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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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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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연도
2011년
이름
하춘화
분야
가수
은관문화훈장(2등급)
파일:문화옥관.jpg
연도
2001년
이름
하춘화
분야
가수
옥관문화훈장(4등급)


파일:KBS 로고.svg 가요대상 대상[1]

남진
김상희
마음이 고와야지
참사랑

(1971년)

나훈아
하춘화
고향역
물새 한 마리
(1972년)


남진
하춘화
그대여 변치마오
영암 아리랑

(1973년)
나훈아
하춘화
고향역
물새 한 마리

(1972년)

남진
하춘화
그대여 변치마오
영암 아리랑
(1973년)


김세환
하춘화
옛 친구
난생 처음

(1974년)
남진
하춘화
그대여 변치마오
영암 아이랑

(1973년)

김세환
하춘화
옛 친구
난생 처음
(1974년)


김세환
이수미
사랑하는 마음
내 곁에 있어주

(1975년)
김세환
이수미
사랑하는 마음
내 곁에 있어주

(1975년)

김훈
하춘화
나를 두고 아리랑
대관령 아리랑
(1976년)


김훈
혜은이
모래탑
당신만을 사랑해

(1977년)


파일:MBC 로고.svg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수상

남진
그대여 변치마오
(1973년)

하춘화
난생 처음
(1974년)


송창식
왜 불러
(1975년)



하춘화
河春花 | Ha Chun-hwa


출생
1955년 6월 28일 (68세)
전라남도 영암군[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래미안 리더스원
본관
진주 하씨
신체
162cm, 50kg, A형
데뷔
1961년 노래 '효녀 심청 되오리다'
학력
서울수송초등학교 (졸업)
정화여자중학교 (졸업)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경남대학교 병설 산업전문대학 (가정학 / 전문학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 / 학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 / 석사[2])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3] / 박사[4])
가족
부모님[5], 4자매 중 둘째, 배우자, 자녀 없음
종교
천주교 (세례명: 세실리아)
사이트
파일:다음 카페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기부 활동
3. 학업
4. 대표곡
5. 기타



1. 개요[편집]


슈퍼스타가 된 트로트 영재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대한민국가수.

1962년 2월, 만 6세로 당대의 가수들도 발표하기 어려웠던 10인치 LP 스튜디오 앨범당년 7세 소녀가수 앨범으로 데뷔해 2023년 현재 데뷔 61주년[6]을 맞이한 전설적인 대가수.

데뷔 60주년에도 만 67세밖에 되지 않았다.


2.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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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의 재능을 알아본 하춘화의 아버지 하종오는 그녀를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했고 거기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게 한 뒤 가수로 데뷔시켰다. 개요에서 소개되었듯 1962년 7세로 데뷔하고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하춘화의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1971년 발표한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면서 꽤 많이 팔렸고 1971년,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서 이걸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가수상을 수상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다.

하춘화는 성격이 굉장히 대인배였는데, 보통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하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하춘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소외받고 있던 당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내 공연의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 꼭 이주일 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이주일을 자신과 같이 일하게 했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존경했다.

그 뒤 1977년 이리시(현 익산시)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 인근에서의 대규모 폭발사고로 인해 극장이 무너져내려 하춘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이 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여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다.[7] 이 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경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학업 및 결혼 준비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1981년에 다시 가수로 복귀해서 '우리 사랑 가슴으로', '연인의 부르스'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으며 1983년에는 자신이 아끼는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 가수들에게 나눠줬다. 1985년에는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으로 남한북한에서 각각 최고의 가수들을 상대방에게 파견하여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이 때 하춘화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공연을 했다.

파일:external/cmsimg.mnet.com/437132.jpg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8]가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고 1991년에 총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였고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다. 이후 하춘화는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연하의 남자'를 부르면서 자신만의 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로서 하춘화는 춤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다.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으나 2007년에 다시 복귀하여 '나이야 가라' 등 신곡을 꾸준히 발표했다. 학업은 계속해서 병행하고 있는 모양이며 2019년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2018년 발표)라는 노래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2.1. 기부 활동[편집]


하춘화는 평생동안 기부해왔다. 2011년 기자의 질문에 '200억 정도 될까요?'라고 어림 잡아 이야기했는데 더 될 수도 있다고 한다. 2021년 KBS2 연중 라이브에서 연예계 최고의 기부 스타 1위로 선정되었다. # 그녀는 기부하는 이유에 대해 "한 번도 (연예인으로서 수입을) 내 돈으로 생각한 적 없다. 이 돈은 나누기 위해 쓰라고 생긴 돈"이라며 “앞으로도 노래와 함께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밝혔다.


3. 학업[편집]


이 와중에도 하춘화는 공연과 학업을 병행함에도 불구하고 학업에도 열중하여 1994년고려대학교 자연자원대학원 최고 정책과정을 수료한 후 1998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였다. 2000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공연예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2006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예술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박사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대한민국 가수가 되었다.

다만 학위 경력상 제대로 된 일관성이 없다는 점은 비판받는다. 특히 동국대 석사 당시에는 대놓고 학교에서 학위 장사한다며 법대 학생들이 들고일어났었는데, 이 때문에 법학사 학위는 무산되고 대신 예대로 다시 들어간 것이다.


4. 대표곡[편집]


여기 적힌 목록도 전부는 아니다.

  • 효녀 심청 되오리다 (1962)
  • 아빠는 마도로스 (1966)
  • 물새 한마리 (1971)
  • 잘했군 잘했어 (Duet. 고봉산) (1972)
  • 영암 아리랑 (1972)
  • 강원도 아리랑 (1972)
  • 하동포구 아가씨 (1972)
  • 연포 아가씨 (1973)
  • 쌓인 정 (1973)
  • 알고 계세요 (1973)
  • 난생 처음 (1974)
• 숙녀 초년생 (1974) [동명의 영화주제곡]
  • 약속시간 (1975)
  • 우리 사이 (1975)
  • 대관령 아리랑 (1976)
  • 두줄기 가로수 (1977)
  • 당신이 올때까지 (1978)
  • 사랑했는데 (1981)
  • 그 누가 당신을 (1982)
  • 우리사랑 가슴으로 (1983)
  • 연인의 부르스 (1984)
  • 평양길 육백리 (1985)
  • 지금은 타인 (1987)
  • 타버린 마음 (1988)
  • 가을 바닷가 (1988)
  • 날 버린 남자 (1989)
  • 당신이 미워라 (1990)
  • 사랑은 길어요 (1991)
  • 밤이 무서워요 (1991)
  • 무죄 (1993)
  • 갈테면 가세요 (1995)
  • 항구의 여자 (1998)
  • 인생 (1998)
• 따로 따로 사랑 (2000) [40주년 기념음반 수록곡]
  • 연하의 남자 (2002)
  • 남의 속도 모르면서 (2003)
  • 당신쯤이야 (2004)
  • 왜 이제 왔어 (2005)
  • 사랑은 늘 그래 (2007)
  • 하여간 (2008)
  • 휘뚜루 마뚜루 (Duet. 이호섭) (2011)
  • 나이야 가라 (2014)
  •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 (2018)


5. 기타[편집]


  • 최연소로 가수 데뷔와 앨범 발매를 해서 기네스북에 오른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서 마이클 잭슨이 5살의 나이로 데뷔함으로서 그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고... 이렇다 보니 데뷔 60년이 넘었다는 말을 들으면 “그럼 80대세요?” 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하춘화를 구했던 이주일은 오히려 무명일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거둬들여 고정적으로 일하게 해줬다면서 살아 생전 하춘화를 마음 속 깊이 존경했다. 하춘화 역시 이주일을 평생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으며[9] 2002년 이주일이 사망했을 때도 당연히 빈소를 찾았다. 다만 이주일의 조사는 그를 생각하면 너무 사무친다는 이유로 고사했다고 한다.

  • 학사 3개, 석사 1개, 박사 1개로 학위를 5개 보유하고 있으며 국내 가수 중에선 가장 갯수가 많다. 방송통신대학교 시상식에서 시상소감으로 말하길 자매가 넷인데, 다른 자매와 달리 혼자 박사학위 없이 가수로 생활하다보니 학위를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 나이에 비해 엄청 일찍 데뷔했기 때문에 본인보다 연상인 웬만한 거물급 가수들인 남진(1965 서울 후레이보이), 나훈아(1968 내사랑), 조용필(1972 꿈을꾸리), 양희은(1971 아침 이슬), 혜은이(1975 당신은 모르실거야), 현철(1969 무정한 그대), 송대관(1967 인정많은 아저씨), 태진아(1973 내 마음 급행 열차), 최백호(1976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등보다 데뷔로는 선배다. 그녀보다 일찍 데뷔한 대표 가수들은 패티김(1961 썸머타임, 1년 위)과 이미자(1958 행여나 오시려나, 4년 위), 김용만(1953 남원의 애수, 9년 위), 명국환(1956 백마야 우지마라, 6년 위) 등이 있고, 데뷔 동기로 현미(1962 밤안개)가 있다. 1살 연하이자 동향 후배인 강진과는 데뷔 연차가 무려 25년 차다!

  • 전국노래자랑에서 첫번째 초대가수로 자주 출연한다. 1993년 군산 편과 2002년 서귀포 편은 각각 두번째, 세번째 초대가수로 나왔다. 1992년과 1993년에는 송해가 하춘화를 초대가수로 소개하면 "하춘화 양"이라고 하였지만[10] 1993년부터 "하춘화 씨"로 부르고 있으며 현재로써는 2019년에 출연한 이후, 현재까지 초대가수로 나오지 않고 있다.

  • 위에 거론된 이미자와 패티김과 관계가 특이한데, 이미자와 패티김이 선배님이라 하지 말고 아줌마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이미자하고는 14살, 패티김하고는 17살로 맏딸과 늦둥이 딸 나이 차이나 호칭을 아줌마라고 부르고 있다. 사유는 그게 편해서라고...


  • 개그맨 김영철이 하춘화를 대상으로 한 성대모사로 유명해진 바 있다. 물론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하도 오랫동안 하다 보니 하춘화 본인도 재미를 들렸는지 아예 하춘화를 따라하는 김영철을 따라하는 하춘화를 기믹으로 내세우기도 김영철과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같이 출연했고, 광고도 함께 찍었다.

  • 1992년 KBS 1TV의 쇼 주택복권 방송에서 준비하시고 쏘세요에 출연했다.

  • 아침마당 수요일 코너 <도전! 꿈의 무대>에 초대가수로 출연하고 있다.

  • 나이가 든 동시대 연예인들과 달리 젊은 층들의 음악도 듣고 춤도 추는 듯 하다. 한때 예능에서 소녀시대의 춤을 추기도 했다. 본인 나이도 젊다.

  • 이자벨 아자니가 태어난 바로 다음날 태어났다. 당연히 나이는 동갑이다.

  • 하춘화의 동창에 의하면 하춘화가 처음 전학을 왔을 당시 노래를 불러달라는 선생님의 요청에 "마이크가 없어서 노래 안 해요." 라며 거절했었다고 한다.


  • 대한외국인 100회 특집에서 2명을 이기며 맹활약을 하였다.


  • 하춘화는 공연 중 못으로 쏜 새총을 맞은 적이 있다고 한다. 무대 중에 이마에 돌을 맞은 적도 있으며 화재 사건도 겪은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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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영암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잠시 살다 광주광역시(당시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서울로 상경하였다.#[2] 석사 학위 논문 : 韓國歌謠의 原流와 變遷에 關한 硏究 : 新民謠와 트로트歌謠 比較를 中心으로(한국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 : 신민요와 트로트가요 비교를 중심으로, 2000. 8).[3] 예술철학 전공[4] 박사 학위 논문 : 社會變動期의 大衆歌謠와 大衆情緖의 相關性 硏究 : 韓國 1970年代 産業化와 都市化 過程을 中心으로(사회변동기의 대중가요와 대중정서의 상관성 연구 : 한국 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을 중심으로, 2006).[5] 아버지 하종오 씨는 2019년 7월 8일 향년 10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4년 뒤 모친 김채임 여사도 2023년 11월 28일 향년 101세로 세상을 떠났다.[6] 본인은 앨범 녹음을 시작한 1961년을 정식 데뷔 년도로 친다.[7] 이런 인연으로 2002년 이주일 장례식 때 조시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너무 가슴에 사무쳐서 못할 것 같다며 고사했다.[8] 개그맨 김영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모창하던 그 노래이다.[9] 이후 공연 관계자들에게 자신이 공연하는 쇼의 사회자는 이주일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공언했다고 한다.[10] 물론 1992년과 1993년 때는 양 이라고 할 때도 있고 씨 라고 할 때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