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환

덤프버전 :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

한원그룹과 하동환자동차[1] 창업주 및 한원 미술관 설립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출범시킨 그룹의 명칭도 자신의 호에서 나왔다.


2. 생애[편집]


젋은 시절의 하동환
1930년 7월 29일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난 하동환은 10대 후반 시절부터 신촌에 소재한 자동차 정비공장의 기술자로 일하며 자동차와의 연을 시작했다.

1954년 1월 24세의 하동환은 한국전쟁이 휴전된 이후 자신의 집마당앞이였던 마포구 창천동에 천막공장을 지어 자신의 이름를 따와 하동환자동차제작소를 설립해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물자가 귀하던 시절 버스를 만들만한 소재가 없어 주한미군에서 나오던 미군 전용 트럭을 불하받아 거기에서 떼어낸 엔진과 변속기, 차축을 이용하였고, 프레임은 기차 레일을 구하고 자르고 용접해 만들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골조위에 망치로 편 드럼통 철판을 입혀 버스차체를 만들어 얹었다.

1962년 동방자동차공업(주)를 설립하고 이듬해에 역병합병시켜 구로동에 공장을 지어[2] 일본의 상용차 제조업체 닛산디젤의 버스 차종 샤시를 조립 생산해 시내버스를 주로 생산하여 덕분에 당시 차량 부족에 시달리던 버스 업계에 활력을 넣어주어 사랑받았으며, 당시 서울의 시내버스 차종 70%가 하동환자동차에서 생산한 버스였을 정도였고, 이러한 공적으로 교통부장관상을 수상했다. 하동환 사장은 '드럼통 버스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얘기를 하고있는 모습
1966년 하동환자동차는 일본의 상용차 제조업체인 닛산디젤의 샤시를 도입해 하동환자동차가 설계했고, 전영선[3]이 디자인을 맡아 국내 최초로 브루나이에 R66 리어엔진 버스를 수출했고, 이듬해인 1967년에는 남베트남과 브루나이에 V67 리어엔진 버스를 수출했다.[4][5][6]

그러나 1967년 아시아자동차의 버스 등이 잇달아 출시되면서 하동환자동차는 부실위기에 처했다. 결국 정부는 부실기업 계열화 정책 (상공부의 자동차 산업 계열화 정책)으로 신진자동차가 인수한 이후 하동환자동차는 자체 버스 생산을 중단하고 신진자동차가 생산했던 버스들을 위탁 생산했다. 이는 당시 생산차종을 통일하려 할 때 신진자동차에서 버스 부품을 공급하던 토요타가, 하동환자동차에 버스 부품을 공급하던 닛산디젤 보다도 부품 가격을 더 저렴하게 불러서 부품 공급 가격이 더 저렴한 신진자동차의 버스 쪽으로 모델을 통일한 것이다.[7]

자체 버스 생산을 중단했지만 대신 하동환자동차는 1971년 일본의 도피공업과 기술을 제휴하고 휠 디스크를 생산하기 시작해 국내 최초로 휠 디스크 개발에 성공하고 수출을 하기도 했다.

이후 1975년 하동환자동차는 신진자동차에서 독립해 1977년 동아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하고 미국과 일본의 유명한 특장차 전문 메이커와 기술을 제휴하고 특장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아렇개 당시 사업을 확장했던 동아자동차는 1984년 신진그룹의 지프 차량 계열사였던 거화자동차를 무리하게 인수하는 바람에 신차 개발이 필요한 자금 조달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자 큰 부담을 느끼고, 그동안 '무차입 경영'을 선호해왔던 하동환 회장은 결국 1986년 투자 여력이 있는 쌍용그룹에 동아자동차를 매각한 이후 자동차 사업을 접었다.

대신 하동환 회장은 트레일러를 생산하던 동아정기를 지켜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시 사업을 확장해 한원그룹을 설립하고 장학회와 미술관을 운영하는 등 문화와 교육 사업을 하기도 했다. 2002년부터는 한원그룹 명예회장으로 지내다가 2018년 5월 27일 88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청자 전 한원미술관 관장과 아들 성수 한원그룹 회장, 딸 성희, 정은, 승연씨 등 1남 3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강남성모병원에 마련됐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7 00:47:52에 나무위키 하동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KG모빌리티.[2] 이 자리는 현재의 구로중앙유통단지이며, 현재의 KG모빌리티의 서울 A/S 사업소로 명맥이 이어진다.[3] 1939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개성고등학교와 영분과를 졸업하고 1964년 하동환자동차에 입사한 이래 신진자동차, 새한자동차, 동아자동차, 쌍용자동차 등에서 하동환자동차의 A60, 새한자동차의 DB986과 BF101, 동아자동차의 HA20과 HA252 등 주로 국산버스 개발 및 디자인에 참여하였고, 은퇴한 이후에는 1992년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현재까지 자동차의 보존 및 복원에 관련된 활동을 하고있다.[4] 남베트남으로 버스를 수출했을 당시 전례없는 특별대우를 받았는데, 당시 공장을 출발한 버스 행렬은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부산항까지 갔다는 기록과 키엔 카오피 수상이 환영식장까지 나와 축하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5] 하지만 한국의 자동차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공식으로 기록되어 있다.[6] 당시 정부에서도 큰 관심을 보여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하동환자동차의 공장을 현장을 살피고 종업원들을 격려했다고 하고 장기원 경제기획원도 하동환자동차의 공장을 방문해 수출 버스 제작 현장을 점검했다고 한다.[7] 게다가 신진버스는 토요타제 4행정 가솔린 엔진이나 4행정 디젤 엔진을 썼으나, 하동환버스는 닛산데젤제 2행정 디젤 엔진을 썼는데, 2행정 디젤 엔진 특성상 매연이 심해서 도시의 대기오염이 상단했던 것도 신잔버스 모델로 생산을 통일하는대 한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