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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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Picaud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피에르 피코 또는 프랑수아 피코로도 알려진 프랑수아-피에르 피코의 제화공[1]이다.


2. 생애[편집]


프랑스 제1제국 시절의 정치-사법적 술책의 희생자로, 알렉상드르 뒤마가 쓴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의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의 실제 모델. 그러나 기록 보관소에 피에르 피코에 대한 존재의 흔적이 없어서 피에르 피코에 대한 성격은 의심할 수 있다. 자크 푀셰가 썼지만 그의 사후에 출판된 경찰 기록 보관소를 낭만적으로 만들기 위해 에티엔-레옹 라모트-랑공이 발명했을 것이다. 계보학자들은 라모트-랑공의 피에르 피코 캐릭터에 영감을 준 인물을 찾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고, 그들의 연구에서 수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가스파르 에티엔 파스토렐이라는 인물을 찾아냈다. 그와 피에르 피코의 캐릭터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존재하며, 그가 몬테크리스토 백작에게 알렉상드르 뒤마에게 영감을 준 라모트-랑공의 진정한 영감인 것 같다.

1807년에 피에르 피코는 아름답고 매우 부유한 여성인 마르그리트 비고루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피에르가 12명을 위한 결혼 피로연을 열 때, 그의 친구 중 한 명인 마티외 루피앙(마르그리트의 지참금을 맡고 있던 두 아이가 있는 홀아비인 여관 관리자)은 그의 행운을 질투했다. 루피앙은 선술집의 두 고객인 (솔라리 그리고 쇼바르)와 공모하여 피에르 피코를 영국에 고용된 스파이이자 왕실 요원이라고 고발했다. 네 번째 친구인 앙투안 알뤼는 이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침묵했다. 경찰 국장의 보고서가 로비고 공작에게 보내졌고, 그는 결혼식을 올리려던 피코를 체포, 극비리에 감옥으로 이송했다.

피코는 알프스의 페네스트렐레 요새(지금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에 있는)에서 별다른 재판도 받지 않은 채 7년을 보냈다. 그는 이웃하는 감방으로 작은 통로를 팠는데, 마침 거기에 억류되어 있던 이탈리의 성직자 토리 신부와 친구가 되었다. 일 년 후에 토리는 죽으면서 피코에게 밀라노에 숨겨진 보물을 물려준다.

피코는 1814년 나폴레옹 제국의 붕괴 후에 풀려났다. 일단 그는 조제프 뤼셰라는 이름을 쓰며 보물을 손에 넣었고 그의 친구이자 배신자들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 이번엔 아베 발디니라는 성직자로 변신하여, 많은 다이아몬드를 정보 수집에 지불한 끝에 옛 친구인 님의 알뤼를 찾아냈다. 알뤼에게서 루피앙이 2년 전에 결혼한 마르그리트 비고루의 지참금 덕에 이탈리아 대로에 있는 카페를 장만했다는 것을 알았다.

제2차 복원 하에서 피코는 루피앙의 레스토랑에 있는 요리사 드 랑에게 고용되어 복수를 시작했다. 쇼바르는 "일인자"라는 글씨가 새겨진 단검에 살해되었고, 다음으로 그는 루피앙을 망친다. 코를라노 출신 가짜 왕자가 루피앙의 딸을 유혹해 그들의 결혼식 날, 코를라노는 하객 150명에게 일일이 손을 썼다. 불량배 친구들의 강권으로 술에 취해 있던 그 집의 아들인 루피앙이 강도 현장에서 주머니마다 훔친 보석들로 가득한 상태로 발견되면서 20년 강제 노동 선고를 받았다.

결국 루피앙의 카페는 이방인들이 태워버리고 솔라리는 독살된 채 발견되어 그의 관에는 "이인자"라는 비문이 새겨진다. 그 순간 피코는 루피앙을 찌른다. 여기서 피코를 지켜보고 있던 알뤼가 피코를 덮쳐 줄로 묶은 뒤 재산을 모두 뜯어내려고 한다. 피코가 계속 거절하니 알뤼는 피코를 살해했다.

1828년 런던의 빈민가에 있던 알뤼는 아프고 빈사 상태였는데,. 알뤼가 죽기 전에 자신의 옆에 있던 프랑스 성직자 아베 마들렌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마들렌은 알뤼의 이야기를 적어 파리 경찰청장에게 보냈고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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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게는 없고 집에서 신발 만드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