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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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멤버
3.1. 전 멤버


1. 개요[편집]


ハナ肇とクレージーキャッツ

1955년부터 2006년까지 활동한 [1] 일본 코미디계의 전설로 불리우는 그룹. 1970년대를 대표하는 더 드리프터즈보다도 10여년 앞서 활동한 오와라이 밴드이자 일본의 TV 코미디 붐을 처음으로 일으킨 당사자들이다.[2]

원래 이름은 '하나 하지메와 쿠바 캣츠'(ハナ・ハジメとキューバンキャッツ)였으나 그룹 초창기 미군 부대에서 공연할 때 재즈 연주 중 멤버 중 한 사람[3]이 세면대에서 머리를 두드리는 개그가 그야말로 빵 터짐과 동시에, "You, Crazy!"라는 말을 들어 이를 인용해 그룹명을 바꿨다고 한다.[4]

오와라이 밴드라고 하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멤버 모두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룰수 있었고 그 수준이 매우 준수하였다. 여기에 개그능력도 출중해 단순히 오와라이 밴드라고는 칭할 수 없는 멀티 엔터테이너 그룹이었다.

이들의 TV 매체 출연 시작이 1950년대 중반이다 보니까 한국의 코미디언과 완벽하게 일대일로 매치시키기가 어렵다. 한국은 1950년대에 라디오 방송만이 존재했고 60년대가 되어서야 TV매체가 생겼으며 거의 1970년이 다 되어서야 TV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이 생겨났기 때문에 코미디 방송계의 역사가 일본에 비해 한 10~15년 정도 늦은 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동 시대에 악극단으로서 전국을 돌며 희극 영화에서도 활약했던 구봉서, 배삼룡, 송해같은 1세대 코미디언들과 연령대도 그렇고 활약 시기도 맞먹는 편이다. 다만 한국의 1세대 코미디언들은 TV 출연은 좀 늦은 편이라서 TV 출연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들은 하나 하지메의 직속 후배격인 더 드리프터즈와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다.


2. 역사[편집]


1955년 4월 1일, 연예 기획사 와타나베 프로덕션 소속으로 그룹이 결성된다. 그룹의 이름은 상기 개요에 서술된 대로 '하나 하지메와 쿠바 캣츠'였다. 결성 당시 멤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멤버와 많이 달랐다고 한다. 지금의 멤버들이 모이게 된 것은 1960년 7월 사쿠라이 센리가 가입하면서 부터.

결성 초기에는 당시 일본에 진주해 있던 미군 캠프에서의 공연을 비롯해 TV방송을 막 시작했던 NHK에 출연해 짤막한 꽁트나 음악 연주를 하였는데, 꽤 인기를 얻게되어 1958년 10월에 개봉한 '알몸의 대장'이라는 영화에 밴드 멤버 전체가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이 기세를 몰아 1959년 3월 2일, 밴드 최초의 레귤러 방송인 후지TV 오토나노 망가에 출연하게 된다. 이후 1961년 6월 4일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음악버라이어티 NTV '샤본다마 홀리데이'에 같은 소속사의 여성 듀오 더 피넛츠와 함께 출연했다.[5]


샤본다마 홀리데이에 출연한 '크레이지 캣츠'와 '더 피넛츠'

이후 1961년 8월에는 그 유명한 '스다라부시'우에키 히토시의 발군의 댄스실력을 볼 수 있다.를 발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한다.

코마츠 마사오우에키 히토시매니저 시절 샤본다마 홀리데이의 크레이지 캣츠가 나오는 콩트 때 종종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71년 4월부터 9월까지 TBS의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8시라구! 출발진행에 메인 멤버로 출연했는데, 타이틀만 보면 빼박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의 아류작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어른의 사정에 따른 전원집합땜빵 프로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3. 멤버[편집]


리더 겸 드럼 담당. 도쿄 부 기타 도시마군 나가사키 마치 (현: 도쿄도 토시마구) 출생. 본명은 노야마 사다오.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토목과 중퇴.
처음에는 기타리스트였지만 도중에 드러머로 전향하고 1946년에 나이토 탱고 앙상블, 1947년에 이자와 이치로 쿼텟, 1948년에는 난리 후미오의 핫 펩파즈, 1949년에 하기와라 사토시 아키라와 듀크 오텟, 1952년에 아프로쿠퍼 주니어등의 밴드를 거쳐서 크레이지 캣츠를 결성한다.
나중에는 하나 하지메와 오버 더 레인보우를 결성하고 재즈클럽에서 연주활동도 활발하게 전개 하였지만 술로 인한 간암으로 향년 63세로 별세.

메인보컬 및 기타 담당. 아이치현 나고야시 신시로 정 출신.[6] 1950년 도요 (동양) 대학교 문학부 졸업.
1962년에 개봉된 코믹영화인 '일본 무책임 시대'로 무책임한 남자라는 캐릭터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걸 캐치 프레이즈로 하면서 이후 숱한 영화에 주연한다. 뛰어난 미성의 보컬로서 여러가지 코믹송을 작사했으며 이것이 히트하게 되면서 방송에서도 밴드의 상징적인 존재로 각인된다.
만년에는 전립선 암과 폐기종으로 투병하면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폐기종에 의한 호흡부전으로 인해서 향년 80세를 일기로 서거.

4대 피아노 담당. 영국 런던 출신으로 10세때 부터는 사이타마에서 성장했다. 본명은 사쿠라이 치사토.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중퇴.
이시바시 에타로가 결핵으로 인한 요양때문에 활동제의를 받고 밴드에 참가했으며 사쿠라이는 18만엔이나 지급되는 봉급을 받았다.[7]
코믹적인 개그로 재치있는 말솜씨로 배역 선택의 폭이 넓어서 콩트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CM에서 두드러진다.
일세를 풍미한 원로 코미디언으로써 센리 할아버지 역으로 2010년대까지 출연 하였지만 노환으로 인해서 향년 86세로 타계.

보컬, 트롬본 담당. 도쿄 부 에바라군 죠후 정 (현:도쿄도 다이센구 덴엔초후) 출생. 본명은 와타나베 야스오. 츄쿄 (중앙) 대학교 경제학부 중퇴.
악보에 개그를 작성하는 개그 스타일로 수많은 음악 개그를 만들고 그 재능을 살려서 비누방울 홀리데이라는 프로그램을 자신이 구성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트럼본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고 1952년에 샤푸스 앤드 플래츠, 1953년 시티 스리카즈 등 다수의 밴드에 참가하고 있었다.
솔로로 활동하면서는 ‘가춍’이란 나름 유명한 유행어를 남겼다. 손을 폈다가 갑자기 움켜쥐며 ‘가춍’이라 외치는 식. 이를 소재로 한 비트매니아 시리즈NaHaNaHa vs. Gattchoon Battle란 악곡에도 직접 출연하여, 올드 리듬게이머에게도 인지도가 있다. 가춍 외에도 '비롱~', '무효~' 등의 의성어도 유행어로 남았다.
2008년 부터 치매 증상이 악화되어 투병 중 자택의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면서 입은 뇌좌상으로 인해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콘트라베이스 담당. 도쿄 부 오타구 오오모리 정에서 출생. 본명은 이누즈카 히로무. 1949년 일본 문화학원 사회학부 졸업.
밴드에 가입하기 직전에는 일본 와트송 통계 계산기계 사무소 (현:일본 I.B.M)에 입사했으나 1951년에 퇴직한 이력을 가졌다. 그로부터 4년후인
1955년에 창립 멤버로 가입하였고 큰 키와[8] 이름에 이누 (개)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밴드의 멤버들에게는 '강아지'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023년 현재 기준으로 유일한 크레이지 캣츠 멤버 생존자이다.

테너 및 4대 색소폰 담당. 도쿄 부 후다마 군 (현:도쿄도 나카노 구)출생. 본명은 야스다 히데미네. 1953년 도쿄 예술대학 기악과 수료.
1957년 9월에 이시바시 에타로의 소개로 밴드의 멤버로 가입하여 참여했는데 브리지를 구사하면서 색소폰을 부는 솜씨가 이미 유명하고 있었다.
콩트 프로그램의 조감독이 야스다 쯔!라고 소리치면 메가폰으로 자신의 머리를 연타하는 슬랩스틱 몸개그로 유명세를 떨쳤다.
만년에 암과 투병이 이어지면서 정력적으로 활동하였지만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향년 64세로 별세.

3대 피아노 담당. 도쿄시 시바구 신바시 (현:도쿄도 미나토 구)출생. 본명은 이시바시 에이이치. 1949년 니혼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한때 성악을 전공한 바가 있어 보컬멤버인 우에키 히토시와 함께 양대 보컬 멤버로 활약했으며 60~70년대 당시 다수의 CM송도 부르고 있었다.
결핵으로 1960년에 인해 밴드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한 바가 있었으며 1962년에 다시 복귀하지만 1971년에 다시 완전히 탈퇴한다.
은퇴한 이후 음식 연구가로써 새출발하여 시부야에서 '세잡이돈'이라는 요리점을 운영하고 있다가 위암으로 의한 심부전으로 향년 66세로 작고.

3.1. 전 멤버[편집]


크레이지 캣츠의 전신격인 하나 하지메와 쿠바 캣츠의 멤버들이다. 즉, 이들이 코믹 게닌밴드로 노선을 변경하기 전에 활동했던 멤버들이 된다.

  • 하기와라 히로아키 (1925.05.26~1984.01.13)
클라리넷 담당. 홋카이도 이와미자와 시 태생. 1942년 도쿄 음악학교 (현:동경 예술대학 음악학부) 기악과 졸업.
악기뿐만 아니라 작사에도 재능이 있어서 유머적이고 풍자적인 요소를 가미한 가사를 주로 작성했다. 1955년 4월 1일에 원년멤버로 참여하였고 음악적인 방향성으로 인해서 1959년에 탈퇴한 이후는 주로 영화음악의 작곡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탈퇴로 인해서 타니 케이가 참가한다.
비인두 종양으로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유족으로 재즈 피아니스트인 동생 하기와라 히데키 (현:게이오기쥬쿠 대학 음악과 교수)가 있다.

  • 이시다 마사히로 (1935.05.09~1985.04.28)
3대 색소폰 담당. 도쿄 부 이케부쿠로 시 태생. 본명은 이시다 히로시. 와세다 실업 고등학교 졸업.
당시 유명 테너 색소폰 주자였던 마츠모토 히데히코에게 색소폰을 사사하며 또 알토 색소폰과 피아노를 배웠으며 1955년 여름에 요코스카의 미군 캠프의 음악 쇼에 고등학교 친구였던 하나 하지메와 우연히 재회하게 되어서 쿠바 캣츠에 참여했고 이후 밴드의 색소폰 주자로 활동한다.
하지만 약물 중독으로 밴드를 탈퇴당하고 나카노 교도소에서 2년간 복역한 뒤 간경변으로 의한 각혈로 인해서 향년 49세의 젊은나이로 요절.

  • 시바타 마사히코
1대 색소폰 담당.

  • 이나가키 지로 (1933.10.03~)
2대 색소폰 담당.
  • 하시모토 미치오 (1932.02.09~)
1대 피아노 담당.
  • 카와 요시카즈
2대 피아노 담당.
  • 미나미 하루코
여성 메인보컬 담당. 밴드의 초기멤버. 같은 소속사의 여성멤버인 츠쿠바 레이코와 활동하다가 나중에 따로 독립하여 더 피넛츠로 활동한다.
  • 츠쿠바 레이코
여성 서브보컬 담당. 후에 미나미 하루코와 페어를 이루어 더 피넛츠로 활동. 또한 현재 뮤지컬 배우로 활동중인 시마다 카호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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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활동기간은 하나 하지메의 사망 이전인 1993년까지이다.[2] 하나 하지메 이전에도 일본에서 희극이란게 있었지만 지금 TV에서 출연하는 현대적 코미디언(게닌)과는 거리가 멀었다. 각 지역의 극장에서 공연하던 라쿠고가나 만자이시는 분명 일본 게닌들의 유래 내지는 영향을 끼친 직업군이었을지는 몰라도 완전한 게닌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그리고 TV시대 이전에도 영화계에 진출한 몇몇 희극인들이 있었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았으며 매체를 통해 전국 단위에서 웃음을 주고 인기를 끈 것은 하나 하지메가 거의 최초라고 봐도 무방하다.[3]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자료에 따라서 사쿠라이 센리 아니면 야스다 신으로 추정된다. 밴드에서 두 사람이 특히 슬랩스틱 위주의 개그를 선보여 유명해지게 되었는데 특히 야스다가 머리를 찧는 몸개그를 많이하여 아마도 야스다 신이 유력하다.[4] 바꾼 시기는 1956년 2월에서 7월 사이로 추정된다. NHK 편성표 검색에 따르면, 1956년 2월 7일에 하나 하지메와 쿠바캣츠로 방송에 출연한 기록이 있고, 이후 동년 7월 5일,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로 방송에 출연한 기록이 남아있다.[5] 1960년대에는 TV 방송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많지 않아 같은 소속사 또는 인기 버라이어티에 같이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겹치기 출연이 잦았다. 더 피넛츠와는 같은 소속사이기도 했거니와, 더 히트 퍼레이드 등의 방송에도 같이 출연했다.[6] 나중에는 미에 현 타키군 오다이 정에서 성장.[7] 당시 통상적으로 활동하는 밴드맨들의 급여가 4만엔까지 였는데 무려 파격적인 대우였다.[8] 179cm로 크레이지 캣츠 멤버들 중 최장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