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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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원자력연구원
韓國原子力開發院
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 (KAERI)

파일:한국원자력연구원 CI.svg
설립일
1959년 2월 3일
원장
주한규[1]
주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덕대로989번길 111 (덕진동)
주무기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형태
기타공공기관(정부출연연구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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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연혁
3. 사건사고



1. 개요[편집]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원자력의 연구개발을 종합적으로 수행하여 학술의 진보, 에너지 확보 및 원자력의 이용 촉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영어 명칭은 KAERI (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2]이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덕연구개발특구에 본원이 위치해 있으며 정읍[3]과 경주[4]에 분원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 한국 안보와 여러 기술 등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 국가중요시설 '가' 등급으로 지정되어져 있다.[5]

1959년 원자력 기술을 통한 에너지 자립을 목표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연구기관이다. KIST보다도 6년이나 더 앞서서 설립되었고 심지어 이승만이 있던 제1공화국 시절이다.[6]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보충지식이 필요한데, 2020년 현재의 통념과 다르게 한국은 1950년대 전쟁까지 겪은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에도 의외로 원자력에 대한 호감 내지 열망이 굉장히 높았다. 당장 10여 년 전 일본이 핵을 얻어맞고 패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본 데다가, 전쟁 직후 남북이 극한대치하는 상황까지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2차대전 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핵물리학 연구와 유카와 히데키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등에도 자극을 받은 면도 있다.

그러나 핵무기 자체는 미군이 1953년 전쟁 직후부터 한반도에 들여와 이미 배치하고 있었기에, 국가 자체적으로 핵무장론이 대두되고(물론 이는 당시 국가 역량으론 어림도 없는 소리였고) 나아가 원자력 운용에 대한 과학력 그 자체를 보유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연구원'으로 검색해보면 원자력 관련 연구기관 동향이 꾸준히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48년에는 "호주도 원자연구소를 설립했다"라는 단신이 실리기도 했고[7] 1954년에는 전쟁 직후임에도 동아일보에 한국도 원자력연구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기고가 지면 중 4단씩이나 할애하여 게재되기도 했다.[8] 참고로 1954년 이 해에는 원자력 관련 두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물리학자 페르미의 사망이고 두 번째는 이웃나라 일본에서 나카소네 의원이 예산항목에 핵 관련 비목을 편성해버린 사건이다. 한국 정부에게는 이것이 실질적 위협으로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를 직접 설계 및 운영하고 있으며[9] 부산 기장군에도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 중이다. 그리고 요르단에 연구용 원자로 JRTR을 수출했다.

한국전력기술의 원자로설계개발단은 한국원자력연구원 내부 (2연구동, 5연구동, 발전로설계동)에 있다.[10]

한전원자력연료의 본사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바로 옆에 붙어있다.[11]

대전 지역에 비행금지구역이 있는 이유는 계룡대가 아니라 여기 때문이다. 기사


2. 연혁[편집]


  • 1959.02.03 원자력연구소 설립(서울 노원구 홍릉 국립연구소)
  • 1962.03.19 TRIGA-Mark2 준공
  • 1972.05.10 TRIGA-Mark3 준공
  • 1973.02.17 한국원자력연구소 발족(정부출연 연구소) - 원자력연구소, 방사선의학연구소, 방사선농학연구소 통합
  • 1975.11.03 대덕분소 센터 기공식(충남 대덕구 탄동면 덕진리 제2연구단지)
  • 1976.12.01 한국핵연료개발공단 발족
  • 1990.02.15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분리독립
  • 1990.09.01 방사선 폐기물 관리 부설인 원자력환경관리센터 발족
  • 1994.10.01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HANARO) 설계 및 건설
  • 1995.01.10 연구용 원자로 TRIGA-Mark2 보존 및 TRIGA-Mark3 퇴역[12](서울 노원구 공릉동)
  • 1995.04.07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HANARO) 가동
  • 2004.10.25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분리독립
  • 2006.09.29 정읍 방사선과학연구소 개소
  • 2007.03.27 한국원자력의학원 분리독립
  • 2013.01.01 경주 양성자가속기연구센터 운영시작


3. 사건사고[편집]


  • 2018년 5월 9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보도자료를 발표하였고 과거에 가동을 했던 서울연구로(트리가 마크 2,3) 해체 및 제염작업과정에서 생기는 납폐기물, 등을 34톤의 절취처분하였다는 무단혐의로 조사를 하였다고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밝혔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이번 사건으로 재발방지를 촉구를 하였다.

  • 2018년 11월 19일 화학분석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히도 방사능 유출은 없었고, 화재를 진압하다 연기를 마신 연구원들은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2019년 12월에는 블라인드 채용으로 모집한 신규 정규직 중에서, 신원조회 단계에서 중국 국적 재외동포[13]가 한국원자력연구원에 합격한 사실이 알려져 기술보안 관련 논란이 일어났다.# 중국인 유학생 등등을 통해 기술을 빼돌리는 중국 공산당의 공작이 엄연히 존재하는만큼, 극도의 보안을 필요로 하는 국내 국책연구기관에 중국인을 채용했다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당사자는 엄연히 원내 합불합 판정기준을 충족하여 합격한 것이며 원내에서도 보안이 필요한 부분은 내, 외국인 막론하고 관계자 이외에는 출입 자체를 통제하며 정보 유출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며 보안 침해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입장을 밝혔다. # 그러나 당시 면접이 원내에서 이루어졌고, 외국인이 출입하기 위해서는 외국인 전용 사전출입신청 절차를 거쳐야 함을 감안하면 최종 단계까지 합격자의 국적을 몰랐다는 발표를 믿기는 어렵다. 결국 2020년 2월에 해당자는 최종 불합격 처리되었으며 연구원의 채용방침도 완전 블라인드 채용제에서 최소한 국적은 표기하도록 하는 방식 등으로 채용절차가 수정되었다고.#

  • 2020년 1월 22일 원자력연구원 내 일부 시설에서 소량의 방사성물질인 세슘-137, 세슘-134, 코발트-60이 누출돼 연구원 부근의 덕진천 일대 토양시료에서 검출되었다. 2019년 12월 30일 정기검사를 위해 토양시료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방사성물질이 검출된 것이 확인되어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사건 조사에 착수했고,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에서 사고조사팀을 급파하여 조사한 결과 원자력연구원이 매년 470~480L씩 30년 동안 총 14,000리터의 방사성 폐기물을 하천으로 누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2021년 6월 18일 하태경 의원은 북한 해커조직 '김수키'에 의해 원자력연구원이 해킹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기사 또한 이 과정에서 원자력연구원이 은폐 시도를 하였다고 한다. 17일 동안 해킹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며, 해킹당했다는 통보를 받고 나서도 이틀 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

[1]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교수, 윤석열 대통령 대선캠프 정책총괄본부 원자력정책분과위원장 역임.[2] 약칭은 "캐리" 또는 "카에리"라고 발음한다. 특히 한국전기연구원의 약칭이 KERI (Korea Electrotechnology Research Institute)이고, "케리"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한국전기연구원 사람들이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캐리"라고 발음하는 대신 "카에리"로 발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KAERI를 절대다수가 "캐리"라고 발음하고 있다.[3] 전라북도 정읍시 금구길 29[4]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미래로 181 (화천리)[5] 이 '가' 등급은 대한민국 3부요인을 구성하는 중심 관청인 국회의사당, 대통령실, 대법원과 같은 등급이다.[6] 물론 오래 묵은 것으로만 치자면 1948년 출범한 건설기술연구소(당시 명칭)도 있긴 한데 이는 사실 내무부 산하 토목시험소로 출범한거라...[7] 당시는 물자의 부족 등으로 신문이 불과 4~8면 정도만 발행되던 시절로, 단신이라고 해도 반드시 실어야 할 만한 중요한 기사만 실렸다.[8] 여담으로 이러한 원자력에 대한 관심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는데, 소련이나 중국 등의 직접 영향으로 동시에터 이미 원자력을 핵무기로 쓰려는 연구에 국가역량을 투입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시기 핵물리학 연구에 투입된 김일성대학 66학번은 저주받은 학번이라고 불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피폭에 노출된 나머지 제대로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국과 북한의 결정적인 차이는 핵을 무기로 쓰는 연구를 했는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까지 범용적 목적의 연구를 했는가이다.[9] 방사성의약품, 반도체, 기초과학 연구 등에 활용됨[10] https://www.kepco-enc.com/portal/contents.do?key=1491 참고[11] https://www.knfc.co.kr/board?menuId=MENU00325&siteId=null 참고[12] 1995.01.09까지 가동중단[13] KAIST에서 기계공학으로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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