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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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todayus.com/BN-AM566_1121SK_G_20131121041407.jpg[1]

대한민국건축, 혹은 한국인건축

1. 개요
2. 역사
2.1. 전통 건축
2.2. 원시 시대 건축
2.3. 삼국 시대 건축
2.4. 남북국시대 건축
2.5. 고려 시대 건축
2.5.1. 남아있는 고려시대 건축
2.6. 조선 시대 건축
2.6.1. 유교의 확산
2.6.2. 목재의 고갈
2.6.3. 기술의 변화
2.6.4. 청나라의 영향
2.6.5. 장식화 경향
2.6.6. 2층?
2.6.7. 조선의 종교 건축
2.7. 개항 이후 ~ 해방 이전
2.8. 해방 이후 ~ 현재
2.8.1. 현재의 전통 목건축
2.8.2. 북한 건축
3. 건축물 명칭
4. 건축물 일람
4.1. 전통건축
4.2. 근대 건축
4.3. 현대 건축
4.3.1. 교통 인프라
4.3.2. 박물관/미술관
4.3.3. 북한


1. 개요[편집]


한국 고유의 건축과 건축의 역사를 주제로하는 문서이다.


2. 역사[편집]


주거의 경우 고대부터 근대 이전까지 동양문화권은 유달리 주거에서 단층 건축을 선호했다. 따라서 고대에는 2층이 흔했을거라는 상상은 적어도 종교나 권위적 건축으로 한정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그 외에는 조선 후기처럼 단층이 절대다수였다. 물론 지역마다 일부 예외도 있지만 대체로 먹고 자는 집은 2층 이상을 싫어했고, 복층 건물은 상업적, 종교적, 권위적이라는 한정적인 목적으로 지었다. 따라서 한국 건축에서 복층을 보기 힘든 이유 첫번째는 이것이다. 2층이상의 한옥 건축이 흔했던 시기는 고대도, 중세도 아니고 한옥에 서양 건축기법이 도입된 근대부터다. 다만 조선 전기 양식의 양반가옥, 누각, 제사건축, 종교나 궁궐 건축에는 다락이라는 복층이 상당수 보인다.[2] 조선 후기에 들어 목재난에도 불구하고 주거 건축의 면적은 더 커졌는데, 집을 이루는 목재의 두께는 갈수록 얇아졌고 휘어진 목재 따위를 그대로 쓰는 등 목재난의 영향을 아예 비껴가지는 못했다.

그 외 건축의 경우 확실히 이전시대보다 규모가 작아졌다. 가장 큰 이유는 목재난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앞다투어 대규모 건축을 계속 지으려고 했기 때문에[3] 소박하고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유교의 영향이라기보단 목재난이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2.1. 전통 건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목재를 주로 사용한 건축으로, 부재를 결합할 때 되도록이면 짜맞춤에 의존하며 못을 거의 쓰지 않는다. 공학적으로는 중국식 건축의 구조인 대량식을 가져왔으나 공간 활용과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마루와 같은 개방형 공간과 안방과 같은 폐쇄형 건축이 조합된 독특한 구조를 자랑하며, 이는 온돌, 매다는 문짝(들문)과 더불어 추운 겨울와 더운 여름을 모두 소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물에 닿으면 썩기 시작하는 목재를 주로 활용했기에 한 가지 큰 단점을 꼽는다면, 무너진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4] 기와가 떨어지고 집이 기울어 비에 노출되기 시작한 목조건물은 불과 수십 년만 지나도 순식간에 녹듯이 썩어 사라진다. 전란 등으로 인해 불에 타서 사라지기 쉬운 것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고대나 중세 건축물의 연구에 어려움이 크다.

소나무가 한국 전통건축의 대표 목재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건축물에 사용하는 목재는 2007년에 발표된 '우리나라 건축물에 사용된 목재 수종의 변천' 논문에 의하면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거의 참나무속 나무를 사용했고 고려시대부터 소나무를 많이 이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직 소나무만이 한국 전통건축의 대표 목재라는 것은 다소 조선 후기 한옥의 이미지에 매몰된 것.[5] 조선 후기에 들면 소나무의 점유율이 88%에 육박하게 된다.


2.2. 원시 시대 건축[편집]


여기서의 원시 시대 건축은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를 의미한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집은 구석기시대의 막집과 신석기시대 움집이다. 막집은 말 그대로 막 지은 집이란 뜻으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주거시설이다. 움집은 지열을 이용하기 위해 땅을 파서 움을 만든 뒤 그 위에 지은 집으로, 시대가 발전할수록 점차 움이 얕아지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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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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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토막식 움집의 모습. 초기의 움집으로, 땅을 이후 시대 움집보다 깊게 파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둥과 주초가 나타나고, 나중에는 방과 초기형 온돌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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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에 비해 많이 발달한 청동기시대 움집. 이런 형태로 벽이 외부에 노출되기 시작한 움집을 초옥토실식이라 한다. 이 초옥토실식 움집에서 한국 전통 건축물의 기본 형태가 나타나기에, 보통 한국 전통건축의 시원은 이 초옥토실식 움집으로 잡는다.

이 외에 누목식(귀틀집)과 고상식 집, 토실도 나타난다. 귀틀집은 통나무를 井자 형태로 쌓아올리고 통나무 틈은 흙으로 메워 만든 집을 말하며, 고상식 집은 윈두막처럼 지면보다 높게 지은 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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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토실(土室)의 구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초옥토실(草屋土室)이라고 나온다. 단, 초옥토실은 지붕을 초가로 하고 흙으로 벽을 만든 집이라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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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를 얹은 귀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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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고상식 주거의 복원. 비와 습기에 강한 고상식은 한반도 남쪽에서 올라온 주거 양식으로 추측된다. 일본 도다이지의 정창원 건물은 아직도 이러한 고상식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가야는 철기 도입은 빨랐지만, 기와의 도입은 상당히 느린 지역이었다.

또한 철기시대로 넘어가면서 한반도에 기와가 도입된다. 기와는 이전에 지붕재료로 쓰이던 풀이나 너와와 달리 반영구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제작 단가가 높고 무거워 근세 후기 부농/상공업자의 성장 이전에는 기와를 마련하고 좋은 원자재로 튼튼하게 집을 짓는 게 가능한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2.3. 삼국 시대 건축[편집]


파일:attachment/uploadfile/hwangryongsaji02.jpg
삼국 시대의 건축 가운데 제일 유명한 황룡사. 그리고 그 복원모형.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삼국시대의 목조 건물은 하나도 없다. 말 그대로 남아있는 고대 목조건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같은 목조건축문화인 중국이나 일본의 상황도 거의 비슷하다. 왜냐하면 돌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 썩고 또 불에 약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부적인 면은 쉽게 알 수가 없으며, 남아있는 터의 기단과 주춧돌로 건물의 배치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삼국 시대 건물지 등을 발굴하여 상당한 양의 건축 부재를 발굴하기도 한다. 무덤이나 조각, 금속으로 만든 모형 등의 유물로 간접적이나마 그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일본에는 호류지, 시텐노지 등 직ㆍ간접적으로 백제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고대 건축물이 존재한다. 중국 역시 당나라 시대 건축이 몇 개 보존되어 연구에 도움을 준다.

이렇듯 장기간 연구 자료가 축적되어 삼국 시대 건축에 대한 고증 역량도 강해지고 있다.

입식과 좌식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삼국시대에서 건축으로 가장 덜 유명한 것은 자료가 적은 가야는 논외로 치더라도 백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안학궁이나 황룡사 등 규모가 큰 고구려나 신라의 건축물과 비교했을 때 미륵사 정도를 제외하면[6] 상대적으로 크기로 유명한 건축물이 부족해서이며, 사실 백제가 삼국시대에 가장 수준 높은 목건축술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황룡사의 9층 목탑에도 추측이지만 백제의 기술자가 건축했을 가능성이 있다. 자세한 건 아비지 문서 참조. 일본의 고건축과 관련된 기록에도 거의 다 백제의 장인이 등장한다.

출토되는 유물이나 터로 봤을 때는 근대를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가장 건축물이 거대한 시기이기도 하다. 터도 크지만, 발굴되는 기와나 치미의 크기 등이 장난이 아니어서 기와의 무게가 조선시대 기와의 5배 정도 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건축물의 크기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된다.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만 하더라도 당대 지어진 세계 건축물 중에서도 높이에 있어서 손에 꼽을 정도다.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치미는 높이가 무려 180cm가 넘으며, 만덕사지 치미도 이에 맞먹는 규모다. 지붕 장식의 규모가 이 정도니 건물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가늠할 수 있다.

삼국을 대표하는 사찰로는 고구려정릉사, 백제의 미륵사, 신라황룡사가 있다. 궁궐로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크고 아름다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안학궁, 신라의 경주 월성 등이 있다.

고구려의 경우는 고구려/건축도 참고.


2.4. 남북국시대 건축[편집]


신라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삼국시대 신라의 연장선이며, 이 시대 역시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남은 것은 거의 없지만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비교적 그 모습을 추측하기가 쉽다. 특히 안압지 물 속에서는 상당한 양의 건축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서까래 등에 사용하는 금속 장식이나 섬세한 기와들, 늪에 빠져 보존된 난간으로 쓰였던 석재와 목재 등 매우 다양하고 희귀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

이 시기의 건축물은 상당히 호화로웠을 것으로 추정된다.[7]# 당연히 이런 화려함은 귀족 이상의 계층에게만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건축에 대해서는 고분이나 궁궐터, 기와나 건축 부자재 일부 외에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단일 건물로써는 한국 건축물 중 크기가 가장 큰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상경용천부 정전도 기단으로만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석조물의 양식으로 보아 아마도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것은 사료부족으로 인해 연구중이다.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건물의 규모가 거대했는데, 상경용천부 제9절터에서 출토된 치미의 높이는 92cm다.

남북국시대 신라 건축의 방향은 형식상의 완성과 균형미적인 면을 중시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특히 화강암을 적극적으로 다뤄서 만든 석굴암의 조각들과 불국사 석조물은 대단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의미부여를 통해 특이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안압지 터를 통해 신라가 인공적인 조경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찰에 있어서는 1개 금당에 1개의 탑이 있던 일탑식 형식(가람 배치)에서 2개의 탑이 있는 이탑식으로 변한다. 특히 통일 후 백제에게서 뭔가 배웠는지 석탑이 마구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전 시기의 신라가 지은 석탑이라고는 분황사 모전 석탑만 남아있다. 불국사, 감은사 등이 이탑식으로 석탑들을 세웠다.

기본적으로 이 시기는 당나라가 중심이 된 중국적 천하가 완성되어 존재하던 시기라 신라와 발해, 그리고 일본 등 많은 주변국 모두 건축뿐만 아니라 복식, 제례문화 등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당나라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다만 둘 중 아예 새로 건국한 발해와 달리 고대 왕조의 연장선인 신라의 경우 당나라식 건축 양식의 영향보다는 자국의 재래문화가 더 강하게 남았다. 대표적으로 도성을 비교해 보면 발해와 일본은 당의 좌우대칭식 도성 구조를 그대로 도입한 데 비해 신라는 기존의 도성 치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2.5. 고려 시대 건축[편집]


파일:attachment/Karch02.jpg

파일:16665639516B84DD2E5F1A.jpg

파일:emiruk.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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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관경서분변상도. 정토삼부경경 가운데 관무량수경 속 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일상화라기 보다는 불화이고, 굉장히 과장된 묘사지만, 건축이나 복식 면에서는 당시의 고려 양식으로 로컬라이징 되어 있어 다른 그림들과도 유사하게 일관성을 보이기에 고증 자료로 참고할 가치는 충분하다. 고려변상도는 그저 종교화일까? 다른나라의 변상도에 나오는 건축과 문화 고려회화, 아집도 대련 중 하앙으로 보이는 구조물 발견

사치스러움을 억제하고 검소함을 지향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는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귀족적인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매우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송나라 사신이 기록한 고려도경에서는 '관리들과 국상 부자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사치스러워졌다'는 내용과 '선의문 안으로 들어서면 수십집 가운데 하나씩 누각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어느 역덕이 재현한 고려시대 건축성문이 무려 25m!? 고려시대 산성 성벽 건축물 성랑, 그리고 흑유와 우진각지붕 고려시대 건물사서기록과 고서화가 교차검증 된다!? - 사서기록 기둥길이를 재현한 고려시대 2층 건물들

그림이나 기록 등 남아있는 자료들로 보아 붉은색의 주칠(朱漆)과 검은색의 흑칠(黑漆) 등 옻칠을 이용한 단청을 궁궐, 사찰, 귀족들의 주택 등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도경에서는 '궁궐 건물에 난간은 붉은 옻칠을 하고 동화(銅花)를 장식하였으며 단청이 장엄하고 화려하다', '청자로 된 기와와 흙담벽에 중국 직수입 비단을 둘러 장식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 외에도 전각에 옻을 칠해서 호화롭게 만들었다는 기록 등이 있다. 기본적인 색상 자체는 삼국시대부터 보이는 전통적인 단청 양식인 주칠 양식을 바탕으로 하되 원나라와 접한 이후부터는 우리가 익히 아는 붉은색(갈색)+푸른색(녹색) 상록하단 양식이 등장한다.[8]

이렇게 옻칠과 금속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양식은 당나라, 송나라를 필두로 동아시아 전반에서 유행한 양식이었으며 당시 사용한 금속 부품, 특수한 재료로 만든 기와, 실내용 타일 등이 지금도 출토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일본에만 남아 있는 양식이 되었으므로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재현한다면 지금의 일본 건물과 유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파일:external/study.zumst.com/%EB%AC%B8%EB%B2%8C%20%EA%B7%80%EC%A1%B1%20-%20%EC%95%84%EC%A7%91%EB%8F%84%20%EB%8C%80%EB%A0%A8.png

고려 귀족들의 생활상을 그린 아집도대련 중 일부. 바닥에 타일을 깐 외실과 문을 걸어닫은 내실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귀족층은 입식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수도 있으나 고려도경 기록에서는 '고려의 왕은 날마다 편좌(便座)에 앉아 정사를 보는데 평상에는 인욕(왕골, 부들로 짠 돗자리)을 깔고 앉아 정사를 본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입식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파일:external/dvdprime.donga.com/4245136_20090830132737406.jpg

공민왕이 그렸다는 기위도. 3시 방향에 당파풍(唐破風)으로 추정되는 둥근 지붕이 보인다.

이 외에도 고려시대의 눈에 띄는 큰 건물로는 개경의 도심 사찰이었던 보제사의 5층 목탑이 있으며, 조선시대 전기까지 존재했다고 하는데 높이가 약 60미터 정도였다고 한다. 보제사의 이름은 조선시대가 되어 연복사로 바뀐다.

십천교를 지나 곧바로 가서 연복사에 이르렀다.

한 중앙에 우뚝 솟은 5층 누각이 온 성중을 압도하고 서 있는데,

창문과 기왓장에 저녁놀이 비친다.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다.

유호인 명산답사기 중 <송도기행>


나무위키에 등재된 주요 건물: 만월대 - 고려시대 본궁터다.

문화컨텐츠닷컴 백과에서 3D로 복원한 영상이 있으니 참고. 한옥이라 하면 좌식 온돌방만을 떠올리는 선입견과 많이 다르다.

반대로 서민들의 주거는 수혈 주거, 즉 움막과 비슷한 열악한 환경을 가졌다.


2.5.1. 남아있는 고려시대 건축[편집]


대부분 고려 후기의 건물이 남아있다. 아마 여몽전쟁과 고려말기 혼란 때문에 임진왜란 급의 거대한 리셋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왜구 침입으로 손상을 입어 1376년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제일 오래된 기록이다. 왜구 침입 때 불타버려 1376년에 세웠다는 의견도 있지만, 14세기 건물치고는 양식이 지나치게 오래됐다.
1377년에 세웠다. 다만 1201년, 또는 1192년에 단청을 개수했다는 묵서도 있기 때문에 조사당의 건립 시기는 1377년보다 훨씬 이르며, 1377년의 기록은 중창이나 해체보수한 기록이라는 견해도 있다.[9]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남아있는 제일 오래된 기록은 1363년에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이다. 수리는 건물이 세워진지 100~150년 뒤에 하니 건립 연대는 1200년대 초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제 건립 연대는 모른다. 양식이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일 수도 있다.
1308년 세움. 세운 연도가 알려진 건물 가운데 제일 오래되었다.
1375년 세움.
6.25 전쟁 때 소실.
북한에 있다. 6.25 전쟁 때 파괴. 1955년 북한에서 복원했다.
1327년 세움.
1374년에 세웠다.
북한에 있다. 1325년에 세웠다.
공민왕 시기인 1374년에 중창되었다. 굉장히 연대가 오래된 건축일 가능성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전소.
6.25 전쟁 직전에 화재로 전소

2.6. 조선 시대 건축[편집]



2.6.1. 유교의 확산[편집]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사회 전반에 자리잡았다. 유교 건축은 사치를 지양하므로 굉장히 엄숙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건축은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재력이 되면야 사치스러운 양식을 했지만 유교 건축에서 만큼은 극도록 절제된 위엄을 중시했다. 유교 건축의 대표적인 예시는 종묘서원이다. 이들 건축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건축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점하는 종묘나 서원은 용도 자체가 유교적 건축물의 대표격으로 장식과 단청을 극도로 단순하게 만들어 의도된 엄숙함을 보인다. 이를 가칠단청이라고 하며, 단청 중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단색의 특정 안료만 칠해놓은 단청이다. 보통 가칠단청은 다른 단청을 칠하기 전 밑바탕으로 칠하는 용도로 많이 쓰는 단청이라 종묘를 비롯한 극소수 건물 외에는 찾기 힘들다.종묘 단청

궁궐은 역으로 종묘보다 화려한 모로단청을 칠했고, 여러 장식을 썼다. 궁궐이 아닌 불교 건축은 더 화려해서 해인사 대적광전 같은 불교 건축은 유교적 기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복잡한 문양과 화려한 채색을 강조하는 '금단청'을 칠했다. 조선시대에는 건물의 격이 높을수록 역으로 절제한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중국의 자금성은 당나라 시기의 대명궁에 비하면 크기는 작으나, 건물 자체를 화려하게 짓기보다는 석축과 건물의 폭[10]이 더 넓어지는 방향성을 취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절제했다기보다는, 화려함보다는 위압감과 권위를 높이는 쪽으로 발달했다는 것.

2.6.2. 목재의 고갈[편집]


고려시대때 부터 줄어든 거목들이 그 이후에도 계속 고갈되고 있었고 거기다 소빙하기로 평균온도가 낮아지자 온돌을 까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온돌로 인해 산림자원의 고갈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11] 가령 경복궁의 궁역 자체는 매우 넓었지만 그 중 가장 큰 건물인 경회루는 신라의 황룡사 금당, 고구려의 안학궁 정전에 비해 작았다.

하지만 건축물의 단일 크기는 거목 고갈로 계속 작아졌지만 그와 반대로 총 건축면적(建築面積)[12] 자체는 훨씬 더 커졌는데 경복궁의 전체 건축면적[13]고구려안학궁보다 더 크며 신라의 궁궐인 경주 월성 보다도 훨씬 더 넓고 일본교토고쇼[14] 보다는 약 5.7배 그리고 천황궁인 메이지 궁전(明治宮殿)[15] 보다는 약 8.4배 이후 새로 만들어진 고쿄[16] 보다는 약 10.2배 이상 더 큰 건축면적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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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자금성과 비교해도 그렇게 큰 차이는 안 느껴질 정도이다.

단일 건축면적이 고려시대 이후로 작아졌다는 것에 대해선 삼국시대에 비해선 작아진 것이 맞고,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작아졌다기엔 좀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가장 대형 건물에 속했을 만월대 회경전의 경우 면적이 근정전의 1.5배 정도로 좀 더 크지만, 경회루나 간혹 볼 수 있는 진남관 같은 대형 객사의 크기와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안학궁 중궁이나 미륵사 강당 황룡사 금당같은 건물들의 면적과 비교하면 삼국시대와는 면적 차이가 확실히 나고 고려시대와는 비슷한 범주 내에서 건물 개별마다 조금씩 차이나는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사라진 기록상의 조선의 거대 건축물들의 경우, 분명 작지는 않았겠지만 정보가 부족하거나, 일반적인 고려~조선시대 대형건물들의 단일 건축면적에서 많이 벗어났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연산군 시절 만들어졌던 서총대 같은 경우 무려 천 명이 앉을 수 있으며 3층이었던 조선 전기 경회루와 비슷하게 지으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넓이와 높이가 상당했을 것이다. 다만 실제 터가 발굴된 것은 아니라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었다'는 서술만으로는 그 정확한 면적을 알기는 어렵다. 사실 경회루 넓이만 되도 천 명은 앉을 수가 있어서...서총대 1 서총대 2 태조 이성계 때 만들어진 흥천사의 5층 사리각의 경우 고려시대에 지어진 대형 불탑들과 비슷한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흥천사 사리각 1흥천사 사리각 2

또 단일 건축면적에 있어서 보 방향(측면)의 길이가 어느정도 되느냐도 중요한데, 측면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결과적으로 지붕이 커질 필요성이 있게 되어 건축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사실 도리 방향(정면)의 길이를 늘리는 것은 같은 가구 구조를 옆으로 반복해서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상대적으로 쉽다. 즉 똑같이 생긴 집을 여러 채 지어서 하나의 지붕으로 이으면 정면 길이가 긴 건물이 되는 것이고, 서로 지붕을 분리하면 별개의 작은 건물들이 되는 것이다. 한국사의 거대건물의 예시들로 등장하는 건물들로는 지긋지긋하게 끌려나오는 안학궁 중궁[17]부터 시작해서 상경성 2궁전[18], 견훤 후백제 궁궐 정전으로 추측되는 건물[19], 미륵사 강당[20], 황룡사 중금당[21], 만월대 회경전[22]등이 있는데, 이 건물들의 공통점은 정면 길이가 측면 길이에 비해서 길다는 것이다. 하지만 측면 길이에 있어서는 경회루[23]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즉 해당 건물들의 소실 자체는 몰라도 규모에 있어서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막말로 경회루를 나란히 3채 지어서 한 지붕으로 이어놓으면 그게 안학궁 중궁이고 4채 지어서 이어놓으면 그게 상경성 2궁전이라[24]... 물론 높이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종묘 정전[25]만 해도 한국사 전체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건물이다.

나무를 절약하면서 맞배지붕의 단점[26]을 보완하기 위해 맞배지붕의 양 옆에 커다란 풍판을 달고 화재에 대해 저항력을 늘리기 위해 일반 벽 겉에 덧씌우는 화방벽이 출연하였고, 기둥이나 추녀같이 긴 부재를 만들 때 길이가 다소 짧은 부재를 이어 만드는 모습이 보인다.[27]



풍판과 화방벽을 설치한 조선시대 건축물의 모습. 사진의 건물의 화방벽은 기둥을 덮지 않고 용지판을 대 기둥과 화방벽을 구분한 것으로, 화방벽이 기둥을 덮어 감싸는 완전밀폐형도 존재한다. 이 경우 습기로 나무로 된 기둥이 썩는 것을 막기위해 화방벽 아래쪽에 기둥의 목재 하단부 일부가 공기와 접촉하도록 작은 공기구멍을 뚫어 놓는다.

나무를 자연 그대로 기둥으로 쓰는 현상이 나타났다. 가공해 쓸만한 곧고 굵고 긴 나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 새로운 문화가 나타났는데, 이를 노리고 희귀하고 값비싼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써서 고급스러움을 드러내려는 건축도 나타난다. 모과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쓴 사찰 건축


2.6.3. 기술의 변화[편집]


한옥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마루식 구조와 온돌식 구조가 합쳐지고, 유교적 사상이 반영된 건축이 들어섰다. 시대가 흐른만큼 이전 시대보다 건축 기술, 민간 경제가 발전되어 민간의 가옥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29][30]에 따라 보다 복잡한 구조의 집들이 지어진다. 특히나 조선시대의 건축 기술의 발전은 수원 화성 같은 당대 동양 기준으로도 고난이도의 거대 건축물 또한 건축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한반도의 전근대 건축 '기술' 자체는 조선시대에 가장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지 사치를 금하는 유교적 풍조탓에 미적인 측면 즉, 화려함이 많이 줄어든 모습이 선입견을 불러 일으켰을 뿐이다. 실제 건축 기술 자체는 조선시대의 건축이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 평면적으로 더 복잡하고, 형태가 더 다양하며, 기술적으로도 더 발전되고 정교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일자형 건축에서 탈피해 ㅁ, ㅂ, ㄱ 형태의 한옥이 보편화 되었던 시기 또한 조선시대였으며 당연하지만 민간의 가옥 또한 조선시대에 더 복잡한 형태와 발달한 기술 그리고 좀 더 큰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수혈 주거에서 벗어나 드디어 우리가 생각하는 초가집, 기와집에 서민들이 살게 된 것도 조선시대에 들어서였다. 물론 토막(흙집) 같은 빈민굴이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2.6.4. 청나라의 영향[편집]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상류층을 중심으로 청나라 문화가 유행했다. 건축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원에 청나라 풍의 정자를 지은 흥선대원군의 석파정, 청나라 양식의 도서관을 지은 경복궁 집옥재가 대표적인 유적이다.


2.6.5. 장식화 경향[편집]


조선 후기에 들어서 건축의 장식화 경향이 심해진다.

유교로 인해 강력했던 신분은 급속히 느슨해져 건축 부분에서 그 제한이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신분마다 건축을 차별한 통일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가사제한령 등의 법을 통해 지배층인 양반의 가옥에조차 그 장식이나 재료를 엄격하게 제한했는데, 건축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서 금과 은, 옻칠 등 사치스러운 물품을 민간에서 쓰지 못하도록 제약을 두었다.

그래서 옻칠장식이나[31] 금속 장식을 쓰지 않은 것 등으로 조선의 건축이 수수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나, 금속 장식만 쓰지 않았을 뿐 다른 부분의 장식은 발달한다.[32]

파일:숭례문 공포2.png
파일:사정전 공포.png
조선 전기 건축인 숭례문의 공포부
조선 말기 건축인 사정전의 공포부

조선의 장식화 경향은 건물 구조 자체를 화려하게 꾸미는 식으로 나타난다. 사치에 민감하여 비싼 재료로 건물을 장식하는 방식은 지양했다. 조선의 장식화 경향은 조각을 세밀하고 화려하게 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단청이나 부재를 화려하게 조각하는 방식으로 그 양상이 변화한다. 대표적인 것이 다포양식이다. 창살이나 기단부를 세밀하게 조각해 장식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내부 장식의 경우 창살을 세밀하게 공예하거나 비단, 병풍, 벽화, 목각으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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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경복궁은 궁궐내 건축물들에 대하여 청자로 만든 기와와 용무늬가 새겨진 석조 기둥들을 자주 사용했으며 조선 후기에도 강화행궁과 외규장각 전도에 묘사된 용미는 심지어 금칠까지 되어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화려함과 사치스러운 장식들을 무조건 배격하기만 한것도 아니었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현판이나 방문(榜文)의 형태로 곳곳에 예절이나 마음 수양과 관련된 글귀를 써붙인 것도 특징이다. 서원의 경우에는 아예 공간구조에까지 성리학적 세계관과 마음의 구조 등을 반영해서 지었다.

단청의 경우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민간 건축에서 단청을 허용하지 않았다. 단청은 종교나 공공 건축에 허용됐다. 조선시대에 단청은 더 복잡한 방향으로 발달해 갖은금단청 등의 양식이 등장했다. 특징은 궁궐이나 종묘 같은 국가의 핵심 건축물보다도 전국 각 지방의 유명 사찰들이 더 화려하고 정교한 금단청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비록 교세가 줄어 건축의 규모는 조선 이전에 비해 줄었지만 유교적 기조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는 종교 건축물이란 특성 덕에 오히려 왕실건축보다 더 화려한 것이 허용된 세계적으로 특이한 사례가 되었다.


2.6.6. 2층?[편집]


현재까지 남아 있는 복층 살림집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2층 가옥이 흔했다. 이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세종대왕이 침실로 쓰는 2층 이상의 집을 의미하는 침루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으며 심지어 2층에서 잠자다가 세종대왕이 감기에 걸렸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고려시대로 가면 이러한 루가 보편적이었다는 기록이 많다. 2층 건물의 규모를 늘려 찻집이나 술집 등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말~조선전기에만 등장하는 침루(寢樓)와 누방(樓房)기록

그런데 소빙하기로 인하여 온돌이 대량으로 보급되고 난 이후에는 난방에 취약하고 온돌설치가 어려운 2층 가옥보다 1층 가옥이 더 선호되어 2층 이상의 가옥들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기술적으로 2층으로 만드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아, 고궁 내 건축물들 중에는 다층건물을 상당 수 발견할 수 있으며[33] , 일부 사찰이나[34] 수원 화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Juhamnu%2C_Changdeokgung_-_Seoul%2C_Korea.jpg
창덕궁 주합루의 모습. 원래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 2층은 열람실인 주합루이나, 현재는 주로 건물 전체를 주합루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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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시 소재의 유형문화재인 방초정. 가운데 온돌방이 있는 2층 구조다.

파일:external/doopedia.co.kr/48570.jpg
덕수궁 석어당. 역시 2층.

파일:external/www.subkorea.com/hgb015.jpg
북한 종성읍성의 수항루. 이건 아예 3층이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84723_STD.jpg
백련사 만경루. 비탈길에 지어 앞에서 보면 2층 건물이란 게 보이지만,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 건물처럼 보인다. 가운데 길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밖의 2층 건물들 사진 링크 경복궁 향원정, 구례 운조루, 남산골 한옥마을, 안동김씨 태장재사 이상루, 용주사 천보루, 의성김씨 서지재사, 그 외 17세기 다층 한옥 관련 포스팅

그리고 누각의 구조는 대부분 바닥에서 들어올려진 형태인데,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 벽만 쌓으면 사실상 2층이다. 또한 법주사 팔상전 등을 보면 기술이 부족해서라는 해석은 근거가 없다. 또한 조선 세종 때의 가사제한령(家舍制限令)에 의해서 법적으로 주택을 장식하거나 크게 짓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서 그러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에 따라서 조선 태종 이후 생긴 경향을 세종이 이어받는 것이다.[35] 여러 기록들을 보면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2층 살림집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글루스의 관련 글 참조.


2.6.7. 조선의 종교 건축[편집]


사람들이 제일 관심을 두는 것은 1차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규모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거대 건축물들은 대부분 왕궁 혹은 종교적 건축물이다. 이런 면에서 조선은 경복궁수원 화성, 서총대 같은 왕궁 또는 왕실에서 주도해서 건축된 건축물들을 제외한 종교적 건축물들 한정으로는 거대 건축 뽕을 빨기는 분명 힘든 환경이다.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불교가 곧 국교였으며, 도시 특히 수도에는 도심 한복판 이곳 저곳에 황룡사, 흥왕사 등과 같은 대형 사찰이 있었다. 건국 초기에 흥천사 사리전각이라는 한양의 위엄돋는 랜드마크격 건축물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 불교는 국교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괴력난신이나 신앙보다는 통치 철학에 가까운 유교가 조선의 이념이 되었다. 따라서 사찰은 평지에서 밀려나 산지에서 번성하게 된다. 조선 초기까지 불교에 대한 반발감이 팽배해 세조 사후 노골적인 절에 대한 압박과 심지어는 고의적인 테러가 벌어졌는데, 조선초에 조선왕사라고 불렸던 회암사는 조선 중기 이후로 몰락한다. 때문에 우리의 거물 판타지를 충족해 줄 거대한 평지 사원은 사라지고 만다.

불교는 평지에서 벗어나 산지에서 살아남는다. 산지의 사찰은 조선 초기의 억불 사상에서 비껴났기 때문에 상당수의 고대 건축이 살아남았다. 이들 건축은 임진왜란 때 대규모로 소실되어 한반도에서 현존하는 고대 건축은 씨가 마른다.

조선 초 이후로 대규모 반달리즘은 사라지며, 불교는 안정기를 찾는다. 그러나 더이상 불교는 탈종교화 되어버린 지배층에게 관심 밖이었으며, 괴력난신을 논한다는 이유로 권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지배층이나(특히 여성) 민간 백성들은 여전히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고, 또 열심히 후원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왕실과 양반계층의 지원을 받은 사찰의 대거 중창된 배경은 이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화엄사, 금산사, 법주사 등의 대형 사찰이 있다. 특히 화엄사 각황전은 숙종이 직접 이름까지 지어주신 귀한 건물되신다. 불교 건축은 이런 여성이나 민간 백성의 후원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왕실은 원찰이나 능을 지키고 관리하는 조포사, 능찰을 대거 건설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문화재를 보호한단 개념이 없어서많은 사찰 건물들이 전문적인 보호를 받지 못해 쇠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기로 가면서 절 건축 자체가 유교건축/관청건축과 유사해지는 경우도 생겼다. 전자는 불국사가 대표적이고, 후자는 수원 용주사가 대표적이다.

조선은 종교 건축만큼은 단청 등 화려한 양식을 허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장식 기술은 더 발전하는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사찰 건축에서는 화려하고 섬세한 모습을 많이 보였으며, 단청이 목재가 많은 건축물에서 좀이 슬거나 썩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으므로 많은 건물에서 단청이 활발히 사용되었다. 특히 산간에 위치한 절이나 궁궐 건축 등에서 많이 사용된 편.

단청 외에도 내부의 종교적 장식은 여전히 화려하다. 오늘날에도 좀 큰 사찰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부 장식이 화려하다.


2.7. 개항 이후 ~ 해방 이전[편집]


이러한 전통건축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개화기일제강점기 시절이다. 이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서양 양식 건축들이 짓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선 전통건축이 아닌 서양식 건축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니와, 조선이나 대만 등 식민지를 미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서양 양식을 채용한 건축물들을 많이 세웠다. 이로 인하여 이 시기에 대대적으로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여 서양 양식의 건축물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총독부구 서울역사 등이 있다.

이와 동시에 일본 전통 형식 건축물들, 일본 전통과 서양식 건축 양식이 합쳐진 절충식 양식들도 볼 수가 있다. 군산의 동국사적산가옥처럼 거의 완전한 일본식 건축물도 등장하며,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에 나왔던 양조장 등 절충형의 건물들은 지금도 조금만 눈돌려보면 손쉽게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주요 도시. 즉 부촌이었던 동네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의 도시와 시골의 경우에는 전통 건축을 그대로 채용해왔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부촌이었던 군산, 강경, 인천 일본조계지만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건축물들은 6.25 즉. 한국전쟁을 통해 현대 건축으로 넘어왔다.

또, 19세기부터 재료와 수요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 전통양식이 발전해간 일본건축과 달리 한국의 전통건축은 쇠락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동안 자기발전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일본에 현재 남아있는 많은 2층 민간주거나 '중복도형'(중간의 복도 양쪽으로 방이 있는 형태) 저택은 사실 대부분 19세기부터 대대적으로 개조, 확장되어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아쉬운 부분. 종교 건축물은 서양식 벽돌건물이, 관공서를 위시한 근대적 행정,교육, 상업 건축은 일본식의 일본-서양 절충식 건물이나 일본 전통의 목조건축이 대체해버렸다.

주거에서도 조선식과 일본식의 대대적인 절충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의 절충하는 경우에는 지붕 기와를 일본식 평기와로 대체하거나, 미닫이 문의 도입,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한국식 온돌방을 도입하는 정도였다. 아무튼 이러한 절충된 양식으로 유명한 한옥으로는 남일당 한약방 등이 있으며, 등록문화재 등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 한옥 형식으로 넓은 2층 상가 건물을 짓는 등의 새로운 시도도 있었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저평가와 혼란기 속에서 곧 사라졌다. 1930년대 지어진 2층 상가 덕우당은 덕성여대 안에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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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2층 목조 상가. 양식이 절충되어 있다. 덕우당은 아니다.

대신 난방연료가 나무나 숯에서 근대식 기름이나 탄으로 바뀌면서 전통건축처럼 부억을 굳이 낮게 만들거나 방높이를 올리지[36] 않아도 되니 집의 높이가 낮아졌다. 그리고 해방후엔 툇마루를 없애고 그 자리에 타일을 붙이는 식으로도 변형되기도 하는데, 근래에 도심에 슬럼가처럼 남아있는 한옥들은 대개 일제말기와 해방후 새롭게 만들어진 바로 이런 도심형 한옥이다. 이런 도시형 한옥이나 유사한 구조의 건축물들은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구조를 제일 쉽게 보는 경우는 일일연속극 등의 막장드라마에 나오는 집 세트 중 재산 없는 집안의 집 세트장.

이 시기에 지어진 많은 건축물들은 해방 직후에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천대받았고, 그 덕분에 상당수의 주요 건물들이 아무런 논의도 없이 헐려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치에 대해 인정받기 시작하며 등록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그러나 등록문화재는 강제성이 없는 제도라서 아직까지도 많은 위험에 노출되었다.


2.8. 해방 이후 ~ 현재[편집]


사실상 1950년대 이후에 현대(사실은 모더니즘) 건축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 양식은 대부분 모더니즘의 변용이다. 서구에서 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건축이 유행할 당시에 한국의 건축가들은 대부분 모더니즘 건축을 공부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2000년대 이전에 지어진 건축물들은 대부분 모더니즘 혹은 그것의 변형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 것이 낡았다, 트랜드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더니즘 건축보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진보했다고는 할 수 없다.

건축계의 노벨상프리츠커상의 수상자가 중국에서도 나오는 상황에서 한국인 수상자는 아직까지 없고 근래에 나올 가능성도 없고, 한국인 건축가가 세계적으로 두각되지도, 한국 현대 건축이 세계 건축학계에선 거의 언급조차 안되는 점에서 한국 현대 건축의 대외적인 평가는 매우 낮다.

주거 양식으로는 단연 아파트를 가장 대표적인 양식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단독주택 역시 아파트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골목만 가면 시뻘건 벽돌로 지어진 비슷한 주택들이 전국에 있다.서울 주택가와 부산 주택가를 비교하면 처음본 사람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다.


2.8.1. 현재의 전통 목건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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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개원한 서울 흥천어린이집. 사진출처:불교신문 2015년 10월 국토교통부 올해의 한옥상을 수상했으며, 서울시 최초의 한옥 어린이집이다.

해방 직후에만 하더라도 그저 헐어버릴 대상이었지만 1980년대를 기점으로 전통 문화의 보존과 한옥의 장단점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며 상당한 재평가를 받았다. 이는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도심지에서는 서울 북촌의 한옥마을, 전주의 한옥마을 등에서 신축, 개량된 주거, 상업용 한옥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새로운 불교 사찰 등이 세워지면서 황룡사 같은 삼국*고려시대의 건물을 복원할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본보기로 지어진 진천 보탑사의 3층 목탑 등이 그러한 것 중 하나. 그리고 건물규모가 그간의 경제성장 덕분에 전체적으로 커지고 화려해졌다. 조선시대 금산사 미륵전의 계보를 잇는 3층 건물도 지어졌고 구인사 조사전분당 대광사, 건축평면양식도 이전의 획일적인 일(一)자형에서 탈피하여 아(亞)자형 형태처럼 다양해졌으며용인 법륜사, 단청 중에서 가장 화려한 갖은금단청[37]을 칠하거나도봉산 능원사, 건물전체에 금박을 입힌 사찰도 생겼다. 서울 수국사. 화려함이 지나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 반면 예술의 다양성 및 취향을 존중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또한 수입목재의 등장으로 길이가 긴 나무를 구하기 쉬워지다보니, 조선 후기 건축에서 비교적 짧은 나무를 이어 긴 부재를 만드는 방식이 다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외 전통건축에 관하여서는 한옥 문서를 참고.


2.8.2. 북한 건축[편집]


남한은 미국이나 시드니에 흔한 서구 양식을 이용하는 데 반해 북한은 소련에서 흔했던 스탈린 고전주의 양식을 사용한다. 지금 북한의 건물들을 보면 구소련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고 북한의 건축가들이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도 구소련 사람들이 상상하던 미래관과 유사하다.

공산권 국가 답게 큰 건물을 매우 선호한다. 반면 그 취향에 비해서 낮은 기술력과 경제난으로 인한 자재난 때문에 열악한 상황. 21세기에도 기포가 들어간 질 나쁜 유리를 쓰고, 류경호텔 같은 초고층 건축물에도 철골을 쓰기가 부담스러운지 철근 콘크리트로 짓고 있다. 그나마 이러한 대형 건축물들도 평양을 벗어나면 없다고 봐야 한다. 또한 도시 주거에서도 아파트의 비율이 높아서 아파트 그라드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한 가지 의의가 있다면, 전통 목건축의 형상을 현대식 건물에 접목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이며, 나름대로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고 있다. 물론 피상적인 외형만을 개량없이 붙이기만 한다는 비판점이 있지만 말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인민대학습당이 있다.


3. 건축물 명칭[편집]


흔히 전각이라 줄여 부르지만, 한국 건축물에 붙는 명칭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 전(殿) : 매우 규모가 큰 중심 건축물에 붙는다. 경복궁 근정전, 대웅전 같은 예가 있다.
  • 당(堂) : 전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꽤 큰 건축물에 붙는다. 창덕궁 희정당 등이 대표적.
  • 합(閤) : 전이나 당의 부속 건물 성격의 건물에 많이 붙는다. 창경궁 낙선당 양정합 같은 식.
  • 각(閣) : 아마 한국 건축물 명칭 중 가장 많이 붙는 명칭일 것이다. 역시 업무 건물의 부속 건물에 많이 쓰였다. 규장각이 대표적.
  • 재(齋) : 궁궐 건축 뿐 아니라 양반들의 가옥에도 종종 붙는 명칭이다. 창덕궁 낙선재가 대표적.
  • 헌(軒) : 주로 생활 공간에 많이 붙인다. 오죽헌이 유명.
  • 루(樓) : 이 명칭이 붙는 건축물은 대부분 여흥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그 규모도 작은 편이 많으나, 경회루처럼 예외적으로 크게 지어진 경우도 있다.
  • 정(亭) : 정자(亭子)할때 그 정이다. 경치가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하여 지은 집. 주거용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벽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다. 경복궁 향원정이 대표적.
  • 정(庭) : 정원(庭園)할 때 그 정. 보통 건물이나 지명 이름에 붙진 않고 조정(朝廷) 같은 식으로 많이 쓴다.
  • 관(館) : 오늘날에도 관청청사 같은 단어에 쓰이듯, 주로 관공서 계통 건축물에 많이 붙는다.
  • 청(廳) : 오늘날에도 정부청사 같은 단어에 쓰이듯, 주로 관공서 계통 건축물에 많이 붙는다.
  • 사(舍) : 객사(客舍)같은 관공서 건물 뿐 아니라 남간정사(南澗精舍) 같은 정원 건축물에도 붙는다.
  • 사(祠) : 이쪽의 사는 사당(祠堂)할 때 사다. 당연히 제사용 건물에 붙는다. 의외로 충렬사처럼 서원에도 붙는데, 공자 등을 모시는 사당이 있어서 그럴지도.
  • 대(臺) : 아마 이 명칭이 붙은 건축물중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청와대일 것이다. 그러나 '대'는 사실 축대(築臺)나 넓직한 자연 바위처럼 벽이나 지붕없이 탁트인 공간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된다. 개성 만월대(滿月臺)나 첨성대가 대표적. 계룡대처럼 지역을 지칭할 때도 쓰이는 듯.
  • 단(檀) : 건축물보다는 말 그대로 제단(祭壇)을 지칭할 때 많이 붙는다. 사직단(社稷壇), 선농단(先農壇)
  • 원(院) : 보통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을 일컬었다. 조치원(鳥致院)이 대표적. 하지만 요즘은 꼭 그런 역참에만 붙는게 아니고 유교의 서원(書院)이나 선종(禪宗) 불교의 선원(禪院) 같은 곳에 붙기도 하고 여기저기 붙는 듯하다.
  • 원(園) : 정원(庭園)할 때 그 원. 소쇄원 같은 사례가 있다. 중국 같은 경우 이화원처럼 큰 경우도 있다. 원 또는 원소(園所)는 왕세자, 왕세자빈 또는 임금의 사친(私親)의 묘소에 붙이는 이름이기도 하다. 같은 자로 원(园)을 쓰기도 한다.
  • 분(墳) : 보통 무덤을 일컬는 명사로 쓴다. 고분 같은 식으로.
  • 능(陵) : 규모가 큰 무덤을 말하며, 보통 주인이 밝혀져 있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일컫는다. 태릉선수촌이 있는 태릉이나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이 있는 선릉이 대표적.
  • 총(塚) : 규모가 큰 무덤을 말하며, 보통 주인이 밝혀져 있지 않은 무덤을 일컫는다. 장군총, 천마총 등이 대표적.
  • 묘(墓) : 일반적인 무덤.
  • 탑(塔) : 원래는 불교건축물에서 유래한 건축물이나 최근에는 그냥 높은 건물이면 다 탑이라 부르는 듯. 원래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만 탑이라 불렀으나, 이후에는 부처에게 봉안하는 봉납품을 봉안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선종 계통에서 명성이 높은 고승의 사리를 모신 것을 부도(浮屠)라고 불렀는데, 최근에는 그냥 승탑이라고 부르는 추세인 듯하다.
  • 성(城) : 읍성 또는 산성.
  • 문(門) :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숭례문, 광화문 같은 큰 것부터 뒷간 막는 것까지 다 문이다. 물론 규모가 큰 문에만 이름이 붙는다.
  • 교(橋) : 다리. 선죽교가 대표적.


4. 건축물 일람[편집]



4.1. 전통건축[편집]



4.1.1. 궁궐[편집]




4.1.2. 성(건축)[편집]




4.1.3. 무덤[편집]




4.1.4. 사당[편집]




4.1.5. 서원[편집]




4.1.6. 향교[편집]




4.1.7. 관아[편집]




4.1.8. 절(불교)[편집]


절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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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상단
대웅전 | 각황전
적광전 | 비로전 | 화엄전 | 광명전
극락전 | 아미타전 | 무량수전 | 수광전
미륵전 | 용화전 | 장륙전
약사전 | 만월전 | 유리광전 | 보광전
문수전
관음전 | 원통전 | 보타전 | 대비전
천불전 | 불조전
나한전
응진전
영산전 | 팔상전
적멸보궁
중단
지장전 | 명부전 | 시왕전
조사전 | 영각
하단
삼성각
산신각
칠성각 | 북극전
독성각
용왕각
가람각
강당
설법전
보제루 | 만세루 | 구광루
기타 전각
생활공간
판전 | 대장전 | 법보전
범종각
요사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
불이문 | 해탈문
부속 시설
암자
선원





4.1.9. 고택[편집]



4.1.10. 정원[편집]


한국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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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지 않는 건축물





4.1.11. 그외 구조물[편집]




4.1.12. 기타문서[편집]




4.2. 근대 건축[편집]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항목에서 많은 사례를 볼 수 있다.


4.3. 현대 건축[편집]




4.3.1. 교통 인프라[편집]




4.3.2. 박물관/미술관[편집]



4.3.3. 북한[편집]


파일:북한 국장_White.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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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기 다른 시기의 세 건축이 만나고 있는 곳으로 높이 평가받는 공간 사옥.[2] 지금까지 남아있는 덕수궁의 석어당, 일제강점기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의 징광루는 대놓고 실내에 계단이 있는 2층이다.[3] 17~18세기: 금산사 미륵전, 법주사, 화엄사 각황전. 19세기: 경복궁[4] 기단은 남는다.[5] 지금 한반도의 강산에 소나무가 아주 많은 것은 녹화사업 때 소나무 중심으로 심었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고대부터 원래 자연적으로 소나무 비율이 지금처럼 높은 환경은 아니었다.[6] 면적에서는 안학궁보다는 작고 개별 건물의 크기는 황룡사보다 작다.[7] 심지어 금으로 된 집도 존재했다고 한다. 금입택이라고도 하는데 그것도 무려 35채가 신라 수도 서라벌에 존재했다고.[8] 갈색으로 칠하는 양식 자체는 고구려 건축에서도 사용하긴 했다.[9] 최영호. (2019). 고려시대 浮石寺의 역사문화적 성격. 석당논총, 73, 5-27.[10] 건물은 높이가 어느 정도 되었을 때부터는 더 높아지는 것보다 좌우 폭이 넓어질수록 위압감이 강하다. 높이는 63빌딩이 더 높지만, 건물의 위압감 자체는 피라미드가 훨씬 강한 것과 같은 맥락.[11] 그 이전 시대에는 거목들이 부족하지 않았다. 불교와 귀족 문화의 영향으로 금입택황룡사흥왕사안학궁 등 화려하고 장대한 건축도 있었다. 안압지에서는 각종 금동 건축자재들이 출토되기도 했다.[12] 건축물의 수평투영면적 1층의 바닥면적이 해당됨[13] 훼손이전 기준 약 16만 제곱미터 (출처: 예(禮)로 지은 경복궁, 임석재)[14] 총건평 8482평으로 약 2만8천 제곱미터[15] 총건평 5800평으로 약 1만9천 제곱미터[16] 약 15,643 제곱미터[17] 정면 87미터 측면 27미터[18] 기단의 규모가 정면 120미터 측면 30미터이다[19] 정면 84미터 측면 17미터[20] 정면 65미터 측면 19미터[21] 정면 51.7미터 측면 26.7미터[22] 정면 43미터 측면 23미터[23] 정면 34.4미터 측면 28.5미터[24] 이런 방식을 각 관아에 있는 객사건물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여수 진남관은 54미터x14미터의 길쭉한 평면을 하나의 지붕으로 덮어 면적만으로는 근정전 보다 큰 단일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전주 풍패지관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길쭉한 건물로 보일만큼 붙어있는, 비슷하지만 별개의 건물 3채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25] 정면 101미터 측면 23미터[26] 지붕이 보호하지 못하는 좌우 벽면에 비바람이 들이친다.[27] 기차 참조서적 : 한국 전통 목조건축의 결구법: 맞춤과 이음(정연상 저), 알기 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김왕직 저)[28]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29] 막상 상업이 발전했다는 식으로 일컫는 고려나 신라보다도,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더욱 민간 경제(상업, 수공업, 무역)의 발전이 나타났었다. 조선이 뒷 시대이므로 제일 상업이 발달한 시기가 조선 후기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 조합(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으며, 그릇[28], 자개, 칠기 등의 생활용품이 시장에 출시돼 대중화되었다.[30] 교역 역시 초기에만 외부적 요인들로 인하여 크게 타격을 받았을 뿐 후기로 갈수록 이전 고려시대 때 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고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꾸준히 쓰이던 시기 역시 유학이 확고히 자리 잡은 조선시대 때부터였다.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 교환, 현물 화폐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었고, 소수의 귀족들만이 주도하는 제한적인 무역만이 이뤄졌었다.[31] 건물에 붉거나 검은 옻칠을 하는 옻 단청이 조선 시대에는 잘 쓰이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는 단청보다 옻칠을 더 격이 높다 여겼다. 이에 대해서는 무령왕릉 항목 참조. 조선 말기까지 옻칠 단청은 실낱같이 명맥을 이었지만, 한국 전쟁으로 마지막 옻칠 건축이 불타며 현존하는 전통 건축에서 옻칠 단청이 쓰인 건물은 사라지고 만다. 옻칠 단청은 현대에 만든 한옥에서 볼 수 있다.[32] 고대의 경우 장식물도 원래는 금, 동화(구리꽃), 치미, 비단, 각종 기와 장식 등 금속 장식이 많았는데, 조선시대에는 달랐다. 금속 장식은 근대까지 쓰긴 했지만 고대만큼 건물 공포에까지 폭넓게 애용하진 않았다. 그래서 조선의 건축이 수수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여러 제약으로 인해 수백년간 장식에 대한 기술이 수요를 잃어버려 맥이 없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불교 건축, 공공 건축, 왕실 건축에서 지속적으로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기록 상에서는 조선시대 내내 일부 기술은 끊기고 새로운 기술은 생겨나고가 확인되기는 하나 대규모로 기술이 단절되는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장식 기술이 단절된 것은 6.25 전쟁을 거치고 현대에 와서 진행되었으며,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고 있다.[33] 대표적으로 경복궁 팔우정과 향원정, 덕수궁 석어당, 경북의 운조루[34] 법주사 팔상전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황룡사와 미륵사의 9층 목탑은 아파트 10층 아파트 높이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35] 고려 충렬왕 때 관후서의 '도선 일기'에 의하면 "땅은 다산(多山)을 양, 희산(稀山)을 음. 옥(屋)은 고루(높은 다락)를 양, 평옥을 음이라 한다. 우리 나라는 원래 산이 많기에 고옥을 지으면 반드시 국운이 쇠퇴를 부른다."고 한다.[36] 궁궐에 가보면 단층 주거인데도 방바닥의 높이가 성인 남성의 키보다 높다! 시골의 양반집도 사실 방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온돌과 바람을 고려한 설계.[37] 금단청의 금자를 황금 금(金)자로 흔히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비단 금(錦)자를 쓴다. 비단처럼 섬세하면서 화려하고 우아한 단청이란 뜻이다. 하지만 금단청을 칠할 때 실제로 금박을 쓰는 경우도 꽤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단 전체를 완전히 금박을 입히는 식은 아니다.[38] 일본 도쿄의 미국대사관을 그대로 베끼다시피 하긴 했지만 건축가는 미국 사람이며 미국의 모더니즘 사조에 해당한다. 해당 항목 참조.[39] 사실 2012년 완공 작품은 신관뿐 아니라 본관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