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 건축의 장단점

덤프버전 : r20180326


파일:external/pbs.twimg.com/BRxsXubCAAETmvN.jpg
1. 개요
2. 상세
2.1. 장점
2.2. 단점
2.2.1. 단점의 보완
2.2.1.1. 지붕
2.2.1.2. 단열
2.2.1.3. 공사비용
3. 오해/낭설
3.1. 경복궁의 크기는 자금성보다 훨씬 작다?
3.2. 2층 주택
3.3. 기와처마끝 수키와의 회칠
3.4. 석조건축의 부재
3.4.1. 벽돌의 사용





1. 개요[편집]


한옥에 대한 많은 장점이 소개되지만, 분명하게 단점이나 논쟁점도 존재한다. 상세히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2. 상세[편집]



2.1. 장점[편집]


  • 온돌과 들문 등으로 기온차를 극복하고 있다. 다만 우리 상식과는 달리 온돌은 통념보다 늦은 조선 후기에 일반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온돌의 기원 자체는 길게 보면 선사시대며, 최소한 고구려 시대에는 온돌의 초기 형태가 발견된다.

  • 뼈대인 목재가 자정작용을 하여 실내의 습도와 온도, 기온등을 조절해 주어, 쾌적한 주거환경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 기단이 높아 땅으로부터 습기와 동결현상을 피할 수 있다.

  • 황토와 짚의 구성이 사람의 건강에 이롭다.


2.2. 단점[편집]


  • 재료나 양식이 다양하지 않아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지 못하고 중국 건축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2]

  • 국가적으로 검약을 매우 강조한 조선왕조 500년의 영향으로 다른 나라 건축에 비해 시선을 끄는 화려함이 부족하다.[3] 흔히 '소박하다', '단아하다' 등으로 표현되는데, 물론 이는 오히려 취향에 따라 장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인간은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쪽이 더 많으므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전통 건축의 단점으로 흔히 꼽힌다.

  • 구조적인 취약점이 많다.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전통 목구조는 기둥에 보를 쌓아 만드는 대량식 구조로 축부에 보강재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면 건물이 커질 수록 지붕도 커져 하중이 증가하기 때문에 충분한 크기의 목재가 없으면 큰 건물을 만들기 힘들다. 금산사 미륵전은 여러부재를 짜맞추어 큰 쌍 기둥을 만들었으나, 시간이 흘러 재기능을 하지 못해 지금은 별도의 쇠기둥을 설치해 하중을 버티고 있다. 그리고 목재간 연결에 금속을 잘 쓰지 않고[4], 축부에 보강재가 없어 연결부위가 취약하다. 이 때문에 지진으로 건물이 좌우로 흔들리면 쉽게 붕괴된다. 이미 이웃 일본에서 고베대지진으로 이런 한계가 드러난 바 있으며, 이번 경주지진에서도드러났다.

  • 건물의 크기에 비해 실내가 좁고, 기둥이 전부 하중을 받기 때문에 구조변경이나 확장 등이 어렵다.

  • 서까래 위에 흙과 기와를 올려 지붕이 무겁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기둥과 보에 변형이 생기고 건물의 수명이 줄어든다. 게다가 흙의 수분이 그대로 목재에 스며들어 목재가 빨리 부식된다. 문화재 복원에 참여한 신응수[5], 신영훈[6] 등 다수의 전문가들도 지적하는 문제다. 이 역시 일본 고베대지진에서 전통 목조건축의 취약점으로 드러난 바 있다. 기와 대신 나무널을 얹는 너와집[7]이나, 풀을 엮어 올리는 초가집, 굴피나무 껍질을 얹는 굴피집의 경우 무게를 기와집보다는 줄일 수 있지만 유기질이기 때문에 화재에 약하고 수명이 짧아 주기적으로 바꿔야 하며, 굴피집의 경우 공기 중 습도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하여 건조한 겨울에는 단열이 잘 안된다. 초가지붕은 기와지붕보다 평상시에는 가볍지만, 폭우 및 폭설이 쏟아지면 짚이 물기를 흡수하여 더 무거워진다.

  • 황토와 짚으로 구성된 벽은, 스티로폼이나 유리섬유보다 단열성능이 떨어진다. 이미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전통건축에도 단열재를 넣고 현대식 냉난방과 환풍시설을 갖추는 추세이나, 한옥에서는 도입이 늦다.

  • 시공단가가 비싸다. 어느 건축물이든 마찬가지지만, 한옥은 손이 많이가 건축기일이 많이 소요되고, 인건비가 많이 지출되는 등[8] 전체적으로 시공비가 일반 건축물보다 비싸 주로 관용이나 공용 성격의 건축물로 시공되는 편이다.


2.2.1. 단점의 보완[편집]



2.2.1.1. 지붕[편집]


파일:external/cfs9.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DhBQ3JAZnM5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IyLzIyMDIuanBn&filename=2202.jpg

파일:external/cfs9.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DhBQ3JAZnM5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IyLzIyMDMuanBn&filename=2203.jpg

최근에는 지붕에 흙을 올리지 않고 방수지를 두르는 건식 시공법을 도입하고 있다. 그와 함께 기존 기와 대신 무게가 훨씬 가벼운 동(銅)기와를 쓰기 시작했다. 특히 월정사나 상원사 같은 강원도 사찰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9]

또한 동기와는 부식 및 산화에 매우 강해 수백 년이 지나도 손상이 적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리는 탄력성 및 복원성이 매우 우수하여 비와 눈,추위, 더위 등에 의한 파손과 균열에 강하다. 일반 기와를 쓰면 날씨 때문에 기와가 깨져 매년 갈아야 하지만, 동기와를 쓰면 그런 번거로움이 줄어든다.


2.2.1.2. 단열[편집]


파일:14040712290162.jpg
파일:문경한옥1.jpg[10]]
파일:사본_-IMG_2625.jpg

최근에는 흙벽과, 흙단열 대신 스프레이폼이나, 유리섬유 단열재가 도입되었다.
물론 황토 선호가 아직도 많기 때문에 흔한 풍경은 아니다.


2.2.1.3. 공사비용[편집]



기사"한옥 3D설계, 첨단과 만난 한옥"
공장에서 미리 가공해서 현장에서는 조립만하는 일본식 프리컷 공법이 한옥에도 도입되었다. 비용절감이 확실하기 때문에 상당히 자주 쓰이고 있다. 유튜브등에서 한옥과 프리컷으로 검색하면 여러 시공업체를 찾아볼 수 있다.


3. 오해/낭설[편집]



3.1. 경복궁의 크기는 자금성보다 훨씬 작다?[편집]


'경복궁의 크기는 자금성 화장실 만 하다.'는 괴설이 나돌고 있다.

파일:attachment/forbidden_and_gyeongbok.jpg
파일:external/i2.wp.com/%EA%B2%BD%EB%B3%B5%EA%B6%81%2BVS%2B%EC%9E%90%EA%B8%88%EC%84%B1.jpg
파일:external/fa608642f49052457d7abccd89554c8cf0ed684c09adc45d1c401d21950f66d9.jpg

중국한국 사이에 관광객이 오가면서 나온 논란으로, 자금성에 비하면 궁궐이 초라하다는 것이다. 심하게는 경복궁이 자금성의 화장실 정도 크기(?)라는 황당한 말까지 나올 정도다. 하지만 위의 같은 축척의 크기 비교 사진을 보면 경복궁이 그렇게까지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했을 때 물론 그 스케일이 작다. 실제로 규모 면에서 경복궁은 14만 평(46만여 제곱미터)으로 자금성 24만평(79만 제곱미터)의 약 60퍼센트 규모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면적이 넓거나 크기가 크다고 해서 더 훌륭하고 우월하다는 생각 자체가 매우 유치하다는 것이다. 단순한 크기에 집착해서 내가 우월하니 네가 뒤쳐지니 하는 유치한 생각은 버리자. 북한은 얼마나 크고 웅장한가?[11] 과연 건축물의 크기가 그 문명의 수준을 나타내는가? 물론 아니다. 애당초 경복궁은 50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 현재에도 동북아에서 자금성 다음으로 2번째로 큰 궁궐이다. 즉, 자금성 하고만 비교 하였을 때 상대적으로 더 작을 뿐 이라는 것이다. 애당초 이것은 자금성이 현존하는 전세계 최대 규모의 궁궐인 탓에 그런 것이지만..

또한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전의 경복궁은 자금성보다 수십 년 먼저 지어졌기에 열화된 모방이 아니며, 조선은 개국 당시부터 작은 정부 검소함을 지향하는 왕도 정치를 표방했기 때문에 궁궐의 장식이나 규모에서도 검소함을 지향했고 균형미와 조화로움도 추구했기 때문에 단순한 면적과 전각의 수로만 비교하기 어렵다.

또한 경복궁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한국 고유의 궁궐 건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만의 개성으로 나타나는 단청의 색과 문양, 창덕궁만큼은 아니지만 경직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 등은 북악산과 이루는 조화를 통해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보여주고 있다. 규모로 따질 수 없는 고유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명확하며 그 완성도도 수준급이다. 단순히 규모로만 아름다움을 따지기에는 경복궁이 가지고 있는 세세한 아름다움이 매우 많다.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인 것이다.

또한 인구가 중국의 5%가 채 안 되었던 국가의 궁궐이 자금성 만큼 호화스럽고 컸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애초에 전 세계 총 생산의 30%를 차지하던, 지금으로 상정하면 미국 정도의 국력을 지닌 의 궁궐과 조선의 궁궐을 비교하는것 자체가 무리수이다. 같은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의 고궁인 일본의 평성궁이나 교토고쇼, 베트남후에 황궁과 비교해도 경복궁은 면적이나 개별 건축면에서 더 크면 컸지 떨어지진 않는다.

여담으로, 자금성 내에 경복궁이라는 이름의 전각이 실제로 존재한다. 한자까지 똑같다. 위치는 자금성 내 동북쪽 가장자리. 관련 포스팅
한편 베트남 후에 황궁 안에는 '자금성'이라는 이름의 구역이 실제로 있다. 참고로 한자까지 똑같다. 오오 이거슨 월남의 기상! 오오

더 자세한 사항은 경복궁해당 항목을 참조

3.2. 2층 주택[편집]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 초까지만 해도 2층 가옥이 흔했다. 이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세종대왕이 침실로 쓰는 2층 이상의 집을 의미하는 침루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으며, 고려시대로 가면 이러한 루가 보편적이었다는 기록이 많다. 2층 건물의 규모를 늘려 찻집이나 술집 등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온돌이 보급되고 난 이후에는 난방에 취약하고 온돌설치가 어려운 2층가옥보다 1층 가옥이 선호되어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기술적으로 2층으로 만드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아, 고궁 내 건축물들 중에는 다층건물을 상당 수 발견할 수 있으며[12] , 일부 사찰이나[13] 수원 화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Juhamnu%2C_Changdeokgung_-_Seoul%2C_Korea.jpg
창덕궁 주합루의 모습. 원래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 2층은 열람실인 주합루이나, 현재는 주로 건물 전체를 주합루로 부른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109047_STD.jpg
경상북도 김천시 소재의 유형문화재인 방초정. 가운데 온돌방이 있는 2층 구조다.

파일:external/doopedia.co.kr/48570.jpg
덕수궁 석어당. 역시 2층.

파일:external/www.subkorea.com/hgb015.jpg
북한 종성읍성의 수항루. 이건 아예 3층이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84723_STD.jpg
백련사 만경루. 비탈길에 지어 앞에서 보면 2층 건물이란 게 보이지만,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 건물처럼 보인다. 가운데 길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밖의 2층 건물들 사진 링크 경복궁 향원정, 구례 운조루, 남산골 한옥마을 안동김씨 태장재사 이상루,용주사 천보루, 의성김씨 서지재사, 그 외 17세기 다층 한옥 관련 포스팅

그리고 누각의 구조는 대부분 바닥에서 들어올려진 형태인데,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 벽만 쌓으면 사실상 2층이다. 또한 법주사 팔상전 등을 보면 기술이 부족해서라는 해석은 근거가 없다.또한 조선 세종 때의 가사제한령(家舍制限令)에 의해서 법적으로 주택을 장식하거나 크게 짓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서 그러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에 따라서 조선 태종 이후 생긴 경향을 세종이 이어받는 것이다.[14] 여러 기록들을 보면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2층 살림집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글루스의 관련 글 참조.


3.3. 기와처마끝 수키와의 회칠[편집]


파일:external/60ddbdc96eb229997acd028367d20e7b05889369ba9c6e2c6a61f7542b297399.jpg
일단 흰색 회칠 때문에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그게 시멘트로 바른 것으로 오해하는데 시멘트가 아니라 회칠마감이다.[15] 이렇게 용마루나 막새 등에 흰 회반죽을 칠하면 단순히 기와를 쌓아 만드는 것보다 바람에 더 강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태풍이 한국보다 더 잦은 일본에선 회반죽 안 써도 용마루가 멀쩡한 것을 보면 그다지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실 이건 꼭 전통 건축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원래 막새라는 끝에 있어야 할 기와나 치미장식이 없기 때문인데 막새 대신 회칠을 하는 경우가 1970~80년대 이후부터 보인다는 것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기와를 그냥 올려놓으면 놓았지 딱히 흰 회칠이 보이도록 마감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막새가 없는 이유는 신라 때부터 신분에 따라서 쓸 수 있는 장식과 집의 크기 등을 자세하게 규정했는데, 이게 조선에도 적용되어 궁궐이나 사찰을 제외하고는 단청이나 막새, 치미, 다듬은 돌 등을 쓰지 못하게 제한했기 때문이다. 가난하거나 미적 감각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회칠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한국의 회칠을 시멘트를 발라놨다고 오해한다. 사실 한국인들도 오해한다..


3.4. 석조건축의 부재[편집]


한국의 역사적 건물들은 대부분 목조건물인지라 전란으로 불타고 무너지고,(안학궁, 미륵사, 황룡사 등) 방치되면 목재가 썩어 붕괴되기 때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고작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이라 피라미드나 콜로세움, 파르테논 같은 것들과 비교해 관광 자원으로서의 건축 유산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한옥은 나무만 쓰는 게 아니라 뼈대만 나무로 한다. 다양한 돌과 여러 흙과 복합재를 섞어 만든 일종의 시멘트를 사용해[16] 축대를 쌓고 벽은 현대 철근 콘크리트처럼 井자 형태로 여러 차례 엮은 골조에다 진흙을 발라 만들고 바닥에 온돌과 흙을 깔아 만든다.

더불어 한국은 목재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듬은 돌이나 벽돌로 아치의 원리를 이용해 다리를 짓고 성을 쌓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건축을 보여주지는 못했으며 이정도의 석조 활용은 석조가 발달하지 못한 다른 문명에서도 흔히 쓰인다(필리핀 만다나오섬에도 석조아치는 쓰인다. 인류의 보편적 지식이지 이것이 뛰어난 석조기술의 증거가 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주로 생산되는 돌이 주철보다 경도가 거의 2배인 HS)70~80의 화강암으로, 가공하기 어려워 유럽이나 이집트같은 정교한 석조건축물을 짓기 힘들었다는 변명은 국뽕들의 단골 변명거리이다. 서양에서도 화강암으로도 뛰어난 건축을 했음에도 대리석 타령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나라에도 대리석이 있었으면 콜로세움이나 바티칸 성당 같은것이 만들어 졌을 것이라 보는가? 화강암 건축인 이집트의 피라미드 및 오벨리스크 같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기술의 미발달을 환경 탓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다.

동양건축에 석조가 발달하지 못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동아시아는 일찍이 목재로 거대한 건물을 짓는 방법을 터득하여 석조로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필요가 없었으며 목조가 노동력, 시간, 재료 측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2. 동양은 서양과 달리 석조건축을 필요로하는 '신전' 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3. 동양건축은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한시적이고 비영구적 건축을 추구한다.

"1000년을 지속하는 집을 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100년후에 누가 살게 될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조화를 이룬 한정한 집에 이를 감싸는 즐겁고 안락한 장소면 충분하다"

-

계성(명나라 시대 건축가)


4. 목재건축은 각종 대들보에서 부재에 이르기까지 조화와 비례가 석조에 비해 섬세하므로 곡선미를 추구하는 동양건축에 알맞다.


3.4.1. 벽돌의 사용[편집]


알고 보면 의외로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벽돌의 사용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자주 나오고, 수원화성 이전에 전축성 건설도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벽돌 사용이 많았던 삼국시대에도 벽돌의 사용은 국영사찰의 장식 벽돌이거나, 일부 성곽과 백제의 남조식 무덤 등의 국가의 지원을 받아 건축되고 관리되는 건물들이었다. 사용 빈도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선시대에 현격하게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 벽돌 사용이 중국처럼 많지 못했던 이유는

(1) 조선의 토질상 중국 화북 지역만큼 낮은 온도에도 벽돌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아# 조선 후기 중국식의 벽돌 제작 전용 원추형 가마 도입 전까지 좋은 벽돌 만들기가 힘들었고

(2) 대륙성 기후인 중국 화북 지역보다 습기가 많아 벽돌이 흙에 잘 붙지 않았고[17][18]

(3) 벽돌과 관련된 상공업 발전이 부진해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19]

비록 조선 후기에 들어 중국 건축의 영향과 국가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벽돌이 보급되기는 했지만, 담장이나 기단을 만들 때나 종묘처럼 조선 후기에 등장한 화방벽을 만들 때 종종 사용되는 정도였지만 이조차도 민간에서는 일정 크기의 자연석들을 수집해 적당히 가공한 후 빈틈을 흙으로 마감하는 수준이었고, 왕실 건축에서나 제한적으로 벽돌을 구워 시공하는 특수제작의 성격을 띄었기에 때문에 벽돌이 사용되었다는 정도의 의의만을 가질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벽돌이 완전히 대중화된 것은 관련 기술과 자본이 들어온 개화기~일제 강점기부터였다.

[1] "조금도 중국 본계의 양식을 이탈함이 없으나 또한 향토색의 수이(殊異)를 따라 다소 상위(相違)함이 있다. 일례를 들면 지붕의 곡선이 중국의 그것보다는 완만하여졌고 일본의 그것보다는 굴곡 있어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향토색을 구비한 조선 건축이 타방인국(他方隣國)에도 영향함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또 중국의 그것과 다른 독창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 건축은 중국 양식의 일퇴화(一退化)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조선은 중국의 양식을 전부 포괄하여 그것을 변형시키지 못하고 다만 조선의 힘이 자라는 한에서 그를 섭취하고 말았다. 이것이 조선 건축의 동양에 있어서의 지위다." - 고유섭, 조선건축미술사[2] 참고로 이 고유섭(1905~1944)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미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선구자로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참조.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 이런 평가를 내릴 정도면...[3] 그 이전 시대에는 불교와 귀족 문화의 영향으로 금입택, 황룡사, 흥왕사 등 중국 일본 뺨치는 화려하고 장대한 건축도 있었다. 안압지에서 각종 금동 건축자재들이 출토되기도 했다.[4] 파일:external/cfs13.blog.daum.net/483135eb91074&filename=%EC%82%AC%EC%A7%84391.jpg 사용하긴 한다. 지붕 상단에 달린 지네모양 금속부착물이 지네철. 지네철을 사용하지 않을때는 건물 외부에 처마를 받치는 보조기둥을 쓰거나, 건물 안쪽에 강다리라는 나무 고정장치를 쓰거나 돌을 끼워 눌러 고정시킨다. 그런데 나머지는 대부분 문에 다는 돌쩌귀나 문고리, 아니면 건축물이 완성된 후 겉에 다는 장식성이 강한 철물 일부 정도다.[5] 경복궁 근정전 등 각종 문화재 공사를 맡아온 대목장[6] 파리 고암서방 및 충북 진천 보탑사 등 다양한 문화재 복원에 참여[7] 돌너와집 제외. 해당 항목 참조[8] 인건비와 마진율이 논란이 되는데, 한옥시장 자체가 협소하다보니 정확히 추정, 파악되는 것이 없다.[9] 동기와를 썼다 하더라도 반년만 지나면 부식되어 일반기와와 얼핏 비슷해보이지만, 용마루 같은 물이 닿지 않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면 구리 특유의 붉은 빛이 도니 식별이 가능하다.[10] 출처 http://hi-cell.kr/?attachment_id=632[11] 북한 건축물은 원래 크고 웅장하게 지어서 프로파간다의 목적을 두고 만든다. 즉, 거대 건축물이 의식 수준이 낮은 다수 대중들에게 얼마나 잘 먹히는지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12] 대표적으로 경복궁 팔우정과 향원정, 덕수궁 석어당, 경북의 운조루[13] 법주사 팔상전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황룡사와 미륵사의 9층 목탑은 아파트 10층 아파트 높이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14] 고려 충렬왕 때 관후서의 '도선 일기'에 의하면 "땅은 다산(多山)을 양, 희산(稀山)을 음. 옥(屋)은 고루(높은 다락)를 양, 평옥을 음이라 한다. 우리 나라는 원래 산이 많기에 고옥을 지으면 반드시 국운이 쇠퇴를 부른다."고 한다.[15] 뭐 회반죽도 넓은 의미의 시멘트에는 들어가긴 한다. 석회가루와 물, 고운 흙, 느릅나무 접착제, 잘게 찢은 한지 등을 섞어 만드는데, 석회와 석고가루를 주성분으로 만든 초기 이집트 시멘트랑 비슷하다.[16] 시멘트는 이미 피라미드건축시부터 사용된 유서깊은 건축자재다. 현대건축에 와서야 주류로 쓰여서 그렇지. 우리나라의 경우 몽촌토성을 지을 때 흙과 석회를 60:40비율로 섞어 일종의 고대식 콘크리트를 만드는 증토축성법(蒸土築城法)으로 지어졌다.[17] 김왕직 저, 알기 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참조.[18] 동아시아에서 벽돌사용의 본좌인 중국 건축에서도 전축건축은 대륙성 기후면서 좋은 흙을 구하기 쉬운 화북지역에 특히 집중되며, 습기가 많은 남부로 갈수록 전통 건축에서 벽돌 사용은 감소하고 흙벽이나 목조 건축이 발달하는 모습을 보인다.[19] 사치품 중 하나인 비단의 경우, 그 자체가 일종의 대체화폐 역할도 하였을 뿐 아니라 수요가 일정했기 때문에 공급이 자연스럽게 요구되어 원활한 수요-공급이 이루어졌지만, 벽돌의 경우 건축자재였고, 또한 비교적 높은 단가를 가진 고급 자재였기 때문에 고급 건물의 신축이 일정하게 발생하는 수요가 없이는 벽돌의 공급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는 조선시대에서 건물은 왕실의 감시와 더불어 검약함을 강조하는 조선의 사상적 제약 때문에 발달이 늦었다.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중인계층이 성장하는 조선 후기 조차도 건축 분야에는 비교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487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487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