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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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 ~ 한사군[편집]


평양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추정된다. 왕검성을 평양으로 비정하는 다수설에 의하면 무려 최소 기원전 194년 무렵 이전부터 단군조선의 수도로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기원전 194년인 이유는 한국사 최초의 군사적 쿠데타인 위만의 정변이 왕검성에서 발생했고 위만조선의 시작이 기원전 194년이기때문. 최소 86년 이상 최대 200년 미만 정도로 고조선의 수도로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 시대에는 '왕검성'으로 불렸다.

그런데 다수설이 왕검성의 위치를 평양이나 그 부근으로 비정하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와는 달리 고조선은 '수도 왕검성이 평양이다'라고 확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상황이고 논란도 많다. 우선 한성백제풍납토성과 같이 고조선의 실체를 밝힐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평양에서 발굴된 바 없으며 후대 낙랑군의 치소였던 낙랑토성만이 발굴되었다. 평양=왕검성은 어디까지나 다수설의 위치이지 확고부동한 정설이라 보기에는 실제적인 증거가 아직은 없다.

이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전한진나라와의 교류를 막고 중간의 막대한 이익을 얻게되자 한무제는 사신 섭하를 보내 좋게 끝내려 했으나 외교는 결렬된다. 섭하는 한나라로 돌아가던 중 한무제에게 처벌받을까봐 두려워서 마중나온 고조건의 비왕 장을 죽인다. 이로써 위만조선과 전한의 갈등은 고조된다.

끝내 기원전 109년에는 이 위만조선을 침공함으로써, 왕검성 전투가 발발한다. 꽤나 팽팽했던 전투가 계속된다.한의 국력은 넘사벽이었지만, 위만조선이 자기 앞마당에서 탈탈 털릴 호구까진 아니었으며, 기본적으로 공격군이 방어군에 비해 불리하다. 결국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내분으로 자멸하고, 이를 놓치지 않은 한의 공세로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결론난다.

한은 위만조선에 4개의 군인 한사군을 설치했다. 그 중 하나인 평양에는 낙랑군 조선현(朝鮮縣)을 세웠다. 낙랑군은 중국 본토가 서진의 몰락으로 혼란에 빠진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보낸 고구려군의 공격에 무너져 내리고 그대로 고구려가 영역화하였다.


2. 삼국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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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궁전이었던 안학궁 복원 상상도.

고구려는 장수왕대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안학궁/대성산성)으로 옮겼다. 427년(장수왕 15)에 천도한 후 668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어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241년간 고구려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도였다. 건국 수도인 졸본성, 2대 왕부터 수도였기에 사실상 제대로 된 첫 수도라 할 수 있는 국내성에 비해 존재감이 미약해 보일 수 있으나, 평양이 고구려사에서 가지는 존재감은 졸본성보다 훨씬 강하고 국내성과 대등한 수준이다.

하지만 국내성이 평양성보다 입지가 약한 것은 결코 아니다. 국내성은 424년간 수도였던 반면 평양성은 그 절반을 조금 넘기는 241년간 수도였다. 또한 평양성이 고구려 영역이 된 시점은 미천왕이 낙랑군을 축출한 313년인데 이 시기부터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의 기간은 355년이고 이는 고구려 사직 704년의 절반에 불과하다. 즉 고구려사 전반기 절반 동안은 평양성은 고구려의 영토조차 아니었던 것.

그런데 평양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이고 이전의 수도보다 마지막 수도의 임팩트가 크기에 평양이 국내성보다 임팩트가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백제의 경우만 봐도 492년간이나 수도였던 위례성보다 겨우 122년간이지만 백제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의 이미지가 더욱 강한 것처럼. 물론 아무도 사비성이 위례성보다 백제사에서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다.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리고 최대 영토를 확보한 5세기, 삼국통일전쟁이나 수, 당과의 전쟁이 일어난 7세기 등 한국사에서 굵직하게 다뤄지는 일들이 고구려에 일어나던 시기에 평양은 수도의 역할을 했다. 때문에 후대에는 국내성보다 평양의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다.

평양으 큰 대동강과 넓게 펼쳐진 평야가 있고, 대륙 문물을 접하기 쉬운 지리적 특성 덕에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전부터 개발된 지역들 가운데 하나다. 요동 지역을 포함해서 본다고 해도 요하 언저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조선의 첫 수도와 더불어 한국 역사상 거의 최초의 도시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고구려들은 내내 평양을 주시하였다. 대무신왕 때부터 여러 번 공략한 끝에 미천왕 때 낙랑을 정복했고, 결국 장수왕 15년(427)에 이 지역으로 천도(遷都)했다. 정확히는 이 당시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은 안학궁대성산성(전시(戰時)에 임시 수도 역할)이 위치했던 현 대성구역 일대였다. 이 당시 궁전이었던 안학궁은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안에 수정성도 있었다고 하니 꽤 화려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고구려가 이처럼 평양에 유독 목숨을 건 이유는 자국 영토 내에서 이보다 좋은 입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그 위치상 도읍의 위치를 정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는데, 우선 수도이니만큼 인구를 부양할 평야지대와 교통로를 제공할 내륙수로(강하천)가 필요하고, 북풍을 막아줄 북쪽 산지가 필수였다.

여기에 더해 방어도 문제였다. 고구려 남부는 인구밀도도 높고 자연장벽이 되어 줄 산이나 하천도 많을 뿐더러 농경국가인 백제나 신라군은 보병 위주로 수도 직공 같은 사태가 벌어질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에 반해 북부와 서부에는 강력한 기병전력을 운용하는 유목민족이나 물량깡패이자 이민족 기병을 용병으로 운용한 한족 화북왕조들이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요동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아 밀도 높은 종심방어를 구축하기 곤란했다.

한반도 전선에는 보통 아무리 많아야 만 단위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최대 기록이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 때 운용한 5만이었으며 장수왕이 사활을 걸고 백제의 수도 위례성 함락할 때 동원한 병력도 3만 정도였다. 반면 대륙세력과의 전쟁에서는 십만 단위의 병력이 동원된다.

압록강 중류 첩첩산중에 틀어박힌 국내성이 탈탈 털린게 고작 100년 전이었으니, 비록 요동을 확보해 종심은 어느정도 확보했다 해도 보다 안전한 수도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요하 일대의 1차 방어선인 요동 방어선-압록강 방어선[1]-청천강 방어선으로 이어지는 하천을 끼고 만들어진 3중 방어선에 이어 최종적으로 낙점된 수도권 부지가 대동강 연안이었다.

많은 대중들은 고구려가 요동 등 대륙지역이 아닌 한반도의 평양에 도읍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전혀 애석해 할 이유가 아니다.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던 남만주 지역은 드넓은 벌판이 아니라 오늘날 중국 정부의 돈지랄로도 휴대폰이 안 터지는 답이 없는 산골동네고, 국내성 역시 그나마 압록강 중류지역에서는 쓸만한 분지였을 뿐 방어상의 이점을 제외하면 대국의 수도로 전혀 적합한 입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방어적 이점이라는 것도 상대적으로 후방이고, 대동강을 끼고 있어 조선 시대까지 천혜의 요새로 유명했던 평양보다 낫다고 보기도 힘들다.

오히려 국내성은 관구검에게 처참하게 털린 전적도 있다. 좀 더 올라가서 요하-태자하 일대에는 넓은 평야가 있지만 이곳은 중원 왕조 및 북방 민족과 접하는 국경지대였기 때문에 수도 후보는 될 수 없었다. 만약 이런 곳에 수도를 건설했다면 고구려는 668년은 고사하고 이미 반 세기 이상 앞서 2차 여수전쟁에서 선보인 30만 별동대를 막지 못한 채 수도가 불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의 국력상 낙랑군의 치소로 잘 개발된 평양의 인프라와 유무형의 자원은 정책적으로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사실 그보다는 요동이라는 방어막의 상실로 인해 이후 1천년간 한반도의 귀중한 평야지대인 서북부가 아예 버려져 황폐화되거나(발해~고려 초기) 지속적인 전란에 휩쓸려[2] 경제적, 문화적으로 포텐을 다 활용하지 못하면서 한민족의 역량이 크게 제약받은 것이 진짜 손실이라 할 수 있다.[3]

더군다나 동북공정에 민감한 현대인의 입장에서도 오히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게 다행인 일이다. 만약 마지막 수도가 중국령이었다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을 제외한 외국사학계는 고구려사를 발해사와 달리 온전한 한국사로 보는 편인데 이에는 역대 한반도 왕조들의 고구려 계승 의식과 더불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가 평양이었던 점이 크다. 물론 국내성에 계속 도읍했다 한들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이 다소 간의 유리함을 가져갔거나 역사왜곡을 지금보다도 더 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는 수도가 줄곧 현 중국령 내에 있어 제대로 된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고 국외에서도 고구려와 달리 한국사의 독점적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발해의 경우를 보면 매우 뚜렷해진다.

그리고 어쨌든 10세기 이후 현재까지 한민족의 영역은 압록강 남쪽으로 한정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 이상을 차지할 확률은 요원하다. 이러 상황에서 마지막 수도가 평양이 아니라 멸망 때까지도 요동의 어딘가로 남았다면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는 달리 한반도 내부의 주요 도시가 황해도의 한성 정도를 빼면 단 한 곳도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뒷날 평원왕 때(북한 교과서 기준 586년) 장수왕이 도읍한 안학궁에서 동남쪽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곳이 바로 평양성으로 알려진 장안성(長安城)이다. 당연히 중국의 시안(西安)이 아니다.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인들이나 대륙설 해괴한 주장을 하는 환빠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수도 있는데, 성(城)을 뜻하는 고유어인 '잣'과 내부를 뜻하는 고유어인 '안'을 음차한 표기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이 평양성 자리는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때를 거쳐서 현재에도 북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평양성의 가장 큰 의의는 그 이전의 도성들과는 달리 백성들의 들과 궁전성(城) 안에 함께 존재하는 한국식 도성의 시초라는 것이다. 또한 평양성의 도시 설계는 당시 신라일본의 도시 설계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역사스페셜 北문화유산 8부작 중 1부 고구려 평양성 편에 따르면, 도로가 잘 정비된 계획도시였으며 고구려 때 운하가 있었고 이것은 조선 때까지도 존재했다. 이 당시 도로들 가운데 일부가 현재의 평양에서도 도로로 쓰이고 있다.물론 당시에 만들어진 도로는 현재의 포장도로 밑에 묻혀서 유적으로만 존재하는 상태다. 당시 평양엔 의외로 많은 양의 낙타가 있었으며, 온달 설화를 보면 당시치고는 상업 수준이 꽤나 정교하게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큼 고구려의 유적들이 꽤 많다. 안학궁대성산성, 고구려 목교, 평양성(부속 건묵물들로는 대동문, 보통문, 부벽루, 연광정, 을밀대, 칠성문), 고구려 시대 무덤들 등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 유물들이 만들어졌다. 그에 맞춰서 오랜 역사의 도시답게 많은 설화들도 함께 내려오고 있으며, 북한에서 이러한 것들을 묶어서 발간한 책도 있다.

물론 고구려의 유적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고조선, 낙랑과 그 이후의 고려, 조선 때의 유적들도 많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고구려 안학궁의 유적과 낙랑군의 유적은 현재 평양 중심지에서 떨어져 있다. 장안성 자리가 현재의 평양 중구역이라 한양도성과 몽촌토성이 있는 서울과 가장 상황이 비슷하다.

그런데 이렇게 충분히 역사적 가치가 높은 평양을 북한 당국은 평양을 포함한 대동강 유역이 인류 최초 5대 문명 발상지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며 그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참고로 현재 학계는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지가 된 것은 BC 3세기 무렵에 고조선이 연나라에 요동지방을 털리고 난 뒤의 일로 여긴다. 지들끼리 그러면 좋은데, 이것이 또 혐한초딩들에게는 좋은 떡밥이 되어 한국인은 뭐든 지들이 최초라고 주장한다 설의 강력한 뒷받침이 되고 있다. 거기에 기사의 해당 기사의 댓글에서도 보이는 잘못된 사상을 가진 네티즌들까지 합세하면서 괴랄함은 배가 되고 있다.

3. 남북국시대[편집]


고구려가 멸망할 때 많은 주민들이 당나라에 끌려갔고, 이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나당전쟁이 벌어지자 자연스레 옛 고구려 영토가 다시 전쟁터가 되는데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많은 유민들이 신라가 설치한 보덕국으로도 이주했다. 이렇게 이중으로 인구가 유출되면서 평양 주변은 인구 이탈이 꽤 심각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삼국시대 당대에 아마 평양성 출신이었을 안승이 당나라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후퇴하면서 속민들을 끌고가기 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탈한 평양성을 보며 슬퍼한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지 않은데, 일단 고구려 시절처럼 대도시로서의 모습은 거의 잃어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발해 두 나라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고, 정확히 어느 나라가 차지했는지 명확하게 밝히는 기록은 현재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두 세력 모두 평양이 포함된 인근 지역을 접수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있기는 하다.

일단 발해의 경우 정약용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는 발해가 평양을 점유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나와있다. 하지만 유득공발해고(渤海考)에서는 발해가 평양을 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남북국시대 지도를 그릴 때는 대강 대동강쯤을 신라와의 경계선으로 해서 대동강 이북 평양성 지역을 발해 영역으로 색칠하는 경향이 있는데, 1차 사료나 고고학적 근거가 미약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통일신라의 경우 평양 바로 건너편인 중화군, 상원군에는 확실하게 군현을 설치했다. 중화군과 상원군은 현대에 평양시에 편입된 적도 한때 있었을 정도로 평양 중심지와 거리가 가까운 지역이다. 2010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떨어져나왔다. 신라는 평양성에서 대동강 맞은편에는 송현현(松峴縣)을 설치했다. 따라서 평양성 지역은 신라 군현의 주변부거나, 최소한 국경선 위에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대략 황해도 지역+평안남도 남부 지역을 관할하던 통일신라 후기 한정 특수 행정구역인 패강진(浿江鎭)이 평양까지 포함하는 행정구역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패강진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데, 신라는 남북국시대 내내 같은 경계선을 유지했던 게 아니라 수백년에 걸쳐 임진강부터 시작해 조금씩 북진하는 모습을 보였고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패강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통일신라 초중기 어느 시점의 행정구역 체계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지의 원사료가 기록되었던 시점엔 최소한 평양 근처 남쪽 중화군까지는 영역화했지만 딱 평양 그 땅까지 찍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패강진이 평양을 포함한다는 설에 의하면 좀 더 시간이 지난 후기에는 직접통치영역이 대동강을 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평양은 통일신라와 발해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나라가 차지했건간에 몰락한 옛 도읍 터인 유적도시이자 잘해봐야 최전방 군사 기지 취급을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평양이 존재 자체가 잊혀진 상태는 아니어서 736년에는 평양주의 지세를 살펴본 기록이나, 769년의 강원도에서 발생한 8,000여 마리의 쥐떼가 평양으로 향했단 기록 등 언급은 계속 된다. 이는 숫자까지 비교적 정확한 데다 이동거리가 매우 긴 것으로 볼 때 도적떼나 흉년으로 인한 난민 등의 비유일 가능성이 커보인다.

삼국사기와 달리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평양이 '신라에 편입됐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 후삼국시대 시점엔 이미 주인 없이 황폐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한국사 교과서나 서적 등을 보면 남북국시대 당시 평양을 포함한 평안도 일대가 발해 영토로 그려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평안도 일대의 경우 발해가 이들 지역을 점령했다고 보기가 힘든 부분이 많다. 발해 유적, 유물이 하나도 발굴되지 않은 점도 그렇고 사서에도 발해가 평안도 지역으로 뻗었다는 근거가 거의 전무하다. 그나마 요동이나 서경압록부와 인접한 평북은 발해 영향권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패강진 인근의 평남은 신라의 영향권이였을 가능성이 현재로서 더 높다.

그나마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발해가 평양을 점령했다고 하긴 했지만 시기적으로도 남북국시대 당대에 가깝고 아무래도 태생적으로 친발해적인 발해고에 비해 비교적 중립적인 고려사의 기록이 조금 더 신뢰성이 높다. 그외에도 상술했듯 아방강역고에서는 평양이 신라 영토였다고 밝혔으며 이 세 사서 이외의 기록은 없다.

발해 선왕 이후에는 신라측 기록에서 말갈 소국들(보로국 등)이 발해 중앙정부를 무시하고 신라와의 통교를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어 9세기 중후반에는 남부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 대한 발해의 통제력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견해가 상당하다. 따라서 흔히 도는 남북국시대 지도만 보고 평안도 일대가 발해의 확고한 영역이었다고는 여기지 않는 편이 좋다. 오히려 그보단 신라 측에서 후삼국시대 직전 9세기 말에는 평양 일대까지 느슨하게나마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는 견해가 상당한 편이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신라가 평양을 접수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인 남단덕(南單德)의 묘지명이 발굴되었는데 그는 699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776년 장안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조부인 남적(南狄)은 안동도호부의 마미주(磨米州)도독을 역임했다고 한다. 남단덕의 아버지인 남우(南于), 장남인 남진공(南珍貢) 또한 당나라의 관작을 역임하였다. 이는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후퇴한 뒤로도 발해의 흥기 전까지 한동안은 평양 일대를 영향권 내에 넣고 있었단 사실을 시사한다고 여겨진다.

다 떠나서 한국사 관련 지도에는 대동강을 기점으로 반갈죽(...)된 모습을 보여준다.

삼국시대~남북국시대 즈음 해서 평양이 마읍(馬邑)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기록도 있는데 고구려가 삼한마한에서 유래했다고 여겨지기도 했기에[4] 마한의 수도라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4. 후삼국시대[편집]


대동강의 서쪽인 패서 13주가 궁예에게 투항하자 평양성주 검용(黔用)이라는 자가 같이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검용이 신라에 복속하던 변방의 호족인지, 발해에 복속하던 변방의 호족인지,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 원래부터 독립적이던(심하게는 말갈계) 호족인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기 어렵다. 일단 기록에 나오는 '패서'의 범위를 감안할 때 9세기 말 쯤에는 평양성 또한 신라가 느슨하게나마 접수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검용은 발해보다는 신라와 관련있는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어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9세기 말 쯤에 가선 신라나 발해나 끝물인 건 비슷했으므로 정황상 어느 쪽이든 성격 자체는 가까이 위치한 패서호족들과 마찬가지로 신라나 발해의 중앙정부의 영향력에서 한참 벗어나 따로 놀던 한국계 토착세력으로 보인다. 따라서 굳이 관련이 있다면 신라쪽과 교류가 많았을 가능성이 컸다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

궁예 열전에 의하면 901년 기준으로 평양성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일단 남북국시대에 평양지역이 신라 땅이든 발해 땅이든 호족 검용 개인의 영지 같은 곳이었든 간에 그다지 잘 관리되던 상태는 전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가 별로 주목 받지 못 하는 부분인데 남북국~후삼국시대는 고조선 이래로 역사의 중심부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던 평양이 유일하게 역사의 변두리 신세로 전락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5. 고려시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서경(고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조선시대[편집]


파일:조선 평양.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평양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려가 멸망한 이후, 조선시대에는 평안도 평양부로서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북부 지방의 최대 거점도시 역할을 했다. 역시 조선시대에도 수도(한양)에 이은 제 2의 도시 지위를 유지했으며, 수도와의 지역감정도 이어갔다. 지역 명문가가 각종 전란으로 뿌리뽑혀 사실상 과거 합격에도 승진이 어렵고 신분이 낮은 사람이 많은 이유가 가장 컸으며, 그래서 조준 같은 명문가는 예외가 되었다. 지방 출신 자체가 승진이 어려웠던 이유는 과거 제도 문서 참조. 서북인을 차별하지 말자는 말이 종종 나와도 명문가의 승진이 유리한 구조를 바꾸지 못해 결과적으로 암묵적인 차별의 양상이 일어난다.

그런데 같은 2위 도시라도 고려조와 조선조의 평양의 입지는 분명 판이하게 다르다. 고려는 평양을 서경이라 칭하며 제 2의 수도로서 대우해주었고 개경과 더불어 분사까지 설치했기에 개성을 견제할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고려시대 평양인들의 인식은 서경별곡에 잘 드러난다. 하지만 조선은 평양을 제 2의 도시로는 취급해도 제 2의 수도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삼경제와 같은 부수도 따위를 운영하지 않았고 오로지 한양에만 몰빵한 나라였다. 굳이 따지자면 제 2 수도 취급을 해주는 도시가 있다 쳐도 조선초에는 전조의 수도 개성 정도였고 정조시기에는 수원이었다. 따라서 같은 2위 도시라도 평양의 입지는 고려보다 조선대에서 더 약화한 것.

그리고 평양이 인구 2위인 것이 무색하게도, 위상은 위에 상술했듯 원간섭기 이후 고려 말기에는 개경>남경>서경이었으니 3위 도시였고 조선 초기, 즉 15세기까지는 한양>개성>평양으로 개성의 위상이 더 높았다. 심지어 조선 성종대까지도 개성을 제 2의 수도라 여긴 듯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인구 측면은 몰라도 위상 측면에서는 풍패지향, 즉 왕실의 본관인 전주가 평양보다 더 대접받았고 정조 시기엔 수원이 평양보다 더 위상이 높았다. 물론 인구는 기록과 통계상 평양부가 훨씬 많았다는 측면이 있다.

당시 평양부 사람들은 신분 차가 크지 않아 상업을 천시하는 인식이 약했으므로 상업에 열중했다. 그래서 당대 평양은 개성과 함께 조선에서 손 꼽히는 상업도시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상업 발달을 토대로 과거 시험에도 많이 응시하여 조선 왕조에서 143명으로 6번째로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1위는 283명의 평안도 정주시.

그러나 평안도 인사는 한양 위주 특정 가문끼리 승진시켜주는 풍토 속에서 과거로부터 내려온 명문가가 거의 없었기에 조선 중기 이후로 관직 진출에 암묵적인 제한이 있었으며 이 차별이 극대화돼서인지 결국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홍경래의 난은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라 간접적 연관은 있어도 직접 평양부를 홍경래의 군대가 점령하진 못했다.

1588년, 평양부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사건이 발생하자 평양의 강등 및 평안도의 이름 변경을 가지고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다른 도시들의 경우처럼 강등시켜야 했다. 조선시대에 반역이나 직계살인 같은 패륜적인 참사가 발생하면 그 고을의 현감은 파직하고 고을을 강등시키곤 했다. 만약 해당 고을이 '도(道)'의 이름에 들어갈 정도로 대표 도시라면 아예 도의 이름까지 몇년간 바꿔버리기도 했다. 조선 역사 내내 수시로 이름이 바뀌어져 온 충청도가 대표적.

하지만 평양이 워낙 크다보니 선조는 이전 사례를 찾아와 상고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조가 내놓은 첫 대답은 '평양은 중국에도 유명한 만큼, 중국에서 사신들이 와서 보면 창피하니 놔두자'라는 답이었다. 그러자 선조는 이전 사례를 열거해서 다시 답을 해오라고 명을 했고, 이조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묘청의 난조위총의 난의 사례를 들어 평양부는 강등하기엔 너무 큰 도시라는 견해를 내놓아 바뀌지 않았다.#1 #2 #3

조선시대에 강계, 함흥부, 해주목, 진주를 포함해서 기생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고우영 일지매에서도 일지매가 평양에 간다고 하자, 월희가 "평양은 색향인데 다른 여자를 만나면 어쩌나" 하면서 걱정했을 정도.

평양부에 주재하며 평안도를 관할하는 평안감사, 이른바 '평양감사'[5]는 조선시대 3대 지방관으로 나주목사[6], 과천현감[7]과 더불어 가장 선망하는 부임지였으며 특히 평안감사는 기백(箕伯)으로까지 불렸다. 이는 기자의 영지를 다스린다는 뜻. 기자조선의 수도가 평양이었고 이 곳에 기자의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도 이 평안 감사의 위세에서 기인한다.

고종은 수도를 한양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는 구상이 있었던듯 보인다. 실제로 이를 위해 어진을 평양으로 옮기고 수도이전을 위한 자금을 위해 세액을 증대하며 평양에 어느정도 공사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풍경궁이 이 계획의 흔적이다. 고려 왕조에 이은 제2의 서경 천도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고종, 왜 평양을 새 수도로 정했을까? 뉴스파워 "고종, 평양 천도 고려했을 수도" 연합뉴스

7. 일제강점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평양부(일제강점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일제강점기 평양 거리2.jpg
파일:대동강변의 고상누각.jpg
파일:평양상점가.jpg
파일:평양 시내 일제강점기당시 시가지.jpg

일제강점기 때에도 평양은 일제가 식민통치의 중추부인 총독부(고려총독부) 설치를 고려할 정도로 여전히 제2의 도시로써 기능했다. 조정의 제도적 차별은 이미 구한말 쯤 사라지고, 문벌이 낮다는 것이 차별의 큰 이유였기에 그냥 경제, 역사적으로 서울과 비교가 가능한 곳으로 취급되는 정도였다. 독립운동 때 기호파가 서북파와 싸웠다는 것도 '변방 상놈'과 '한양 양반네'가 싸운 것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스포츠 경기가 바로 경성부(서울)의 경성축구단평양부평양축구단이 겨루는 경평대항축구전이었다. 이것은 민족의 친목을 도모하는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평양축구단의 주축은 지금의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축구를 통해 민중을 단합시키고, 청년들에게 민족정기를 함양시키겠다는 목적"에서 주최된 경기라고 한다. #


▲ 평양 권번 출신 가수 왕수복의 노래. 민요를 서양식 창법으로 부른 것, 이효석의 연인으로도 유명하다. 1930년대에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보다 유명했다고 한다. 해방 후 북한에 남아 북한 치고는 대접을 받았으나 체제 선전 노래만을 불러야 했다. #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경제력의 발달과 이에 이은 문화의 발달이 있었다. 연예 산업이 존재하여 일본에서도 연예인 역할을 하는 기생을 구경하러 오고, '색향'이라는 이미지를 넘어서 '가수의 도시'로 불릴 정도였다. 다만 평양의 기생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라 매음을 한다고 하여 기독교계나 청년회에서 비판이 있기도 하였다. #

특이점을 더 꼽자면, 일제강점기 당시 개신교세가 한국 전체에서 유난히 강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초기 한국어 성경 중에는 서북 방언으로 번역된 것도 있다. 한편 당시 대구광역시가 좌익세력이 매우 득세해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는데, 1945년 이후 해방 정국과 남북분단을 기점으로 두 도시는 정반대 성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아이러니.

당대 평안도 주민들은 조선 조정의 차별 때문에 조정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평양은 당대에 조선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1907년에 평양 장대현(章臺峴)교회[8]에서 시작된 대부흥으로 인해 평양평안도 지역은 개신교의 세가 더더욱 빠르게 성장했었다. 1907년에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평양 대 부흥 사건은 현재 한국의 개신교 단체에서 한국의 개신교 역사에 대해 논할 때 결코 빠지지 않고 이야기가 나오는 중요한 사건이다. 1936년 신문 기사에 따르면, 비신자들도 일요일을 습관적으로 주일이라고 부르고, 일요일에는 새벽부터 교회에서 치는 종 소리 때문에 늦잠 자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현대인들이 평양과 평안도 지역을 개신교랑 연관짓는 경우가 많은데 개신교의 세가 기타 지방에 비해 강세였긴 하지만 종교별 인구 분포를 보면 해방 당시 북한의 종교인 수는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 수를 합쳐도 불교 신자에 비해 수가 부족했다. 무엇보다 이 3종교 모두를 합친 인구는 천도교 신자의 인구의 절반도 채 안되었다. 결국 이북 지역은 개신교의 산지가 아닌 천도교의 세가 강했던 지역이다. 기타 지방에 비해 강세였고 개신교인들 내부에서 성지 취급되는지는 몰라도 개신교 일색의 지역이었던 건 절대 아니다. 대신에 개신교 자체의 교세가 약한 시국에 그나마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의 개신교인 중 43%가 평안도에 있다고 할 정도로 개신교가 성행했던 경향은 있고, 평안도 중 평양과 선천[9]이 특히 이런 성향이 강한 곳이었던 건 맞다. 인구 비중으로 따지면 선천, 황해도 재령, 평양, 서울 순으로 신도가 많았다. 다만 분단 전에는 지금의 '북한'이라는 개념이 없어 함경도는 특히 기독교의 세력이 더 약해서 기독교가 경상도보다도 약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양부청은 평양역 바로 앞에 있었다. 김일성이 연설을 한 곳이기도 하다. 평양부청 청사는 현재도 평양시 인민위원회 청사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8. 북한[편집]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가 패배, 8.15 광복 직후 한국 북부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남북분단이 발생하면서 북한의 임시수도가 되었다.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자연스럽게 38선 이북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평양에 사령부를 세웠다. 1946년 9월, 대동군 임원면 남사리, 북사리, 청호리, 양암리, 고산리, 상오리를 편입함과 함께 북조선인민위원회 확대위원회 결정에 의해 평양특별시로 승격되었고, 중구, 동구, 서구, 북구로 분구되었다.

소련군의 지지를 받은 김일성은 토착 정치인인 조만식의 세력을 숙청한다. 당시는 김일성은 사회주의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뒤에서 종교 탄압, 문화 탄압과 같은 행동을 벌였다. 심지어 1946년에는 아래와 같은 소요 사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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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3월1일 평양역전에서 개최된 소군정 주최 3·1절 기념식이 느닷없이 날아든 수류탄에 의해 수라장이 된 바로 그날이었다.

해방후 첫 3·1절을 맞아 기념예배가 한창이었던 평양의 장대현교회에 소련군과 무장보안대원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무장대원들은 목사들을 연행하려 했고 이를 막으려는 교인들과의 승강이로 교회는 순식간에 긴장의 도가니가 됐다.

한참을 대원들과 대치하던 교인들은 이윽고 교회를 벗어나 찬송가를 부르며 평양시내로 대열을 지어 행진하기 시작했다.

해방이후 첫번째로 터진 북한기독교인의 반군정 대규모 항의시위는 그렇게 시작됐다.

시위의 직접적 발단은 소련군과 무장보안대원이 장대현 3·1절 기념예배에 참석한 목사를 연행하려 한데 있었다.

(...)

『해방초기 소군정과 기독교계의 관계는 그런대로 원만했습니다. 소련군의 입북으로 교계가 긴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으로 되찾은 신앙의 자유가 안겨준 기쁨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소군정은 포고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고 별다른 간섭도 없었습니다. 교계도 군정이나 김일성과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 애를 썼지요. 교계는 김일성 환영집회뒤 건국준비위원회의 김두혁 농림부장집에서 김일성 환영잔치를 따로 마련하기까지 했습니다.

(평양의 원로 기독교인 김석현 장로 일생을 그의 장남 김기혁씨가 기록한 『김석현장로 전기』(82년·맥밀런)에도 장로교계에서 김일성 환영잔치를 했다고 회고되어 있다.)

그러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나오고 북조선공산당이 출범하자 교인들은 생각을 달리하게 됐습니다.

공산당에 대한 경계는 그때부터 높아져갔습니다. 46년 3·1시위뒤 기독교계가 끊임없이 소군정과 충돌했던데는 그같은 태도변화가 깔려있었습니다.』

46년 3월1일 장대현교회 시위와 이전의 목사 및 청년간부 연행과 같은 일련의 사태는 기독교계의 대소군정 인식에 하나의 분수령으로 작용했다.

기독교계­소군정 긴 투쟁의 서막(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5) 1992.3.9. 중앙일보



이후 1948년 북한 정부가 수립된 이후 헌법상으로는 명목상 서울을 수도로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38선 이북 지역의 중심지였던 평양을 수도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72년, 헌법상 수도 또한 평양으로 바뀌게 되었다.

1948년, 중구에서 남구가 분리되었다.


경인일보에 따르면 프랑스 '르 피가로'지 특파원 세르주 브롱베르제(Serge Bromberger·1912~1986) 등 한국전쟁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어 낸 '한국전쟁통신'에 따르면 당시 평양 사람들은 집 안에 걸어뒀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길바닥에 내던지고 짓밟았다고 한다. 또 봇짐에 허리 휜 여자들이 평양시청에 몰려들어 북한 군복 속의 오리털을 빼내 가져가느라 오리털이 발목까지 찼다고 한다. #


“친애하는 70만 평양 시민 여러분! 여기는 국군 제1보병사단 정훈부 학도의용대 대적방송반입니다.”

대동문아, 연광정아, 을밀대야. 그리고 청류벽[10]

이여! 우리들은 이제 붉은 무리들의 마수로부터 여러분을 구출하고 대동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평양 시민 여러분! 경애하는 북한 동포 여러분! 우리들 배달 민족은 모두가 단군 할아버지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민족의 빛나는 얼은 경애와 신의로서 상부상조하는 생활을 유지해 오면서 국난을 당하였을 때에는 총화단결된 힘으로 이를 극복함으로써 민족의 생명을 이어 왔습니다.

그러나 김일성 공산집단들은 이와 같은 민족사의 바른 줄기를 부정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일이 없이, 인간 중에는 공산주의자, 그중에서도 김일성에게 무조건 맹종하는 자만을 인간으로 대우하여 그 외의 사람들은 반동분자요, 이단자요, 적으로서 무자비하게 박해하고 학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존중의 정신으로 여러분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민군 군관 및 하전사들이여, 아직까지 무기를 들고 무익한 저항을 하는 자는 이를 중지하고 즉시 눈에 잘 띄는 곳에 무기를 버리고 나오십시오. 유엔군은 항자불살[11]

의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그대들의 투항을 환영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서슴없이 우리들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또한 백만 학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속히 치안 확보와 질서 유지 및 도시 미화작업에 앞장 서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제1보병사단 정훈부 학도의용대 대적방송반입니다.

1950년 10월, 동평양 시가지(평양성 동쪽 대동강 건너편의 시가지)의 이용하 씨의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을 알리는 방송에서. 평양의 역사와 분단 직후의 평양의 혼란을 알 수 있다. 싸움을 주장하는 인민군의 서울 점령 방송과 다른 내용이다.

(원 출처: 6.25 참전 유공자회, "6.25 전쟁 참전수기 III", 2011, p.147-148. 2차 출처)


6.25 전쟁 중인 1950년 평양 탈환작전에서 국군과 UN군이 승리하여 10월 19일 탈환에 성공하였다. 유엔군은 평양을 수복한 후 평양시정위원회를 수립해 군정을 실시하고 치안활동을 하였다. 경향신문의 취재에서는 사람들은 북한 치하에서 문화 생활에 굶주려 극장에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지하의 천주교인들이 다시 양지에서 활동하였고, 5년 동안 시달린 탓인지 발걸음이 명랑하지 않고 자발적이라는 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였다. # 백선엽 장군은 이곳 기생이 일제강점기에도 돈을 떼먹힌 적 없으나 노동당 간부들은 일반인은 출입도 못하게 하고 자신은 꾸미지 못하게 하는 주제에 돈을 떼먹었다며 화를 냈다는 증언을 전하였다. #

파일:attachment/k28_12040357.jpg
맥스 데스퍼의 《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in Korea》,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유명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의 사진이다.

그렇게 일시적으로 북한의 통치권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6.25 전쟁에 개입하였고, 국군과 UN군은 12월 4일 철수했다.[12] 이로써 12월 6일 다시 북한 치하에 들어갔고 현재까지 북한 치하에 남아있다.

그 이후 원래의 입지조건 + 북한의 수도라는 점 때문에 원산시와 함께 도시 전체가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 김일성 스스로 "평양에 성한 집이 초가집 2채밖에 없었다"고 할 수준.[13] 이 과정에서 중근세부터 내려오던 유구한 도시 경관은 소멸되고, 영명사풍경궁 등을 비롯한 수많은 유서 깊은 유적들도 파괴되었다.


▲ 1989년의 평양

따라서, 6.25 전쟁 이후의 평양은 몇몇 명승고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 이후 황폐화된 평양은 소련식 도시계획을 도입하여 복구되었다. 특히 소련에서 조립식 건축을 도입하였고, 주택건설 과정을 표준화하여, 대단히 빠른 속도로 주택을 건설하여서, 14분에 한번씩 집 한채를 조립했다고 선전하며 이를 "평양속도"라고 자화자찬할 정도로 빠르게 복구되었다.[14] 북한에서 편찬한 사전인 《조선향토대백과》는 "평양시는 광복 전 비문화적이고 기형적인 상업도시로부터 광복 후에 화려한 문화도시로 전변되었다."라고 주장한다. #. 다만 전후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외곽보다는 빠른 복구에 치중하다보니 외관상으로는 전형적인 소련식 도시가 되었지만, 이후에는 좀 더 사정이 나아지고 김정일이 도시계획에 손을 쓰면서 외관에도 상당히 신경을 써서 대규모 선전기념물과 다양한 모양새의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섰고, 지하철도 건설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는 고난의 행군과 후유증으로 인해서 대규모 개발사업이 보류되었고 전력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어서 돈 좀 있다하는 가정에서도 발전기를 따로 사서 돌려야할 지경이었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대규모 도심개발계획이 다시 재개되었다.

더불어 북한에서도 '주민의 지나친 집중을 막는다'는 언급이 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북한에서 경제개발이 한창 진행되었을때 지방에서 상경민들이 대대적으로 몰려왔지만,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도시개발에 과부하가 걸리자, 북한 당국에서 인구집중을 막기 위해서 평양유입을 제한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이후로는 평양의 인구가 약 300만명 안팍인 선에서 유지가 되고있다.

반면에 1960년대에 윤치영이 서울로의 인구집중을 막기 위해 상경민들의 서울유입을 막자는 식의 정책을 펴자고 했다가, 반려되고, 이후 강남이 대대적으로 개발되면서 인구집중화는 심화되어서 1990년대 초반까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서 1000만을 넘겨 세계 6위 대도시라는 타이틀까지 따냈다.

#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문서를 보면 당시 전쟁에 대한 위협에 대비한다는 핑계로 전쟁 위협의 대상이 되는 고위층이 아니라 노약자와 성분 불량계층을 평양에서 오지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아울러 근현대사에서 가장 폐쇄적인 체제 중 하나인[15] 북한에서 지하철과 대규모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등 가장 발전이 된 지역이고, 그나마 외국인들도 쉽게 드나들수있는 지역 중 하나이다. 또한 전 후기에 전쟁을 대비하여 방공호가 대량으로 건설되는 등 도시자체가 요새화되었으며 그중에서 저고도 대공망은 상당한 수준이다. 낡아 빠진 대공포를 주로 사용하지만. 남한도 방공호가 대랑으로 건설은 되었지만, 대부분은 반지하라고 불리는 셋방이나 지하주차장, 창고나 기계실 용도로 쓰고 있는 실정이라서 방공효과는 썩 높지 않다는 평이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RangeRings.jpg

현재 전세계에서 저고도 대공망이 가장 조밀하게 구성한 지역이다.

물론 모스크바 대공망처럼 세계 최강수준은 아닌 것이 고고도 대공망은 6포대의 S-200이 전부이다. 때문에 한국군은 대량의 매버릭벙커 버스터, 팝아이 지대지 미사일을 대량으로 운용하고 있다. 덕분에 북한군은 빈약한 공군 전력 중 그나마 상태가 좋은 MiG-29 40대 전량을 평양 근처에 대기해 놓고 있으며 대량의 GPS교란 장치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한반도판 바그다드인 셈이다.

그외 최근 북한의 군사퍼레이드에서 S-300으로 추정되는 신형방공무기가 튀어나와 군당국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고고도 공격에 취약하기에 폭격기를 사용한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다. 때문에 과 주일 미공군기지에서 B-52가 항시 대기 중이다. 옛소련의 공화국이나 중국의 라이센스인 HQ-9라고 추정. 물론 바그다드의 사례에서도 알겠지만 한국과 미국에서 작정하고 를 던져대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이다.

한편 행정구역이 여느 북한 지역 마냥 정권의 변덕으로 크게 변하고 최근 그 폭이 심하다. 20세기 평안남도에서 뜯어서 편입한 승호구역, 상원군, 중화군을 2010년대 들어 연고도 없는 황해북도로 내쫓고 머나먼 평안북도 구성군 방현동을 편입하는 등 혼란스럽다.

[1] 668년 연남생사부구 등의 배신으로 요동 방어선이 붕괴된 고구려가 가동한 2차 방어선이 압록책이 설치된 압록강 방어선이었다.[2] 여요전쟁, 거란유민의 침입, 여몽전쟁, 카다안의 침입, 홍건적의 침입, 정묘호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등등 이루 다 말을 할 수가 없다. 심지어 남방에서 터진 임진왜란마저 청남을 강타했다.[3] 서북부는 평야지대이나 수자원이 부족해 잠재력을 제대로 터뜨리기 위해서는 수리관개가 필수였다. 이것이 계속되는 전란으로 남부에 비해 개발이 늦어졌고 그 여파는 오늘날 북한 정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4] 사학, 고고학이 발달한 현재의 시점으로 봐서는 그게 아니란 게 당연하지만 당대에 그렇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이게 꽤 어지럽고 정확하지가 않아서 마한 외에도 고구려가 그냥 변한이나 진한이라 불리기도 했다.[5] '평양감사'를 잘못된 명칭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평안감사의 별칭으로서 쓰였다.(예: 「중종실록 60권, 중종 22년 12월 16일 기미 1번째기사」,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2일 무인 2번째기사」, 「승정원일기 숙종 16년 3월 25일 병진 1690년」 등)[6] 조선시대 나주의 지역은 남평읍, 금천면, 산포면, 다도면, 봉황면, 빛가람동을 제외하면 지금과 같다.[7] 조선시대 과천의 지역은 현재의 경기도 과천시, 안양시(석수동, 박달동 제외), 군포시(대야동 제외), 서울특별시 관악구(남현동), 동작구(노량진동, 본동, 흑석동, 동작동, 사당동), 서초구 대부분(내곡동, 염곡동, 신원동 제외 전부)이다. 지금의 과천시는 다 떨어져 나가고 읍치의 소재지, 즉 중심지의 영역만 남은 지역이다.[8] 순우리말로 널다리골교회라고도 불린다. 이 자리에는 오늘날 상당히 유명한 김일성·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다.[9] 여기는 진짜 개신교 일색의 지역이 맞았다. 주민의 50% 정도가 신자였다. #[10] 평양 모란봉부벽루에서 연광정으로 내려오는 대동강가에 있는 바위로 된 절벽.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11]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12] 평양 철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너무 빠른 후퇴였다. 당시 중공군은 거듭되는 전투로 피로에 지쳐 있었고 UN군이 평양-원산선에서 방어할 것이라고 여기고 공격을 숙천군(평양 북방 60km) 일대에서 멈춘 상태였다. 그러나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빠져나간 것을 알고 나서야 급속 진격에 돌입했다.[13] 이건 김일성이 과장한 것이다. 보통문의 사례도 있고 실제로는 75% 정도 파괴된 것으로 평가된다. 신안주 같이 100% 파괴된 곳도 분명 있지만. 물론 그 만큼 파괴의 정도가 심했던것은 사실이었다.[14] 다만 빠른 복구에 치중하다보니 집 1채의 크기가 보통 10평 남직한 수준이었고, 화장실과 샤워실도 공동으로 쓰도록 되어있었던데다가 이 당시에는 출산율이 6명대를 기록할정도로 자녀를 많이 낳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에서 보면 많이 불편하기는 하다. 남한도 마포아파트시민아파트같은 1950~70년대 초반 아파트는 이런 형태가 많았기는 했지만. [15] 북한 이상으로 폐쇄적이던 독재국가는 알바니아 인민 사회주의 공화국민주 캄푸치아, 마시아스 응게마 시기 적도 기니 정도밖에 없다. 그나마 오래 간 공산 알바니아가 45년 정도였고 민주 캄푸치아는 4년, 응게마 정권도 10여년에 불과했다. 북한을 제외하면 현 시점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인 에리트레아도 북한에 비하면 훨씬 개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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