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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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고서
1.1. 저자와 저술 동기
1.2. 내용
1.3. 의의
1.4. 반응
1.5. 이후의 영향
1.5.1. 근대
1.5.2. 현대
1.6. 기타
2. 인명


1. 일본의 고서[편집]


"무사도는 죽음을 마주했을 때 실현된다. 즉,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죽음을 택한다는 뜻이다. 다른 생각의 여지는 없다." - 야마모토 쓰네토모

葉隠, 또는 葉可久礼라고도 쓴다. 전국시대 직후, 에도 막부 초기에 저술된 사무라이 철학서 내지 지침서이며 근대의 '사무라이'와 '무사도'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서적이다.


1.1. 저자와 저술 동기[편집]


총 11권으로 저자는 다시로 쓰라모토(田代陣基)지만 책의 내용은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와의 담화를 적은 것이므로 실질적인 저자는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라고 할 수 있다. 에도 시대 하급 사무라이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 사가번(佐賀藩) 출신으로 생몰년은 1659년 ~ 1719년이다. 1700년 42세의 나이로 출가한 뒤 사실상 은거에 들어갔는데, 이때 이름의 '常朝'를 훈독이 아닌 음독으로 바꾸어 '야마모토 조초'라고 하였다.

대대로 사가번을 섬겨온 제법 이름있는 번사 가문 출신으로 센고쿠 시대가 끝난 이후에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다. 특히 그의 생애는 도쿠가와 이에츠나가 쇼군이었던 시기와 겹치는데, 이 시대는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정형화되고 관습화된 기존의 무사계급의 문화와 규범들이 전후 새로운 시대의 문화규범들과 충돌하며 완화되거나 변형되는, 일종의 전환기였다. 이러한 전환기 속에서 지방의 지배계급 출신으로 태어나고 자란 츠네토모는 자연스레 옛 질서의 붕괴와 소멸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자라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 더해 츠네토모는 그의 아버지가 70세(!)에 얻은 차남인데다가 매우 병약하였던 탓에 어렸을때부터 번주인 나베시마 미쓰시게(鍋島光茂)가 직접 거둬 키웠기에 더욱더 보수적인 환경 속에서 자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죽음을 찬양한 작자가 정작 죽지 않고 살아남아 책을 쓴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것은 주군의 명령으로 인해 죽는 것을 금지당했기 때문. 원래 쓰네토모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아들이자 사가번 2대 번주였던 나베시마 미쓰시게의 가신, 그것도 나베시마가 직접 키웠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측근이었기에, 미쓰시게가 늙어 병석에 눕게되자 그를 따라 순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필 이무렵 번주인 나베시마 가문에 연로한 자가 많았던 탓에 단기간 동안에 지나치게 많은 순사자가 출현하였고, 번주인 미쓰시게가 사망한 이후에는 더욱더 많은 수의 순사자가 발생할 확률이 높았던 터라, 결국 이를 걱정한 미쓰시게가 누가 되었든 간에 순사 자체를 금지하였다. 게다가 사가번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지나치게 순사자가 많이 발생하던 상황이었기에 막부 역시 전국의 순사를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고, 순사자의 후손을 사실상 사무라이에서 제적해버리는 초강경한 자세까지 취한 상황. 이렇게 되자 쓰네토모는 주군을 따라 죽겠다는 계획이 좌절되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에, 주군이 죽기 직전 순사 대신 출가를 허락 받은 뒤 미쓰시게가 사망하자 출가, 은퇴한 뒤 초가집을 짓고 은거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순사는 주군에게 허락받을 것을 필수조건으로 여겼기에, 순사가 금지되자 쓰네모토가 이를 대신하여 출가를 허락받은 행위는, 신분과 지위, 재산을 포기하는 사회적 죽음이나 마찬가지인 출가라는 형태로서 순사를 대체한 것이나 다름없다.

죽는 날까지 19년 동안 쓰네토모는 출가 및 은거 생활을 하게 됐는데, 출가한 지 10년이 지난 1710년 사가번의 번사인 다시로 쓰라모토(田代陣基)가 방문한다. 쓰라모토는 야마모토 쓰네모토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 7년의 세월에 걸쳐 1716년 전체 11권으로 하가쿠레를 완성한다.


1.2. 내용[편집]


제목인 하가쿠레는 '잎'을 뜻하는 '하'와, '숨다'의 명사형인 '가쿠레(숨음)'의 합성어이다. 이 제목의 유래에 대해서도, "무사그림자처럼 숨어 주군을 받들라."라는 의미에서 지었다던가, 헤이안 시대의 와카집 <산가집(山家集)>에서 유래했다는 설, 츠네토모가 '하가쿠레'라고 이름 붙인 감나무를 키워서 이런 제목을 붙였다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주요 내용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체험이나 가문에 전해지는 교훈 등을 통해 얻게된 사무라이로서의 마음가짐과 각종 규범들에 대해서 서술한 것으로, 일종의 사무라이 철학서 내지 행동지침서라고 보면 된다.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면, 사무라이는 어떤 존재이고 그들이 지켜야할 규범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세세히 정리하고, 저자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특히 그와 관련하여 사무라이로서 지켜야할 명예와 그 대가로서 치러야 할 죽음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실제로 행할 수 있는 행동규범들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이를 더욱더 간단히 설명하자면 부시도에 대한 책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위에서도 나왔듯이 무사도는 죽는 것이라고 보았다.(武士道と云ふは死ぬ事と見付けたり)는 문구가 유명한데, 에도 시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에 대해서 비평적이기 때문에 겐로쿠 아코 사건에 대해서도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은 점이나 주군원수를 갚은 다음에 바로 할복하지 않았음을 떳떳하지 못하다고 기록했다. 어쨌거나 직접 실천할 수 있는 행동으로서의 무사도를 강조한 셈이다.

이 "무사도는 죽는 것이라고 보았다."라는 문장은 츠네토모가 본디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기존의 "무사도=죽음"이라는 해석을 부정하고, "기본적으로 생명을 중시해야 하지만, 무사에게는 올바르게 사는 것 이외에도 올바르게 죽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무사가 '죽음'이라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의 대처법에서 무사도가 드러나는 법이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1] 또는, 정말 죽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슨 일이던지 죽을 각오로 임해야한다" 또는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말고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삶에 대해 감사하고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라는 해석도 있다. 어쨌거나 하가쿠레는 행동양식으로서의 무사도를 중심으로 서술된 책이기에, 세세하게 파고 들면 제법 많은 모순점이 있고, 사상적 깊이도 얄팍하기 때문에 단순한 문장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등장한 것이다.


1.3. 의의[편집]


사실 세계 각지 여러시대에 걸쳐 수많은 종류의 군사귀족들이 존재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행동양식과 규범을 관습법이나 구술, 가정교육 등의 체계적이지 않은 형태로 후손에게 전파하였고, 후대에 이들에 대해 남은 기록들 또한 파편화된 형태로 여러곳에 나누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마저도 본인들이 직접 기록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제3자인 다른 교양인들이 작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가쿠레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경우인데, 해당 계급의 당사자 스스로 자신이 속한 계급의 행동양식과 규범, 사상등을 직접 저술하여 남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화랑이 직접 '화랑도는 무엇인가'라는 책을 남겼다거나, 기사(역사)가 직접 '기사도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남긴 것과 마찬가지.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무사도의 당사자인 동시대 에도 시대사무라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1.4. 반응[편집]


에도 막부다이묘들은 하가쿠레를 꺼렸다. 하가쿠레의 내용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경우 사적인 결투복수가 횡행할것이 뻔한 상황. 이로인해 일선계급의 사무라이들은 주군의 눈치를 보아 뒤에서 몰래 읽을지언정 공식적으로는 스스로 분서처분했다고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하가쿠레에 대해 에도막부 성립 이후 유행하기 시작한 주자학자(성리학자)들이 거센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하가쿠레에서 강조하는 무사도라는 개념과 철학들이 주자학의 그것들과 너무나 상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가쿠레가 논하고 있는 무사도의 개념철학들은 일본의 전란기 시절에 등장하여 발전, 형성된 것이기에 전후시대인 에도시대의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이었다. 예를 들면, "큰소리를 쳐라, 노름을 해라, 거짓말을 하지 못하면 사내답지 못하다(博打を打ち、嘘をいえ。一丁歩むうち七度ほらを吹かねば、男でないぞ)" 같은 내용들이 있다. (하가쿠레의 내용을 분석하여 소개하는 사무라이브(SAMURAI'VE)의 칼럼(일본어)) 당연히 이런 내용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나 당시의 기준으로나 일반적인 도덕 규범과는 동떨어진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책이 몰래 숨어서 읽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것일까? 그 까닭은, 이 책의 내용들이 사무라이 계급 자체에 대한 사상적 내용을 부여하고 그들이 행동하는 지침을 지시하는 역할에 있어 매우 충실했기 때문. 즉, '사무라이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데 있어 일종의 바이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곤란한 처지의 하급 사무라이들일수록[2] 이 책에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왜 가난하고 실질적인 직위도 없는 자신들이 왜 여전히 지배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밖에 없으며 해야 하는가, 그리고 자신들이 현재 받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우월하고 특별한 존재인가에 대한 나름의 사상적인 설명들을, 이 책이 대신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이 책은 교양이나 지식수준이 낮은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문장과 내용으로 작성되었고, 그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의 사상적 깊이를 다루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하급 계급의 사무라이들에게는 애독서, 필독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들은 하가쿠레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 세세한 행동양식을 정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수많은 사본을 통해 하가쿠레의 내용을 후세까지 전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자료로 활용하기도 하였고, 직접 본인의 생각을 덧붙이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나베시마[3] 논어>.

1.5. 이후의 영향[편집]



1.5.1. 근대[편집]


그저 그렇게 하급 계급의 사무라이들의 애독서로서 역사속에 기록되어 사라졌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인기가 많았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들이 이 책을 애독하였던 하급 사무라이들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이후 중앙 정부의 강력한 견제와 숙청으로 인해서 공백이 발생한 일본 군대의 중상위 계층을 차지했고, 이로서 하가쿠레 역시 매우 중요한 철학서, 지침서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사실 무사도라는 개념 자체가 기독교, 유교, 그리스철학 등에 비하면 얄팍하디 얄팍하고 역사 또한 짧은 것인데, 그나마 무사도라는 개념을 어느정도 수준으로 설명하고 사상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었던 저서는 사실상 하가쿠레가 유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상황. 결국 이 낡디 낡은 하가쿠레에 적혀진 "무사도"의 내용들이 국가적인 이념으로까지 승격되어버렸다.

결국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지침서로까지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로도 일본 극우들의 애독서가 되었으며, 미시마 유키오 같은 이들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지침서를 너무 정확히 따랐다. 즉,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사용한 카미카제, 반자이 어택, 대전차총검술 같은 상식을 벗어난 전술들은 많든 적든 이 책의 영향을 받았고, 적지 않은 수의 고위 장교들 역시 자신들의 실패와 공포를 직면하는 상황이 된다면 곧 명예로 치장된 옥쇄와 죽음을 탈출구로 삼았다.

1.5.2. 현대[편집]


무사도라는 개념이 2차대전 이후 군국주의의 상징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하가쿠레 역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사람이 적어졌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정신적인 잔향에 영향받은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에, "정신력"을 들먹인다거나 "죽음을 각오하고 해내는 자세" 등을 언급할 때, 하가쿠레가 그 기원으로서 논해진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편집을 거쳐 적당히 내용을 순화한 뒤 처세술 서적이나 비즈니스 서적으로 읽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원판 자체가 오늘날의 합리주의나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있고, 애초부터 일반적인 도덕규범과는 다른 선상에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이런 하가쿠레에 대한 일본 기업인들의 숭배가 오히려 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을 초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17대 일본 총리였던 오쿠마 시게노부 역시 하가쿠레가 "낡아빠진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사에키 신이치의 저서 <전쟁터의 정신사 - 무사도라는 환상(戦場の精神史―武士道という幻影―)>(한국 출판본 제목: 무사도는 없다)에서는 이 하가쿠레의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을 토대로 한 일본 제국의 "무사도"를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다. (# #2)

그러나 도덕이나 윤리, 철학 문제와는 관계없이 중세 일본 지배계급의 일상이나 사고방식, 관습 등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유용하기에, 일본학이나 인류학, 철학사 등에서 일본인의 사상적, 문화적 기원을 연구할 때 필수적으로 참조하는 책이다. 즉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보기 위해 참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이 책이 뛰어나서 읽는 것은 아니라고 보면 된다.


1.6. 기타[편집]


  • 위에서 서술했듯이 저자인 츠네모토 본인은 센고쿠 시대이후에 태어난 인물로 전쟁을 겪어본 일이 없다. 츠네모토의 아버지이며 그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고 하가쿠레에 기술된 아버지 야마모토 시게즈미(山本重澄, 다른 이름은 야마모토 진에몬 시게즈미 山本神右衛門重澄 - 1590-1669) 역시 센고쿠 시대 극후반의 인물로, 기껏해야 오사카 전투시마바라의 난 정도가 종군경험의 전부이다. 시게즈미가 그나마 오사카 전투에서도 맡았던 일조차 전투가 아닌 보청(普請), 그러니까 시설직이었으며, 유일하게 확인되는 실전경험은 시마바라의 난 뿐이다. #

  • 한국에서는 무사의 아이가 떡을 훔쳐먹었다고 의심받자 무사가 직접 아이의 배를 갈라서 결백을 증명한 뒤 떡집 주인을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는데[4], 정작 하가쿠레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없다.
원래 이 이야기는 아키타 지방의 전통 구전 설화들 중 하나인 '팥밥'(赤いまんま)이며 제목처럼 가난한 농부의 아이가 근처에 있는 부잣집에서 몰래 팥밥을 훔쳐먹었다는 의심을 받자 그 농부는 부잣집 주인이 보는 앞에서 직접 아이의 배를 으로 갈라 결백을 증명했다는 이야기다.(일본어) 어째서 이 이야기가 한국에서 하가쿠레 속 무사들의 이야기처럼 와전되었는지는 불명. 위에 나왔듯이 하가쿠레 자체가 낡아빠진 무사도를 담은 책이므로, 그런 무사도를 비판하기 위해서 출처를 찾다가 하가쿠레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 먼 미래 23세기를 다루는 미니어쳐 게임 인피니티 세계관 속에서 독립 일본의 정신과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로 인해서 독립 이전에도, 독립한 후에도, 일본은 전근대적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2. 인명[편집]


보통 창작물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유래는 1번 항목이다. 다만, 위에서 설명했듯이 1번 물건의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고 실제로 읽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기에... 일단 서적 하가쿠레의 철학이나 사상을 감안하여 작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전략인간병기 카쿠고뿐인데 그마저도 서적 하가쿠레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단간론파나 히로아카 같은 나머지의 경우는 각 캐릭터들의 특성상 단순히 하가쿠레의 한자 뜻, "잎사귀에 숨다"가 그럴듯해 보여 따라 지은 경우인 것으로 추정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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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을 두려워해서 비겁한 선택을 하면 안된다는 의미.[2] 에도 시대에 하급 사무라이라면 봉급을 받아 생활했는데 봉급은 쌀로 나왔고 이를 팔아 돈을 마련해서 생활해야 했는데 상인들은 이를 노려 봉급날에 맞춰 일제히 쌀을 풀어 쌀값을 내렸다. 그래서 하급 사무라이쯤 되면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3] 鍋島. 사가번은 나베시마씨의 영지였다.[4] 일본통이었던 한국 수학자 김용운 교수도 일본 문화에 대한 자신의 저서에서 해당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5] 히로아카하가쿠레 토오루는 전신이 투명하다는 특성이 있고, 단간론파의 하가쿠레 야스히로는 마이페이스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이러한 특성을 살려 이름을 "잎사귀에 숨다"라는 하가쿠레로 지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