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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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
Franklin Pierce


파일:Franklin_Pierce.jpg

출생
1804년 11월 23일
미국 뉴햄프셔 주 힐스브로
사망
1869년 10월 8일 (향년 65세)
미국 뉴햄프셔 주 콩코드
재임기간
제14대 대통령
1853년 3월 4일 ~ 1857년 3월 4일
서명
파일:프랭클린 피어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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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벤저민 피어스
어머니 엘리자베스 앤드루스 피어스
형제자매
7남 2녀 중 5남
배우자
제인 애플턴 피어스
자녀
슬하 3남[1]
학력
보든 칼리지
종교
개신교 (성공회)
신장
178cm
소속 정당




파일:external/periodicpresidents.files.wordpress.com/14-fp-portrait.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대통령 당선 전
2.2. 대통령 당선 후
2.3. 퇴임 후
3. 가정사
4. 평가
5.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의 제14대 대통령.


2. 생애[편집]



2.1. 대통령 당선 전[편집]


뉴햄프셔의 주지사를 역임한 벤자민 피어스와 엘리자베스 앤드루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세에 핸콕 인근에 있는 학당에서 공부하다가 1년 후에는 프랜스타운의 학당으로 전학을 가고 이후 필립스 엑스터 학당으로 다시 전학을 갔다. 1820년보든 칼리지에 입학한 피어스는 너새니얼 호손과 절친이 된다. 대학생 피어스는 많은 나날을 학교가 아닌 사회운동 속에서 보내느라 2학년 기말 시험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는다. 자신의 낮은 성적에 놀란 피어스는 열심히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학업에 정진하여 1824년에 전교 3등으로 졸업한다.

대학을 졸업한 피어스는 당시 뉴햄프셔 주지사인 리바이 우드버리에게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우드버리와 결별한 피어스는 지역 재판관인 새뮤얼 에드먼드 파커 아래에서 공부한 후 1827년에 콩코드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설한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민주당에 입당하여 앤드루 잭슨을 지지한다.

2년 후에는 뉴햄프셔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다. 2년 후 재선에 성공하고 1836년에는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2번의 임기를 마친 후에 미국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32세에 최연소 미국 상원의원이 된다.

1834년보든 칼리지 학장의 딸인 제인 애플턴과 결혼한다. 제인은 남편이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워싱턴 D.C.에서 지내는 날이 거의 없었다. 결국 피어스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제인의 뜻에 동의하며 1842년에 상원의원직을 사퇴하고 귀향한다.[1]

하지만 1846년에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피어스를 육군 대령으로 임관시켰다. 전쟁이 시작되고 몇 개월 후 피어스는 준장으로 진급까지 했다. 하지만 멕시코 시티 원정에서 윈필드 스콧의 휘하에서 복무하던 피어스는 추루부스코 전투에서 여단을 지휘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면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만다.

다행히도 부상이 심하지는 않아서 다음 날의 전투에 복귀하였지만 적들을 상대하다가 다리를 다시 다치면서 이후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병력 지휘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적들은 피어스의 행각을 두고 겁쟁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종전 후 콩코드로 돌아와서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1852년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피어스는 34회의 후보자 선거를 치른 끝에 당원들로부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하지만 선거 당시에도 피어스는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인지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었고 선거 내내 논란이 일었다.

피어스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 제인은 기절하고 말았다. 당시 상황에 남편이 대통령에 되어도 좋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2] 선거에 돌입한 피어스는 휘그당의 윌리엄 스콧을 상대로 큰 득표수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 당시에 사용한 대선 구호가 나름 유명한데, 미국의 영토를 확장시킨 것으로 평가가 좋았던 포크 전 대통령의 이름까지 가져다가 섹드립에 가까운 언어유희를 한 것이 눈에 띈다.

We Polked You in '44; We Shall Pierce You In '52.[3]



2.2. 대통령 당선 후[편집]


파일:franklin pierce portrait.jpg
프랭클린 피어스의 초상화.

대통령으로 당선된 피어스는 노예 문제를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시도하나 1854년에 통과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은 피할 수 없었다. 캔자스는 원래 미주리 타협에 의하면 36도 30분선 이북에 있으므로 본래 네브래스카와 함께 자유주가 되어야 하는 주이나 남부-북부간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남부의 반발에 급작스럽게 스티븐 A. 더글러스의 주도[4]로 투표를 통해 자유주-노예주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변경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정책 변경으로 인해 캔자스 주민들은 노예제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서 무장 충돌을 벌이기 시작하고 캔자스는 내분으로 혼란에 빠진다. 피어스가 새로 가입하는 주들의 자유로운 결정(소위 '주의 권리')을 옹호한다는 논리를 내세워서 1820년의 미주리 타협을 파기했고, 새롭게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이 효력을 발휘했다. 사실상 남부를 지지한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노예제 문제로 미국이 내분에 빠진 와중에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에서 노예 해방운동이 시작된다. 노예 해방운동이 미국에 확산되기 시작하면 자신들의 중요한 자산인 노예를 잃어버릴 것을 우려한 남부 세력들의 압박을 받기 시작한 피어스는 미국에서 파견한 각국 대사들을 소환하여 조언을 구한다.[5] 대사들의 조언과 국제 정세를 보고받은 피어스는 오스텐드 선언을 발표하면서 쿠바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공개한다.

스페인이 미국에게 쿠바를 1억 2,000만달러에 매각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쿠바를 점령하더라도 정당하다.

오스텐드 선언의 요약문.


피어스의 오스텐드 선언이 공개되자 북부는 물론이요 세계 각국에서도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당사자인 스페인은 미국에게 강한 항의를 하면서 매각 거부를 선언한다. 그렇게 오스텐드 선언은 없는 선언으로 취급되며 묻힌다.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 피어스의 정책과 방향성은 결국 북부의 지지를 잃어버리고 대통령 선거를 위해 출마한 경선에서도 지지받지 못한다. 대통령 후보에는 제임스 뷰캐넌이 지명된다.


2.3. 퇴임 후[편집]


후임인 뷰캐넌의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후 피어스는 건강이 악화된 아내 제인을 회복시키고 복잡한 심경도 정리하는 차원에서 국외로 떠난다.

마데이라 제도에서 2년을 보내고 유럽을 돌고 나서 미국으로 돌아와서 고향인 콩코드로 돌아간다. 1863년 12월 2일에 제인이 사망하고 상심한 피어스는 절친인 너새니얼 호손과 어울린다. 1864년 투병 중이던 호손을 데리고 요양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여행 도중 호손이 악화된 병마로 인해 여행지에서 사망한다.

친구마저 잃어버린 피어스는 상심을 이기지 못하고 홀로 돌아와서 술로 슬픔을 달래다가 1869년 10월 8일알코올 의존증으로 생긴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3. 가정사[편집]


가정사가 매우 불행하다. 불운한 가정사나 인생의 역경만 보면 에이브러햄 링컨도 무시할 수 없지만 역사의 승자로 기록된 링컨과 달리 피어스는 대통령 당선 후부터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 피어스의 자식들은 모두 12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차남인 벤저민도 11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피어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가족들과 여행을 떠났는데 기차가 탈선하면서 피어스와 제인은 심한 부상을 당하고 벤저민은 사망한다. 임기 시작 전부터 자식을 잃는 비극을 당한 피어스의 백악관은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인 제인은 사교적인 피어스와 달리 어려서부터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다. 평소에도 남편에게 정치를 그만하라고 여러 번 말렸지만 피어스가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백악관에 입주하기 전에 아들을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제인은 피어스의 임기 초반에 심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백악관 내 자신의 방 안에서 죽은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생활하였다. 피어스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방 안에서 은둔하며 사는 제인을 보다못한 제인의 이모인 애비 켄트 민즈가 제인을 대신하여 2년 가량 영부인 역할을 대행한다. 제인은 애비의 조언을 따라 1855년 1월 1일에 개최된 백악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후부터는 국정 행사에 자주 참석하기 시작한다.


4. 평가[편집]


그의 초상화는 백악관에 전시된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 중 제일 잘생겼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의 그는 미인 대회의 승리에 필요한 요소와 같은 재능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실수 투성이에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고 만약 알았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해리 S. 트루먼


형편없는 실력에, 비천한 환경 속에 놓여서는 강자에게 침묵하고 약자에게 비열하게 굴었다. 노예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그들에게 맞출 수 있도록 일을 준비하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후임 대통령들의 혹평은 현대 미국 국민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며 대통령 인기 순위나 업적 평가에서도 에이브러햄 링컨의 화려한 업적 때문에 전반적으로 바닥을 기는 형편이다. 제임스 뷰캐넌, 앤드루 존슨, 워런 G. 하딩,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함께 미국 최악의 대통령 TOP 5를 뽑으면 거의 항상 꼽히기도 한다.

그나마 20세기에는 하딩이, 21세기에는 뷰캐넌과 존슨이 최하위를 독차지하는 덕에 최하위는 의외로 1번도 안 해봤다. 그러나 이들에 비하면 존재감도 없다 보니 피어스의 정책이 주목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오히려 정치보다는 문학사에서 더 기억되는데 너새니얼 호손의 절친으로 유명하다. 그것조차 없었으면 기억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뻔했다.

5. 여담[편집]


  • 임기 중 시애틀 추장에게 땅을 팔라고 편지를 보낸 대통령이다.[6] 시애틀 추장은 토지 매매 제안을 수락하면서도 토지를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재산으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며, 구입한 토지를 형제처럼 소중히 다루라고 당부하는 내용의 답장을 보낸다. 답장을 받고 감명한 피어스는 시애틀 추장의 고결한 성품을 칭송하였다. 이 사연은 꽤 유명해서 영어 원서나 참고서를 찾아보면 가끔 볼 수 있다. 추장 이름과 편지 내용은 유튜브 등지에서 대충 검색하면 나온다.

  • 19세기에 태어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또한 취임 당시 나이가 48세로 당시 최연소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현재 최연소 미국 대통령은 43세의 나이로 취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 조개 요리를 매우 좋아했는데 그중에서 조개튀김을 좋아했다. 조개 요리 외에도 애플파이도 좋아해서 즐겨 먹었다.

  • 위 트루먼의 말처럼 외모가 잘생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초상화는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도 거의 손꼽을 만큼 잘생기게 잘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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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족의 제안 외에도 1840년 양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휘그당에 참패하고 소수당으로 전락하자 이에 큰 좌절을 느끼고 사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 이때문인지 제인은 피어스의 임기 중 첫 2년간은 영부인으로서의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3] '1844년에는 포크, 1852년에는 피어스입니다'로 의역해서 읽을 수도 있고, '1844년에는 당신과 폴카 춤을 췄으니, 1852년에는 뚫어드리겠습니다'라고 읽을 수도 있다.[4] 후일 에이브러햄 링컨과 대선에서 맞붙는 그 더글러스다.[5] 피어스에 의해 소환된 대사들 중에는 당시 영국 대사인 제임스 뷰캐넌도 있었다.[6] 1855년에 지금의 시애틀이 있는 자리는 시애틀로 불렸지만 우연히도 편지의 수신자도 이름이 시애틀이어서 후일 시민들이 도시 이름에 시애틀 추장을 기리는 의미를 추가한다. 다만,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에 무지하던 당대 미국인들의 특성 상, 지명을 인명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