억
$3,603억
국방비
391억 달러
-
IMF 분류
선진국
선진국


3. 정치[편집]


한편 한중관계에서도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한중수교 이전에도 홍콩에서 양국 외교실무자들이 접촉을 해왔다. 사드 배치로 한국과 중국이 갈등을 빚은 바 있던 2016년에서 2018년 사이 유커들의 한국 단체관광도 금지되자 대륙 유커들의 대안으로 홍콩 관광객들이 싱가포르 관광객들과 함께 급속히 떠오르고 있으며 아니꼬운 중화인민공화국 대신 대만과 함께 홍콩, 마카오로 가는 여행객이 많아졌다.

도널드 창렁춘잉 행정장관이 대한민국2009년2014년에 각각 방문한 바 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한국에 방문한 적이 없다. 덕분에 한국인들의 인식이 안 그래도 안 좋은데 더 안 좋아졌다. 게다가 캐리 람 시대에 들어 한-홍콩 간 정부 관계가 크게 나빠지기까지 했는데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당시 한국 외교부의 여행경보 발령을 정치적 조치로 받아들여 사이가 틀어진 게 컸다.[1]

홍콩 홍콩섬 중서구 구의원으로 한국계 홍콩인 조던 팽(Jordan Pang Ka-Ho)이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에서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다. 지역구는 사이잉푼역이 있는 사이완(西環,Sai Wan) 선거구이다. 재미있는 점은 사이완 지역구는 중국 공산당홍콩에 설치한 대사관격의 기관이자 영국령 시절 총독부의 역할을 어느 정도 맡고 있는 중국 국무원 홍콩마카오판공실 홍콩주재연락사무소가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전부터 중국 공산당의 통제를 직접 받는 지역인데 여기 구의원은 한국계 홍콩인인 셈이다. 게다가 중국 공산당한테는 더 골때리게도 조던 팽은 민주파 정당인 빅토리아사구협회 소속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준석과 친밀한 관계이다. 과거 바른미래당이 홍콩 민주시위를 지지할 때 인연을 맺었다.[2]

앞서 말했듯 정의당이 2020년 이후 홍콩 민주파를 적극 지지하기로 하면서 류호정 의원과 조슈아 웡이 타 민주파 인사들과 함께 공동 방송 형식으로 대화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정의당은 홍콩 민주파 및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태 후 대두된 흑인민권운동(Black Lives Matter)를 모두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조슈아 웡은 자신의 트위터에 류호정 의원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또한 조슈아 웡은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자신의 말을 곡해하는 한국 언론에 경고하기도 했으며 현재 한국 언론과는 인터뷰 등 접촉을 꺼리고 있다.

2023년 1월 10일, 홍콩 당국이 성명을 내고 한국 정부의 비행기 입국 제한 조치의 철회를 요청했다.#

3.1. 북한 관련[편집]


싱가포르마카오가 북한인의 입국에 비교적 관대한 것과 달리 홍콩은 북한인의 입국에 전혀 관대하지 않아 북한인을 볼수 없고 북한식당도 없다.

홍콩 내에서 한국어를 쓰는 사람은 한국인이거나[3] 중국본토에서 이주한 광둥성 출신의 조선족이거나 아니면 재미교포, 재일교포, 재호주 교포, 싱가포르 교포 등 다른 나라 출신 교포이거나 셋 중 하나이다. 싱가포르가 북한인 입국에 비교적 관대하여 북한음식점도 하나 있고 고위층이 자주 오가고 남북 간 비공식 대화창구 중 하나로 쓰이는 것과 달리 홍콩은 그런 거 없다. 이 점은 심지어 옆의 마카오와도 크게 다르다. 사실 마카오는 포르투갈1975년 카네이션 혁명 후 공산권에 우호적인 나라로 바뀌어 북한과 우호관계를 유지했기에 그런 게 컸다. 포르투갈은 현재도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캐나다 등과 함께 북한에 우호적인 서방국가이다.[4]

그래서 북한인의 입국은 한국인과 달리 까다롭게 제한을 걸어놓았다. 홍콩인들도 여행경보만 없을 뿐 사실 상 여행금지 내진 철수권고에 준하게 취급해 반드시 비자를 받아야 북한에 들어가도록 제한했고 비자 발급에 대한 타당한 사유가 있어야 발급된다. 북한인이 입국하려면 비자를 받아야 하며, 그나마 북한인의 취업 및 거주는 전면 금지 대상이다. 애초 워킹비자 발급 불가 대상이 북한과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테러 지원국들이다. 한마디로 관광비자만 된다는 얘기이다. 인턴(Training Visa) 및 취업비자(Working Visa) 등 취업허가(work permit)의 경우 북한라오스, 베트남, 네팔, 아프가니스탄, 쿠바등 몇몇 국가들은 발급이 금지되어 있다.# 여기에는 중국본토 후커우 소지자도 해당되며 이들은 조건부로 별도 절차를 밟아야 한다. 심지어 자기 돈 들고 사업하는 투자비자도 발급이 안 된다.

안 그래도 북한인 입국을 제지하다가 2017년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인한 UN제재에 의해 북한인의 입국이 전면 금지되었다. 그리고 북한 선적 내진 편의치적 선박은 물론 북한에 기항한 제3국 선박도 콰이청 부두 기항 금지, 고려항공 여객기도 사실 상 취항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5], 실제로 북한 선박의 홍콩 입항이 해사처에 의해 거부당하기도 했다. 이제 북한인은 갈 수 있는 나라도 없다.

영국령 시절부터 영국의 적대국가인 북한 국적자는 입국을 못 하게 막아 놓긴 했지만[6] 이렇게 전면적인 금지 조치는 대북제재가 강화되면서이다.

이래저래 홍콩은 북한에게 적대적인 곳이라서 북한인들을 받지 않았고, 북한인들은 상대적으로 북한에 우호적인 포르투갈마카오로 간 것. 마카오는 홍콩과 달리 종주국 포르투갈이 친북 성향의 서방국가인지라 북한인이 흔하여 북한식당도 있고 중국-북한, 혹은 북한-포르투갈 합작 무역회사들도 있다. 이들은 북한의 핵개발을 돕는단 의심 하에 제재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김정남이 마카오에서 거주할때 홍콩 입국을 시도했으나 홍콩 이민국은 적성국가인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국을 거부했다. 2006년 북한의 핵실험 이후 전세계가 북한을 까는 분위기에서 있던 일이다.[7] 그리고 2007년에는 PSI의 일환으로 홍콩 해사처가 북한 화물선을 억류하기도 하였다.

홍콩인들 사이에서도 북한은 미친 나라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캐리 람 시대에 들어 남한과 사이도 나빠진 판에 북한과의 관계는 더욱 개선할 리가 없다.


3.2. 탈북 루트[편집]


2010년대 들어 새로운 탈북 루트로 떠오르고 있는 지역으로,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출전했던 18세의 남학생이 홍콩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으로 진입한 것이다. 옆 기사 남학생은 2016년 9월 초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중국 정부는 북한이탈주민이 한국 외교관을 통해 한국으로 정식 송환될 경우 특별행정구와 중화민국을 불문하고 중국 영토에서 곧바로 한국으로 진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8]

홍콩은 중국령이기 때문에 한-홍콩 노선을 이용할 수 없었으며 타이완 섬 즉 대만은 중국이 대만을 자국령으로 인식하고 있고, 92공식에 따라 중화민국중국 대륙을 통치하는 중국인지라 싱가포르일본을 거쳐가는 방법 밖에는 없어서 할 수 없이 도쿄를 경유할 수 밖에 없었다. 싱가포르 경유도 이론상 가능하지만 돌아가기 때문에 인천국제공항까지 1시간 반이면 가며 사실 상 한국과 붙어있다시피한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을 거친 것.

홍콩 경찰중국 경찰과 달리 북송하지 않고 보호하다가 제3국, 특히 한국과 붙어있는 일본을 경유, 한국에 조용히 넘기는 걸로 처리한다.

기존 탈북 루트인 러시아중국 대륙,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은 북송될 위험이 높고 몽골이나 태국도 북송될 위험이 앞의 국가들에 비하면 낮지만 없는 것은 아니어서[9] 대체 루트로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이 떠오르고 있다. 셋 다 북한 공작원들이 얼쩡거리지도 못하는 곳이라 안전하고 해당 국가 경찰들은 탈북자를 보호하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 홍콩이 영국 영토였을 때는 당연히 영국 영토답게 경비가 삼엄했다. 1989년까지만 해도 영국군 육군과 해군이 홍콩 경찰 및 홍콩세관 등과 함께 국경에 들어가 있었고 영국 육군의 구르카 레인저 연대에서 국경에 설치된 철조망을 순찰했다. 지뢰도 곳곳에 깔려있었다. 냉전 초기에는 중국 인민해방군 내진 중국을 거쳐 소련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중소분쟁 및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중국이 형편없는 나라로 전락해 약체화된 뒤에는 막장이 된 고향을 등지고 홍콩으로 탈출하려는 인민들을 막기 위해 국경 경비를 삼엄히 했다. 그리고 홍콩과 중국본토 사이의 경계에는 선전강(深玔河)이라는 도랑[10]과 선전만(深玔灣,The Deep Bay)이라는 바다, 험한 산지가 가로막아 월경이 쉽지 않아서, 홍콩 루트는 되려 영국령 홍콩 시절일 때 비주류였다. 시도도 못 하고 선전시 쪽에서 경찰에 사살당하거나, 운 좋게 탈출해 성공해 심천강에 뛰어들어도 영국군에 발견되면 총살당해 벌집으로 끔살 확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홍콩 사회 분위기가 중국 공산당을 극딜하는 반대륙[11]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탈북자에 우호적, 북한에 적대적인 여론이 형성되어 새로운 탈북루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홍콩에는 중국이나 마카오와 달리 그 지긋지긋한 북한 특무도 없다! 한국, 일본, 미국, 대만 등과 함께 북한인 입국이 금지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경찰의 보호 후 마음 놓고 한국행이 가능하다. 중국 정부도 특별행정구까지 굳이 문제를 일으키긴 싫어서 그냥 모른 척 한다. 심지어 국가보안법 통과 직후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2020년 5월 28월 홍콩 국가보안법 문제가 불거지면서 홍콩을 통한 탈북루트의 안전성도 위협받게 될지 모른단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나친 걱정이다. 애초 국가보안법의 성격이 하나의 중국에 대한 침해 및 외국 세력과의 결탁, 그리고 조직범죄/국제조직범죄 등 치안을 위협하는 조직적 범죄행위[12] 등을 막는 것으로 사실상 홍콩 독립운동 및 서방주의 때려잡기이며 파룬궁, 탈북자는 여기 해당이 안 된다.


4. 양국 간 여행[편집]


새로운 테마여행이 속속 등장하고, 저비용 항공사들의 등장으로 이웃 나라인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과 엮어 가는 소위 두 도시 여행 등이 등장하면서 계속 옛 명성을 유지하는 곳이다. 단 해외직구로 홍콩 명품을 한국의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어 쇼핑은 많이 시들해졌다. 그래도 할사람은 한다. 주로 하버시티나 공항 근처 퉁충의 시티게이트 아울렛 등을 많이 간다.

1940년대 설립된 대한민국 주 홍콩 총영사관이 있으며 중국의 공산화 이후에도 영국령인 만큼 상관없이 남아서 영사업무를 수행했다. 엄밀히 말해서는 1997년 이전 주영 한국대사관, 이후 주중 한국대사관 휘하의 영사관이 되는 것이 맞으나 사실상 따로 놀고 있다. 이는 다른 주홍콩 영사관도 마찬가지로 반환 전 런던의 주영 한국대사관과는 독립적으로 활동했고 현재도 베이징의 대사관과는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특히,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절에도 항공편이 일찌감치 개설되어 상류층들의 해외쇼핑 단골 여행지로 자리매김하면서 지금까지도 쇼핑천국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한항공의 전신 대한국민항공사가 김포-쑹산-카이탁 노선을 개설한 적이 있으며, 캐세이퍼시픽 항공1992년 한중수교 및 대만과 단교 전까지 다니던 중화항공도 일찌감치 김포-타이베이-카이탁 노선을 걸어두고 있었다. 타이베이에서 환승하는 식이었다. 특히 캐세이퍼시픽 항공의 경우에는 항공편 개설 이후 단 한번도 단항한 사실이 없다.

침사추이의 경우에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쇼핑의 성지 취급이다. 해외 직구가 등장한 뒤 많이 시들해졌다만 여전히 하버시티 등에는 한국 관광객이 넘친다. 주로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쇼핑의 경우 해외직구의 등장으로 홍콩제품을 한국의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어 많이 시들해졌지만[13] 대신 먹자여행이나 근교의 산을 오르는 트레일 탐방, 부속도서들을 가보는 섬 여행 그리고 태국 치앙마이베트남 다낭 등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휴양지와 엮어 가는 여행 등의 새로운 유형이 등장한다.[14]

볼 것이 없고 역사가 일천하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당장 중국 국경과 가까운 신계의 원나라(元)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객가인 거주지 와이(圍, Wai)의 경우만 해도 한국인들이 찾아오지 않는 숨겨진 명소들로, 아직도 마을사람들이 버젓이 살고있으면서 성벽 등이 보존되어 있다. 중세 중국과 현대 홍콩이 조화를 이루는 이국적 관광지로 홍콩에서 중국틱한 전통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박물관 기행도 재밌다. 홍콩의 역사는 물론, 남방 중국사를 공부할 수 있는 홍콩역사관, 과학기술과 환경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는 홍콩과학관, 습지 생태계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습지공원, 홍콩 철도 발전사를 배울 수 있는 철도박물관, 홍콩 경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경찰박물관, 해양사 발달에 대해 알수 있는 해양박물관, 쑨원의 홍콩 망명 시절을 다루는 쑨원 기념 박물관 등이 있다. 게다가 꼬박꼬박 입장료를 받는 싱가포르와 달리 홍콩 박물관들은 입장료가 거의 무료다.

도시의 독특한 경관을 구경하는 것도 홍콩 여행의 또다른 재미. 완전히 깔끔하게 정돈된 싱가포르나 휘황찬란한 카지노 도시인 마카오와는 다른, 시민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공간에서 소소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홍콩이다. 어지러이 들어선 건물에 네온사인이 곳곳에서 반짝이는 침사추이의 광경은 여러 매체에서 배경으로 다룰 정도로 홍콩의 상징처럼 되어 있으며, 아기자기한 가게와 식당, 카페가 즐비하고 곳곳에서 유머러스한 그래피티를 즐길 수 있는 홍콩섬의 소호 역시 볼만하다. 특히 이 곳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랜드마크가 된 지 오래.

그리고 도시 말고도 라마 섬이나 청차우 섬, 팽차우 섬 등의 섬 관광도 즐길거리고, 신계 북부 팔선령(八仙嶺, Pat Sin Liing) 등 산 트레킹도 재밌다. 특히 팔선령 국립공원의 경우 선전(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선전 최고봉 오동산(梧洞山), 그리고 선전TV 타워가 보이기까지 한다.

반면, 대한민국으로 관광 오는 홍콩인도 상당하다. 한국인의 눈에는 홍콩사람이나 대륙사람이나 구분이 안되어서 그렇지, 서울이나 부산 시내에서 홍콩인 관광객은 쉽게 볼 수 있다.[15]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각 국가 등에 비해 전체인구가 적기 때문에 인구 수 대비로 치면 거의 1~2위를 다툰다고 볼 수 있다.


5. 문화 교류[편집]


2000년대 이전에는 홍콩 영화가 대한민국에 큰 인기를 끌면서 대한민국 대중문화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한류 열풍으로 반전되어서 한국이 홍콩에 오히려 영향을 주는 입장이다. 사실 이는 아시아 어디나 똑같은 현상이다. 한국 아이돌 그룹들의 인기 덕에 한류가 보편화되었다.

다만 1990년대 이전에도 일부 대한민국 노래가 홍콩으로 수출되었기는 했고, 빨간 마후라같은 일부 영화도 홍콩으로 수출되어 왔다. 단지 현재는 대한민국 아이돌 그룹들이 인기를 끌면서 아시아 문화수출국 지위를 한국이 대체하였다.


5.1. 홍콩 문화 애호[편집]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오랜기간 동안 홍콩 영화가 많이 수입되어왔으며 1990년대 전반기까지 한국 내에서 수입영화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 아니면 홍콩 영화가 공식으로 자리잡았다.

TV에서도 주말이나 명절때 홍콩 영화와 헐리우드 영화를 상당한 빈도로 편성해주었기 때문에 성룡, 홍금보 등의 액션배우들이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으며 성룡의 경우 무명시절 끝자락이던 1970년대 중반에 한국-홍콩 합작 무술영화를 다수 촬영하며 한국에서 장기체류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성룡은 한국에 거주한 경험과 한국 여성과 장거리 연애도 하였으며 직접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한국사랑을 보여주었다.[16] 엄청난 친한파이다. 한국 통영시 명예시민이기도 하다. 홍콩은 물론 중화권 자체에서 성룡 같은 수준의 친한파가 드물다. 성룡은 중국 공산당원이 된 후에도 여전히 친한파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17]

또 다른 친한파들은 주윤발과 고인인 장국영으로 두 사람은 한국의 CF에도 등장했고 방문도 자주 했다. 박사학위를 가졌던 장국영은 생전에 독립기념관 등 역사 유적지를 현장학습하듯 자주 찾았고, 주윤발은 주로 오락거리를 찾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기는 1990년대 전반기까지도 이어졌고 그래서 1990년대 당시에는 홍콩스타들이 한국에 찾아와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곤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홍콩 영화가 침체세에 접어들고 이후로도 홍콩 영화계 자체가 시장성 때문에 또 하나의 내수시장이나 마찬가지인 중국을 노리는 경우가 많아지는데다가 한국에서 영화수입업자들이 1998년 일본문화 개방 후 일본 애니매이션이나 일본 영화를 주로 수입해오거나 아싸리 중국본토 영화를 수입해서 홍콩 영화에 관심을 꺼둔지 오래인 상황인지라 홍콩 영화가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한국 영화수입업자들이 보기엔 철 지난 느낌인데다 광동어로 되어 있어 번역도 더럽게 힘든 홍콩산 영화를 수입하느니 차라리 스케일 크고 중국어 능통자가 많아 번역도 쉬운 중국산 영화를 수입하는 편이 더 낫다. 1980년대까진 홍콩 영화도 대만을 통해 수입되어 표준중국어 더빙판이 들어왔으나 1997년 홍콩 반환 후 직접 홍콩에서 수입되어 대사가 광동어로 된 것밖에 없어 번역 문제가 제일 크다. 광동어는 아예 한국에 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없다.

그래도 케이블 영화채널에서는 홍콩 영화를 꽤 많이 편성하는 경우는 있는데다가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홍콩과 한국이 합작으로 영화를 찍는 경우도 많았고, 또한 영화감독들도 홍콩 영화가 한창 전성기였을 시절에 홍콩 영화를 즐겨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적지 않은 한국 영화에서 홍콩 영화의 영향을 쉽게 찾아볼수 있다. 현재도 홍콩식 재난물이나 홍콩식 호러, 그리고 독립영화 등이 명작이 꽤 나온다. 홍콩 현지 스크린에는 지금도 훌륭한 자국산 영화가 얼마든 걸리지만 단지 한국시장이 대상이 아니라 한국에서 모를 뿐이다.

홍콩 드라마 일명 홍드는 매니아층이 꽤 두텁다. 사실 TVBRTHK 등에서 꽤 괜찮은 드라마가 여전히 제작되곤 하며 한국인들이 몰라서 그렇지 현지에서는 꽤 많은 신인 연예인들이 나온다. 염정행동 등 정부와 합작한 드라마도 있고 호러물이나 SF도 있는 등 장르도 다양하다. 홍콩 드라마 일명 홍드는 대만 드라마 일명 대드와 함께 비 대륙 중화권 드라마로 묶이기도 한다. 크게 보면 중국 드라마의 일종이기도 하다만 중국본토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5.2. 대한민국/문화 애호[편집]


중국으로 반환된 후인 21세기에 들어서 중국 대륙이나 대만,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처럼 홍콩에서 한류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주로 한국 드라마와 K-POP 위주로 인기가 많다.


6. 대한민국과의 관계[편집]


홍콩은 태생부터 남중국의 귀퉁이 섬 지역으로 왕조 시대에는 해적이나 득실거리고 객가인이나 들어와 살던 오지였고, 태생이 아편전쟁의 영국 전리품인 영국령 홍콩으로 주권국가가 아닌 식민지일 뿐이며, 따라서 굳이 광복 후 대한민국과는 척 질 이유도 필요도 없어 대한민국과 문제가 없던 곳이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매우 우호적이다. 이는 본국인 영국이 역사상 대한민국과 척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이 망한 후 상하이에 들어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우방국도 중화민국, 영국, 프랑스, 미국 이렇게 네 나라였으며 영국군은 한국광복군과 미얀마 전선에서 같이 싸우기도 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에는 당연히 중화민국, 프랑스, 미국과 함께 맹방 오브 맹방이 되었으며 이러한 본국 영국과 대한민국의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홍콩도 자연스럽게 한국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홍콩은 6.25 전쟁 때 중국 인민지원군, 일명 중공군과 거리가 멀며 오히려 유엔군의 일원인 영국 땅이었고 영국군이 중공군에 대승을 거둔 해피밸리 전투의 유래가 홍콩섬 해피밸리이다.

옛날 남중국과 북중국은 별개의 실체로 인식되어 왔고, 한반도와 충돌한 세력은 북중국의 중원이 중심인 전한, 후한, 위나라, 수나라, 당나라 등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세력들이나 아예 비한족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요나라, 여진족금나라, 몽골족원나라, 만주족청나라 등이며[18] 남중국은 되려 이들 북방 기마민족에게 똑같이 핍박받고 차별받았다. 마르코 폴로원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는 한족 영주들이 자치로 다스리던 남중국은 북중국을 키타이라 하던 것과 달리 남만에서 유래한 만지라고 부르며 다른 나라로 인식했었다. 그리고 원나라 때 최하층민을 구성한 남인도 홍콩인/마카오인의 조상인 광동인이고 청나라변발을 거부해 집중적으로 학살 타겟이 된 곳들도 광둥성, 푸젠성 등 현대 홍콩/마카오인의 조상들이 대거 건너온 곳들이다. 홍콩에서 수가 꽤 많은 객가인은 아예 원나라 때 몽골족의 말발굽을 피해 황하 유역에서 남하한 사람들이다.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했던 1988년에 홍콩은 개최국인 대한민국의 바로 앞 순서에 입장했다.

6.1. 친한적인 면[편집]


홍콩은 거의 100년간 중국 대륙과는 정치적으로 떨어져 있던 영국의 식민 도시로서 중화사상이 중국 본토에 비하면 비교적 적고, 외국 문화에 개방적이며 겸손하다. 애초에 시작부터 자유항이라 일찍이 국제화되어 있고 외국인을 보기 힘든 베이징과 달리 세계 여러 나라의 민족 전시장이다. 한국인도 과거 홍콩 영화 흥행 등으로 홍콩은 좋다는 사람들이 많으며 언어 장벽 및 여행 편의 때문에 대륙에 갈 엄두가 안 나는데 중국문화는 보고 싶으면 대만과 함께 홍콩을 고르는 경우가 많다. 홍콩은 영어가 통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국본토에 비해 큰 메리트를 제공한다. 중국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인들도 홍콩에서 장기체류하며 스타트업을 하여 중국시장에 접근한다.

최근 홍콩의 영자지보도에 의하면 한국문화에 친근감을 느끼는 홍콩인이 더 많다고 한다. # 아시아에서는 예전에는 일본문화에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달라졌다.

특히 2010년대 들어서부터 K-POP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에 힘입어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과 한국음식을 취급하는 식당들이 늘어났고 이에 대한 인식도 좋은 편이다.

홍콩 독립 운동 당시에도 대한민국의 6월 항쟁, 5. 18 민주화 운동 등은 롤모델이 됐고, 6월 항쟁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1987을 상영하며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 점 때문에 한국을 높게 평가하는 홍콩인들이 상당히 많다. 주변 국가에 피를 흘린데다 성공한 민주주의 국가가 대한민국 외에는 희소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본래는 뒤에 반한적인 면에서 언급하듯 2010년대부터 이전까지는 홍콩 독립파가 과격파였지만, 2019년대에 들어 중국 시진핑 정권에 폭정과 간섭이 심해지며 최대 80%까지 홍콩 독립 운동을 찬성하게 되었다. 때문에 현재는 과거랑 반대로 홍콩 독립 운동을 찬성하는 사람이 친한파가 되었다. 이 점 감안해서 아래 문단을 봐야 할 듯.

우리나라도 마오쩌둥 정권 아래 외교적으로도 국민 정서로도 반중 정서가 강해졌므로 더더욱히 서로 잘맞는다. 홍콩 독립 운동 반대파(친중파)를 제외하면 거의 대다수가 대한민국 국민들이 홍콩 생각하는 것 비슷하게 최소한 나쁘게 보지는 않거나 우호적으로 본다고 봐도 될 듯. 과거에는 친중파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실적인) 독립 반대파가 친한파에 가까웠음을 생각하면 재밌는 일.


6.2. 반한적인 면[편집]


물론 홍콩도 700만 명이나 사는 곳이니만큼 각자 생각이 다르며 친한적인 사람도 있는가 하면, 혐한적이거나 반한적인 면도 있다.

홍콩의 나무위키라고 할 수 있는 홍콩연락대전의 "남한" 문서를 보면 일부 한국기원설 및 개신교 선교사들의 행패 때문에 웹상에서 홍콩에서는 분명히 반한정서가 상당히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사실 해당 문서란은, 한국인이 보기엔 상당히 거북하고 불쾌할 내용밖에 없는 수준이다. 한국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기술해 놓은 것이 아니라, 한국을 향한 중화권의 안 좋은 루머, 그리고 불미스런 사건/사고들을 위주로 스크랩을 해놓고 비아냥거리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반면 홍콩연락대전의 '대만' 문서는 분량도 상당하며, 우호적인 내용이 굉장히 많다. 실제로 홍콩사람들은 대부분 대만과 대만인에 매우 우호적이다.

그 이유는 공자중국인들의 위인이 한국인이라는 식의 한국기원설이 반감을 사기도 하고[19] 또한 몇몇 몰지각한 개신교 선교사들 및 이들이 속한 한인교회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침례교 등 한국에선 소수인 개신교 교파들과 천주교가 다수인 현지교회와 마찰을 빚어 성공회천주교 등 타 교파 소속 홍콩인 그리스도인을 무리하게 자기 교파의 한인교회로 끌고올려다 마찰을 빚기도 하는 것이 그 원인이다.

여기서 당연히 공자 한국기원설이야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종의 거짓뉴스 이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한 반한 감정은 천주교,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사도전승이나 전통을 존중하는 교파들은 기독교로 인정하지 않으며, 더 많은 신도들을 자신의 교회로 끌어오기 위해 생기는 일이다. 이들은 현지문화를 존중하는 신앙의 모습만 보고 미신을 믿는다고 지레짐작하다가, 19세기까지도 거슬러 올라가 4-5대째 대대로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사람[20]을 만나 깨갱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부 배타적인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이런 것 상관 없이 자기 교파만이 진리인 것이 문제다.

이렇게 홍콩인중국인과 완전히 별개[21] 게다가 장제스 시절에 홍콩과 광둥성은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한 지역이었으며 심지어 1950년대 초반까지도 홍콩-중국 국경은 폐쇄되지 않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홍콩인들도 결코 한국에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일부 몰상식한 10-20대의 경우,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 주변국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사이트를 눈팅하다 보면 한국을 지칭할 때 비하명칭인 "소한국(小韓國)" 또는 "소한(小韓)"(조그만 한국), "빵쯔(捧子)"나 김치를 지칭하는 "파오차이(泡菜)"[22]를 쓰는 경우가 많다.

특히 2010년대 중반에 들어 한국의 사회문제를 홍콩 언론에서 보도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한국의 몰카 불법촬영 문제, 성별 갈등,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을 알게 된 사람이 많다. 또한 이 사회문제들을 가지고 한국인 전체를 싸잡아서 중국인과 국민성이 오십보백보라고 욕하는 행위가 빈과일보 페이스북 페이지 등에서 많이 보인다.

물론 여기엔 적지 않은 몰상식한 한국인 네티즌이 짱개 드립 등 제노포비아 발언을[23] 하면서 자초한 면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홍콩인들도 참지 못하고 한국인 네티즌들을 굉장히 싫어하게 되었고 한국 전체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졌다.

물론 편견에서 기인한 혐오이니 모든 홍콩인들이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홍콩은 불과 2000년대만 해도 한국인한테 일본인이냐고 물어보던 의외로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지역이다. 묻지마 혐한이라기 보단 몰지각한 사람들이 초래한 사태에 가깝다.

물론 대체로 홍콩인은 외국인에 우호적이고 친절한지라 대놓고 싫어하는 티는 안낸다. 사실 한국 네티즌들의 무지로 인한 무례한 태도, 예를 들면 홍콩인을 대륙인과 엮어 짱개 어쩌구 비하하면서 감정이 상한 경우들이 많다. 따져보면 19세기부터 영국령으로 외국 식민지를 겪은 곳으로, 독립국가도 아니었던데다 식민통치국 영국도 한국의 독립을 도운 우방국이라 굳이 적대관계가 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한국인은 태평양 전쟁때 일본인처럼 홍콩에서 행패를 부린 것도 아니다.

2019년 1월 14일에 홍콩의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한국 언론이 미세먼지의 원인을 중국 탓이라고 비난하는 보도하는 것을 비판했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영국령 홍콩 시절에 홍콩 내 영국인을 대상으로 창간된 영자신문으로 반중 성향이 강한 언론임에도 이런 문제는 중국편을 들고 있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의 경우 신빙성이나 공정성은 높은 언론이지만, 중국 국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전체주의적인 중국공산당에 비판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중국 본토에서는 차단되어 있다.[24] 물론 이 언론사는 주로 중국 문제를 보도하는 만큼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사실인 건 감안해야 한다. 참고로 서양에서 중국 소식을 접할 때 주로 참고하는 언론 중 하나로 중국 공산당의 검열을 대개 피해가는데다 영자신문이라 언어의 어려움이 없어서이다.


7. 기타[편집]


  • 홍콩에는 조선족들도 꽤 있다. 국공내전 때 이주한 조선족 말고도 최근 들어 대륙에서 건너오는 조선족들도 많다. 이들은 주로 한식당에서 설거지 및 배달 등의 잡일을 한다. 홍콩인들은 중국본토인의 일종으로 여기고 별로 안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정작 대한민국 본토 한국인들에게는 친근감을 느끼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 국공내전 후 이주한 한국예라 불리는 조선족 후손들은 대부분 홍콩화되어 영국식 영어광동어가 주요 언어이고 한국어를 못 한다.
  • 한국과 워킹홀리데이 협약이 체결되어 있는 국가[25] 중 하나가 홍콩이다. 그래서 정규 취업비자를 바로 얻지 못하면 일단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얻은 뒤 입사하여 스폰서쉽을 받고 정규 취업비자를 받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비자 변경을 하면 이미 검증이 된 사람이라 더 간단히 비자가 나온다. 캐나다호주 같은 동네의 워홀 프로그램이 반쯤 놀러 가는 비자라면 홍콩의 워홀 비자는 취업 비자를 위한 디딤돌 정도로 평가되는데, 영어와 중국어 중 하나 혹은 직종에 따라 둘 다 요구하는지라[26] 언어능력이 많이 요구되므로 공급에 비해 수요가 적어 경쟁률이 낮은 편이다. 비 중국계 외국인은 무조건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 곳이며, 특히 핵심 산업인 금융은 중국어가 잘 안쓰이는 업종이다.
  • 현재는 코로나19와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시위정국이 끝났지만 지난 2019년 하반기에 들어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응원적 차원의 교류가 잦아졌다. 원래 한국과의 관계도 좋았고 한류 등 한국문화도 인기를 많이 얻은 탓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본 사태에 대해 한국의 민주화 운동 역사가 홍콩에서 조명받기도 했다. 특히나 멀지 않은 과거인 2017년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대대적 저항이 일어나 당시 대통령이던 박근혜를 몰아낸 적도 있던 그런 나라가 한국이며 민간인권전선은 스스로 박근혜를 탄핵시킨 한국의 촛불시위가 대규모 저항 모티브이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들은 캐리 람을 박근혜에, 중국 공산당을 당시 한국의 집권당 새누리당에 동치시키며 한국을 본받자고 했다. 비록 홍콩 내에서 사업하는 한인 기업인들 등은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시위에 부정적이었지만 한국 내에선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이 홍콩을 응원하였고 이는 국가보안법 통과로 외국인의 시위 참여가 금지되기까지 계속되었다. 홍콩에서도 한국의 성의와 관심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한국 정계에서도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정혜영, 류호정 정의당 의원 더 나아가 정의당과 녹색당 전체가 당론으로 홍콩의 민주세력을 지지하는 선언을 한 적도 있다. 이 중 류호정은 가장 깊숙히 홍콩 민주진영과 관계를 갖고 있으며 조슈아 웡, 아그네스 초우 등과 공동으로 방송도 진행했다. 전술했듯 정의당은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Black Lives Matter)을 같이 지지한다. 홍콩 내 민주파도 서방주의 그룹이 아닌 구민주파는 BLM운동에 연대해서 미국 총영사관 앞에서 동조시위를 벌였다.
  •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개최할 경우 홍콩은 대한민국 바로 앞 순서에서 입장하는데 이는 홍콩이 한글 가나다순으로 나라들을 나열했을 때 ㅎ으로 시작해서 맨 뒤이기 때문이다. 차후 한국이 올림픽을 다시 개최하면 홍콩 다음에 차차기 개최국, 차기 개최국, 대한민국 순으로 입장하게 될 수도 있다.

8. 관련 문서[편집]



[1] 2019년 이후 뜻밖에 한국인 방문객의 출입국을 트집잡는 등 유례없던 적대행위를 홍콩 이민국이 자행했다. 홍콩은 90일 간 내에선 무비자체류가 가능하고 창업 등을 하는 스타트업을 하는 서양인이나 일본인들은 이 무비자로 상시 출입(Frequent Visitor)으로 등록 후 오래 사는 사람도 많은데 서양인/일본인은 아무 문제없는데 한국인만 심지어 단기 방문자도 너무 자주 온다 싶으면(...) 출입국에 트집을 잡았다. 한국인들은 이 트집 때문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엄청 고생했다. 이후 코로나19 신천지발 영남 집단감염 후 홍콩 이민국이 기자회견까지 열며 한국 국적자만 꼭 집어 망신주기식으로 입국금지를 먹여 한-홍콩 양측의 사이가 엄청 나빠졌다. 특별행정구와 외국 간 트러블은 외교/국방을 담당해주는 중국 중앙정부가 해결해줘야 하는데 중국도 한동안 코로나19 및 후폭풍 때문에 정신없다가 2020년 후반기에 들어 여유가 생기며 중재에 나서서 양측을 강제 화해시키고 그 결과 2020년 9월 홍콩 이민국/관광청이 한국 측에 트래블 버블로 자유여행을 재개하고 출입국 제한을 해제하기로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후 한국-홍콩 간 정부관계는 어쨌든 화해 국면으로 가는 듯 하다.[2] 현재는 제3당이자 진보정당인 정의당이 홍콩 민주파를 지지하고 있다. 정의당 초선의원 류호정조슈아 웡과도 친분이 있다.[3] 한국화교를 포함한다.[4] 이 중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유럽연합과 북한 간 중재 역할을 자처하기도 하며 북한 관련 유튜브 여행영상 업로더도 독일인이 많다. 스웨덴과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이라 말이 필요없고 되려 남북 간 충돌을 막는 중립국감시위원회 위원국가를 맡는 판이다.[5] 민간항공기 급유는 제재대상은 아니지만 과연 어떤 나라가 불량국가로 찍힌데다 실제로 핵 갖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의 국적기를 좋게 볼지 모르겠다.[6] 영국이 북한과 수교한 것은 냉전이 끝난 뒤인 2000년이다.홍콩이 영국령이었을 당시인 1970년대-1980년대는 냉전 시대로 중공을 포함한 공산 진영은 전부 영국의 적성국가로 간주해 영국 및 영국령 입국을 제한했다. 북한인 말고도 소련인들과 베트남인들도 이렇게 입국을 막았다.[7] 참고로 김정남은 해외를 오갈때 포르투갈 국적을 획득, 포르투갈 여권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추방당한 건 단지 김씨 일가라서였다고 보면 된다.[8] 물론 대만은 중국정부가 전혀 터치를 못하는 터라 한국으로 진입을 할 수는 있으나 중국으로 둘러싸인 곳으로부터 어떻게 한국으로 가는지도 문제이다.[9] 이들 국가들의 공식 입장 자체는 탈북자들을 인도적으로 대하는 것이나 엄연히 북한 공작원들이 활동하는 곳이라 완벽하게 안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몽골의 경우 북한에 꽤 우호적이라서 울란바토르에 북한인이 많고 북한 특무들도 대거 나가있다. 몽골은 과거 소련의 위성국가로 사실 상 소련 속국이나 다름없던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소련에 많이 진출한 북한인이 여기에 많이 들어왔다.[10] 동철선 로우역선전 지하철 1호선 뤄후역 사이의 도랑을 말한다.[11] 반공이라고 했는데 중국 공산당은 무늬만 공산당이지 국가자본주의 및 파시즘에 가깝다. 애초 2019년 시위 참가자들도 홍콩 독립운동 그룹이 아닌 민주파 계열 그룹들은 뜻밖에 반자본주의 구호를 들고 나왔으며 반공 쪽 투쟁으로 착각하고 이를 지지하던 한국 극우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반자본주의 구호에 당황해 모른 척 해버렸다. 이후에는 진보정당들이 민주파 홍콩인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해 다들 알다시피 정의당, 녹색당이 당론으로 홍콩 민주파와 미국 흑인 민권운동 등을 지지하는 입장을 펴고 있다.[12] 홍콩은 독립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안보는 곧 특별행정구의 치안을 뜻한다. 독립국이 아니니까 적국도 가상적국도 없다.[13] 홍콩의 물가 상승도 쇼핑의 매력이 과거보다 감소한 이유이기도 하다. 면세 국가임에도 국내에 입접한 브랜드와 가격적 매리트가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잘 비교해 보고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브랜드로 접근하는게 현명할 듯 하다.[14] 사실 홍콩과 마카오, 싱가포르는 그 특성상 남자보단 여자들이 주로 좋아한다. 술을 싸게 마실 수 있는 홍콩이 셋 중에선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편이다. 마카오는 카지노 갈 것이 아니라면 주로 야경이나 먹자여행 외에 할 게 없고, 싱가포르는 술 한잔 사먹을 때 마다 술값에 손이 떨린다.[15] 정확하진 않지만 단체 관광객이 대륙, 가족단위의 여행객이 대만 혹은 홍콩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표준중국어를 주로 쓰면 대륙이나 대만, 광동어영어를 주로 쓰면 홍콩인이고 표준중국어영어를 같이 쓰면 중국계 싱가포르인인 경우가 많다. 4월 진해 군항제 때는 서울보다 부산에 더 많은 홍콩인 관광객이 몰리는데 어느새 홍콩 내에서 진해가 벚꽃 명소로 쫙 소문이 퍼져버렸다.[16] 홍금보 역시 젊은 시절 한국에서 거주한 적이 있으며 첫번째 아내도 한국인이었다. 홍금보의 자녀들 모두 첫번째 아내 사이에서 낳았다.[17] 사실 성룡은 정치적 친중이라기보단 아시아주의자에 가깝다. 미국 활동을 오래 하고 LA에서 거주하기도 하면서 미국 내 은근한 인종차별에 질려버려 아시아주의자가 된 듯 하다. 친한과 함께 친일적 성향도 보인다. 애초 성룡은 말만 공산당원이다. 그는 미국 LA에 거주한 기간이 더 길고 그의 부친은 정작 중국 국민당 지지자였다. 공산당원임에도 종교도 심지어 갖고 있으며 무려 개신교 신자이다. 애초 성룡은 하나의 중국을 중시하는 중화사상가이지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진짜 멀며 하나의 중국을 깨는 게 싫어서 중국본토 편을 드는 것 뿐이다. 그는 민진당이 집권할 땐 대만에 가지도 않다가 마잉주 집권기 때 오랜만에 대만을 갔을 정도였다.[18] 대몽항쟁 및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대륙세의 고려 이후 대대적 침공은 주로 북방 기마민족이 저지른 짓이다.[19] 물론 한국기원설은 대부분 일본 극우들의 모함이라는 것을 홍콩인 대부분은 잘 알고 있다. 대륙인들과의 차이. 애초에 이런걸 진지하게 생각하는 한국인도 거의 없다.[20] 주로 홍콩섬 북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집안일 경우가 많다. 이쪽은 일찍이 영국화된 곳이다.[21] 홍콩은 아편전쟁 후 1842년 난징조약으로 영국령으로 넘어갔지만, 그 인구 다수 (대체로 70% 이상)는 1949년 공산화가 되고 나서 영국령으로 피난온 대륙인들이며, 홍콩 토박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1945년 인구 60만이었는데 1950년 230만으로 급등한다.[22] 한국인들이 중국을 비하할 때 "짱깨"라는 말을 쓰는 것과 비슷한 어감이다.[23] 물론 한국 네티즌이 본토인과 홍콩인을 구분하는 경우는 많지만, 한국 인터넷의 혐오표현은 반공·반독재와 제노포비아가 함께 얽혀있다.[24] 2015년에 이 신문은 알리바바 그룹의 회장이자, 중국 공산당 당원인 마윈이 인수했지만 그와 별개로 중국본토 내에선 못 보게 막는 중이다. 오히려 공산당원인 마윈 소유라서 차단 명분이 더 생기는 면도 있다.[25] 홍콩은 국가가 아니지만 협정서에는 '양국'이라는 표현이 나온다.[26] 한국인은 외국인이라 광동어를 배울 일이 없어 현지인을 자주 상대하는 직종은 보통 표준중국어를 요구한다. 물론 대세인 언어는 국제 공용어이자 홍콩의 상용어인 영어로 영어 능력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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