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퀀트 윈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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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작전 계획과 옵션
2. 전개
2.1. 북베트남의 침공
2.2. 4월: 작전 개시
2.3. 4월 29일: 옵션 4 - 화이트 크리스마스
2.4. 4월 30일: 마지막 탈출
3. 한국의 철수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파일:1683443152190.jpg

1. 개요[편집]


Operation Frequent Wind.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베트남 공화국에서 실행한 마지막 작전이다.

국지적인 의미의 프리퀀트 윈드 작전이란 사이공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온 1975년 4월 29일에서 30일에 걸쳐서 약 24시간 동안 7천 명이 넘는 미국인과 제3국 국민, 그리고 "위험에 처해 있다고 판단된" 남베트남 국민을 대피시킨 사건이다. 헬기 있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사진이 바로 당시 사진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 24시간 동안만 사람들을 탈출시킨 것은 아니므로 이 문서에서는 1974년 12월 북베트남의 공세 시작 이후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실행한 탈출 작전을 모두 서술한다.

1.1. 작전 계획과 옵션[편집]


북베트남의 공세로 남베트남이 무너지는 가운데 제럴드 R. 포드 대통령 하 미국 정부는 남베트남의 패망이 머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남베트남에 체류하던 미국인과 제3국 국민, 그리고 남베트남에 남아 있을 경우 북베트남의 보복을 받을 것이 확실한 남베트남 국민들을 구출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탈출대상자로는 남베트남에 체류중인 미국인과 제3국 국민, 그리고 남베트남에 남아 있을 경우 북베트남의 보복을 받을 것이 분명해 "위험에 처한(At-risk)" 남베트남 국민이었는데 미국인과 제3국 국민 8천여 명은 당연히 탈출 대상자에 포함되었으나 문제는 남베트남 국민들이었다. 당시 미국 대사관에 "위험에 처한 인물"로 등록된 남베트남 국민만 17,000명이었는데 이들이 평균 7명의 가족을 이루고 있다고 가정하면 이것만 계산해도 119,000명이었다. 여기에 이런저런 이유로[1] 구출해야 하는 남베트남 국민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20만 명을 훌쩍 넘겼다.

당시 미국은 총 4개의 옵션을 구상했다.
  • 옵션 1은 떤선녓 공군기지 및 남베트남의 다른 공항을 통해서 민항기로 공중수송하는 방안이었다.
  • 옵션 2는 옵션 1의 비행장을 통해 군용기로 공중수송하는 것이었다.
  • 옵션 3은 사이공 항만을 통해서 해상수송하는 것이었다.
  • 옵션 4는 최종계획으로서 헬리콥터로 공중수송하여 남베트남 근해에 정박 중인 미 함대로 보내는 것이다.

2. 전개[편집]



2.1. 북베트남의 침공[편집]


1974년 12월 13일 북베트남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2]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남베트남군은 패배와 붕괴를 거듭했다.

1975년 1월 5일 사이공 서남쪽 푸옥롱 성의 주도 푸옥빈이 함락되었다. 푸옥빈은 북베트남군이 처음으로 함락시킨 남베트남의 성도였다.

3월 18일 중부 고원지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닥락성의 부온마투옷이 함락되었다. 승리한 북베트남군은 중부 고원지대를 차지하여 동쪽 해안에 주둔 중이던 남베트남군에게 아낌없이 공세를 퍼부을 수 있었다. 응우옌반티에우 남베트남 총통은 메콩강 삼각주라도 지키기 위해 동쪽 해안에 주둔 중이던 남베트남군 주력부대를 남쪽으로 후퇴시켜 재편성을 시도했으나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후퇴 계획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던 상태에서 사기가 바닥난 남베트남군 1군단과 2군단은 북베트남군의 공격에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패주 과정에서 북베트남군이 노획한 막대한 양의 남베트남군 장비는 덤이었다.

3월 25일 남베트남 북부 투어티엔성의 성도이자 응우옌 왕조의 고도 후에가 함락되었다. 같은 날 꽝찌성과 꽝남성, 꽝응아이성이 함락되면서 남베트남 1군단이 방어하던 북부 지역에서 유일하게 저항하는 곳은 다낭만 남게 되었다.

3월 27일 남베트남과 미 해군은 다낭에서 미국인과 남베트남 국민을 탈출시키는 철수 작전을 진행했다. 다낭 공항에서 민항기를 이용해 민간인들을 열심히 실어나르고 다낭 항으로 수송선을 보내 3일에 걸쳐서 약 3만 명의 민간인과 군인을 해상으로 철수시켰다. 이렇게 해서 200만 명이 모여든 다낭에서 5만 명 조금 넘는 군인과 민간인을 탈출시켰으나 북베트남군의 진격이 너무 빠르고 민간인을 피난시킬 곳도 마땅치 않았다.

3월 29일 다낭 역시 함락되었다.[3]

3월 31일, 달랏의 원자력 연구소(DNRI)의 연구용 원자로에 있던 우라늄 연료봉을 공군 C-130 수송기 편으로 이동시켰다.

2.2. 4월: 작전 개시[편집]


4월 1일, 중부 지방의 중심도시인 꾸이년냐짱이 함락되었다.

같은 날인 4월 1일 미국의 본격적인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앨러모 계획(Plan Alamo)을 발동하여 떤선녓 공군기지에 있는 미 국방무관 사무처(Defense Attaché Office, DAO)[4] 건물에 지휘통제소를 차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방어태세를 갖췄다. 앨러모 계획은 4월 16일에 완료되었다.

본격적인 작전 개시 전인 3월부터 미 대사관은 필수 인력을 제외한 미국인과 제3국 시민들로 하여금 민항기 및 군용기를 이용한 탈출을 유도하고 있었다. 미국 국적 항공사 소속 민항기뿐만 아니라 매일 2~3편 정도의 미 군사공수사령부(Military Airlift Command) 소속 군용기가 떤선녓 공군기지에 착륙하여 군수물자를 내려준 후 탈출 대상자들을 태워 이륙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발생한 전쟁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려가는 베이비리프트 작전(Operation Babylift)을 병행하여 총 2,678명의 전쟁고아와 아메리시안[5]을 미국으로 데려갔다.

4월 3일, 깜라인만에 위치한 미 해군의 해군기지도 함락되었다. 이무렵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60%를 장악했는데 당초 북베트남은 전쟁이 1976년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예상외로 남베트남이 쉽게 무너지자 호찌민의 생일인 5월 19일까지 사이공을 함락시키기로 하고 공세를 계속 이어나갔다.

4월 4일, 떤선녓 공군기지에서 베이비리프트 작전을 수행 중이던 C-5가 추락하는 탄손누트 C-5 추락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35명의 DAO 직원을 포함해 총 155명이 목숨을 잃었다.

파일:떤선녓 DAO 사무처.jpg
파일:DAO LZ.jpg
파일:사이공 미 대사관 LZ.jpg
좌: 남베트남 철수 작전을 지휘한 지휘통제소이자 옵션 4의 주요 LZ였던 미 국방무관 사무처(DAO) 건물(위)과 DAO 내 헬기 LZ 위치(아래)
우: 옵션 4의 주요 LZ였던 사이공 주남베트남 미국 대사관. 대사관 내 헬기 LZ였던 왼쪽의 대사관 건물 옥상과 가운데 대사관 주차장이 보인다.

4월 7일,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6] 소속 헬기들이 사이공 시내를 비행하면서 사이공 시내에 있는 37개 건물을 조사하여 DAO와 미 대사관을 비롯해 헬기 착륙 및 탈출 장소인 LZ(Landing Zone)으로 적합한 13개 건물을 선정한 후 각각의 장소를 탈출 장소로 개조하였다. 헬기 수송과 LZ의 경비는 미 해병 9여단이 맡았다. 파리 평화 협정에 따라 사이공에 주둔하는 미군이 50명을 초과하면 안 되었기 때문에 인력이 부족하여 에어 아메리카 헬기들 역시 헬기 수송을 도왔다. 사이공 시내 곳곳에 위치한 28개 건물에 탈출대상자용 셔틀버스를 배치하고 작전이 개시되면 사이공 시내부터 DAO까지 이어지는 미리 지정된 4개의 루트를 따라 이동하면서 탈출 대상자들을 태울 예정이었다.

4월 8일, 남베트남 공군 소속 F-5가 남베트남 총통 관저인 독립궁을 폭격하고 도주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파일럿이 이미 오래 전에 북베트남이 심어 둔 첩자였던 것이다.[7]

4월 12일,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에서도 공산 반군 크메르 루주가 수도 프놈펜으로 진격해 오면서 크메르 공화국의 패망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프놈펜에 남아 있는 미국인을 헬기를 이용해 구출하는 이글 풀 작전(Operation Eagle Pull)을 실행했다. 이글 풀 작전은 289명의 미국인과 캄보디아인을 성공적으로 구출했으며 프놈펜은 이글 풀 작전 5일 후인 4월 17일 함락되었다.

4월 18일, 미 해군 소속 군함 18척으로 구성된 76특임부대(Task Force 76)가 붕따우성 해안으로 파견되어 헬기 수송 준비를 마쳤다. 동시에 남중국해에 파견된 77특임부대(Task Force 77)는 헬기 수송 중 공중 엄호를, 73특임부대(Task Force 73)는 물자 보급을 맡았다. 동시에 미 군사해상수송사령부(Military Sealift Command) 소속 수송선 9척과 예인선 5척으로 이루어진 분함대가 옵션 3를 지원하기 위해 사이공 항으로 파견되었다.

앞서 4월 4일에 발생한 C-5 추락 사고로 인해 C-5가 지상에 묶인 가운데 미국은 남은 C-141C-130으로 작전을 계속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비행기 1대에 탑승 가능한 탈출객의 수가 줄어들었고 무장경비 역시 비행기에 동승하였다. 미국은 탈출 절차 간소화로 더 많은 사람들을 탈출시키려 했으나 남베트남 측의 지지부진한 행정 절차로 인해 탈출객을 태우지도 못한 채 이륙하는 군용기도 있는 등 애를 태우고 있었다. 민항기들은 여전히 떤선녓 비행장을 오가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 횟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호주 등 다른 국가들 역시 군용기를 동원해 자국 국민들과 외교관들을 탈출시켰다.

4월 19일, 남베트남 측의 동의로 탈출 절차 간소화가 완료되었다. 이로서 비행기를 통해 탈출 가능한 사람들의 수가 대폭 늘었다.

4월 21일, 사이공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 쑤언록이 함락되었다. 쑤언록은 레민다오 준장이 지휘하는 남베트남군 18사단이 격전을 치르며 4월 9일부터 4월 21일까지 12일간 버텨내고 있었다. 18사단은 남베트남군에서도 최약체로 평가되었고 병력이 부족했음에도 필사적으로 버텨냈던 것이다. 하지만 18사단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의 파상 공세에 결국 쑤언록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서 사이공의 함락은 시간문제였으며 자국의 운명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는걸 깨달은 수많은 사이공 시민들이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DAO로 몰려들었다.

쑤언록이 함락된 그 날 자포자기한 응우옌반티에우 남베트남 총통은 미국을 비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사퇴하였고 가족을 해외로 피신시킨 후 25일 측근들과 함께 대만으로 망명했다. 공석이 된 총통직은 쩐반흐엉 남베트남 부총통이 이어받았다.

4월 23일, 떤선녓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군용기의 주 목적지였던 필리핀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한 번에 수용 가능한 베트남인을 총 2,500명으로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제 미군은 사이공에 발이 묶인 탈출객들은 물론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수용된 5,000명이 넘는 탈출객까지 훨씬 더 멀리 떨어진 이나 웨이크섬, 요코타 공군기지로 실어나르는 수 밖에 없었다. 전날인 4월 22일까지 매일 20대의 C-141과 20대의 C-130이 떤선녓을 오고가며 탈출객들을 필리핀까지 실어날랐다.

4월 25일, 미 연방항공청이 떤선녓 공군기지의 민항기 운항을 금지했다. 몇몇 민항기 파일럿들이 이를 거부하고 비행장에 착륙해 탈출객들을 실어나르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옵션 1은 이날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같은 날 미국 대사관을 경비 중이던 미 해병대 대사관경비단 소속 해병 18명을 지원하기 위해 미 해병 40명이 미국 대사관에 도착했다. 추가로 그레이엄 마틴 주남베트남 미국 대사를 호위할 6명의 해병 역시 도착했다.

4월 27일, 사이공 외곽의 촐롱 지구에 북베트남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C-141의 사용을 중단하고 C-130로만 작전을 속행했다.

4월 28일, 사이공 동쪽 30km 지점에 위치한 비엔호아 역시 함락되었다. 같은 날 반티에우 총통이 사임하면서 후임 총통이 된 쩐반흐엉 역시 취임한 지 1주일만에 사임하면서 즈엉반민이 후임 총통이 되었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외곽에 진입했다.

같은 날 18시 6분 즈엉반민 총통이 총통 선서를 할 무렵 북베트남군이 노획한 A-37 공격기를 사용하여 떤선녓 공군기지를 공습하여 비행기 몇 대를 파괴했다.[8] 활주로를 이륙한 C-130을 향한 북베트남군의 대공포 사격이 발생했으며 북베트남군이 발사한 로켓포와 포탄이 산발적으로 공군기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C-130의 운항을 일시 중단했다가 20시에 재개했다.

21시 미 국방무관 호머 D. 스미스 육군 소장은 지휘통제소에 내일 총 10,000명을 탈출시킬 60대의 C-130이 도착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2.3. 4월 29일: 옵션 4 - 화이트 크리스마스[편집]


29일 3시 30분 DAO 경비초소가 북베트남군의 로켓포 공격을 받아 DAO를 경비하던 해병 2명이 전사하였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발생한 마지막 미군 전사자였다.

3시 58분 탈출객을 탑승시키기 위해 유도로에서 대기 중이던 C-130 1대가 북베트남군의 로켓포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조종사는 무사히 탈출하여 다른 C-130를 타고 이륙했으나 더 이상 비행장을 이용해 탈출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C-130이 떤선녓 공군기지를 이륙한 마지막 군용기였다.

한편 미군 군용기의 이륙이 중단되어 활주로가 텅 비자 떤선녓 공군기지에 주둔하던 남베트남 공군 조종사 대부분이 각자 전투기를 몰고 태국으로 망명했다. 일부 조종사는 남아 저항을 이어갔으나 북베트남군의 대공포화에 격추되었다. 이것으로 남베트남 공군은 사실상 소멸하였다.

날이 밝자 사이공의 운명을 직감한 수천 명에 달하는 사이공 시민들이 마지막 희망인 미국 대사관으로 모여들여 제발 대사관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9] 대사관의 안전을 위해 대사관 정문은 폐쇄됐고 뒤늦게 도착한 탈출 대상자들은 대사관 담벼락을 경비 중인 미 해병이나 대사관 직원한테 탈출 자격을 증명한 후 담벼락을 넘어 몰래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7시 스미스 소장은 마틴 대사에게 옵션 2를 종료하고 옵션 4를 발동할 것을 요청했다. 마틴 대사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떤선녓 공군기지의 상태를 직접 확인한 후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8시 30분 옵션 4 발동에 대비해 에어 아메리카 소속 헬기 조종사들이 DAO 건물 맞은편에 위치한 에어 아메리카 건물에 도착했다.

10시 떤선녓 공군기지를 방문하여 상태를 둘러본 마틴 대사는 스미스 소장의 옵션 4 발동 요청을 승인했다. 옵션 2는 이것으로 공식 종료되었다. 이날까지 옵션 1과 옵션 2를 통해 총 5만 7천 명이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같은 시각, 미 대사관에 주둔 중인 해병들은 미 대사관 주차장에 있는 가로수들을 베어내고 주차된 차량을 치워 추가 LZ 공간을 확보했다. 이렇게 해서 미 대사관에는 대사관 옥상과 주차장, 2개의 LZ가 만들어졌다.[10]

10시 30분, 에어 아메리카 소속 UH-1 헬기 24대가 DAO를 이륙하여 각 LZ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10시 48분, 마틴 대사가 포드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옵션 4의 발동 승인을 요청하였다.

10시 51분, 옵션 4 발동 명령이 하달되었다. 명령 개시 암호는 "현재 사이공 온도는 105도[11]이며 점점 오르는 중입니다. 곧바로 '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고 있어요(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12]'가 이어지겠습니다(The temperature in Saigon is 105 degrees and rising. This will be followed by the playing of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파일:사이공 탈출.jpg
1975년 4월 29일 14시 30분 경 사이공 자롱로(路) 22번지[13]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직원 숙소 건물 옥상에 위치한 LZ[14]에서 헬기로 탈출하는 사람들

옵션 4 발동과 동시에 미 육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White Christmas' 노래와 함께 미리 준비해둔 버스들이 사이공 시내를 돌아다니며 이전에 탈출 대상자로 지정된 미국인과 동맹국 국민, 그리고 미국 정부가 지정한 남베트남 국민들을 태운 후 미 대사관을 제외한 나머지 LZ로 이동시켰다.[15][16] 이렇게 LZ로 이동한 탈출 대상자들은 미군 헬기에 올라타 붕따우 해안에 주둔한 미 함대로 이동했다.

안전을 위해 탈출 헬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들은 헬기의 적정 고도, 비행 루트, 착륙을 위한 체크포인트의 위치, 혹여나 있을 적의 대공화기 종류까지 모두 숙지했다. 혹여나 탈출 헬기가 적의 공격이나 고장으로 인해 추락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지상에 추락한 생존자 호위 및 부상자 구출을 위해 미 해병이 탑승한 CH-46 4대가 상시 대기하였다. 또 남중국해에 있는 77특임부대 소속 항공모함 2척[17]과 주태국 미군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전투기가 공중 지원 및 엄호를 맡았다.

남베트남군과 북베트남군 사이에 교전이 한창인 혼란상에서도 작전은 크게 방해받지 않고 진행됐는데 북베트남군은 탈출 중인 미 헬기를 공중 지원하는 미 공군의 움직임을 레이더에 포착했지만 '미국이 탈출 작전까지 개시한 이상 미국이 남베트남을 도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탈출 헬기를 공격하지 않았다. 사이공 시내의 경비를 맡은 경찰은 탈출 버스를 보호하는 조건으로 탈출을 보장받아서 작전을 방해하지 않았고 탈출 헬기를 본 몇몇 남베트남 군인들이 총으로 방해하려 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 수행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위치 파악을 방해하는 흐린 날씨와 시내에서 가시거리가 1.6km 밖에 되지 않은 사이공 시내의 안개였다.

14시 6분, 철수 작전의 지휘를 맡은 미 해병 9여단장 리처드 캐리 해병 준장이 헬기를 타고 DAO에 도착했다.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방어를 위해 DAO로 뒤따라 올 해병대를 대비해 간이 사령부를 설치했다.

15시 6분, DAO의 방어를 맡은 해병대를 태운 CH-53 12대로 이루어진 제1진이 DAO에 도착했다. 한편 그 시각 미 대사관 경비대대장 제임스 킨 해병 소령이 DAO 앞으로 전갈을 앞으로 보내왔는데 미 대사관 내 탈출 대상자들을 DAO로 보낼 수 없으니 대사관으로 헬기가 더 많이 보내야 한다는 헬기 증파 요청이었다.

15시 15분, 제1진과 마찬가지로 CH-53 12대로 이루어진 제2진이 DAO에 도착했다. 직후 CH-53 8대, HH-53 2대로 이루어진 제3진이 도착했다.

15시 40분, 첫번째 탈출 대상자들을 태운 CH-53가 DAO를 이륙했다.

17시, 첫번째 CH-46이 미 대사관에 착륙했다.

17시 30분, 캐리 장군은 DAO를 경비 중이던 C중대 3소대의 철수를 지시했다. 이들은 25일 DAO에 착륙하여 계속해서 DAO를 경비 중이었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었다.

17시 45분, 탈출 대상자들을 태운 마지막 버스 행렬이 DAO에 도착했다.

19시, 캐리 장군은 대사관 방어를 위해 3개 소대, 130명의 병력을 추가로 미 대사관에 파견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가운데 킨 소령은 대사관 내 모든 차량을 동원해 LZ에 헤드라이트를 비춰 대사관 LZ를 밝히라는 지시를 내렸다.

19시 30분, 캐리 장군은 철수 준비를 위해 DAO 방어구역을 축소했다. 이제 DAO에 위치한 7개 LZ 중 헬기 이착륙이 가능한 LZ는 LZ36 하나만 남았다.

20시 30분, DAO에 남아있는 마지막 탈출 대상자들이 헬기에 탑승했다.

21시, 에어 아메리카 헬기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 시점까지 총 20대의 에어 아메리카 소속 헬기[18]가 미군을 도와 철수 작전을 수행하며 1천명이 넘는 탈출대상자를 구출했다.

21시 30분, 킨 소령은 대사관에 착륙한 헬기 조종사로부터 "23시에 작전을 중단할 예정"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76특임부대 사령관 도널드 위트마이어 해군 소장의 지시였다. 아직 사람들이 남았는데 벌써 작전을 중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 킨 소령은 마틴 대사에게 작전이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대통령을 설득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잠시 후 마틴 대사는 "작전이 계속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한편 그 시각 캐리 장군은 작전을 속행하도록 한창 위트마이어 제독을 설득 중이었다.

22시 50분, DAO의 이착륙 통제팀이 탈출을 완료한 후 캐리 장군은 해병대의 철수를 지시했다.

23시 40분, DAO 내 위성 터미널을 파괴했다. 이제 DAO가 외부와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수단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30일 0시 30분 마지막까지 DAO를 방어하던 미 해병대를 태운 CH-53 2대가 이륙하고 DAO 건물은 헬기의 이륙 직후 폭파되었다. 이로써 미 대사관을 제외한 사이공 시내의 모든 LZ가 폐쇄되었다.

파일:the-last-gasp-of-the-vietnam-war-operation-frequent-wind-1.jpg
파일:사이공 탈출 2.jpg
이 모든 공중탈출 피난민을 받아주는 항공모함의 갑판도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수십 대의 헬기가 쉴새없이 갑판 위를 뜨고 내리는 가운데 관제하랴, 헬기에 연료 채우랴, 탈출한 사람들 통제하랴 갑판 위는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거기다 예정에 없던 F-5 전투기나 O-1 연락기 등등 남베트남에서 임의로 탈출한 항공기까지 수용해야 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무단으로 착함한 헬리콥터는 탑승 인원만 수용한 후 바다에 밀어버리는 과감한 조치를 감행해야 했다. 조종사들의 가족을 싣고 온 한 헬기는 착함할 공간이 없는 군함 옆에 붙어서 가족들을 내리게 한 뒤 바다에 불시착했다. 조종사는 착수한 기체에서 탈출해 구조되었다.

2.4. 4월 30일: 마지막 탈출[편집]


30일 2시 15분 DAO를 비롯해 모든 LZ가 폐쇄된 가운데 마지막 탈출구는 미 대사관만 남았고 그때까지 CH-46 한 대와 CH-53 한 대가 10분마다 미 대사관에 착륙해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이 무렵 미 대사관에는 마틴 대사와 대사관을 방어하는 미 해병대 장병들을 포함해 225명의 미국인과 850명의 제3국 국민 및 남베트남 국민이 남았으며 미 대사관에서는 남은 탈출대상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는 총 19번의 비행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한편 대사관 바깥은 어떻게든 헬기에 타서 탈출하려고 대사관 안에 들어오려는 사이공 시민들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3시 마틴 대사는 킨 소령에게 남은 탈출 대상자들을 마지막 방어구역인 대사관 주차장 LZ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했다.

3시 27분 탈출 완료를 위해 19편의 비행편을 승인하는 포드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졌다.

4시 30분 추가로 허가된 19편의 비행편 역시 마감되었고 킨 소령은 캐리 장군으로부터 "이제부터 오는 헬기들은 해병대와 대사관 직원들만 탑승이 가능하니 철수를 위해 마지막 남은 LZ인 대사관 옥상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해병대가 도망간다는 사실을 눈치챈 피난민들은 대사관 정문을 부수고 대사관으로 밀려들어왔고 일부 해병들만 건물 대문 앞에서 피난민들을 막아서서 겨우 통제하던 가운데 탈출할 때가 되자 지상에서 피난민들을 통제하던 해병들은 "화장실에 가야겠다"는 변명을 하고 어둠을 틈타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해병대는 피난민이 건물 안으로 못 들어오도록 건물 안에 문이란 문은 모조리 걸어잠그고 통로마다 설치된 철창문까지 내린 후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피난민들은 급수차 한 대를 끌고와서 대문을 들이받아 뚫어 버렸고(...) 그대로 건물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해병들은 피난민들을 떼어내기 위해 호신용 스프레이 사용이랑 공포탄 발사도 꺼리낌없이 했다. 치사하게 보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수의 해병으로는 상대하기 힘든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난동을 일으켜 해병대가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4시 58분, 마틴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이 성조기를 내린 후 CH-46 헬기를 타고 미 대사관에서 철수했다.

사실 마틴 대사는 철수 과정에서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북베트남이 공세를 시작한 후 정보 당국이 계속해서 "북베트남군이 전략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조만간 남베트남이 무너질 것"이라고 보고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남베트남이 버틸 수 있다고 주장하며 철수 작전을 거부하면서 구출할 수 있는 남베트남 사람들의 수가 대폭 줄어 버렸다. 또 정보국 요원들과 협력자들이 미리 남베트남에서 철수하는 것을 계속 거부했기 때문에 2700명에 달하는 남베트남 내 휴민트들이 탈출하지 못하면서 모조리 북베트남군한테 잡혀 버렸다. 본인 역시 아직 버틸 수 있다면서 대사관 탈출을 거부해 오죽하면 포드 대통령이 "대사가 계속 탈출을 거부할 경우 강제로라도 끌고 오라"고 비밀리에 명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령의 나이에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철수 작전까지 맡아서 건강이 안 좋은 데다 포드 대통령이 간곡하게 돌아오라고 부탁해서 결국 헬기에 올랐다. 그가 해승하자 조종사는 항모 쪽으로 그의 탈출을 의미하는 코드 '타이거가 나갔다(Tiger is out)'를 연발했다.

7시, 대사관을 수비하던 미 해병대도 뒤따라서 헬기를 타고 철수하였다.

7시 53분, 킨 소령을 포함한 대사관경비단 소속 해병 11명이 해군이 보낸 마지막 CH-46을 타고 탈출했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대사관 옥상에 남아 헬기를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들을 태울 헬기가 안 와서 북베트남이 점령한 사이공에서 탈출하지 못할 뻔했다.[19] 이들은 해군에 무전으로 구조요청을 한 뒤 몰려드는 피난민을 막기 위해서 옥상 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버티다가 구조요청을 듣고 달려온 헬기를 타고 탈출했다. 마지막으로 탄 해병대원 한 명은 탑승하다가 미끄러졌는데 조종사가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이륙해 버렸다! 램프도어를 붙잡고 버티다가 다행히 인원수가 맞지 않아서 후방 출입구를 살펴보던 해병이 구해줬다.

8시 30분, 대사관경비단 소속 해병들을 태운 CH-46 헬기가 USS 오키나와에 착륙하면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10시 24분, 남베트남 총통궁에 북베트남군이 진입해 금성홍기를 게양하고 즈엉반민 총통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사이공의 함락이었다.

5월 3일, 북베트남군은 아직 남아서 저항하는 남베트남군을 무장해제하고 남베트남 전역의 장악을 완료하였다. 이것으로 20년 동안 이어온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와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종결되었다. 부온마투옷이 함락된지 겨우 55일 만이었다.

옵션 4 발동 결과 미국인 1373명, 제3국 국민과 남베트남 국민 5595명이 미군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하였으며 추가로 에어 아메리카 역시 미군을 도와 1천명이 넘는 탈출 대상자를 구출했다. 이 과정에서 해병 2명이 전사하고 구축함 USS 핸콕 함에 접근하던 CH-46F 헬리콥터 한 대가 원인 불명의 이유로 해상에 추락해 해병대 조종사 2명이 실종되었다.

한편 해병대마저 떠난 후 아직 탈출하지 못한 일부 인원들이 더 이상 오지 않을 헬기를 부르짖는 사이공 시민들과 함께 미 대사관으로 밀려들어왔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탈출 대상자들 중 탈출에 실패하였거나 탈출을 거부하고 사이공에 남는 선택을 하여 사이공에 잔류한 사람은 49명의 미국인과 제3국 국민, 그리고 100여 명의 한국인을 포함해 총 400여 명이었는데 이 중 남베트남인은 강제 억류되었고 나머지 외국인들은 북베트남의 방침에 따라 대사관 직원인 이대용 주남베트남 한국 공사와 안희완 영사, 서병호 경무관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건 없이 석방됐다. 통일이 완료된 마당에 더 이상 미국을 포함한 외국을 자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2.5. 보트피플[편집]


프리퀀트 윈드 작전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보트피플" 역시 시작되었다. 정크선, 통통배, 바지선 등 배란 배에는 모조리 올라타 사이공을 탈출한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미 함대가 있는 붕타우 해안으로 모여들었다. 남베트남이 함락된 그 날 오후 미 함대는 붕타우 해안을 빠져나오면서 가는 길에 도중 발견한 피난민 선박들을 합류시켰다. 피난민들은 즉시 분류되었고 무장해제되었다. 피난민들은 간단한 의료검진을 마친 다음 미리 준비된 수송선에 수용되었다.

남베트남 해군 역시 운용가능한 함정을 모조리 붕타우 해안에 집결시켰다. 26척의 남베트남 함정에 장병과 그 가족, 도합 3만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5월 2일까지 이어진 선박 수송 작업이 끝난 후 미 함대는 합류한 남베트남 해군, 그리고 프리퀀트 윈드 작전으로 탈출에 성공한 7천 명 및 해상으로 탈출한 4만 4천 명의 피난민과 함께 남베트남 해역에서 빠져나와 필리핀으로 향했다.

1974년 12월 13일 북베트남의 공세 시작부터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까지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포함한 미국의 탈출 작전 또는 자력으로 탈출해 미국에 난민으로 들어온 남베트남 국민은 총 13만 8869명이었다.


3. 한국의 철수[편집]


미국이 주도한 프리퀀트 윈드 작전과 별개로 한국 역시 교민 철수 작전을 진행했는데 해군에서 LST 2척(LST-810 계봉함[20], LST-815 북한함[21])을 사이공으로 파견해 4월 26일 한국인 교민과 소수의 남베트남 주민을 싣고 철수했다.


훗날 이 작전은 십자성 작전으로 기록되는데 원래 해군이 LST를 사이공으로 보낸 명목상 목적은 교민 철수가 아니라 구호품 전달이었다. 그래서 사이공에 도착한 뒤 남베트남 관계자들이랑 구호품 전달식도 거하게 치루고 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으로 진격해오고 있었고 상황이 안 좋아지자 해군 본부에서는 다 내던지고 LST선만 탈출하라고 시간 단위로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전쟁통에 군인이 국민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LST 전대장의 독단으로 교민 철수 작전을 지시한다.

문제는 남베트남에 머물던 교민들의 상당수가 돈을 벌기 위해 남베트남에 온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실제 남베트남 교민의 수는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았으며 당국에 등록도 안 되어 있어서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연락도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베트남 측에서 한국 대사관에 뜻밖의 제안을 했는데 남베트남의 VIP 500명을 수송해 주면 비자 검사 안 하고 한국 사람들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상황이 급한 나머지 일단 제안에 동의하고 작전을 시작했는데 여기서도 문제가 터졌다. 원래 두 LST는 4월 27일 오전에 출항할 예정이었으나 전날인 26일 밤 정박 중이던 사이공 신항 인근에서 교전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했고 전대장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여 즉각 출항을 결정했다. 그런데 출항을 결정한 무렵 교민들은 배에 웬만큼 다 태웠지만 같이 태우기로 한 남베트남의 VIP는 가족을 제외하고 본인만 150명밖에 오지 않은 것이다. 결국 약속한 VIP를 다 태우지도 않고 그냥 출항하였다.

먼저 출항한 LST는 한밤중에 불을 전부 켜 두고 남베트남 사람들을 전부 갑판 위로 올려보내 "너희 나라 사람들이니 죽일 테면 죽여라!" 하는 식으로 수로를 통과하여 나왔고 3시간 뒤에 출항한 두번째 LST는 반대로 불을 다 끄고 플래시 하나로 수로를 보면서 탈출하였다. 남베트남 측에서는 VIP를 다 안 태웠다고 "정선하라! 안 그러면 나포하겠다!"며 협박했지만 어차피 며칠 후에 망할 예정인 것들이기에 그대로 무시당했다. 또 철수하는 도중 남베트남 해군의 YTL이 위협적으로 LST에 접근하여 갑판의 중기관총을 사격해 쫓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이 출항한 사이공 신항은 다음날인 27일 오전부터 북베트남군의 포격을 받기 시작했다. 배신이라면 배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예정시간에 출항했으면 전투에 휘말려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올바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제8대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김영관 주월한국대사를 포함한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LST를 타고 철수하라는 본국의 훈령을 어기고 탈출을 거부하여 대사관에 남았다. 실제로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우선 남베트남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수백 명의 교민들을 일일이 불러모으느라 대사관의 철수 준비는 거의 안 되어 있었고 이를 해결한 후 미국 측 항공편을 이용해 철수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 교민들이 연락이 안 되거나 기껏 모은 재산을 버리고 도망칠 수 없다며 뻗대는 바람에 대사관의 철수가 계속 늦어졌고 대사관 직원들은 하염없이 이들을 기다리며 대사관에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대사관 쪽에서 "북베트남군의 공격으로 군용기의 운항이 되었으며 내일 재개될 예정"이라고 통보가 온 것이다. 상술했듯이 4월 28일 18시경부터 떤선녓 공군기지에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떨어져 탈출 작전이 일시중단되었고 20시에 다시 재개되기는 했으나 대사관 직원들을 위한 자리가 제대로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김기원 공보관이 "지금부터 각자 행동을 할 시기이니 나 혼자 비행기 타고 도망가겠다"고 김영관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는 어이가 없었겠지만 "가는 길에 내 골프채 태국 대사관에 가져다 주게."라고 말하며 순순히 보내줬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들이 움직일 수 있을 시점에는 한가하게 골프채나 챙길 수 없다는 걸 직감한듯 김영관 대사 입장에서 뭐라 할 수도 없었던 것이 당장 정확한 정보를 가져와야 할 중앙정보부 소속의 이대용 공사부터가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돼서 NHK에서는 북군의 사이공 진입 날짜(4월 30일)까지 정확히 알고 있을 때 여전히 사이공은 무너지지 않는다느니 요원 몇명은 남겨야 한다느니 하면서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직원들의 불안감과 불만이 누적되는 상황 속에서 아무리 봐도 멸망이 다가오는데 어떻게든 탈출하겠다는 직원을 차마 말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김기원은 대사 골프채 가방과 함께 진짜 비행기를 타러 한밤중에 로켓탄과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떤선녓 공군기지로 갔고 운 좋게도 마침 이륙하려는 C-130 수송기를 얻어 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상술했다시피 이 C-130은 떤선녓 공군기지를 이륙한 마지막 군용기였으며 이후 미군은 옵션 2를 종료하고 옵션 4로 넘어가면서 활주로는 폐쇄되었다. 이후 교민회를 이끌며 이대용 공사 등의 옥바라지를 한 순흥통상의 이순흥 사장은 떤선녓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활주로 폭격을 목격했고 그대로 사이공에 발이 묶였다. 이순흥은 원래 전날 출발하려고 했으나 은행에서 돈을 찾아와야 한다는 직원들 때문에(...) 결국 탈출에 실패했다.

옵션 4로 넘어간 29일, 이제는 LZ에서 이착륙하는 미군 헬기만이 유일한 탈출구로 남은 가운데 김영관 대사는 더 이상 대사관으로 교민들이 올 것이라 기대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철수 결정을 내렸다. 만에하나 아직 탈출하지 못 한 교민들이 대사관으로 올 것에 대비해 직원 15명이 위험을 감수하고 대사관에 남은 가운데 대사를 포함한 몇몇 직원들은 미국 대사관 LZ로 이동해 헬기를 타고 철수했다. 그리고 정말로 마지막 날에 거의 100명에 달하는 교민들이 다시 한국대사관으로 들이닥쳤고(...)양심도 없다이대용 공사 등은 이들을 수습해 허겁지겁 미국대사관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미국 측의 탈출 약속만 믿고 대사관 수영장 근처에서 기다리던 대부분의 직원들과 교민들은 눈앞에서 마지막 헬기를 놓쳤고 이들이 당연히 탈출했을 줄 알고 헬기에 탑승했던 김영관 대사는 미군 항공모함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을 포함한 몇몇 직원만 빠져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당시 탈출하지 못한 한국 교민 100여 명과 한국 대사관 직원들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나 귀국했지만 이대용 공사 등 3명은 억류되어 북한의 전향 강요 등으로 고생하다가 1980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김영관 대사 역시 직원들과 교민들을 구출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다소 억울하게도 불명예스럽게 공직생활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나마 김 대사는 해군 최초의 4성 제독 진급자로 해군 내에서 원로로 대우받으며 그럭저럭 말년을 보냈다.

탈출하지 못한 이대용 공사 등 주월한국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은 북베트남과도 수교한 프랑스 대사관에 도움을 청했으나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거절당했고 일본 대사관에도 도움을 청했으나 일본 역시 파병만 안 했지 한국과 상황이 다를 게 없어 제 코가 석자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나마 일본 대사관은 한국 대사관 직원이 정문에서 쪽지를 통해 한국에 현지 상황을 담은 내용의 전문을 한국에 전송해 달라는 요구는 들어 주었다. 일단 프랑스 대사관이 운영해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그랄 병원에 모였으나 이 곳 역시 폐쇄 명령이 떨어졌고 하는 수 없이 직원들과 교민들은 한국대사관저로 돌아와 태극기 대신 프랑스 삼색기를 내걸고 버티기에 돌입했다. 이 때 간장식량을 외부에서 구매해 올 계획을 세웠는데 한국 국적자임이 탄로나면 사로잡힐 것을 우려하여 고민하던 중 당시 교민철수 부본부장을 맡고 있던 김상우 목사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들한테 하도 당해서 지금도 프랑스인들을 무서워 한다. 트럭에 프랑스 국기를 꽂고 다니면 아무도 손을 못 댈 것이다."라는 제안을 했고 실제로 프랑스 국기를 단 트럭이 지나가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순순히 비켜 줘서 무사히 식량을 구매해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베트남인들이 프랑스인들을 무서워했다기보단 엄연히 중립국이자 정식 수교국인 프랑스의 국기를 갖고 다니는 사람들을 건드렸다가 외교적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그랬을 뿐이다.

이대용 공사는 2017년 11월 14일 사망했고 김영관 대사도 2021년 3월 21일 사망했다.


4. 여담[편집]


  • 한국 대사관 건물은 고아원으로 사용되다가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하면서 호치민시 주재 총영사관으로 바뀌었다. 한국 대사관은 수도인 하노이에 설치됐다.

  • 2006년 김영관 대사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고문 자격으로 18년 만에 베트남을 다시 방문했다고 한다. 이때 재직 당시 그가 대사 관용차로 타던 캐딜락 자동차의 행방이 궁금해 찾아보니 현지에 버려진 뒤 북베트남 정부가 인수했다가 여기저기 중고차로 매각되던 끝에 방월 당시엔 택시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기사


  • 이 작전에서 미 해군 F-14A 극초기형[22] 이 상공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데뷔했다. 위에 나와 있는 탈출하는 헬리콥터의 엄호를 맡은 엔터프라이즈의 전투기가 전투비행대대 VF-1, VF-2 소속 F-14A였다.

  •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탈레반의 승리로 끝나면서 똑같은 상황이 카불의 미국 대사관에서 재현되었다. 심지어 카불의 미국 대사관 퇴출 당시 쓰인 헬기 중에는 이 프리퀀트 윈드 작전 당시 투입되었던 CH-46도 당시에는 해병대 소속이었다가 해병대에서 퇴역해서 국무부에 넘겨져서 국무부 소속으로 있었다고 한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 참고. 다만 프리퀀트 윈드 작전 때 가지고 갔던 이 헬기는 카불 철수 때도 동원되기는 했으나 철수 전 사용 불능화 조치로 고철이 되어 버려졌다. 물론 불능화 조치를 하지 않아 탈레반이 손에 넣었다고 해도 노후화가 심한 상태라 이 비행이 사실상 마지막이라고 봐도 좋은 상황이었고 더해서 미국이 카불 공항에 남겨놓은 헬기 등 정밀장비용 수리부속들을 모조리 파괴하거나 미국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어디 망가지면 수리할 수도 없어서 얼마 쓰지도 못하고 결국 고철이 되었을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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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미국으로 이민을 가 미국 시민이 된 베트남계 미국인이 있는데 그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 않고 남베트남에 남아 있다던가.[2] 제럴드 포드는 남베트남을 도와야 한다고 했는데 미국 의회에서 돈 없다고 막았다.[3] 다낭이 함락되면서 다낭 국제공항으로 사람들을 구하러 온 당시 상황을 CBS 기자 브루스 더닝이 취재한 영상이 있다.# [4] 1973년 파리 평화 협정 이후 주남베트남 미국 군사고문단이 철수하게 되자 미 군사고문단 대신 설치되어 미국 국방부와 남베트남 현지의 연락용 가교 역할과 미국의 남베트남 지원 업무를 맡았다.[5] 미군 장병들이 남베트남 현지 여자들과 결혼하거나 겁탈해서 생긴 미국-베트남 혼혈 아동. 이들 대부분이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후 버려졌다.[6] 명목상 민영항공사였지만 실제로는 CIA가 운영하는 위장기업이었다.[7] 이 파일럿은 이후에도 몇 번 더 폭격했고 전쟁이 끝난 후 민항기 파일럿이 되었다.[8] 떤선녓 공군기지를 공습한 이들은 전직 남베트남 공군 소속 파일럿으로 다낭 함락 이후 북베트남군으로 전향했다.[9] 실제로는 미 대사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에 정박된 배들을 통해 탈출할 수 있는 선택지도 있었다. 강줄기를 북베트남군이 점거하기 전이라 일단 어떤 종류의 배만 타서 탈출하기만 하면 해상의 미 해군이 구조해 줬는데 미국 대사관에만 목맨 사람들 중 대다수는 버려졌다. 대사관 안으로 밀고 들어온 민간인들이 헬기를 타지 못할 것을 직감한 한 미군 부사관이 트럭을 운전해 민간인 몇십 명을 배를 탈 수 있는 강가의 부두로 보내 배를 탈 수 있게 한 경우도 있었다.[10] 원래는 주차장 LZ를 25일에 만들었어야 했는데 마틴 대사가 아직 전쟁을 중단할 협상의 기회가 있다고 해서 해병대가 가로수들을 베어내는걸 막았다. 또 미 대사관에 머무는 중인 탈출 대상자들을 버스를 이용해 DAO로 이동시키려고 했는데 아침부터 미 대사관으로 모여든 군중들 때문에 버스가 진입할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옵션 4 발동 직전에 와서야 부랴부랴 주차장 LZ를 만들게 되었다.[11] 화씨온도이며 섭씨온도로는 약 40도.[12] 1942년 미국의 가수 어빙 벌린(Irving Berlin)이 부른 크리스마스 캐럴 'White Christmas'의 첫 소절이다. 여담으로 이 노래는 제1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수상했으며 빙 크로스비가 커버한 버전이 대히트를 쳤다.[13] 지금은 리뜨쫑(Lý Tự Trọng)로(路)로 이름을 바꾸었다. 번지수는 22번지로 그대로다.[14] 흔히 사진 속 장소가 미 대사관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미 대사관은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950m 떨어진 통녓(Thống Nhứt)대로 4번지에 위치해 있었다.[15] 상술했듯 미 대사관은 대사관을 둘러싼 군중들 때문에 버스 진입이 불가능했다.[16] 이렇게까지 해서 보안을 유지한 것이 효과가 꽤 좋았는지 아직 오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시내에 3번이나 다시 갔다 올 정도로 시간이 남았다고 한다. 원래는 1번 정도 예상했다고.[17] USS 엔터프라이즈(CV-65), USS 코럴시(CV-43)[18] 4대는 작전 수행 도중 파손되었다.[19] 정부에서 대사관에 있는 인원들이 다 나온 걸로 착각해서 헬기 수송을 중단했다.[20] 이후 LST-675로 함번 변경[21] 이후 LST-678로 함번 변경[22] 초음속 활공을 할 시 글러브 베인(Glove Bane) 이라는 짧은 직삼각형 형태의 전개/수납식 초음속 활공 보조장치가 주날개 앞에 달려 있는 형식이다. 사용 결과 별로 실용성이 없는지라 이후 후기형과 D형까지 후속 개량형들에게서는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