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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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KBO 리그
1986년 열린 프로야구 시즌.
팀당 108경기, 총 378경기를 치뤘다. 리그 최초의 신생 확장 구단이자 7번째 구단인 빙그레 이글스가 처음으로 선을 보인 시즌이었다. 충청지역 향토기업인 한국화약그룹이 모기업으로 나선 빙그레는 OB 베어스의 이탈 이후 비어있던 충청을 연고로 삼았다.
빙그레의 참여로 프로야구는 다시 서울/인천·경기·강원/충청/호남/대구·경북/부산·경남 등 제주를 제외한 전국 모든 권역에 연고팀을 맞이하는 호재가 생겼다. 그러나 홀수 구단 체제로 운영됐기 때문에 대진이 없어서 쉬는 팀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기형적 리그 구조는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1군 무대에 합류하기 직전 시즌인 1990년까지 이어졌다.
해태 타이거즈는 2년차지만 사실상 신인이었던 선동열이 0.99의 방어율을 가록하며 마운드를 굳게 지켰고 차동철, 김정수, 장채근, 이건열, 신동수, 김대현 등 대형 신인들이 대거 입단한데다가 김인식 전 동국대 감독과 박정일 코치를 영입하면서 우승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갖췄다.
해태의 한국시리즈 상대는 삼성 라이온즈. 당시 해태와 삼성은 비슷한 투타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방어율은 2.86대 2.95로 해태가 약간 앞섰지만 팀타율에서는 .274의 삼성이 .259의 해태보다 앞섰고 홈런수에서는 해태가 99개를 치며 74개의 삼성을 압도하는 장타력을 보여주었다. 길게 얘기할 것 없이 페넌트레이스에서 삼성은 득/실이 475/369, 해태는 474/372로 정말 용호상박의 전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팀간전적에서는 해태가 삼성에 11승1무6패의 우세를 보였다는 점, 그해 개인하이를 찍은 선동열의 존재와 삼성은 플레이오프를 거쳐 체력소모를 했기 때문에 해태의 우세가 점쳐졌다.
1985년 삼성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소멸이 일어나자, KBO 이사회는 1986년 1월에 다음과 같이 전년도의 제도를 수정했다.
그런데... 순위표에서 드러나듯 손을 좀 본 이 제도에도 문제점이 없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기리그 1위는 삼성, 후기리그 1위는 OB가 차지했지만, 전기리그 2위와 후기리그 2위는 해태가 차지했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후기는 두 팀이 공동 1위였는데, 당시에는 공동 1위가 나오는 경우는 3전 2선승제로 리그 우승 팀을 가린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래서 두 팀은 포스트시즌 대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우승결정전을 치렀고 여기서 해태가 져서 2위였다. 그래서 해태는 플레이오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MBC 청룡은 지난해의 부진을 딛고 김건우가 신인상을 수상하고 김용수가 구원왕으로 자리잡으며 단숨에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후기리그에서 후반기 줄곧 2위권을 지키며 플레이오프는 안정권으로 보였고 우승도 바라볼 수 있었으나 1위 해태와 3위 OB의 3연전에서 OB가 모두 가져가면서 꼬이기 시작했고, 결국 3위로 내려앉은 뒤 최종전에서 반드시 승리한 다음, OB가 롯데에 져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최종전에서 청룡이 해태에 승리했고, 롯데가 3년 연속 20승이 걸려있던 에이스 최동원을 앞세워 9회말이 시작할때까지 3:1로 이기고 있었으나 9회말 김형석이 터뜨린 극적인 동점 홈런과[2] 롯데 야수진의 끝내기 실책이 나오면서 OB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해 꼴찌는 청보 핀토스가 아닌 빙그레 이글스였다. 당연히 1년차 신생팀이었기 때문. 하지만 그 빙그레를 누른 청보도 성적은 처참했다. 바로 이 해의 감독이허구라허구연이었던 것. 40도 안 된 초보 감독인지라 엄청난 부진에 빠졌고 결국 5월 11일, 해외 유학을 이유로 강태정 수석코치에게 잠시 감독 대행을 맡겼고 후기리그가 시작되자 미자 돌아왔으나 7승 2무 17패를 기록하며 씁쓸하게 물러났다. 그래서 인천팬들 사이에 "허구헌날 지는 허구연"이란 드립이 한때 유행하기도... 어쨌든 이 두 팀 때문에 엄청난 승률 인플레가 일어났다. 뭐 그 시절엔 전력차가 심했던지라 흔한 일이었지만. 승률 3할 5푼 미만의 팀이 2팀이나 된 유일한 시즌인데 34년 뒤인 2020년 청보의 연고지 인천을 연고로 하는 SK 와이번스와 같은 대전 연고에 빙그레의 후신인 한화 이글스에 의해 재현되어 극심한 리그 승률 인플레에 기여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 시즌은 최악의 투고타저를 자랑한 시즌으로 리그 평균자책점이 3.03에 불과했다.
이하 실제로 수상이 이루어지는 1위 타이틀은 굵게 표시한다.
순서는 '단일 시즌 기록' - '개인 통산 기록' - '개인 통산 O년 연속 기록' - '구단 통산 기록' - 'KBO 역대 기록' 순이다.
'구단 통산 기록'의 경우 타이틀 홀더 수상이 이뤄지는 부문에 한해 기록한다.
'피-'의 경우 -개, 그외의 기록은 '-홈런, -안타' 등으로 기재.
한국프로야구/1987년/신인드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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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6년 열린 프로야구 시즌.
팀당 108경기, 총 378경기를 치뤘다. 리그 최초의 신생 확장 구단이자 7번째 구단인 빙그레 이글스가 처음으로 선을 보인 시즌이었다. 충청지역 향토기업인 한국화약그룹이 모기업으로 나선 빙그레는 OB 베어스의 이탈 이후 비어있던 충청을 연고로 삼았다.
빙그레의 참여로 프로야구는 다시 서울/인천·경기·강원/충청/호남/대구·경북/부산·경남 등 제주를 제외한 전국 모든 권역에 연고팀을 맞이하는 호재가 생겼다. 그러나 홀수 구단 체제로 운영됐기 때문에 대진이 없어서 쉬는 팀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기형적 리그 구조는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1군 무대에 합류하기 직전 시즌인 1990년까지 이어졌다.
해태 타이거즈는 2년차지만 사실상 신인이었던 선동열이 0.99의 방어율을 가록하며 마운드를 굳게 지켰고 차동철, 김정수, 장채근, 이건열, 신동수, 김대현 등 대형 신인들이 대거 입단한데다가 김인식 전 동국대 감독과 박정일 코치를 영입하면서 우승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갖췄다.
해태의 한국시리즈 상대는 삼성 라이온즈. 당시 해태와 삼성은 비슷한 투타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방어율은 2.86대 2.95로 해태가 약간 앞섰지만 팀타율에서는 .274의 삼성이 .259의 해태보다 앞섰고 홈런수에서는 해태가 99개를 치며 74개의 삼성을 압도하는 장타력을 보여주었다. 길게 얘기할 것 없이 페넌트레이스에서 삼성은 득/실이 475/369, 해태는 474/372로 정말 용호상박의 전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팀간전적에서는 해태가 삼성에 11승1무6패의 우세를 보였다는 점, 그해 개인하이를 찍은 선동열의 존재와 삼성은 플레이오프를 거쳐 체력소모를 했기 때문에 해태의 우세가 점쳐졌다.
1.1. 플레이오프 제도 수정[편집]
1985년 삼성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소멸이 일어나자, KBO 이사회는 1986년 1월에 다음과 같이 전년도의 제도를 수정했다.
- 전기 1,2위와 후기 1,2위 팀에게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부여.
- 한 팀이 전후기 모두 2위 안에 들면 한국시리즈 직행
- 한 팀이 전후기 중 한 번만 2위 안에 들면 플레이오프 진출
- 포스트시즌 진출 팀이 네 팀이면 전기 1위와 후기 2위, 전기 2위와 후기 1위 간의 5전 3선승 플레이오프 후 한국시리즈 실시.
그런데... 순위표에서 드러나듯 손을 좀 본 이 제도에도 문제점이 없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2. 정규시즌 최종순위[편집]
전기리그 1위는 삼성, 후기리그 1위는 OB가 차지했지만, 전기리그 2위와 후기리그 2위는 해태가 차지했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후기는 두 팀이 공동 1위였는데, 당시에는 공동 1위가 나오는 경우는 3전 2선승제로 리그 우승 팀을 가린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래서 두 팀은 포스트시즌 대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우승결정전을 치렀고 여기서 해태가 져서 2위였다. 그래서 해태는 플레이오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MBC 청룡은 지난해의 부진을 딛고 김건우가 신인상을 수상하고 김용수가 구원왕으로 자리잡으며 단숨에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후기리그에서 후반기 줄곧 2위권을 지키며 플레이오프는 안정권으로 보였고 우승도 바라볼 수 있었으나 1위 해태와 3위 OB의 3연전에서 OB가 모두 가져가면서 꼬이기 시작했고, 결국 3위로 내려앉은 뒤 최종전에서 반드시 승리한 다음, OB가 롯데에 져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최종전에서 청룡이 해태에 승리했고, 롯데가 3년 연속 20승이 걸려있던 에이스 최동원을 앞세워 9회말이 시작할때까지 3:1로 이기고 있었으나 9회말 김형석이 터뜨린 극적인 동점 홈런과[2] 롯데 야수진의 끝내기 실책이 나오면서 OB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해 꼴찌는 청보 핀토스가 아닌 빙그레 이글스였다. 당연히 1년차 신생팀이었기 때문. 하지만 그 빙그레를 누른 청보도 성적은 처참했다. 바로 이 해의 감독이
여담으로 이 시즌은 최악의 투고타저를 자랑한 시즌으로 리그 평균자책점이 3.03에 불과했다.
3. 시즌 최종과 시즌 마감[편집]
3.1. 정규 시즌 기록 1위[편집]
이하 실제로 수상이 이루어지는 1위 타이틀은 굵게 표시한다.
순서는 '단일 시즌 기록' - '개인 통산 기록' - '개인 통산 O년 연속 기록' - '구단 통산 기록' - 'KBO 역대 기록' 순이다.
'구단 통산 기록'의 경우 타이틀 홀더 수상이 이뤄지는 부문에 한해 기록한다.
'피-'의 경우 -개, 그외의 기록은 '-홈런, -안타' 등으로 기재.
3.1.1. 타자, 공격[편집]
3.1.2. 투수, 수비[편집]
4. 신인드래프트[편집]
한국프로야구/1987년/신인드래프트
5. 포스트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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