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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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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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베를린 영화제
파일:베를린 국제 영화제 로고.svg
황금곰상
제21회
(1971년)


제22회
(1972년)


제23회
(1973년)

비토리오 데 시카
(핀치 콘티니의 정원)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캔터베리 이야기)


사티야지트 레이
(대지의 눈물)
심사위원대상
제20회
(1970년)


제21회
(1971년)


제22회
(1972년)

수상자 없음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데카메론)


아서 힐러
(종합병원)

역대 칸 영화제
파일:칸 영화제 로고.svg
심사위원특별그랑프리
제26회
(1973년)


제27회
(1974년)


제28회
(1975년)

장 외스타슈
(엄마와 창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아라비안 나이트)


베르너 헤어조크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
각본상
제10회
(1957년)


제11회
(1958년)


제12회
(1990년)

수상자 없음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마시모 프란치오사, 파스콸레 페스타 캄파닐레
(젊은 남편들)

수상자 없음

역대 베네치아 영화제
파일:베니스 국제 영화제 로고.svg
특별 심사위원상
제24회
(1963년)


제25회
(1964년)


제26회
(1965년)

루이 말 / 이고르 탈란킨
(도깨비불) / (삶으로의 입장)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 그리고리 코진체프
(마태복음) / (햄릿)

루이스 부뉴엘 / 마를렌 후치예프 / 레이프 크란츠
(시몬 오브 더 데저트) / (나는 스무살) / (용감한 하층민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Pier Paolo Pasolini

파일:PIER-PAOLO-PASOLINI.jpg
출생
1922년 3월 5일
이탈리아 왕국 에밀리아로마냐 볼로냐
사망
1975년 11월 2일 (향년 53세)
이탈리아 라치오 로마 오스티아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직업
영화 감독, 소설가, 시인
신장
167cm
활동
1954년 ~ 1975년
서명
파일:600px-Pier_Paolo_Pasolini_signature.svg.png

1. 개요
2. 생애
3. 파졸리니와 카톨릭
4. 필모그래피
4.1. 장편 영화
4.2. 기타 작품



1. 개요[편집]


"내게 있어 진정한 우상은 리얼리티다."

파일:salo_7_pas_2.jpg

이탈리아영화감독. 이탈리아에선 이름을 줄여서 PPP로 쓰기도 한다.

3대 영화제 모두에서 본상을 받은 만큼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감독이지만 시인, 소설가, 극작가로도 활동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1]

2. 생애[편집]


1922년 3월 5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로 알베르토 파졸리니는 고위 파시스트당원이었고 어머니 수산나 콜루시는 농민 집안 출신의 교사였다. 이런 계급 차이 때문에 아버지는 파졸리니를 아들로서 대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아내로 여기지도 않으면서 무시했다. 덕분에 어머니가 파졸리니를 홀로 돌봐야 해서 파졸리니는 아버지가 병사하자 무척 기뻐했을 만큼 아버지를 극도로 혐오했다. 그래서 파졸리니가 감독한 여러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파시즘의 모순을 비판하는 메세지를 담고있다. 그러나 어머니한테는 엄청난 효자였고 사이도 좋아서 어머니는 파졸리니가 만든 영화에서 열연하기도 했다. 귀도라는 세 살 아래 동생이 있었지만 1944년 살로 공화국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살해당했다. 파졸리니는 동생의 죽음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1940년 볼로냐 대학교에 입학하여 예술사를 전공하고 20세에 시집 카사르사의 노래를 발표해 미래의 문학인으로 주목받았으며 지역 공산당 조직에 가입하기도 했으나 1949년 집단 동성애 혐의로 추방당해 가족들과 함께 로마로 이주했다. 이후 파졸리니는 로마에서 교사로 일하며 빈민가 사람들의 생활을 관찰해 내놓은 거리의 아이들폭력적인 삶이라는 소설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다. 1961년에는 영화 감독 데뷔작이자 뒷골목 포주들 이야기를 다룬 아카토네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문제적 감독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파졸리니가 감독한 영화들의 일관된 파격성으로 정치적 문제를 포함해 수많은 논쟁을 환기해서 그는 수차례 감옥에 들락거렸다. 의외로 흥행 실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특히 데카메론은 당시에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가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우파들은 "그의 영화들에는 언제나 타락한 사람들이 중심을 이룬다."고 비난했고, 좌파들은 "그의 영화가 대중들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위험한 인식을 줄 수 있다."며 우려했지만 파졸리니가 이탈리아 사회의 여러 모순을 뿌리깊게 관찰하고 자신만의 시적 리얼리즘이라 명명한 예술방식은 지금까지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Edipo Re, 1967년)은 프로이트적 해석과 자전적인 요소- 상술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 어머니에 대한 사랑, 혹은 어쩌면 욕망- 를 가미하여 신화를 변주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원작의 오이디푸스가 진리 추구, 자아 발견에 대한 열의를 결코 꺾지 않고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파졸리니 영화에서의 오이디푸스는 무의식적으로 이미 깨달은 것에 대한 의식적인 거부를 표하는 인간의 심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이디푸스 역의 프랑코 치티와 그를 보좌하는 광대 역의 니네토 다볼리는 파졸리니의 영화에 여러 번 참여했으며 특히 다볼리는 파졸리니가 연인으로 생각했지만 1971년에 여자친구와 결혼한다고 말해서 파졸리니가 상당히 실망했다고 한다.

1975년 유작 살로 소돔의 120일[2]을 남기고 11월 2일 오스티아 해변에서 17세 소년 주세페 펠로시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살해 현장에 난 많은 발자국과 여러 차량 자국, 여러 증언 들로 말미암아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사실 파졸리니는 우익이나 보수층을 적나라하게 까기도 했지만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냉전 당시 네오파시즘과 신자본주의의 팽창을 우려하는 글을 신문에 개재하곤 해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워낙에 적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용의자도 엄청났다. 경찰 측에서 지어낸 시나리오도 치밀했는데 용의자인 소년이 동성애 상대였고 파졸리니가 변태적인 성행위를 강요하여 살해했다. 이때 소년은 파졸리니의 지갑을 슬쩍했으며 마을로 도망친 소년의 입을 통해 파졸리니의 동성애 짓이 소문나자 격분한 마을 청년들이 시체를 두들겨 패고 소년이 차로 후진해서 얼굴을 뭉갰다는 각본이 준비되어 있었다.

경찰은 사건 현장의 증거 인멸에만 급급했고 급기야는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파졸리니를 지지하는 몇 사람이 경찰에게 덤벼들면서 반발하기까지 했다. 파졸리니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인 파졸리니가 누군가에게 살해되고 권력으로 은폐됐다고 죽을 때까지 비난했으며 파졸리니를 지지하는 소수도 시위하면서 재조사를 거듭 촉구했지만 1998년 이탈리아 측은 파졸리니가 살해된 사건을 미해결로 마무리했다. 2000년대에 와서 범인으로 잡혔다는 주세페 펠로시는 당시 억지로 거짓 자백한 것이지 나는 파졸리니를 죽이지 않았다고 고백하면서 시칠리아 억양을 쓰는 남성 3명이 파졸리니를 죽였다고 밝혔다. 이후 주세페 펠로시는 각종 방송과 책을 통해 파졸리니가 사망한 당시 상황을 증언했고 새로운 용의자도 추론되었지만 세월이 지나 증거 부족 및 용의자 일부가 이미 사망하여 재조사는 흐지부지 되었다.

혼돈기인 70년대 납의 시대, 우익 마피아 세력에게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당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22년 이탈리아에서 새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네오 파시스트 계열 마피아 조직 '반다 델라 말리아나'가 파졸리니 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3. 파졸리니와 카톨릭[편집]


사회주의자답게 교황청을 비롯한 교회를 엄청 까던 사람으로, 파졸리니가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로고파구》(Ro.Go.Pa.G)는 지나친 교회 비판으로 말미암아 상영 금지 처분받아 결국 이탈리아 상영판에서는 파졸리니의 연출 분량 전체를 삭제하여 겨우 개봉했다.

하지만 지인들 말에 의하면 파졸리니야말로 참된 신자라고 할 정도로 꽤나 진지한 기독교도(가톨릭)였다고 한다. 실제 파졸리니가 감독한 대표작 가운데 하나는 예수의 생애를 다룬 1964년작 영화 《마태오 복음서》(Il Vangelo secondo Matteo)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오죽하면 이 마태오 복음서를 보고 호평하던 바티칸에서 성직에 종사하던 보수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 감독이 파졸리니라는 말에 기겁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이 영화가 바티칸에서 열리던 가톨릭 영화제에서도 상을 못 받은 게 심사위원을 맡은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파졸리니가 싫어서 일부러 외면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정도였으니. 이 영화는 한국내 개신교 관련 월간지 낮은 울타리에서 추천하던 종교 영화이기도 하다. 참고로 말하자면 낮은 울타리를 발행하는 목사 신상언은 별별 대중문화에 대해 반대 시위를 벌여온 작자로 악명이 높다.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도 바로 그가 썼고 레이디 가가 내한 반대 사건도 주도하던 자이다! 그런 그가 이 영화를 추천했을 정도다.


4. 필모그래피[편집]



4.1. 장편 영화[편집]


  • 아카토네(1961)
  • 맘마 로마(1962)
  • 마태복음 (1964) -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 매와 참새 (1966)
  • 오이디푸스 왕 (1967)
  • 테오레마 - (1968) -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라우라 베티)[3]
  • 돼지우리 (1969)
  • 메데이아 (1970)
  • 생애 3부작
  • 살로 소돔의 120일(1975)


4.2. 기타 작품[편집]


  • 백색 치즈 / 분노 1부(1963)
  • 사랑의 집회 (1964)
  • 마태복음을 위한 팔레스타인 보고서 (1965)
  • 달에서 본 지구 (1966)
  • 구름은 무엇인가? (1967)
  • 인도의 한 영화를 위한 노트 (1968)
  • 종이꽃다발 (1969)
  • 아프리카의 오레스테스를 위한 노트 (1970)

이 외에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각본가로 참여한 마우로 볼로니니 감독의 영화 《조바니 마리티》로 1958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비리아의 밤》 각본에도 참여했다.
[1] 사망 불과 며칠 전, 스웨덴 스톡홀름을 방문한 것도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였다.[2]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성으로 국가 대부분에서 상영 금지를 먹은 악명 높은 영화이다. 80년대 국내에서 상영회를 했을때 여대생들이 영화를 보다 뛰쳐나와 집단으로 구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3] 하길종 감독이 이효석의 소설인 '화분'의 이름을 빌려 1973년 번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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