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먼 리코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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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먼 조지 리코버
Hyman G. Rickover


파일:b4EWbsxr.jpg

이름
Hyman George Rickover[1]
(하이먼 조지 리코버)
출생
1900년 1월 27일
러시아 제국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 마코프[2]
사망
1986년 7월 8일 (향년 86세)
미국 버지니아 주 알링턴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복무
미합중국 해군(1918–1982)
최종 계급
해군 대장
주요 이력
미 해군 원자력국장 (Director of Naval Reactors)
주요 참전
1차 대전[3]
중일전쟁
2차 대전
태평양 전쟁
주요 서훈
해군 공로훈장
의회 명예 황금 훈장[4]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엔리코 페르미 상 수여[5]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초기 경력
2.3. 미 원자력 해군의 아버지
3. 리코버의 유산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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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
[1] 출생당시 이름은 하임 고달리아 리코베르(חיים גדליה ריקובר)였지만 아버지가 먼저 퍼스트네임을 하이먼으로 바꿨고, 본인은 히브리어로 신은 위대하다(God is Great)라는 뜻을 가진 고달리아라는 이름을 잘 쓰지 않다가 어느 순간부터 조지라고 바꿔서 부르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하이먼 G. 리코버 또는 하이먼 리코버라고 불렸다. 사관생도 시절 별명은 리키.[2] 바르샤바에서 약 80km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3] 대전시기 사관생도는 참전중인 것으로 간주 되었다.[4] 두번 받았다.[5] 미국 에너지부에서 주관하는 상으로 에너지 개발, 사용 또는 생산에 관한 업적을 이룬 전 세계의 과학자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묘비명: 원자력 해군의 아버지[6]


"끊임없는 독설로 부하들의 진을 빼놓는다. 관료주의를 산산조각 낸다. 거래하는 군납업체들을 돌아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일 하나는 똑 소리 나게 잘 한다."

미국 시사주간지 TIME


"그 사람은 추진력이 대단했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했어요. 자기를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제거해버렸죠."

미 해군 퇴역 장교 W.I 마틴 (히스토리 채널 '영웅이 된 전함 - USS 노틸러스' 편)


1. 개요[편집]


1900년 1월 27일 러시아 제국 마코프[7] 출생. 1986년 7월 8일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타계. 최종계급은 해군 대장.

미합중국 해군의 역사에 남긴 영향력을 보면 소련 해군의 어머니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원수나 중국 해군류화칭 상장과 매치된다. 고르시코프 원수인 양 2차대전부터 냉전 막바지까지 스스로 하드캐리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고르시코프와 류화칭 제독이 스스로 해군의 1인자에 올라서 폭넓은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과 달리 리코버는 오로지 원자력이라는 한 우물만을 팠다는 차이는 있으나, 오늘날 유일무이한 세계해군을 보유한 미국의 군사전략[8], 나아가 외교전략까지 365일 24시간 전 세계 제해권 장악은 리코버의 원자력 해군 육성 프로젝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그의 영향력과 업적은 고르시코프와 류화칭 제독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00년 1월 27일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 마코프에서 봉제공의 아들로 태어난 리코버는 5살이 되던 1905년 어지러운 시국을 피해 일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를 한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당시의 이민자 가정이 그리하였듯 9살때 지인의 공장 기계를 켜두고 3센트를 받는 일을 시작으로 어린시절부터 생업 전선에 투입됐고 학업과 일을 병행하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전신국에 취업해 일하던 리코버는 같은 이민자 출신 상원의원의 추천서를 받으면서[9] 1918년 예비번호 3번으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2.2. 초기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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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생도 시절의 리코버

엄연히 미국해군사관학교 1922년 졸업생[10]으로 중일전쟁제2차 세계 대전 때도 실전에서 잠시나마 활동하고 맨해튼 계획에도 관여하긴 했지만, 그의 행보는 군인이라기보다는 군 소속 기술진이었다. 리코버 제독의 커리어는 함대를 지휘하는 체스터 니미츠윌리엄 홀시처럼 현명하거나 싸움닭 기질의 제독과는 거리가 멀다. 1940년대 후반 해군이 제독들의 반란으로까지 이어지는 공군과의 마찰로 뒤숭숭할 때 리코버는 진급 잘되는 항해/항공 병과가 아닌 바다와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테네시주 오크 리지에서 원자력을 공부하고 잠수함 연구에만 실컷 전념했으며, 상부와의 관계도 원활하지 않았다.

1937년 노구교 사건과 중일전쟁 개전 당시 리코버는 미국 동양함대 소속 상하이 앞바다에서 활동하던 소뢰정 핀치 (USS Finch)를 지휘했고, 미국 동양함대가 재중 미국인들을 안전철수시키는 작전을 완료한 이후 당시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카비테 해군 조선소 정비소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939년 미 해군 설계국 전기부 부부장으로 승진하고, 진주만 공습 이후 박살난 USS 캘리포니아 정비를 위해 하와이로 간 적이 있으나 이 이후로 실전 경험은 한 번도 겪지 않고, 2차대전 내내 행정직만 전전했다. 리코버 본인도 군인으로서 명예욕이나 호승심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지 2차대전 내내 전선 지휘관으로 보직변경을 여러차례 요청했으나 늘 반려당하거나, 받아들여져도 아싸 드디어 남들처럼 전쟁하러 간다 싶더니 펜실베이니아 해군 조병창, 그나마 전선에 가장 가까웠던 보직도 오키나와 해군 수리소 따위였다. 물론 해당 위치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전쟁영웅 소리 들을 만한 최전선이 아닐 뿐이지 강대국의 총력전에선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란건 미 해군 당국이나, 리코버 본인이나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고, 해당 자리에서도 리코버는 최대한 능력을 살려 2차대전 끝날 때는 공로훈장까지 받고 아는 사람들 사이엔 확실히 유능하긴 하지만 성격은 지랄맞은 미 해군 내 최고의 전기공학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미 30년 넘게 복무한 그는 진급누락을 두 번이나 당했고 화려한 실전 경험이나 공훈도 없었지만[11], 1953년 6월 말부로 예편당할 위기에 있었다. 그 당시 해군의 다른 간부들이 구축함에 원자로 탑재를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리코버는 뚝심으로 "안돼! 무조건 잠수함 먼저!" 라고 밀어붙여서 원자력 잠수함 개발 사업을 발족하고 원자력 항공모함 사업까지 추진하며 겨우 군생활을 이어갔다. 리코버가 이렇게 잠수함에다 먼저 원자로를 탑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원자로 탑재로 얻어지는 이익이 수상함보다 잠수함에서 더 크다는 결론을 얻어냈기 때문이었다. 잠수함 항목에서 보면 알겠지만 잠수함 승조원들은 해군에서도 가장 고된 노동강도와 숙련도를 자랑하는, 자기 직별에 관한 한 그 어떤 수상함 승조원보다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 프로들인데, 리코버의 말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건인 원자로를 관리하는 첫번째 실험은 해군 최고의 테크니션들인 잠수함 승조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논리였다. 무엇보다 잠수함은 원자로를 탑재하면 잠항지속 능력이 크게 올라간다는 점에서 잠수함 탑재시 얻어지는 이익은 수상함에 비해 매우 높았다. 실제로 오늘날 미 해군 항모전단의 무적함대화에는 겉으로 보이지 않고 물밑에서 잠항거리 걱정없이 얼마든지 따라다니는 원자력 잠수함들이 큰 공을 세우고 있다.

만약 이때 리코버가 높으신 분들에게 찍히거나 해서 1953년 6월 말부로 옷을 벗었다면 미 해군의 원자력 해군화는 10년 정도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미군 원자력화만 늦어지면 차라리 다행이지, 원자력 해군화를 통해 얻어진 기술로 최초의 민간 원자력 발전소를 만든 그의 공로 또한 세워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2.3. 미 원자력 해군의 아버지[편집]


리코버는 1949년 대령 계급으로 해군핵추진프로그램국장(Director of Naval Reactors)이 되었고, 1953년 진급누락을 2번이나 당한 리코버는 퇴역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가 군복을 벗게 됐을 때 핵추진프로그램의 폐지 또는 유명무실화를 우려한 부하들은 리코버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높으신 분을 꼬셔서 리코버의 제독 진급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설[12]을 냈고 큰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아이크 행정부와 의회에서는 해군부의 제독 진급심사위에다 민간인들을 포함시키기로 해서 우여곡절 끝에 퇴역을 면하고 제독이 된다.

이후로도 그는 틈만나면 해군부의 높으신 분들이나 제독들과 쌈박질을 이어갔다. 사실 그는 쌈박질이고 나발이고 원자력 잠수함과 항공모함 등을 만드는 데에만 골몰하고 싶었지만 해군 내에서 그에 대한 평판은 진짜 개판이었다. 해사 생도 시절부터 자신에 대하여 엄격하다 못해 잔인할 정도로 스스로를 단련했으며, 이런 자기관리는 평생을 이어졌는데 그 자기관리는 보는 사람이 기가 질릴 정도였다. 흔히 리코버 본인은 까다로우면서도 완벽을 중시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융통성의 결여로 이어지다 못해 "구부러지지 않고, 부러지지도 않는다"는 신조로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이상적인 인물상이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인물이라 하는데, 그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한테도 가혹했다. TV에 출연해서는 "나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그건 댁(ABC 월드 뉴스 앵커 다이앤 소이어)도 마찬가지"라는 패기 넘치는 독설을 날려서 수많은 이들을 아연실색케 했다.[13] 대외적인 이미지메이킹에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으며, 대인관계 면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 뺨치는 독불장군이었다.[14] 원자력이라는 물건을 다루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더욱 까다로워져야 했고, 인재 선발에 있어서도 더욱 악독해야 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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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수함 승조원이나 조함병과 장교/사병/군무원들을 면접으로 뽑을때면 의자의 앞부분 두 다리를 수 인치씩 잘라 불편한 자세로 앉게 하고 블라인드를 올려 면접자가 햇빛을 눈에 직빵으로 맞게 하며 몹시 불안한 분위기에서 면접을 진행했고, 진짜 가능한 것인가 싶은 기상천외한 과제를 내주며 면접자들의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그의 면접 스타일이나 잔인한 면접 센스등을 보면 네이비 씰 교관이 따로 없었을 지경이었다나. 예시로 든 위 사진은 리코버 제독이 후일 4성 제독의 자리에 오른 스티브 화이트 해군 제독을 면접한 장면을 재연한 것이다. 당시 리코버 제독이 화이트 제독에게 낸 과제는 "10초안에 나를 화나게 만들도록. 못한다면 귀관은 나가리다." 화이트 제독은 처음엔 그 말에 당황한 듯 했지만 5초가 채 지나기 전에 책상을 뒤엎어서 리코버 제독의 속을 뒤집어 놓으면서 당당히 합격했다고 한다.

다른 예를 들면 한 장교가 면접을 볼 때의 일화인데, 당시 리코버는 그 장교에게 '귀관은 침몰직전의 배에 5명의 동료와 함께 있으며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귀관 뿐이다. 그걸 다른 5명에게 잘 얘기할 수 있나?'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장교가 자신있게 "예"라고 답하자 갑자기 5명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디 장담한 대로 해보게나." 라고 말했다. 그 외의 사례.

이런 갈굼의 정도는 온누리 만인이 평등했다보니 리코버가 신나게 갈궜던 이들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며 되려 자신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도 여전히 리코버를 자신의 스승으로 대했으니 그렇다 쳐도, 리코버와 싸웠던 사람들의 영전이 발표된 후 보복성 있는 제재가 가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해군 내의 최고 브레인으로 평가받던 줌왈트도 리코버와의 면접에서는 리코버의 언변에 낚이기를 반복하다 빡대갈 새끼(stupid jerk)소리나 들으며 물러나야 했는데 그렇게 칼을 갈던 줌왈트는 해군참모총장이 된다. 줌왈트는 해군참모총장이 된 이후에 원자력 수상함 예산을 대폭 감축했는데, 개인적인 감정에 따른 뒤끝이라기보다는 리코버와 줌왈트의 성향 차이에서 기인한 게 컸다. 리코버는 완벽한 원자력 해군 자체를 추구하는 완벽주의였지만, 줌왈트는 하이로우 믹스 개념을 통해 저렴하면서도 실속 있는 함선들을 도입하여 운용의 경제성과 유연성을 확보한다는 실용주의를 택했기 때문이다.당연히 리코버는 이에 대해 노발대발.

1959년 핵잠수함 노틸러스함를 지휘하여 최초로 북극을 횡단한 윌리엄 앤더슨 함장은 핵잠수함 함장 선정 면접에서 "1년간 읽은 책의 제목과 그 내용을 제시해보게"라는 리코버의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해서 함장에서 탈락할 뻔 했으나, 나중에 해명과 함께 자기가 읽은 책의 목록과 내용을 동봉하여 합격하였다. 이런걸 보면 배경을 빡세게 잡은 면접에서는 응시자가 당황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아량은 있거나, 혹은 엔지니어의 주요 덕목 중 하나인 문제해결 실패 후 사후 수습절차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었던 것일 수도 있다.많은 사람들 혹은 조직들이 프로젝트의 실패를 정치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버티다가 조기에 사후수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서 문제를 오히려 더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을 생각해보자. 실제로 원전 사고 중에서 사후수습에 대한 대처를 정말 잘못해서 노심용융 사태까지 터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대표적 사례다. 스컹크 웍스의 전설 켈리 존슨의 성향도 비슷한 데가 있다.(단, 켈리 존슨은 영업도 잘 했다.) 걸핏하면 하급자들을 손대고 갈궈댔다지만, 보고 중에 실수나 잘못을 알아채고 자수하고 대안을 생각해내면 용서받았고, 끝까지 - 수치로 증명되는 설계와 보고서에서 - 뭘 잘못했는 지 모르면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또한 해군사관학교에서 인문학적인 내용 대신 실용적인 기술을 우선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하게 말하자면, 해사는 원자력 해군의 예과학교(Preparatory School)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해사를 기술자 양성소로 만들자는 것이자 좀 깊게 막나가자면 해사 무용론과도 연계될 수 있는 사항이었다. 물론 인문학 교육은 생도들이 알아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기 위해 공교육에서의 철저한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건 덤. 이건 해군사관학교 및 해군 교육 훈련 과정을 넘어서서 아예 미국의 공교육 전체를 손봐야 하는, 너무나도 스케일이 큰 방안이었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원자력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감독하지 않으면 미국판 K-19 같은 사고가 날 물건이기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일관된 잔인함을 견지했어야 하는 리코버의 커리어였지만, 현실과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개인의 평판에 있어서는 악수 중 악수였다. 그래서 평소 항해/항공 그 어느 쪽과도 먼 거리가 유지될 정도로 인맥관리가 철저히 개판이었던 리코버의 이런 거침없는 막가파식 주장에 학을 뗀 고위 간부들이 매우 많았다. 사실 자기가 자주 부대꼈던 잠수함 계통 인물들 중에서도 존 매케인 2세 같이 척을 지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

하지만 따뜻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 또한 가지고 있었다. 미 해군의 잠수함 설계에 대해 "잠수함에 아드님이 타고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하고 일침을 놓은 것으로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해당 이야기의 출처 원자로의 기밀설계 방법을 두고 당시 전문가집단이 토론을 벌였는데, 일반적인 볼트고정+개스킷과 용접방식을 혼용하느냐 아니면 볼트고정+개스킷만 사용하느냐를 두고 리코버가 주도하는 해군 엔지니어측과 민간 엔지니어측의 의견이 갈렸다. 해군 엔지니어측은 용접과 개스킷을 둘 다 사용해서 완전히 보강하자고 주장했고, 민간 엔지니어측은 볼트고정+개스킷 설계만 가지고도 충분하다고 주장한 것. 그러자 리코버는 직접 민간 엔지니어들을 모아놓고 "그 알량한 개스킷쪼가리 하나만 가지고 원자로 용기 뒤에서 넘쳐나는 방사성물질을 틀어막고 있는 원자로 앞에 댁들 자식들을 집어넣고 싶소?" 라고 설득했고, 이러한 설득에 다른 민간 전문가들도 리코버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그동안 아무도 해봤던 적이 없는 원자로라는 물건에 대한 설계 방향을 설정하는 공감대 형성에 해당하는 이 일화는 영 엉뚱하게도 리코버가 잠수함 예산을 가지고 의원들과 언쟁을 할 때 써먹었다는 이야기로 와전된 경우가 많다.

리코버 제독은 1982년 존 리먼 해군장관에 의해 예편 "당하다"시피 퇴역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깐깐하다 못해 강경한 성격이 서로 수시로 부딪혔기 때문이다. 해군의 고질적 관료주의에 철퇴를 날리려는 기조 등에서는 두 사람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양측 모두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이었던 탓에 이 불화는 결국 리코버 제독의 퇴역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때 리코버는 82세였다. 이 때까지 현역으로 있는 장교가 몇 명이나 있을 지 생각해 보면 무섭다. 사실 제자였던 지미 카터가 1976년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면 좀더 일찍 예편하기는 했을 것이다.

해군장관과의 갈등 외에도 그는 1970년대 후반 로스앤젤레스급 잠수함을 대체할 후속 공격원잠 구상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인사들에게 무자비하게 보복했고(이 문서의 처음에 등장한 "리코버 제독은 자신을 방해하는 이는 누구든 제거했다"는 회고는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 결과 해군 내에서도 리코버 제독이라면 이를 가는 적이 너무 많은 상태였다. 미 해군 잠수함 커뮤니티의 화합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리코버 제독의 예편이 도움이 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물러난 후 자기들이 원하던 작고 민첩한 공격원잠을 구상해본 잠수함 관계자들은 다시 리코버 제독이 옳았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바라던 컴팩트한 고출력 원자로는 도무지 안전하지가 않았고,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소형 티타늄 선체는 의회에 예산을 달라고 할 수가 없을만큼 끔찍하게 비쌌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모두 소련 해군이 알파급시에라급 공격원잠에서 겪은 문제였지만, 소련 해군 운용실무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면 몇년 뒤 냉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미 해군으로서는 아직 알 방법이 없었다. 결국 미 해군 잠수함대는 리코버 제독이 마련한 "크고 안전한 잠수함"의 토대로 돌아가 차기 공격원잠을 설계했다. 그것이 바로 시울프급 잠수함이다.[16]

3. 리코버의 유산[편집]


"후회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제가 왜 후회를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한 일들은 우리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의 승인을 통해 이루어진 일들이고 저는 제가 한 일들이 이 나라의 평화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경찰이 여러분들의 안녕을 지켜 주는 것처럼 여러분들은 우리의 군대가 외부로부터 우리를 공격하는 것을 막기 때문에 안전하게 살고 계시는 겁니다. 원자력 기술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 개발 중이었고, 제 임무는 미 원자력 해군의 성장이었는데, 저는 그걸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전역 직후 강연회에서 해군 원자력 개발에 대해 후회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오늘날에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등으로 원자력을 좋지 않게 보는 의견이 강해지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인 이용이 현대 문명의 발전에 있어 한 획을 긋고 현대 문명의 수준을 현재단계까지 급속도로 끌어올린 요소임은 부정할 수 없다. 원자력 에너지는 잘못 관리하면 환경과 인류에게 있어 전대미문의 재앙이 될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잘 관리만 한다면 효율성 면에서 현존하는 그 어떤 에너지원과도 비교를 불허하며 관리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친환경적인 에너지이기 때문. 물론 뒷처리가 힘든데다가 사고라도 한번 터지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는 너무도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해서 말이 많은 것이지만.

리코버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기까지 해군 핵추진프로그램국장을 역임했다. 원래 이 보직은 끽해야 준장 보직이었지만, 리코버가 수십년간 해놓은 일이 워낙 많아서 원자력 해군의 위상이 심히 높아졌기 때문에 이후로도 계속 4성 제독이 보임되고 있다. 다만 한번 보임되면 8년쯤 복무하는 건 예사라 리코버 이후 10명이 안된다. 리코버가 49년부터 82년 1월까지 해먹었던지라 2012년 착임하고 2015년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된 1982년 군번 존 리처드슨 제독은 리코버의 괴이한 면접을 겪은 바 없는 첫 국장이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강제 예편 압박을 당했고, 수많은 후배 제독들에게 괴팍한 늙다리 취급을 받았지만, 특유의 강한 기지와 의지로 원자력 해군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틸러스를 비롯한 원자력 잠수함으로 북극점을 횡단하고 진주만에서 영국까지 잠항하는 해저 2만리 실사판을 찍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더니 오늘날 미 해군의 상징인 엔터프라이즈, 니미츠 등을 만들어냈고, 그 과정에 쌓은 기술과 경험을 토대로 쉬핑포트 원자력 발전소의 설계 및 운영을 감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조건 기밀유지 만을 외치지 않고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하고 평화적인 이용을 위해 군이었다면 기밀급이었을 정보들을 대폭 공개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들의 원전 설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그러면서도 철저한 관리, 감독을 통해 자신이 해군에 있는동안 군에서 '원전 무사고'를 이끌었다.[17] 냉전 기간 동안 미 해군은 단 한 건의 원전 고장도 일으키지 않은 반면[18] 소련은 두자릿수나 원전 사고를 냈다.

4. 여담[편집]


어떤 부하 장교의 보고서가 개판이길래 "해사에서 국어(영어)공부나 했냐" 하고 훈계했더니 해사에서 문학상 두번이나 받았던 해당 장교는 약이 올라서 "이게 무슨 존 밀턴의 에세이 같은 거라도 됩니까?" 하고 툴툴대길래 "아 그래? 그럼 밀턴의 소네트[19]를 하나 읊어보도록." 해서 무작위로 떠올려서 읊어내려가다 막히는 부분에서 우물쭈물하던 것을 그 부분부터 본인이 제대로 이어나가면서 끝마무리를 짓고 그 장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뽑은 뒤에도 엄격해서, 식당에서 밥 먹을 때 간을 먼저 보지 않고 소금부터 치는 사람들은 모조리 쫓아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그야말로 일명 압박 면접의 대표적인 인물.[20]

로스앤젤레스급 원자력 잠수함에서 유일하게 사람 이름을 딴 함정은 바로 USS 하이먼 G. 리코버(SSN-709)로, 리코버가 사망하기 2년 전에 진수되어 이름이 붙었다.[21]

SSN-571 USS 노틸러스의 60주년 기념식. 명명이 발표되자 참석자 전원 기립박수...[22]

로스앤젤레스급 리코버는 20여년이 지나 퇴역했지만, USS 노틸러스의 60주년 기념식[23]에서 리코버의 미망인 엘레노어 베드노비츠가 지켜보는 가운데 레이 메이버스 해군청장이 버지니아급 SSN-795 USS 하이먼 G. 리코버의 명명을 발표하였다.[24] 원자력 잠수함의 개발자를 기리는 데에 있어 적절한 예우라 하겠다. 비슷하게 시울프급에도 인명을 따온 함정이 있는데, 이는 USS 지미 카터다. 그런데 그 지미 카터는 리코버의 휘하에서 원자력 잠수함 개발에 참여하고 승조원으로 복무했던[25] 양반이니... 카터는 해사를 820명 중 59등으로 졸업했는데, 카터가 복무할 당시 대령이었던 리코버는 그런 카터에게 이렇게 물었다. "최선을 다했나?" 그러길래 카터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답했다가 이를 고쳐서 "솔직히 가끔씩은 설렁설렁 한 감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나온 리코버의 말. "WHY NOT THE BEST?"("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이후 카터는 이 말을 자신의 좌우명 비슷하게 달고 살았으며 자서전 제목으로도 썼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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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그리고 대통령.[27]

지미 카터는 그 인연으로 대통령 재임기간에 자신의 스승이었던 리코버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였으며, 후임 레이건 행정부에서 리코버가 동업자의 뇌물수수 혐의를 억울하게 뒤집어쓰고 수사를 받으며 무혐의가 드러났음에도[28] 군복을 벗는 꼴을 보며 노장에 대한 예우가 부족하다며 레이건 행정부를 깠다.

자기 휘하에 있던 지미 카터와의 대화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원자력이 무기(군함의 에너지원이 아닌 적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싫어하며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원자력이 개발되지 않는 사회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원자력 전문가였던 리코버는 자신이 원자력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원자력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가 담당했던 분야도 항상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자력 분야였지, 저 석기시대용 무기의 개발 및 배치 등에 대해선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리코버의 휘하에서 복무했던 시어도어 로크웰이 저술한 리코버와의 복무기간을 돌아본 회고록(The Rickover Effect : The Inside Story of How Adm. Hyman Rickover Built the Nuclear Navy)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그의 휘하에서 복무했던 경험이 있는 前 해군참모총장 제임스 D. 왓킨스 제독[29]이 미국 출간 당시 서문을 쓰기도 했다. 손원일함의 초대 인수함장을 지내고 95잠수함 전대장을 역임한 대한민국 해군 최일 대령(해사40기)[30]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사관후보생 108기로 해군 정훈관으로 복무 중인 김문수 중위가 번역을 맡았다. 한국어로 리코버 제독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인데, 정작 역자들은 로크웰의 문장이 워낙 약을 빤듯이 현란하게 쓰여졌고(물론 역자들이 전업 번역가가 아니라서 더 어렵게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핵물리학/화학 용어들도 많아서 고생을 했다고.

미 해군 역사상 최장 복무 기간인 63년을 채우고 대장으로 전역했다. 리코버 제독보다 오랫동안 복무한 장성들은 해군에선 전무했으며, 타군에서도 설령 있더라도 종신계급이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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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USS 노틸러스싸제 양복을 입고 시찰한 리코버의 모습.


USS 노틸러스의 구동계 구조를 같은 싸제 양복을 입고 설명하는 리코버의 동영상.

한평생을 군인으로 살다 갔는데 그가 공식석상에서 찍힌 사진들은 대부분 그냥 양복 차림이다. 이 할아버지가 군인이라 하면 모르는 사람들은 예비역이겠거니 한다. 리코버의 사진을 구글링해보면 정복, 특히 대장 수장을 단 동정복 사진은 정말정말 찾기 힘들다. 군복 입으라 하면 아주 질색을 했던 사람이라 해군사관학교에 자기 이름 딴 기념관을 세워준다고 준공식에 초대할 때도 그냥 양복 입고 가려던 것을 해군장관이 뜯어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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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못해 정복을 입고 해사에 방문했을 때의 리코버. 옆의 중령 정복 입은 여성은 엘레노어 베드노비츠로, 리코버의 두번째 부인이다. 해군 간호장교로 근무하며 중령까지 진급했는데, 환자로 찾아온 리코버가 엔터프라이즈 가볼래요?[32]라고 꼬셔서 데이트를 했고 결혼까지 했다. 이 시절의 일화도 가관인데, 여군의 함정 근무를 되도록 꺼리던 이 시대에 간호장교로서 항공모함에 들락거릴 일이 별로 없었던 엘레노어는 신기해하며 엔터프라이즈의 함장[33]에게 "정복 입고 갈까요?"라는 질문을 해 "해군 장교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지" 하는 대답을 들었는데, 리코버한테 얘기를 했더니 "에라이 나도 안 입는데 알 게 뭐야(...)"하는 소리에 그냥 사복 차림으로 엔터프라이즈에 승선했다고 한다.

미해군의 역대 제독들 중에 까다로운 성미와 불 같은 성질을 갖추고, 허구한 날 주변 인물들과 싸우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업무만큼은 똑부러지게 처리하던 제독은 리코버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리코버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군경력을 시작하던 시기에, 미해군을 이끈 어니스트 킹도 리코버에 밀리지 않는 개성과 업무 능력의 보유자였다. 다만 원자력 추진의 전력화를 위한 연구 업무에만 매진한 리코버와 달리, 킹은 미해군 참모총장답게 항공모함에서 잠수함까지 온갖 종류의 함선에서 근무하였고, 지휘와 참모 그리고 행정 업무까지 두루 섭렵한 팔방미인형 제독이었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잠수함 영화 크림슨 타이드에서 함장 프랭크 램지가 핵 미사일 발사 절차의 교육과 함께 전략 원잠 함장 자리를 리코버에게서 직접 임명받았음위에서 언급한 좆같은 면접을 통과한건가, 라떼는~을 언급한다.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두 편 존재한다. 하나는 인터뷰 형식의 '리코버 제독', 또 하나는 '리코버: 핵 추진의 탄생'

역사 대전략 게임 HOI4에서 미국측 잠수함 특화 해군 장성으로 등장한다. 독일이 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러시아가 아닌 프랑스, 영국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터졌으며 미국에서 또한번 내전이 터지는 가상 역사를 배경으로한 해당 게임의 인기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러스트벨트와 동북부 공장지대를 근거지로한 사회주의 반군인 전미노조연맹의 해군 제독으로 등장한다. 육군의 모리스 로즈 장군처럼 이민자 집안에 유대인으로서 차별받던 한, 신기술을 다루는 소장파 군기술자로서 진보적인 성향과 그로 인해 보수적이고 완고한 군 상부와 충돌하던 현실과 맞물려 증폭하여 생디칼리즘으로 넘어갔다는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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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을 본다면 가히 이런 칭호는 아깝지 않음을 알 수 있다.[7] 이곳은 현재는 폴란드의 영토다. 리코버는 어릴적에 이민을 온 유대인.[8] 소련쿠바에 핵미사일을 갖다놓자 엔터프라이즈가 소련 봉쇄에 나섰고, 9.11 테러가 터지자 테러 다음 날 아침 파키스탄 앞바다에 엔터프라이즈 항모전단이 전개되었다. 미국과 소련-러시아 간 북극해 바닷속 암투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9] 미국의 사관학교 입학 의무 사항 중 하나로서 입학 신청자들은 해당 거주 주의 연방상원의원의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 실제로 연방상원의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사관학교 입학 희망자들이 추천서를 받고자 할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개시해놓았다.[10] 에놀라 게이 승무원으로서 리틀 보이를 공중에서 조립하여 떨궜던 윌리엄 파슨스와 동기이다.[11] 위를 보면 알겠지만 리코버 입장에선 정말 억울한 일이었다. 리코버는 엄연히 남들처럼 목숨걸고 싸우면서 실전에서도 함선들을 지휘하고 싶어서 보직변경 요청도 여러 번 했지만 군행정가로서 그의 진면목을 파악하고 이쪽으로만 굴린 건 미 해군 당국이었다.[12] 대충 말해서 "리코버가 만든 배 없이는 앞으로 싸우지도 못할 똥별들이 지들 밥그릇 챙기려고 리코버를 견제한다" 같은 내용.[13]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앵커는 이 사람에게 멍청하다는 말 듣는 것은 부끄러운게 아니라고 받아넘겼다(...)[14] 하지만 맥아더는 대외적인 이미지를 꾸미는데 천재적이었고 주위에는 예스맨만 득시글거렸다.[15] 초기 원자력이라는 것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그 위험성이 증명되어가는 시기였기에 그의 시니컬하고 괴팍한 성격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원자력 해군을 만드는 데에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인류가 원자력을 사용한 직후부터 현재까지 민간이나 군에서 일어난 원자력 관련 사고들을 보면 부주의로 일어난 인재(人災)가 태반이다.[16] 하지만 이렇게 건조한 시울프급은 아무리 미 해군이라 할 지라도 너무 고가였기 때문에 3척으로 끝났고, 퇴역하는 로스앤젤레스급의 빈 자리는 연안작전특화 + 보다 저렴한 버지니아급 잠수함으로 채우게 되었다.[17] 다만 민간에서는 사고가 나긴 났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있었던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대표적. 당연히 지미 카터 대통령은 리코버에게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맡겼다.[18] 스콜피온, 쓰래셔 함 실종(침몰)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원자로와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물론 사고 원인 자체는 원자로와 무관하다고 해도 바닷속에 오랫동안 쳐박혀있으니 방사능으로 뭔 사단이 났을지는...[19] 각운을 엄격히 맞추는 유럽의 정형시로, 우리로 치면 정철의 가사를 외워 보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20] 물론 사전적 의미에서의 압박면접이며 한국에 와서 변질되어버린 압박 면접의 탈을 쓴 인격모독과는 다르다.[21] 다만 여기에는 기구한 사연이 하나 있는데 원래 리코버의 이름을 붙인 함정은 니미츠급 핵 항공모함에 붙이기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리코버가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어이없게 옷을 벗은 후 당시 해군장관인 존 레이만은 항공모함에 붙이기로 했던 그의 이름을 은근슬쩍 로스앤젤레스급 22번함에 붙이는 걸로 바꿔버렸다. 리코버 제독이야 별말 없이 넘어갔다지만 그래도 주위사람들은 존 레이만 해군청장의 이런 결정에 상당히 말들이 많았다는 후문.[22] 해군장관 레이 메이버스, 해군참모총장 조너선 그리너트와 핵추진국장 존 리처드슨 외에 양복 입은 NNSA 국장 프랭크 클로츠(Frank Klotz)는 초대 지구권타격사령관을 지낸 미 공군 중장 출신이다.[23] 정확히는, 노틸러스가 원자력 추진으로 항해 중이라고 역사적인 메시지를 보낸 날에 맞춘 것이다. 실제 취역은 1954년이지만 이 행사는 2015년 초에 열렸다.[24] 함정의 스폰서는 마찬가지로 리코버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던 해군참모총장 조너선 그리너트의 부인인 달린 그리너트.[25] 다만 카터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가업을 잇겠다며 일찍 전역해서 땅콩 농장을 운영했다.[26] 실제로 카터는 자기 자서전에서 아마도 리코버의 "최선을 다했나?"라는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기 때문에 선발된 것 같다는 추측을 남겼다. 카터는 이후 시울프(SSN-575)에 탑재될 액체금속 냉각방식 원자로를 다루는 일을 했고, 캐나다 초크 리버에 설치된 중수로가 파손되자 이를 수리하기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27] 사진은 1977년 5월 27일 로스앤젤레스급 공격원잠의 초도함인 USS 로스앤젤레스함의 진수식에서 찍힌 사진이다. 뒤의 까만 배경이 로스앤젤레스함.[28] 이는 해군 항공대 파일럿 출신 예비역이었던 해군장관 존 레이만이 늙다리 제독 한 명 퇴역시키겠다고 마음 먹고 건수를 하나 잡아서 무자비하게 까댄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실, 훨씬 이전인 대령 시절부터 리코버는 강제 예편 조치가 언제든지 내려질 수 있는 1순위 후보였고 해군부에서는 30년만에 겨우 꼬투리를 잡아내서는 지화자를 외치며 뒷조사를 들어가서 리코버를 들볶았고 리코버는 열받아서 "내가 만든 배들 싸그리 가라앉힐까보다!" 하는 전대미문의 폭언까지 내뱉은 끝에 결국 1982년에 전직 대통령 3명이 참석하면서도 정작 현직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은 퇴역식을 치렀다.[29] 1982년부터 1986년부터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행정부에서는 원자력 전문가로서 에너지부 장관까지 지냈다. 리코버는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만 활동하며 자기가 가르쳤던 후배들이 자기와 맞먹거나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까지 다 지켜보았던 것이다. [30] 전역 후 손원일급을 건조했던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가 대령 이상 계급의 전역자는 전역 후 2년간 관계업체에 취업할 수 없다는 공직자 윤리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현재는 유튜브에서 잠수함연구소 채널을 운용 중 [31] 예를 들면 오마 브래들리 육군 원수가 세상을 떠날 당시 현역 복무 기간이 66년째였다. 브래들리 원수는 6.25 전쟁 당시 보직이 이미 합참의장에 이르러서 이후에는 현역에다 이름만 올려놓은 채 은퇴한 상태인 명예직이었음을 감안하면 브래들리도 리코버 앞에서는 데꿀멍. 물론 리코버도 의회에서 핵추진프로그램을 위해 리코버에게 연령/계급 정년을 적용하지 않기로 보증한 덕이긴 하지만 리코버의 경우는 명예직이나 다름없던 브래들리와 달리 나이를 먹어서도 실제로 해군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일을 도맡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32] 1962년 엔터프라이즈가 취역하기 얼마 전이었다.[33] 빈센트 푸아(Vincent P. de Poix) 대령으로, 2차대전에서 USS 엔터프라이즈(!)의 비행대에서 조종사로 활약했다. DIA 국장을 지냈으며 중장까지 올랐던, 리코버만큼의 끗발은 아니지만 나름 굉장히 높으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