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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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명중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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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남우주연상
제13회
(1974년)


제14회
(1975년)


제15회
(1976년)

박근형
(이중섭)

하명중
(불꽃)


신일룡
(아라비아의 열풍)

제16회
(1977년)


제17회
(1978년)


제18회
(1979년)

김진규
(난중일기)

하명중
(족보)


최불암
(달려라 만석아)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제9회
(1973년)


제10회
(1974년)


제11회
(1975년)

남궁원
(충녀)

하명중
(나와 나)


김진규
(광화사)
백일섭
(망나니)





하명중
河明中 | Hah Myung-joong


본명
하명종 (河明鍾)
출생
1947년 5월 14일(76세)
부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72cm 72kg
학력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학부 (독일어과 / 학사)
가족
하길종
수상
1983 대종상 신인감독상
데뷔
1967년 영화 나와 너 출연
경력
1992년 뤼미에르 극장대표



1. 개요
2. 상세
3. 연출 작품
4. 출연 작품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www.immc.co.kr/20140224_1623340.jpg

대한민국배우, 영화 감독.

요절한 감독 하길종의 동생으로도 유명하다.


2. 상세[편집]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1965년 KBS의 5기 공채 탤런트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고, 1967년 KBS 드라마 '연화궁'에서 첫번째 주연을 맡게 된다. 한국에 영화를 팔기 위해 방한해있던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사 회장인 런런쇼가 이 연화궁을 보고 하명중을 쇼브라더스에 스카웃한다. 그래서 하명중은 한홍합작 영화가 아닌 순수 홍콩 영화에는 한국인 최초로 캐스팅된 배우가 된다. 그는 홍콩 활동 시절에 본명 하명종을 하명중으로 개명한다. 중국인들이 친근하게 여기는 中자를 이름에 넣은 것. 그의 뒤를 따라 정창화 감독 등 한국 영화인들의 홍콩 진출이 이어진다. 이후 쇼브라더스 영화사가 일본 도호 영화사와 합작하는 영화 '태양의 계절'의 리메이크판에 캐스팅되어 일본 영화계에도 진출[1]했으나, 주연배우의 국적이 한국이면 일본에서 영화 흥행이 힘들다면서 일본이나 홍콩으로 귀화하라는 권유를 받자 고민 끝에 1969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2]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 배우로서 드라마, 영화, 연극을 오가며 당대에 큰 인기를 얻었다.

한국영화 암흑기인 1970년대를 대표하는 남자배우다. 대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남우주연상 등 굵직한 상을 받은 손꼽히는 남자 배우이자 하길종, 유현목, 김기영 등 명 감독들이 선호하는 배우였다.

1970년대 중반~80년대 초반 여배우 트로이카로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을 뽑는다면 이들의 상대역을 주로 맡았던 남배우 세명이 있었으니 하명중, 신영일, 신일룡이 바로 그들이다. 신일룡이 굵직하고 남성미 넘치는 외모였다면 하명중은 정반대로 곱상하고 지식인 역할에 어울리는 마스크였다. 이 두배우 얼굴 중간쯤 되는 배우가 신영일. 주로 하명중&정윤희, 신영일&유지인, 신일룡&장미희 앙상블이 가장 호흡이 잘 들어맞아 보였다.

1970년대 중반 대히트했던 고교얄개에도 정윤희와 나오며 같은해 야구영화 "목마와 숙녀"에도 호흡을 맞췄다. 이듬해 대힛트친 고교야구 영화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에서 야구부 감독으로 나와 열연했다. 이 영화는 1980년대 안방극장에서 자주 해줘서 고교야구의 인기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시대상과 사회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헤비한 작품들에 연이어 출연하다가 1983년 조해일 원작의 엑스로 감독에 데뷔한다. 그 전에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영화사에서 제작하는 작품의 감독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영화사의 갑작스런 부도로 무산된다. 그의 감독 데뷔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형 하길종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첫 작품 엑스는 매우 실험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그에게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안겨주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한다. 두번째 작품 '땡볕' 역시 감독으로서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고, 소년가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 '혼자도는 바람개비'를 어려움 속에서도 완성시켜 좋은 평을 듣기도 했다. 특히 주연 여배우로 하이틴 스타였던 조용원을 기용하여 만든 김유정 원작의 영화 땡볕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를린영화제 본선(경쟁부문)에 올라가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고, 조용원을 스타로 만들었다.

혼자도는 바람개비 이후 긴 시간 감독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하명중 영화제작소를 통해 외화 수입과 제작에 열중했다. 시네마 천국, 플래툰, 로메로 등이 바로 하명중 필름을 통해 국내에 개봉해 대박을 거둔 경우. 1996년에는 양윤호 감독의 데뷔작 유리를 제작해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진출시킨다. 2000년대 후반에 와서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와 '주문진'을 감독하며 영화감독으로 복귀, 제2의 감독생활에 매진 중이다. 관련 기사

감독으로서도 배우로서도 상을 받은 몇 안되는 한국 영화인 중 한 명.[3]


3. 연출 작품[편집]


  • 1983년 엑스
  • 1984년 땡볕
  • 1985년 태(영화)
  • 1990년 혼자 도는 바람개비
  • 2007년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 2010년 주문진


4. 출연 작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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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마스크를 가진 유망주이긴 했으나 당시 홍콩영화계의 주류인 무협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식인스럽고 곱상한 외모를 가졌던 하명중을 쇼브라더스가 도호에 트레이드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2] 귀화 문제를 형인 하길종에게 상의하려고 편지를 보냈더니, 하길종은 "만일 네가 귀화한다면 너도 죽고 나도 죽게 된다"고 답장을 써보냈다고 한다.[3] 후에도 배우로서하고 감독으로 상받은 영화배우는 김윤석, 이정재 등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