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덤프버전 :



[[프란츠 카프카|

파일:카프카 서명.png
]]

[ 작품 목록 ]
나무위키에 등재된 작품
소송

변신
시골의사
만리장성의 축조 때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파일:Franz Kafka1.jpg

출생
1883년 7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
(現 체코 중앙보헤미아 주 프라하)
사망
1924년 6월 3일 (향년 40세)
오스트리아 클로스터노이부르크 키얼링
국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display: none; display: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행정구
]]
(1883–1918)
[[체코|
체코
display: none; display: 체코"
행정구
]]
(1918–1924)
직업
소설가
서명
파일:카프카 서명.png
[ 펼치기 · 접기 ]
묘소
체코 프라하 신 유대인 묘지
학력
카렐 대학교[1] 법학과 (1901-1905년)
스타일
모더니즘
언어
독일어
혈통
유대인
신체
182cm
종교
무종교 (무신론)
부모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
어머니 율리에 카프카[2]


1. 개요
2. 일생
2.1. 유년기
2.2. 작품 활동
2.3. 죽음
3. 사후의 영향력
4. 이스라엘의 역사 왜곡
4.1. 반론: 카프카는 정말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적 없는가?
5. 작품 목록
6. 기타
7. 각종 매체에서
7.1. 오규원의 시



1. 개요[편집]


Ich habe kein literarisches Interesse, sondern bestehe aus Literatur, ich bin nichts anderes und kann nichts anderes sein.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1913년 8월, 연인 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Ein Buch muss die Axt sein für das gefrorene Meer in uns.

책이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1904년 1월,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지금의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쓴 유대인 소설가.[1]

예술적 감각이 시대를 앞서간 천재 중의 천재로 평가된다. 독어권의 대문호라고 볼 수 있다.


2. 일생[편집]



(카프카의 일생, 작품세계에 관한 영상)

2.1. 유년기[편집]


1883년,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부유한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2](Hermann Kafka, 1852–1931)는 자수성가한 유대인 상인이었고, 어릴 적부터 병약하고 감성적이었던 프란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카프카가 집필한 단편 소설 <선고>에선 현실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아버지가 그려져 있다. 그가 원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그는 걸핏하면 프란츠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고 폭언을 일삼으면서 키웠는데, 이는 프란츠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문학사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라고 그러면 헤르만 카프카가 자주 언급될 정도다. 헤르만이 이런 식으로 아들을 기른 것은, 현실적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출세한 자신과는 프란츠가 매우 달랐던 데다가, 세 아들 중 두 명이 일찍 죽고 남은 프란츠에게 건 기대가 크기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을 보통 사람들이 다녔던 체코어를 쓰는 학교 대신, 당시 프라하의 약 10%의 지배층이 주로 사용했던 독일어를 사용하는 학교에 보냈다. 카프카가 독일어로 소설을 쓴 배경이 여기에 있다.


2.2. 작품 활동[편집]


프라하에 보존된 생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학교를 다니고, 프라하에서 직장 생활을 했으며 죽어서도 프라하에 묻힌 '프라하 토박이'였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지만 독서를 즐겼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게 된다. 그의 창작 활동을 배려하지 않고 수시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글을 쓰는 등 틈틈이 저작 활동을 이어가 영감을 받고 하룻밤 만에 변신을 완성하기도 한다.

말이 적었지만 불친절한 성격은 아니어서 직장에서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재정적으로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가난한 노동자들에겐 종종 친절과 선의를 베풀었다. 실제로 노동자 실태 파악을 위해 출장을 다니고, 노동 조건 개선 등에 힘쓰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인형을 잃어버려 울고 있던 이웃집 소녀를 위해, 여행을 떠난 인형이 쓴 편지라며 자기가 쓴 편지를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는 <카프카와 인형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생전에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평생 전업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직장 생활과 창작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글은 돈벌이나 인기몰이 대신 사람과 예술을 위해서만 써야 한단 신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지만, 오히려 별도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힘겹게 작가의 꿈을 이어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글만 쓰며 사는 삶을 모색했다는 기록이 있다. 1914년 7월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을 한 뒤, 친구와 함께 덴마크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부모님께 편지를 썼는데 프라하를 떠나 독일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의향을 묻는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고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노동 보험 공단은 박봉이었지만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보람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인 짧은 근무 시간 때문에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기업의 이의 제기에 대한 반박문 작성, 보험 회사 홍보나 기업 변호를 주로 맡았다. 2시쯤 퇴근하고 귀가한 후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자고 밤 11시경부터 3시간쯤 글을 쓰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하루에 두 번 잠을 잤다는 말.

제1차 세계대전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징병 대상자였고 실제로도 오스트리아군에서 영장을 발부했으나, 그의 직장이었던 보험공단에서 카프카가 공단의 필수 인력이라고 보호해주어 전장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카프카는 귀향한 전쟁 부상자들 및 러시아 제국령에서 들어온 아슈케나짐 유대인 난민들을 상대하는 일에 종사했다. 이때 동유럽 유대인 난민들을 만난 경험은 그의 유대인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속하고 또 만났던 프라하 유대인들은 사실상 거의 독일화된, 유대 전통은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수준이었으나 동방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모습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

아인슈타인 평전에 따르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한 유대인 문화 예술 모임에서 프란츠를 만났다고 하는데 무슨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1887–1960)란 여성과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다가 결국 완전히 헤어지고 만다. 이후 다른 여자들과 여러 번 연애를 하나 결국 결혼하지는 못했다. 바우어 역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다른 부유한 남성과 결혼했으며, 카프카가 그녀와 쓴 편지를 모두 태워버린 데 반해 그녀는 평생 카프카의 편지를 간직한다. 살아생전 바우어는 그 편지들을 출간하라는 제의도 받았으나 거부했다고 한다. 참고로 매컬리 컬킨과 친분 있는 미국 뮤지션 애덤 그린이 바우어의 증손자다. 이와 관련해 2013년 독일 쪽에서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

문학계에 만연한 근거 없는 무명신화의 희생자 중 첫 손 꼽힐 작가다. 카프카는 생전에 절대 무명작가가 아니었다. <>, <실종자(아메리카)>, <소송(심판)> 같은 대표장편들이 생전에 출간되지 않았고 단편들만 발표했음에도 1915년 폰타네상을 수상하고 20세기 독일 모더니즘 대표작가 로베르토 무질이 카프카를 만나고 싶어 직접 프라하를 찾아왔었고, 독일 여행중에 <유형지에서> 낭독회를 갖는 등 독문학계에선 주목받은 작가였다. 역시 생전에 무명이었다는 오해를 받는 에드거 앨런 포, 허먼 멜빌도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생전에 무명이었던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다.


2.3. 죽음[편집]


신경쇠약으로 발작까지 일으키던 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 폐결핵으로 4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를 평생 괴롭혔던 아버지는 아들보다 7년이나 더 살았다.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란 지위의 폭력성이 언급될 때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그가 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보면 양육 방식부터 시작해서 원망이 가득하다. 소설 대부분의 절망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이론도 있으며, <소송> 같은 소설은 대놓고 억압적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그대로 투영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여동생들은 나치 정권의 광기를 피하지 못한 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카프카는 숨을 거두며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4]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 소설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브로트는 유언을 어기고 원고를 모두 보존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재출판했다. 현재 프라하 성의 황금 소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서점이 되어 있고 그 곳에서 집필한 <시골의사>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카렐교 근처에는 카프카 박물관도 있다.

물론 처음에 출간된 장편들도 성한 모습은 아니었다.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가 친필 원고를 독점하고 있었기에 초기 판본들은 원문을 브로트가 편집한 형태로 나왔다. 브로트의 말로는 카프카와 나누었던 논의를 더듬어서 수정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이 신빙성과 적합성을 항상 의심했다. 브로트의 사후 원고는 1961년 유족들에게 넘겨졌고, 다음 해에 원고 실소유자인 조카 마리안네 슈타이너의 요구대로 영국 독문학자인 M. 패슬리의 중재 하에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 도서관에 보존되었다. 패슬리가 이 원고들을 토대로 브로트의 편집본이 아닌 순수한 원고를 토대로 책을 간행한 것은 1982년부터의 일이었다. 아무튼 브로트에게 작품 일부가 간 것이 행운인 셈이다.

카프카는 <>, <소송>(혹은 심판이라는 제목으로도 출판되어 있음), <실종자>(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고쳤음) 등 총 3편의 장편을 썼으나, <소송>의 경우에는 결말은 썼지만 부분적으로 미완, <성>과 <실종자>의 경우 결말이 없다. 그리고 특이한 것이, 이 3편 중 <성>, <소송>의 주인공의 이름이 K이며, <실종자>에서는 카를 로스만(Karl Roßmann)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리하여 음악사의 K는 모차르트, 문학사의 K는 카프카의 전매특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는 훗날 작가들의 패러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장편들이 모두 미완이기는 하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평론가들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완벽한 작품'으로 카프카의 장편들을 꼽는다.


3. 사후의 영향력[편집]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이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 만한 작품들이라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 토마스 만


카프카는 20세기의 어떤 작가보다 문학계에 더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 해리 슈타인하우어 (문학교수)[5]


카프카가 독문학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로 올라서게 만든 이들은 실존주의자들이다. 프랑스의 지성 장폴 사르트르도 극찬했고 <백년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변신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카프카의 인생과 문학관에서 소재를 따온 장편 <해변의 카프카>를 쓰기도 했고 이 작품은 체코에서 프란츠 카프카 상을 받았다. 현대 문학의 최고봉 중 한 명이라고 불리오는 밀란 쿤데라도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프카에게서 따온 소재를 자주 언급하기도 했다. 저명한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세 명으로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와 함께 프란츠 카프카를 꼽았다.

카프카에 대한 연구는 국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사실 이것도 현대의 국가를 소급할 경우에) '체코 문학'의 세부 분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독문학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독일에서 출판된 <독일 문학사>에도 독일 작가로 기술이 되어 있다.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인데, 기본적으로 작가론 연구에서는 그 작가가 사용한 언어를 기준으로 문학을 분류하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쓰였는데 어떻게 체코어 문학으로 간주하겠는가?

카프카는 보헤미아 출신이지만 프라하 이주 후 독일계 김나지움(인문계 중고등학교)과 독일계 대학을 나왔다. 게다가 당시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국이었으므로 독일 문화권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6] 하지만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므로 '독일인 작가'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독일어권 작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한편 체코에서는 지금도 체코 작가로 여겨야 할 것인가, 오스트리아 작가로 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유대인인데다가 독일어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20세기 전반기에 중국계 화교 출신으로, 일제 치하의 한반도 경성에서 활동하며, 일본어로 작품을 남긴 것과 마찬가지인 셈. 그나마 한국인들은 단일민족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어서 이를 타인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온갖 유럽 민족이 섞인 나라였기도 하다.



4. 이스라엘의 역사 왜곡[편집]


한 술 더 떠 이스라엘에서는 카프카의 혈통이 유대인이므로 이스라엘의 작가라고 주장하는데, 당연히 이는 이스라엘 외부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다. 그 논리 자체도 궤변이기 짝이 없거니와, 이들이 순수하게 카프카를 존경해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오니즘을 정당화려는 불순한 정치적 목적으로 그를 이용하려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7]

상술했던 대로 카프카의 유품을 관리하던 브로트와 사귀던 여성 에스터 호페(1906–2007)와 이스라엘 정부 측에서 브로트가 공개하지 않은 카프카의 여러 유품 및 친필 원고의 소유권을 서로 주장하여 국제적인 논쟁이 된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1988년 소더비 경매에서 독일 현대 문학 박물관이 198만 달러라는 거액으로 <소송> 친필 원고를 구입하자 그것을 이스라엘에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린 탓에 독일과 외교적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독일 정부에서는 이러한 억지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하였으며, 현재까지도 해당 원고는 독일 현대 문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텔아비브의 도서관장 다비드 블룸버그는 "유대인들의 자랑인 카프카의 자료는 이스라엘이 소장하는 것이 옳다"는 논지의 발언을 했다가, 당시 뉴욕 도서관장이 대놓고 카프카 본인이 그런 유서라도 남겼냐며 비난하기도 했다. 국제 도서관계에서도 카프카는 혈통만 유대인일 뿐 그가 생전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반론이 쏟아졌다.

또한 이스라엘 정부는 브로트가 이스라엘에 카프카와 관련된 모든 유품을 기부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호페는 생전 브로트의 유서를 공개하며 자신에게 카프카의 유품에 대한 상속권을 넘겼다고 반론했다. 호페가 사망하고 나서는 그녀의 딸들이 계속 논쟁을 이어가다가, 2012년 10월에 끝내 이스라엘 법원에서는 카프카의 모든 유품은 이스라엘이 소유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호페의 유족들은 이에 항소하며 계속 맞서고 있다. 당연히 이 판결은 국제적으로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 그나마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미국조차도 이 판결은 국제적인 효력이 없다며 무시하고, 미국 내 유대인들조차 진성 꼴통 시오니스트가 아닌 한 크게 비판하고 있다.

영국의 작가 윌 셀프는 데일리 미러 지에 이런 글을 기고해 이런 이스라엘의 추태를 직설적으로 비꼬았다.

"이스라엘이 카프카를 시오니즘의 성인으로 둔갑시키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카프카 본인이 본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분노하고도 남을 일이다."


이스라엘 측의 이런 억지 논리는 제대로 자승자박이 되었다. 구스타프 말러요한 슈트라우스 2세, 펠릭스 멘델스존 등의 유대인 혈통을 타고난 예술가들도 많은데 이들은 왜 이스라엘인이라고 주장하지 않느냐며 거꾸로 비아냥을 받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핏줄만 유대인일 뿐 유대교를 믿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자각조차 없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흔하다.[8]

또한 이스라엘의 이런 식의 주장은 바로 자신들을 그렇게나 탄압했던 나치 독일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을 분류하던 방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나치 독일 역시 개개인의 정체성을 철저히 무시한 채 조상이 유대인이면 그 후손도 유대인이라는 기준 아래 그들을 억압하고 학살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카프카에게는 유족이나 직계 후손이 없기에 2019년 7월에 스위스 취리히 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프란츠 카프카의 친필 원고는 스위스 법원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으로 이송되었고, 8월 7일 예루살렘에서 공개되었다. 이번에 도서관이 넘겨받은 카프카와 브로트의 유고는 약 수백 편으로, 서류철 60개 분량에 이른다. 대부분은 이미 출판된 것이라고.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은 브로트의 자필 원고도 함께 받았다.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은 이 원본 컬렉션들을 디지털화해 전세계 독자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이 자료들은 공식적으로 소유주가 없는 상태였기에 이스라엘이 가져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타국에서 정식 소장 중인 자료들은 이스라엘 측에서 구매하지 않는 한 어림도 없다는 것 정도이다.


4.1. 반론: 카프카는 정말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적 없는가?[편집]


카프카를 시오니스트 투사로 표현하거나 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측에서 그를 '유대인 예술가'로 받아들이며 연구하는 것은 왜곡이라 표현하기 어렵다. 오히려 카프카는 저명한 작가들 중에서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꽤나 명확히 표현하는 편이었으며,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점점 더 유대교적인 신념에 크게 이끌렸다.

우선 카프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작가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일종의 종교적인 것'이라고 종종 일기에서 표현했으며[9], 이 '종교'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대교 역시 그 범위에 포함됐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카프카의 신앙은 명백하게 유대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도 꽤나 섞여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작업을 종종 유대교 신앙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했으며 그가 남긴 일기나 편지의 여러 대목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폐결핵 진단을 받고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던 말년에 카프카는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했다[10]. 이것은 그의 혈통적 뿌리로서 유대인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특히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던 1920년대에 들어서면 시오니즘에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곤 했다. 그를 시오니스트로 표현하는 이스라엘측의 주장이 반드시 왜곡인 것만은 아닌 셈이다. 1924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고 싶다는 의지까지 드러냈으나, 익히 알다시피 그 해는 카프카가 사망한 해였으며 당연히 이주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카프카가 한두 해만 더 살아남았다면 국적 기준으로는 정말 '이스라엘 작가'[11]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카프카의 정체성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체코에서 태어난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작가'라는 관점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체성은 혼란스럽던 제국주의 시대 유럽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에 대한 해석은 국적, 언어, 종교의 세 가지 측면 모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5. 작품 목록[편집]


  • 장편소설
    • 소송[12](Der Prozess)
    • (Das Schloss)
    • 아메리카(Amerika)[13]
  • 중/단편소설 및 기타 작품
    • 변신(Die Verwandlung)
    • 유형지에서(In der Strafkolonie)
    • 시골의사(Ein Landarzt)
    • 학술원에의 보고(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
    • 굴(Der Bau)
    • 법 앞에서(Vor dem Gesetz)
    • 판결(선고)(Das Urteil)
    • 단식 광대(Ein Hungerkünstler)
    • 작은 우화(Kleine Fabel)
    • 돌연한 출발(Der Aufbruch)
    •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Wunsh, Indianer zu werden)
    • 승객(Der Fahrgast)
    • 회랑 관람석에서(Auf der Galerie)
    • 황제의 전갈(Eine kaiserliche Botschaft)
    • 화부
    • 선고
    • 튀기
    • 콘도르 독수리
    • 만리장성의 축조 때(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


6. 기타[편집]


  • 그의 작품들이 갖는 특성을 빗대어 "카프카스러운"(Kafkaesque)이라는 용어도 존재한다.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케임브리지 단어사전을 비롯한 세계적인 사전에도 등재될 정도로 널리 쓰이는 단어다. "매우 혼란스럽고, 불쾌하며, 충격적인 상황"을 뜻하는데,[14] 카프카의 작품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반영한 듯.
  •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가 노동자용 안전모를 만들었으며, 당시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던 카프카는 이 일로 1912년에 미국 안전 협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어떤 증거자료도 없어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 체코 출신의 또 다른 유명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도 카프카처럼 체코어가 아닌 다른 언어(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체코어가 모어가 아니었고, 그에 반해 쿤데라는 체코어를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도 모어로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사실 쿤데라는 처음에는 체코어로 소설을 썼었으나, 1970년 이후부터 2006년까지 그의 책의 출판이 금지되었고,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한 이후 줄곧 프랑스어로 집필하고 있다. 외국에서 번역할 때에도 프랑스어판을 원본으로 여긴다.
  • '카프카'라는 성씨는 '검은 까마귀'를 뜻하는 체코어 단어 Kavka의 이표기로 추정된다. 이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kavka가 가리키는 것은 일반적인 까마귀 보다는 작으며 비둘기 정도의 크기인, 목 부분이 회색으로 칠해진 까마귀의 일종으로, 서울에서 까치 보기가 쉽듯이 프라하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성씨는 당시 카프카가 유대계의 독일어 구사자라는 상황 속에서도 체코 지역에서 별 차별 없이 사는 데 도움이 되었던 존재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이름은 프란츠 카프카의 명성 때문인지 다양한 곳에 적용되는 이름이기도 하며, 예를 들어 만화가 이우일은 고양이에게 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7. 각종 매체에서[편집]




7.1. 오규원의 시[편집]


제목은 카프카, 내용 자체는 여러 가지 의미로 파격적인 시이다. 공식적으로는 1987년 오규원이 출판한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에 처음 수록되었다.

――― MENU ―――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15]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16] 1000원
에리카 종[17]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18]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내로라하는 인문학계 저술가들의 이름에다 가격을 매기고 그것을 메뉴마냥 나열했다는 것만 하더라도 파격적이기 그지없는데, 그들 중에서도 특히 문학가들은 싸구려로 취급되는 데서 이 시는 인문학, 그 중에서도 문학이 현대에서 얼마나 찬밥을 받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시를 공부하겠다는 제자를 미친 제자로 표현한 것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장 비싼 1200원짜리 학자 4명은 철학자 내지는 사상가이고, 그 다음 1000원짜리 두 명은 근대(20세기 후반) 문학 작가고, 그보다도 싼 800원짜리들은 20세기 초반 이전 문학가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오규원이 이 시를 발표한 것은 1987년이다. 이미 그 시절에도 인문학에 대한 인식이 이러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1] 역사적으로 체코 또는 보헤미아 지역에는 혈통이 게르만이든 슬라브든 독일어 화자가 매우 많았다. 이들은 유대인이면서 체코어를 할 줄 아는 체코인이고 독일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히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은 카프카 특유의 사회적 소외감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2]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야코프 카프카(Jacob Kafka)라는 축산업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원래는 체코어를 모어로 사용했으나, 유대인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독일어를 학습하여 사용한다. 병역을 끝마친 그는 프라하로 이주했고, 이후 율리에 뢰비(Julie Löwy)라는 부유한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 아내의 자산을 바탕으로 그는 사업을 시작했고, 그의 가게는 곧 번성하여 그의 가정 역시 부유해졌다.[3] 이들은 현 이스라엘 하레디들의 조상이다.[4] Max Brod(1884–1968). 이스라엘 건국을 도우면서 시오니즘 찬양과 팔레스타인 학살을 찬양하는 글을 쓰면서 이스라엘 바깥에서 매장당하고 오로지 친구였던 카프카의 소설을 발굴하여 알린 사람으로만 알려졌다. 놈 촘스키나치에게 당한 유태인이 나중에 팔레스타인에서 나치처럼 구는 경우로 브로트를 언급하기도 했다.[5] 1905년 출생, 2006년 사망. 폴란드 태생의 독문학자이자 번역가. 주로 미국, 캐나다에서 활동했으며, 독문학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6] 보헤미아가 오래 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부속 왕국으로 있었던 만큼 독일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이후에도 1945년까지 주데텐란트는 독일계 주민들이 집중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코의 일부 지역은 독일어권 지역이었다.[7] 카프카 본인도 생전에 시오니스트인 친구를 두긴 했지만 시오니즘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카프카의 친구들도 그는 시오니즘과 거리가 먼 사회주의자에 가까운 성향이었다고 증언했다.[8] 사실 상술된 인물들은 전부 개종하고 본인의 정체성을 오스트리아인, 독일인이라고 정의했으며, 먼 과거부터 각자의 나라에서 존경받고 자국 음악가로 대우받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도 함부로 건들지 못한 것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만만한 케이스라 계속 찝적거리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9]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에서 재인용[10] 그가 말년에 남긴 친필 원고 중에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거나 히브리어 연습을 위해 쓴 것들이 제법 있다[11] 이 시기는 공식적인 이스라엘 건국 이전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밸푸어 선언이 발표된 다음이었으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던 시기였다.[12] <심판>이라고도 번역된다.[13] 실종자(Der Verschollene)라고도 번역된다.[14] 그의 대표작 <변신>에서 주인공이 벌레로 변해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15] 미국의 시인, 역사학자.[16] 프랑스의 시인.[17] 미국의 소설가.[18]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창자.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4 08:22:05에 나무위키 프란츠 카프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