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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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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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26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Alexander%20Grover%20Plaque%20165_NBL.png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헌액 연도
1938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0.92% (3회)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1913년)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필라델피아 필리스, 1915년)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필라델피아 필리스, 1916년)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필라델피아 필리스, 1915년)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필라델피아 필리스, 1916년)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1918년)
히포 본
(시카고 컵스, 1918년)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1918년)
히포 본
(시카고 컵스, 1918년)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시카고 컵스, 1920년)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1924년)




파일:external/cdn.fansided.com/Grover-Cleveland-Alexander.jpg

필라델피아 필리스 No. P
그로버 클리블랜드 "피트" 알렉산더
Grover Cleveland "Pete" Alexander

출생
1887년 2월 26일
네브래스카 주 엘바
사망
1950년 11월 4일 (향년 63세)
네브래스카 주 세인트폴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신체
185cm / 83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11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PHP)
소속팀
필라델피아 필리스 (1911~1917)
시카고 컵스 (1918~1926)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26~1929)
필라델피아 필리스 (1930)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타고난 내구성
3. 은퇴 이후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5. 연도별 성적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투수로, 통산 3회의 트리플 크라운 기록을 가졌으며 역대 다승 3위[1]에 올라있다. 흔히 이름이 애칭인 Old Pete와 섞여서 피트 알렉산더로도 불린다.

통산 20시즌 696경기/600선발 436완투/90완봉 5,190이닝 373승 208패 2.56ERA/135ERA+ 2,198K/951BB 2.82FIP 1.121WHIP 32세이브 116bWAR.[2]

1915년(10.9)-1916년(11)-1920년(11.9)로 10이 넘는 bWAR을 3회 기록했다.

2. 선수 경력[편집]


어린 시절 법조인이 되라고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통째로 가져다가 붙여줬더니 야구에만 맛을 들였던 알렉산더는, 마이너리그 시절 주루 플레이 중 유격수가 던진 공을 맞고 기절했다가 야구를 포기할 뻔 했다. 시신경에 이상이 생겨 공이 두 개로 보였을 정도였다고.

파일:external/image1.findagrave.com/1812_124027651601.jpg

다행히 이 문제가 해결된 뒤, 그는 750달러의 이적료에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입단한다. 그리고, 전설이 시작되었다. 데뷔 첫 해부터 그는 리그 다승왕과 31완투를 거두며 최다 이닝 투수의 영예를 안았고 MVP 투표에서 3위에 오른다. 그 뒤로 매년 20승~30승 가까이 거둬주는[3] 필리스의 에이스로 자리잡았고 데드볼 시대에 내셔널리그를 주름잡는 최강의 에이스로 입지를 다졌다.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시카고 컵스로 팔린 그는 1918년 단 세 경기만 치르고 군에 입대해 유럽으로 갔다. 그리고 그가 팔려간 이후 필리스의 성적은 처참했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알렉산더는 프랑스에서 끔찍한 경험을 했다. 악명 높은 참호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포격의 공포를 감당해야만 것. 이 포격을 통해 알렉산더는 왼쪽 귀의 청력을 완전히 잃었으며, 오른쪽 귀도 잘 들리지 않게 됐다. 또한 그의 밥줄인 오른팔에도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전쟁에서 돌아온 알렉산더는 본격적으로 간질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4][5] 또한 알 수 없는 공포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찾아왔다. 이쯤되면 PTSD가 따로 없다. 원래 애주가 집안이었던 알렉산더는 이 때부터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고 알코올 중독의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6]

파일:external/bioproj.sabr.org/AlexanderPete.jpg
이처럼 힘든 시간을 겪고서 군대에서 돌아온 뒤, 그는 다시금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하는 등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의 모습으로 돌아오는가 듯 했다. 그런데 때마침 시작된 라이브볼 시대에 의해 실점이 늘어났고, 탈삼진 능력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 그렇게 데드볼 시대의 에이스는 잊혀지는가 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1992+Conlon+Collection+%2523630+Grover+Alexander.jpg
하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된 알렉산더는 그 해 월드 시리즈에서 20⅓이닝 동안 17K를 잡아내는 활약으로[7]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공헌한다. 이 때의 활약을 자세히 풀어보면 2차전에서 2실점 완투승, 팀이 2승 3패로 몰린 6차전에서 다시 2실점 완투승, 7차전 7회부터 등판해 마무리까지 던졌다. 현대로 치면 2014년 월드 시리즈 매디슨 범가너급의 특급활약을 퇴물이 다 됐다는 평을 듣던 투수가 해낸 것이다. 더군다나 알렉산더는 정규시즌 200이닝 가량을 던지면서 삼진은 47개 밖에 잡지 못했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생각나는 활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927년 다시 21승 2.52 ERA 시즌을 보낸 알렉산더는 1930년 필리스로 복귀하여 한해를 보낸 뒤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물러난다.

2.1. 타고난 내구성[편집]


그와 같이 뛰었던 한스 로버트[8] 회고:

기자: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와 한 팀이었죠?"

로버트: "예."

기자: "술꾼이었나요? (로버트: "예") 1차대전 이전에도요?"

로버트: "오우... 아주 헤비 드링커였죠. 그리고 전쟁 이후에 벤치에서 간질 발작을 일으켰는데,"

기자: "벤치에서요?"

로버트: "그때마다 브랜디같은 독주로 정신을 차렸죠. 그리고 아내와 불화가 있었는데... 제가 볼땐 술 마시는 습관은 그때 시작된 것 같아요. 전쟁에서 돌아왔을 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는데, 그때부터 엄청 마시기 시작했죠. 진짜 그때부터는... 휴우..."

기자: "어떻게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이 그토록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죠?"

로버트: "좋은 몸을 타고났죠. 그리고 절대로 뛰지 않았어요. 투수생활을 하면서도 절대로 뛰지 않았죠."

기자: "제가 알기로 투수한테는 다리가 그렇게 중요한데도요?"

로버트: "(큰소리로) 그러게 말이에요! 그는 워밍업을 길게 할 필요도 없었어요. 월드 시리즈에서 카디널스가 양키스를 상대할 때 그는 경기 전날 밖에서 엄청 퍼마셨어요. 밤새도록 엄청나게 취했고요. 감독이랑 스태프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죠."

기자: "뭐... 당시에 어린 선수도 아니였으니..."

로버트: "그렇죠. 그리고 경기날 벤치에서 자고 있었는데, 감독이 구원투수로 나오라니까 헤인스가 그의 손가락 물집을 잡아 당기는(...) 와중에 (양키스의) 토니 라제리가 주자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오더군요. 알렉[9]

을 흔들어 깨우니까 워밍업으로 공 다섯 개 던지고 마운드 위로 올라갔는데, 경기장 좌측에서 마운드로 걸어가는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알렉이 던진 초구를 토니 라제리가 좌측스탠드 방향으로 라인드라이브 파울을 날렸는데, 그제서야 잠이 깬 것 같더군요. 그리고 (라제리를) 삼진으로 처리하고 경기는 카디널스의 승리로 끝났죠. 그 누구도 해치지 않을 사람이었다만, 마운드위에선 정말 터프했어요. 휴우... 빈볼은 두 눈 사이로 날렸죠. 언젠가 그를 타석에서 만났는데, 제 심장위를 맞췄거든요. 그가 절 죽인 줄 알았어요. 바로 쓰러졌는데 숨이 안쉬어지는거에요. 1분도 안돼 맞은 부위가 엄청 크게 부풀어 올랐고요. 우측 외야로 밀어치려고 하다가 공이 안쪽으로 들어온 게... 퍼억!! ...쓰러졌지만 경기는 계속 뛰어야 했는데, 계속 숨을 쉴 수 없었던게 지금도 생각나네요. ...거친 시절이었죠."

기자: "(공이) 빨랐나요?"

로버트: "어우... 아주 묵직한 공을 던졌죠. 작고 짧은 손가락으로 공을 잡았는데, 손끝에서 공이 떠나면 마치 공이 떠오르는 듯했어요.[10]

몸에 맞으면 납덩어리에 맞는 듯한 느낌이었죠."

인터뷰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qPoQ9NbfLNQ&ab_channel=ThisDayInBaseball


  • 데뷔 후 첫 10년동안 루키 시즌을 포함해 7번이나 최다이닝을 기록했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이닝이터이자 고무팔이었다.[11] 그렇게 엄청나게 많이 던지고도 무려 43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통산 5190이닝을 기록했다.

  • 1차대전에서 돌아왔을때가 만 32세였고, 매년 300이닝 이상을 거뜬히 던지던 이전과는 달리 이후 성적이 들쭉날쭉한데, 여기에 있는 사연이 참으로 기구하다. 에이징커브는 물론이고, 전쟁에서 당한 청력상실, 오른팔 부상, 간질 발작, PTSD, 알코올 의존증 등, 선수로서의 생활은 물론이고 일반인 기준으로도 자살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심신이 망가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망가진 몸은 자그마치 그가 40대에 은퇴할때까지 12년이나 더 그 폭음을 견뎌줬는데, 그가 얼마나 상식을 초월하는 강골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12][13]


3. 은퇴 이후[편집]


1938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 3년차에 80.92%의 득표율로 쿠퍼스타운에 입성했다. [14][15]

은퇴한 이후 그는 순회 야구단에서 플레잉코치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최고의 투수로 활약하며 모았던 돈을 술값으로 탕진했다. 간질알코올 의존증이 결국 그의 인생을 망친 것이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건 자랑스럽다. 그러나 명예의 전당을 뜯어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라며 한탄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정상급 야구선수, 특히 명예의 전당급 선수라면 연봉만 수천만 달러씩 받아서 술값은 평생 문제가 없겠지만, 그가 선수생활 내내 받은 1만불을 조금 상회하는 연봉은 고액이지만 당대 미국인 평균의 겨우 세 배[16][17] 정도였다. 그가 무려 20년을 팔빠져라 공을 던지면서 번 돈의 누적은 17만 8천 900불. 2022년 환율로도 $300만에 못미치는 돈이었다.[18][19] 당연히 은퇴하고서 뚜렷한 수입원이 없는 상태에서 매일 술을 먹으면 바닥날 수 밖에 없는 돈으로, 오늘날과 당대의 스포츠 산업의 격차를 보여주는 씁쓸한 예시다.

1950년 11월 4일 그는 고향 네브래스카주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파일:external/www.baseball-almanac.com/grove_alexander_grave.jpg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피트 알렉산더
130
342
257
77
HOF 입성자 평균
40
185
100
50

  • JAWS - Starting Pitcher (5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피트 알렉산더
120.0
69.6
94.8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73.9
50.3
62.1


5. 연도별 성적[편집]


파일:MLB 로고.svg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11
PHI
48
28
13
3
-
367
2.57
285
5
129
8
227
1.128
132
7.2
8.1
1912
46
19
17
3
-
310⅓
2.81
289
11
105
6
195
1.270
128
4.9
6.3
1913
47
22
8
2
-
306⅓
2.79
288
9
75
3
159
1.185
118
5.5
6.5
1914
46
27
15
1
0
355
2.38
327
8
76
11
214
1.135
122
7.2
8.7
1915
49
31
10
3
0
376⅓
1.22
253
3
64
10
241
0.842
225
9.6
11.0
1916
48
33
12
3
0
389
1.55
323
6
50
10
167
0.959
172
7.4
11.0
1917
45
30
13
0
0
388
1.83
336
4
56
6
200
1.010
154
9.0
9.2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18
CHC
3
2
1
0
0
26
1.73
180
0
38
1
121
0.846
163
0.7
0.7
1919
30
16
11
1
0
235
1.72
293
3
113
0
223
0.928
166
5.4
7.4
1920
46
27
14
5
0
363⅓
1.91
335
8
69
1
173
1.112
166
6.5
11.9
1921
31
15
13
1
0
252
3.39
286
10
33
1
77
1.266
113
4.2
4.7
1922
33
16
13
1
0
245⅔
3.63
283
8
34
3
48
1.290
115
4.3
4.4
1923
39
22
12
2
0
305
3.19
308
17
30
0
72
1.108
125
5.1
5.2
1924
21
12
5
0
0
169⅓
3.03
183
9
25
1
33
1.228
128
2.1
2.0
1925
32
15
11
0
0
236
3.39
270
15
29
3
63
1.267
128
3.9
4.4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26
CHC/STL
30
12
10
2
0
200⅓
3.05
191
8
31
2
47
1.108
128
3.1
3.3
1927
STL
37
21
10
3
0
268
2.52
261
11
38
1
48
1.116
160
3.8
6.2
1928
34
16
9
2
0
243⅔
3.36
262
15
37
2
59
1.227
120
3.9
3.4
1929
22
9
8
0
0
132
3.89
149
10
23
1
33
1.303
123
2.0
2.4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30
PHI
9
0
3
0
0
21⅔
9.14
40
5
6
0
6
2.123
61
-0.1
-0.5
MLB 통산
(20시즌)

696
373
208
32
0
5190
2.56
4868
165
951
70
2198
1.121
135
95.7
116.2

6. 여담[편집]


  • 파일:external/dd9832381e91f34680ea1664a2f9bcf9ba836f2e6483263e8c05fb7527681e83.jpg
그의 사후인 1952년, 그의 생애를 다룬 전기 영화 이 제작되어 로널드 레이건,도리스 데이가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알렉산더의 인생을 클리셰로 점철시킨 끔찍한 영화라며 혹평했다(...).


7. 관련 문서[편집]


[1] 크리스티 매튜슨과 공동 3위인 373승. 1위는 512승의 사이 영, 2위는 417승의 월터 존슨[2] 투수 116+타자 3.1.[3] 1914~17 4년 연속 다승왕에 올랐다.[4] 이는 마이너리그 시절 머리에 공을 맞은 충격에 기인한다.[5] 이러한 간질 발작은 후술한 알코올 중독과 겹쳐 마운드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알렉산더에 대한 술주정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6] 김형준 기자의 레전드 스토리 참조.[7] 또한 베이브 루스끝내기 도루실패가 결정적이었다.[8] 1910년대에 필리스에서 알렉산더와 선수로 같이 뛰었고, 후술되는 1926년 월드 시리즈는 그가 카디널스의 스태프로 있었던 시기로 추정된다. 은퇴 후 미국육군사관학교 야구팀의 코치, 자이언츠의 전설 존 맥그로의 스카우터, 필리스와 레즈의 코치와 감독을 지낸 등, 크고 작은 야구계 경력이 굉장히 다양하다.[9] 알렉산더의 애칭[10] 라이징 패스트볼 항목의 묘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영상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100년전 레전드의 구위를 묘사하는 귀중한 자료.[11] 특히 데뷔 7년차에 6번이나 최다 이닝을 던졌다.[12] 오늘날같이 건강과 영양상태가 좋은 시대에도 보통 사람은 30대에 접어들면 매일 술먹고 출근하는 생활은 버티기 힘들다. 근데 이건 자그마치 40대까지 망가진 몸 + 폭음으로 프로 스포츠 무대에서 버틴 케이스다.[13] 특히 1920년의 성적은 bWAR기준 11.9로, 레퍼런스의 기여도 수치로는 커리어하이었다.[14] 월터 존슨에 이어 사이 영과 역대 2위를 다투는 대투수임에도 3년 차에 낮은 득표율로 입성한 이유는 알코올 중독의 이미지 탓이 컸던 듯 하다.[15] 라고 적혀 있으나 그 사이 영도 2년 차에 75%를 겨우 넘겨 헌액되었다. 그러니 이미지 탓이 그렇게 큰 건가도 확실하지는 않다. 명예의 전당 초창기에는 대선수들도 이런 경우가 많았다. 통산 타율 2위의 대타자 겸 2루수 로저스 혼스비는 5년차 78%, 역대 최고의 좌완 투수 레프티 그로브도 4년차 76%,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2루수 에디 콜린스도 4년차에 겨우 들어갔다. 1936년의 First Five를 제외하면, 첫 해 헌액은 1962년의 밥 펠러와 재키 로빈슨이 처음이다. 막상 퍼스트 파이브 중에서도 원톱이었던 야구황제 타이 콥과 2년차 합격자 트리스 스피커는 감독 겸 선수때 승부조작 의혹이 있었고, 팀을 옮겨서 코치를 하다가 은퇴했던 경우였는데도 높은 성적으로 합격했다.[16] 오늘날의 정상급 스포츠스타와 일반인의 평균 연봉은 수백, 혹은 천 배 이상의 차이가 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똑같아서, 당대에도 선수들이 너무 많이 받는거 아니나며 시기하는 사람들은 많았다.[17] 게다가 버는 만큼 세금도 더 내야 하니까 사실상 세 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차이다.[18] 물론 이것마저도 선수 생활 내내 썼기 때문에 은퇴할 시점에 통장의 잔고는...(...).[19] 여담으로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베이브 루스의 누적은 85만 달러로 당시 상식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근데 술은 베이브 루스도 많이 퍼먹었고 스포츠신문에도 많이 나왔다. 착한 부인이 붙잡고 돌봐줘서 시즌 중에는 안 먹고, 겨울에만 퍼먹는 쪽으로 바꾸면서 중독까지는 안 갔지만 부인 없었으면 충분히 갈 수도 있었던... 무려 수십년 뒤의 슈퍼스타 미키 맨틀의 누적이 112만불이었다는 걸 보면 얼마나 엄청난 고액연봉자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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