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모리츠 폰 레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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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2. 7년 전쟁
2.3. 이후의 경력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원수.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레이시는 1725년 10월 2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리보니아의 페터르 레이시이고 어머니는 마사 폰 팡케였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아일랜드 사람이었으나 자코바이트에 가담했다가 진압군에게 쫓겨 1691년 리보니아로 망명했다. 레이시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페터르는 러시아군에 입대했고 1734년에 단치히와 라인강에 파견된 러시아군의 지휘를 맡았으며, 1736년에는 크림 반도에, 1741년에는 핀란드에서 복무했다.

레이시는 아버지가 외지에서 복무하는 동안 어린 시절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고, 이후 슐레지엔의 리기니츠에 있는 리터 아카데미로 유학갔다. 1743년, 레이시는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 장군이 이끄는 보병 연대의 기수로서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이탈리아, 보헤미아, 슐레지엔, 네덜란드에서 복무하며 두 번 부상을 입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 중위로 진급했다. 이후 그는 순탄하게 승진을 거듭하여 1750년에 대령으로 진급해 보병 연대 지휘관이 되었다.


2.2. 7년 전쟁[편집]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브라운 원수의 부대에 합세한 그는 10월 로보지츠 전투에서 부상당했으나 끝까지 전의를 잃지 않고 적과 용감히 맞서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으로 진급했다. 1757년 5월 6일, 레이시는 프라하 전투에 참가했으나 또다시 부상을 입었고 11월 22일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주력군이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농락당해 참담한 대패를 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758년, 레이시는 모든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최측근이 되었다. 이후 그는 다운 백작과 함께 남은 전쟁 동안 프리드리히 대왕에 맞서 싸웠다. 그해 2월에는 총참모부가 설립되었고 레이시는 다운 백작에 의해 총참모장이 되었다. 그는 프로이센군과 정면전을 벌이기보다는 장기전으로 끌고 가서 적을 지치게 만드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 때문에 그해 봄 모라비아를 침공하여 모라비아의 수도 올로모우츠를 포위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과 회전을 벌이길 희망했으나 적이 응해주지 않자 초조해 하다가, 오스트리아군이 보급로를 교란하는 데다 대규모 수송 부대 마저 돔슈테트 전투에서 와해되자 7월에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1758년 10월 14일, 레이시는 총참모장으로서 호크키르히 전투에 참가해 방심한 프로이센군에 대한 오스트리아군의 기습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그는 이 공로로 그해 12월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스프레처 보병대의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다.

1759년 9월 1일, 레이시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발표한 새로운 보병 및 기병에 관한 규정을 고안했고 11월 20일 막센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14,000명을 포위해 항복시켰다. 그는 이 공적으로 보병대 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베를린을 향한 공세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8월 15일 리그니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에게 기습당해 고전하고 있던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을 구하러 가던 다운 백작에게 이미 늦었으니 철수할 것을 건의해 다운 백작이 전장 근처까지 이르렀다가 철수하게 만듬으로서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라우돈 남작은 자신이 리그니츠에서 수많은 병력을 희생시켜가며 적과 맞서 싸웠거늘 8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으면서 도와주지도 않고 철수해버린 것에 격분해 다운 백작과 레이시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다운 백작은 레이시의 최고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의심했고 11월 3일 토르가우 전투에서 부상당했을 때 레이시에게 임시 지휘관을 맡기는 걸 거부하고 아돌프 니콜라스 폰 부커우 장군이 자신을 대신하게 했다. 이후 레이시는 여전히 다운 백작과 함께 했지만 이렇다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고 라우돈 남작과의 심각한 갈등에 시달렸다.


2.3. 이후의 경력[편집]


1763년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 협약이 체결된 뒤, 레이시는 전쟁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1765년에는 전체 오스트리아군의 감찰관이 되었고 1766년에는 오스트리아군 원수가 되었다. 이후 레이시는 1768년부터 1774년까지 전쟁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위원장으로서 군대 개혁을 주도했다. 각 부대 마다 새로운 군법 규정을 적용했으며 보다 향상된 보급 체계를 수립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어느 때보다도 잘 조련되었고 무기도 잘 갖춘 강군으로 육성되었다. 또한 레이시는 군사 고문으로서 요제프 2세와 매우 친해졌다.

1778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레이시는 라우돈 남작과 함께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항하는 오스트리아군 최고 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요제프 2세는 그를 고용하려 했지만, 그는 고령을 이유로 거절했다. 레이시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후 비엔나 근처 뉴왈데그 성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801년 11월 24일에 사망했다. 향년 7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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