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크 당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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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풀크 당굴렘(Foulques d'Angoulême : ? ~ 1157년 11월 20일)[1]은 1146년부터 1157년까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였다. 앙굴렘 백작 풀크와는 다른 인물이다.


2. 생애[편집]


풀크는 앙굴렘(Angoulême) 출신이다. 기욤 드 티레에 따르면, 그는 "종교적이고 신을 두려워하며, 천박한 학문에 매료되었지만 신의있는 사람이자 규율을 사랑하는 자"였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풀크가 셀르프루앙(Cellefrouin)의 대 수도원장에 있을 때와 예루살렘으로 갈 때까지, 성좌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와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 2세(Anacletus II)로 분열했다. 1131년 앙굴렘의 주교는 아나클레토 2세의 편에 섰고 풀크는 인노첸시오 2세에 섰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성묘 교회의 의전 사제로 일했고, 그리고 1134년에는 티레의 대주교이자 성묘 교회 수도원장이었던 기욤 1세(William I)의 후임이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기욤 드 말린(Guillaume de Malines)에게 서임받지만, 인노첸시오 2세에게 팔리움[2]을 받기 위해 로마로 여행한다. 그런데 풀크가 귀환하자 총대주교 기욤은 그를 박대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 기욤에게 티레 대교구를 로마의 아래에 두거나 안티오크 라틴 총대주교 관할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1145년에 기욤 드 말린이 사망하자 이듬해에 후임 총대주교로 선출되었으며[3] 1149년에는 50여년간 재건된 성묘 교회를 축성했다.

1148년 풀크는 독일의 콘라트 3세제2차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환영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안티오키아에 들른 프랑스의 루이 7세를 만나기 위해 파견되어, 루이가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도록 설득했다.

1152년 풀크는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와 그의 어머니 멜리장드의 권력 분쟁에 개입했다. 이 분쟁은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풀크의 평화 협상 시도는 실패했으며, 보두앵이 승리했다. 1156년 풀크는 근친을 이유로 아모리 1세와 아녜스의 결혼을 반대했다.

풀크는 1157년 11월 20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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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푸세(Foucher) 라고도 한다.[2] 대주교 이상의 고위 사제가 사용하는 양털 띠 하얀 바탕에 검은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다. 견책이라고도 한다.[3] 티레 대주교좌는 예루살렘의 수상 랄프(Ralph)와 바르셀로나의 페드로(Peter of Barcelona) 사이의 분쟁 끝에 페드로가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