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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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2.1. 가톨릭교회의 대응
2.2. 1903년 키시네프 포그롬
2.3. 카를 케슬러 사건
2.4. 21세기
3. 여담


1. 개요[편집]


중세반유대주의루머 중 하나로, 유대인들이 가톨릭 신도의 어린아이를 유대교 예식을 위해 살해한다는 괴소문이다.

근현대에 포그롬으로 유대인을 학살한 러시아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루머가 있었고 독일의 나치도 피의 중상을 선전했다.러시아 선전물, 나치 선전물


2. 설명[편집]


영어로는 Blood libel[1] 또는 ritual murder libel이며 독일어로는 Ritualmord라고 한다.

11세기까지 유럽에서의 유대인 박해는 제도적이지 않았으며 우발적이거나 공교로운 사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2세기부터 유대인 박해는 종교적 동기를 갖고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발단 중 하나가 '유대인들은 영아를 납치 살해한다'는 소문이었다.

1144년 잉글랜드 왕국노리치에서 한 소년이 실종되었는데 기독교로 개종한 한 유대인이 '유대인들의 유월절 의식에 쓸 무교병을 만들 때 기독교도의 피를 넣어야 해서 기독교도 아이를 납치살해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사건이 유대인에 대한 폭력으로 확대되기 전에 소년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몸에 상처나 피를 빼낸 흔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 생겨난 소문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때부터 '유대인은 유대교 의식에 그리스도교 영아를 인신공양한다'는 루머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으며 이는 세기를 더할수록 여러 바리에이션으로 발전되어 파리에선 '유대인이 경영하는 양장점의 탈의실에 여성 혼자 들어가면 납치, 살해된다'고 구전되기도 하였다. 오를레앙 괴담 문서 참조.


2.1. 가톨릭교회의 대응[편집]


12~13세기의 가톨릭교회는 유대인들이 인신 제사를 지낸다는 유언비어와 그 전파 속도[2]에 대경실색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들을 교황좌에서 여러번 내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중들에게 다가오진 않았던지, 그리고 교회도 그 흐름을 거부할 순 없었던지 트렌토(Trent)의 성 시모네(Simone)[3]성인은 유대인들에게 살해된 아기 순교자라고 시성되었다. 축일은 3월 24일.


2.2. 1903년 키시네프 포그롬[편집]


1903년 러시아 제국 키시네프(현 몰도바의 수도)에서 6살 아이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6살짜리 우크라이나인 소년 미하일 리바첸코(Mikhail Rybachenko)가 키시네프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두버사리 마을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고 독약으로 자살한 한 소녀가 유대인 병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는데 베사라베츠(Бессарабец)라는 이름의 지역신문에서 두 아이 모두 유월절에 피를 사용할 목적으로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했으며 또 다른 현지 신문인 스베뜨(Свет)도 비슷한 암시를 주는 보도를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폭동과 학살을 촉발했다.

폭동과 학살은 수일간 이어져 49명이 학살당하고 600여명이 중경상을 입고 건물 700여채가 파괴되었다. 이 광란을 경찰은 방조했고 러시아 정부는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이후 아이를 죽인 범인은 유대인이 아니라 친척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 키시네프 포그롬은 러일전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 포그롬에 분개한 유대인 부호들이 당시 제정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던 일본 제국에 재정적으로 다소간의 보탬을 주었다는 건 어느정도 알려진 이야기다.[4]

2.3. 카를 케슬러 사건[편집]


1929년 3월 17일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연간이었던 독일에서는 카를 케슬러(Karl Keßler[Kessler])라는 이름의 4살 아이의 시신이 숲에서 발견되었는데 시신은 목이 잘리고 피가 뽑힌 상태였다.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발행하던 나치 선전지 돌격대(Der Stürmer)는 이를 유대인의 살인 의식(Ritualmord)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나치는 카를 케슬러를 추모하는 비석도 남겼고 반유대주의 시위를 일으켰는데 이에 주동적 역할을 한 인물은 오토 헬무트(Otto Hellmuth)라는 인물이었다.

하필 카를 케슬러가 죽은 날은 유월절과 가까운 날이었고 검시관(Dr. Burgel of Bamber)은 "우리는 여기서 제의(祭儀)적인 살인(ritual murder)을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카를 케슬러 사건은 사법기관이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며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반유대주의는 더욱 확산되었으며 살인 다음날 Hofheim에서 온 유대인 정육점이 없어진 것이 의심되었다.

이 외에도 나치가 유대인의 살인 의식 희생자라고 주장하면서 반유대주의 선동의 소재가 된 인물은 Hans Fehse와 Erika Fehse, Helmut Daube, Martha Kaspar 등이 있다. Hans Fehse와 Erika Fehse의 시체는 1926년에 Breslau 광장에 발견되었는데 시체에는 피와 성기가 없었다. 유대인 정육업자가 의심되었으며 그 역시 없어졌다고 한다. Helmut Daube의 시체는 1928년에 발견되었다. Martha Kaspar의 시신은 1932년 발견되었으며 유대인 모리츠 마이어(Moritz Meyer)가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2.4. 21세기[편집]


21세기에도 피의 중상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2020년 이탈리아의 화가 조반니 자스파로(Giovanni Gasparro)는 트렌트의 시몬을 묘사한 그림을 그렸는데 해당 그림에서 유대인은 반유대주의적인 이미지인 매부리코에 웃으면서 잔혹한 의식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해당 그림

현대의 아랍권에서도 피의 중상 신화가 방송, 서적 등을 통해 전파된 바 있다.


3. 여담[편집]


더 슬픈 것은 이렇게 특정 종교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신자들이 아이를 납치해서 몰래 제물로 바치는 사교 의식을 치른다'는 루머가 돌고 그로 인한 탄압과 순교, 박해, 학살이 이뤄진 역사는 기독교도 자신들이 한때 고스란히 고대 로마 제국에게 당했던 일이라는 점이다.

많은 로마인들은 카타콤에 모여서 미사를 집전하는 초기 기독교 교도들의 순수한 영성체 의식에 쓰이는 빵을 두고 그 반죽을 영아의 피로 빚는다고 생각했는데 첫 영성체 의식은 기독교에 입교한 신자에게 밀가루 반죽 속에 숨겨 둔 영아를 내려치게 하고 그 반죽으로 만든 전병인 성체를 먹게 함으로서 식인행위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기독교도 탄압의 근본적 이유는 로마의 종교 거부, 특히 반역행위로 해석된 황제 숭배 거부에 있지만 이런 루머도 기독교도 혐오에 단단히 일조했다.

[1] 블러드 라이블이라고 발음한다.[2] 2백년 가량 지나는 동안 전 유럽 대륙에 퍼져나갔다. 당시로선 상당히 빠른 속도이다.[3] 기록상에는 1472년생 트렌토는 현재 이탈리아 트렌티노알토아디제의 도시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산하 트리엔트 주교후국(Hochstift Trient)에 속했다. 여담으로 움베르토 에코는 반유대주의 음모론을 다룬 소설 프라하의 묘지의 주인공의 이름으로 이 시모네 성인을 이용했다.[4] 그런데 환빠 계통의 반유대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역으로 이걸 반유대주의의 논거중 하나로 귀납해 버리는데 대략 "이 사건 때문에 일본이 이겨서 일제강점기가 되어 버렸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겨서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으니 일본에게 돈준 유다야 신디케또 나빠요"라는 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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