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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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준비 과정
3.1.1. 초기 접촉
3.1.2. 핑퐁외교와 회담 합의
3.2. 회담 진행
3.2.1. 중국으로 떠나는 키신저
3.2.2. 저우언라이와의 만남
3.2.3. 2차 회담
3.2.4. 3차 회담
3.2.5. 닉슨 방중 계획 발표
4. 결과
5. 참고문헌
6. 문화대혁명 중의 사건


1. 개요[편집]


1971년 7월 9일부터 7월 11일까지 미합중국 안보담당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 사이에 개최된 회담이다. 6.25 전쟁 이래 적대관계에 놓여있던 미국과 중국은 이 회담을 계기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1979년 미중수교에 이르는 상호관계를 구축하며 데탕트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2. 배경[편집]


1969년 리처드 닉슨이 새로운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헨리 키신저가 국가안보 담당보좌관에 임명되었다. 원래 닉슨은 50년대에 마오쩌둥에 대한 비난을 쏟아낸 강경한 반중인사였으나 차차 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입장을 선회하게 되었다. 1969년 2월 1일, 닉슨은 키신저를 호출하여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중국과의 화해 가능성을 탐색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키신저는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대통령, 모하메드 야햐 칸 파키스탄 대통령 등을 통해 중국에 화해 의사를 타진하였다. 이어 1969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한편 중국은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벌어지는 등 소련과 급격한 관계악화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계속되는 호의적인 제스처에 중국 역시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고 1970년 1월 20일 폴란드의 중국 대사관에서 중국과 미국 외교관들이 바르샤바 회담을 개최하여 언론인, 과학자, 학생들을 교환하자고 합의하였다. 2월 20일에 2차 바르샤바 회담이 개최되었을 때 중국 측에서는 회담 장소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고위 관리가 인솔하는 미국 대표단을 환영할 용의가 있다는 의사를 타진하였다. 5월 30일로 예정된 3차 바르샤바 회담은 중국 측에서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을 구실로 일방적으로 취소하였으나 대미 강경파인 린뱌오가 실각하고 저우언라이가 득세함에 따라 문호 개방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즉, 미국은 소련과 대립각을 세우던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냉전 상황 하에서 레버리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고, 중국 역시 소련에게 “계속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하면 우리도 다 대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미국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미중수교는 엄정한 냉전 상황 하애서 자본주의 세계의 리더인 국가와 공산주의의 한 축인 국가가 과거를 뒤로 하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맺은 관계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 하다.


3. 전개[편집]



3.1. 준비 과정[편집]



3.1.1. 초기 접촉[편집]


"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에 가는 것이다. 만약 안된다면 우리 아이들이라도 갈 수 있기를 바란다."

1970년 10월, 타임지와 인터뷰할 때 닉슨의 발언.


1970년 10월 24일, UN 창립 25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 참여했던 파키스탄의 칸 대통령은 다음날 닉슨의 초청을 받아 한시간 동안 닉슨과 대화를 나누었다. 닉슨은 곧 베이징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칸에게 중국 측에 미국이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조성할 계획이 있음을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11월 9일 베이징을 방문한 칸 대통령은 닉슨의 요구대로 미국의 의사를 전달했다. 키신저는 파키스탄을 중재로 하는 당시 미중접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때의 메시지 교환은 20여년 이래 두 나라 사이에 교환된 최초의 진지하고도 솔직한 것이었다. 미국 측의 메시지가 극도로 모호했던 데 반하여, 중국 측의 메시지는 극도로 애매하였다. 미국측 각서를 초안한 나로서 중국 측의 답신을 처음 대했을 때 소련과 중국의 외교 의사 통신의 차이가 큰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중국이 소련에 비해 훨씬 더 세련되고 우아했으며, 스타일과 발상에 있어서도 보다 더 섬세하였다."


1970년 12월, 저우언라이는 "타이완이라고 부르는 중국 영토에서 휴가를 주제로 토론하기 위해" 워싱턴 특사를 베이징에 초청하겠다는 내용을 전달했고 키신저는 "베이징에서의 회담은 단지 타이완 문제로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1970년 12월, 마오쩌둥은 에드거 스노우[1]를 초청해 아침식사를 하며 "중국과 미국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편견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존중과 평등이 존재할 뿐."이라고 발언했다. 마오쩌둥은 미국 국민들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갖고 있으며 자신과 닉슨이 대화를 나누면 기쁠 것이라고 하였다. 1970년 12월 25일자 인민일보는 마오쩌둥이 10월 1일 국경절 행사에서 에드거 스노우와 같이 천안문 연단에서 찍은 사진을 게재하며 마오쩌둥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인용했다.

"미국 인민을 포함한 전 세계 인민이 우리의 친구들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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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스노우와 마오쩌둥, 옆에 린뱌오도 있다.

파키스탄을 사이에 둔 미중접촉은 1971년 2월, 미국이 라오스를 폭격함에 따라 단절되었으나 2월 25일 닉슨이 의회에 외교 교서를 제출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약속하며 중국과의 대화 의사를 타진했다. 이에 3월 5일 마오쩌둥은 "소련이 위협 세력으로 대두되는데 반해, 미국은 아시아 문제에서 철수하는 추세에 있다."고 교시하며 저우언라이를 하노이에 파견해 베트남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며 저우언라이는 서방측 외교관들과 만나 "중국은 미국 지도자들과 고위급 대화를 갖기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공언하였다.


3.1.2. 핑퐁외교와 회담 합의[편집]


그러다가 1971년 4월 6일 나고야에서 개최된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 폐막 즈음에 중국 선수단이 미국 선수단을 중국으로 초청하였다. 주일 미국 대사관은 워싱턴에 연락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고 백악관은 즉시 참석을 허가했다. 4월 10일, 미국 선수 9명, 임원 4명, 기자 9명 등 20여명의 선수단이 영국령 홍콩을 경유하여 중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저우언라이가 직접 이들을 영접했다. 미국 선수단은 중국 선수단을 답례로 초청하였고 중국은 수락 의사를 밝혔다. 4월 21일, 닉슨 대통령이 중국 선수단의 방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확약하였으며 중국인들의 비자 발급을 허가했다. 또한 4월 29일, 닉슨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5월 10일, 키신저는 주파키스탄 미국 대사인 힐러리를 소환하여 칸 파키스탄 대통령을 통해 저우언라이에게 보낼 국서를 전달했다. 이는 미중 관계 정상화를 위해 닉슨 대통령이 직접 중국을 방문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키신저가 예비 회담을 위해 비밀리에 중국을 다녀오겠다는 제안 역시 보내기로 하였다. 6월 중순, 중국 측은 힐러리 대사를 통해 미국의 제안을 수락하였고 닉슨과 키신저는 모두 뛸듯이 기뻐하며 브랜디로 축배를 들었다. 이후 키신저는 저우언라이와의 협상을 위해 저우언라이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요청했다. 키신저의 중국 여행은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따서 <폴로>라는 암호명이 붙여졌다. 키신저는 파키스탄 대통령과의 회담을 구실로 파키스탄으로 가서 그곳에서 바로 베이징으로 떠나기로 했다. 키신저는 만약 자신이 성공한다면 <유레카>라는 암호를 닉슨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베트남과 북한을 비롯한 중국의 우호국에 키신저를 초빙하기로 알렸다. 베트남과 북한은 중국의 움직임에 이해를 보냈으나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는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7월 1일, 키신저는 대통령 전용 제트기를 타고 앤드류 공군기지를 떠나 7월 3일 사이공에 도착, 7월 4일에 방콕, 7월 6일 뉴델리를 경유하여 7월 8일 목요일에 파키스탄에 도착하였다. 키신저는 보안을 위해 자신을 쫓아다니는 대규모 취재진들에게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고 더운 날씨 때문에 지친 취재진들은 키신저에 대한 취재를 거의 중단하였다. 이 때문에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였을 때 키신저를 쫓아온 기자는 3명에 불과했다.


3.2. 회담 진행[편집]



3.2.1. 중국으로 떠나는 키신저[편집]


7월 8일, 키신저는 칸 대통령과 한시간 반 동안 회담을 가지고 공식 만찬에 참여하기로 하였으나 사실 칸 대통령과 짜고 만찬을 취소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키신저는 거짓으로 복통을 호소하며 요양을 핑계로 칸 대통령의 산장인 나티아 갈리 별장으로 떠났고 칸 대통령은 만찬석상에 모인 사람들에게 키신저 박사가 여독과 복통이 겹쳐 자신의 산장에서 쉬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다음날인 7월 9일, 파키스탄 정부는 공식적으로 키신저가 병환으로 인해 휴식을 연장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칸 대통령은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등 요인들을 키신저를 문병하게 한다는 구실로 별장에 파견했지만 칸 대통령의 연락을 받은 모하마드 칸 외무장관이 이들을 제지하여 키신저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 사이에 별장에 파견된 의사는 키신저로 위장한 경호원을 치료하는 등 파키스탄 정부는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키신저의 가짜 복통 소동이 워낙 보안에 잘 부쳐져서 놀란 키신저의 비밀요원들이 산장에 경호원을 파견하여 키신저의 상태를 살피려다가 적발되었고 키신저는 보안을 위해 문제의 경호원을 산장에 연금시키라고 지시했다.

그 사이 키신저는 7월 8일 오후 11시, 파키스탄 영빈관에서 잠자리에 들었으나 긴장감으로 인해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7월 9일 새벽 3시가 되자 키신저는 영빈관에서 아침을 먹은 후 4시에 모하마드 칸 외무장관을 따라 파키스탄 군용 차량을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키신저는 파키스탄 국제항공(PIA) 소속 보잉 707제트기로 이동했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4명의 중국 관리가 키신저를 영접했다. 키신저는 개인 비서 윈스턴 로드, 아시아 문제 전문가 존 홀드리지, 보좌관 리처드 스마이저만 대동하고 있었다. 키신저를 태운 특별기는 베이징으로 출발했다.

한편 키신저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써서 위장한 상태였고 키신저가 탑승한 특별기도 수시로 베이징을 오가는 비행기라 이목을 끌지 않았으나 때마침 근처에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자 베그가 불침번을 서다가 키신저를 목격했다. 베그는 파키스탄 관리를 붙잡고 방금 탑승한 사람이 키신저가 아닌지 물었는데 키신저가 베이징으로 가는 것이 기밀인줄 몰랐던 관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베그는 이어 키신저의 행선지를 물었으나 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그는 키신저가 베이징으로 간다고 유추하고 즉각 기사를 작성하여 본국에 송고했으나 데일리 텔레그래프 본사는 황당한 기사로 치부하고 베그에게 이따위 술에 취해 쓴 기사를 보내지 말라고 면박을 주어(...) 희대의 특종기사는 이렇게 사장되었다.

중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키신저는 스마이저 보좌관과 함께 뒷좌석에서 의견교환 및 중국에 관한 브리핑 자료를 읽었다. 비행기는 K2상공을 지나 오후 12시 15분에 베이징 근교 남원 군사공항에 착륙했다. 키신저는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 겸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예젠잉과 훗날 초대 유엔 수석대표와 외교부장을 지내는 외교관 황화의 영접을 받았다. 이들과 악수를 교환한 후 몇마디 말을 한 키신저는 중국 차량 <홍기>를 타고 영빈관으로 안내되어 식사를 했다. 식사가 대단히 맛있었기 때문에 키신저는 아무래도 중국을 방문하다가 굶어죽은 귀빈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농담을 했다.[3] 조어대 6호관에 숙소를 배정받은 키신저는 샤워를 한 후 저우언라이와의 회담을 준비했다.


3.2.2. 저우언라이와의 만남[편집]


7월 9일 오후 4시 30분, 인민복 차림의 저우언라이가 직접 키신저의 숙소에 나타났다. 저우언라이는 국무원 총리로 국가원수에 맞먹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그가 직접 숙소를 찾는 것은 국제관례상 파격적인 대접이었고 키신저는 저우언라이와 힘차게 악수하였다. 저우언라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이 미중 양국의 고위급 외교 관료가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나눈 악수입니다."[4]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 악수를 이내 공개할 수 없다는 게 유감스럽군요. 온 세계를 놀라게 할 테니까요."


회담이 시작되자 저우언라이는 손님이 먼저 말하게 한다는 중국의 관습을 소개하며 키신저가 먼저 말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키신저가 닉슨 대통령과 6시간 동안 협의하여 작성한 개회사를 10여분 동안 낭독했다. 개회사의 내용은 닉슨의 중국 방문 시기와 회담 내용을 분명히 하는 것이 회담의 목적이며 대만 문제에 대해 대만 주둔군을 축소시킬 용의가 있으며 중국이 유엔 의석을 회복하는 것을 지지하지만 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하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키신저는 말미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동안 22년 간의 단절을 끝내기 위해 우리는 이 신비로운 나라에 왔습니다."


이에 저우언라이가 물었다.

"무엇이 신비로운가요?"


공산주의 국가의 외교관들 특유의 공격적인 질문이 아니라 여유롭고 부드러운 질문에 키신저는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저우언라이는 키신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 7시간 이상 회담하였다. 두 사람은 각국의 정치, 사회에 관해 광범위한 의견을 주고받았으며 회담 분위기는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끝났으며 닉슨이 국내의 입지를 강화하도록 돕기 위해 닉슨이 방중하기 전에 미국의 다른 정치인은 물론이고 서방 지도자 누구도 베이징에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신이 난 키신저는 "이 세상에 외교 정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국민이 미국과 중국밖에 어디 또 있소?"라는 농담을 하였고 저우언라이의 노련한 외교관의 자세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저우언라이는 "이 천하에는 여전히 분쟁 지역이 있소. 우리 함께 분쟁을 종식시킬 기회를 가집시다."라고 발언했다. 그날 밤 깊게 저우언라이는 다음날도 회담을 계속하자고 제의했으며 7월 6일 닉슨 대통령이 캔자스 시티에서 미국, 소련, 서유럽, 일본,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한 연설에 대해 관심을 표했다. 오후 11시 20분에 회담이 끝났다.

회담이 끝난 후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찾아 첫번째 회담에 대해 보고하려 했으나 린뱌오 문제 때문에 정신이 팔려 있던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보고에 대해 거의 듣지 않았다.[5] 국내 최신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에야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보고를 들었다. 마오쩌둥은 대만 문제에 대해 불평했다.

"원숭이는 아직 인간이 되지 못했어. 대만 문제에도 아직 꼬리가 남아 있어."[6]


마오쩌둥은 키신저와 보좌관들에게 세계혁명에 관한 사항들을 전하라고 저우언라이에게 시키면서 "천하의 대혼란"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중국의 훌륭한 상황', '미국과 소련, 일본이 중국을 분할하려는 것에 대해 중국은 준비가 되어 있다.'는 내용을 설명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닉슨의 중국 방문을 실현시키고 싶다는 키신저의 제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체적인 문제는 언급하지 말게. 우리는 미소일에 의한 중국 분할에 대비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키신저에게 큰소리쳐 줘요."



3.2.3. 2차 회담[편집]


7월 10일 아침, 키신저에게 닉슨 대통령의 캔자스 시티 연설문 원본이 전달되었다. 원본에는 저우언라이가 직접 체크한 주석이 빼곡하게 달려 있었는데 일흔이 넘은 저우언라이의 정력적인 모습을 확인한 키신저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키신저는 이날 자금성 관광을 하며 홍위병이 때려부수지 않은[7] 중국의 문물을 관람했고 오후 4시부터 저우언라이와 2차 회담에 들어갔다. 2차 회담은 저우언라이의 집무실에서 거행되었으며 역시 8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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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에게 손수 오리고기를 전병에 감싸 대접하는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는 전날과 다르게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세계 정세와 혁명 투쟁, 초강대국과의 충돌에 대한 중국 인민의 자세에 대해 키신저에게 강경한 자세로 강의했다. 키신저는 전날과 다르게 장광설을 늘어놓은 저우언라이를 보고 놀랐다. 키신저는 저우언라이의 '미사 여구 없는 발언'에 대해 반박을 시도했으나 저우언라이는 할말을 마친 후에는 관련 주제에 대해서 관심을 끊은 듯이 행동했다. 이 때문에 회담 분위기는 다소 딱딱해졌으나 저우언라이는 키신저에게 식사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며 북경 오리 구이를 대접했다. 저우언라이는 키신저에게 오리 구이의 먹는 법과 역사를 설명하며 손수 전병에 오리구이를 싸서 키신저에게 대접했다. 식사 이후 분위기는 다시 누그러졌다.

식사 후 재개된 회담에서는 닉슨 대통령의 방중 사실을 발표하는 양국 공동 발표문 초안과 관련해서 의견 충돌이 벌어졌다. 중국은 미국에서 먼저 초청을 요청했다는 내용으로 작성하길 원했기 때문에 닉슨이 먼저 중국을 방문하고 싶어 했다는 내용을 추가하자고 주장했다. 양측은 크게 3가지 사항에 대 합의했다.

  • 1. 대만은 중국 영토의 일부인만큼 그 장래가 중국인 사이에 해결되어야 한다.

  • 2. 베트남 전쟁도 휴전을 통하여 결국 베트남인끼리 정치적 해결이 불가피하다.

  • 3. 모든 아시아의 분쟁은 평화적인 해결이 당면 원칙이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저우언라이가 정식으로 닉슨의 중국 방문을 초청했고, 키신저는 닉슨을 대신하여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이때 키신저는 방문 시기가 1972년 5월 이전이 되면 좋다는 뜻을 전달했다. 오후 10시에 회담이 끝났고 저우언라이는 다시 마오쩌둥에게 회담 내용에 대해 보고했다. 마오쩌둥은 보고를 듣고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공동 성명에서는 닉슨의 중국 방문을 누군가가 주도한 것으로는 하지 말게나. 쌍방이 함께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야. 내가 닉슨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점도 언급하지 말게."


이에 따라 저우언라이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고 싶어했다는 문구를 파기했다.


3.2.4. 3차 회담[편집]


7월 11일, 오전 9시 40분부터 영빈관에서 2시간 동안 최종 회담이 열렸다.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저우언라이가 중국 측이 주장한 문구를 파기했기 때문에 양측은 중국 측에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고 싶어한 것을 알아서 초대했다는 절충안으로 타협을 보았다. 방문 시기에 대해서도 1972년 여름은 대통령 선거일에서 너무 가까우니 앞당겼으면 좋겠다고 키신저가 요구하여 1972년 5월 이전으로 합의하였다. 최종적인 합의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한 것을 알고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대표해 닉슨 대통령이 1972년 5월 이전의 적당한 때에 중국을 방문하도록 하는 초청장을 보낸다.

또한 앞으로 연락은 3국을 통하지 않고 프랑스 파리와 캐나다 오타와에 주재한 대사관을 통해 직접 연락하기로 정했으며 7월 15일 오후 10시에 워싱턴과 베이징에서 동시에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하였다. 이날 오후 1시, 키신저는 마오쩌둥 선집 영문판을 선물로 받고 파키스탄 항공편으로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갔다. 키신저는 도착하자마자 백악관에 성공했음을 알리는 비밀급전을 쳤다.

키신저는 베트남 대표 레둑토와 베트남 평화협정을 위한 회담을 하기 위해서 다음 목적지인 파리로 향했다. 레둑토와 회담을 마친 후 키신저는 마침내 귀국했다.[8][9]

3.2.5. 닉슨 방중 계획 발표[편집]


우리는 당신마오쩌둥이 역사의 한 장을 넘길 수 있는 정지 작업을 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래에 관해서 아무런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와 중국 사이에는 깊은 이견과 오랜 고립의 해들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정상회담에서 대만과 다른 주요한 문제들에 관해서 완강한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만약 양국 관계가 신랄하게 될 경우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적이 될 것입니다. 중국인들에 대한 나의 평가는 그들이 극도로 이념적이고 그들의 신념의 강도는 맹신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네들이 설정한 원칙의 테두리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신뢰도와 정확성의 기교가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과정을 마스터하면 우리는 혁명적 진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겁니다.
귀국 후 키신저가 작성한 보고서

7월 15일 밤, 닉슨 대통령은 NBC 방송을 통해 중대발표를 하였다.

"나는 오늘밤 영원한 세계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에 큰 진전이 있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누차 지적했듯이 7억 5천만 인구를 가진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여 없이 안정된 세계 평화는 있을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여러 통로를 통해 미국-중국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해 온 이유입니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 나는 나의 안보담당특별보좌관인 헨리 키신저 박사를 베이징에 파견, 저우언라이 수상과 회견하게 했습니다. 베이징과 미국에서 동시에 발표하기로 된 성명 전문을 발표하겠습니다.

<헨리 키신저 보좌관과 저우언라이 수상은 베이징에서 1971년 7월 9일부터 7월 11일까지 회담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자 하는 닉슨 대통령의 뜻에 따라 저우언라이 수상은 중국을 대신해서 1972년 5월 이전 적당한 시기를 택해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초청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 초청을 기쁘게 수락했다. 미중 지도자들의 회담은 양국 간의 당면 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양국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이어 로저스 국무장관이 재미 외교 사절단을 모아서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합의를 알렸다. 전 세계가 놀랐으며 존 슈미츠를 비롯한 일부 우익 강경파는 국제 공산주의에 투항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중화민국 그러니까 타이완에서도 "우방과의 사전협의나 통고 없이 그와 같은 결정을 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며 야비한 흥정이다."라고 비난했다. 중국과 대립하고 있던 소련 역시 분노했고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내각도 충격을 표시했다. 또한 키신저는 세계적인 외교관으로 부상하였으며 7월 17일 뉴욕타임스는 키신저를 '닉슨의 조타수', '불가해한 서양주의자'라고 평하면서 "칵테일 파티의 호스트로 환상을 자아내게 하고 냉정한 지성과 노련한 수완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세계사를 통찰하는 능력자"라고 칭찬했다.


4. 결과[편집]


8월 2일 로저스 국무장관이 중국의 유엔 가입 지지와 더불어 대만 축출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10월 5일, 미국은 키신저의 2차 베이징 방문 계획을 방문했고 폴로 2호 계획에 따라 10월 20일, 키신저가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2차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개최했다. 비밀 회담이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공식 방문이었다. 10월 25일, 유엔은 중국의 가입을 의결했고 대만은 탈퇴를 선언했다.

1971년 11월 30일, 닉슨 대통령의 공식 방중 일정이 발표되었다. 이어 1972년 2월 21일부터 28일에 걸쳐 역사적인 닉슨-마오쩌둥 회담이 개최되게 된다.


5. 참고문헌[편집]


  • 구보 도루, 중국근현대사 4권: 사회주의를 향한 도전 1945-1971(서울: 삼천리, 2013).
  • 로더릭 맥파커 외, 중국 현대정치사 : 건국에서 세계화의 수용까지 1949~2009(서울: 푸른길, 2012).
  •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저우언라이 평전(서울: 베리타스북스, 2007).
  • 산케이신문 특별취재반, 모택동 비록 上(서울: 문학사상사, 2001).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서울: 민음사, 2017).
  • 이재방, 장덕환, 美·中 和解(서울: 법영사, 2005).
  • 오쿠무라 사토시, 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 전쟁과 사회주의의 변주곡(서울: 소나무, 2002).
  • 프랑크 디쾨터,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976(파주: 열린책들, 2017).
  • 관련기사 1.
  • 관련기사 2.


6. 문화대혁명 중의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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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언론인. 국공내전 시기에 중국 옌안의 중국공산당을 찾아가서 마오쩌뚱을 포함해서 주요 고위 간부들을 인터뷰한 후에 대장정을 다룬 <중국의 붉은 별>을 저술하였다.[2] 사실 이때 마오쩌둥은 에드거 스노우가 CIA의 정보원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미국에 전하기 위해서 한 의도적인 발언이었지만, 에드거 스노우는 CIA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당연히 마오의 발언은 CIA나 미국 정부에 전달되지 않았으며 마오쩌둥의 발언은 1971년 4월에 이미 핑퐁외교를 통해 중미접촉이 상당히 진전된 후에야 공개되었다.[3] 키신저는 중국에서 대접한 음식이 워낙 마음에 들었는지 귀국할때 몸무게가 5파운드나 증가한 상태였다.[4] 1954년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제네바 합의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났지만 매몰차게 악수를 거절한 일이 있다.[5] 불과 2달 뒤에 린뱌오는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는 571 공정을 가동했다가 실패했고 소련으로 망명하려다가 몽골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9.13 사건으로 사망한다.[6] 프랑크 디쾨터는 이를 두고 마오쩌둥이 키신저를 황제를 알현하는 일개 사절로 격하시킨 표현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키신저를 구린내나는 학자라고 싫어하여 1971년 7월의 방문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다.[7] 참고로 이때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일때다.[8] 키신저는 레둑토에게 중국이 미국과 우호관계를 구축하였음을 암시하며 더 이상 국제적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 경고했다.[9] 참고로 키신저와 레둑토는 기나긴 협상끝에 결국 평화협정을 이끌어냈고, 197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단 레둑토는 여전히 베트남전이 종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